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7년 토스카나 대공 자리의 계승자였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대공자는 페시아 대성당에서 라파엘로가 미완성으로 남긴 제단화를 떼어 내 피티 궁전의 자기 거처로 가져갔다. 제단에는 그 대신 피렌체 화가 피에르 단디니가 그린 모사본이 놓였고, 이 모사본은 그 뒤로 줄곧 페시아에 남았다.

이 궁전은 15세기에 피렌체의 은행가 루카 피티가 자신을 위해 지었고, 1549~1550년에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공작의 아내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가 사들였다. 메디치 가문은 1737년까지 이곳에 살았고, 그 뒤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대공들이 이었으며, 피렌체가 이탈리아의 수도였던 1865~1871년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국왕이 들어와 살았다. 로트링겐 가문은 18세기 말부터 1834년 사이에 그림들을 액자와 액자가 맞닿도록 빽빽하게, 화파와 시대를 뒤섞어 걸었고, 1830년 무렵 레오폴도 2세 대공이 이 미술관을 일반에 공개했다.

우리는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1545년 코시모 1세에게 선물로 보낸 초상화에서 시작해, 이 궁전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보이아 왕가 국왕들의 옥좌의 방으로 끝낸다.

선물과 메디치 가문의 첫 소장품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티치아노, 1545, 팔라티나 미술관

1. 티치아노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

1545년 초, 베네치아의 문필가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티치아노에게 돈을 치르고 자기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피렌체의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공작에게 선물해 그의 후원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아레티노는 편지와 풍자문, 그리고 권력자들의 후한 씀씀이에 기대어 살았고, 젊은 시절에는 공작의 아버지인 용병대장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와 친구로 지냈다. 초상화는 10월에 피렌체로 보내졌다. 같은 해 가을 아레티노는 코시모에게 두 번째 선물을 보냈는데, 자기가 간직하던 데스마스크를 보고 그린 조반니 본인의 초상화였다. 아레티노는 처음에 이 그림을 티치아노에게 부탁했지만 티치아노는 끝내 손을 대지 않았고, 초상화는 잔 파올로 파체가 그렸는데, 메디치 가문의 목록에서는 1905년까지 이 그림을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여겼다. 아레티노의 초상화는 1553년부터 공작의 소장품 창고인 과르다로바의 목록에 올라 있지만, 이 그림이 언제 피티 궁전으로 옮겨졌는지 알려 주는 문서는 연구자들이 찾아내지 못했다.

선물을 보낸 뒤 아레티노는 이 그림에 대해 편지 두 통을 썼다. 티치아노에게는 초상화가 “완성했다기보다 대강 그린 것”이라고 알렸다. 10월 17일 코시모에게는 초상화가 숨을 쉬고 맥박이 뛴다고 쓰면서, 자기가 화가에게 준 돈이 좀 더 많았더라면 옷감이 더 반짝이고 부드럽고 두툼하게 나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진홍색 벨벳 옷의 옷깃을 보면 알 수 있다. 옷깃은 연분홍 비단이고, 티치아노는 밝은 물감을 길고 느슨한 띠처럼 붉은색 위에 곧바로 얹었으며, 오른쪽 옷깃을 따라서는 재빠른 붓질로 모피인지 술 장식인지 모를 것을 대강 그려 두었다. 가슴의 금사슬은 짙은 노란 물감으로 두껍게 칠했는데, 얼굴 다음으로 캔버스에서 가장 공들여 마무리한 부분이다. 아레티노 자신은 보는 사람을 비켜 옆쪽을 바라보고, 왼쪽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넓은 이마와 코, 턱에서 희끗해지는 수염을 비춘다. 우피치 미술관은 옷에 남은 느슨한 붓질을 티치아노가 일부러 택한 방식으로 본다.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티치아노, 1545, 팔라티나 미술관

2. 브론치노 《난쟁이 모르간테의 초상》

코시모 1세의 궁정에서 난쟁이 브라초 디 바르톨로는 루이지 풀치의 서사시에 나오는 거인의 이름을 따서 모르간테라고 불렸다. 그는 공작이 거느린 어릿광대 다섯 명 가운데 가장 유명했고, 1555년의 한 문서는 그를 “우리 공작 궁전의 난쟁이이자 몹시 아끼는 하인”이라고 부른다. 궁정 초상화가 아뇰로 브론치노는 코시모를 위해 그를 벌거벗은 전신상으로, 그것도 캔버스 한 장의 앞뒤 양면에 그렸다. 이 그림은 1553년에 이미 베키오 궁전에 있던 공작의 과르다로바 목록에 올라 있었다.

앞면에서 모르간테는 두 다리를 벌리고 똑바로 서서 치켜든 손에 올빼미를 얹고 있고, 올빼미에 맨 끈이 아래로 내린 그의 왼손까지 이어진다. 올빼미는 새를 꾀어 들이는 미끼이고, 오른쪽 위에서는 날개에 파란 줄무늬가 있는 어치 한 마리가 벌써 그쪽으로 날아온다. 뒷면에서는 같은 사람이 등을 보이고 선 채 오른쪽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치켜든 손에는 잡은 작은 새들을 한 묶음 들고 있다. 그래서 한 번의 사냥이 사냥 전과 사냥 뒤, 두 순간으로 나뉘어 그려졌다. 우피치 미술관은 브론치노가 그를 새 사냥꾼으로 그린 까닭을, 큰 짐승 사냥은 그보다 신분 높은 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미술사학자 제임스 홀더바움은 1956년 이 그림을, 인문주의자 베네데토 바르키가 1546~1547년 피렌체 미술가들 사이에서 벌인 논쟁과 연결했다. 회화와 조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고귀한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조각가들은 조각상은 한 바퀴 돌며 볼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웠고, 브론치노는 한 사람을 앞뒤 양쪽에서 보여 주었다.

