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대공 피에트로 레오폴도는 1784년 피렌체에 미술 아카데미를 세웠고, 그에 딸린 미술관은 이 학교의 교육용 소장품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보고 배울 모형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교회와 수도원에서 나온 제단화가 들어왔다. 이 교회와 수도원들은 1780년대에 피에트로 레오폴도 자신이, 그리고 1808~1810년에 나폴레옹이 문을 닫게 한 곳이었다. 금빛 바탕에 그린 옛 그림들을 이곳으로 모은 것은 학생들에게 공부할 거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19세기에는 아카데미를 위해 그린 그림도 생겼다. 교수와 학생들의 공모전 출품작과 과제 작품으로, 이 그림들도 미술관에 있다. 아카데미 자체를 위해 만든 작품이어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아래의 작품 열 점은 저마다 다른 곳, 곧 광장이나 정원의 동굴, 조각가의 작업장, 수도원, 메디치 가문의 악기 컬렉션을 위해 만들어졌고, 이야기마다 중요한 것은 왜 그곳에서 옮겨 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품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다.
작품은 리카솔리 거리의 아카데미 건물에 들어온 순서대로 소개한다. 아카데미가 세워진 해에 받은 점토 모형으로 시작해, 2001년 이곳으로 옮겨 온 스트라디바리의 비올라로 끝난다.
학생들을 위한 모형 (1784)

1. 잠볼로냐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모형, 1579~1580년
1579년 6월, 플랑드르 도시 두에 출신으로 메디치 궁정에서 일하던 조각가 잠볼로냐는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에게 편지를 보내 두 인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작은 청동 군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려고 이 주제를 골랐으며, 군상에는 헬레네의 납치든 프로세르피나의 납치든 사비니 여인의 납치든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고 설명했다. 그 뒤 그는 인물 하나를 더하고, 프란체스코 1세 대공이 베키오 궁전 안에 마련해 준 작업장에서 군상을 실물 크기로 빚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모형은 주문도 없이, 정해진 주제도 없이 만들어졌다. 라파엘로 보르기니는 1584년에 나온 책 《일 리포소》에서, 대리석 군상을 광장에 세우기로 했을 때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라는 이름이 제안되었다고 전한다.
모형은 굽지 않은 점토로 빚었고 나중에 그 위에 석고를 여러 겹 입혔기 때문에, 안내서에서는 흔히 석고상이라고 부른다. 벌거벗은 세 인물이 사람 키보다 높은 하나의 나선으로 휘감겨 올라간다. 젊은 남자는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두 팔로 여자의 허벅지를 감싸 안고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린다. 여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왼팔을 손가락을 활짝 편 채 곧장 위로 뻗었으며, 오른손으로는 남자의 머리를 짚고 버틴다. 그 아래, 남자의 두 다리 사이에는 노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여자를 향해 펼친 손바닥을 들어 올린다. 어느 한 자리에서도 세 사람의 얼굴을 한꺼번에 볼 수 없고,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앞에 나서는 인물이 바뀐다. 노인이 들어 올린 팔 아래의 가는 금속 막대는 나중에 받침으로 세운 것이다.
대리석 군상은 1581~1582년에 깎았고, 1582년 시뇨리아 광장의 란치 회랑에 세웠다. 점토 모형은 그 뒤 보르고 핀티에 있던 잠볼로냐의 작업장으로 옮겨졌고, 1687년에 작성된 보르고 핀티 대공 작업장의 재산 목록에도 여전히 올라 있다. 1784년 모형은 막 세워진 아카데미에 교재로 넘어갔고, 미술관 소장품이 된 것은 1911년이다.
모형은 여러 차례 옮겨지면서 손상을 입었다. 갈라진 곳은 두꺼운 석고로 메우고 덧칠했으며, 떨어져 나간 부분은 새로 빚어 붙였다. 당시 미술관장 프란카 팔레티가 이끈 복원가들은 모형을 전시실 밖으로 옮기지 않고 커튼 뒤에서 1년쯤 이 덧층을 걷어 냈고, 그 아래에서 대리석 군상에는 없는 빠르고 스케치 같은 소조가 드러났다. 복원을 마친 모형은 2014년 2월 25일에 공개되었다.

