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2월, 피츠버그의 은행가로 1921년부터 1932년까지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앤드루 멜런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회화와 조각 컬렉션을 나라에 기증하고, 이를 위한 건물을 워싱턴에 지어 주며, 직원들의 급여로 쓸 돈도 남기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건물의 이름을 ‘국립 미술관’으로 하고 자기 이름은 붙이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그 안에서 보여 줄 모든 작품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의 질”을 지키기 위한 규칙을 정해 두었다. 의회는 1937년 3월 24일, 멜런의 82번째 생일에 이 기증을 받아들였다.

하버드 대학교가 워싱턴에서 운영하는 연구 기관 덤버턴 오크스는 멜런이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은 까닭을, 다른 기증자들을 이 미술관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멜런 이후로는 염가 잡화점 체인의 창업자부터 런던의 한 자선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개인 소유자들이 저마다의 조건을 걸고 이곳에 그림을 기증하고 유증하고 팔았다.

우리는 멜런이 1926년에 산 한 여인의 초상에서 시작해, 와이드너 가문이 기증한 그림 가운데 2022년 미술관이 더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보지 않게 된 한 점으로 끝을 맺는다.

재무장관이 에르미타주의 그림까지 옛 거장들을 사들이다 (1926~1931)

어느 여인의 초상
어느 여인의 초상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146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어느 여인의 초상》, 1460년경

빳빳하게 풀을 먹인 투명한 베일의 가장자리가 이 젊은 여인의 이마를, 눈썹 바로 위를 가로지르고, 얇은 천 너머로 살갗과 눈썹이 비쳐 보인다. 베일은 뒤통수 쪽으로 넘겨 쓴 낮은 금빛 모자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고, 머리 양옆으로 뻣뻣하게 각진 두 날개처럼 어깨까지 펼쳐진다. 눈은 아래로 내리깔아 우리를 비껴가고, 깍지 낀 손가락은 패널의 맨 아래 가장자리에 놓여 있어 아래쪽 손가락들은 그림의 테두리에 잘려 있다. 배경은 짙은 청색, 옷은 검은색이며, 이 초상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색은 가슴 아래에 맨 붉은 허리띠와 그 위의 투조 금 버클이다.

로히어르는 1464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 그림은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초상 가운데 하나다. 여인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는 로히어르의 공방에서 그린 같은 구도의 다른 판본이 있는데, 런던의 미술관 스스로 워싱턴의 패널이 거장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귀속”되며 “눈에 띄게 질이 높다”고 적고 있다.

어느 여인의 초상
어느 여인의 초상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146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여인의 초상
여인의 초상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공방, 1460, 내셔널 갤러리

이 초상은 뵈를리츠에 있던 안할트데사우 제후 가문, 뒤의 공작 가문의 고딕 하우스에 아마 걸려 있었을 것이다. 이 ‘아마’는 미술관이 소장 이력에 직접 적어 둔 말이다. 미술관이 이름을 밝히는 마지막 소유자는 1918년 4월 21일에 세상을 떠난 안할트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이며, 그가 죽은 뒤 누가 그림을 팔았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1925년 안할트 공작 가문의 이 그림은 헤이그의 화상인 바크슈티츠 화랑으로 넘어갔고, 거기서 다시 런던과 뉴욕에 지점을 둔 조지프 듀빈의 회사로 갔다.

1926년 12월 멜런이 듀빈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는 친구이자 수집가인 헨리 클레이 프릭을 본받아 1910년대 말에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고, 피츠버그 시절부터 알던 두 화상, 곧 듀빈과 뉴욕 뇌들러 화랑의 찰스 카스테어스에게서 그림을 샀다. 그가 주로 산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회화였고, 그의 구입품 가운데 초기 네덜란드 화파의 초상은 드문 경우다. 국립 미술관에 대한 구상은 1928년 무렵 그에게 생겼고, 1931년부터 그는 그림의 소유권을 피츠버그에 있는 자신의 자선 재단으로 옮기기 시작했으며, 이 초상은 1932년 3월 30일에 재단으로 넘어갔다.

필립 워튼 경
필립 워튼 경안토니 반 다이크, 1632,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멜런은 미술관 건물의 터파기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8월에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존 러셀 포프도 세상을 떠났다.

2. 안토니 반 다이크 《필립 워튼 경》, 1632년

이 초상에서 4대 워튼 남작 필립의 나이는 19세이며, 이는 캔버스에 직접 적혀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금색 글씨의 영어로 “Philip Lord Wharton 1632 about ye age of 19”, 곧 ‘필립 워튼 경, 1632년, 19세 무렵’이라고 쓰여 있고, 왼쪽 아래 구석에는 그보다 작은 글씨로 “P. Sr Ant: Vandike”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화가는 기사 칭호로 불린다. 반 다이크는 1632년 봄 찰스 1세의 궁정화가로 런던에 왔고, 그해 7월 5일 기사 작위를 받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가 런던으로 옮겨 온 뒤 왕을 빼면 영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그에게 초상을 주문한 사람이 워튼이었다.

젊은 귀족은 오른손을 허리에 짚고 서 있어서, 팔꿈치가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뻗어 나와 있다. 그는 흰 레이스 깃을 단 회보랏빛 비단 상의를 입었고, 그림의 아래쪽 절반은 거대한 금빛 노란 공단 망토가 온통 덮고 있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끝에 구부러진 쇠 삽날이 달린 긴 목동 지팡이가 기대어 있는데, 목동들은 이런 삽날로 흙덩이를 떠서 무리에서 떨어진 양들에게 던졌다. 오른쪽에는 위에서 아래까지 에메랄드빛 초록 비단 휘장이 드리워 있다. 미술관은 이 초상을 아르카디아풍, 곧 목가풍 초상이라 부르고,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1910년에 펴낸 에르미타주 회화관 안내서에서 “이런 사람을 가면무도회 차림의 목동으로, 벨벳과 비단을 두른 모습으로 보게 되는 것은 특징적이다”라고 썼다. 워튼은 열렬한 청교도의 아들이었고, 이 초상이 그려지고 10년 뒤 내전이 일어나자 찰스 1세에 맞서 의회 편에 섰으며 에지힐 전투에서 연대를 지휘했다.

초상은 1725년까지 워튼 가문에 남아 있다가, 그해 영국 정부를 이끌던 로버트 월폴 경이 노퍽에 있는 자신의 영지 호턴 홀에 두려고 사들였다. 1779년 월폴의 손자인 3대 오퍼드 백작 조지는 런던 주재 러시아 공사 알렉세이 무신푸시킨 백작을 통해 호턴의 그림들을 예카테리나 2세에게 팔았다. 멜런은 미술관이 밝힌 날짜로는 1930년 3월에 에르미타주에서 이 초상을 샀고, 이는 그가 에르미타주에서 산 첫 그림들 가운데 하나였다(역사가 로버트 윌리엄스는 이 구입을 1930년 7~11월로 본다). 이 판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다음 항목인 반 에이크 이야기에서 다룬다.