난쟁이 모르간테의 초상
난쟁이 모르간테의 초상브론치노, 1553, 팔라티나 미술관

나중에 누군가 이 그림에 덧칠을 해서 모르간테를 바쿠스로 바꾸어 놓았다. 머리에 포도 잎 관을 씌우고, 올빼미를 잔으로 고쳐 그리고, 왼손 밑에 항아리를 세우고, 사타구니는 포도송이 달린 잎 꽃줄로 가렸다. 국가 문화재 목록은 이 덧칠을 17세기의 것으로 보고, 미술관과 복원 연구소 오피피초 델레 피에트레 두레는 19세기의 것으로 본다. 2010년 오피피초의 복원가들이 덧칠을 모두 걷어 내자 그 아래에서 호랑나비 두 마리가 나왔다. 한 마리는 왼쪽 아래 작은 풀 곁을 날고, 다른 한 마리는 사타구니에 앉아 있는데, 이 나비는 브론치노가 직접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이 피티 궁전으로 옮겨진 것은 2019년 9월에 와서였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는 우피치의 복도에 놓여 있었지만, 그곳 바닥이 관람객의 발걸음에 흔들려 물감층이 들뜰 위험이 있었다. 팔라티나 미술관은 이 이중 초상화를 충격 흡수 장치를 단 독립 진열장에 넣었고, 진열장을 한 바퀴 돌면 양면을 다 볼 수 있다.

난쟁이 모르간테의 초상
난쟁이 모르간테의 초상브론치노, 1553, 팔라티나 미술관

우르비노와 보티의 유산

베일을 쓴 여인
베일을 쓴 여인라파엘로, 1513, 팔라티나 미술관

3. 라파엘로 《베일을 쓴 여인》

피렌체의 귀족이자 외교관 마테오 보티는 1615년 코시모 2세 대공과 종신 연금 계약을 맺었다. 그림 소장품을 대공에게 넘기는 대신, 보티는 죽을 때까지 대공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1619년의 유언장이 이 계약을 확인했고, 1621년 보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그림들은 메디치 가문으로 옮겨 갔다. 그 가운데 베일을 쓴 젊은 여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림의 대부분을 소매 하나가 차지한다. 소매는 옅은 비단이어서 주름을 따라 흰빛에서 분홍빛과 잿빛으로 변하고, 금빛 도는 노란 줄무늬와 같은 빛깔의 안감이 어깨에서 뒤집혀 드러나며, 주름 하나하나가 따로 그려져 있다. 여인은 손가락을 벌린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왼손은 거의 화면 밖으로 빠져서, 왼쪽 아래 구석에 손끝과 금팔찌를 찬 손목만 보인다. 크림빛 투명한 베일은 정수리에 얹혀 양쪽으로 화면 아래 끝까지 흘러내리고, 그래서 인물 전체가 좁고 높은 삼각형 안에 들어선다.

라파엘로는 1512~1516년 무렵 로마에서 이 초상화를 그렸다. 피렌체에서는 그림에 붙어 있던 그의 이름이 잊혔고, 18세기 말 로트링겐 가문은 메디치 가문의 궁정 초상화가 유스투스 수스테르만스의 작품으로 이 그림을 걸었다. 1839년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다비트 파사반트가 이 그림을 라파엘로에게 되돌려 주며, 모델이 화가의 연인 포르나리나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포르나리나 이야기는 바사리에게서 비롯되었다. 바사리는 1568년, 라파엘로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의 초상화를 피렌체의 상인 마테오 보티가 갖고 있다고 썼다. 그런데 코시모 2세와 계약을 맺은 마테오 보티는 1570년 무렵에 태어났으니, 바사리가 말한 사람은 다른 마테오다. 바사리는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마르게리타’라는 이름은 나중에 누군지 모를 독자가 《미술가 열전》 한 권의 여백에 적어 넣은 것이고, 빵집 딸이라는 뜻의 별명 포르나리나는 그보다도 뒤에 생겨났으며, 1897년에는 “시에나의 고 프란체스코 루티의 딸, 과부 마르게리타”에 관한 1520년의 기록이 공개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옷과 장신구로 보아 이 그림이 젊은 귀부인을 그린 주문 초상화일 가능성이 더 크고, 베일은 그녀가 결혼한 여인이라는 표시라고 본다.

베일을 쓴 여인
베일을 쓴 여인라파엘로, 1513, 팔라티나 미술관
라 벨라
라 벨라티치아노, 1537, 팔라티나 미술관

4. 티치아노 《라 벨라》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를 지휘하던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는 1536년 5월 2일 베네치아에 있던 자기 대사에게, “푸른 옷을 입은 그 여인의 그 초상화”를 서둘러 달라고 티치아노를 재촉하라고 일렀다. 모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모두 이 한마디에서 나온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모리츠 타우징은 공작의 아내 엘레오노라 곤차가라고 추정했지만, 공작이 아내를 “그 여인”이라고 불렀을 것 같지는 않다. 이탈리아의 레안드로 오촐라는 그림에서 젊어진 이사벨라 데스테를 보았고, 고급 창부라고 본 사람들도 있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한 것으로 보며, 많은 사람이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같은 얼굴을 알아본다. ‘라 벨라’, 곧 ‘미인’이라는 별명은 18세기 피렌체에서 붙었다.