창고와 문 닫은 수도원에서 (1850년대까지)
2. 스케자 《결혼식 춤》(옛 이름 《아디마리 카소네》), 1450년경
이 길쭉한 채색 패널은 20세기 초까지 혼수 궤짝인 카소네의 앞판으로 여겨졌고, 피렌체의 아디마리 가문과 연결되었다. 궤짝 앞판이라기에는 너무 길어서, 지금은 방의 나무 벽판에 끼워 넣던 채색 판, 곧 스팔리에라로 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의 이름을 《결혼식 춤》으로 바꾸고, 옛 이름 《아디마리 카소네》는 ‘옛’이라는 표시를 달아 괄호 안에만 남겼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1420년 보카치오 아디마리와 리사 리카솔리의 결혼식을 그린 그림이다. 화풍으로 보아 1450년경에 그렸으므로 1420년의 결혼식과는 관계가 있을 수 없다. 한 설명에 따르면 이 패널은 1826년부터 아카데미 소장품에 있었다.
길 위로는 왼쪽 끝의 로자에서 오른쪽 끝의 집까지 빨강과 하양의 넓은 줄무늬 차일이 쳐져 있다. 그 아래에서 남녀가 짝을 지어 천천히 움직이는데, 서로 손가락 끝만 맞대고 있다. 여자들은 이마를 높이 드러냈고, 머리 장식을 높이 올렸으며, 금색 무늬가 든 검정과 짙은 초록 브로케이드 옷자락을 아주 길게 끌고 있다.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양탄자를 덮은 벤치에는 악사들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슬라이드가 달린 길고 휘어진 트럼펫을, 다른 두 사람은 곧은 트럼펫을 불고, 곧은 트럼펫에는 붉은 피렌체 백합이 그려진 흰 깃발이 늘어져 있다. 악사들 뒤로는 세례당의 검고 흰 줄무늬 대리석 벽이 보인다. 왼쪽, 꼬인 분홍 기둥이 받친 로자 아래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이 커다란 금빛 대야를 머리에 이고 간다.

화가는 오랫동안 ‘아디마리 카소네의 대가’라고 불렸다. 1969년 미술사학자 루치아노 벨로시는 피렌체에서 한 발표에서 그를 마사초의 남동생으로 스케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조반니 디 세르 조반니와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스케자의 작업장은 피렌체 명문가들의 주문을 받아 값비싼 가정용 그림, 곧 궤짝과 벽판, 그리고 아기를 낳은 여인에게 선물하던 쟁반을 만들었다. 벨로시는 이 패널을 스케자의 고향 산조반니발다르노에 있는 그의 서명이 든 프레스코와 비교했는데, 반론에 부딪히자 오랫동안 발표 내용을 출간하지 않았다. 원고는 1999년에야 세상에 나왔다.
3. 미켈란젤로 《성 마태오》, 1505~1506년
《성 마태오》의 한쪽은 거의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다른 쪽은 아직 돌덩이 그대로다. 마태오는 높고 좁은 돌덩이의 앞면에서 깎여 나와 아주 높은 부조에 가깝고, 가장자리와 아래쪽 돌은 떨어져 나가고 파인 자국투성이로 거칠게 남았다. 머리는 뒤로 젖혀진 채 왼쪽 어깨 쪽으로 홱 돌아가 있고, 얼굴은 윤곽만 잡혀 있다. 왼쪽 무릎은 돌덩이에서 앞으로 튀어나와 거의 반짝일 만큼 갈려 있는데, 조각 전체에서 가장 많이 마무리된 곳이다. 가슴과 팔, 옷 주름은 톱니 끌이 남긴 촘촘한 교차 빗금으로 엮은 듯 덮여 있고, 옆에서 빛이 들면 잘 보인다. 왼쪽 어깨에 붙인 책은 납작한 판으로 남았고, 그 아래쪽 절반은 돌에서 떼어 내지 못했다.
1503년 피렌체 대성당의 관리 기구인 오페라 델 두오모는 양모 상인 조합과 함께 미켈란젤로에게 사람 키보다 큰 사도상 12점을 주문했다. 대성당 돔을 받치는 기둥 곁의 벽감에 세울 조각으로, 해마다 한 점씩 만드는 조건이었다. 그는 아직 《다비드》를 작업하고 있었고(이 조각은 아래에서 이야기한다), 사도상에 쓸 대리석 덩어리는 1504~1505년에야 채석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떠난 뒤인 1505년 12월에 계약은 해지되었다. 사도 12명 가운데 그가 손을 댄 것은 마태오 하나뿐이었고, 피렌체 공화국의 수장 피에로 소데리니의 편지로 보아 그는 1506년에도 이 조각을 계속 작업했다.