같은 호턴 컬렉션에서 나온 그림 가운데 에르미타주에 남은 것으로는, 반 다이크가 1630년대 말에 그린 워튼의 두 딸 필라델피아와 엘리자베스의 이중 초상이 있다.

필립 워튼 경
필립 워튼 경안토니 반 다이크, 1632,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수태고지
수태고지얀 반 에이크, 143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3.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1434~1436년경

얀 반 에이크의 《수태고지》를 판매용으로 내놓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에르미타주 직원들은 지시서에 화가 이름이 반 다이크로 적혀 있고 미술관에는 반 다이크의 《수태고지》가 없다는 점을 들어 그림을 내주는 일을 늦추려 했다. 그림은 결국 넘겨졌고, 1930년 6월 앤드루 멜런이 이를 샀다.

소련 정부는 제1차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산업 수입품의 대금을 외화로 마련하려고, 수출 기관 ‘안티크바리아트’를 통해 에르미타주의 그림을 해외에 팔았다. 멜런은 베를린의 마티젠 화랑, 런던의 콜나기, 뉴욕의 뇌들러, 이 세 회사를 한꺼번에 거쳐 그림을 샀고, 그림은 베를린에서 넘겨받았다. 뇌들러의 찰스 헨셸이 뒤에 법정에서 설명한 바로는, 당시 미국이 소련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이 구입품 가운데 첫 그림에 매긴 날짜로 치면 1930년 3월부터 1931년 4월까지, 멜런은 이런 식으로 그림 21점을 샀고, 역사가 로버트 윌리엄스의 계산으로는 그 값으로 약 665만 달러를 치렀다.

거래는 비밀에 부쳐졌다. 신문들은 1932년 무렵부터 소문을 싣기 시작했지만 멜런은 이를 부인했다. 구입 사실은 1935년 2월에야 피츠버그에서 열린 멜런의 조세 사건 청문회에서 그의 변호사 프랭크 호건이 확인했고, 그 자리에서 《수태고지》의 값은 50만 3010달러로 평가되었다. 조세항소위원회는 멜런이 죽고 넉 달 뒤인 1937년 12월 7일에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사기는 없었다고 보고 그의 재단을 합법적인 단체로 인정했지만, 다툼이 된 거래 아홉 건 가운데 세 건에서는 멜런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렸고, 그의 유언 집행인들에게는 약 60만 달러의 세금이 추가로 부과되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
동방박사들의 경배산드로 보티첼리, 1482,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폴란드 귀족
폴란드 귀족렘브란트, 1637,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거울을 보는 비너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티치아노, 155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그림은 높고 좁으며, 인물들은 그 아래쪽 절반만 차지하고 그 위로는 평평한 나무 천장을 인 어둑한 성당 내부가 솟아 있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말 AVE GRA PLENA, 곧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는 금빛 글자로 그의 입에서부터 이어지고, 마리아의 대답 ECCE ANCILLA DNI, 곧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는 위에서 읽도록 거꾸로 쓰여 있다. 가브리엘의 날개에는 공작 깃털처럼 무지갯빛 줄무늬와 눈 모양 무늬가 있고, 금빛 바닥에는 구약성경의 장면들이 선으로 새겨져 있는데, 마리아의 옷자락 바로 아래에서는 삼손이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 위로 신전을 무너뜨리고 있다.

에르미타주에 오기 전 이 패널의 주인은 네덜란드 왕 빌럼 2세였다. 1848년 왕비 안나 파블로브나의 남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왕의 회화 컬렉션을 담보로 100만 휠던을 빌려주었고, 1849년 왕이 빚을 남긴 채 죽자 상속인들은 그림들을 경매에 내놓았으며, 1850년 8월 12일 헤이그에서 화가 표도르 브루니가 니콜라이 1세를 위해 《수태고지》를 샀다. 에르미타주에서는 아마 1864년에서 1870년 사이에 그림층을 패널에서 캔버스로 옮겼고, 그래서 미술관은 이 작품을 패널에서 캔버스로 옮긴 유화로 기재한다.

1997년 3월 《수태고지》는 ‘세계 미술관의 걸작’ 연작 전시의 하나로 몇 주 동안 에르미타주에 다시 돌아왔다.

4. 티치아노 《거울을 보는 비너스》, 1555년경

티치아노는 이 비너스를 1576년 죽을 때까지 20년 넘게 베네치아의 자기 집에 두었다. 미술관은 제자들이 이 그림을 보고 주문자들에게 줄 복제본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며, 티치아노 자신과 그의 공방이 그린 이 구도의 변형은 적어도 30점이 알려져 있다.

비너스는 허리까지 옷을 벗은 채 앉아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얹었고, 왼손으로는 무릎 위에 걸친 짙은 붉은색 벨벳 망토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있는데, 갈색 모피를 댄 이 망토에는 넓은 금색 단이 둘려 있다. 큐피드 하나는 줄무늬 쿠션 위에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검은 틀의 네모난 거울을 그녀 앞에 들고 있고, 다른 하나는 거울과 그녀의 어깨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작은 꽃이 달린 잎사귀 화관을 그녀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거울에는 그녀 얼굴의 좁은 한 부분과 진주 귀걸이, 한쪽 눈만 비치는데, 이 눈은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미술관은 이를 두고 비너스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살피고 있다고 읽는다.

1581년 티치아노의 아들 폼포니오가 크리스토포로 바르바리고에게 집을 팔았고, 집에 남아 있던 그림들도 집과 함께 새 주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비너스》가 확실하게 처음 기록된 것은 1600년 바르바리고의 유언장이다. 그림은 2세기 반 넘게 베네치아의 바르바리고 델라 테라차 궁에서 바르바리고 가문의 소유로 있다가, 1850년 조반니 디 알비세 바르바리고의 상속인들이 니콜라이 1세에게 팔았으며, 에르미타주에서는 1931년 4월 멜런이 살 때까지 머물렀다.

알바의 성모
알바의 성모라파엘로, 1511,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970년대 초에 발표된 엑스선 사진에서, 티치아노가 그리다 만 남녀의 이중 초상 위에 《비너스》를 그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5. 라파엘로 《알바의 성모》, 1510년경

라파엘로는 《알바의 성모》 속 성모의 자세를, 셔츠 차림에 맨다리를 드러낸 젊은 남자를 모델로 붉은 분필로 그렸다. 이 소묘는 릴 미술관에 있으며, 종이 뒷면에는 전체 구도가 원 안에 스케치되어 있다.