푸른 다마스크 드레스에는 뻣뻣한 몸판을 따라 금색 줄무늬가 수놓여 있고, 푸른 바탕에 작은 리본들이 흩어져 있다. 소매 아랫부분은 짙은 포도주빛 벨벳인데, 트인 틈으로 흰 리넨 퍼프가 부풀어 나와 금실 끈으로 묶여 있다. 왼손은 허리에 얹었고 집게손가락은 아래를 향한다. 왼쪽 아래의 오른손은 묵직한 금 끝장식이 달린 금사슬을 쥐고 있으며, 팔뚝에는 어두운 모피가 걸쳐져 있는데 어두운 배경 속에서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이 초상화는 1631년에 피렌체로 왔다. 그해 델라 로베레 가문의 마지막 우르비노 공작이 죽고, 그의 소장품을 아홉 살 난 손녀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가 물려받았다. 비토리아는 1623년 한 살 때 피렌체로 왔고, 두 살 때 훗날의 대공 페르디난도 2세와 약혼해 메디치 가문 사람들 틈에서 자랐다. 비토리아는 16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티 궁전의 자기 방에 이 초상화를 두었다. 그 뒤 그림은 그녀의 아들 프란체스코 마리아 데 메디치 추기경에게, 1711년에는 코시모 3세 대공에게 넘어갔다.

나폴레옹 시대에 그림은 파리로 실려 갔고, 복원가들에 따르면 그곳에서 1804년 배접되고 덧칠되고 두꺼운 바니시가 입혀졌다. 1815년 이후 그림은 피렌체로 돌아왔다. 2008~2011년 오피피초 델레 피에트레 두레의 복원가 파트리치아 리이타노가 프랑스에서 한 덧칠과 어두워진 바니시를 걷어 내자, 푸른 드레스가 남동석과 청금석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라 벨라
라 벨라티치아노, 1537, 팔라티나 미술관
참회하는 막달레나
참회하는 막달레나티치아노, 1533, 팔라티나 미술관

5. 티치아노 《참회하는 막달레나》

막달레나의 몸을 가린 것은 자기 머리카락뿐이다. 구릿빛 도는 금발은 길게 양 어깨로 흘러내려 그림 아래 끝까지 닿고 앞쪽에서 무거운 다발로 모이는데, 티치아노는 머리카락을 재빠른 붓질로 한 가닥씩 그려서 다발마다 제각각 빛이 번뜩인다. 그녀는 손가락을 벌린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한쪽 가슴에 눌러 대고 있고, 다른 쪽 가슴은 드러나 있다. 머리는 뒤로 젖혀졌고, 오른쪽 가장자리 쪽으로 치켜뜬 눈은 눈물로 반짝인다. 왼쪽 위 어두운 언덕 능선 위로 구름 낀 푸른 하늘이 한 조각 보이는데, 그림에서 유일하게 차가운 색이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막달레나가 향유를 담아 온 뚜껑 달린 밝은 색 단지가 놓여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티치아노는 이 단지 가장자리에 서명을 남겼다.

우피치 미술관은 이 그림이 1533~1535년 무렵 베네치아에서, 《라 벨라》를 주문한 바로 그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위해 그려졌을 것으로 본다. 일부 연구자는 여전히 이 그림을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곤차가가 1531년 시인 비토리아 콜론나에게 선물하려고 주문한 막달레나로 여긴다. 바사리는 1548년 프란체스코 마리아의 아들 귀도발도 2세 공작의 과르다로바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가슴 위까지 그린 그림을 보고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했는데, 보통 이 기록을 피티 궁전의 그림과 연결한다. 막달레나는 1631년 《라 벨라》와 함께, 같은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의 유산으로 피렌체에 왔다.

티치아노는 1560년대까지 이 구도를 되풀이해 그렸고, 그런 그림이 에르미타주, 나폴리, 슈투트가르트, 게티 미술관에 있다. 피티 궁전의 막달레나는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작품으로 여겨진다. 교회 성화에 품위를 요구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 그린 후기의 그림들에서는 막달레나가 옷을 입고 있다.

페르디난도 2세의 궁정

유디트와 하녀
유디트와 하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8, 팔라티나 미술관

6.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디트와 하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로마에서 아고스티노 타시에 대한 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12년 말이나 1613년 초에 피렌체로 왔다. 그녀는 이곳에서 메디치 궁정을 위해 일했고, 1616년에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피렌체 소묘 아카데미에 받아들여졌다.

피렌체에서 지내던 그 몇 해 동안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그의 진영을 빠져나가는 두 여인을 그렸다. 두 여인은 모두 고개를 홱 오른쪽으로 돌려 화면 밖의 무언가를 바라본다. 유디트는 뒤쪽에 서서 칼날이 위로 가게 칼을 자기 어깨에, 목 바로 옆에 걸쳐 들고, 왼손은 하녀 아브라의 어깨에 얹었다. 노란 드레스에 밝은 터번을 쓴 아브라는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어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얼굴이 겨우 보인다. 아브라는 허리께에 바구니를 받쳐 들고 있는데, 바구니에는 눈을 감은 머리가 담겨 있고, 바구니에서 흘러나온 피가 흰 천으로 번지며 그녀의 소맷부리에도 얼룩을 남긴다. 아르테미시아는 이 구도를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에게서 가져왔는데, 같은 주제를 그린 오라치오의 그림은 오슬로에 있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도 같은 궁정을 위해 같은 주제를 그렸고, 그의 《유디트》도 이 궁전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이 메디치 가문의 문서에 처음 나오는 것은 1637년 피티 궁전 과르다로바의 목록으로, 거기에는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바구니에 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지닌 유디트와 그 동행”이라고 적혀 있다. 이 목록보다 앞서 주문이나 구입을 기록한 문서는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때 이미 피렌체를 떠난 지 17년이었다. 남편의 빚 때문에 가족이 피렌체를 떠났고, 1620년 3월에 아르테미시아는 벌써 로마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으며, 피렌체의 작업실에는 끝내지 못한 작품들이 남아 있었다.