바사리는 1568년에, 이렇게 남겨진 이 조각을 보면 조각가들이 대리석에서 인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꺼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썼다. 곧 돌을 조금씩 걷어 내되 나중에 고칠 수 있도록 늘 여유를 남겨 두는 법이다. 오페라 델 두오모는 300년 넘게 이 조각을 자기 안뜰과 창고에 두었고, 오페라 측의 말로는 여러 세대의 조각가가 《마태오》를 보며 배웠다.

1831년 조각은 미술 아카데미의 현관 홀로 옮겨졌고, 1909년 7월 21일 미술관에 《다비드》로 가는 동선을 꾸미면서 이웃 안뜰에서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회색 석조 대좌에는 긴 이탈리아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작한 이 성 마태오상이 오랫동안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오페라의 안뜰에 서 있다가 MDCCCXXXI, 곧 1831년에 이 미술 아카데미로 옮겨졌다는 내용이다.
4. 파치노 디 보나구이다 《생명의 나무》, 1310~1315년경
큰 패널 한가운데, 올리브빛 초록 나무줄기에 창백한 그리스도가 그대로 못 박혀 있다. 눈은 감겨 있고, 두 발에서 줄기를 타고 가느다란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양옆으로는 작은 라틴어 글씨가 적힌 밝은 띠 모양의 가지 12개가 한쪽에 여섯 개씩 뻗어 있고, 그 가지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은 아주 작은 장면이 든 금빛 원형 메달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다.
파치노는 13세기에 글을 쓴 프란치스코회 수사 보나벤투라의 《생명의 나무》에 그림을 붙였다. 묵상을 위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상상 속의 나무에 펼쳐 놓아 기억하기 쉽게 했는데, 가지가 12개이고 가지마다 네 장씩이다. 메달은 47개이고, 오른쪽 맨 위 가지에는 네 개 대신 세 개만 달려 있다. 화가가 책의 마지막 48번째 장, 곧 알파이자 오메가인 그리스도에 관한 장을 줄기 밑동으로 옮겨 “ALPHA”와 “ET ω”라고 적은 명판 두 개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 아래, 바위 언덕의 동굴에는 펼친 종이를 든 수사가 앉아 있다. 흔히 보나벤투라 자신으로 보지만, 얼굴은 거의 지워졌다.
파치노는 무엇보다 책에 그림을 그리는 세밀화가였고, 피렌체에서 큰 작업장을 운영했다. 이 패널에도 책 속 세밀화만 한 장면 47개를 담았다. 화가의 이름은 1885년 미술사학자 헨리 토데가 이 패널을 파치노 디 보나구이다의 작품으로 보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패널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클라라회 수녀원인 몬티첼리 수녀원의 수녀들을 위해 그렸다. 수녀원은 산 프레디아노 성문 밖에 있었다. 1529~1530년 피렌체가 포위되었을 때 수녀원이 헐리자, 1531년 수녀들은 성벽 안 말콘텐티 거리로 옮기면서 패널을 가지고 갔다. 1808년 나폴레옹이 수도원들을 폐쇄했을 때 패널은 이웃한 몬테도미니로 넘어갔는데, 옛 수도원을 빈민 구호소로 바꾼 곳이었다. 그곳에서 1849년 10월에 패널이 발견되었고, 1850년에는 이미 아카데미에 전시되어 있었다.

5. 폰토르모 《비너스와 큐피드》,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에 따라, 1533년경
이 그림의 내력은 1568년에 나온 바사리의 폰토르모 전기에 실려 있다. 피렌체의 상인이자 은행가이며 미켈란젤로의 친구였던 바르톨로메오 베티니는 미켈란젤로에게서 비너스와 큐피드를 그린 실물 크기의 밑그림을 받았고, 이 밑그림으로 폰토르모가 그림을 그려 주기를 바랐다. 그림은 한 방의 한가운데에 걸릴 예정이었다. 그 방의 반달 모양 벽면에는 브론치노가 이미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를 그리기 시작했고, 언젠가는 토스카나 말로 사랑을 노래한 시인들이 모두 그곳에 그려질 참이었다. 바사리의 이야기에 따르면, 폰토르모가 그림을 마치자 베티니를 골탕 먹이려던 사람들이 완성된 그림을 화가에게서 거의 강제로 빼앗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에게 넘겼다. 공작은 폰토르모에게 금화 50스쿠도를 치렀고, 베티니는 밑그림을 돌려받았다.
