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피네트 가문 남성의 초상
레스피네트 가문 남성의 초상한스 멤링, 1487,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마우리츠하위스는 1630~1640년대에 나사우지겐의 요한 마우리츠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는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서인도 회사를 대신해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다스렸고, 집의 설계는 건축가 야코프 판 캄펀과 피터르 포스트가 맡았다. 집을 지은 재산의 일부는 브라질의 설탕과 노예 무역에서 나왔으며, 미술관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1986년에 만든 요한 마우리츠 흉상 복제품을 2017~2018년 현관 홀에서 치운 뒤, 그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은 의회 질의로까지 번졌다.

컬렉션의 뿌리는 오라녜 가문 출신으로 공화국을 다스린 총독들의 그림, 무엇보다 1774년 바위턴호프에 있던 자기 갤러리를 일반에 연 빌럼 5세의 그림이다. 1795년 프랑스군이 그의 그림들을 파리로 가져갔고, 1815년 그 대부분이 돌아왔으며, 1816년 빌럼 1세 국왕이 왕립 회화관을 세웠고, 1820년 국가가 요한 마우리츠의 집을 사들였으며, 1822년 그 집에서 그림 305점으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그 뒤로 이곳을 위해 그림을 사들인 이는 국왕, 개혁적인 관료 빅토르 더 스튀르스, 관장 아브라함 브레디위스, 개인 수집가들, 그리고 네덜란드 미술관들의 미술품 구입을 돕는 민간단체 렘브란트 협회였다. 협회가 창립 이래 처음으로 미술관에 구입 자금을 내준 것은 1894년으로, 브레디위스가 마우리츠하위스를 위해 한스 멤링의 남자 초상을 살 때였다. 1945년 이후에는 국가와 기금과 복권이 이곳의 그림을 사들였다.

이 글에서는 그림 20점을 이야기한다. 이 그림들이 이 집에 오기까지의 길을 따라가면, 시대마다 누가 이곳에 무엇을 걸지 정했는지가 보인다. 첫 그림은 요한 마우리츠 자신을 위해 그린 브라질 풍경이고, 마지막 그림은 2018년 복권 기금으로 사들인 흥겨운 모임 장면이다.

브라질이 값을 치른 집

1. 프란스 포스트 《브라질 이타마라카섬 풍경》, 1637년

캔버스 뒷면에는 종이쪽지가 붙어 있고, 프란스 포스트는 거기에 그림에 무엇이 그려졌는지 적어 두었다. 남쪽에서 바라본 이타마라카섬으로, 도시는 위쪽 언덕 위에 있고 아래쪽 바다로 나가는 어귀 바로 곁에는 오라녜 요새가 있으며, 포스트는 끝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탄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25세 안팎이었고, 1637년 지형 화가로 요한 마우리츠의 수행단에 끼어 브라질에 왔으며, 같은 해에 이 풍경을 그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유럽 화가가 브라질을 그린 첫 그림이자 포스트의 그림 가운데 알려진 가장 이른 작품이라고 부른다. 요한 마우리츠는 처음에 이타마라카섬에 식민지의 새 수도를 세울 생각이었고, 레이크스미술관은 해변의 사람들이 아마 섬을 둘러보는 중일 것이라고 쓴다.

브라질 이타마라카섬 풍경
브라질 이타마라카섬 풍경프란스 포스트, 1637,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하늘이 캔버스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납작한 크림색 구름은 그 아래 넓고 옅은 황토색 물과 거의 같은 빛깔이다. 물 건너편으로 길고 짙은 초록빛 섬이 뻗어 있고, 그 등성이에는 가느다란 야자나무들과 붉은 지붕을 얹은 하얀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앞쪽의 잿빛 모래 해변에는 사람들과 말들이 거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가운데에서는 넓은 챙의 밝은 모자를 쓰고 채찍을 든 얼굴 흰 기수가 짙은 적갈색 말에 앉아 있는데, 쪽지에 적힌 포르투갈 사람이 바로 그다. 그 곁에는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쓴 다부진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서, 치켜든 손으로 섬을 가리킨다. 왼쪽에서는 웃통을 벗은 흑인 남자가 머리에 인 바구니를 붙잡고 있고, 오른쪽에서는 또 한 사람이 흰 말의 고삐를 쥐고 있으며, 그의 발치에는 오렌지가 담긴 고리버들 바구니가 놓여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의 쓰러진 통나무 위에는 화가의 이름 머리글자와 성, 그리고 1637이라는 연도로 된 서명이 짙은 대문자로 적혀 있다.

미술관은 포스트의 그림이 대체로 식민지를 목가적으로 그리지만, 이 그림에서는 화가가 의도하지 않은 채 피부색에 따른 불평등을 드러냈다고 쓴다. 화가의 형제인 피터르 포스트는 마우리츠하위스를 설계한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레이크스미술관과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그림이 1679년 요한 마우리츠가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 선물한 그림들 가운데 하나였으리라고 추정한다. 1879년 레이크스미술관이 파리 사람 외젠 오디노에게서 이 그림을 샀고, 1953년 소유권은 그대로 둔 채 마우리츠하위스에 장기 대여했다.

브라질 이타마라카섬 풍경
브라질 이타마라카섬 풍경프란스 포스트, 1637,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메리 스튜어트 1세(1631-1660)와 시동의 사후 초상
메리 스튜어트 1세(1631-1660)와 시동의 사후 초상아드리안 한네만, 1664,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2. 아드리안 한네만 《하인과 함께 있는 메리 스튜어트(1631~1660)의 사후 초상》, 1664년경

이 사후 초상에서 영국 공주 메리 스튜어트는 흰 공단 옷에 깃털 망토를 두른 아메리카 여인의 차림으로 서 있고, 그 곁에는 흑인 소년이 있다. 1664년 무렵 헤이그의 초상화가 아드리안 한네만은 이 그림을 그녀의 아들, 훗날 총독이자 영국 왕이 되는 빌럼 3세를 위해 그렸는데, 아들은 그때 14세 안팎이었다. 총독 빌럼 2세의 미망인이던 메리는 1660년 12월 24일 런던에서 천연두로 죽었고, 나이는 29세였다. 한네만은 오랫동안 잉글랜드에서 반 다이크의 화풍으로 일하다가 1638년 무렵 헤이그로 돌아와, 메리 곁에 모인 망명 영국 궁정의 화가가 되었으니, 그녀의 얼굴은 실물을 보며 여러 번 그린 셈이다.

옷차림도 실제에서 가져왔다. 1655년 1월 헤이그의 가면무도회에서 한 목격자는 공주가 아마존 여인처럼 아주 화려하게 차려입었다고 적었는데, 아메리카 여인의 의상을 입었다는 뜻이다. 같은 해 한네만은 이 차림의 그녀를 그렸고, 그 초상은 영국 왕실 컬렉션에 속해 있다.

메리는 크림색과 금색 줄무늬 터번을 썼는데, 터번에는 연어빛 분홍 깃털과 진주 줄이 달려 있고, 어깨에는 파랑, 노랑, 흰색 조각을 섞은 붉은 주황빛 깃털로 만든 무거운 망토를 걸쳤다. 이런 깃털 망토는 당시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있던 브라질 북동부의 투피남바족이 만들었다. 네덜란드 궁정과 관련된 비슷한 붉은 망토가 코펜하겐에 남아 있는데, 아마 요한 마우리츠를 거쳐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왼쪽, 메리보다 낮은 곳에는 겨자색 비단 웃옷을 입고 귀에 진주 귀고리를 단 흑인 소년이 서서, 그녀의 팔꿈치 곁에서 긴 진주 줄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소년은 메리를 올려다보고, 메리는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커다란 자개 조개껍데기가 놓여 있고, 그 아래 어두운 돌 턱에서 진주 줄이 늘어져 있다.

