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리 미술관은 튈르리 정원 안에 있고, 한 지붕 아래에 두 컬렉션이 있다. 첫째는 클로드 모네가 자신의 요구대로 지어진 전시실과 함께 국가에 기증한 《수련》이다. 둘째는 파리의 화상 폴 기욤이 모은 컬렉션으로, 1934년 그가 죽은 뒤 미망인 도메니카가 규모를 줄이고 새로 짰다. 그녀는 남편이 산 작품 가운데 가장 대담한 것들을 팔았고, 1937년부터는 직접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재혼하면서 그녀는 건축가 장 발테르의 아내가 되었고, 컬렉션에는 그녀의 두 남편 이름이 모두 붙어 있다.
1960년대에 이 건물에 장 발테르와 폴 기욤 컬렉션을 들일 자리를 마련하면서, 모네의 타원형 전시실 위로 한 층을 올렸다. 새 천장이 모네가 고집했던 위쪽의 자연광을 가렸고, 그 빛은 2000~2006년 개보수 공사 때에야 돌아왔다. 이때 증축한 층을 헐어 내고, 발테르와 기욤의 컬렉션은 새 전시실로 옮겼다.
1. 클로드 모네 《수련》
1918년 11월 12일, 휴전 이튿날 클로드 모네는 총리이자 오랜 친구인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편지를 썼다. 장식 패널 두 점을 마무리하고 있으니, 승전일에 서명해서 그를 통해 국가에 바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클레망소는 더 많이 내놓으라고 모네를 설득했다. 1920년의 합의에서 패널은 이미 12점으로 늘어나 있었고, 이 패널들을 걸기 위해 파리 비롱 저택의 정원에 건축가 루이 보니에의 설계로 원형 전시관을 지을 계획이었다. 전시관은 끝내 지어지지 않았다. 1921년 10월 31일 모네는 오랑주리를 받아들였고, 건축가 카미유 르페브르가 그의 지시에 따라 그곳에 유리 지붕으로 자연광이 쏟아지는 타원형 전시실 두 개를 지었다.
모네는 자신이 쓴 대로 “끝없는 전체, 수평선도 물가도 없는 물결의 환상”을 원했다. 여덟 개의 구성이 두 타원형 방의 휘어진 벽을 따라 차례로 이어지고, 그림은 모두 합쳐 100미터 가까이 된다. 《석양》에서는 왼쪽 아래 구석의 어두운 갈대 덩어리에서부터 주황빛 도는 노란 햇빛 반사가 물 위로 띠를 이루며 올라가고, 그 오른쪽으로 물빛은 청보라와 적갈색으로 짙어지며, 수련 잎은 청록빛 붓질로 표시되어 있다. 버드나무가 있는 아침 장면 가운데 하나에서는 나무줄기가 캔버스 위아래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고, 물 위로는 초록빛 가지 타래만 위에서 늘어져 있다.
모네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패널 작업을 계속했다. 1925년 1월 그는 클레망소에게 기증은 없던 일로 하겠다고 썼고, 클레망소는 모네에게 약속을 어길 권리가 없다고 답했다. 화가는 1926년 12월에 세상을 떠났고, 전시실은 그가 없는 가운데 1927년 5월 17일 클레망소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1922년 4월 12일에 서명된 기증 증서는 국가에 패널 19점을 약속했는데, 벽에 걸린 것은 22점이었다.
2.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폴 기욤, 노보 필로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이 초상화를 그렸을 때 폴 기욤은 스물세 살이었고, 이미 아프리카 조각을 팔며 입체파 화가들의 전시를 열고 있었다. 그보다 한 해 전에 시인 막스 자코브가 그를 화가에게 소개했고, 미술관이 조심스럽게 적은 대로 기욤은 1915년부터 아마 이미 모딜리아니의 화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화가에게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얻어 주었고, 그 뒤 모딜리아니의 그림 100점가량과 소묘 50점가량이 기욤의 손을 거쳐 갔다. 모딜리아니는 1915~1916년에 기욤의 초상을 모두 네 점 그렸고, 《노보 필로타》는 그 가운데 첫 번째다.
