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과 천사들과 함께 옥좌에 앉은 성모자
성인과 천사들과 함께 옥좌에 앉은 성모자조반니 벨리니, 1480, 아카데미아 미술관

1810년 5월 31일 베네치아의 산 조베 수도원이 폐쇄되었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수도원으로 옮겨 갔다. 조반니 벨리니의 제단화는 텅 빈 성당의 오른쪽 두 번째 제단에, 연구자들이 거의 이견 없이 피에트로 롬바르도와 그의 공방 작품으로 보는 돌 액자 안에 그대로 남았다. 1812년 패널은 보호를 위해 제단에서 내려졌고, 1815년 미술 아카데미의 갤러리로 옮겨졌으며, 액자는 성당에 남았다.

아카데미는 1750년에 세워졌고, 1807년 나폴레옹의 칙령으로 새로 설립되어 폐쇄된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신도회의 건물과 그 성당, 그리고 이웃한 라테라노 수도참사회의 수도원에 자리 잡았다. 이 수도원의 한쪽 날개는 팔라디오가 짓기 시작했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문을 닫은 성당과 수도원과 신도회에서 그림들이 이리로 모여들었고, 뒷날에는 베네치아의 귀족 가문들이 자기네 컬렉션을 갤러리에 기증하거나 유증하기 시작했다. 갤러리는 아카데미 회장 레오폴도 치코냐라 시절인 1817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공화국의 제단과 법정 (14~15세기)

1. 파올로 베네치아노 《성모 대관 다폭 제단화》

성모 대관 다폭 제단화
성모 대관 다폭 제단화파올로 베네치아노, 1330, 아카데미아 미술관

1808년 이 다폭 제단화의 가운데 패널은 이 제단화에 속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받고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양옆 날개 패널과 액자는 1812년 아카데미로 들어왔고, 1828~1829년 복원 때 비어 있던 가운데 자리에 다른 화가의 《대관》이 끼워졌다. 베네치아 산타녜세 성당의 주임 사제 스테파노가 그리고 서명과 함께 1381년이라는 날짜를 적은 그림이다. 다폭 제단화는 백 년 넘게 남의 그림을 가운데에 단 채 전시되었다. 1950년 파올로 베네치아노의 패널이 브레라에서 돌아왔고, 제단화는 다시 조립되었다.

이 제단화는 베네치아의 클라라회 수녀원인 산타 키아라 수녀원을 위해 그려졌는데, 옛 재산 목록들과 윗줄에 그려진 성녀 클라라와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장면들로 이를 알 수 있다. 수녀원은 1806년에 폐쇄되었다. 제작 시기는 1330년대부터 14세기 중엽까지 연구자마다 다르게 본다. 파올로는 아들들과 함께 일하는 가족 공방을 꾸렸고, 그가 서명하고 날짜를 적은 첫 작품인 비첸차의 다폭 제단화는 1333년의 것이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는 오른손으로 마리아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마리아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 모두 금빛 꽃무늬가 빈틈없이 짜여 들어간 어두운 옷을 입었다. 옥좌 뒤로는 금빛 별이 박힌 파란 띠가 반원을 그리고, 그 위 금빛 바탕에는 류트와 비올을 든 천사들이 빼곡하며, 옥좌 발치에는 얼굴이 그려진 작은 금빛 해와 초승달이 보인다. 가운데 패널은 비잔티움의 본보기를 따라 엄격하게 그려졌다. 탄생과 세례에서 십자가 처형과 승천에 이르는 날개 패널의 작은 장면들에서는 인물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사건이 차례차례 펼쳐지며, 연구자들은 이 화풍의 차이를 언제나 지적해 왔다.

윗줄 오른쪽의 성 프란치스코의 죽음 장면에서는 아래쪽 가운데에 작고 어두운 인물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다. 이탈리아 국가 문화재 목록은 이 인물을 제단화를 주문한 수녀로 보고, 역사가 엘레나 할라프는 2024년, 딸이 수녀원에 들어갈 때 제단화를 수녀원에 기증한 부유한 과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2. 야코벨로 델 피오레 《정의의 세 폭 제단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사이 옥좌에 앉은 정의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사이 옥좌에 앉은 정의야코벨로 델 피오레, 1421,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공화국의 법정 가운데 하나인 마지스트라토 델 프로프리오는 도제의 궁전, 곧 두칼레 궁전에서 열렸고, 1421년 그 방을 위해 나랏돈으로 패널 세 개가 그려졌다. 그린 사람은 화가 프란체스코 델 피오레의 아들 야코벨로 델 피오레였다. 이 무렵 야코벨로는 공화국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1415년에는 화가 조합의 우두머리를 맡았다.

가운데에는 관을 쓴 정의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앉아 있고, 왼손에 든 저울의 두 접시는 나란히 수평을 이룬다. 단의 양쪽 모서리에는 사자 두 마리가 앉아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정의의 머리 위로 라틴어 시를 적은 띠가 이어지는데, 시에서 말하는 이는 정의 자신이다. 천사들의 가르침과 거룩한 말씀을 따르겠으며, 경건한 이에게는 너그럽고 악한 이에게는 적이 되며 교만한 이에게는 오만하게 대하겠다는 내용이다. 왼쪽에서는 대천사 미카엘이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들고 빈 접시가 달린 저울을 들고 있는데, 그 저울 끈을 향해 아래에서 갈고리 발톱이 달린 발 하나가 뻗어 올라온다. 오른쪽에서는 맨발의 가브리엘이 백합을 들고 정의를 향해 걸어온다.

세 패널의 바탕은 모두 거의 검은 짙은 파란색이다. 야코벨로는 금을 갑옷과 후광과 관과 문양에만 아껴 썼고, 석고 반죽으로 모양을 빚은 뒤 그 위에 금을 입혀 도드라지게 올렸다. 그래서 미카엘의 갑옷과 정의의 가슴받이에서는 금이 물감 위로 솟아 있다.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사이 옥좌에 앉은 정의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사이 옥좌에 앉은 정의야코벨로 델 피오레, 1421, 아카데미아 미술관

정의 곁에 수태고지의 천사 가브리엘이 있는 까닭을 일부 연구자들은 연도로 설명한다. 전설에 따르면 베네치아는 421년 3월 25일, 성모 영보 대축일에 세워졌고, 1421년은 도시가 세워진 지 천 년이 되는 해였다. 세 폭 제단화는 법정의 사무실에 약 네 세기 반 동안 걸려 있다가 1884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어왔다.