그림 속 마리아는 풀밭에 그대로 앉아 오래된 그루터기에 등을 기대고 있다. 몸은 오른쪽으로 틀었고 고개는 왼쪽으로 홱 돌려, 아기 그리스도와 털가죽을 걸치고 무릎 꿇은 어린 세례 요한이 함께 붙잡은 가느다란 막대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얼굴은 진지하다. 오른발은 앞으로 뻗어 푸른 망토 아래로 회청색 샌들을 신은 맨발이 보이고, 왼손에는 덮어 둔 작은 책을 들고 책장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두었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 온 지 2년 뒤인 1510년 무렵 로마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미술관은 역사가 파올로 조비오가 이 그림을 주문했고 그에게서 나폴리 근처 노체라의 한 성당으로 그림이 넘어갔을 수 있다고 보는데, 두 번 모두 ‘어쩌면’이라는 말을 붙인다. 1686년 나폴리 부왕 델 카르피오 후작이 이 그림을 샀고, 그의 딸을 통해 그림은 알바 공작 가문으로 넘어가 이름도 그 가문에서 얻었으며, 이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그림을 소유한 사람은 세비야 근처 산루카르에 살던 알바 공작 부인이었다. 공작 부인의 상속인들은 이 성모를 스페인 주재 덴마크 공사 버크 백작에게 팔았고, 그는 1820년 런던의 은행가 윌리엄 쿠스벨트에게, 쿠스벨트는 1836년 니콜라이 1세 측에 그림을 팔았다. 에르미타주에서 그림층은 패널에서 캔버스로 옮겨졌다.

멜런은 1931년 4월 《알바의 성모》를 116만 6400달러에 샀다. 값은 비밀에 부쳐졌고 모스크바에서는 150만 달러라는 말이 흘러나왔는데, 1935년 조세 청문회에서 실제 금액이 밝혀지자 신문들은 그림 한 점에 이보다 비싼 값을 치른 적은 없었다고 썼다.

알바의 성모
알바의 성모라파엘로, 1511,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염가 잡화점 체인을 세운 크레스의 재단 (1938~1961)

작은 십자가 처형
작은 십자가 처형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52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6. 조르조네 《목자들의 경배》(《앨런데일 성탄화》), 1505~1510년경

1938년 12월 조르조네의 《목자들의 경배》는 뉴욕 5번가에 있는 크레스 상점의 진열창에 걸려 크리스마스를 앞둔 손님들에게 선보였고, 크레스 재단은 이를 “5번가 역사상 가장 놀라운 크리스마스 진열”이라고 부른다. 새뮤얼 크레스(1863~1955)는 5센트와 10센트짜리 물건을 파는 잡화점 체인 S. H. 크레스 앤드 컴퍼니를 세웠고, 그의 재단은 유럽 미술품을 3000점 넘게 모았다. 재단은 그 가운데 가장 큰 몫을 1939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미술관에 주었고, 나머지는 다른 도시의 미술관 18곳에 나누어 주었는데, 그 도시들을 고른 데는 그곳에 크레스 상점이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재단은 화상들에게서 그림을 사서 여러 묶음으로 나누어 기증했으므로, 기증 연도가 구입 연도보다 몇 년 늦은 경우가 많다.

이 그림은 로마의 페슈 추기경과 수집가 클로디어스 태럴의 컬렉션을 거쳐 1847년 토머스 웬트워스 보몬트가 샀고, 그 뒤 거의 90년 동안 요크셔의 브레턴 홀에서 그의 후손들, 곧 뒷날의 앨런데일 자작 가문이 소유했으며, 두 번째 제목도 이 가문에서 얻었다. 1937년 8월 앨런데일 가문은 이 그림을 조지프 듀빈에게 팔았다. 듀빈은 이 그림을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팔았는데, 듀빈과 여러 해 계약을 맺고 일해 온 이탈리아 회화 감식가 버나드 베런슨은 티치아노의 초기작이라고 보았고, 이 다툼 끝에 두 사람의 협력은 끝났다. 베런슨의 전기를 쓴 레이철 코언은 듀빈의 동업자 에드워드 파울스의 말을 근거로, 듀빈이 이 그림에 31만 5000달러를 치렀고 크레스 재단이 1938년 그에게서 40만 달러에 샀다고 쓴다. 재단은 1939년 이 그림을 미술관에 기증했고, 미술관은 이를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분류한다.

목자들의 경배
목자들의 경배조르조네, 1507,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화면은 둘로 갈라진다. 오른쪽에는 동굴의 어두운 입구가 뚫린 갈색 바위가 솟아 있고, 그 입구 바로 앞 오른쪽 아래 구석에 성가족이 바짝 모여 있다. 푸른 망토를 입은 마리아는 무릎을 꿇었고, 아기는 짚단 위에 깐 흰 천에 누워 있으며, 빛나는 주황빛 금색 망토를 입은 요셉은 돌덩이에 몸을 기대고 있다. 왼쪽으로는 강과 탑과 푸른 산이 있는 밝은 풍경이 펼쳐지고, 그쪽에서 해진 옷을 입은 목자 두 사람이 아기에게 몸을 숙인다. 맨 왼쪽 위 구석, 나무의 잎사귀 사이에는 아주 작은 천사가 구름 위에 앉아 있는데, 너무 얇게 그려서 천사 너머로 잎사귀가 비쳐 보인다.

7. 엘 그레코 《라오콘》, 1610~1614년경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공은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의 섭정이 되기 전인 1934년 5월에 이미 《라오콘》을 소유하고 있었다. 1934년 5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그림은 그가 잠시 빌려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 있었다. 1941년 그의 섭정은 쿠데타로 끝났고, 남아프리카로 망명한 파블레 공은 요하네스버그에서,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그림을 맡아 보관하도록 협의했다. 1946년 그는 그림을 뇌들러에 위탁해 팔았고, 그해 2월 크레스 재단이 이를 사서 같은 해에 이미 그림이 보관되어 있던 미술관에 기증했다.

라오콘
라오콘엘 그레코, 161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이 그림은 엘 그레코의 회화 가운데 신화를 주제로 한 유일한 작품이다. 1621년 그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의 재산 목록에는 《라오콘》이 세 점 올라 있는데, 그 가운데 남은 것은 이 그림뿐이다. 그 뒤 그림은 스페인의 인판테 안토니오 데 오를레앙이 소유했고, 1910년에는 파리의 화상 뒤랑뤼엘에게 가 있었으며, 1911년에는 뮌헨에서 전시되었고, 1914~1915년에는 베를린에 대여되어 걸렸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따르면 사제 라오콘은 트로이 사람들에게 목마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가 아들들과 함께 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림 속 라오콘은 어두운 바위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뱀 한 마리를 얼굴 바로 앞에서 붙잡고 있다. 왼쪽에는 아들 하나가 서 있고 그가 치켜든 팔 위로 두 번째 뱀이 고리 모양으로 휘어 있으며, 다른 아들은 구부린 다리를 쳐든 채 아버지 옆에 누워 있다. 엘 그레코는 트로이 자리에 자신이 일하던 톨레도를 그렸다. 언덕 위에 성문이 난 분홍빛과 회색 성벽이 있고, 성문 앞에는 작고 불그스름한 말이 서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
동방박사의 경배프라 안젤리코, 143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오른쪽에는 벌거벗은 두 인물이 사건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를 두고 연구자들은 지금도 논쟁한다. 이들을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파리스와 헬레네, 아담과 하와로 보는 견해가 있었고, 미술관은 자신들의 복수를 지켜보는 신들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두 사람의 머리 사이에는 창백한 옆얼굴의 세 번째 머리가 그려져 있는데, 녹청색 하늘이 그 턱과 목 위로 넘어와 있다.

