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국립미술관은 부쿠레슈티 한복판의 옛 왕궁에 자리 잡고 있다. 왕들은 1947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고, 한 해 뒤 궁전은 미술관이 되었다. 1989년 12월에는 건물이 총격에 휩싸였고, 그때의 총탄 자국이 정면 외벽에 남아 있다.
궁전 안의 작품들도 저마다 전혀 다른 길을 거쳐 이곳에 왔다. 어떤 것은 교회 벽에서 떼어 냈고, 어떤 것은 왕이 사들였으며, 어떤 것은 유언으로 넘어왔고, 또 어떤 것은 지진이나 혁명 뒤에 구해 냈다. 우리가 이 열다섯 점을 고른 것은 작품마다 운명이 바뀐 순간을 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437년에 수놓은 에피타피오스에서 시작해, 1977년 지진 뒤 수도원 성당에서 옮겨 온 이코노스타시스로 끝을 맺는다.
01. 교회에서 미술관으로
1. 실루안 수도원장의 에피타피오스, 네암츠 수도원, 1437년
성금요일이 되면 정교회에서는 에피타피오스, 곧 무덤에 누운 그리스도를 수놓은 천을 제단에서 들고 나와 성당 한가운데의 탁자 위에 놓는다. 이 에피타피오스는 1437년 몰다비아의 네암츠 수도원에 그곳 수도원장 실루안이 바친 것이다. 봉헌한 사람의 이름은 가장자리를 한 바퀴 두르는 명문에 수놓여 있다. 미술관 명패에는 그가 실반으로 적혀 있지만, 연구서에서는 실루안이라는 이름을 쓴다.
이 천을 수놓은 것은 네암츠의 수사들로, 수도원 안의 공방에서 작업했다. 그들이 본뜬 것은 1428년 몰다비아의 수도대주교 마카리에가 주문한 에피타피오스였는데, 이 앞선 작품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수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1686년 폴란드 왕 얀 소비에스키의 병사들이 그것을 폴란드로 가져갔고, 리비우의 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라졌다. 실루안의 에피타피오스는 지금 남아 있는 몰다비아 에피타피오스 가운데 연대가 적힌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그리스도는 천의 폭을 가득 채운 채 에페소스의 돌이라 불리는 붉은 판석 위에 누워 있다. 눈은 감았고 두 팔은 엇갈려 포갰다. 머리맡에서는 성모가 얼굴이 그의 얼굴에 닿을 듯이 낮게 몸을 숙였다. 발치에는 두 손을 머리로 들어 올린 여인이 서 있는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막달라 마리아다. 이 자리에는 보통 사도 요한을 그렸는데, 네암츠 공방은 향유를 들고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세웠다. 시신 위에서는 두 천사가 리피디온, 곧 긴 자루 끝에 별 모양을 단 전례용 부채를 들고 있고, 아래쪽에서는 천사 셋이 몸을 숙였으며 가운데 천사는 한 손으로 뺨을 괴었다. 주요 윤곽선은 작은 진주로 둘렀고, 어두운 바탕에는 십자가를 넣은 장미 문양이 흩어져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네 복음서 저자의 상징을 수놓았다.
에피타피오스는 사람 키보다 길다. 그리스도를 전신으로 수놓았고, 탁자 위에 통째로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이 천이 어떻게 네암츠에서 부쿠레슈티로 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이 문서를 찾지 못했다. 2024년 염료를 조사한 화학자들이 붉은 실에서 카민산을 찾아냈다. 아메리카산 코치닐은 1437년보다 나중에야 유럽에 들어왔으므로, 이 붉은색은 아르메니아산이나 폴란드산 코치닐에서 나온 것이다.
2. 카프탄, 왈라키아, 이탈리아 벨벳, 1480~1490년경
1490년 무렵 왈라키아 서부 올테니아 지방의 대귀족 크라이오베슈티 형제가 비스트리차 수도원을 세우고 값비싼 카프탄 한 벌을 바쳤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옷 한 벌 값이 수십 헥타르짜리 영지 하나와 맞먹었다. 그 시절 귀족들은 예복을 교회에 바치는 일이 많았고, 교회는 그 옷을 뜯어 제의와 성물 덮개를 지었다. 이 카프탄도 뜯겨서 조각조각 무덤 덮개로 다시 기워졌고, 미술관 목록에도 무덤 덮개로 올라 있었다. 복원가들이 이를 살펴보다가 조각들이 카프탄 모양으로 재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미술관은 이를 다시 옷으로 복원했다.