야코벨로의 서명은 왼쪽, 사자와 칼 사이에 있다. 옛 사진에서는 이 자리에 큰 대문자로 쓴, ‘야코벨로 델 피오레가 1421년에 그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가 읽히는데, 1955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도록을 쓴 산드라 모스키니 마르코니는 이것을 뒷날 덧쓴 글씨라고 했다. 복원을 마친 뒤 미술관이 찍은 사진에서는 같은 자리에 고딕 소문자로 쓴 ‘1421’과 ‘야코벨루스’가 겨우 드러난다.

3. 조반니 벨리니 《산 조베 제단화》

벨리니는 패널 위에 예배당 하나를 그렸다. 격자 칸마다 금빛 장미 장식이 박힌 원통형 궁륭이 안쪽 앱스까지 깊숙이 이어지고, 앱스의 반구형 천장은 산 마르코 대성당처럼 금빛 모자이크로 덮여 있으며, 그 가장자리를 따라 ‘더럽혀지지 않은 정결의 동정 꽃이여, 기뻐하소서’로 시작하는 라틴어 글귀가 이어지다가 끝부분이 아치에 잘린다. 양옆의 조각 장식 벽기둥은 실제 돌 액자의 벽기둥을 그대로 되풀이했으므로, 신자들에게는 그려진 예배당이 성당의 돌 제단에서 곧장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벨리니는 시점을 낮게 잡았고, 그래서 인물들은 높이 솟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보던 대로 아래에서 올려다보인다.

성인과 천사들과 함께 옥좌에 앉은 성모자
성인과 천사들과 함께 옥좌에 앉은 성모자조반니 벨리니, 1480, 아카데미아 미술관
산 카시아노 제단화
산 카시아노 제단화안토넬로 다 메시나, 1475, 미술사 박물관

마리아는 하얀 대리석 옥좌 높이 앉아 있고, 벌거벗은 아기는 그 무릎 위에 있다. 왼쪽에는 갈색 수도복을 입고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프란치스코, 그 뒤에 거의 가려진 세례자 요한, 그리고 허리에 천 하나만 두른 늙은 욥이 서 있다. 오른쪽에서는 도미니코가 빨간 표지의 책을 읽고, 화살 두 대에 꿰뚫린 젊은 세바스티아노가 성모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맨 가장자리에는 주교관을 쓴 툴루즈의 주교 루도비코가 서 있다. 옥좌 계단에서는 천사 셋이 류트 두 대와 바이올린을 닮은 리라 다 브라초를 연주한다. 빛은 왼쪽에서 들어와 세바스티아노와 욥의 몸 왼쪽을 비춘다.

1475~1476년 베네치아에서는 시칠리아 출신의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일했다. 그가 산 카시아노 성당을 위해 그린 제단화는 조각들만 빈에 남아 있는데, 그 제단화에서 성모와 성인들은 한 공간에 서 있었고 유화로 그려졌다. 산 조베 제단화는 이에 대한 벨리니의 응답으로 여겨지며, 그 뒤로 베네치아의 제단화는 오랫동안 같은 틀에 따라 짜였다. 이 그림을 언제 그렸는지는 1478년부터 1480년대 말까지 의견이 갈린다.

1815년 이후 패널의 위쪽이 잘려 나갔다. 잘리기 전인 1815년에 잰 치수를 보면 패널은 지금보다 약 반 미터 더 높았고, 그려진 궁륭의 일부가 그때 사라졌다. 패널은 가로로 놓인 포플러 판자 13장을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그 이음매를 따라 앱스의 모자이크를 지나고 마리아의 손 높이를 지나며 그림 전체를 가로지르는 긴 균열이 나 있다.

신도회가 그림으로 주문한 도시 (1496~1566년)

4. 젠틸레 벨리니 《산 마르코 광장의 행렬》

산 마르코 광장의 행렬
산 마르코 광장의 행렬젠틸레 벨리니, 1496, 아카데미아 미술관

1444년 4월 25일 성 마르코 축일, 베네치아의 신도회들이 성유물을 들고 행렬을 지어 걷던 날, 아들이 크게 다친 브레시아 상인 야코포 데 살리스가 산 마르코 광장에 왔다. 데 살리스는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신도회가 들고 가던 성십자가 조각의 성유물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들이 나아 있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신도회를 스쿠올라라고 불렀다. 상인과 장인들의 평신도 단체였고, 가장 부유한 스쿠올라들은 큰 홀을 갖춘 자기 건물이 있었다.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스쿠올라는 1369년 성십자가 조각을 얻었고, 1490년대에는 그것을 모셔 둔 홀을 위해 성유물의 기적을 그린 큰 캔버스 연작을 주문했다. 아홉 점 가운데 여덟 점이 전해지며, 그중 세 점을 젠틸레 벨리니가 그렸다. 이 그림은 기적이 일어나고 52년이 지난 1496년에 완성되었고, 젠틸레는 광장을 그 무렵의 모습 그대로 그렸다.

이 거대한 캔버스에서 상인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림의 폭 전체를 가로질러 흰 겉옷을 입은 신도회원들이 금박 촛대에 꽂은 키 큰 초를 들고 걸어가고, 가운데보다 조금 왼쪽에서는 금빛 성유물함을 막대에 얹어 메고 간다. 그 바로 오른쪽, 그들의 등 뒤에 빨간 옷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행렬의 앞줄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

산 마르코 광장의 행렬
산 마르코 광장의 행렬젠틸레 벨리니, 1496, 아카데미아 미술관
리알토 다리에서의 성십자가의 기적
리알토 다리에서의 성십자가의 기적비토레 카르파초, 1496, 아카데미아 미술관

젠틸레는 화가 야코포 벨리니의 큰아들이자, 산 조베 제단화를 그린 조반니의 형이었다. 1469년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고, 1479~1480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궁정을 위해 일했다. 젠틸레 자신은 다른 신도회인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의 회원이었다. 1806년 스쿠올라들이 폐쇄된 뒤 이 캔버스는 1820년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광장 위로는 초록빛 도는 회색 돔 다섯 개와 금박을 입힌 고딕 소탑들을 얹은 산 마르코 대성당이 서 있고, 정문마다 그 위에 금빛 모자이크가 있다. 오른쪽에는 분홍 돌과 흰 돌을 마름모꼴로 쌓은 두칼레 궁전의 모서리가 보인다. 대성당 정문 위의 모자이크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맨 왼쪽 정문 위의 하나뿐이고, 나머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무엇보다 이 캔버스를 통해 알려져 있다.

5. 비토레 카르파초 《리알토 다리에서 일어난 성십자가 유물의 기적》

당시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길이던 리알토의 나무다리를 그린 화가는 여럿이지만, 가장 자세히 그린 사람은 카르파초다. 그림에서 다리는 안쪽 깊숙한 곳에서 운하를 가로지르는데, 양쪽은 널빤지를 깐 구간이고 가운데에는 난간 달린 도개 부분이 들어 올려져 있으며, 그 위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이 다리는 1524년에 무너졌다.