이 초상이 어떻게 이 집에 왔는지는 미술관 스스로도 말하지 못한다. 오라녜 가문의 가족 그림으로, 1755년에는 총독들의 혼설라르스데이크 궁에 있었고, 미술관의 설명에는 1875년이나 그 전에 들어왔다고만 적혀 있다. 소년의 이름은 연구자들이 찾아내지 못했다. 2019~2020년, 《변하는 이미지, 요한 마우리츠를 찾아서》 전시를 마친 뒤 미술관은 요한 마우리츠와 네덜란드령 브라질과 노예제를 다룬 새 상설 전시실로 이 초상을 옮겼고, 설명문에는 한네만이 소년을 이국적인 장식물로 격하해 메리의 흰 피부와 높은 신분을 돋보이게 했다고 적었다. 그전의 미술관 설명에는 메리가 소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하다는 말뿐이었다.

메리 스튜어트 1세(1631-1660)와 시동의 사후 초상
메리 스튜어트 1세(1631-1660)와 시동의 사후 초상아드리안 한네만, 1664,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총독들이 모으고 프랑스군이 가져가다

젊은 어머니
젊은 어머니헤리트 다우, 1658,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3. 헤리트 다우 《젊은 어머니》, 1658년

1660년 10월 홀란트와 서프리슬란트 주의회는 레이던의 화가 헤리트 다우에게 이 작은 집안 장면의 값으로 4000휠던을 치렀다. 독일의 화가이자 전기 작가 요아힘 폰 잔트라르트에 따르면 다우의 그림은 한 점에 1000휠던까지 나갔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값이었다. 주의회가 이 그림을 산 것은 1660년 왕위를 되찾은 영국 왕 찰스 2세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주의회는 이 선물을 주로 레인스트 컬렉션의 이탈리아 그림과 고대 조각으로 꾸렸고,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은 나중에 보탰다. 11월 ‘네덜란드의 선물’은 런던에서 왕에게 바쳐졌다. 찰스 2세는 다우와 엘스하이머의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꼽으며 다우를 궁정으로 불렀지만, 화가는 레이던에 남았다.

다우는 유리 장인의 아들로, 처음에는 유리에 무늬를 새기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고, 1628년 젊은 렘브란트의 첫 제자가 되었다. 위쪽이 둥근 패널은 거의 전부를 높고 어두운 방이 차지하고, 인물들은 아래쪽 3분의 1에 앉아 있다. 빛은 왼쪽 높은 창에서 들어오고, 활짝 열린 덧창 너머로 햇빛 비치는 거리가 보인다. 젊은 어머니는 창가의 고리버들 의자에 앉아 무릎에 레이스 짜는 쿠션을 올려놓고 똑바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 곁에서는 흰 두건을 쓴 하녀가 커다란 고리버들 요람 옆에 무릎을 꿇고 파란 덮개를 들춰 올리는데, 덮개 밑의 아기는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바닥에 고인 빛 속에는 문이 열린 등불이 옆으로 누워 있고, 오른쪽 어스름 속에는 죽은 산토끼가 걸려 있으며, 천장에서는 가지가 여섯 개인 샹들리에가 내려온다. 위쪽 창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문장 아래에 다우의 이름과 1658이라는 연도가 적혀 있는데, 이 글자들은 유리 조각들과 함께 납 테두리에 끼워 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림은 30년쯤 영국 왕실 컬렉션에, 처음에는 찰스 2세, 다음에는 제임스 2세의 손에 있었다. 그 뒤 총독이자 영국 왕이던 빌럼 3세가 다른 그림 30점가량과 함께 이 그림을 네덜란드로 가져갔고, 그다음에는 오라녜 가문 안에서 대물림되다가 빌럼 5세의 갤러리에 들어갔다. 1795년 프랑스군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갔고, 1815년 그림은 돌아왔으며, 1822년 마우리츠하위스가 문을 열 때 걸린 그림 가운데 하나였다.

마우리츠하위스의 연구자들은 주의회가 팔리기 몇 해 전에 시작된 그림을 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엑스선 사진을 보면 다우는 작업하면서 인물들을 크게 고쳐 그렸고, 미술관의 2016년 풍속화 도록에는 연도의 마지막 숫자가 처음에는 1이었다가 8로 고쳐졌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다.

4. 파울뤼스 포터르 《황소》, 1647년

황소
황소파울뤼스 포터르, 1647,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마우리츠하위스의 복원가 애비 밴디비어와 욜레인 스힐더르는 2025년 12월, 누렇게 변하지 않는 새 합성 니스를 입혀 《황소》 작업을 마쳤다. 두 사람은 2024년 여름부터 미술관 안에 마련한 임시 작업실에서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일했고, 그 작업실에는 ‘외양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누렇게 변한 니스와 200년까지 묵은 덧칠을 걷어 내자, 시커먼 먹구름 아래 하늘에서 물감이 떨어져 나간 자리들이 드러났다. 하늘은 네덜란드 왕립 기상 연구소의 법과학 기상학자에게 조언을 받아 되살렸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 소나기가 물러가는 초여름의 하루가 되었다.

복원가들이 딜레마라고 부른 것은 ‘프랑스 나뭇가지’였다. 1795년부터 1815년까지 그림은 루브르에 걸려 있었는데, 거기서 손상이 발견되자 나무에 없던 가지 하나를 그려 넣어 가렸다. 이 가지도 그림의 역사에 속했으므로, 복원가들은 나중에 걷어 낼 수 있는 가역적인 덧칠로 그것을 덮었다. 가지에서는 잎이 몇 장 달린 가는 잔가지만 남았고, 황소의 등 위로는 하늘이 더 넓게 열렸다.

이 그림은 마우리츠하위스에서 가장 큰 그림이고, 그림 속 어린 황소는 거의 실물 크기로, 당시라면 대개 역사화에나 쓰던 크기다. 황소는 옆모습으로 서서 머리를 보는 사람 쪽으로 돌렸고, 붉은 갈색 털가죽에는 어깨를 가로지르는 흰 얼룩이 있으며, 아랫입술에서는 침이 실처럼 늘어지고, 어깨와 옆구리에는 파리가 앉아 있다. 왼쪽에는 얼굴이 흰 암소가 누워 역시 똑바로 우리를 바라보고, 울타리 너머에서는 갈색 모자를 쓴 늙은 목동이 나무줄기에 손을 얹고 서 있으며, 아래쪽, 암소의 앞다리 앞 맨땅에는 작은 초록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숫양 위쪽 울타리 판자에는 파울뤼스 포터르가 1647년에 그렸다는 뜻의 글귀가 칼로 새긴 것처럼 적혀 있다. 포터르는 그때 22세였고 1654년 28세로 죽었으며, 미술관의 말로는 이 황소를 나이가 서로 다른 여러 마리의 짐승을 짜 맞춰 그렸다.

황소
황소파울뤼스 포터르, 1647,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8세기 전반 이 그림은 하를럼 시장 집안의 가보로서 유언을 따라 대물림되었다. 1749년 마지막 상속인이 죽자 그림은 하를럼의 경매에 첫 번째 품목으로 나왔고, 경매인 프란스 데커르가 630휠던에 샀는데, 그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값이었다. 집안에 남은 경매 목록의 여백에는 데커르가 레인스트 제독의 부탁을 받아 샀고, 제독은 이 그림을 로의 저택에 있던 공에게 선물했다는 메모가 적혀 있다. 야코프 레인스트 제독은 오라녜 가문의 지지자였고, 공은 총독 빌럼 4세였으며, 빌럼 4세는 1748년과 1750년에 레인스트의 계급을 올려 주었다.

5. 대 얀 브뤼헐과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 있는 지상 낙원》, 1615년경

인간의 타락이 있는 에덴동산
인간의 타락이 있는 에덴동산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패널 아래 가장자리에는 서명이 두 개 있다. 가운데보다 왼쪽, 공작 꼬리 아래에는 작은 대문자로 인물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렸다는 뜻의 라틴어 서명이 적혀 있다. 오른쪽 물가에는 겨우 알아볼 만한 아주 작은 두 번째 글귀가 있는데, 이것을 대 얀 브뤼헐의 서명으로 읽는다. 대 피터르 브뤼헐의 아들이자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다스린 알베르트 대공과 이사벨라 대공비의 궁정 화가였던 브뤼헐은 루벤스와 친구였고, 두 사람은 이런 그림을 여러 점 함께 그렸다. 미술관의 설명으로는 구도는 브뤼헐이 짰고 그림은 루벤스가 시작했다. 루벤스는 아담과 이브, 나무, 말, 뱀을 얇게 스케치하듯 그렸고, 그다음 브뤼헐이 두꺼운 물감으로 백과사전처럼 정확하게 식물과 동물을 그려 넣었다.