천은 이탈리아에서, 어쩌면 밀라노에서 짰다. 짙은 진홍색 벨벳 위로 구름 같은 꽃잎꼴 테두리에 둘러싸인 큼직한 금빛 원형 문양이 이어지는데, 무늬를 벨벳과 함께 짜 넣었기 때문에 금실 고리가 벨벳의 털 위로 도드라져 올라와 있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초록 띠 일곱 줄이 앞섶을 여미고, 띠마다 작은 금도금 단추가 한 다발씩 달려 있다. 소매와 옆구리에서는 솔기가 원형 문양을 반으로 가르는데, 몸에 맞춰 천을 재단했기 때문이다.
3. 터르고비슈테의 도브로미르 《록산다 공주》, 1526년 이전
커다란 봉헌자 초상에서 남은 것은 록산다 한 사람뿐이다. 그녀는 흰 성당 모형을 들고 있고, 프레스코의 찢긴 왼쪽 가장자리는 그 건물을 곧장 가로지른다. 반대편에서 모형을 함께 들고 있던 남편 라두는 그 부분의 벽과 함께 사라졌다. 록산다는 루비와 사파이어, 진주를 박고 뺨 옆으로 긴 드리개를 늘어뜨린 높은 금관을 쓰고, 잔주름을 잡은 붉은 드레스에 검은 무늬가 든 금란 망토를 걸쳤다.


록산다는 쿠르테아데아르제슈 수도원 성당을 지은 왈라키아 군주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딸이었다. 아버지 때 시작된 성당 벽화는 1526년 그녀의 남편인 아푸마치의 라두 공 때 완성되었고, 터르고비슈테 출신 화가 도브로미르는 서쪽 벽에 두 사람을 성당 모형을 받쳐 든 봉헌자로 나란히 그렸다.
이 잘린 자리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루마니아 당국은 프랑스 건축가 앙드레 르콩트 뒤 누이를 불러 성당 복원을 맡겼고, 공사는 1875년부터 1886년까지 이어졌다. 당국은 옛 벽화를 새 유화로 바꾸고 싶어 했고, 1882년 르콩트 뒤 누이는 이미 촛불 그을음으로 검게 변한 프레스코 조각 35점을 벽에서 떼어 내게 했다. 원래 벽화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추산에 따라 20분의 1에서 10분의 1 정도다. 떼어 낸 조각들은 부쿠레슈티의 고대유물박물관으로 보내졌고, 대부분은 나중에 미술관으로 넘어왔다.
1888년부터 이온 민쿠를 비롯한 젊은 루마니아 건축가들은 르콩트 뒤 누이가 나라의 유산을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공식 조사에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이 논쟁은 1892년 루마니아에 역사기념물위원회가 생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35점 가운데 29점은 국립미술관에, 두 점은 루마니아 국립역사박물관에, 네 점은 아르제슈 대교구에 있다.
4. 파르부 무투 《자화상》, 보르데슈티 성당 벽화 단편, 1699년
1699년 파르부 무투는 당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경계에 가까웠던 보르데슈티 암자의 성당에 벽화를 그리면서 그 벽에 자기 모습을 그려 넣었다. 성당을 지은 사람은 대귀족 머너일러로, 콘스탄틴 브런코베아누 공의 무관이자 칸타쿠지노 가문과 가까운 인물이었고, 무투는 칸타쿠지노 가문이 가장 아끼던 화가였다. 무투는 작은 단추가 촘촘히 달린 긴 연보랏빛 분홍 카프탄에 올리브색 망토를 두르고 서서, 치켜든 오른손에는 붓을, 허리께에 댄 왼손에는 기록에서 조개라고 부르는 작고 둥근 물감 그릇을 들고 있다. 그의 어깨 뒤에는 수수한 청회색 옷을 입은 제자 라두가 서서, 회반죽을 고르게 펴던 끝이 뾰족한 밝은색 흙손을 가슴에 꼭 안고 있다.
무투는 대귀족의 옷, 곧 평신도 차림을 하고 있다. 비잔티움 이후의 전통에서 성당 화가들은 오랫동안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이런 자화상은 동업조합이 힘을 얻어 장인의 솜씨가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주기 시작한 17세기 말에 나타난다. 무투의 자화상은 다른 성당에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잘된 작품으로 꼽힌다.