모딜리아니는 그의 연인인 영국 시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의 노르뱅 거리 집에서 판지에 이 그림을 그렸다. 기욤은 붉은 배경 앞에 검은 펠트 모자를 쓰고 어두운 양복에 깃이 높은 흰 셔츠를 입은 채 앉아, 가슴께에 담배를 들고 있다. 그의 얼굴은 길고 곧은 코와 짧은 콧수염이 달린 창백한 가면 같고, 턱을 치켜들었으며, 무거운 눈꺼풀 아래의 눈은 콧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본다.
모딜리아니는 판지 위에 물감으로 직접 글자를 써넣었다. 왼쪽 위에는 ‘폴 기욤’이라는 이름을, 오른쪽 위에는 다윗의 별과 ‘스텔라 마리스’를, 왼쪽 아래에는 멋을 부린 획의 청록빛 글자로 ‘노보 필로타’를, 오른쪽 아래에는 서명과 연도를 적었다. ‘노보 필로타’는 이탈리아어로 ‘새로운 키잡이’라는 뜻이고, ‘바다의 별’이라는 뜻의 라틴어 ‘스텔라 마리스’는 뱃사람들의 수호자인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이름이다. 미술관에 따르면 모딜리아니는 젊은 화상을 현대 회화의 길잡이이자 수호자로 그렸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기욤의 다른 손은 모딜리아니가 윤곽만 잡아 두었다.
3. 앙드레 드랭 《어릿광대와 피에로》

어릿광대와 피에로가 파란 하늘 아래 헐벗은 불그스름한 들판에 온몸을 드러내고 서 있는데, 둘 다 한쪽 무릎을 들어 올려 마치 춤추다 멈춘 것 같다. 삼각모를 옆으로 돌려 쓰고 빨강, 초록, 노랑, 파랑 마름모 무늬 옷을 입은 어릿광대는 작은 만돌린을 켜며 앞을 똑바로 바라본다. 주름 깃이 달린 헐렁한 흰 옷에 검은 모자를 쓴 피에로는 기타를 목이 위로 가게 들고 눈을 내리깔았는데, 그 얼굴도 어릿광대만큼 진지하다. 오른쪽 아래 구석 땅바닥에는 활이 딸린 바이올린과 어두운 항아리, 구겨진 흰 천이 놓여 있고, 미술관은 드랭이 이 작은 정물을 얼마나 공들여 그렸는지 짚는다.
이 그림은 폴 기욤이 주문했고, 1925년부터 그의 소유였으며, 메신 대로에 있던 그의 아파트 벽에 걸린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어릿광대와 피에로는 드랭이 1928~1929년에 그린 기욤 부인의 초상화 배경에 윤곽만 잡힌 채 한 번 더 나타난다(이 목록의 11번이다). 미술관은 피에로의 얼굴에서 기욤 자신을 알아본다. 한편 미술관은 다른 기록에서, 드랭 밑에서 일하던 카탈루냐 화가 하신토 살바도가 두 인물의 모델을 섰고, 그 뒤 피카소를 위해서도 어릿광대 옷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고 전한다.
4. 앙리 루소 《쥐니에 영감의 마차》
앙리 루소는 파리로 들어오는 물품에 세금을 걷던 시 경계의 세관 초소에서 여러 해 일했기 때문에 ‘세관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8년에 그는 은퇴한 지 오래였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채소 장수 클로드 쥐니에에게 빚을 지고 있었는데, 쥐니에의 아내가 루소의 끼니를 챙겨 주었다. 마침 쥐니에는 말을 한 필 사서 뽐내던 참이었고, 루소는 채소 장수 가족이 마차를 타고 가는 그림으로 빚을 갚았다. 1914년까지 그림은 쥐니에에게서 화상 폴 로젠버그에게 넘어갔고, 1918년에는 화상 빌라르가 가지고 있었으며, 루소가 죽고 17년이 지난 1927년에야 기욤이 그림을 샀다.