이 캔버스도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신도회를 위한 성십자가 유물의 기적 연작에 속했고, 당시 서른을 넘긴 카르파초는 연배가 위인 젠틸레 벨리니와 나란히 이 연작을 그렸다. 여기서는 총대주교 프란체스코 퀘리니가 성유물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다. 카르파초는 기적을 왼쪽 위 구석, 2층의 트인 로지아에 두었다. 거기서 사제가 금빛 성유물함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젊은이를 사람들이 양팔을 붙들어 부축한다. 로지아 아래 강둑에서는 아무도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그곳에는 빨간 옷과 파란 옷의 귀족들이 서 있고, 주랑 아래에는 흰 터번을 쓴 상인들이 있으며, 그들 발치에 포도주 통이 놓여 있다.

운하는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 다리를 향해 대각선으로 뻗어 있고, 검은 곤돌라로 빽빽하다. 가운데 아래쪽 가까이에는 빨간 웃옷에 흰 깃털을 꽂은 빨간 모자를 쓰고 알록달록한 체크무늬 긴 양말을 신은 흑인 곤돌라 사공이 곤돌라 위에 서서 긴 노로 배를 민다. 오른쪽 아래의 다른 곤돌라에는 하얀 강아지가 앉아 있고, 지붕 위로는 깔때기 모양의 굴뚝들이 솟아 있으며, 장대에는 빨래가 마르고 있다. 이 캔버스는 젠틸레의 《행렬》과 함께 1820년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리알토 다리에서의 성십자가의 기적
리알토 다리에서의 성십자가의 기적비토레 카르파초, 1496, 아카데미아 미술관
성 우르술라의 꿈
성 우르술라의 꿈비토레 카르파초, 1495, 아카데미아 미술관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서 흑인 곤돌라 사공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연구한 역사가 케이트 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이에게 이 일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는 길이었다고 본다.

6. 비토레 카르파초 《성 우르술라의 꿈》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은 1869년 이 그림을 처음 보았고, 1872년 7월 《포르스 클라비게라》라는 이름으로 연재하던 편지 가운데 한 통에서 이 그림을 묘사했다. 그는 방과 침대와 신발, 그녀의 하얀 강아지, 그리고 거의 인형 같다고 한 천사를 하나하나 꼽았다.

우르술라는 빨간 이불을 덮고 오른손을 뺨 밑에 괸 채 반듯이 누워 있고, 머리에는 가는 금 머리띠를 둘렀다. 관은 침대 발치 단의 계단에 놓여 있고, 파란 신발은 바닥에 있으며, 아래쪽 가장자리의 개는 몸의 일부만 보인다. 오른쪽으로 긴 종려나무 가지를 든 천사가 들어오고, 그의 등 뒤 문간은 빛으로 가득하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는 꿈속에서 우르술라에게 앞으로 닥칠 순교를 알린다. 창턱에는 화분 두 개가 놓여 있는데, 하나는 도금양이고 하나는 카네이션이다.

카르파초는 성 우르술라 스쿠올라를 위해 우르술라 이야기를 담은 캔버스 아홉 점을 그렸다. 도미니코회의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에 홀이 붙어 있던 작은 신도회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 맡은 큰 주문이었다. 신도회가 폐쇄된 뒤 캔버스들은 1812년 아카데미로 들어왔고, 아홉 점 가운데 가장 많이 손상된 《꿈》은 1852년에야 전시되었다.

1876년 러스킨은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한 증언에 따르면 아카데미는 그가 모사할 수 있도록 그림을 벽에서 내려 방 하나를 내주었다. 가까이에서 보고 나서 그는 주제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1876년 11월의 편지에서 그는 천사를 죽음의 천사라고 불렀고, 1872년에 천사 손에 든 두루마리로 여겼던 것을 수의라고 했으며, 그림이 걸려 있던 높이에서는 이 표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고 주석에서 설명했다.

1876년 크리스마스에 캐슬타운 부인은 러스킨에게 카네이션 화분 하나를 보냈다. 카르파초가 성 우르술라의 침실 창턱에 그린 것과 꼭 같은 카네이션이었고, 러스킨은 그것을 성녀가 몸소 보낸 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성 우르술라의 꿈
성 우르술라의 꿈비토레 카르파초, 1495, 아카데미아 미술관

7. 야코포 틴토레토 《노예를 풀어 주는 성 마르코》

성 마르코가 머리를 아래로 한 채 하늘에서 내리꽂힌다. 맨발은 그림 맨 위 가장자리에 닿아 있고, 분홍 튜닉과 주황 망토가 펄럭이며, 책은 몸에 꼭 붙였고, 얼굴은 그늘 속에 있다. 그 아래에는 벌거벗은 노예가 그림을 가로질러 반듯이 누워 있다. 주위에는 쪼개진 말뚝, 도끼, 망치, 밧줄이 흩어져 있고, 흰 터번에 올리브색 긴 옷을 입은 남자가 망치와 부러진 자루 조각을 머리 위로 들어 주인에게 보여 준다. 흰 수염에 진홍색 옷을 입은 주인은 단 위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야기는 《황금 전설》에서 왔다. 프로방스의 한 귀족이 허락도 없이 베네치아로 가서 성 마르코의 유해에 참배했다는 이유로 자기 노예를 고문하라고 명령했는데, 성인이 나타나자 고문 도구들이 부서졌다.

노예의 기적
노예의 기적야코포 틴토레토, 1547,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성 마르코의 시신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성 마르코의 시신야코포 틴토레토, 1564, 아카데미아 미술관

1547년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는 참사회 홀에 걸려고 이 그림을 주문했다. 틴토레토는 서른 살 무렵이었고, 큰 스쿠올라에서 받은 첫 주문이었다. 같은 해 이 신도회에서는 훗날 화가의 장인이 되는 마르코 에피스코피가 직책을 맡고 있었다. 1548년 4월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벌써 이 새 캔버스에 대해 틴토레토에게 편지를 썼고, 무엇보다 노예를 칭찬했다. 그에 따르면 노예는 빛깔이 살결 그대로이고 윤곽이 둥글며 몸이 살아 있었다. 편지는 가시 돋친 말로 끝난다. 틴토레토가 작업의 빠르기를 작업의 끈기로 바꾼다면 그 이름은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다.