18세기 초 이 그림은 레이던의 수집가 피터르 드 라 쿠르 판 데르 보르트의 것이었고, 그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본 화가 전기 작가 아르놀트 하우브라컨은 자기가 본 브뤼헐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했다. 1766년 9월 8일 드 라 쿠르 집안 컬렉션의 매각에서 총독 빌럼 5세를 위해 이 그림을 샀는데,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같은 경매에서 반 다이크나 요르단스에게 매겨진 값보다 훨씬 많이 치렀다. 빌럼 5세는 이 그림을 자기 갤러리에 걸었고, 1795년 그림은 컬렉션 전체와 함께 파리로 실려 갔다가 1815년 돌아왔다.

창백한 이브는 왼쪽에 서 있고, 금발은 무릎까지 늘어져 있다. 이브는 오른손으로 아직 가지에 달린 사과를 향해 손을 뻗고, 왼손으로는 다른 사과를 아담에게 건넨다. 아담은 풀 덮인 둔덕에 앉아 한 손으로 사과를 받고, 다른 손은 집게손가락을 편 채 들어 올렸다. 뱀은 선악과나무 가지들을 휘감고, 머리를 이브가 사과를 따는 바로 그 가지 쪽으로 내리고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루벤스가 그린 적갈색 말이 서서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나머지는 모두 브뤼헐이 동물로 채웠다. 호랑이와 얼룩 표범은 등을 대고 뒹굴고, 시냇가에는 왜가리와 푸른 쇠물닭들이 서 있으며, 나무 위에는 마코앵무새들이 앉아 있고, 멀리 나무 아래로는 낙타와 코끼리가 보이며, 이브의 발치에는 흰 볼로네즈 강아지가 앉아 있다. 왼쪽 아래 구석, 칠면조 뒤에서는 원숭이가 벌써 사과를 베어 물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있는 에덴동산
인간의 타락이 있는 에덴동산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국왕이 나라를 위해 사들이다

6.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델프트 풍경》, 1660~1661년경

델프트 풍경
델프트 풍경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마르셀 프루스트는 1902년 10월 18일 헤이그에서 《델프트 풍경》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했다. 1921년 5월 이 그림이 파리 죄드폼에서 열린 네덜란드 미술 전시에 오자 프루스트는 다시 그림을 보러 갔고, 그의 소설 《갇힌 여인》에서 작가 베르고트는 이 그림 앞에서 노란 벽의 작은 면을 바라보다가 죽는다.

국가는 1822년 5월 22일 암스테르담의 스틴스트라 컬렉션 매각에서 2900휠던에 이 그림을 샀고, 빌럼 1세 국왕은 그림을 헤이그에 걸게 했다. 마우리츠하위스에 들어온 첫 페르메이르였다. 그보다 한 세기도 더 전인 1696년 야코프 디시위스 컬렉션 매각에서는 이 그림에 200휠던이 매겨졌는데, 그 경매의 어느 그림보다 비싼 값이었다. 페르메이르는 평생 델프트에서 살았고, 그가 그린 도시 풍경은 이 그림과 《골목길》 두 점이다.

하늘이 캔버스의 위쪽 5분의 3을 차지하고, 맨 위로는 무거운 잿빛 갈색 구름이, 그 아래로는 흰 구름 띠가 지나간다. 도시는 물 건너 먼 강둑을 따라 좁은 띠처럼 뻗어 있고, 물가의 성벽과 문들은 그늘에 잠겼지만 그 뒤의 지붕들은 햇빛을 받고 있다. 가운데보다 왼쪽에는 계단식 박공에 둥근 금빛 시계판을 단 벽돌의 스히담 문이, 오른쪽에는 뾰족한 작은 탑 두 개와 도개교를 갖춘 로테르담 문이 있다. 그 뒤로 햇빛을 흠뻑 받은 신교회의 밝은 탑이 솟아 있고, 종루의 열린 틈으로는 옅은 하늘이 보인다. 옛 종들은 1660년 봄에 떼어 냈고, 암스테르담의 주조공 헤모니 일가가 부어 만든 새 종들은 1660년 5월부터 1661년 가을 사이에 걸었으니, 페르메이르는 비어 있는 종루를 본 것이다. 오른쪽 크고 어두운 배의 선체에는 젖은 나무에 비친 반짝임 같은 흰 물감 점들이 도드라져 있다.

프루스트가 쓴 노란 벽의 작은 면이 어디인지를 두고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가장 자주 꼽히는 곳은 로테르담 문의 작은 탑들 왼쪽, 햇빛을 받은 따뜻한 노란 지붕의 짧은 띠다.

델프트 풍경
델프트 풍경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7.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과 공방 《그리스도의 애도》, 1460~1464년경

두 세기 동안 이 패널은 얀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멤링의 작품으로, 그리고 마침내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작품으로 불렸다. 빌럼 1세 국왕은 1827년 아직 멤링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던 이 패널을 3000휠던에 마우리츠하위스를 위해 사들이게 했고, 1464년에 죽은 브뤼셀의 시 전속 화가 로히어르에게 이 그림을 돌린 것은 1847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렇게 본 사람은 독일 미술사가 구스타프 바겐이었다. 네덜란드의 미술관에 있는 로히어르의 그림은 이것 하나뿐이고, 마우리츠하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포함해 인물 11명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까지 빽빽이 들어차 있고, 새파란 하늘 아래의 풍경은 그들의 머리 위로만 보인다. 그리스도의 몸은 흰 수의 위에 대각선으로 누워 있고, 머리는 보라색 모자를 쓴 노인의 모피 외투 곁에 놓였으며, 왼팔은 성모 쪽으로 뻗어 있다. 짙은 파란 옷의 마리아는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은 채 두 손바닥을 아들의 팔에 대고 있고, 붉은 옷의 요한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서는 진주로 수놓은 검은 보디스를 입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붉은 망토를 눈에 갖다 대고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흰 주교관에 붉은색과 금색의 제의를 입고 수정 장식이 달린 금빛 주교 지팡이를 든 주문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에게서 아라스, 투르네, 위트레흐트의 주교를 비롯해 여러 주교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막달레나, 요한, 성모, 그리고 왼쪽 아래에 앉은 또 다른 마리아의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이 마리아의 눈물은 오랫동안 누렇게 변한 니스에 가려 있어서, 1949년 미술사가 포헬상은 그녀가 울지 않는다고 썼다.

그리스도의 애도
그리스도의 애도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1460,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이 그림을 멤링이라고 부른 사람은 브뤼셀의 수집가 샤를루이 판 케버르베르흐 판 케설 남작으로, 그는 1817년 이 그림을 샀고 한 해 뒤 자기 책에 이 그림에 관해 썼다. 케버르베르흐 이전에는 뢰번의 조제프 피에르 헤츠가 이 그림을 가지고 있으면서 얀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여겼고, 17세기 초에는 아마 뢰번의 아트레흐트 학료에 있었을 것이다.

2009년 이 그림은 뢰번의 로히어르 전시에 나갔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 곁에서 누런 니스가 보기 흉했다. 복원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졌고, 2018년 여름에는 전시실 안에 차린 작업실에서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니스를 벗겨 냈다. 요한, 베드로, 막달레나의 머리 둘레에는 가는 금빛 후광 고리가 남았는데, 복원가들은 이것을 19세기에, 아마 케버르베르흐를 위해 그림을 손본 화가 마테위스 판 브레이가 덧붙였다고 본다. 고리의 지름이 꼭 9.5센티미터와 10센티미터라서 19세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2025년 논문에서 마우리츠하위스의 복원가들은 이 그림을 로히어르의 생애 중반인 1440~1450년에 그린 것으로 보았지만, 미술관은 화가의 말년으로 연대를 잡는다.