유디트와 하녀
유디트와 하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8, 팔라티나 미술관

7. 안드레아 델 사르토 《파세리니 성모 승천》

코르토나의 마르게리타 파세리니는 1526년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계약을 맺고, 코르토나 근교에 있는 성모의 종 수도회 성당 제단에 걸 《성모 승천》을 155플로린에 주문했다. 그림 속 성인들은 주문자의 가족에 맞추어 골랐다. 왼쪽에는 파세리니 가문의 수호성인인 흰 수염의 미라의 성 니콜라오가 금실로 수놓은 무거운 분홍 제의를 입고 무릎을 꿇었고, 그 앞 바닥에는 금 공 세 개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서는 흰 베일에 잿빛 도는 갈색 옷을 입고 묵주를 든 나이 든 여인이 기도하는데, 이 고장의 성녀이자 주문자와 이름이 같은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게리타다.

파세리니 성모 승천
파세리니 성모 승천안드레아 델 사르토, 1526, 팔라티나 미술관
판차티키 승천
판차티키 승천안드레아 델 사르토, 1523, 팔라티나 미술관
목성의 방 천장화
목성의 방 천장화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643, 팔라티나 미술관

델 사르토는 몇 해 전 피렌체의 판차티키 가문을 위해 그린 자신의 《성모 승천》을 바탕으로 삼고, 여러 곳을 고쳤다. 아래쪽의 풍경과 하늘은 어두운 바위로 바꾸어서, 무덤을 둘러싼 사도들의 분홍, 빨강, 오렌지빛이 어른거리는 옷이 거의 검은 바탕에서 선명하게 두드러지고, 구름 위의 마리아는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는 계약하고 4년 뒤인 1530년에 세상을 떠났다. 팔라티나 미술관에는 르네상스의 어느 대가보다도 그의 그림이 많다. 1639년 파세리니 가문의 상속인이 이 제단화를 페르디난도 2세 대공에게 팔았고, 대공은 그림을 피티 궁전의 회화 소장품으로 보냈으며, 제단에는 모사본이 놓였다. 판차티키 가문의 《성모 승천》은 1687년 페르디난도 대공자에게 들어와 피티 궁전에 왔는데, 이때 코르토나의 그림과 높이를 맞추려고 패널 위쪽을 덧대어 늘렸다.

8.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와 치로 페리, 행성의 방 천장화

이 방들에서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그림보다 스투코 장식이 더 많다. 금박 입힌 틀, 처마 돌림띠를 따라 비스듬히 누운 흰 스투코 인물상, 금박 입힌 푸토와 아틀라스, 라틴어 표어를 새긴 메달리온과 카르투슈가 궁륭 천장을 거의 다 덮고, 프레스코는 한가운데에만 남겨 두었다. 목성의 방 천장에는 네 잎 모양의 틀 안에서, 푸른 망토를 휘날리는 벌거벗은 젊은 군주가 독수리 위에 앉은 유피테르에게 두 팔을 뻗는다. 군주의 등 뒤에는 그에게 곤봉을 넘겨준 수염 난 헤라클레스가 곤봉을 든 채 서 있고, 오른쪽에서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방패에 M 자를 새긴다. 미술관은 이 천장의 인물들 가운데 네 여인을 ‘메디치의 별’로 본다. 1610년 갈릴레이가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들에 붙인 이름이다.

1641년 페르디난도 2세 대공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에게 자신의 의전용 방들을 장식하는 일을 맡겼다. 코르토나는 당시 화가이자 건축가이자 스투코 장식의 대가였고, 얼마 전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 천장화를 그린 참이었다. 프로그램은 궁정 사서 프란체스코 론디넬리가 짰는데, 여기서는 행성의 표지 아래 군주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알현을 기다리던 금성의 방에서는 미네르바가 젊은이를 비너스의 품에서 떼어 내고, 사절들이 기다리던 화성의 방에서는 군주가 싸우며, 메디치 가문의 알현실이던 목성의 방에서는 군주가 관을 받는다. 마지막은 토성의 방으로, 여기서는 사투르누스가 늙은 군주를 맞아들인다.

1647년 코르토나는 로마로 떠났고, 다시는 피렌체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폴론의 방은 미완성으로 남았다가 1659~1661년 코르토나의 제자 치로 페리가 마무리했다. 토성의 방은 1663~1665년 페리가 스승의 밑그림에 따라 혼자서 전부 그렸다.

목성의 방 천장화
목성의 방 천장화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643, 팔라티나 미술관

메디치 가문의 수집가들

9. 티치아노 《연주회》

페르디난도 2세 대공의 아우로 훗날 추기경이 되는 레오폴도 데 메디치는 피렌체 귀족 파올로 델 세라를 베네치아에 둔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델 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사를 하러 베네치아로 갔다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사람이다. 30년 동안 델 세라는 수많은 그림과 소묘, 자화상을 피렌체로 보냈고, 레오폴도에게 직접 쓴 편지만 650통가량에 이른다. 1654년 레오폴도는 델 세라가 소장하던 그림도 한 점 샀다. 이 그림은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여겨졌고, 베네치아의 미술가 전기 작가 카를로 리돌피가 1648년에 이미 델 세라 컬렉션의 조르조네로 기록한 것도 아마 이 그림이었을 것이다.