8. 프라 안젤리코와 프라 필리포 리피 《동방박사의 경배》(쿡 톤도), 1440~1460년경

위대한 로렌초가 죽은 뒤 작성된 1492년의 재산 목록에는, 피렌체 메디치 궁 1층의 큰 방에 금박 액자를 두른 큰 톤도, 곧 둥근 그림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림에는 성모와 아기, 예물을 들고 오는 동방박사들이 그려져 있었고, 목록은 이를 수도사 프라 안젤리코의 수도명인 프라 조반니의 솜씨로 적고 100플로린으로 평가했다. 이것이 바로 이 패널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궁에서 가장 값비싼 그림이라 부르는데, 견주어 보면 같은 방에 있던 파올로 우첼로의 패널 여섯 점은, 《산 로마노 전투》 세 점을 포함해 모두 합쳐 300플로린으로 평가되었다.

이 톤도는 도미니코회 수도사 프라 안젤리코가 시작했고, 그가 1455년에 죽은 뒤 카르멜회 수도사 프라 필리포 리피가 완성했는데, 어느 인물을 누가 그렸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미술관은 마리아의 머리를 안젤리코의 것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동방박사들과 얼굴이 넓적한 요셉을 리피의 것으로 본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른쪽 위 초록 언덕에서부터 흰 톱니 모양 성벽을 지나고, 왼쪽의 무너진 아치를 통과해, 아래쪽에 무릎 꿇은 동방박사들에게까지 나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그 가운데 가장 나이 든 박사는 왕관을 벗고 아기의 발을 붙들고 있다. 마구간 지붕 위에는 목이 푸른 큰 공작이 서 있고, 그보다 오른쪽에서는 맹금 한 마리가 꿩을 향해 쏜살같이 내리꽂힌다. 미술관은 이 새들을 리피가 이미 완성된 그림 위에 맨 마지막으로 덧그렸다고 본다. 아치 오른쪽의 부서진 벽 위에는 벌거벗은 젊은이 다섯이 서 있고, 아래 풀밭에는 귀를 짧게 자른 흰 개가 엎드려 있다.

16세기 말부터 약 2세기 동안 이 톤도는 피렌체의 귀차르디니 가문에 있었다. 1810년에는 보티첼리의 작품으로, 1826년 런던에서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으로 팔렸고, 1849년에는 필리포 리피의 작품으로 여겨졌으며, 1874년 알렉산더 바커 컬렉션 경매에서는 그의 아들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으로 나와 프랜시스 쿡 경에게 낙찰되었고, 그 뒤로 쿡의 이름으로 불린다. 쿡의 상속인들은 리치먼드의 다우티 하우스에 이 그림을 두었고, 1947년 2월 크레스 재단이 이번에는 필리포 리피의 작품으로서 그들에게서 사들여 1952년 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이 톤도에 두 화가의 이름을 함께 붙인다.

동방박사의 경배
동방박사의 경배프라 안젤리코, 143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튈르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
튈르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자크루이 다비드, 1812,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9. 자크루이 다비드 《튈르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 1812년

해밀턴 공작가의 상속자인 스코틀랜드인 더글러스 후작 알렉산더는,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던 1811년 8월 3일 편지로 다비드에게 나폴레옹의 초상을 주문했다. 1804년부터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였던 다비드는 그와 1000기니에 값을 합의했고, 자신의 작품 대장에는 이 초상을 영국으로 갈 그림이라고 적었다.

나폴레옹은 책상 옆에 전신으로 서서 오른손을 흰 조끼 안에 넣고 있다. 1812년 5월 8일의 편지에서 다비드는 황제를 그가 가장 익숙하게 하는 일, 곧 일하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황제는 서재에서 자신의 법전을 쓰며 밤을 새웠고, 촛불은 다 타 들어갔고, 시계는 새벽을 가리키며, 그는 이제 막 군대를 사열하러 가려고 칼을 집어 들려는 참이라는 것이다. 책상 위 램프의 초 하나는 꺼져 연기를 피우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타고 있으며, 오른쪽의 높은 시계는 미술관의 판독으로 4시 13분을 가리키고, 책상 위에 말린 종이에는 COD라는 글자가 보이며, 금 손잡이가 달린 칼은 금빛 꿀벌 무늬가 있는 붉은 벨벳을 씌운 안락의자 위에 놓여 있다. 연구자들은 나폴레옹이 이 초상을 위해 직접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초상은 1882년까지 글래스고 근처의 해밀턴 궁에 걸려 있었고, 그해 크리스티 경매에서 궁의 컬렉션이 팔릴 때 F. 데이비스라는 인물이 이 그림을 샀는데, 아마 훗날 총리가 되고 나폴레옹의 마지막 몇 해에 관한 책을 쓴 로즈버리 백작을 대신해 산 것으로 보인다. 1951년 6대 로즈버리 백작이 그림을 윌덴스타인 화랑에 팔았고, 1954년 크레스 재단이 그곳에서 초상을 샀으며, 1961년 초상은 재단의 마지막 대규모 기증과 함께 미술관에 들어왔다.

다비드는 1812년 3월 말에 초상을 완성했고, 그로부터 석 달 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로 들어갔다.

튈르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
튈르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자크루이 다비드, 1812,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필라델피아의 저택이 워싱턴으로 옮겨 오다 (1911~1922년 구입, 1942년 기증)

저울을 든 여인
저울을 든 여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0.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저울을 든 여인》, 1664년경

여인이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들고 있는 저울은 수평을 이루고, 놋쇠 접시 두 개는 모두 비어 있어 저마다 가장자리에 아주 작은 빛 반점 하나씩만 맺혀 있다. 미술관에서 이 빛 반점들을 현미경으로 살펴본 결과, 반점들은 탁자 위의 금 사슬이나 진주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져 있었고, 따라서 접시에는 금도 진주도 올라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편 1696년 암스테르담의 경매에서 이 그림은 ‘금을 다는 젊은 여인’으로 팔렸고, 1913년 와이드너 컬렉션 도록에서도 제목은 《금을 다는 여인》이었다.

빛은 노란빛 주황색 커튼이 드리운 창을 지나 왼쪽 위에서 들어와, 그녀만을 비춘다. 흰 두건과 얼굴과 손, 그리고 상자에서 탁자 위로 쏟아진 진주들이 그 빛을 받는다. 그녀 뒤 벽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린 어두운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 위쪽 희미한 광채 속에서 그리스도가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있으며, 여인의 머리는 바로 그 아래에 놓인다.