왼쪽과 오른쪽 같은 높이에서 복원가들은 그을음과 촛농 방울이 남은 그을린 자국 두 군데를 찾아냈는데, 패널 앞 제단에서 타던 초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자국들은 이미 16세기나 17세기에 두 번이나 메우고 손질했다.

8. 렘브란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렘브란트, 1632,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탁자 위의 시신은 레이던 출신으로 아리스 킨트라는 별명으로 불린 아드리안 아드리안스의 것으로, 그는 1632년 1월 강도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1월 31일 암스테르담 외과의 길드의 해부학 강사 니콜라스 튈프 박사가 이 시신으로 자신의 첫 공개 해부를 했다. 이런 해부는 한 해에 한 번, 겨울에 처형된 사람의 시신으로 열렸고, 구경꾼들은 입장료를 냈다. 렘브란트는 25세나 26세였고, 고향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생애 첫 집단 초상인 이 그림으로 도시에서 이름을 얻었다.

시신은 캔버스 아래쪽 절반을 가로질러 거의 수평으로 누워 있는데, 창백한 잿빛이고 얼굴은 반쯤 그늘에 잠겨 있다. 시신의 왼쪽 아래팔은 손가락까지 절개되어 있고, 튈프는 집게로 붉은 근육을 들어 올리면서 자기 왼손은 손가락을 구부린 채 가슴께에 들고 있는데, 이 근육들이 손가락을 어떻게 굽히는지 보여 주는 듯하다.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그뿐이다. 흰 깃을 단 검은 옷의 외과의 일곱 명이 왼쪽에 피라미드꼴로 서 있고, 둘은 팔 쪽으로 몸을 숙였으며, 맨 위의 한 사람은 똑바로 우리를 바라본다. 엑스선 사진을 보면 이 사람도 처음에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렘브란트가 그것을 덧칠해 지웠고, 아마 모자는 강사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튈프의 어깨 너머에 선 외과의는 팔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있는데, 그 위에 나중에 그림 속 모든 사람의 이름이 적혔고, 1996~1998년 복원 때 이 글씨는 일부 지워졌다. 위쪽 뒷벽에 붙은 종이에는 렘브란트가 1632년에 그렸다는 뜻의 서명이 있는데, 이름 철자에 아직 ‘디’ 글자가 없다.

실제 해부는 내장이 가장 먼저 상하기 때문에 배에서 시작했고, 팔에는 맨 마지막에야 이르렀다. 렘브란트는 몸의 다른 곳은 손대지 않은 채 팔만 절개된 모습으로 그렸고, 연구자들은 여기서 베살리우스의 1543년 해부학 책에 실린 판화, 곧 베살리우스 자신이 아래팔 근육을 보여 주는 판화를 본뜬 연출을 본다.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렘브란트, 1632,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그림은 길드의 소유였다가 1798년부터는 외과의 미망인 기금의 소유가 되었다. 기금이 해산되자 그림은 1828년 8월 4일 경매에 나올 예정이었다. 7월 19일 빌럼 1세 국왕은 칙령으로 경매를 멈추었고, 국가가 3만 2000휠던에 그림을 샀으며, 국왕은 그림을 마우리츠하위스로 보냈다. 이 돈의 대부분은 레이크스미술관과 마우리츠하위스가 남아돈다고 본 그림들을 경매에 부쳐 마련했고, 가장 많은 돈을 가져온 것은 레이크스미술관의 그림들이었다. 레이크스미술관 관장 코르넬리스 아포스톨은 이미 1817년에 《해부학 강의》를 자기 미술관에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림이 걸려 있던 곳에서 부엌 연기에 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식가들이 시장을 앞지르다

디아나와 님프들
디아나와 님프들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53,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9.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디아나와 님프들》, 1653~1654년경

내무부의 미술 담당 고문 빅토르 더 스튀르스는 1876년 5월 4일 파리의 네빌 골드스미드 컬렉션 매각에서, 네덜란드 화가 니콜라스 마스의 작품으로 나온 이 그림을 국가를 위해 1만 프랑에 샀다. 마우리츠하위스 관장 더 용어는 너무 비싸다며 반대했다. 1885년 그림을 복원할 때 더 스튀르스는 마스의 이름으로 된 서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름과 성의 머리글자인 앞의 두 글자가 다른 서명의 흔적을 고쳐 만든 것임을 알아보았고, 그 밑에서 페르메이르의 서명을 읽어 냈으며, 그의 판독은 뒤에 사실로 확인되었다.

1876년의 페르메이르는 1866년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거가 쓴 글들 덕분에 막 다시 발견된 참이었고, 실내화와 도시 풍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역사화가로 출발한 것으로 보이며, 《디아나》는 1653년 말 그가 델프트 화가 길드에 들어갈 무렵에 그린, 남아 있는 그림 가운데 가장 이른 작품일 수도 있다. 1889년부터 마우리츠하위스 관장이던 브레디위스는 1892년 이 그림을 또 다른 페르메이르, 곧 위트레흐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요하네스 판 데르 메이르의 작품으로 돌렸다.

디아나는 금빛 노란 옷을 입고 바위에 앉아 눈을 내리깔았고, 얼굴은 반쯤 그늘에 잠겨 있다. 그녀가 여신이라는 것은 머리에 두른 가는 띠의 작은 금빛 초승달과 갈색 얼룩이 있는 흰 개로 알아본다. 구릿빛 갈색 공단 보디스를 입은 님프가 무릎을 꿇고 노란 해면으로 그녀의 발을 씻기는데, 님프의 등은 캔버스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다. 예전에 오른쪽에서 캔버스를 띠 모양으로 잘라 냈기 때문이다. 뒤에는 검은 옷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고, 개 곁에는 가시 돋친 엉겅퀴가 삐죽 솟아 있다. 레이크스미술관 연구자들은 캔버스를 스캔하다가, 페르메이르가 디아나 옆 바위에 처음에는 화살 통을 그렸다가 덧칠해 지웠음을 알아냈다.

옛 복제 사진들을 보면 오른쪽 위 구석에 구름 낀 파란 하늘이 있다. 1999~2000년 복원 때 이 하늘은 1704년에 발명된 프러시안블루와 1840년 무렵 널리 쓰이기 시작한 크롬 그린으로 19세기에 그린 것임이 밝혀졌다. 그 아래 물감은 너무 약해서 하늘을 벗겨 낼 수 없었기에, 복원가들은 나무와 같은 색조의 얇고 어두운 층으로 하늘을 덮었고, 미술관은 이 층을 걷어 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디아나와 님프들
디아나와 님프들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53,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유혹
유혹유디트 레이스터르, 163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0. 유디트 레이스터르 《남자에게 시달리는 젊은 여인》, 1631년

젊은 여인이 눈을 내리깐 채 바느질감 위로 몸을 숙이고 앉아, 바늘이 꽂힌 흰 천을 무릎에 놓고 있다. 그 뒤에서 덥수룩한 모피 모자를 쓴 남자가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웃는다. 그는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다른 손바닥에는 금화 한 줌을 올려 내민다. 높은 받침대 위에서 작은 기름 등잔이 타고 있는데, 그 불꽃은 남자의 어두운 웃옷을 배경으로 밝게 도드라지고, 넓은 청록색 치마에는 빛이 긴 주름을 따라 내려앉는다. 치맛자락 곁에는 발 난로가 놓여 있고, 그 구멍들 사이로 붉은 숯이 빛난다. 적외선으로 보면 레이스터르는 처음에 남자의 손을 여인의 목 가까이에 얹었다가 나중에 더 아래로 내렸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제안》이나 《젊은 여인에게 돈을 내미는 남자》라고 불렸다. 1975년 연구자 프리마 폭스 호프릭터는 처음으로 이 그림을, 남자에게 시달리는 여인을 공감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썼고, 여인이 기꺼이 돈을 받는 흔한 장면들에 화가가 내놓은 대답을 여기서 보았다. 역사가 웨인 프래니츠는 이 그림에서 진지한 구애를 보았고, 미술관은 여성의 미덕을 보여 주는 예로 이 그림을 설명했으며, 그 뒤 마우리츠하위스는 그림에 새 제목을 붙였다.