루소는 사진을 보고 그렸고, 미술관이 짚는 대로 몇 군데를 바꾸었다. 대로의 나무 한 그루를 없앴고, 개들은 자리를 옮기며 크기도 달리했다. 마차와 말은 옆으로 돌아서 캔버스 가장자리와 나란히 서 있다. 살이 촘촘한 바퀴는 선명한 주황색이고, 같은 색이 끌채와 마구에서 되풀이되며, 얼룩무늬 회색 암말은 발굽이 길에 닿을 듯 말 듯해서 미술관은 말이 ‘까치발로’ 서 있다고 표현한다. 고삐를 쥔 백발의 쥐니에를 빼고 마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오른쪽의 밀짚모자 쓴 남자가 바로 루소 자신이고 암말의 이름은 로즈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림 속 개는 세 마리이고, 크기가 저마다 다르다. 큰 검은 개는 마차 밑 바퀴 사이에 서 있고, 작은 개는 뒤쪽의 젊은 여인이 품에 안고 있으며, 아주 조그만 개는 저 앞쪽 길 위를 달려간다. 당시 루소와 가깝게 지내던 미국 화가 맥스 웨버가 검은 개가 왜 그렇게 크냐고 묻자, 루소는 자기 캔버스가 그렇게 요구했다고 대답했다.

5. 앙리 루소 《결혼식》

여덟 사람이 사진사 앞에 선 것처럼 풀밭에 빽빽이 모여 있고, 모두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뒷줄의 머리 다섯은 종이를 오려 붙인 것처럼 나뭇잎을 배경으로 층층이 포개져 있다. 앞쪽 왼쪽에는 파란 작업복을 입은 백발 노인이 베어 낸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있고, 오른쪽에는 흰 두건을 쓴 노파가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었으며, 그 사이에 바닥까지 끌리는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서 있다. 풀밭 위에 신부의 발은 보이지 않아서, 미술관은 그녀가 공중에 매달린 것 같다고 쓴다. 신부의 긴 면사포는 노파의 치마 위로 흘러내리고, 앞쪽에는 그 자리에 있기에는 너무 큰 털북숭이 검은 개가 앉아 적갈색 눈으로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기욤은 1929년 시인 아폴리네르의 친구이자 루소의 그림을 가장 먼저 모은 사람 가운데 하나인 화가 세르주 페라에게서 《결혼식》을 샀다. 미술관은 루소를 “공간의 역설을 다루는 대가”라고 부르며, 그가 신부를 일부러 땅 위로 띄워 올렸다고 본다.
2026년에 열린 루소 전시회를 앞두고 2025년에 프랑스 박물관들의 연구 기관인 프랑스박물관연구복원센터의 연구소가 엑스선과 적외선으로 그림을 조사했고, 그 결과를 뉴스 매체 프랑스앵포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뒤쪽의 네 인물은 루소가 나중에 그려 넣었고, 신부의 드레스는 처음에는 더 길었으며, 면사포는 고쳐 그렸고, 개는 나중에 덧붙였다. 개의 눈이 어쩌면 원래 신부의 발이 있던 자리를 덮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파 쪽 면사포 아래에서는 손이 세 개 드러났다.
6. 샤임 수틴 《어린 제과사》

1922~1923년 겨울 미국 수집가 앨버트 반스는 파리에서 폴 기욤을 찾아갔다가 샤임 수틴이 그린 젊은 제과사의 초상화를 보았다. 당시 수틴은 가난했고, 그를 아는 사람은 몽파르나스에만 있었다. 1923년 기욤은 잡지 《레 자르 아 파리》에 그 그림에 관해 쓰면서 “거대하고 멋진 귀”를 가진 제과사를 떠올렸고, 반스가 그 캔버스를 보고 열광한 덕분에 수틴이 하루 만에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고 적었다. 반스는 수틴의 그림을 50점가량 샀는데, 대부분은 당시 화가와 일하던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의 재고에서, 16점가량은 기욤을 통해서였다. 미술관은 기욤이 묘사한 제과사가 아무래도 지금 필라델피아의 반스 재단에 있는 그림인 것 같다고 쓴다.