페르메이르는 1632년부터 1675년까지 평생을 델프트에서 살았고, 그가 남긴 그림은 35~37점이다. 1910년 런던의 콜나기 화랑이 이 그림을 아마 페리에 가문 출신의 세귀르 백작 부인에게서 샀고, 10월에는 뉴욕의 뇌들러가 그 지분 4분의 1을 사들였으며, 1911년 1월 11일 두 회사는 그림을 피터 와이드너에게 팔았다. 20년 뒤 바로 이 두 회사가 멜런에게 에르미타주의 그림을 팔게 된다.

피터 A. B. 와이드너(1834~1915)는 필라델피아의 전차 노선으로 부를 쌓았고, 필라델피아 근교 엘킨스 파크에 있는 자신의 저택 린우드 홀에서 유럽 회화를 모았다. 그의 아들 조지프(1871~1943)는 컬렉션을 회화 약 100점으로 추렸고, 1942년 판화와 소묘를 포함해 2000점이 넘는 작품을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 회화는 약 100점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는 그림을 주 밖으로 내보내는 대가로 5퍼센트의 상속세를 요구했고, 결국 이 세금은 의회가 냈다. 의회는 루스벨트의 요청에 따라 이를 위해 19만 5000달러를 배정했다.

11. 렘브란트 《풍차》, 1645~1648년

풍차
풍차렘브란트, 164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풍차》를 미국으로 실어 가기 전에 이 그림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틀 동안 전시되었는데, 신문들은 하루 관람객이 약 1만 1000명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림이 영국으로 들어온 것은 1790년대에 오를레앙 공작 가문 컬렉션의 네덜란드 회화가 매각될 때였고, 1824년에는 이미 랜즈다운 후작 가문에 넘어가 그들의 영지 보우드에 있었다.

1911년 화상 아서 설리는,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피터 와이드너의 의뢰를 받아, 랜즈다운 후작에게 10만 파운드를 제시했다. 1911년 3월 9일 하원에서 재무부 측 대표는, 후작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나라에 같은 금액으로 먼저 살 권리를 남겨 두었고 자신도 5000파운드를 보태겠다고 약속했지만, 내셔널 갤러리 이사회에는 그만한 돈이 없고 공개 모금을 벌일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림을 런던에 남기자는 운동이 벌어졌는데도 1911년 4월 《풍차》는 와이드너에게 넘어갔다.

같은 4월 설리는 그림을 베를린으로 보내, 베를린 미술관들의 총관장 빌헬름 폰 보데 밑에서 일하던 복원가 하우저에게 맡겼다. 4월 10일 하우저는 바니시를 모두 벗겨 내면 그림을 망치게 된다고 전보를 보내고, 오른쪽 하늘과 물 위의 누런 얼룩만 없애자고 제안했다. 렘브란트의 작품이라는 귀속은 바로 그 1911년부터 여러 차례 의문에 부쳐졌고, 미술관은 이를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인정한다.

신들의 향연
신들의 향연조반니 벨리니, 1514,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어두운 보루의 커다란 덩어리 위에 옅은 연어 살빛 날개를 단 풍차가 서 있고, 아래 물가에서는 한 여인이 빨래를 하며, 오른쪽에서는 돛대를 내린 배 한 척이 물가로 다가온다. 물 위의 하늘이 은회색으로 드러난 것은 1977~1979년 미술관이 어둡게 변한 바니시를 벗겨 낸 세척 이후이며, 그 전까지 사람들은 이 하늘을 금빛 노란색으로 보았다.

12. 조반니 벨리니와 티치아노 《신들의 향연》, 1514~1529년

《신들의 향연》의 풍경은 두 부분이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인물들 뒤에는 가는 나무줄기들이 곧게 고른 줄을 이루고 그 사이로 밝은 하늘이 보이며, 왼쪽에는 구름 낀 푸른 하늘 아래 가파른 갈색 바위가 솟아 있다. 조반니 벨리니는 1514년에 이 그림을 그렸다. 아마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가 성 안에 있던 자신의 개인 서재, 사람들이 ‘설화석고의 방’이라 부르던 곳을 위해 주문했을 것이며, 이 그림은 공작이 그 방을 위해 주문한 바쿠스 축제화 가운데 첫 작품이었다. 당시 벨리니는 80세 무렵이었고 수십 년 동안 베네치아의 첫째가는 화가였으며,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그는 1516년에 세상을 떠났다.

미술관의 기술 조사 결과는 1990년 복원가 데이비드 불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조이스 플레스터스가 발표했는데, 이 조사에서 그림 속 세 사람의 손이 구별되었다. 페라라의 화가 도소 도시는 왼쪽에 있던 벨리니의 나무들을 건물이 선 언덕으로 바꾸고, 오른쪽 나뭇가지 위에 꿩 한 마리를 앉혔다. 1529년 무렵 벨리니의 제자 티치아노(그에 관해서는 《거울을 보는 비너스》 항목에서 다루었다)는 같은 방에 걸릴 자신의 바쿠스 축제화들과 그림이 어울리도록 이 부분을 바위와 구름으로 새로 그렸고, 도소의 작업 가운데서는 꿩 한 마리만 남겨 두었다. 미술관의 결론에 따르면 인물들은 벨리니가 그린 그대로 남았다.

주제는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일』에서 가져왔다. 바쿠스의 축제에서 프리아포스가 잠든 님프 로티스에게 몰래 다가가는데, 실레노스의 당나귀가 울어 대자 님프가 깨어나고 신들은 프리아포스를 비웃는다. 벨리니는 당나귀가 울기 직전의 순간을 그렸다. 오른쪽에서는 초록 윗옷을 입은 프리아포스가 몸을 굽혀 잠든 님프의 흰 옷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고, 왼쪽에서는 귀가 긴 당나귀의 머리가 사람들 위로 삐죽 솟아 있다.

그림들은 1598년까지 그 서재에 걸려 있었다. 알폰소 2세 데스테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죽자 페라라는 교황령에 넘어갔고,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이 서재의 그림들을 로마로 가져갔으며, 그곳에서 이폴리토 알도브란디니가 이를 물려받았다. 뒤에 《신들의 향연》은 로마의 카무치니 형제에게, 이어서 앤윅 성의 노섬벌랜드 공작에게 넘어갔고, 1921~1922년에는 작고한 피터 와이드너의 컬렉션을 위해 팔렸는데, 이 거래는 그의 아들 조지프가 맡았다.

신들의 향연
신들의 향연조반니 벨리니, 1514,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오른쪽 아래 나무 통에 핀으로 꽂힌 작은 종이쪽지에는 “joannes bellinus venetus p MDXIIII”, 곧 ‘베네치아인 조반니 벨리니가 1514년에 그렸다’라는 서명이 남아 있다.