베네치아 회화사를 쓴 카를로 리돌피는 백 년 뒤인 1648년에 이 그림에 대해 썼고, 그의 이야기는 전승으로 여겨진다. 리돌피에 따르면 신도회원들은 이 그림을 두고 다투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림을 원하고 어떤 이들은 원하지 않았으며, 기분이 상한 틴토레토는 캔버스를 벽에서 떼어 자기 집으로 가져가게 했고, 그림은 나중에 다시 걸렸다.

1797년 프랑스군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갔고, 그림은 1815년에야 돌아왔다. 그사이 신도회가 폐쇄되었으므로 캔버스는 1816년부터 아카데미에 있고, 신도회 건물에는 군 병원이 들어섰다.

8. 야코포 틴토레토 《성 마르코 시신의 구출》

라벤나 출신의 의사이자 점성가 토마소 랑고네는 1562년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의 최고 책임자였다. 6월 21일 그는 신도회로부터 성 마르코의 기적을 그린 그림 세 점을 자기 돈으로 주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세 점은 틴토레토가 그렸고, 세 점 모두에 랑고네의 초상이 들어 있다. 그 무렵 베네치아 산 줄리아노 성당의 문 위에는 이미 야코포 산소비노가 만든 랑고네의 청동상이 앉아 있었다.

여기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이 태우려던 장작더미에서 복음사가의 시신을 옮겨 가고, 갑자기 몰아친 폭풍이 박해자들을 흩어 놓는다. 시신은 오른쪽에서 가파른 대각선을 따라 옮겨지고, 머리는 창백하며 눈은 감겨 있다. 성인의 머리 바로 뒤에는 긴 흰 수염을 기르고 담비 모피를 댄 금갈색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서서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이 사람이 랑고네다. 왼쪽 절반은 텅 빈 광장이 차지하고, 포석은 저 멀리 건물까지 이어지며, 왼쪽 아케이드 아래로는 창백하고 거의 투명한 인물들이 달아난다. 가운데에는 장작으로 쌓아 둔 섶나무 더미가 어둡게 보이고, 오른쪽에서는 낙타가 털북숭이 머리를 돌리며, 붉은 갈색 하늘에는 가는 번개가 지그재그로 내리친다.

1573년 새 책임자가 들어서자 신도회원들은 그림에 랑고네가 너무 많다고 여겨, 초상을 지우라며 캔버스들을 틴토레토에게 돌려보냈다. 그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랑고네는 제자리에 남았다.

신도회는 1807년에 폐쇄되었고, 그림은 산소비노가 지은 마르차나 도서관의 홀로 옮겨졌다. 19세기에 그곳에서 캔버스의 왼쪽이 잘려 나갔고 장작더미 위에는 아케이드가 덧칠되었으며, 그 뒤로 이 주제는 《성 마르코 시신의 탈취》라고 불리게 되었다. 1920년 그림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어왔다. 나중에 덧칠이 벗겨졌고, 섶나무는 다시 보이게 되었다.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성 마르코의 시신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성 마르코의 시신야코포 틴토레토, 1564, 아카데미아 미술관

잘려 나간 곳은 왼쪽 가장자리였다. 아래 구석에는 한 남자가 반듯이 누워 연보랏빛 도는 분홍 망토 자락을 주먹에 쥐고 있는데, 그 망토를 입은 사람은 이제 캔버스에 없다.

수도원 식당과 무덤 (1573~1576년)

9. 파올로 베로네세 《레위 가의 향연》

1573년 7월 18일 베네치아 종교 재판소는 파올로 베로네세를 심문하며, 그의 《최후의 만찬》에 어릿광대, 술꾼, 독일 사람, 난쟁이 같은 온갖 점잖지 못한 것들이 왜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림은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수도원의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자기네 식당에 걸려고 주문한 것으로, 1571년 그곳 화재 때 불탄 티치아노의 《최후의 만찬》을 대신할 그림이었다.

레위 가의 향연
레위 가의 향연파올로 베로네세, 1573, 아카데미아 미술관

심문관들은 코피를 흘리는 하인, 독일식 차림의 미늘창병, 앵무새와 개들에 대해 물었고, 독일을 비롯해 이단에 물든 여러 지방에서는 이런 그림으로 교회를 조롱한다고 일깨웠다. 베로네세는 미늘창병들이 만찬이 벌어지는 방 바깥에 서 있고, 부유한 주인의 집에는 그런 하인들이 있게 마련이며, 화가들은 시인이나 미치광이와 같은 자유를 누린다고 답했다. 재판소는 그에게 석 달 안에 자기 돈으로 그림을 고치라고 명했다.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에 따르면 베로네세는 아무것도 다시 그리지 않고 그림에 새 제목을 붙였다. 계단이 가운데 부분에 닿는 두 받침대에는 ‘레위가 주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다’라는 라틴어 글귀와 ‘루카 복음서 5장’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루카 복음서 5장은 그리스도가 세리 레위의 집에서 식사하는 대목이다. 같은 받침대의 밑단에는 1573년 4월 20일이라는 날짜가 있다.

그리스도는 세 아치 가운데 가운데 아치 아래, 긴 식탁 한복판에 분홍 옷과 청록색 망토 차림으로 앉아 있다. 레이스 단을 두른 식탁보 밑에는 줄무늬 고양이가 누워 있고, 식탁 앞에는 개들이 앉아 있다. 앞쪽에서는 붉은 주황색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쓴 작은 어릿광대가 초록 앵무새를 들고 있고, 오른쪽 계단에는 줄무늬 웃옷을 입은 병사 둘이 서 있는데, 한 사람은 유리잔으로 붉은 포도주를 마신다.

레위 가의 향연
레위 가의 향연파올로 베로네세, 1573,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에타
피에타티치아노, 1575, 아카데미아 미술관

1797년 프랑스군이 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갔다. 1815년 그림은 돌아왔지만 수도원은 이미 폐쇄된 뒤였고, 캔버스는 아카데미에 넘겨졌다. 심문에서 베로네세는 수도원장이 그보다 먼저 개를 막달라 마리아로 바꾸어 달라고 했지만 자기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의 말로는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보기 좋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 티치아노 《피에타》

카를로 리돌피의 이야기에 따르면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자기 무덤을 위해 그렸다. 화가는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과, 그 성당의 십자가 예배당에 자신을 묻어 주는 대신 그 제단에 《피에타》를 내놓기로 합의했다. 그림은 1575년 잠시 프라리 성당에 놓였지만 약속한 제단은 아니었고, 교황 대사의 명령으로 티치아노에게 돌려보내졌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북쪽 산악 지대의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서, 《피에타》를 그릴 무렵 그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거나 어쩌면 아흔 가까이였다. 반세기 넘게 그는 베네치아 제일의 화가였고, 황제 카를 5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림을 그렸으며, 뒷날 아카데미가 들어선 건물의 주인인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신도회를 위해서는 《피에타》보다 40년 앞서 《성전에 바쳐지는 성모》를 그렸다.