연주회
연주회티치아노, 1510, 팔라티나 미술관

그림에는 허리 위까지 보이는 세 남자가 어두운 배경 속에 바짝 붙어 있다. 가운데의 연주자는 아직 스피넷 건반에 손가락을 얹고 있지만, 오른쪽 사람을 향해 어깨 너머로 홱 돌아보아 눈의 흰자가 보인다. 오른쪽에 선 사람은 연주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현악기의 목을 쥐고 있는데, 악기 몸통은 화면 아래로 빠져 있다. 왼쪽에서는 커다란 흰 타조 깃털을 꽂은 검은 베레모의 젊은이가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얼굴을 그린 방식이 서로 달라서, 연주자는 날카롭고 또렷하게, 젊은이는 더 부드럽고 평평하게 그려졌고, 이 차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공동 작업으로 보았다. 세 사람이 누구인지도 논란거리다. 미술관은 연주자를 모피 달린 망토를 입은 세속인으로, 오른쪽 사람을 도미니코회 수도자로 보고, 영국의 비평가 월터 페이터는 연주자를 수도사로 보았다. 1976~1978년 복원가들이 나중에 위쪽에 덧댄 캔버스 띠를 떼어 냈기 때문에, 젊은이의 깃털은 처음 의도대로 그림 위쪽 가장자리에 닿아 있다.

1675년 《연주회》는 우피치의 트리부나에 전시되었고, 1697년 피티 궁전의 페르디난도 대공자에게 돌아왔다. 19세기 내내 이 그림은 조르조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혔고, 페이터는 1877년 이 그림을 바탕으로 조르조네라는 화가에 대한 자기 생각을 세웠다. 3년 뒤 이탈리아의 감식가 조반니 모렐리가 처음으로 이 그림을, 조르조네가 죽은 해인 1510년 무렵에 그린 티치아노의 초기작이라고 했다.

연주회
연주회티치아노, 1510, 팔라티나 미술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디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디트크리스토파노 알로리, 1611, 팔라티나 미술관

10.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디트》

이 그림의 내력은 단 한 사람, 미술사가 필리포 발디누치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발디누치는 17세기 말, 크리스토파노 알로리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 화가의 친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2세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알로리에 대해 썼다. 발디누치에 따르면 알로리는 피렌체의 이름난 고급 창부이자 자기 연인이던 마차피라를 모델로 유디트를, 그녀의 어머니를 모델로 늙은 하녀를 그렸고, 잘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자기 얼굴을 보고 그렸다. 로마의 코르시니 도서관에는 눈을 감은 알로리 자신의 머리를 그린 소묘가 있는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위한 습작으로 여겨진다.

유디트는 큼직한 무늬가 있는 금빛 도는 노란 비단 드레스를 입고 술 장식이 달린 넓은 크림색 띠를 둘렀으며, 어깨 뒤로 진홍색 망토가 휘날린다. 우피치 미술관은 이 드레스를 피렌체의 비단 산업에 바친 경의로 본다. 유디트는 차분하게 보는 사람을 바라보고, 왼손으로는 치마 바로 옆에서 머리채를 잡아 머리를 들고 있다. 오른손은 화면 왼쪽 가장자리로 뻗어 있는데, 그 손에는 금박 입힌 칼자루만 보이고 칼날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오른쪽 위에 흰 베일을 쓴 하녀만이 겁먹은 얼굴로 옆을 보고 있어,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금실 레이스를 두른 초록 벨벳 쿠션이 놓여 있는데, 홀로페르네스의 침상에서 남은 것은 이 쿠션뿐이다.

알로리는 162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도 이 그림을 갖고 있었다. 그가 죽은 뒤 그림은 페르디난도 2세에게, 1626년에는 대공의 숙부인 카를로 데 메디치 추기경에게 넘어갔고, 1666년 카를로가 죽자 피티 궁전으로 왔다.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1799년부터 1815년까지는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 있었다. 제작 연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미술관은 1610~1612년으로 보고, 다른 연구자들은 1610년대 말로 잡으며, 영국 왕실 컬렉션은 1613년이라는 서명이 있는 자기네 판본을 첫 번째로 본다.

11. 카라바조 《잠자는 큐피드》

잠자는 큐피드
잠자는 큐피드카라바조, 1608, 팔라티나 미술관

1607년 7월 카라바조는 도망자 신세로 배를 타고 몰타에 왔다. 한 해 전 로마에서 그는 싸움 끝에 라누초 토마소니를 죽이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몰타에서는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가 되어 사면을 받기를 바랐다. 그는 기사단의 기사이자 기사단장의 이탈리아 담당 비서였던 피렌체 사람 프란체스코 델란텔라 수사를 위해 잠자는 큐피드를 그렸다. 1608년 7월 14일 카라바조는 기사단에 받아들여졌다. 8월 말 한 기사가 다친 싸움이 있은 뒤 그는 감옥에 갇혔고, 10월 초에 탈옥했으며, 12월 1일 기사단은 그를 “썩어 악취를 풍기는 지체”라며 내쫓았다.

캔버스의 3분의 2 가까이가 고른 어둠으로 덮여 있다. 벌거벗은 아기는 그 어둠 속에 대각선으로, 왼쪽 아래 구석의 발에서 오른쪽의 뒤로 젖힌 머리까지 누워 있다. 눈은 감겼고 입은 벌어졌으며, 배는 둥글게 부풀어 있고, 빛은 배꼽과 무릎에 가장 세게 떨어진다. 아기 밑에는 시위가 느슨해진 활이 놓여 있고, 머리 밑에는 베개 대신 화살통이 받쳐 있으며, 머리 위 어둠 속에는 다른 쪽 날개가 밝은 호 하나로만 남아 있다. 델란텔라는 기사단의 모든 기사처럼 순결 서원을 했다. 여기서 큐피드는 잠들어 있고, 그의 무기는 곁에 내던져져 있다.