같은 시기: 런던과 파리에서 그린 미국 화가들 (1940~1963)

화이트 심포니 1번: 하얀 소녀
화이트 심포니 1번: 하얀 소녀제임스 맥닐 휘슬러, 186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3. 제임스 맥닐 휘슬러 《화이트 심포니 1번. 하얀 소녀》, 1861~1863년, 1872년

1862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는 이 그림을 여름 전시회에 받아 주지 않았고, 휘슬러는 매슈 모건의 개인 화랑에서 그림을 선보였는데, 화랑은 윌키 콜린스의 인기 소설 제목을 따서 이 그림을 ‘흰옷을 입은 여인’이라고 광고했다. 휘슬러는 잡지 『애서니엄』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그림은 “흰 커튼 앞에 서 있는 흰옷 차림의 소녀를 그렸을 뿐”이라고 밝혔다. 1863년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단은 이 그림을 떨어뜨렸고, 그림은 ‘하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낙선전에 걸렸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걸린 바로 그 전시였다. 화가 앙리 팡탱라투르는 개막일에 휘슬러에게 편지를 보내, 이제 그가 유명해졌고 그림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 있으며 쿠르베가 이 그림을 환영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미국인 휘슬러는 파리에서 그림을 배웠고 1859년부터 런던에 살았는데, 이 그림은 1861~1862년 겨울 파리에서 그렸고 1872년에 고쳐 그렸다. 수수한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흰 커튼 앞에 전신으로 서 있고, 풀어 내린 짙은 적갈색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아래로 늘어뜨린 왼손에는 시든 꽃 한 송이를 줄기째 쥐고 있고, 발밑에는 머리가 달린 밝은 빛깔의 짐승 가죽이 깔려 있는데 그 머리는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며, 오른쪽 위 커튼에는 짙은 청색 물감으로 “Whistler 1862”라고 적혀 있다. 모델은 1860년대 휘슬러의 반려자이자 주요 모델이던 조애나 히퍼넌이었다.

1875년 그림은 볼티모어에 사는 화가의 조카에게 보내졌고, 1896년 코네티컷의 해리스 휘트모어가 그림을 샀으며, 1943년 휘트모어 가문의 회사가 ‘해리스 휘트모어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에 기증했다. 18세기 미국 초상화는 이미 1940년과 1942년에 멜런 재단이 미술관에 기증했고, 《하얀 소녀》는 멜런 일가의 테두리 밖에 있는 기증자가 미술관에 준 첫 19세기 미국 걸작이 되었다.

화이트 심포니 1번: 하얀 소녀
화이트 심포니 1번: 하얀 소녀제임스 맥닐 휘슬러, 1860,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스케이트 타는 사람
스케이트 타는 사람길버트 스튜어트, 1782,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4. 길버트 스튜어트 《스케이트 타는 사람(윌리엄 그랜트의 초상)》, 1782년

화가의 딸 제인 스튜어트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 이야기를 전한 것은 1877년, 초상이 그려지고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였다. 콩갈턴 출신의 젊은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그랜트는 전신 초상의 모델을 서려고 길버트 스튜어트를 찾아왔다가, 이렇게 추운 날에는 화가 앞에 앉아 있기보다 스케이트를 타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스케이트를 타러 갔는데, 미술관의 설명으로는 하이드 파크의 서펀타인 호수였다.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하자 스튜어트는 그랜트에게 자기 코트 자락을 붙잡으라고 하고는 그를 물가로 이끌어 냈다. 화실로 돌아온 스튜어트는 그랜트의 머리를 실물을 보고 그린 뒤, 그를 스케이트 타는 모습으로 그리자고 제안했다.

로드아일랜드 태생인 스튜어트는 1777년부터 런던에서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화실에서 일했다. 1782년 이 초상이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을 때, 훗날 그가 한 말에 따르면 그는 “그림 한 점으로 갑자기 명성을 얻었다”.

그랜트는 팔짱을 가슴 높이 끼고, 회색 모피 깃을 단 검은 코트에 챙 넓은 검은 모자 차림으로 거의 우리 쪽을 향해 미끄러져 오며, 지평선은 그의 허벅지 높이를 지난다. 하늘과 헐벗은 나무부터 가는 스케이트 자국이 난 어두운 얼음까지 그림은 거의 온통 회색이고, 따뜻한 빛깔은 그랜트의 분홍빛 얼굴과 물가에 있는 작은 붉은 인물들뿐이다. 오른쪽 나무 아래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몸을 숙이고 스케이트를 매고 있다.

초상은 그랜트의 후손들에게 남았고, 1950년 미술관은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런던의 존 스튜어트 보더위치 부인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거의 170년 동안 집안에 있는 사이, 이 그림은 1878년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으로 걸린 적도 있었다.

15. 존 싱글턴 코플리 《왓슨과 상어》, 1778년

왓슨과 상어
왓슨과 상어존 싱글턴 코플리, 1778,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상어가 벌린 아가리 앞에서 물 위에 등을 대고 떠 있는 창백하고 벌거벗은 소년은 이 그림을 주문한 브룩 왓슨이다. 1749년 14세이던 그는 아바나 항구에서 헤엄을 치다가 상어에게 두 번 공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종아리 살이 뜯겨 나갔고 다음에는 오른발이 물려 잘렸으며, 뒤에 그의 다리는 무릎 아래에서 절단되었다. 그는 세 번째 시도 만에 구조되었고, 코플리가 그린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왓슨은 뒷날 상업에 종사했고, 하원 의원을 지냈으며, 1796~1797년에는 런던 시장을 지냈다.

보스턴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였던 존 싱글턴 코플리는 1774년 미국을 떠나 런던에 자리 잡았고, 《왓슨과 상어》는 그곳에서 그린 그의 첫 대형 역사화가 되었다. 1778년 이 그림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상어에게 공격당하고 배에 탄 선원들에게 구조된 소년, 아바나 항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바탕을 둠’이라는 제목으로, 왓슨의 이름 없이 전시되었다.

배 안의 아홉 사람은 피라미드를 이룬다. 젊은 선원 둘은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어 소년의 손을 향해 팔을 뻗고, 고물에서는 머리칼을 휘날리는 젊은이가 긴 갈고리 장대를 상어 위로 치켜들었으며, 꼭대기에는 흰 셔츠를 입은 흑인 선원이 서서 소년의 치켜든 팔에 고리 모양으로 감긴 밧줄을 붙잡고 있다. 미술관은 이 선원에 관한 연구를 따로 내놓았다.

왓슨과 상어
왓슨과 상어존 싱글턴 코플리, 1778,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803년 8월 12일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왓슨은 이 그림을 “젊은이들에게 가장 유익한 교훈”으로 런던의 자선 학교 크라이스트 호스피털에 남기면서, 학교가 그림을 받는 것은 자기 아내가 죽은 뒤로 정했다. 왓슨은 1807년에 죽었고, 1819년 9월 28일 학교는 그림을 받아 대강당에 걸기로 결의했다. 1963년 학교는 이 그림을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팔았다.