카프탄과 황토색 바탕, 제자의 옷 위로 긁어 새긴 글자와 표시가 빼곡하다. 1911년 이후 성당은 버려진 채 열려 있었고, 찾아온 사람들이 벽을 긁어 댔다. 20세기 중반 문화부가 보낸 작업반이 같은 성당의 프레스코 《성모 안식》과 함께 이 자화상을 벽에서 떼어 냈고, 두 벽화는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무투는 코트로체니 수도원 성당의 봉헌자 초상도 그렸는데, 이 성당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나온다.
무투는 훗날 파프누티에라는 이름으로 수도사가 되었고, 2017년 루마니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02. 왕실 갤러리

앞의 네 점은 교회와 수도원에서 이곳으로 왔다. 19세기 말에는 소장품의 또 다른 원천이 생긴다. 카롤 1세가 자기 궁전을 위해 유럽 옛 거장들의 그림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5. 대 루카스 크라나흐 또는 그 추종자 《비너스와 큐피드》, 1520년대
20세기 말까지 이 비너스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몸 위에 짙은 청색의 두툼한 천을 덧그려 어깨와 허리, 엉덩이를 가려 놓았던 것이다. 그 물감에서 1710년 무렵에야 만들어지기 시작한 프러시안 블루가 나왔으므로, 이 옷은 처음 그린 그림의 일부일 수 없었다. 1967년 루마니아 우표에도 비너스는 천을 두른 모습으로 실렸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미술관의 복원가 이오안 스프리잔이 덧그린 천을 걷어 냈다.
이제 비너스는 다시 벌거벗은 채 짙은 붉은색 벨벳 휘장 앞에 서 있다.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작은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와 묵직한 금사슬을 걸었다. 배 앞에 쥐고 있는 투명한 베일을 화가는 가느다란 흰 선 몇 개로만 나타냈다. 비너스의 허벅지까지 오는 큐피드는 키 큰 붉은 활을 들고, 시위를 걸 때처럼 발로 활의 아래 끝을 딛고 있으며, 오른손은 등 뒤로 돌렸다. 그 손에는 화살이 들려 있어 깃이 패널 왼쪽 가장자리에 보이는데, 비너스는 그 화살을 보지 못한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카롤 1세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독일 공자로, 루마니아의 군주가 되었다가 국왕이 되었다. 1879년 그는 독일 영사이자 수집가인 펠릭스 밤베르크에게서 이 그림을 샀는데, 옛 거장의 컬렉션이 아직 하나도 없던 나라를 위해 꾸리던 갤러리의 첫 구입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백 점이 넘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 갤러리를 유언으로 루마니아 왕관에 남겼고, 루마니아 국가는 여기서 말하는 왕관이 곧 국가 자신이라고 본다. 1948년 왕실 컬렉션은 국유화되어 새로 생긴 미술관에 넘어갔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1520년에 그린 대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으로 본다. 크라나흐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를 크라나흐 추종자의 작품으로 분류하고, 왼쪽 아래 돌 위에 있는 크라나흐의 표지, 곧 날개 없는 뱀도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6. 렘브란트와 공방 《에스더 앞의 하만》, 1635년경과 1660년대
성경 에스더서에 따르면 왕의 신하 하만은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칙령을 얻어 냈고, 자신도 유대인이던 왕비 에스더가 이 일을 왕에게 알리자 하만은 에스더 앞에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에스더는 진주 박힌 높은 관을 쓰고, 두텁고 거칠게 끊어지는 붓질로 그린 금빛 드레스를 입고 왼쪽에 앉아 하만을 비껴 아래를 내려다본다. 하만은 붉은 옷을 입고 오른쪽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 모은 두 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터번을 쓴 왕은 에스더 뒤 어둠 속에서 몸을 내밀어 하만을 보고 있고, 어두운 탁자 위로 뻗은 왕의 금홀만이 세 사람을 한데 잇는다.
이 그림에는 중요한 특이점이 있다. 사실상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그린 두 겹의 그림이 포개져 있는 것이다. 누가 그렸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1960년대부터 이어지고 있다. 엑스선 촬영으로 지금의 표면 아래에서 1635년 무렵의 더 이른 층이 드러났는데, 구도는 그때 이미 있었지만 에스더의 얼굴은 더 오른쪽에 있었다. 1660년대에 이 그림은 아마도 렘브란트의 공방에서 거의 전부 다시 그려졌다. 그래서 미술관은 이 그림에 ‘렘브란트와 공방’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네덜란드 미술사연구소도 렘브란트 자신이 손을 댔을 가능성을 열어 둔다.