1609년 7월 이 그림은 피렌체에 있는 주문자의 형제 니콜로 델란텔라 원로원 의원에게 도착했다. 캔버스 뒷면에는 붓으로 “시뇨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작품, 몰타에서 1608년”이라고 적혀 있다. 삼인칭으로 쓴 글이어서 화가의 서명으로 보지는 않는다. 1619~1620년 화가 조반니 다 산 조반니는 산타크로체 광장에 있는 델란텔라 궁전의 정면 프레스코에 이 큐피드를 다시 그렸다. 그림은 59년 동안 이 가문에 남아 있었다. 1667년 1월 14일 주문자의 조카인 도나토 델란텔라 수도원장이 자식 없이 죽었고, 같은 해 레오폴도 데 메디치 추기경이 그의 상속인들에게서 그림을 샀다.

잠자는 큐피드
잠자는 큐피드카라바조, 1608, 팔라티나 미술관

12. 페테르 파울 루벤스 《전쟁의 참화》

유스투스 수스테르만스는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고, 162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궁정 초상화가로 일했다. 1637년 그는 같은 고향 사람인 루벤스에게 자신이 가질 그림을 주문했다. 1638년 3월 12일 루벤스는 그에게 이탈리아어로 편지를 써서, 그날 그림값 가운데 마지막 142플로린을 받았고 그림을 담은 상자는 이미 3주 전에 릴을 거쳐 이탈리아로 떠났다고 알리며, 그림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설명했다. 편지 원본은 사라졌고, 역사가 필리포 발디누치가 펴낸 사본으로 글이 전한다.

전쟁의 참화
전쟁의 참화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7, 팔라티나 미술관

갑옷을 입고 커다란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스가 열린 야누스 신전에서 걸어 나온다. 로마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 이 신전의 문을 닫아 두었고, 루벤스의 말로는 마르스가 여러 민족에게 큰 재앙을 안기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벌거벗은 비너스는 그를 끌어안고 붙잡으려 하지만, 횃불을 든 복수의 여신 알렉토가 그를 앞으로 끌고 간다. 왼쪽 신전 문간에서는 찢어진 베일을 쓴 검은 옷의 여인이 두 팔을 쳐들고 서 있는데, “벌써 그토록 여러 해 동안 약탈과 모욕과 재앙을 견뎌 온 불행한 유럽”이다. 바닥에는 화합과 평화의 상징인, 리본이 풀린 화살 다발과 카두케우스가 떨어져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컴퍼스를 손에 쥔 건축가가 반듯이 누워 있고, 그 곁에 부러진 류트를 든 여인이, 그들 위에는 우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있다. 마르스는 펼쳐진 책과 소묘가 그려진 종이들을 밟고 있는데, 루벤스는 이것들에 대해 “내 기억이 맞는다면”이라고 쓴다. 그림이 이미 떠난 뒤라 기억에 의지해 설명했기 때문이다. 추신에서 그는 오래 포장해 둔 탓에 살색과 흰색이 조금 누레졌을까 걱정하며, 캔버스를 이따금 햇볕에 내놓으라고 권했고, 필요하다면 수스테르만스가 손을 봐도 좋다고 했다.

루벤스는 그때 60세 가까이였고, 30년 전쟁은 벌써 20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1640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수스테르만스는 1681년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곁에 두었고, 1691년 무렵 그의 상속인들이 코시모 3세의 아들 페르디난도 대공자에게 그림을 팔았다. 1799년 프랑스군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갔고, 1815년 돌려받을 때 작성한 목록에는 비너스의 등 쪽 물감층에 금이 갔다고 적혔다. 파리에서 캔버스를 틀에서 떼어 낼 때 생긴 금이었다.

전쟁의 참화
전쟁의 참화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7, 팔라티나 미술관
닫집의 성모
닫집의 성모라파엘로, 1507, 팔라티나 미술관

13. 라파엘로 《닫집의 성모》

1506~1507년 무렵 피렌체의 데이 가문은 산토스피리토 성당에 있는 가문 경당에 걸 제단화를 라파엘로에게 주문했는데, 1508년 가을 화가가 교황 율리오 2세를 섬기러 로마로 떠나면서 패널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1987~1991년 오피피초 델레 피에트레 두레의 복원가들은 아랫부분에 마지막 글레이즈 층이 입혀지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그 차이는 눈으로도 보인다. 옥좌 발치에서 펼친 두루마리를 보며 노래하는 날개 달린 두 아기는 성모 곁에서 더 밝고 명암으로 거의 입체감을 주지 않았으며, 성 베드로의 옷과 옥좌의 계단은 군데군데 밑칠처럼 얇게 칠해져 있다.

라파엘로가 죽은 뒤 작업실을 물려받은 줄리오 로마노와 잔프란체스코 펜니는 이 패널을 페시아 출신 발다사레 투리니에게 넘겼다. 투리니는 교황청에서 청원을 맡아보던 다타리오였고, 화가의 친구이자 유언 집행인이었다. 투리니는 1534~1542년 페시아 대성당에 경당을 지었고, 나중에 이 제단화가 그곳에 놓였다. 1697년 페르디난도 대공자가 이 그림을 가져갈 때,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페시아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패널을 밤에 실어 냈다.

대공자의 소장품에 맞추려고 패널 위쪽을 덧댔고, 그 부분은 궁정 화가 니콜로 카사나가 그렸다. 금박 입힌 꽃줄 장식이 달린 초록 닫집보다 위에 있는 것, 곧 닫집의 뾰족한 윗부분과 그 뒤로 금박 입힌 격자 천장이 있는 반원형 돔은 모두 그의 솜씨다. 이 띠 부분은 인물들보다 잿빛이 돌고 평평하다. 오른쪽에는 흰 주교관을 쓴 성 아우구스티노가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펼친 손바닥으로 성모를 가리키고, 그 뒤에는 순례자의 지팡이를 든 수염 난 노인이 서 있다. 미술관은 이 노인을 피사의 수호성인 성 라니에리로 보고, 옛 문헌은 성 야고보로 보았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얻지 못한 데이 가문은 1522년 같은 제단에 걸 그림을 로소 피오렌티노에게 주문했고, 대공자는 그 그림도 산토스피리토 성당에서 가져가고 모사본을 남겼다.