오랑주리의 제과사는 그와 다른 그림이다. 수틴은 1922~1923년에 이 그림을 그렸고, 미술관이 알고 있는 이 주제의 판본은 모두 여섯 점이다. 청년은 뒤통수 쪽으로 밀려난 구겨진 흰 모자를 쓰고 보는 사람을 향해 앉아 있으며, 두 줄 단추 재킷은 캔버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거의 옆으로 퍼져 있다. 목은 가늘고, 머리는 그 몸에 비해 작아 보이며, 귀는 튀어나왔는데, 보는 사람 쪽에서 오른쪽 귀가 왼쪽 귀보다 크고 붉다. 두 손은 아래쪽 무릎 위에 모여 있고, 그 밑에는 그림에서 가장 선명한 새빨간 천이 깔려 있다.
기욤은 즈보로프스키와 화상 조스 에셀을 거친 이 캔버스를 1930년대 초에 샀는데, 미술관의 말을 빌리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첫 번째 제과사를 기억하려고” 산 것이다.
7. 파블로 피카소 《천을 두른 커다란 누드》
1920년대 초 피카소는 고전적인 자세를 취한 육중한 여인들을 그렸고, 이 그림의 제작 시기를 1921~1923년으로 보는 미술관은 그 원천을 하나하나 꼽는다. 고대 미술, 가슴에 천을 끌어안은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리나》, 앵그르, 그리고 르누아르인데, 피카소는 르누아르가 그린 목욕하는 여인들을 직접 소장하고 있었다.
여인은 앉아서 캔버스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어서, 정수리는 위쪽 가장자리에 닿을 듯하고 무릎은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으며, 물결치는 긴 밤색 머리는 등 뒤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왼손으로 흰 천을 오른쪽 어깨에 끌어안고 있는데, 이 손이 얼굴보다 넓어서 미술관은 기록에서 그 손을 비례에 맞지 않는다고 적는다. 오른손으로는 같은 천을 허벅지 사이에서 비틀어 쥐고 있다. 배경은 고른 회색이고, 아래쪽 주름에는 흰 물감이 아주 얇게 칠해져 그 밑의 갈색 도는 회색 밑칠이 비쳐 보인다. 이 그림에는 《화장하는 여인》이라는 다른 제목도 있다.
기욤은 1927년에 이 그림을 샀고, 두 해 뒤 자기 컬렉션 전시회에 내놓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가 죽은 뒤 도메니카는 그 시기의 가장 대담한 작품들은 처분했지만 이 그림은 곁에 남겼다. 1936~1937년 그녀는 뉴욕의 피카소 전시회에 《커다란 누드》를 빌려주었다.
8. 앙리 마티스 《빨간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
1927년 한 비평가는 마티스가 니스에서 그린 오달리스크들을 “벽지 장수의 진열창”에 견주었다. 이 오달리스크는 기욤이 직접 샀고, 1929년 베르넴죈 화랑에서 열린 그의 컬렉션 전시회에 걸렸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가 죽은 뒤 미망인이 곁에 남긴 마티스의 그림은 거의 모두 마티스가 1917년에서 1929년 사이에 니스에서 그린 작품들이었다.
마티스는 1924~1925년 니스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여인은 왼쪽 위 구석에서 오른쪽 아래 구석으로 대각선으로 뻗은 긴 의자에 누워, 청록색 원통형 쿠션과 진홍색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오른손을 관자놀이께로 들어 올렸다. 그녀는 흰 튜닉을 입고 목걸이와 팔찌를 걸쳤으며, 빨간 바지는 종아리에서 금실로 수놓은 띠로 여며져 있다. 그녀 뒤로는 분홍 장미와 커다란 노란 황토색 무늬가 있는 짙은 코발트블루 천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연한 민트빛 바탕에 진홍색 꽃이 그려진 높다란 패널 두 개가 서 있다. 얼굴은 마티스가 붓질 몇 번으로만 잡아 두었고, 주위의 천들은 인물보다 더 촘촘하게 칠했다. 미술관은 파란 천 앞에 놓인 꽃병이 있는 작은 둥근 탁자를 비례에 맞지 않게 크다고 하며, 이 방에서 깊이를 드러내는 유일한 표시로 본다.