1898년에는 이미 카롤의 소유였다. 그해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 전시회에 출품되었는데, 그림을 보낸 곳은 카롤의 여름 별궁인 펠레슈성이 있는 시나이아였다.

1989년 12월 이후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의 관장 헹크 판오스가 부쿠레슈티에 와서, 총탄을 맞은 16세기 패널 두 점을 복원하려고 네덜란드로 가져가면서 이 캔버스도 함께 가져갔다. 이 캔버스는 총탄을 맞은 작품 목록에는 올라 있지 않다. 복원은 1990~1991년에 레이크스미술관과 마스트리흐트의 한 복원 공방에서 이루어졌다.
7. 엘 그레코 《목자들의 경배》, 1596~1600년
엘 그레코가 마드리드에서 받은 주문은 단 하나, 신학교 성당의 주 제단화였다. 이 신학교는 설립자인 왕비의 시녀 이름을 따서 도냐 마리아 데 아라곤 학원이라고 불렸다. 계약은 1596년에 맺었는데, 도냐 마리아가 작업이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 주문은 카스티야 평의회로 넘어갔고, 1600년 제단이 설치되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복원안에 따르면 제단은 2단으로 되어 있고 단마다 그림이 세 점씩 있었으며, 《목자들의 경배》는 아래 단 왼쪽에 있었다. 그래서 이 캔버스는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 가까이 되고, 제단의 한 칸만큼 폭이 좁다.
그림 아래쪽 절반은 밤이고, 빛은 흰 포대기 위에 누운 아기에게서 나와 둘레의 얼굴들을 아래에서 비춘다. 진홍색 옷을 입고 머리에 흰 베일을 쓴 마리아가 두 손으로 포대기를 걷어 목자들에게 아기를 보여 준다. 마리아 앞에는 다리가 묶인 흰 어린양이 누워 있는데, 앞으로 있을 희생의 표시다. 맨 앞에는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한 초록 윗옷을 입은 목자가 등을 반쯤 돌린 채 무릎을 꿇고 있고, 그림 맨 가장자리에 흙 묻은 맨발바닥이 보인다. 위쪽에서는 커다란 천사 둘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적힌 띠를 들고 있고, 그 사이에서 벌거벗은 푸토들이 공중제비를 돈다.
1808~1809년 조제프 보나파르트 치하에서 학원이 문을 닫자 제단은 해체되었다. 19세기에 이 그림은 파리에 있던 루이필리프의 스페인 갤러리를 거쳐 런던 경매와 몇몇 개인 컬렉션을 지나 펠릭스 밤베르크의 손에 들어갔고, 카롤 1세가 그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제단의 나머지 캔버스 다섯 점은 프라도 미술관에 있으며, 2000년 프라도는 부쿠레슈티의 캔버스를 잠시 빌려 와 여섯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카롤 1세는 엘 그레코의 그림을 여러 점 가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 이 그림과 《성모의 결혼》, 《성 마우리티우스》 세 점이 부쿠레슈티에 남았다. 옛 왕실 컬렉션의 행방을 둘러싼 다툼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2025년에는 루마니아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자 크리스티가 이 컬렉션에서 나온 또 다른 엘 그레코를 경매에서 거둬들였다.

03. 루마니아 화가들

카롤이 부쿠레슈티를 위해 유럽 옛 거장들을 모으는 동안, 루마니아 화가들은 혁명과 도시의 새로운 일상, 풍경, 그리고 그때까지 이 나라 회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던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다.
8. 콘스탄틴 다니엘 로젠탈 《혁명의 루마니아》, 1850년
1848년 9월 튀르크군이 왈라키아의 혁명을 짓밟고 지도자들을 체포하자, 그중 한 사람인 언론인 콘스탄틴 알렉산드루 로세티의 아내 마리아 로세티는 포로들을 따라가 석방을 얻어 내려고 농촌 아낙으로 변장했다. 본래 이름은 메리 그랜트로, 건지섬에서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50년 망명자들이 모여 있던 파리에서 콘스탄틴 다니엘 로젠탈이 그녀를 그렸다. 로젠탈은 빈에서 함께 공부하던 시절부터 로세티의 친구였다. 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그는 1848년 혁명에 가담한 공로로 왈라키아 시민권을 받았다.