마리아는 돌 벽감 안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고 앉아 있고, 그 위의 금빛 반구형 천장에는 옛 믿음에 따라 제 피로 새끼를 먹인다는 펠리컨이 있다. 왼쪽의 막달라 마리아는 손을 치켜들고 입을 벌린 채 그림 밖으로 곧장 걸어 나온다. 오른쪽에는 흰 수염의 대머리 노인이 거의 벌거벗은 채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에게 몸을 숙여 그의 손 밑에 자기 손을 받쳤다. 전통적으로 이 노인은 니코데모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모습을 한 티치아노의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물감은 거칠고 툭툭 끊기는 붓질로 발려 있고, 많은 부분이 윤곽만 잡혀 있다.

1575년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고, 1576년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봉헌물로 바꾸었다. 오른쪽 아래 받침대에는 그림을 그린 작은 판이 기대어 있는데, 그 안에서 두 사람이 구름 속 피에타 앞에서 기도하고, 곁에는 화가의 집안인 베첼리오 가문의 문장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흑사병에서 지켜 달라고 비는 티치아노와 그의 아들 오라치오로 여겨진다. 티치아노는 전염병이 한창이던 1576년 8월 27일, 그림을 끝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오라치오도 같은 해 흑사병으로 죽었다.

그림을 작업실에서 가져간 사람은 다음 세대의 베네치아 화가 팔마 일 조바네였다. 그는 오른쪽 위에 횃불을 든 천사를 그려 넣었고, 계단에는 티치아노가 시작해 두고 떠난 것을 팔마가 경건하게 완성해 하느님께 바쳤다는 뜻의 라틴어 글귀를 남겼다.

티치아노는 그림 없이 프라리 성당에 묻혔다. 팔마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곁에 두었고, 1631년 그림은 산탄젤로 성당에 놓였으며, 1814년 아카데미로 넘어왔다.

피에타
피에타티치아노, 1575, 아카데미아 미술관

귀족 저택에서 온 그림들 (1523~1932년)

11. 히에로니무스 보스 《내세의 환영》

《최고천으로의 승천》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검다. 천사들이 벌거벗은 영혼들을 한 쌍씩 지그재그로 위로 나르고 떠밀며, 패널 위쪽 3분의 1에서는 조금씩 어긋나게 겹친 고리들로 이루어진 창백한 회청색 원이 빛난다. 고리들은 깔때기처럼 모여들어 가운데보다 조금 왼쪽의 작고 환한 구멍으로 이어진다. 패널에서 가장 밝은 것은 가운데 있는 천사의 붉은 날개다. 빛 앞의 마지막 한 쌍, 무릎 꿇은 영혼과 흰 옷의 천사는 이미 깔때기 안에 들어가 있다.

내세의 환영: 지상 낙원
내세의 환영: 지상 낙원히에로니무스 보스, 1510, 아카데미아 미술관
내세의 환영: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
내세의 환영: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히에로니무스 보스, 1510, 아카데미아 미술관
내세의 환영: 지옥으로 떨어지는 저주받은 자들
내세의 환영: 지옥으로 떨어지는 저주받은 자들히에로니무스 보스, 1510, 아카데미아 미술관
내세의 환영: 지옥
내세의 환영: 지옥히에로니무스 보스, 1510, 아카데미아 미술관
내세의 환영: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
내세의 환영: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히에로니무스 보스, 1510, 아카데미아 미술관

패널은 높고 좁은 것 네 개로, 지상 낙원, 의인들의 승천, 죄인들의 추락, 그리고 지옥이다. 아마도 사라진 큰 제단화의 날개였을 것이고, 가운데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이 패널들은 대략 1482년보다 앞서 그려졌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미술관은 제작 시기를 1505~1515년으로 본다. 보스는 브라반트의 스헤르토헨보스에 살았고, 알려진 바로는 베네치아에 온 적이 없다.

이 패널들은 북유럽 회화를 모은 베네치아의 수집가 도메니코 그리마니 추기경의 것이었다고 여겨지지만, 이는 추정이다. 1521년 베네치아 저택들에서 본 그림을 기록하던 감식가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은 그리마니의 집에서 보스의 작품들을 적어 두었는데, 그중에는 온갖 괴물이 가득한 지옥을 그린 캔버스와 꿈을 그린 캔버스가 있었다. 미키엘은 이것들을 캔버스라고 부르지만, 《내세의 환영》은 참나무 패널에 그려졌다. 1523년 유언으로 추기경은 자신의 그림과 고대 조각 대부분을 공화국에 남겼다. 보스의 패널들은 수백 년 동안 두칼레 궁전에 보관되었고, 2010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같은 컬렉션에서 나온 보스의 세 폭 제단화 두 점은 1838년 빈으로 옮겨졌다가 1919년에 돌아왔지만, 《내세의 환영》은 빈으로 가지 않았다.

깔때기 구멍 바로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인물 하나가 보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빛을 마주한 채 서 있고, 구멍의 아래 가장자리에는 손을 든 인물이 하나 더 보인다.

작은 나무들의 성모
작은 나무들의 성모조반니 벨리니, 1487, 아카데미아 미술관

12. 조반니 벨리니 《마돈나 델리 알베레티》

1838년 지롤라모 콘타리니는 그림 188점을 갤러리에 기증했고, 《마돈나 델리 알베레티》는 그중 하나였다. 콘타리니는 살아 있을 때 그림들을 내주었고, 1843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기는 대리석 무늬를 그린 초록 난간 위에 서서 오른발을 왼발 위에 엇갈려 놓고 어머니의 손가락을 붙잡고 있다. 마리아는 두 팔로 아기를 감싸 안았고, 아기는 어머니의 뺨에 머리를 기댄 채 보는 사람을 비껴 바라보며, 마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두 사람 뒤에는 고른 황록색 휘장이 드리워 있고, 그 양옆으로 풍경이 띠처럼 보이는데, 띠마다 가느다란 어린 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다. 이탈리아어로 ‘알베레티’라고 하는 이 작은 나무들에서 그림의 이름이 나왔다. 그 옆 들판에는 잎 없이 말라 버린 나뭇가지들이 서 있고, 해석자들은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에서 신약과 구약을 보기도 하고 아가서를 가리키는 암시를 보기도 한다. 미술관은 마리아가 휘장에 드리운 그림자에 주목한다. 그림자는 겨우 알아볼 만해서, 파란 망토 오른쪽의 초록이 아기 머리 뒤 왼쪽보다 조금 더 어두울 뿐이다.