9. 모리스 위트릴로 《베르노의 집》
몽마르트르의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가운데, 작은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 앞에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남자가 있다. 그는 백발에 중산모를 쓰고 회녹색 외투를 입었으며, 왼손에는 붓과 물감이 두껍게 묻은 팔레트를 들고 있다. 그 곁으로는 역시 등을 보인 여자 여섯 명쯤이 블라우스에 무겁고 어두운 부츠 차림으로 걸어가는데, 청록색, 검은색, 올리브색 치마가 종처럼 부풀어 있어서 인형처럼 보인다.
몽스니 거리의 포장도로는 비탈을 이루며 내려간다. 왼쪽에는 흰 간판에 붉은 대문자로 ‘베르노’라고 적힌 가게가 있고, 문 옆에는 거리 이름이 적힌 파란 표지판이 붙어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가게는 석탄을 팔던 곳이다. 오른쪽에는 주철 가로등 기둥이 솟아 있고 회칠이 벗겨진 벽이 이어지며, 오른쪽 위 구석에는 캔버스 가장자리에 잘린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종탑이 하얗게 보인다. 위트릴로는 창문과 지붕, 가로등을 굵고 검은 선으로 둘렀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르에서 자랐지만, 1924년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 동부의 앵 도에 살고 있었고, 미술관이 적은 대로 이 거리는 아마 그림엽서를 보고 그렸을 것이다. 그림은 기욤의 것이었고, 그가 죽은 뒤 도메니카에게 남았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위트릴로는 ‘모리스, 위트릴로, V,’라고 서명하고 1924년 2월이라는 날짜를 적었다. V라는 글자로 그는 어머니인 화가 쉬잔 발라동의 성을 나타냈다.

10.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1892년 프랑스 국가는 살아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던 뤽상부르 미술관을 위해 르누아르에게서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샀고, 이것이 국가 소장품에 들어간 그의 첫 그림이었다. 국가가 산 그 그림은 지금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르누아르는 이 구도를 여러 번 그렸는데, 오랑주리의 캔버스는 더 자유롭게 그려졌고, 오르세 미술관은 이를 유화 스케치라고 부른다. 정작 오랑주리는 ‘스케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적어도 여섯 점의 다른 판본이 더 있다고 쓴다.
금발의 소녀가 반듯한 옆모습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머리는 등 뒤로 풀어 내렸고 정수리에서 분홍 리본으로 묶었으며, 잔 물방울무늬가 있는 흰빛 도는 회색 드레스에 넓은 하늘색 띠를 매어 뒤에서 큰 리본으로 묶었는데, 띠의 끝자락은 의자 위로 늘어져 있다. 한 손으로는 건반을 치고, 다른 손은 악보 가장자리로 들어 올렸다. 연어빛 분홍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소녀는 피아노에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채 악보를 들여다본다. 왼쪽 위 구석은 초록, 청록, 파랑, 황토색의 빠른 붓질로 채워져 있어서 커튼으로도, 나뭇잎으로도, 벽지로도 볼 수 있고, 왼쪽 아래에는 가느다란 금빛 의자가 캔버스 가장자리에 잘려 있다. 미술관은 르누아르가 두 인물에 집중하려고 불필요한 세부를 피했다고 쓰고, 이 그림이 화가의 집에서 그려졌으리라고 짐작한다. 르누아르는 1890년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피아노를 선물했다.
르누아르는 이 캔버스를 오랫동안 곁에 두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파리의 뒤랑뤼엘 화랑에 맡겨 두었고, 1919년에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가지고 있었으며, 1928년부터는 기욤의 소유였다. 남편이 죽은 뒤 도메니카는 이 그림을 남겼다.
11. 앙드레 드랭 《큰 모자를 쓴 폴 기욤 부인의 초상》

폴 기욤의 아내는 태어날 때 이름이 쥘리에트 라카즈였고, 도메니카라는 이름은 기욤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8~1929년 그녀를 그린 앙드레 드랭은 한때 야수파 화가였고, 1920년대 말에는 기욤에게 가장 중요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초상화는 1929년부터 기욤의 것이었고, 그해 그는 이 그림을 자기 컬렉션 전시회에 내놓았으며, 집에서는 포슈 대로에 있던 저택의 침실 가장 좋은 자리에 걸었다.