캔버스는 타원형이고, 젊은 여인이 그 안을 거의 다 채운다. 그녀는 소매에 붉은 무늬와 반짝이 장식이 여러 줄 들어간 무스첼 지방의 흰 농민 블라우스를 입고, 금화를 여러 줄로 엮은 목걸이를 걸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홱 돌려 그림 밖 위쪽을 바라본다. 주먹 쥔 손으로 깃대를 어깨에 붙여 쥐고 있는데, 왼쪽 아래로 쪼개지고 부러진 깃대 끝이 삐져나와 있다. 파랑, 노랑, 빨강 깃발 천은 구겨진 채 그녀의 어깨께에 모여 있다. 다른 손에는 칼끝을 아래로 한 단검을 쥐었고, 오른쪽 먼 곳 연기 속에서는 기병들이 맞붙어 싸운다.

1851년 7월 초 로젠탈은 로세티의 선전 문서를 가지고 트란실바니아로 떠났다. 프랑스 당국이 그의 편지를 가로채 빈에 알렸고, 그는 페스트에서 체포되었다. 7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밤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그가 감방에서 목을 맸다고 발표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그가 동지들을 밀고하지 않아 심문 중에 고문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로세티는 이 그림을 줄곧 곁에 두다가 1885년 4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언장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이콘’들과 헤어질 힘이 없었다고 쓰고, 아내와 아들들에게 로젠탈의 역사화 두 점, 곧 이 그림과 《자유의 들판에서 사슬을 끊는 루마니아》를 로젠탈이 바랐던 대로 그의 이름으로 국립박물관에 넘기라고 일렀다.
9. 니콜라에 그리고레스쿠 《거위를 든 유대인》, 1880년
1866년 루마니아 헌법은 기독교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했다. 1878년 베를린 회의는 이 조건을 없애는 것을 루마니아 독립 승인의 전제로 내걸었고, 1879년 10월 해당 조항이 개정되었다. 종교에 따른 금지는 풀렸지만 시민권은 여전히 한 사람씩 따로 주어졌다. 원하는 사람은 저마다 청원서를 냈고, 의회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따로 표결했다.
1880년 봄, 그 무렵 프랑스에 살던 니콜라에 그리고레스쿠는 이 그림을 파리 살롱에 내놓았다. 훗날 화가 자신은 이 그림을 《장래의 루마니아 시민》이라고 불렀다. 둥근 모피 모자를 쓰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보는 이를 향해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다. 오른팔 아래에는 살아 있는 흰 거위를 끼고 손가락을 깃털 속 깊이 파묻었으며, 왼손으로는 품속에서 귀퉁이에 인지가 붙은 접힌 종이를 꺼내고 있다. 그리고레스쿠에 관한 책을 쓴 작가 알렉산드루 블라후처는 그 청원서의 첫머리를 “의장님, 의원 여러분…”으로 읽어 냈다.

1887년 그리고레스쿠는 부쿠레슈티의 에포리에 궁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거기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이 이것이었다. 8,000레우에 이 그림을 산 사람은 엄청난 재산 때문에 ‘나보브’, 곧 대부호라는 별명으로 불린 게오르게 그리고레 칸타쿠지노였다.
논쟁은 그리고레스쿠가 여기서 누구를 비웃고 있느냐를 두고 벌어진다. 블라후처는 이 인물을 노골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말로 묘사했고, 거위를 관리에게 바칠 뇌물로 보았다. 후대 연구자들은 풍자의 과녁을 귀화 절차 자체로 옮겨 보는 경우가 점점 늘었다. 국가는 종교에 따른 금지를 없애고서도 의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권을 따로 표결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거위는 제도를 겨냥한 농담의 일부가 된다.
10. 니콜라에 토니차 《산지기의 딸》, 1925년경
그림 속 소녀의 눈에는 흰자위가 거의 없다. 넓게 벌어진 거의 검은 두 개의 둥근 눈동자가 보는 이를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시선이 안쪽을 향한 듯한 이런 눈을 보면 니콜라에 토니차의 아이 초상인 줄 금세 알 수 있다. 소녀는 흰 두건을 쓰고, 어깨가 봉긋하고 넓은 흰 주름 깃이 달린 새빨간 드레스를 입었으며, 짙은 밤색 곱슬머리가 허리께까지 내려온다. 배경은 온통 짙은 청록빛 나뭇잎으로, 쨍한 노란빛 위에 길고 날카로운 붓질로 그렸다. 토니차는 빨강과 초록 사이를 황토색, 흰색, 갈색으로 이어 놓는다.
