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센테 카르두초
1576–1638 · 토스카나 대공국, 스페인 · 바로크 회화, 매너리즘
이야기
1627년 펠리페 4세의 궁정은 네 명의 화가에게 같은 주제를 내주었다. 모리스코의 추방, 곧 1609년부터 스페인에서 쫓겨난 개종 무슬림의 이야기였고,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의 새 홀에 걸 그림을 두 명의 심사자가 고르게 했다. 그때 이미 18년째 국왕의 화가였던 비센테 카르두초는 졌다. 이긴 사람은 아직 이십 대이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였고, 그 대가로 궁정의 자리를 받았다.
그는 피렌체에서 빈첸초 카르두치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576년 무렵으로 보지만, 옛 문헌의 일부는 1578년을 든다. 어릴 때 형 바르톨로메 카르두초를 따라 마드리드로 왔다. 형은 펠리페 2세의 수도원 겸 궁전인 엘 에스코리알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고용된 사람이었고, 그는 형의 공방에서 일을 배웠다. 1609년 형이 죽자 국왕의 화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서명도 출판도 에스파냐어로 했고, 프라도가 오늘까지 찍어 내는 이름도 비센테 카르두초다.
1633년 그는 『회화 대화』를 펴냈다. 회화가 자유 학예에 속하며 그것을 하는 사람은 시인이나 학자와 나란히 선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그 주장 뒤에는 법정이 있었다. 카르두초와 마드리드의 다른 화가들은 화가가 알카발라, 곧 매매에 매기는 세금을 물어야 하는지를 두고 왕실 재무와 소송 중이었고, 책은 그 소송 서류를 극작가 로페 데 베가의 증언까지 포함해 함께 싣고 있다.
마지막 큰 주문은 새 부엔 레티로 궁전의 옥좌 방이었다. 그곳에는 전투 그림 12점이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과 함께 걸렸다. 카르두초는 그중 세 점을 그려 연작에서 가장 많이 맡았다. 플뢰뤼스, 콘스탄츠 구원, 라인펠덴 강습이다. 모리스코를 그린 벨라스케스의 수상작은 1734년 알카사르 화재로 타 버렸고, 그 경합에 대해 남은 유일한 이미지는 카르두초가 자기 그림을 위해 그린 소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