비너스는 넓은 패널을 가로질러 누워 있고, 머리는 오른쪽 위에 있다. 몸은 거의 하얗게 보일 만큼 창백하며, 묵직한 허벅지와 근육이 도드라진 배는 돌을 깎아 만든 것 같다. 비너스는 고개를 돌려 큐피드에게 입을 맞추고, 큐피드는 뒤에서 그녀의 목을 끌어안은 채 손바닥을 그녀의 뺨에 대고 있다. 비너스는 뻗은 손의 손가락 사이에 화살 한 대를 끼워, 큐피드가 앞에 들고 있는 화살 묶음에서 뽑아내고 있다. 왼쪽에는 활에 붉은 끈으로 가면 두 개가 걸려 있다. 하나는 흰 콧수염과 턱수염이 난 늙은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눈을 반쯤 감은 젊은 얼굴이다.
나중에 비너스의 알몸은 가슴부터 허벅지 중간까지 그려 넣은 천으로 가려졌고, 그림은 그 모습으로 대공들의 창고 속에 묻혀 버렸다. 1850년 그곳에서 이 그림이 발견되어 베티니의 그림으로 확인되었고, 1852년 복원가 울리세 포르니가 덧그린 천의 대부분을 걷어 냈다. 미술관은 작가를 폰토르모로 밝히는 반면, 이탈리아 국가 문화재 목록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려 폰토르모의 원작으로 보는 쪽과 모사본으로 보는 쪽이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구도를 옮긴 모사본만 해도 30점 넘게 알려져 있다. 비너스의 음부를 덮고 있던 마지막 천 조각은 2002년 복원 때에야 걷어 냈다.
지붕 아래로 들어온 미켈란젤로 (1873~1909)

6.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높고 좁은 카라라 대리석 덩어리는 원래 오페라 델 두오모가 거인상을 만들려고 주문한 것이었다. 대성당 버팀벽 위에 세우려던 예언자상 가운데 하나였다. 1464년 조각가 아고스티노 디 두초가 이 대리석을 맡아 다듬기 시작했다가 그만두었고, 1476년에는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넘겨받았지만 그 역시 손을 뗐다. 그 뒤 대리석은 25년쯤 오페라의 안뜰에 놓여 있었다.
1501년 봄, 26세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로 이름을 얻은 뒤였다. 당시 피렌체는 공화국이었고, 그에게 버려져 있던 대리석 덩어리가 맡겨졌다. 1504년 1월, 시민과 예술가 30명가량이 모여 조각을 어디에 세울지 논의했고, 그때까지 도나텔로의 《유디트》가 서 있던 베키오 궁전 입구 곁을 골랐다. 1504년 9월 8일 《다비드》가 공개되었다. 처음에는 대성당을 위한 예언자상으로 시작한 조각이, 메디치 가문을 쫓아낸 뒤 되살린 공화국의 상징으로 시청 문 앞에 세워진 것이다.
《다비드》는 몸무게를 오른쪽 다리에 싣고 있고, 그 종아리 뒤에는 받침으로 그루터기를 깎아 두었다. 왼쪽 다리는 옆으로 내디뎌, 발가락이 거친 돌 받침대 가장자리 밖으로 걸쳐 있다. 눈썹은 찌푸려 있고, 고개는 왼쪽으로 홱 돌아가 있으며, 목에는 힘줄이 팽팽하다. 어깨까지 들어 올린 왼손은 돌팔매의 접힌 부분을 쥐고 있다. 돌팔매의 가죽끈은 등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오른쪽 허벅지까지 내려가 끈으로 이어지고, 그 끝은 핏줄이 불거진 채 아래로 늘어뜨린 오른손에 쥐여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머리와 손이 몸에 비해 너무 커 보인다.