모델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924년 토니차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출품했고, 1926년에는 화가 프란치스크 시라토, 슈테판 디미트레스쿠, 조각가 오스카르 한과 함께 ‘4인 그룹’의 첫 전시회를 열었다. 루마니아 비평계에서 그에게는 ‘아이들의 화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마 20세기 루마니아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일 것이고, 미술관도 이 그림을 대표 소장품으로 꼽는다. 2023년 국가는 이 그림을 국가 문화유산의 최고 등급인 ‘테자우르(보물)’로 지정했다.
11. 디미트리에 파치우레아 《대지의 키메라》, 1927~1928년
《대지의 키메라》는 탁자 위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다. 여인의 머리는 뒤로 젖혀져 있고, 무겁게 내리깐 눈꺼풀의 매끈한 얼굴은 가면 같으며, 길고 굵은 목이 형상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몸은 앞쪽에서는 짧은 사자 발로 서 있고, 뒤쪽에서는 울퉁불퉁한 돌 둔덕 속으로 가라앉아 그 돌과 한 몸이 되는 듯하다. 그 아래에서 가느다란 뱀 꼬리가 나와 받침을 휘감는다. 청동은 어두운 빛이고, 얼굴과 이마와 목은 반들반들하게 광을 냈으며, 뒷머리의 머리카락은 거칠게 남겨 두었다.
이 작품은 디미트리에 파치우레아가 1920년대 후반에 만든 키메라들 가운데 하나다. 실물 크기의 인물상 《공기의 키메라》로 그는 1927년 국가 조각상을 받았다. 파치우레아는 1909년부터 부쿠레슈티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가르쳤고, 그의 제자로는 코르넬 메드레아, 이온 잘레아, 오스카르 한이 있었다. 작업은 화가 테오도르 아만의 기념관 마당에 있는 작업실에서 했는데, 그는 이 기념관의 관리자이기도 했다. 키메라들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 무렵 19세기의 상징주의는 이미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동상이 어떻게 미술관에 들어왔는지는 알려진 것이 적다. 명패에는 ‘입수 경위: 구입’이라고 적혀 있고, 언제 주조했는지는 발표된 바 없다. 같은 미술관의 《공기의 키메라》는 조각가가 세상을 떠나고 35년이 지난 1967년에 주조되었다.
파치우레아는 1932년 7월 1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쿠레슈티의 신문 《디미네아차》는 그가 가난 속에 죽었다고 썼고, 장례 비용은 친구들이 모았다.

12. 콘스탄틴 브랑쿠시 《기도》, 1907년
1907년 4월 18일 콘스탄틴 브랑쿠시가 파리에서 서명한 계약서에 주문된 것은 우는 여인이었다. 주문자는 부저우에 사는 엘리자 스터네스쿠였다. 1905년 10월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이던 남편 페트레 스터네스쿠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결혼한 지 다섯 달쯤 만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무덤을 위해 돌 받침과 우의적인 인물상, 고인의 흉상을 7,500레우에 주문했다. 브랑쿠시는 31세였고, 그해 봄 로댕의 작업실에서 한 달쯤 일하다가 나온 참이었다.
처음에 그는 주문받은 대로 만들었다. 옷을 걸치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슬픔에 잠겨 묘석에 기댄 여인으로, 이 인물상은 사진으로 전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인물상을 부수고 새로 시작했다. 1910년에 주조한 청동상에서 여인은 벌거벗고 무릎을 꿇었으며, 온몸이 무릎에서부터 하나의 긴 사선을 그리며 앞으로 기울었고, 고개는 가슴까지 깊이 숙였다. 오른팔은 굽혀 주먹을 가슴에 대고 있고, 왼팔은 브랑쿠시가 로댕을 본받아 팔꿈치 위에서 직접 잘라 냈다. 그는 아직 훗날처럼 표면을 매끈하게 연마하지 않았고, 어두운 청동에는 손으로 빚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그 위에서 빛이 잘게 부서져 반짝인다.

1910년 《기도》는 파리 앵데팡당전에 출품되었고, 1914년 브랑쿠시는 직접 부저우에 와서 현장에서 돌로 받침을 깎고 둠브라바 묘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과부에게 브랑쿠시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던 화가 슈테판 포페스쿠는, 인수할 때 한바탕 소동이 있었지만 기념비는 결국 세워졌다고 적었다.
미술관은 1958년 스터네스쿠 집안에서 《기도》를 70,000레우에 사들였다. 국가가 브랑쿠시의 또 다른 작품 《대지의 지혜》를 몰수한 지 한 해 뒤였다. 무덤에는 복제품이 놓였고, 페트레 스터네스쿠의 흉상도 미술관에 있다. 복제품은 1996년에 도난당했다가 1998년에 되찾았지만 2005년에 다시 도난당했다. 2014년 6월부터는 미술관의 원작에서 뜬 틀로 주조한 새 청동 복제품이 무덤에 서 있으며, 비용은 부저우 로터리클럽과 개인 후원자들이 댔다.