도메니카는 챙이 어깨보다 넓은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데, 모자 챙은 밝은 원반처럼 머리 뒤에 펼쳐져 있다. 왼쪽 위의 검붉은 휘장을 빼면 그림 전체가 베이지, 황토, 크림빛으로 칠해졌다. 어깨에는 긴 흰 술이 달린 크림색 새틴 숄을 둘렀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엇갈려 포개었다. 눈은 크고 옅은 하늘색이며, 미술관이 짚듯이 드랭은 눈빛에 생기를 주려고 눈동자에 흰 반짝임을 찍었다. 진주 귀걸이가 그 흰빛을 되풀이한다.
미술관에 따르면 오른쪽 위에는 피에로와 어릿광대가 윤곽만 희미하게 잡혀 있는데, 미술관은 이것이 기욤이 주문한 그 큰 그림인지, 아니면 부부가 역시 집에 두고 있던 그 그림의 스케치 두 점 가운데 하나인지 스스로 묻는다. 1934년 기욤이 죽은 뒤 컬렉션은 도메니카에게 넘어갔다. 초상화는 그녀 곁에 남았고, 1950년 그녀는 파리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열린 ‘여인의 초상 100점’ 전시회에 이 그림을 빌려주었으며, 1959년에는 컬렉션과 함께 국가에 팔았다. 1996년에 나온 도메니카의 전기 제목은 《큰 모자를 쓴 여인》이다.

12.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앞의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도메니카는 1937년 6월 10일 이 그림을 샀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세 해가 지났는데도 서류에는 ‘폴 기욤 부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전에 그림은 파리와 뉴욕, 스위스의 화랑들을 거쳤다.
1897년 무렵 르누아르는 화가이자 수집가인 앙리 르롤의 딸 이본과 크리스틴이 피아노 앞에 있는 모습을 그렸다. 주제는 《피아노 치는 소녀들》과 같지만, 여기서는 소녀들에게 이름이 있고, 벽에는 아버지의 소장품인 그림들이 걸려 있다. 깃이 높은 흰 드레스를 입은 한 자매는 검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한다. 목에 검은 벨벳 리본을 두르고 붉은 주황빛 드레스를 입은 다른 자매는 그 뒤에 서서 얼굴을 보는 사람 쪽으로 돌리고 악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왼쪽 위 금빛 액자에는 경주마와 기수를 그린 에드가 드가의 그림이, 오른쪽 위에는 분홍 튀튀를 입은 역시 드가의 무용수들이 걸려 있는데, 무용수들의 머리는 캔버스 위쪽 가장자리 너머로 잘려 나갔다. 미술관은 이 두 그림을 《경주 전에》와 《나무 아래의 무용수들》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그림은 지금 패서디나의 노턴 사이먼 미술관에 있다.
두 자매는 뒷날 드가의 오랜 친구인 수집가 앙리 루아르의 아들들과 결혼해서, 이본은 외젠의, 크리스틴은 루이의 아내가 되었다.

13. 폴 세잔 《사과와 비스킷》
미국 잡지 《타임》은 이 정물화가 팔린 일을 “루브르가 놓친 그림”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전했다. 1952년 5월 14일 파리의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사마리텐 백화점의 상속인 가브리엘 코냐크의 소장품이 경매에 나왔고, 《사과와 비스킷》은 3300만 프랑에 낙찰되었다. 잡지에 따르면 세잔의 그림이 경매에서 그보다 비싸게 팔린 적은 없었다. 루브르에는 우선 매수권, 곧 같은 금액으로 그림을 가져갈 권리가 있었지만, 루브르는 이 권리를 쓰지 않았다. 경매 기록에는 구매자가 장 발테르 부인으로 적혀 있고, 《타임》은 구매자를 “납 광산을 가진 프랑스 백만장자”라고 불렀는데, 그녀의 남편을 가리킨 말이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만한 돈을 들인 구매로 대중의 관심이 도메니카의 컬렉션에 쏠렸다.