《다비드》는 광장에서 369년을 서 있었다. 1527년 메디치 가문에 맞선 봉기 때 궁전에서 내던진 벤치에 맞아 왼팔이 세 조각으로 부러졌고, 팔은 1543년에야 다시 맞춰 붙였다. 1843년 조각가 아리스토데모 코스톨리는 염산 용액과 날카로운 도구로 대리석을 닦아 표면을 약하게 만들었다. 조각 아래 광장 바닥이 고르지 않게 가라앉으면서 《다비드》는 조금씩 앞으로 기울었고, 발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873년 조각을 지붕 아래로 옮기기로 했다.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다비드》는 강철 스프링에 매단 나무 수레에 선 채로 실려 레일 위로 아카데미까지 옮겨졌고, 더위 때문에 작업은 아침 4시부터 11시까지만 했다. 조각을 들일 전시실은 이제 막 짓기 시작한 참이어서, 《다비드》는 상자 속에 서 있다가 1875년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맞아 상자에서 나왔다. 조각을 둘러싼 건축가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의 트리부나는 1882년에 문을 열었고, 1910년에는 광장의 원래 자리에 대리석 복제품이 세워졌다.
1991년 9월 14일, 옷 속에 망치를 숨겨 미술관에 들어온 한 남자가 조각의 왼발을 내리쳐 둘째 발가락을 부러뜨렸다. 떨어진 조각들을 모았고, 며칠 뒤 피렌체의 복원 연구소 오피피초 델레 피에트레 두레의 복원가들이 발가락을 제자리에 붙였다.

7. 미켈란젤로 《포로들》, 1520~1534년경
1564년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조카이자 상속인인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는 모차 거리에 있던 삼촌의 피렌체 작업장에서 미완성 대리석상 네 점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공작에게 선물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에 쓰려고 이 조각들을 깎았는데, 무덤 계획은 1505년부터 1542년까지 여러 번 다시 그려지고 줄어들었다. 1542년 계약에서 포로상은 계획에서 완전히 빠졌고, 1545년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는 포로상이 없는 무덤이 세워졌다. 미켈란젤로가 언제 이 조각들을 작업했는지를 두고 연구자들의 의견은 갈려, 1519년으로 보는 쪽도 있고 1530년대 초로 보는 쪽도 있다.
《젊은 노예》, 《수염 난 노예》, 《아틀라스》, 《깨어나는 노예》라는 이름은 나중에 자세를 보고 붙인 것이다. 《아틀라스》는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네모나고 거친 돌덩이가 솟아 있어서, 신화 속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쳤듯 이 돌을 어깨에 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염 난 노예》는 다른 조각들보다 많이 진척되어, 가슴과 배의 근육이 또렷하고 거의 매끈하게 다듬어졌지만, 늘어뜨린 팔의 손은 아직 형체 없는 덩어리다. 《젊은 노예》는 머리 위로 굽힌 팔로 얼굴을 가렸고, 뒤에서 보면 거의 전부 손대지 않은 돌덩이여서 어깨만 겨우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1580년대에 이 미완성 상태에 뜻밖에 잘 어울리는 자리가 생겼다. 코시모의 아들 프란체스코 1세 대공 시대에, 포로상들은 메디치 가문의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가 보볼리 정원에 짓던 대동굴의 첫 번째 방 네 모퉁이에 세워졌다. 포로상들은 구멍이 숭숭 난 돌로 빚은 목동과 동물들 사이에서 동굴 천장을 떠받치는 듯 서 있었고, 거친 대리석은 정말로 몸이 돌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1909년 포로상들은 《다비드》로 가는 통로를 따라 세우기 위해 동굴에서 아카데미로 옮겨졌다. 동굴 모퉁이의 그 자리에는 지금 복제상이 서 있다.
우피치가 넘겨준 제단화 (1954)

8. 필리피노 리피와 피에트로 페루지노 《십자가에서 내려짐》, 1504~1507년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의 아들이자 보티첼리의 제자였던 필리피노 리피는 1504년 4월에 세상을 떠났고, 이 패널의 위쪽 절반밖에 그리지 못했다. 그림을 주문한 것은 성모의 종 수도회 수사들로, 피렌체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의 중앙 제단에 놓을 거대한 양면 제단화였다. 한쪽 면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짐》이, 다른 쪽 면에는 《성모 승천》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필리피노와의 계약은 1503년에 맺었다. 1505년 8월 5일, 그보다 10년 전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나가던 화가였던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작업을 이어받았고, 1507년 11월 완성된 그림들의 값이 매겨졌다.