아기 발밑 난간 앞면에서 라틴어로 쓴 화가의 이름은 ‘요안네스 벨’까지만 읽히고 나머지 글자는 지워졌으며, 그 아래에 ‘1487’이 있다. 1474년 작 외르크 푸거의 초상에 이어 벨리니 작품에서 알려진 두 번째 날짜인데, 푸거 초상의 날짜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성 히에로니무스와 기증자
성 히에로니무스와 기증자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60, 아카데미아 미술관

1850년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는 이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을 보냈고, 이 그림을 보석이자 진주이자 갤러리의 별이라고 불렀다. 그는 같은 해 젊은 화가 루이마리위스 가르생이 그린 모사본을 샀다. 모사본은 타원형이고, 가르생은 거기서 그림에 이름을 준 어린 나무들도, 아기의 엇갈린 발도 잘라 냈다.

1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성 히에로니무스와 기증자》

성 히에로니무스와 무릎 꿇은 기증자는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졌는데,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보통 주문자는 성인 발치의 작은 인물로 그려졌다. 흰 수염의 대머리 히에로니무스는 얇은 흰 회색 셔츠를 입고 돌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책을 펼쳐 놓은 채 언짢은 얼굴로 손님을 곁눈질한다. 기증자는 두 손을 모으고 엄격한 옆모습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고, 그의 빨간 옷은 주름을 이루며 땅에 퍼져 있다. 그들 뒤로는 탑과 종탑이 선 하얀 도시가 있는데, 흔히 산세폴크로로 여겨진다.

성인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빨간 옷자락 곁 땅에 적힌 글귀는 그를 아고스티노의 아들 지롤라모 아마디라고 부른다. 아마디는 루카 출신 집안의 베네치아 상인이었고, 히에로니무스, 이탈리아어로 지롤라모는 그의 수호성인이었다. 이 글귀는 화가의 서명과 다른 손으로 쓰였고, 많은 이들이 이를 뒷날 덧붙인 것으로 본다. 미국 역사가 제임스 뱅커는 무릎 꿇은 사람이 산세폴크로의 법률가 야코포 아나스타지라고 추정했지만, 미술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아마디로 보는 견해를 따른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토스카나와 움브리아의 경계에 있는 작은 도시 보르고 산세폴크로 출신이고, 패널에 고향 이름을 넣어 서명했다. 서명은 왼쪽 아래 구석의 베어 낸 나무 그루터기, 가는 막대에 작은 금빛 십자가상이 꽂힌 자리에 있으며, ‘보르고 산 세폴크로의 피에트로의 작품’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피에로가 서명한 작품은 많지 않다. 미술관은 서명을 진짜로 보지만, 2022년 역사가 마시모 존텔라는 서명도, 이 작품이 피에로의 것이라는 사실 자체도 의심했다. 미술관은 패널을 1460년대 초의 것으로 본다.

1850년 베르나르디노 레니에르 백작의 미망인 펠리치타 베르트랑 헬만이 이 패널을 미술관에 남겼다. 풍경의 초록 물감은 세월이 흐르며 갈색으로 변했고, 그래서 도시를 둘러싼 언덕들이 갈색이 되었다.

14. 조르조네 《노파》

수집가 가브리엘레 벤드라민이 죽은 뒤 1567~1569년에 작성된 벤드라민 집안의 재산 목록에는, 미술관이 인용하는 문구에 따르면, 이 그림이 조르존이 그린 조르존 어머니의 초상으로 올라 있고, 벤드라민 가문의 문장을 그려 넣은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조르존은 조르조네, 곧 카스텔프랑코의 조르치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는 1510년 흑사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고, 그의 것으로 확실히 인정되는 그림은 많이 남지 않았다. 미술관은 《노파》를 그의 작품으로 보지만, 작가 문제는 여러 번 논란이 되었다. 제작 시기는 1506년 무렵으로 본다.

노파
노파조르조네, 1506, 아카데미아 미술관

노파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고개를 다시 돌려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입은 말을 하는 듯 조금 벌어져 이가 한두 개 보이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으며, 부드러운 흰 두건 밑으로 성긴 흰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다. 노파는 오른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그 손에서 보는 사람 쪽으로 종이 띠가 휘어져 나오는데, 거기에는 ‘세월이 지나면’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 템포’가 적혀 있다. 배경은 온통 검고, 빛은 왼쪽에서 들어와 얼굴과 손, 어깨에 걸친 술 달린 흰 숄을 비춘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에는 처음에 남자 초상을 그린 덮개가 있었다. 1601년 재산 목록에는 그 덮개에 검은 모피 옷을 입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고 적혀 있다. 덮개 자체는 남아 있지 않거나, 아직 어느 그림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서재에 있는 신사의 초상
서재에 있는 신사의 초상로렌초 로토, 1530, 아카데미아 미술관

벤드라민 집안에서 그림은 상인 크리스토포로 오르세티에게 넘어갔고, 그는 1664년 유언장에 이 그림을 언급했으며, 그 뒤 그림은 베네치아의 만프린 갤러리에 들어갔다. 1856년 그림은 만프린의 상속인들에게서 아카데미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돈으로 매입되었는데, 당시 베네치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15. 로렌초 로토 《서재에 있는 젊은 남자의 초상》

1923년 미술사가 루치오 콜레티는 트레비소에 있는 로베로 백작 가문 저택의 응접실에서 이 초상화를 보고 로렌초 로토의 작품임을 알아보았다. 1930년 국가는 로베로 가문 트레비소 분가의 마지막 후손 에도아르도 로베로에게서 그림을 샀다. 미술관은 그려진 사람이 아마도 로베로 집안의 누군가, 곧 크리스토포로나 그의 사촌 알비세일 것으로 본다.

로토는 1520년대 말, 베네치아에 살며 주로 개인 주문자들을 위해 일하던 때에 이 초상을 그렸다. 그는 자기 초상화로서는 드물게 가로로 긴 캔버스를 골랐고, 오른쪽 절반을 탁자에 내주었다. 창백하고 얼굴이 긴, 검은 옷의 젊은이는 무늬를 찍은 가죽 장정의 두꺼운 책을 넘기고 있지만, 눈은 책을 비껴 보는 사람을 향한다. 탁자에는 장미 꽃잎이 흩어져 있고, 펼친 편지와 금목걸이와 반지가 놓여 있으며, 작은 상자 위에는 열쇠들이, 술 달린 하늘색 비단 숄 위에는 작은 초록 도마뱀이 있다. 왼쪽 위 구석의 좁은 창으로는 하늘과 먼 푸른 산들이 보인다.