프랑스군과 망명, 그리고 귀환

의자의 성모
의자의 성모라파엘로, 1513, 팔라티나 미술관

14. 라파엘로 《의자의 성모》

1820년 무렵 독일 작가 에른스트 폰 하우발트는 이 그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한 동화를 아이들을 위해 지었다. 포도원 일꾼의 딸이 은수자 베르나르도 신부를 늑대에게서 구하려고 그를 참나무 위로 피신시켰다. 은수자는 딸과 참나무를 축복하며, 둘 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리라고 예언했다. 세월이 흘러 참나무는 베어져 술통이 되었고, 처녀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라파엘로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보고, 바로 그 참나무로 만든 포도주 통의 밑판에 세 사람을 숯으로 스케치했고, 그래서 그림이 둥글게 되었다. 이 동화는 그 뒤로 여러 번 되풀이되었고, 19세기에는 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렸다.

라파엘로는 1512년 무렵 로마에서 집에서 기도할 때 쓰도록 이 톤도를 패널에 그렸다. 성모는 아기의 머리에 뺨을 대고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고, 아기도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 바깥을 바라보며, 오른쪽 가장자리의 어린 세례자 요한만이 두 손을 모으고 그들을 올려다본다. 그림 이름의 유래가 된 의자는 왼쪽 아래에 꼭대기에 공 장식이 달린 금박 입힌 기둥 하나로만 보인다. 미술관은 이 의자를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이 쓰던 ‘실내용 의자’라고 부른다.

이 그림은 16세기 말에 피렌체에 들어왔고, 1589년에는 우피치의 트리부나에서 다른 라파엘로 그림 두 점 곁에, 네 모서리에 브로카텔로 대리석을 박은 네모난 액자에 끼워진 채 기록되어 있다. 이 액자는 1648년 화가 조반나 가르초니가 동판에 그린 모사화에서 볼 수 있다. 페르디난도 대공자는 톤도를 트리부나에서 피티 궁전의 자기 침실로 가져가, 네 모서리에 가면 장식이 있는 금박 입힌 새 직사각형 액자에 끼웠다. 1799년 프랑스군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갔고, 1816년부터 다시 피티 궁전 소장으로 올라 있다. 의자 기둥 위의 공을 두고 어떤 연구자들은 메디치 가문 문장의 구슬로 보아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주문을 떠올리고, 다른 연구자들은 교황 율리오 2세의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 문장의 도토리로 본다.

의자의 성모
의자의 성모라파엘로, 1513, 팔라티나 미술관
그란두카의 성모
그란두카의 성모라파엘로, 1506, 팔라티나 미술관

15. 라파엘로 《그란두카의 성모》

성모는 무릎 위까지, 거의 정면을 향한 모습으로 고른 검은 바탕에 그려져 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고, 시선은 아들을 비껴 간다. 아기는 한 손바닥으로 성모의 가슴께 옷을 짚고, 다른 손 손가락으로는 어깨에 걸친 그녀의 푸른 망토 자락을 붙잡은 채, 살짝 찡그린 진지한 얼굴로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후광은 가느다란 금선으로만 그려져 검은 바탕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라파엘로는 1506~1507년 무렵 피렌체에서 이 패널을 그렸고, 우피치에는 그가 같은 두 인물을 원 안에, 또 타원 안에 넣어 보다가 결국 직사각형으로 정한 소묘가 남아 있다.

1983~1984년 이 패널을 복원할 때 오피피초 델레 피에트레 두레가 엑스선 사진을 찍어 보니, 검은 바탕 밑에서 아치를 받치는 기둥이 있는 실내와 작은 풍경 한 조각이 드러났다. 오피피초의 복원가들은 검은 바탕을 나중에 덧칠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라파엘로 연구자 마이어 추어 카펠렌은 인물에 더 무게를 주려고 화가 자신이 바탕을 어둡게 칠했을 가능성도 열어 둔다. 복원가들은 검은 바탕을 벗겨 내지 않기로 했다.

이 그림에 관한 문서는 1799년부터 시작된다. 그해 봄 프랑스군이 토스카나를 점령했고, 페르디난도 3세 대공은 빈으로 떠났다. 11월 23일 우피치 관장 톰마소 푸치니는 피렌체의 상인 가에타노 갈리에르가 라파엘로의 성모를 팔겠다고 한다고 대공에게 알렸고, 1800년 1월 페르디난도는 빈에서 편지를 보내 구입을 허락했다. 갈리에르에게는 300체키노가 치러졌고, 10월에 그림은 대공에게 보내졌다. 그림은 망명 기간 내내 그와 함께 있었는데, 페르디난도가 토스카나 대신 받은 뷔르츠부르크에서도 그랬고, 1814년 그와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란두카의 성모’, 곧 대공의 성모라는 이름은 이런 애착에서 나왔다. 로트링겐 가문은 이 그림을 개인 거처에 두었고, 다른 라파엘로 그림들이 걸린 공개 미술관으로 옮긴 것은 1882년에 와서였다.