위쪽은 온통 움직임이다. 가로대 왼쪽 끝에 감긴 긴 분홍 천은 고리 모양으로 펄럭이고, 오른쪽 사다리를 십자가에 묶은 노란 끈은 바람에 나부끼며, 진홍색 옷을 입은 남자는 맨발 하나를 맨 위 디딤대에 걸고 오른쪽 사다리에 거의 거꾸로 매달린 채 그리스도의 팔을 붙잡고 있다. 아래쪽 인물들은 무거운 옷 주름에 싸여 꼼짝 않고 서 있다. 성모는 세 여인의 팔에 안겨 주저앉고, 긴 금발의 막달레나는 십자가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우리 쪽으로 거의 등을 돌리고 있으며,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주황색 천 위에 못 세 개가 놓여 있다.
한 화가에서 다른 화가로 넘어간 것을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반긴 것은 아니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피렌체의 젊은 화가들은 완성된 제단화를 소네트와 공개적인 욕설로 맞았는데, 페루지노가 예전에 쓴 인물들을 그대로 되풀이했다는 이유였다. 페루지노는 그들이 전에 칭찬했던 바로 그 인물들을 가져다 썼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세부를 두고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엇갈리지만, 사다리 위의 남자들은 대개 필리피노의 몫으로, 땅 위의 무리는 페루지노의 몫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몸은 필리피노가 시작하고 페루지노가 마무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1546년 제단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나무로 만든 닫집인 치보리움이 놓였다. 《성모 승천》은 성당에 남았고, 《십자가에서 내려짐》은 세월이 흐르며 토스카나 대공들의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패널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역사가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1954년 우피치 미술관은 이 패널이 자기 관람 동선에 맞지 않는다며 아카데미에 넘겼다.

1996~1997년의 복원은 패널이 크고 상태가 나빠서 아카데미 안에서 그대로 진행했다. 국립 광학 연구소의 전문가들이 적외선으로 패널을 촬영해 물감 아래에서 필리피노의 밑그림을 찾아냈는데, 그 밑그림에서 막달레나는 다른 자세로 그려져 있었다. 페루지노는 작업을 이어 가면서 막달레나의 자세를 바꾸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그리고 음악원에서 (1966~2001)

9. 로렌초 바르톨리니의 석고상과 《전갈과 님프》, 1837년 이전
로렌초 바르톨리니의 석고 님프에는 작고 검은 점이 흩어져 있다. 어깨와 쇄골, 가슴, 배, 허벅지, 무릎, 그리고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선 바로 곁에도 있다. 이 점들은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으로 석고에 박아 넣은 작은 금속 못의 머리다. 측정 기구로 이 못들을 기준 삼아 거리를 재서 대리석 덩어리에 옮겼고, 못이 많을수록 복제는 더 정확해졌다.
벌거벗은 소녀가 타원형 판 위에 낮게 앉아 있다. 한쪽 다리는 뻗고 다른 쪽 다리는 굽혀, 그 발을 뻗은 다리 위에 가로로 올려놓았다. 소녀는 고개를 숙여 그 발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손으로 발가락을 쥐고 있는데, 방금 쏘이기라도 한 것 같다. 전갈은 바로 곁, 뻗은 다리와 들린 발 사이의 판 위에 작고 납작하게 얕은 부조로 빚어져 있다. 흰 바탕에 흰 전갈이어서 발 쪽에서 볼 때 가장 쉽게 눈에 띈다.
대리석 《전갈과 님프》는 샤를쥐스트 드 보보크라옹 공이 로렌 지방에 있는 자신의 아루에 성을 위해 주문했다. 1837년 바르톨리니에게 대리석으로 한 점 더 만들면 값이 얼마냐는 문의가 왔을 때, 석고상은 이미 작업장에 서 있었다. 대리석상은 1845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고, 1994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두 번째 대리석상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주문했는데, 바르톨리니가 죽은 뒤 조각가 조반니 뒤프레가 완성했고, 이 조각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다.
바르톨리니는 피렌체 보르고 산 프레디아노에 큰 작업장을 두고 외국 주문자들을 위해 일했고, 석고 모형들은 그곳에 남았다. 그는 1850년 1월 20일에 세상을 떠났고, 같은 달 가족은 석고상을 팔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1884년 상속인들은 소장품을 국가에 맡겼고, 1889년 9월 17일 국가가 1만 2000리라에 통째로 사들였다. 석고상들은 나뉘어 체나콜로 디 풀리뇨의 옛 수도원 식당과 산 살비 등 여러 곳에 보관되었는데, 1966년 11월 4일 범람한 아르노강이 그곳들을 덮쳐 석고상이 손상되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모형들은 피티 궁전에 모였다가 아카데미로 옮겨졌다. 14세기에 세운 산 마테오 병원의 옛 여성 병동이었던 긴 전시실에서는 1985년부터 400점이 넘는 석고상을 전시하고 있다.
