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톤 로마코
1832–1889 · 오스트리아 제국 · 사실주의, 아카데미 미술
이야기
오스트리아 기함의 함교에서 수병들은 다리에 힘을 주고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고 있다. 배는 이탈리아 장갑함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중이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사람은 제독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 한 명뿐이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모자를 비스듬히 쓴 채, 발끝을 살짝 안쪽으로 모으고 서 있다. 안톤 로마코는 1878년에서 1880년 무렵, 1866년 아드리아해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이 승리한 리사 해전의 이 순간을 그렸다. 화면은 곤두선 신경과 긴장한 얼굴들로 가득하고 흔한 전쟁화의 영웅적 연출은 빠져 있었으며, 빈의 관객은 이 그림을 반기지 않았다.
로마코에게 외면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스승이던 비더마이어 화가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발트뮐러는 그에게 재능이 없다고 여겼다. 로마코는 뮌헨에서, 그리고 빈의 역사화가 카를 랄 밑에서 공부를 이어 갔고, 1857년 로마에 자리를 잡았다. 거의 20년 동안 그는 이 도시 외국인 사회가 가장 아끼는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였다. 1862년 건축가의 딸 조피 쾨벨과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두었다.
1875년 아내가 그를 떠났고, 이듬해 로마코는 빈으로 돌아왔다. 당시 빈의 취향을 쥐고 있던 사람은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화로 이름난 한스 마카르트였고, 불안하고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로마코의 초상화는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도움에 기대어 살게 되었다. 1887년에는 두 딸 마틸데와 메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는 끝내 그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1889년 3월,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정은 나중에 찾아왔다. 20세기 초 빈의 의사이자 수집가 오스카어 라이헬이 그를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어 코코슈카의 선구자로 내세웠다. 오늘날 테게트호프를 그린 두 가지 버전은 모두 빈의 벨베데레에 있으며, 두 번째 그림은 첫 번째의 거의 절반 크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