긴 나무 궤짝 뚜껑 위에 노랑, 빨강, 주황빛 사과 14개가 느슨하게 한 줄로 놓여 있고, 그 뒤로는 회백색 잔가지 무늬가 있는 푸르스름한 초록빛 벽이 보인다. 제목의 비스킷은 캔버스에 겨우 들어왔다. 캔버스 오른쪽 가장자리에 파란 테두리를 두른 흰 접시가 3분의 1쯤만 그림 안에 걸쳐 있고, 그 위에 납작한 분홍빛과 크림빛 비스킷 몇 개가 놓여 있다. 접시는 사과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기울어져 있다. 이 그림의 첫 소유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장부에는 그림값이 150프랑으로 적혀 있다.
14. 폴 고갱 전칭 《풍경》

미술관은 ‘고갱으로 전칭되는 작품’이라는 단서를 달아 이 풍경화를 고갱의 목록에 올려 두었는데,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P. 고갱 1901’이라는 서명과 날짜가 있다. 예전에는 이 그림을 《주임 신부와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캔버스는 거의 온통 초록으로 덮여 있다. 층층이 납작한 수관을 얹은 키 크고 가느다란 나무, 쨍한 형광빛 노란색의 둥근 나무 두 그루, 오른쪽 위의 야자나무와 바나나 잎이 있고, 하늘은 위쪽 가장자리를 따라 좁은 띠로만 남았다. 노랗고 푸른 풀밭 한가운데에 긴 검은 옷을 입은 작고 어두운 인물이 붓질 몇 번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 곁에는 그보다 더 작은 인물들이 있다. 미술관은 이들을 세 아이가 뒤따르는 선교사로 보고, 조그만 인물들이 초목 속에 묻혀 사라지는 것 같다고 쓴다.
미술관은 ‘아마도’라는 단서를 달아, 이 풍경이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섬이고 고갱이 1901년 9월 타히티에서 그곳으로 옮겨 간 뒤 처음 몇 달 사이에 그려졌다고 본다. 컬렉션에 있는 고갱의 그림은 이것 하나뿐이고, 도메니카가 샀지만, 언제 누구에게서 샀는지는 미술관이 밝히지 않는다. 그림의 이전 소유자로는 빈의 수집가 H. 뵐러, 암스테르담의 휘잉크 앤 스헤르욘 화랑, 그리고 《푸른 천사》를 찍은 할리우드 감독 조지프 폰 스턴버그가 있었다.
15.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
미국 화가 로메인 브룩스가 1921년 무렵부터 니스의 집에 이 그림을 두고 있었고, 1955년 무렵 도메니카가 그림을 샀다. 이것은 장 발테르와 폴 기욤 컬렉션에 있는 유일한 모네 작품이다.
모네는 1871년 12월 파리 근교 센강 가의 작은 도시 아르장퇴유에 자리를 잡았고, 1875년 그곳의 돛배 정박지를 그렸다. 가운데에는 선체가 주홍빛인 배 두 척이 닻을 내리고 서 있고, 그 붉은 물그림자가 끊어진 붓질로 물 아래쪽으로 뻗어 내린다. 가느다란 연노랑 돛대들이 그림을 가로질러 줄지어 서 있고, 가장 높은 돛대는 위쪽 가장자리에 거의 닿는다. 미술관은 원근선이 배에서부터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져 나간다고 짚는다. 앞쪽의 물은 노란빛 도는 초록과 올리브색 붓질로 덮여 있는데, 미술관은 여기서 센강을 떠내려가는 수초를 보며, 그림의 아래쪽 띠는 거의 온통 초록이다.
1959년 도메니카는 컬렉션을 국가에 팔았다. 이 컬렉션을 위해 오랑주리에 한 층을 올렸을 때 《수련》은 위에서 들어오던 빛을 잃었다. 증축한 층은 2000~2006년 개보수 공사 때에야 헐렸다.

더 볼 만한 작품
컬렉션에는 샤임 수틴의 그림 22점과 세잔의 그림 15점이 있고, 세잔의 그림 가운데에는 《세잔 부인의 초상》이 있으며, 모딜리아니의 작품으로는 《노보 필로타》 말고도 《안토니아》와 《젊은 견습생》을 볼 만하다. 기욤 자신은 키스 반 동겐이 그린 초상화에도 한 번 더 등장한다. 피카소의 《커다란 목욕하는 여인》은 1921~1922년, 곧 《천을 두른 커다란 누드》와 같은 시기에 그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