헤로니모 코시다
1510–1592 · 아라곤 연합왕국, 스페인 · 르네상스, 매너리즘
이야기
헤로니모 코시다의 이름을 가장 멀리 실어 나른 그림은, 정작 그가 그렸다고 아무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점이다. 1570년 무렵 나바라의 툴레브라스에 있던 시토회 수녀원 주제단화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붉은색과 금색 망토를 걸친 거대한 인물 하나가 눈 네 개를 나누어 가진 세 개의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며, 스쿠툼 피데이라 불리는 중세의 삼위일체 도식, 곧 믿음의 방패를 들어 올린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코시다의 작품으로 본다. 그를 이 그림과 묶어 주는 문서는 없다. 이런 종류의 도상은 그 뒤로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 우르바노 8세가 1628년에 세 얼굴의 삼위일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실물을 불태우게 했기 때문이고, 남아 있는 예가 그토록 적은 것도 그래서다.
기록에 남은 코시다는 평생을 아라곤에서, 사라고사와 타라소나 사이에서 보냈고, 연구 문헌이 전하는 바로는 이탈리아에 간 적이 없다. 사라고사 대주교이자 가톨릭왕 페르난도의 손자인 에르난도 데 아라곤의 미술 고문이었고, 그 자리 덕분에 대성당 라 세오에 들어가 이탈리아 사람 피에트로 모로네와 나란히 붓을 들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의 손을 갈라내는 일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문제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주문은 1540년부터 1544년까지의 베루엘라 수도원 주제단화에서, 1574년부터 1585년까지 그를 붙들어 둔 사라고사 외곽 아울라 데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제단화까지 이어진다. 세상을 떠난 날은 1592년 4월 5일이다. 태어난 해는 사정이 다르다. 프라도 미술관은 1510년이라고 딱 잘라 적고, 위키데이터는 1510년경이라 하고, 스페인 학계는 1510년 이전이라고만 말하며, 결정적인 세례 기록은 없다. 태어난 곳을 두고는 타라소나와 사라고사가 서로 자기네라고 한다.
프라도에 있는 그의 유일한 패널화, 작은 「놀리 메 탄게레」, 곧 나를 만지지 말라는 장면은 수백 년 동안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1746년 라 그란하 궁전의 스페인 왕비 이사벨 데 파르네시오 재산 목록에는 오래된 피렌체 작품으로 올라 있고, 코시다에게 돌리는 견해는 훨씬 나중에 나왔다. 미술관은 제작 시기를 1570년 무렵보다 더 좁혀 잡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