1825년 아카데미는 바르톨리니에게 조각 교수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가 그 자리를 얻은 것은 1839년, 62세 때였다. 그가 죽은 뒤 수백 점에 이르는 그의 교육용 석고상을 가장 많이 보관하게 된 곳이 바로 그 아카데미였다.


10.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메디치 테너 비올라》, 1690년
큰 테너 비올라는 거의 사라졌다. 17세기 말에 이미 잘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그런 악기 대부분은 나중에 보통 비올라 크기로 줄였기 때문이다. 이 비올라는 한 번도 줄이지 않았고, 알려진 바로는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테너 비올라는 이것 하나뿐이다.
스트라디바리를 아끼던 크레모나의 귀족 바르톨로메오 아리베르티는 코시모 3세 대공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대공자에게 선물하려고 스트라디바리에게 바이올린 두 대와 첼로 한 대를 주문했다. 선물은 호평을 받았고, 스트라디바리는 비올라 두 대, 곧 큰 테너 비올라와 그보다 작은 콘트랄토 비올라를 더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5중주 한 벌을 갖추었다. 테너 비올라 안쪽, 베이스바 곁에는 “Prima 20 ottobre 1690 per S. A. da Fiorenza”라고 적혀 있는데, 1690년 10월 20일 피렌체의 전하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몸통은 비올라치고 크고 위아래 부분이 넓으며, 앞판은 결이 고르고 곧은 가문비나무다. 지판 아래쪽 끝, f자 구멍 바로 위에는 자개로 만든 메디치 가문 문장이 박혀 있다. 왕관 아래 공 여섯 개가 있는 방패를 통통한 아기 천사인 푸토 둘이 받친 모양이다. 꼬리걸이판에는 활을 든 날개 달린 큐피드가 자개로 새겨져 있다.
1700년에 작성된 페르디난도의 악기 목록에는 이 비올라가 5중주의 하나로 올라 있다. 1737년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기고 로렌 가문이 토스카나를 다스리게 되자 악기들은 예전만큼 잘 관리되지 못했고, 1776년에는 콘트랄토 비올라가 목록에서 사라졌지만 테너 비올라는 남았다. 1863년 3월 10일 테너 비올라는 훗날 루이지 케루비니 음악원이 되는 음악 학교에 넘겨졌고, 연주하기에 마땅치 않은 이 큰 비올라의 값은 1000리라로 매겨졌다. 1869년 12월 음악 학교의 관리인이자 복원가였던 주세페 스카람펠라는 나무좀을 없애려고 비올라를 열었다가, 안에서 스트라디바리가 직접 “Correto da me Antonius Stradivarius”라고 적어 붙인 덧댐 조각을 찾아냈다. 자신이 손수 고쳤다는 뜻이다. 이 비올라는 1690년부터 줄곧 피렌체에 있다. 2001년부터는 아카데미 미술관의 악기 부문에 전시되어 있지만, 소유권은 지금도 음악원에 있다.
5중주의 나머지 악기 가운데 첼로도 아카데미에 있고, 바이올린 한 대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에, 콘트랄토 비올라는 워싱턴의 미국 의회도서관에 있다.
이 열 점 말고도
우리는 옮겨 온 내력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원래 자리에서 왜 옮겼는지까지 알 수 있는 작품을 골랐다. 이 목록에 가장 가까이 갔던 작품은 아카데미가 1939년에 사들인 《팔레스트리나 피에타》였지만,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견해에는 반론이 있고 미술관 스스로도 논란이 있다고 밝힌다. 금빛 바탕 패널 가운데서는 로렌초 모나코의 세폭 제단화 《수태고지》와 조반니 다 밀라노가 1365년에 그린 《피에타》를 볼 만하다. 악기 부문에는 비올라 말고도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만든 타원형 스피넷과 흑단 하프시코드가 전시되어 있다. 크리스토포리는 메디치 궁정의 악기 관리인으로, 피아노를 발명한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