미술관은 이 책을 장부, 곧 회계 장부로 보고, 탁자 전체를 한 젊은이가 젊은 날의 즐거움을 버리고 집안일을 떠맡는 이야기로 읽는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열쇠와 반지와 장부는 어두운 벽에 걸린 류트와 사냥 나팔과 대비되고, 꽃잎과 편지와 여자의 숄을 미술관은 끝나 버렸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연결한다. 도마뱀은 여러 가지로 풀이되는데, 죽음과 부활의 표지로 보기도 하고, 도마뱀이 냉혈 동물이라는 데서 고삐를 잡힌 정념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의 의학서들은 장미 꽃잎을 우울증 치료제로 권했다.

서재에 있는 신사의 초상
서재에 있는 신사의 초상로렌초 로토, 1530, 아카데미아 미술관
폭풍우
폭풍우조르조네, 1506, 아카데미아 미술관

16. 조르조네 《폭풍우》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이 그림을 엑스선으로 찍어 보았더니, 지팡이를 든 젊은이 밑에서 다른 인물, 물가에 앉아 두 발을 물에 담근 벌거벗은 여인이 나왔다. 조르조네는 처음에 왼쪽에 두 번째 여인을 앉혔다가, 나중에 그 자리에 남자를 그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빨간 웃옷 차림의 젊은이가 긴 지팡이를 짚고 왼쪽 아래 구석에 서서 여인을 바라본다. 오른쪽 구석의 풀밭에는 어깨에 흰 천을 두른 벌거벗은 여인이 앉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탁 트인 풀밭과 시냇물, 벽돌 받침 위의 부러진 기둥 두 개가 있고, 그 너머로 나무다리와 탑과 돔이 있는 창백한 도시가 보인다. 도시 위 청록색 하늘에서 작은 노란 번개가 번쩍이고, 가운데보다 조금 오른쪽에 있는 높은 집의 지붕 마루에는 황새인지 왜가리인지 모를 아주 작은 흰 새가 서 있다.

이 그림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1530년 가브리엘레 벤드라민의 집에서 그림을 본 베네치아의 감식가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었다. 그는 폭풍우와 집시 여인과 병사가 있는, 캔버스에 그린 작은 풍경화라고 적었다. 그림의 이름은 이 기록에서 나왔다. 주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고, 해석도 많다. 미술사가 에드거 윈드는 이 그림에서 용기와 자비의 알레고리를 보았고,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살바토레 세티스는 1978년, 낙원에서 쫓겨난 뒤 어린 카인과 함께 있는 아담과 하와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벤드라민 집안을 떠난 《폭풍우》는 《노파》와 같은 길을 따라 오르세티 집안을 거쳐 만프린 컬렉션에 들어갔다. 1875년의 일은 전해 오는 이야기로만 알려져 있다. 그해 베를린의 한 미술관이 이 그림을 사려 했지만 이탈리아 당국이 반출을 허락하지 않았고, 베네치아의 귀족 주세페 조바넬리 공이 그림을 샀다고 한다. 1932년 이탈리아 정부는 조바넬리 집안에서 《폭풍우》를 사들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네치아의 그림들은 마르케 지방의 보관소들로 옮겨졌고, 그 보관소들은 파스콸레 로톤디가 맡고 있었다. 로톤디 자신은 나중에, 1943년 9월 《폭풍우》와 다른 그림 몇 점을 우르비노의 자기 집으로 가져가 침대 밑에 두었다고 이야기했다.

폭풍우
폭풍우조르조네, 1506, 아카데미아 미술관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하여 (1490년 무렵~1765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0, 아카데미아 미술관

17.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빛이 종이를 상하게 하므로 오늘날 거의 전시되지 않는 이 한 장의 드로잉은, 바로 학생들이 보고 배우라고 베네치아 아카데미를 위해 사들인 것이다. 1822년 오랜 협상 끝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1815년에 죽은 밀라노 화가 주세페 보시의 드로잉 컬렉션을 아카데미를 위해 매입했다. 매입을 밀어붙인 사람은 아카데미 회장 레오폴도 치코냐라였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과 함께 레오나르도의 드로잉 25장이 더 베네치아로 왔다. 보시 이전에 이 드로잉은 체사레 몬티 추기경의 것이었고, 그 뒤 추기경의 상속녀에게, 다시 그녀에게서 데 파가베 집안으로 넘어갔으며, 보시는 1807년 데 파가베 집안에서 이것을 샀다.

레오나르도는 1490년 무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서 일하던 밀라노에서 이 드로잉을 그렸다.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십서》에서 신전의 비례를 인체의 비례에서 끌어냈고, 레오나르도는 이 종이 위에서 그 계산을 하나하나 따져 본다.

벌거벗은 남자 한 사람이 두 자세로 한꺼번에 그려져 있다. 다리를 모으고 두 팔을 옆으로 뻗은 자세로는 정사각형 안에 들어가고, 다리를 벌리고 팔을 어깨보다 조금 높이 든 자세로는 배꼽을 중심으로 한 원에 닿는다. 몸을 가로질러 비례의 마디를 표시하는 짧은 선들이 그어져 있고, 정사각형 아래에는 눈금자가 놓여 있으며, 인물 위아래로는 레오나르도가 거울 글씨로 쓴 글이 이어진다. 다리를 모은 자세에서는 한쪽 발이 바깥으로 돌려져 정사각형 아랫변을 따라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주랑이 있는 투시 풍경
주랑이 있는 투시 풍경카날레토, 1765,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술관은 이 드로잉을 온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아래쪽 글에서 레오나르도는 여러 치수 가운데 하나로, 사람이 두 팔을 벌린 길이는 그의 키와 같다고 적었다.

18. 카날레토 《주랑이 있는 투시 풍경》

1763년 1월 베네치아 아카데미는 카날레토, 곧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덟 달 뒤 아카데미는 마음을 바꾸어 그를 건축과 원근법 교수로 뽑았다. 그는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였다. 그는 주로 외국인, 무엇보다 영국인을 위해 그림을 그렸고, 아홉 해쯤 영국에서 살았으며, 베네치아에 남은 그의 그림은 많지 않다.

아카데미의 관례에 따라 새 회원은 자기 작품을 하나 기증했고, 1765년 카날레토는 이 캔버스를 내놓았다. 원근법 교수 자리를 위해 그는 상상 속 궁전의 안뜰을 그렸다. 캔버스는 세로로 길고, 격자 천장을 인 어두운 주랑이 왼쪽 위 구석에서 오른쪽 안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들어가며, 왼쪽으로는 계단과 궁전이 있는 햇빛 가득한 안뜰이 열린다. 기둥들은 돌바닥에 길고 비스듬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위쪽의 큰 아치 안으로는 회랑이 보이는데, 하인들이 그 난간 너머로 빨간 양탄자를 걸쳐 놓았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이 엮어 만든 빈 의자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한다.