13. 이온 안드레스쿠 《바위와 자작나무》, 연도 미상
캔버스의 위쪽 절반은 구름 한 점 없이 고르게 옅은 하늘색 하늘이다. 마른 붓으로 칠해서 물감이 캔버스 결에 걸려 있다. 오른쪽에는 자작나무 한 무리가 서 있는데, 줄기 하나하나를 두껍고 흰 붓질 한 번으로 올리고 검은 나무껍질 반점을 찍었으며, 가느다란 줄기 하나는 가운데 쪽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가운데에는 좁고 어두운 노간주나무가 솟아 있고, 왼쪽에는 잎이 성긴 적갈색 나무가 있으며, 앞쪽에는 적갈색 고사리 사이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놓여 있다. 바위는 희끄무레한 회색에 연보라와 연둣빛 지의류 얼룩이 앉았다. 오른쪽 아래 바위 밑동에는 적갈색 물감으로 ‘안드레스쿠’라고 서명했다.
언제 그렸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부저우 시절 작품으로 보기도 하고 프랑스 시절 작품으로 보기도 하는데, 화풍에는 퐁텐블로에서 배운 것이 엿보인다. 1872년부터 1878년까지 안드레스쿠는 부저우에서 소묘와 습자를 가르치며 독학으로 풍경을 그렸다. 1878년 말 그는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고, 그 뒤 퐁텐블로 숲 가장자리의 바르비종에서 그리고레스쿠와 나란히 작업했다. 이때 그리고레스쿠가 그린 그의 초상 《바르비종의 안드레스쿠》도 이 미술관에 있다.
1881년 그의 《바르비종의 겨울》이 파리 살롱에 걸렸다. 1882년 부쿠레슈티에서 약 60점의 그림으로 그의 생전 유일한 개인전이 열렸고, 그해 10월 22일 그는 32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마니아에서는 그를 그리고레스쿠, 루키안과 함께 루마니아 근대 회화를 세운 화가로 꼽는다. 2020년 미술관은 1989년 12월에 총탄을 맞았다가 미술관 복원가들이 되살린 그림 47점 가운데 하나로 그의 《마을 어귀의 포플러》를 전시했다.

04. 포화 속의 궁전

마지막 두 작품과 함께 이야기는 다시 미술관 건물로 돌아온다. 1989년 12월 옛 왕궁은 소장품을 보관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사건의 한복판에 놓였다.
14. 슈테판 루키안 《꽃 파는 소녀 사프타》, 1900년경
1989년 12월 22일 저녁, 옛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와 미술관이 들어 있던 궁전 사이의 광장에서 총격이 시작되었다. 그날 밤 미술관의 이젤화 복원실이 불탔고, 그사이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그림들을 건물 안쪽 계단에 숨겼다. 그중에는 미술사학자 도라나 코쇼베아누와 18세의 미리암 처럴룽거도 있었다. 미술관은 나중에 유럽 그림 17점과 루마니아 그림 13점, 모두 30점을 잃었다고 집계했다.
슈테판 루키안의 《꽃 파는 소녀 사프타》는 상설 전시실에 걸려 있다가 총탄 두 발을 맞았고, 두 발 모두 앞에서 날아왔다. 한 발은 쇄골 가까이에서 여인의 가슴을 뚫었고, 다른 한 발은 심장 위 어두운 윗옷에 크고 너덜너덜한 구멍을 냈다. 루키안은 국가 기념물 등록부에 젊은 집시 여인으로 기록된 사프타를 1900년 무렵, 훗날 그를 마비시킨 병이 찾아오기 전에 그렸다. 그녀는 이마까지 눌러쓴 검붉은 머릿수건에,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어두운 윗옷과 두텁게 도드라진 붓질로 그린 깊게 파인 흰 셔츠 차림으로 서서, 보는 이를 비껴 오른쪽으로 눈을 흘긴다. 그녀 뒤로는 회반죽처럼 거칠게 끊긴 붓질로 바른 따뜻한 황토색 바탕이 있다.

미술관 직원들은 일부 여성 인물을 일부러 겨냥해 쏘았다고 회상했지만, 검찰 기록에는 무차별 사격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이제 밝혀낼 길이 없다.