1892년 아브라함 브레디위스는 마우리츠하위스를 위해 이 패널을 1500휠던에 샀고, 소장품 대장에는 1660년 무렵의 네덜란드 화파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한 해 뒤 부관장 코르넬리스 호프스테더 더 흐로트가 그림에서 화가의 이름과 성 머리글자를 엮고 별을 곁들인 모노그램과 1631이라는 연도를 찾아냈다. 모노그램은 왼쪽 가장자리, 높이로는 한가운데쯤, 탁자 다리의 왼쪽에 보인다. 유디트 레이스터르는 자기 성을 별로 빗대었는데, 이 성은 네덜란드어로 ‘길잡이 별’과 거의 같게 들린다. 그녀는 하를럼에서 프란스 할스 가까이에서 일했고, 1631년에는 22세 안팎이었으며, 1636년 결혼한 뒤로는 그림을 점점 덜 그렸다.

같은 1893년 런던의 왕좌 법원에서는 프란스 할스의 작품으로 팔린 그림을 둘러싼 소송이 열렸는데, 다툼의 대상은 바로 그 별이 달린 모노그램이었다. 양쪽은 그날로 화해했고, 레이스터르의 이름은 법정에서 끝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호프스테더 더 흐로트가 두 그림 모두에 이 이름을 되찾아 주었고, 1893년 7월 1일 런던의 잡지 《애서니엄》이 이에 관한 그의 편지를 실었다. 그 소송에 걸렸던 그림은 이제 레이스터르의 《즐거운 한 쌍》으로 알려져 있다.

유혹
유혹유디트 레이스터르, 163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황금방울새
황금방울새카럴 파브리티위스, 1654,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1. 카럴 파브리티위스 《황금방울새》, 1654년

1654년 10월 12일 델프트의 화약고가 폭발했고, 카럴 파브리티위스는 자기 집에서 32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1640년대 초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에게 배웠고, 1650년 무렵 델프트로 옮겼으며, 그의 그림은 십여 점 남아 있다. 《황금방울새》에도 바로 그해인 1654년의 서명이 있다. 패널의 물감 층 전체에 금이 가지 않은 작은 움푹 팬 자국들이 흩어져 있는데, 물감이 아직 무를 때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하며, 미술관은 이것이 그 폭발 때 날아든 파편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실물 크기의 황금방울새가 잿빛 모이통 위, 밝은 회벽에 박아 놓은 반원형 나무 횃대 두 개 가운데 위쪽 횃대에 앉아 있다. 새는 등과 접은 날개를 우리 쪽으로 돌리고, 고개만 어깨 너머로 돌려 똑바로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데, 부리 둘레에는 붉은 가면 같은 무늬가, 뺨에는 흰 무늬가 있다. 검은 날개의 노란 줄무늬는 파브리티위스가 물감을 두껍게 올린 뒤 마르기 전에 붓대 끝으로 긁어 냈다. 모이통 아래로는 집에서 기르는 새를 매어 두던 사슬이 고리 모양으로 늘어져 있다. 빛은 왼쪽에서 들어오고, 오른쪽 벽에는 부드러운 갈색 그림자가 지며, 모이통 아래쪽에는 가는 잿빛 대문자로, 마치 연필로 쓴 듯 파브리티위스의 이름 머리글자와 성, 그리고 1654라는 연도가 적혀 있다.

2003년 이 패널을 컴퓨터 단층 촬영 장치로 조사했는데, 연백이 보통의 엑스선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조사해 보니 파브리티위스는 처음에 어두운 바탕 위에 새를 그렸고, 패널에는 금박 액자가 못 열 개로 박혀 있었다. 그 뒤 액자를 떼어 내고 바탕을 밝은 벽으로 다시 칠하고 아래쪽 반원 횃대를 더했다. 이 패널이 무엇에 쓰려고 만든 것인지를 두고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이어지는데, 작은 장이나 다른 그림을 넣어 두는 상자의 문짝으로 보기도 하고, 창틀의 일부나 간판으로 보기도 한다.

1654년 이후 거의 200년 동안 이 그림은 문서에서 자취를 감춘다. 1859년에는 이미 브뤼셀의 한 수집가가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페르메이르를 다시 발견한 바로 그 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거(9번)가 이 그림을 보았으며, 1865년 수집가의 상속인들이 이 그림을 토레에게 선물했다. 그가 죽은 뒤 1892년 그림은 경매에 나왔고, 나중에 파리의 수집가 에밀 마르티네의 손에 들어갔다. 1896년 2월 27일 파리 드루오 경매장에서 열린 그의 컬렉션 매각에서 브레디위스가 마우리츠하위스를 위해 6200프랑에 이 그림을 샀다. 미술관의 이야기로는 값이 오르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보내 응찰하게 했다고 한다.

2012~2014년 마우리츠하위스를 고쳐 짓는 동안 《황금방울새》는 도쿄,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뉴욕을 돌았고, 뉴욕 프릭 컬렉션에서는 이 그림을 보려는 줄이 한 블록을 빙 둘러섰다. 그림이 뉴욕에 있던 2013년 10월, 이 그림을 표지에 실은 도나 타트의 소설 《황금방울새》가 나왔고, 소설은 201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2. 렘브란트 《사울과 다윗》, 1651~1658년경

사울과 다윗
사울과 다윗렘브란트, 1650,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아브라함 브레디위스는 《사울과 다윗》을 렘브란트의 성서 그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개인적인 작품의 하나로 여겼다. 그가 죽고 20여 년 뒤인 1969년, 또 한 사람의 손꼽히는 렘브란트 전문가 호르스트 헤르손은 브레디위스가 엮은 렘브란트 회화 목록을 새로 펴내면서 이 그림을 목록에서 지웠다. 헤르손은 이 그림에 대한 찬탄이 그림의 질보다는 성서 그림을 좋아하는 취향에서 나온 것이라고 썼고, 두 인물 사이의 텅 빈 휘장을 따로 꼬집어 깎아내렸다. 브레디위스는 1898년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 전시가 끝난 뒤 자기 돈으로 이 그림을 사서, 당시 자신이 이끌던 마우리츠하위스에 맡겼다. 바로 그 휘장의 주름 일부는 1899~1900년, 브레디위스가 누구보다 신뢰한 베를린의 복원가 알로이스 하우저가 다시 그렸다.

사무엘상에 따르면 젊은 다윗은 사울 왕을 괴롭히는 악령을 달래려고 왕 앞에서 하프를 탔는데, 어느 날 사울은 질투에 사로잡혀 그에게 창을 던졌다. 화가들은 대개 창을 던지는 순간을 그렸지만, 렘브란트는 그 직전, 사울이 아직 음악을 듣고 있는 순간을 골랐다. 왕은 왼쪽에 앉아 주황빛 금색, 분홍, 청록색 줄무늬의 거대한 터번을 썼고, 터번 꼭대기에는 놓치기 쉬운 작은 은빛 왕관이 얹혀 있다. 그는 짙은 붉은 휘장의 주름을 한쪽 눈에 대고, 다른 눈으로는 우리를 바라보며, 오른손은 창 자루 위로 힘없이 늘어뜨렸다. 미술관은 이 몸짓을, 슬픔에 잠긴 사울이 손에 닿은 첫 물건을 붙잡은 것처럼 설명한다. 오른쪽 아래에는 머리와 어깨와 두 손만 보이는 다윗이 현으로 눈을 내리깔고 엷게 웃으며 연주하고, 그 위로는 거의 텅 빈 어두운 바탕이 펼쳐진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마우리츠하위스에서 이 그림을 조사하고 복원했다. 그 결과 캔버스는 1830년에서 1869년 사이에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잘렸다가 톱니 모양 이음매로 다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띠 하나가 사라졌다. 다윗 위쪽에는 다른 캔버스 조각, 곧 반 다이크가 그린 이사벨라 대공비 초상을 일찍이 베낀 모사화를 거꾸로 뒤집어 끼워 넣었고, 가장자리에는 좁은 띠들을 덧대어 꿰맸다. 그림은 모두 15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원가 카롤 포타스는 헤르손에 대해, 나중에 덧칠한 것들 아래에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15년 미술관은 《사울과 다윗》이 렘브란트의 작품이며 1651~1654년 무렵과 1655~1658년 무렵 두 차례에 걸쳐 그려졌다고 발표했지만, 다른 연구자들의 연대 추정은 1646년부터 1660년까지 엇갈린다.