코플리가 같은 1778년 자신이 가지려고 원작과 같은 크기로 다시 그린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에 있고, 1782년에 그린 작은 세로형 판본은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있다.

상속인들이 기증하고, 미술관이 사들이며 기증품을 검증하다 (1956~2022)

16. 에두아르 마네 《철도》, 1873년

1874년 프랑스의 풍자 화가 샴은 풍자 잡지 『샤리바리』에 《철도》를 비튼 그림을 실으면서, 이 가엾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그려진 꼴을 보고 달아나려 했지만 화가가 미리 쇠창살을 세워 길을 막아 두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그해 살롱의 심사위원단은 이 그림을 받아들였다.

철도
철도에두아르 마네, 1873,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짙은 청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펼친 책에서 눈을 들어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녀의 팔오금에서는 강아지가 잠들어 있다. 그 옆에서는 큰 하늘색 리본을 단 흰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쇠 울타리의 검은 창살을 붙잡고 서 있다. 울타리는 그림 전체를 가로지르고, 그 너머는 온통 흰 증기 구름으로 가득한데, 증기 사이로 높은 아치형 문이 달린 석조 건물이 드러난다. 연구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마네는 생라자르역 선로 위쪽의 정원에서 이 그림을 그렸고, 증기 너머로 보이는 문은 그의 화실 문이다. 마네는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이 여인을 그렸으며, 이 그림은 그녀가 마네를 위해 모델을 선 마지막 그림이 되었다.

마네에게서 이 그림을 산 사람은 그의 그림을 누구보다 많이 사들인 오페라 바리톤 가수 장바티스트 포르였고, 1881년 무렵 그림은 화상 뒤랑뤼엘에게 넘어갔으며, 1898년 뉴욕의 수집가 헨리와 루이진 해브마이어 부부가 이 그림을 샀다. 루이진은 1929년 컬렉션의 대부분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유증했지만 《철도》는 아들 호러스에게 돌아갔고, 1956년 호러스는 이 그림을 “어머니 루이진 W. 해브마이어를 기리며” 국립미술관에 유증했다.

마네가 1874년 살롱에 보낸 작품 가운데 심사위원단이 떨어뜨린 것은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였다. 이 그림도 워싱턴에 있는데, 1894년 헨리 해브마이어가 샀고 1982년 호러스의 미망인이 미술관에 기증했다.

철도
철도에두아르 마네, 1873,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에두아르 마네, 1873,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7. 메리 카사트 《뱃놀이》, 1893~1894년

체스터 데일의 유언은 그의 컬렉션에 속한 작품을 미술관이 외부에 대여하는 것을 금지한다. 월스트리트에서 채권을 거래하던 뉴욕 사람 데일은 화가이자 비평가였던 첫 아내 모드와 함께 프랑스 회화를 수집했고, 1955년부터 국립미술관의 회장을 지냈으며, 1962년 12월 세상을 떠나면서 미술관에 회화 약 240점을 남겼다. 그는 이 조건에 대해, 오래 별러 온 그림을 보려고 먼 길을 온 미국인이 그 자리에서 빈 벽과 ‘전시 대여 중’이라는 안내판만 보게 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펜실베이니아 태생의 메리 카사트는 1866년부터 프랑스에 살았고, 루이진 해브마이어에게 어떤 그림을 살지 조언했다. 카사트는 1893~1894년 겨울 앙티브에서 《뱃놀이》를 그렸고 적어도 1918년까지 직접 갖고 있었다. 그 뒤 그림은 뒤랑뤼엘에게 넘어갔고, 1929년 10월 1일 데일이 그 화랑의 뉴욕 지점에서 이 그림을 샀다.

뱃놀이
뱃놀이메리 카사트, 1893,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지네브라 데 벤치
지네브라 데 벤치레오나르도 다 빈치, 1476,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시점은 배 안, 노 젓는 사람의 어깨 바로 뒤쯤에 있다. 노 젓는 사람은 짙은 청색의 한 덩어리로 그림의 오른쪽 3분의 1을 통째로 차지하고, 밝은 노가 왼쪽 가장자리에서 한가운데를 지나 그의 손까지 이어진다. 맞은편 고물에는 커다란 노란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이 앉아 있고, 그녀의 무릎 위에서는 분홍 옷을 입은 묵직한 아이가 축 늘어진 채 노 젓는 사람을 바라본다. 배 안쪽은 평평한 레몬빛 초록으로 칠해져 있고, 흰 뱃전은 액자처럼 그림의 아래쪽 절반을 빙 두른다. 미술관은 이 평평한 색면과 낯선 시점을 카사트가 파리에서 연구한 일본 목판화와 연결한다.

1966년 《뱃놀이》는 미국의 5센트짜리 우표에 실렸다.

18. 레오나르도 다 빈치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1474~1478년경

복원가 마리오 모데스티니는 이 그림에 맞추어 특별히 만든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여행 가방에 《지네브라 데 벤치》를 넣고 스위스항공 100편으로 미국까지 날라 왔으며, 비행기 안에서 그림이 놓일 좌석은 ‘모데스티니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반 관람객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다.

월계수, 종려나무, 향나무로 된 화환과 'Virtutem Forma Decorat' 명문이 새겨진 두루마리 [뒷면]
월계수, 종려나무, 향나무로 된 화환과 'Virtutem Forma Decorat' 명문이 새겨진 두루마리 [뒷면]레오나르도 다 빈치, 1474,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967년 2월 10일 미술관은 리히텐슈타인 공 프란츠 요제프 2세에게서 이 초상을 샀는데, 그는 그 무렵 집안 컬렉션의 다른 그림들도 팔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값이 약 500만 달러로, 그때까지 그림 한 점에 치른 값으로는 가장 많았고, 돈은 미술관 설립자의 딸 에일사 멜런 브루스의 기금에서 나왔다(그녀와 그녀의 남동생에 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다룬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아마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1세 공 시절인 1712년 이전에 피렌체에서 이 초상을 샀을 것이다. 1733년 패널 뒷면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둥근 붉은 봉랍 인장이 찍혔으니, 이해에는 초상이 확실히 그들의 소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림은 빈에서 파두츠로 옮겨졌다.

피렌체의 은행가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 지네브라는 1474년 16세에 루이지 니콜리니와 결혼했다. 미술관은 피렌체 주재 베네치아 대사이자 그녀를 플라토닉하게 흠모했던 베르나르도 벰보가 이 초상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적외선 촬영으로 뒷면의 지네브라 표어 밑에서 벰보 자신의 표어 VIRTUS ET HONOR가 발견되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때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나이로 피렌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 그림은 그가 처음 그린 유화 가운데 하나다.

