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코프 더 빗
1695–1754 · 네덜란드 공화국 · 바로크, 로코코
이야기
1711년과 1712년, 암스테르담에서 온 십대 도제 한 명이 안트베르펜의 예수회 성당에서 천장화를 베끼고 있었다. 플랑드르의 거장 루벤스와 그의 공방이 그곳에 그린 천장화였다. 1718년 벼락으로 성당에 불이 났고 천장화는 모두 타 버렸다. 수십 년 뒤 그의 제자 얀 퓐트가 판화로 새겨 출판한 소년의 소묘는 사라진 것을 전하는 중요한 기록이 되었다.
그 소년이 야코프 더 빗이고, 천장화는 그의 전문 분야가 되었다. 1715년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그는 헤렌흐라흐트와 케이제르스흐라흐트 운하를 따라 늘어선 저택들의 천장을 신들과 구름이 떠 있는 하늘로 채웠다. 가톨릭 신자들이 평범한 집 정면 뒤에 숨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던 도시에서 그 역시 가톨릭 신자였고, 초기 주문 가운데에는 그런 교회를 위한 제단화가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그림은 도시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 1737년 그는 암스테르담 시청, 지금의 담 광장 왕궁에 있는 시의회실을 위해 〈70인의 장로를 뽑는 모세〉를 그렸다. 대략 5미터에 12미터 크기의 캔버스다.
그의 또 다른 전문은 눈속임이었다. 회색과 흰색의 농담으로 돌에 새긴 부조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렸는데, 흔히 뛰노는 아이들과 꽃줄 장식이 등장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조각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그림은 곧 '빗여스', 즉 '작고 하얀 것들'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빗댄 말장난이다. 1742년 그의 연 수입은 4000휠던으로 평가되었고, 초상화가 얀 마우리츠 퀸크하르트와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보수가 높은 화가로 꼽혔다. 그는 케이제르스흐라흐트에 살며 뒤채를 작업실로 썼고, 175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