사울과 다윗
사울과 다윗렘브란트, 1650,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마우리츠하위스의 그림들은 국가의 소유이고, 미술관은 1995년부터 독립 재단으로서 그림들을 관리한다. 1946년 브레디위스는 이 그림을 포함해 그림 25점을 미술관에 유증했고, 프랑스어로 쓴 그의 유언장에는 그림들이 오직 그 미술관에만 전시되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는 그림들을 임시 전시에 빌려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브레디위스의 유일한 상속인이던 요제프 크로니히의 상속인들은 그림들이 늘 걸려 있어야 하는데도 25점 가운데 20점가량이 전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26년 6월 10일 헤이그 지방 법원은 그림들을 반드시 전시해야 할 절대적인 의무는 없으며 국가가 그림들을 돌려줄 필요도 없다고 판결했고, 《사울과 다윗》은 법원이 국가가 그대로 가지도록 허락한 25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상속인들은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개인 수집가들이 나라 대신 정하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년경

1881년 은퇴한 육군 장교이자 족보학자이며 수집가였던 아르놀뒤스 안드리스 데스 톰버는 헤이그의 경매에서 두 휠던에 웃돈 30센트를 얹어, 터번을 쓴 소녀의 얼굴이 그려진 더럽고 방치된 그림 한 점을 샀다. 그는 그림을 안트베르펜으로 보내 세척하고 뒤에 새 캔버스를 덧대게 했다. 데스 톰버는 1902년 12월 16일 헤이그에서 죽었는데, 상속인이 없었고, 그가 몰래 유언장을 써서 페르메이르를 포함한 그림 12점을 마우리츠하위스에 남겼다는 사실이 그때 드러났다.

페르메이르는 1660년대 중반, 가장 많은 작품을 그리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트로니라고 부르는데, 당시 트로니는 특이한 차림을 한 어떤 유형의 얼굴을 주문 없이 그린 그림을 가리켰고, 미술관은 특정한 모델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얼굴 그림에 페르메이르는 가장 비싼 파란 물감인 울트라마린을 썼는데, 이 물감은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서 캐낸 청금석으로 만들었다.

소녀는 왼쪽 어깨 너머로 우리를 돌아보고, 입술은 살짝 벌어졌으며, 두 눈에는 반짝임이 맺혀 있다. 머리에는 파란 천을 감았고, 그 위에서 노란 천이 등 뒤로 늘어지며, 노란 웃옷에 두툼한 흰 깃을 달았다. 진주는 목의 그늘 속, 귀 아래에 매달려 있고, 붓질 두 번, 곧 왼쪽 위의 밝은 반짝임과 아래쪽의 부드러운 회백색 반사광으로 그려졌는데, 이 반사광은 깃이 진주에 비친 것이다. 2018년 연구자들은 진주를 매달았을 갈고리나 고리를 찾지 못했다. 미술관은 그림 설명에서 이 진주를 믿기 어려울 만큼 크다고 한다.

같은 2018년 그림은 두 주 동안 전시실 안에서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조사를 받았고, 현미경으로 두 눈가에서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갈색 속눈썹을 찾아냈다. 소녀 뒤의 평평하고 거의 검은 바탕은 원래 비스듬한 주름이 진 짙은 초록 휘장이었지만, 초록 물감이 세월이 흐르며 변해 어두워졌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두 명의 아프리카 남자
두 명의 아프리카 남자렘브란트, 166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4. 렘브란트 《두 아프리카 남자》, 1661년

1656년 빚 때문에 렘브란트의 재산 목록을 만들 때, 그의 큰 작업실에 있던 그림들 사이에 렘브란트가 무어인 두 사람을 한 화면에 그린 그림이 기록되었다. 마우리츠하위스의 그림에는 1661년이라는 연도가 적혀 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흑인 주민들을 연구한 역사가 마르크 폰터는 이 둘이 같은 그림으로, 1656년까지 시작해 나중에 마친 것일 수 있다고 보지만, 목록에 오른 것이 사라진 다른 그림이었을 수도 있다. 폰터는 혼인, 세례, 장례 기록에서 이 도시의 흑인 주민 100명가량을 찾아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요덴브레이스트라트에 있는 렘브란트의 집 둘레 동네에 살았다. 그는 렘브란트 근처에 살던 상투메섬 출신의 형제 마누엘 페르난도와 바스티안 페르난도를 모델의 이름으로 제시하면서, 이것이 가설일 뿐이라고 스스로 강조한다. 마우리츠하위스는 더 조심스럽게, 그림 속 인물들이 아마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흑인 주민이었을 것이라는 데서 그친다.

오른쪽의 더 키 큰 남자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채 이를 드러내고 웃는데, 크게 뜬 눈은 옆으로 비껴 있다. 그의 어깨에는 옅은 회백색 천이 걸쳐 있고, 그 천이 목에 닿는 곳이 그림에서 가장 밝은 자리다. 그의 눈 안쪽 구석에 렘브란트는 아주 작은 주황빛 붉은 붓 자국을 찍었는데, 미술관의 말로는 그림 전체에서 붉은색은 그 한 점뿐이다. 왼쪽 남자는 고개와 눈을 숙였고, 입술은 다물었으며, 얼굴은 부드러운 반그늘 속에 있다. 바탕의 물감은 너무 얇아서 캔버스의 올이 비쳐 보이고, 아래쪽 3분의 1은 빠른 붓질로 대강만 그려져 있다. 렘브란트는 오른쪽 위 구석에 서명과 연도를 남겼다.

브레디위스는 1902년이나 1903년에 런던의 화상에게서 이 그림을 샀고, 1903년부터 자신이 이끌던 마우리츠하위스에 자기 소유인 채로 맡겨 두었다. 1946년 그림은 유증으로 미술관에 넘어왔고, 상속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그 25점 가운데 하나다(12번). 오랫동안 이 그림은 《두 무어인》이라 불렸고, 그 뒤 미술관이 지금의 제목을 붙였다. 2020년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의 집 미술관은 렘브란트 시대 암스테르담의 흑인 주민들에 관한 전시를 열었는데, 이 그림은 그 전시의 구상과 도록 한가운데에 있었다.

두 명의 아프리카 남자
두 명의 아프리카 남자렘브란트, 166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5. 얀 스테인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 1668~1670년경

스테인흐라흐트 컬렉션은 1912년까지 헤이그의 랑어 페이버르베르흐에 있는 한 집, 마우리츠하위스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걸려 있었다. 마지막 소유자는 컬렉션을 팔아 그 돈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언을 남겼고, 1913년 6월 9일 컬렉션은 파리의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경매에 나왔다. 렘브란트 협회 이사회의 헤이그 출신 이사 두 사람이 경종을 울렸고, 협회는 마우리츠하위스를 위한 첫 대규모 공개 모금을 벌였으며, 국가도 돈을 보태기로 해서, 얀 스테인의 이 그림을 37만 5000프랑에 붙잡아 나라 안에 두었다. 미술관은 그 매각에서 이 그림과 함께 다섯 점을 더 샀고, 같은 컬렉션의 렘브란트 《밧세바》는 화상 듀빈을 거쳐 뉴욕의 수집가 벤저민 올트먼에게 넘어가 그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갔다.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얀 스테인,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컬렉션을 시작한 사람은 마우리츠하위스의 첫 관장 요한 스테인흐라흐트 판 오스트카펠레였다. 그는 1816년 바르몬트 성에서 열린 판 레이던 남작 부인 컬렉션 매각에서 스테인의 이 그림을 자기 몫으로 1260휠던에 샀고, 그림은 거의 한 세기 동안 그의 후손들 손에 있었다.