지네브라의 얼굴은 창백해 거의 도자기 같고, 눈꺼풀은 무겁고, 입술은 꼭 다물려 있다. 머리 뒤로는 어둡고 가시 돋친 향나무 덤불이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물과 멀리 가느다란 첨탑 두 개가 보이는 풍경이 열린다. 미술관은 당시 여인의 초상은 방 안에서 창밖 풍경과 함께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레오나르도는 지네브라를 야외로 데리고 나왔다고 지적한다. 초상에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패널의 아래쪽이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손이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윈저에 있는 여인의 손 소묘를 《지네브라》와 연결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영국 왕실 컬렉션은 그 소묘를 1490년 무렵, 초상보다 한참 뒤의 것으로 본다.

뒷면에는 반암을 흉내 낸 짙은 붉은 바탕 위에 향나무 잔가지를 둘러싼 월계수와 종려나무 화환이 그려져 있고, 그 사이로 VIRTVTEM FORMA DECORAT, 곧 ‘아름다움은 미덕을 꾸민다’라는 글귀가 적힌 띠가 감겨 있다. 월계수와 종려나무의 줄기는 아래 가장자리 너머로 사라져 서로 만나지 않는데, 패널과 함께 화환의 아랫부분도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파라솔을 든 여인 – 모네 부인과 아들
파라솔을 든 여인 – 모네 부인과 아들클로드 모네, 187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19. 클로드 모네 《파라솔을 든 여인. 모네 부인과 아들》, 1875년

미술관 설립자의 아들 폴 멜런은 1967년, 자신과 아내 버니는, 그리고 누나 에일사 멜런 브루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늘 자연과 야외 생활을 사랑해 왔으며 어쩌면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폴 멜런(1907~1999)은 50년 가까이 미술관 이사회에 몸담으며 이사회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누나 에일사 멜런 브루스(1901~1969), 앤드루 멜런 재단과 함께 동관 건립 비용을 댔으며, 미술관에 1000점이 넘는 작품을 넘겼다. 그는 ‘버니’라고 불리던 아내 레이철과 함께 수집했고, 함께 살고 싶고 늘 곁에 두고 보고 싶은 것만 샀다.

1965년 6월 15일 파리의 화상 엑토르 브람이 갈리에라 궁에서 열린 조르주 메니에 컬렉션 경매에서 그를 위해 《파라솔을 든 여인》을 샀고, 1983년 폴과 버니 멜런 부부는 이 그림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모네의 아내 카미유가 풀이 덮인 둔덕 꼭대기에 서 있고, 그 모습은 온전히 하늘을 배경으로 한다. 그녀가 입은 흰 드레스의 그늘진 쪽은 하늘색과 연보라색, 보라색으로 칠해졌고, 오른손에는 초록 파라솔을 들었으며, 바람이 투명한 베일을 그녀의 얼굴로 날리며 오른쪽으로 끌고 간다. 두 사람의 아들 장은 그녀 뒤쪽 비탈 아래에 서 있는데, 풀에 가려 허리 위만 보인다. 모네는 1875년 여름, 당시 살던 아르장퇴유 근처에서 이들을 그렸고, 오른쪽 아래에 “Claude Monet 75”라고 서명했다.

1876년 이 그림을 모네에게서 처음 산 사람은 파리의 의사 조르주 드 벨리오로, 모네의 그림을 가장 꾸준히 사들인 사람 가운데 하나였으며, 2년 뒤 바로 그 드 벨리오가 《인상, 해돋이》를 210프랑에 샀다.

20.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공방 《피리 부는 소녀》, 1669~1675년경

2022년 10월, 2년 동안 《피리 부는 소녀》의 안료와 촬영 이미지를 연구해 온 국립미술관의 큐레이터와 보존가, 과학자들은 이 그림을 페르메이르가 그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미술관은 작가 표기를 ‘페르메이르 공방’으로 바꾸었다. 같은 해 『네덜란드 미술사학자 저널』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페르메이르의 기법을 속속들이 알고 그의 작업 순서를 한 단계씩 되밟았지만, 단계마다 더 거칠게 처리했다. 그는 회색의 거친 바탕칠을 한 참나무 패널에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바탕칠은 조사된 다른 페르메이르 작품 어디에도 없으며, 페르메이르 자신은 대개 캔버스에 그렸다.

피리 부는 소녀
피리 부는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공방, 167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빨간 모자를 쓴 소녀
빨간 모자를 쓴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9,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피리 부는 소녀
피리 부는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공방, 167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소녀는 회색, 흰색, 갈색 줄무늬가 있는 넓은 원뿔형 모자 아래에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얼굴은 거의 다 초록빛 그늘에 잠겨 있으며 왼쪽 뺨과 코만 넓은 분홍빛 면으로 밝게 빛난다. 살짝 벌린 붉은 입술 사이에는 푸르스름한 초록빛 하이라이트 점이 하나 찍혀 있는데, 연구자들은 하이라이트에 주변 사물의 색을 입히던 페르메이르의 습관을 잘못 이해하고 따라 한 흔적을 여기서 본다. 금빛 피리를 쥔 손가락에는 마디가 거의 없고, 왼쪽 의자의 꼭지 장식은 빛 얼룩 몇 개로 바뀌어 있다. 1937년 멜런이 미술관에 기증한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서는 같은 의자에 몇 번의 붓질로 사자 머리가 그려져 있으며, 이 그림은 같은 검증을 통과했다.

1923년 조지프 와이드너가 《피리 부는 소녀》를 샀고, 1942년 그의 기증품과 함께 미술관에 들어왔을 때 이 그림은, 연구자들의 표현으로는 미술관의 다섯 번째 페르메이르로 환영받았다. 같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다섯 점 가운데 멜런 컬렉션의 《미소 짓는 소녀》와 《레이스 뜨는 여인》 두 점은 1974년의 조사에서 20세기의 위작으로 판정되었다.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미술관은 국립미술관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2022년 11월 1일 발표한 페르메이르 전시 출품작 목록에서 레이크스미술관은 《피리 부는 소녀》를 1664~1667년의 페르메이르 작품으로 올렸고, 회화부장 피터르 룰로프스는 미술관이 이 그림을 “진짜 페르메이르로” 걸겠다고 말했으며, 2023년 레이크스미술관은 실제로 그렇게 전시했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들

멜런이 에르미타주에서 사들인 그림 가운데 이 미술관에는 기사가 다리에 가터 훈장의 가터를 매고 있는 라파엘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 보티첼리의 《동방박사들의 경배》, 렘브란트의 《폴란드 귀족》, 페루지노의 《골리친 세폭화》도 있다. 데일의 유증품 가운데서는 피카소의 《곡예사 가족》, 마네의 《늙은 음악가》, 르누아르의 《물뿌리개를 든 소녀》를 찾아볼 만하다. 에일사 멜런 브루스의 기증품 가운데에는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가 있는데, 2015년 이 그림 아래에서 처음에 그렸던 다른 인물이 발견되었다. 1961년 크레스 재단은 그뤼네발트의 《작은 십자가 처형》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20세기 미술은 건축가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동관에 모여 있는데, 로스코와 폴록의 《라벤더 안개》에서 콜더의 모빌까지 아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