총탄을 맞은 그림들의 복원은 1990년 1월 미술관 복원실에서 시작되었다. 2020년 복원가이자 큐레이터인 소리나 게오르기처와 복원실장 이오안 스프리잔은 총탄 맞은 그림들의 복원을 다룬 전시 《실험실 2. 1989》의 포스터에 《사프타》를 썼다. 포스터에는 복원된 얼굴과 가슴이 실렸고, 곁들인 작은 사진 두 장에는 총탄 구멍이 담겼다.
15. 코트로체니 수도원의 이코노스타시스, 1682년
1977년 3월 4일 지진이 일어난 뒤, 미술관 직원들은 코트로체니 수도원 성당에서 이코노스타시스, 곧 성소 앞을 가로막는 이콘 벽과 다른 성물들을 옮겨 왔다. 대부분은 수도원을 세운 사람이 바친 것이었다. 일곱 해 뒤인 1984년, 코트로체니 궁을 관저로 쓰려던 차우셰스쿠의 명령으로 성당은 헐렸다. 그때 이코노스타시스는 이미 성당 안에 없었다.
이 이코노스타시스는 왈라키아 군주 셰르반 칸타쿠지노가 자신이 세운 코트로체니 수도원의 성당을 위해 주문했고, 성당은 1682년에 완공되었다. 조각은 현지 공방이 맡았고, 이콘은 화가 콘스탄티노스가 그렸다. 그는 아마 그로부터 십 년 뒤 후레지 수도원의 벽화 작업을 이끈 바로 그 화가일 것이다. 조각가들은 왕의 문 위에 누워 있는 이새를 새기고, 그 몸에서 금박을 입힌 포도덩굴이 자라나 조각된 벽 전체로 뻗어 나가게 했다. 이렇게 조각가들은 다윗 가문에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나타냈다. 콘스탄티노스는 금빛 바탕 위에 빨강, 파랑, 초록을 강렬하게 맞세워 이콘을 그렸다.
철거에 앞서 건축가 카밀 로구스키는 성당의 석재와 기둥, 프레스코를 구해 체르니카 수도원으로 옮겨 놓았다. 구해 낸 조각들 가운데에는 앞에서 본 보르데슈티 자화상의 화가 파르부 무투가 그린 봉헌자 초상도 있었다.

미술관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1989년 12월에는 이코노스타시스에도 총탄이 박혔지만, 어디에 맞았는지 기록한 사람은 없다. 복원은 2002년에 끝났고, 25년 사이에 이코노스타시스는 1977년, 1989년 이후, 2002년, 이렇게 세 번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었다.
2009년 정부는 이코노스타시스와 미술관에 보관 중이던 코트로체니의 다른 성물 약 140점을 재건된 성당에 쓰도록 대통령 행정실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미술관의 복원가와 학예사들은 또 한 번 해체하면 이코노스타시스가 위험해지고 새 성당의 온도와 습도도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나머지 성물들은 코트로체니로 돌아가 2014년 10월부터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재건된 코트로체니 성당에는 지금 복제품이 서 있다. 원본은 이곳, 옛 왕궁에 남았다. 몇 세기에 걸쳐 이 미술관의 작품들은 벽에서 떼어지고, 뜯겨 다시 재단되고, 팔려 오고, 유언으로 넘어오고, 지진 뒤에 구조되고, 총격 뒤에 복원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미술사와 나란히 거의 언제나 또 하나의 역사, 곧 작품이 어떻게 지금 우리 앞에 오게 되었는지의 이야기가 흐른다.
더 볼 것
이 목록은 궁전에 이르는 길 자체가 흥미로운 작품들을 중심으로 꾸렸고, 토니차와 안드레스쿠는 일부러 둔 두 가지 예외였다. 목록 밖에도 이곳을 찾을 이유는 많다. 옛 루마니아 미술 갤러리에서는 1395~1396년 코지아 수도원의 에피타피오스와 1561년 푸트나의 도소프테이가 만든 행렬용 십자가를 찾아보자. 유럽 갤러리에는 엘 그레코의 그림 두 점, 《성모의 결혼》과 《성 마우리티우스》가 더 있고, 루벤스의 《조반나 스피놀라 파베세의 초상》도 있다. 루마니아 갤러리에서는 루키안의 《아네모네》, 그리고레스쿠의 《문가에서 실 잣는 소녀들》, 테오도르 팔라디의 《창가의 꽃, 도핀 광장》을 찾아보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