레이던 출신의 얀 스테인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나쁜 본보기를 따라 배운다는 이 속담을 여러 번 그렸고, 그런 장면에는 거의 언제나 자신을 그려 넣었다. 여기서 그는 오른쪽, 분홍과 흰색 리본을 단 높은 검은 모자를 쓰고 웃는 남자로, 곱슬곱슬한 불그스름한 머리의 소년 입에 긴 점토 파이프를 직접 물려 주고 있다. 탁자에서는 검은 두건을 쓰고 코에 안경을 걸친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줄을 짚어 가며 종이를 보고 노래하는데, 그 종이에서는 앞 세대가 부른 노래를 뒤 세대가 피리로 분다는 뜻의 옛 네덜란드어로 된 속담의 첫머리와 몇 마디의 악보를 읽을 수 있다. 왼쪽에서는 흰 모피를 단 초록 벨벳 웃옷에 연보랏빛 분홍 공단 옷을 입은 여인이 키 큰 잔을 들고 있고, 어깨에 냅킨을 걸친 젊은이가 위에서 붉은 포도주를 가늘게 따른다. 위쪽에서는 모피 모자를 쓴 십대 소년이 백파이프를 불고, 창가의 횃대에는 붉은 앵무새가 앉아 있으며, 탁자 위에는 포도, 칼집을 낸 레몬, 백랍 접시에 담긴 굴이 놓여 있다.

마우리츠하위스에는 같은 제목의 스테인 그림이 하나 더 있는데, 더 작고 몇 해 먼저 그렸으며 짜임새도 다르다. 그 그림은 빌럼 5세의 것이었고, 1795년 프랑스군이 그의 컬렉션 전체와 함께 파리로 가져갔다가 1815년 돌아왔다.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얀 스테인,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
노인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가 피리를 분다얀 스테인, 1664, 빌럼 5세 갤러리
굴을 먹는 소녀
굴을 먹는 소녀얀 스테인, 1658,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6. 얀 스테인 《굴을 먹는 소녀》, 1658~1660년경

위쪽이 둥근 패널은 엽서보다 조금 큰데, 미술관은 이 그림이 가까이 들여다보도록 그린 것이라고 강조한다. 넓은 흰 모피 테를 두른 붉은 벨벳 웃옷의 소녀가 탁자 위로 몸을 숙이고, 비스듬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바라보며, 왼손에 든 벌어진 굴에 무언가를 뿌리고 있다. 곁의 쟁반에는 쪼갠 빵, 검은 알갱이가 든 종이 봉지, 소금 한 무더기와 칼이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새가 그려진 델프트 도기 주전자와 옅은 빛깔 포도주가 담긴 잔이 있다. 그녀 뒤로는 침대의 초록 휘장이 드리워 있고, 뒷방 문간에서는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굴을 더 까며, 흰 두건을 쓴 여인이 그를 바라본다. 17세기의 보는 사람들에게 소금 친 굴과 포도주와 침대는 한데 모여 사랑의 유혹을 뜻했다.

이렇게 잘고 매끈하게 그린 것은 레이던의 화가들, 헤리트 다우(3번)와 그의 제자 대 프란스 판 미리스였고, 보통 사람이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장면을 그리던 스테인은 여기서 붓질을 작은 크기에 맞추었다.

1900년부터 로열 더치 회사를 이끌고 뒤에 로열 더치 셸의 수장이 된 헨리 데터딩은 1936년 물러나면서 네덜란드 국가에 이름난 그림들을 선물했다. 그 가운데 다섯 점이 마우리츠하위스에 왔고, 얀 스테인의 이 패널도 그중 하나다. 데터딩은 192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식스 가문 컬렉션 매각에서 이 그림을 19만 휠던에 샀고, 같은 경매에서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의 《편지를 쓰는 여인》을 31만 9000휠던에 샀는데, 이 그림도 마우리츠하위스에 준 선물에 들어 있었다. 같은 선물에는 프란스 판 미리스의 1661년 작 《굴 식사》도 있었다.

데터딩은 말년에 히틀러의 독일에 감탄했고, 그 나라와의 친선을 내세우는 선전에 돈을 댔는데, 주간지 《더 바흐》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39년 2월 생모리츠에서 죽었다.

편지를 쓰는 여인
편지를 쓰는 여인헤라르트 테르 보르흐, 165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굴 식사
굴 식사대(大) 프란스 판 미리스, 166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전쟁 뒤에는 국가와 기금과 복권이 값을 치르다

자화상
자화상렘브란트, 1669,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7. 렘브란트 《자화상》, 1669년

1945년 10월 8일 그림 26점을 실은 특별기가 스히폴 공항에 내렸고, 이것이 반출되었던 미술품이 네덜란드로 돌아온 첫 공식 반환이었다. 그 가운데 렘브란트의 이 자화상이 있었다. 이 그림은 베를린의 수집가 마르쿠스 카펠의 것이었는데, 그는 처음에 베를린의 카이저 프리드리히 미술관에 이 그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돈 문제로 마음을 바꾸었고, 그림은 유산으로 독일 유대인 집안인 그의 손주 에르네스트 라테나우와 엘렌 라테나우에게 넘어갔다. 1925년 두 사람은 그림을 레이크스미술관에 빌려주었다. 1940년 침공 뒤 독일인들은 카펠 컬렉션이 보호 대상인 독일 문화유산 목록에 올라 있어 잠시라도 독일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이 그림을 가져갔다. 그림은 히틀러가 린츠에 세우려던 미술관의 몫으로 정해졌고, 오스트리아 알타우스제의 소금 광산에서 헨트 제단화, 페르메이르의 《천문학자》와 함께 보관되었다.

초상은 라테나우 집안에 돌아갔고, 1947년 마우리츠하위스가 그들의 유산에서 30만 휠던에 이 그림을 샀다. 렘브란트 협회가 6만 휠던을 내고 15만 휠던을 무이자로 빌려주었으며, 나머지는 개인들이 모았다.

렘브란트는 1669년 10월에 죽었고, 이 그림은 그해의 연도가 적힌 자화상 세 점 가운데 하나다. 미술관은 그가 이 그림에서 다른 두 점보다 더 늙어 보인다고 보며, 그래서 이 그림을 어쩌면 마지막 자화상이라고 부른다. 렘브란트는 4분의 3 각도로 오른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이마와 코와 뺨은 두꺼운 물감으로 빚어 냈고, 넓은 황토빛 금색 띠를 두른 부드러운 베이지 갈색 베레모 아래로 흰 곱슬머리가 비어져 나온다. 엑스선 사진에는 베레모 아래에 남자들이 집에서 쓰던 수수한 흰 아마포 모자가 보이는데, 미술관은 렘브란트가 먼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빠르게 그려 두고, 어떤 모자를 쓴 모습으로 초상에 남을지는 나중에 정했다고 본다.

웃는 소년
웃는 소년프란스 할스, 1627,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8. 프란스 할스 《웃는 소년》, 1625년경

《웃는 소년》은 예전 주인이 살아 있는 동안 해마다 아홉 달을 파리의 그녀 곁에서 보내야 했다. 이 조건을 달고 호의적인 값으로, 슐레지엔의 석탄 재벌 프리츠 폰 프리틀렌더풀트의 딸 마리안 폰 골트슈미트로트실트는 1968년 이 그림을 마우리츠하위스에 팔았다. 다섯 해 동안 둥근 패널은 파리와 헤이그를 오갔고, 1973년 11월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헤이그에 아주 머물게 되었다. 구입 자금은 렘브란트 협회, 베른하르트 공 기금, 마우리츠하위스 친구회가 댔다. 그때까지 미술관에는 할스의 초상화만 있었는데, 이 그림은 주문 없이 표정 연구로 그린 얼굴 그림이다.

그전에 이 패널은 쾰른의 수집가 알베르트 폰 오펜하임의 것이었다. 그의 컬렉션 매각은 베를린에서 1914년 10월로 잡혔다가 전쟁 때문에 1918년 3월로 미뤄졌고, 그때 프리틀렌더풀트 집안을 위해 이 소년 그림을 샀다.