카날레토 연구자 윌리엄 조지 컨스터블은 이 구도를 되풀이한 그림을 여덟 점 헤아렸다. 카날레토는 1768년 4월에 세상을 떠났고, 1777년 이 그림은 센사 축제 때 산 마르코 광장에 전시되었다. 그리스도 승천 대축일인 이 축제 때면 베네치아에서는 야외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주랑이 있는 투시 풍경
주랑이 있는 투시 풍경카날레토, 1765, 아카데미아 미술관

사라진 천장화, 그리고 처음부터 그 그림의 자리였던 벽

19.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로레토로 옮겨지는 거룩한 집》

1915년 10월 24일 밤, 철도역을 노린 오스트리아군의 폭탄이 이웃한 산타 마리아 디 나자레트 성당에 떨어졌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맨발 가르멜회 수사들을 따라 이 성당을 스칼치, 곧 ‘맨발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폭탄은 기와지붕과 얇은 궁륭 사이에서 터졌고, 궁륭은 티에폴로의 천장화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이 천장화에서는 천사들이 거룩한 집, 곧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은 나자렛의 집을 하늘로 나르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들은 그 집을 이탈리아 마르케 지방의 로레토로 옮겼다. 가르멜회 수사들은 1743년 9월 13일 티에폴로와 계약을 맺었고, 같은 날 그에게 체키노 금화 100닢을 치렀는데, 아마도 이 타원형 밑그림의 값이었을 것이다. 프레스코에 더 가까운 두 번째 밑그림은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미술관에 있고, 전쟁 전에 찍은 천장 사진도 남아 있다.

로레토 성가의 이전
로레토 성가의 이전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3, 아카데미아 미술관
로레토 거룩한 집의 기적
로레토 거룩한 집의 기적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3, 게티 센터

밑그림의 하늘은 꿀빛을 띤 황토색이다. 수수한 회녹색 상자 같은 거룩한 집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이고, 주황빛 빨강과 회청색 옷을 입은 천사들이 아래에서 그것을 위로 밀어 올리며, 마리아는 분홍빛 빨간 옷과 파란 망토 차림으로 지붕 위에 앉아 있다. 왼쪽 위에서는 어두운 날개를 단 천사가 흰 백합의 긴 줄기를 들고 머리부터 아래로 뛰어들고, 왼쪽 가장자리에서는 근육질의 어두운 나체 인물들이 거꾸로 떨어지며, 타원의 아래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미늘창을 든 아주 작은 사람들이 서서 위를 올려다본다. 많은 인물이 바탕칠 위에 재빠른 붓질 몇 번으로만 잡혀 있다.

1930년 갤러리는 조각가 안토니오 달 초토의 상속인들에게서 이 밑그림을 샀다. 프레스코 자체의 잔해, 곧 기도하는 구경꾼들이 그려진 난간 조각들은 1916~1917년에 수습되었고, 이것들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20. 티치아노 《성전에 바쳐지는 성모》

산타 마리아 델라 카리타 신도회는 1534년 8월 21일 티치아노에게 이 그림을 주문했다. 신도회 운영진이 모이고 문서와 성유물을 보관하던 알베르고 홀에 걸 그림이었다. 티치아노는 1538년 3월 6일 그림을 넘겼다. 1807년 신도회 건물에 아카데미가 들어섰고, 알베르고 홀은 갤러리의 일부가 되었다.

성전에 바쳐지는 성모
성전에 바쳐지는 성모티치아노, 1536, 아카데미아 미술관

캔버스는 낮고 넓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힌다. 왼쪽에서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오른쪽에서는 파란 옷을 입은 어린 마리아가 온몸을 감싼 타원형의 금빛 광채 속에서 회색 돌계단을 올라 대사제에게 간다. 계단 가장자리의 초록 옷 입은 남자는 마리아의 빛을 가리기라도 하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계단 아래에는 청회색 옷에 흰 머릿수건을 쓴 몸집 큰 노파가 행렬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고, 그 곁에 달걀 바구니가 있으며, 오른쪽 짙은 그늘 속에는 고대 토르소의 파편이 놓여 있다. 빛은 왼쪽에서 들어온다.

캔버스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문을 내느라 도려낸 자리가 두 군데 있다. 오른쪽 문은 티치아노 이전부터 벽에 있었고, 그는 그 둘레를 그려 넣은 돌 벽으로 감쌌기 때문에, 계단은 마치 실제 문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은 이 홀을 위해 그려졌고, 다시 처음 걸렸던 벽에 걸려 있다. 전시를 위해,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동안 보호를 위해 여러 번 벽에서 내려졌지만, 그때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왼쪽 문은 1572년 3월 10일 신도회가 캔버스를 뚫고 낸 것으로, 그때 군중의 일부가 사라졌으며, 티치아노는 그때 아직 살아 있었다.

낙원의 보좌에 앉은 성모자와 교회 박사들
낙원의 보좌에 앉은 성모자와 교회 박사들조반니 달레마냐, 1446, 아카데미아 미술관

안토니오 비바리니와 조반니 달레마냐가 1446년에 그린 세 폭 제단화도 카리타 신도회가 알베르고 홀을 위해 주문한 것으로, 같은 홀의 다른 벽에 걸려 있다. 두 그림 위에는 15세기의 금박 채색 천장이 남아 있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베네치아 석호 일대에서 그 시대의 인물 장식 천장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

카르파초가 우르술라 이야기를 그린 나머지 캔버스 여덟 점도 《사절의 도착》을 비롯해 모두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품이고, 젠틸레 벨리니, 라차로 바스티아니, 조반니 만수에티, 베네데토 디아나가 그린 성십자가 유물의 기적 연작의 나머지 캔버스들도 마찬가지다. 그리마니 컬렉션에서 나온 보스의 세 폭 제단화 두 점, 《은수자들》과 《성녀 윌게포르티스》는 1838년부터 1919년까지 빈에 있었다. 공화국의 한 관청을 위해 그린 틴토레토의 《카메를렌기의 성모》,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게오르기우스》,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의 《점쟁이 여인》도 찾아볼 만하다. 리알토 다리 곁 독일 상인들의 상관이던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의 정면에 조르조네가 그린 프레스코에서는 벽에서 떼어 낸 《누드》가 갤러리에 들어왔는데, 그 물감은 이제 희미한 붉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잉글랜드 사절의 도착
잉글랜드 사절의 도착비토레 카르파초, 1495, 아카데미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