소년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 옅은 붓질로 그린 이 몇 개를 드러내고, 뺨은 분홍빛이며, 눈은 보는 사람을 비켜 오른쪽으로 쏠려 있다. 헝클어진 불그스름한 금발은 시원스러운 붓질로 놓였고, 콧등에는 할스가 밝은 선 하나를 그었으며, 콧구멍은 빠르고 어두운 붓질 두 번으로 나타냈다. 구겨진 흰 깃은 평평하고 뭉툭한 붓질로 그려져 얼굴보다 눈에 띄게 거칠다. 왼쪽 바탕에는 프란스 할스의 머리글자를 엮은 모노그램이 있다.

할스 연구자 클라우스 그림은 2023~2024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얼굴은 할스가, 깃은 작업실 조수 가운데 누군가가 그렸다고 본다. 미술관은 패널 전체를 할스의 작품으로 본다.

19. 클라라 페이터르스 《치즈, 아몬드, 프레첼이 있는 정물》, 1615년경

치즈, 아몬드, 프레첼이 있는 정물
치즈, 아몬드, 프레첼이 있는 정물클라라 페이터르스, 161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은 손잡이가 달린 칼이 탁자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놓여 있고, 조각된 손잡이 끝은 가장자리 밖으로 튀어나와 있으며, 손잡이 옆면에는 클라라 페이터르스라는 이름이 대문자로 적혀 있다. 미술관의 말로는 화가는 이 그림에 자화상도 남겼는데, 주전자의 백랍 뚜껑에 비친 아주 작은 모습이다.

탁자는 약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거의 검은 바탕 앞에 놓여 있다. 왼쪽 백랍 접시 위에는 치즈들이 쌓여 있다. 크고 밝은 둥근 치즈는 잘려 있고, 단면을 따라 길고 좁은 홈이 나 있으며 거기서 금이 뻗어 나가고, 그 앞에는 숙성된 초록빛 회색 치즈 한 조각이, 맨 위에는 작은 치즈와 골을 낸 버터 말이가 소복이 담긴 접시가 있다. 가운데에는 백랍 뚜껑이 달리고 목에 수염 난 얼굴이 돋을새김된 갈색 석기 주전자가, 오른쪽에는 금도금 띠를 두르고 호박빛 붉은 포도주가 담긴 뚜껑 달린 잔이 있다. 청화 자기 그릇에는 말린 무화과, 아몬드, 건포도가 담겨 있고, 왼쪽 맨 탁자 위에는 프레첼 두 개가 놓여 있다.

클라라 페이터르스 자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녀는 1607년 무렵부터 1621년 무렵까지, 아마 안트베르펜에서 일했고, 정물화만 그렸으며, 소박한 음식과 값비싼 그릇이 차려진 식탁을 그린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북유럽에서 얀 반 에이크의 볼록 거울 뒤로 잔과 백랍 그릇에 자기 모습을 비춰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녀가 가장 이른 축에 든다.

치즈, 아몬드, 프레첼이 있는 정물
치즈, 아몬드, 프레첼이 있는 정물클라라 페이터르스, 161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1920년부터 이 정물화는 프랑스의 개인 컬렉션에 있었고, 1998년 파리 경매에서는 페이터르스의 그림으로서는 최고가에 팔렸으며, 2012년 6월 마우리츠하위스가 미국의 개인 소장자에게서 사들였다. 미술관 관장 에밀리 고든커는 이 그림을 17세기 여성 화가의 드문 그림이라고 불렀다. 미술관 스스로 센 바로는 컬렉션의 화가 300여 명 가운데 여성은 콜로, 레이스터르(10번), 판 오스테르베이크, 페이터르스, 라위스 다섯 명이다.

20. 빌럼 바위테베흐 《테라스의 즐거운 모임》, 1616~1617년경

테라스의 즐거운 모임
테라스의 즐거운 모임빌럼 피터르스존 바위테베흐, 1616,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직업 장교였던 쿠르트 로데는 1920년 군을 떠나 베를린에서 그림 장사를 시작했고, 그에게 조언한 사람은 이웃인 미술사가 빌헬름 폰 보데였다. 1926년 보데는 로데가 가진, 미소 짓는 소녀를 그린 그림을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그 그림은 미국에 팔렸고, 로데는 그 수수료 35만 라이히스마르크로 독일, 오스트리아, 헤이그, 암스테르담의 경매에서 그림들을 샀다. 1970년부터 이 ‘페르메이르’는 의심을 받았고, 2008년부터는 위작자 한 판 메이헤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1930년 11월 베를린의 파울 그라우페 경매에서 로데는 빌럼 바위테베흐의 《즐거운 모임》을 샀다.

로데는 1950년에 죽었고, 1958년부터 2016년까지 그의 상속인들은 이 그림을 베를린 회화관에 장기 보관으로 맡겼다. 2018년 마우리츠하위스는 네덜란드 복권 방크지로 로테레이의 돈으로 상속인들에게서 이 그림을 샀고, 미술관의 말로는 그때까지 17세기 초의 전형적인 풍속화를 한 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위테베흐는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1612년 하를럼 화가 길드에 들어갔고,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보고 소묘했으며, 30세를 조금 넘겨 세상을 떠났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재치 있는 빌럼’이라고 불렀다. 미술관이 세는 그의 그림은 여섯 점뿐이고(베를린에서는 여덟 점이라고 한다) 소묘는 약 125점, 에칭은 32점이며, 미술관은 이 그림을 초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핵심 작품으로, 바위테베흐를 흥겨운 모임 장면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다.

테라스의 즐거운 모임
테라스의 즐거운 모임빌럼 피터르스존 바위테베흐, 1616,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장면은 무대처럼 꾸며져 있다. 왼쪽에는 거대한 잿빛 갈색 휘장이 기둥에 감겨 걷혀 있고, 오른쪽에는 코린트식 기둥머리를 얹은 기둥이 서 있으며, 그 사이로 로지아와 정원과 먼 교회가 펼쳐진다. 그림을 가로질러 흰 식탁보를 덮은 긴 탁자가 놓였고, 그 아래로는 새빨간 천이 바닥까지 늘어져 있다. 왼쪽에서는 붉은 깃털을 꽂은 높은 회색 모자의 콧수염 난 남자가 고리버들 안락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고, 그 곁에서는 분홍빛 연보라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몸을 뒤로 젖힌 채 우리를 바라본다. 탁자 한가운데에는 꼬리를 펼친 공작으로 장식한 파이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류트와 펼쳐진 악보가 내던져져 있으며, 오른쪽 가장자리에서는 진홍색 망토에 붉은색과 흰색의 트임 장식 웃옷을 입고 붉은 리본이 달린 구두를 신은 멋쟁이가 똑바로 보는 사람을 보며 히죽 웃는다.

스무 점 다음에

우리는 시대마다 누가 이 집에 무엇을 걸지 정했는지가 보이는 그림들을 골랐기 때문에, 관람객이 아끼는 그림 가운데 많은 수가 이 목록에 들지 못했다. 두 번째로 찾아온다면 바위턴호프의 빌럼 5세 공 갤러리부터 시작할 만한데, 1774년 총독이 일반에 공개한 바로 그 갤러리다. 마우리츠하위스 안에서는 브레디위스가 유증한 렘브란트의 《호메로스》, 소 한스 홀바인의 《로버트 체스먼의 초상》, 야코프 판 라위스달의 《표백장이 있는 하를럼 풍경》, 얀 다비즈 데 헴의 《꽃병》을 찾아볼 만하다. 2026년 9월 마우리츠하위스와 레이크스미술관은 헨드릭 아베르캄프가 1625년 무렵 그린 《얼음 위에서 골프 치는 사람들》을 함께 사들였고, 이 그림을 암스테르담과 헤이그에서 번갈아 보여 주기로 했다.

호메로스
호메로스렘브란트, 1663,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로버트 체스먼(1485-1547)의 초상
로버트 체스먼(1485-1547)의 초상소 한스 홀바인, 1533,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표백장이 있는 하를럼 풍경
표백장이 있는 하를럼 풍경야코프 판 라위스달, 1672,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꽃병
꽃병얀 다비즈 데 헴, 1670,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