16. 안토니오 카노바 《이탈리아의 비너스》

메디치의 비너스
메디치의 비너스Attributed to Cleomenes, son of Apollodorus of Athens, -100, 우피치 미술관
이탈리아의 비너스
이탈리아의 비너스안토니오 카노바, 1812, 팔라티나 미술관
Napoleon's Bathroom, Palazzo Pitti
Napoleon's Bathroom, Palazzo PittiDimitris Kamaras from Athens, Greece, 2016 (Wikimedia Commons), CC BY 2.0

1800년 우피치 트리부나의 가장 중요한 조각상이던 고대의 《메디치의 비너스》는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팔레르모로 옮겨졌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1802년 그곳에서 이 조각상을 징발했고, 1803년 8월에는 조각상이 루브르에 서 있었다. 나폴레옹에게서 토스카나를 받은 에트루리아 왕 루도비코 1세는 빈자리를 채울 복제품을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주문했다(미술관은 1802년, 트레카니 전기 사전은 1803년으로 적는다). 카노바는 복제품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이 구상한 서 있는 비너스를 제안했다. 루도비코는 1803년에 죽었고, 그의 미망인인 섭정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1805년 주문을 확인했으며, 1809년 토스카나 대공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의 누이 엘리자 바치오키가 오빠를 설득해 조각가에게 약속한 25,000프랑을 치르게 했다.

카노바의 비너스는 몸을 웅크리고 서 있다. 온몸이 앞으로 기울고, 어깨는 오므렸으며, 무릎은 살짝 굽었고, 무게는 앞으로 내디딘 다리에 실려 다른 발의 뒤꿈치가 받침대에서 떨어진다. 그녀는 두 손으로 천을 가슴에 끌어안는데, 천은 길게 늘어져 배와 한쪽 다리를 타고 발목까지 흘러내린다. 머리는 누가 들어오기라도 한 듯 어깨 너머로 홱 돌아가 있다. 등과 옆구리가 모두 드러나 있어서, 옆에서 볼 때 몸이 가장 온전하게 보인다.

1812년 4월 29일 이 조각상은 트리부나의 새 회전 받침대 위에 놓였다. 조각상을 돌려 가며 사방에서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해 시인 우고 포스콜로는 《메디치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신이고, 자기가 보고 또 보는 이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썼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메디치의 비너스》는 트리부나로 돌아왔고, 카노바의 조각상은 1815년 이후 피티 궁전으로 옮겨졌다.

17. 주세페 카찰리, 나폴레옹의 욕실

카노바의 조각값을 오빠에게서 받아 낸 엘리자 보나파르트 바치오키는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이 지방을 다스리며 피티 궁전에 살았다. 1813년 그녀의 주문으로 궁정 건축가 주세페 카찰리가 궁전 안에 황제 부부, 곧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가 묵을 거처를 꾸미기 시작했다. 욕실은 이 거처의 일부였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끝내 피렌체에 오지 않았고, 1814년 봄 그의 권력은 무너졌다.

엘리자 시절에 주조를 마친 것은 청동 수도꼭지 하나였다. 꽃줄을 든 날개 달린 두 수호신 사이에 금박 입힌 여인의 가면이 있고, 그 아래로 물이 나온다. 스투코와 부조, 바닥과 조각상은 돌아온 페르디난도 3세 대공 때에 만들어졌고, 자리를 지킨 카찰리는 나폴레옹의 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을 대공을 위해 마무리했다. 바닥은 상감 대리석으로 깔았는데, 분홍, 크림, 연보랏빛 도는 갈색 조각들이 모인 장미꽃 무늬 한가운데 흰 원 안에 월계관이 들어 있다.

방은 좁고 천장이 높다. 양 끝이 둥근 흰 대리석 욕조는 안쪽 깊숙이, 아치형 창 아래 벽감 속에 짙은 녹색 대리석 기둥 두 개 사이에 놓여 있다. 양옆 벽감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바다의 님프 갈라테이아, 도리스, 테티스, 암피트리테가 서 있는데, 이 조각상들은 1819~1821년에야 만들어졌다.

로트링겐 가문과 공개 미술관

성모자와 성 안나의 생애 장면
성모자와 성 안나의 생애 장면필리포 리피, 1452, 팔라티나 미술관

18. 필리포 리피 《바르톨리니 톤도》

필리포 리피 수사는 피렌체 사람 레오나르도 바르톨리니에게 둥근 그림을 1452년 12월 8일까지 끝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1453년 4월에도 그림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고, 4월 16일 바르톨리니는 화가에게서 위약금 22플로린을 받아 냈다. 위약금 조항은 프라토 대성당의 관리인들을 통해 맺은 것이었다. 리피는 그 무렵 마침 이 대성당의 성가대석 벽화를 맡은 참이었다.

성모는 비스듬히 돌려놓은 의자에 앉아 앞쪽에 크게 그려져 있고, 아기와 함께 쪼갠 석류를 들고 있으며, 아기는 손을 들어 석류 알 하나를 손가락으로 쥐고 있다. 그 뒤 안쪽으로는 성모의 어머니 성 안나의 생애 장면들이 펼쳐진다. 왼쪽에는 붉은 휘장이 드리운 침실에서 안나가 해산 뒤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있고, 곁의 여인이 강보에 싸인 갓 태어난 마리아를 안고 있다. 오른쪽 위에서는 문 앞 바깥 계단을 요아킴이 안나를 향해 올라오고, 안나는 그를 끌어안으려 몸을 숙인다. 성모 쪽으로 더 가까이에는 머리에 바구니를 인 회색 옷의 젊은 여인이 걸어오는데, 걸음에 따라 옷자락이 나부낀다. 그때까지 둥근 형태는 산모에게 선물하던 쟁반에 흔히 쓰였고, 리피의 톤도는 성모를 그린 최초의 둥근 그림 가운데 하나로 자주 꼽힌다.

이 톤도가 처음 확실하게 언급된 것은 1761년 피티 궁전의 재산 목록에서이며, 일설에 따르면 그때 그림은 다락방에 있었다. 1834년에는 이미 미술관에 걸려 있었다. 그해 인쇄된 도록에는 “필리포 리피 수사. 무릎에 아기 예수를 앉힌 성모, 멀리 산모를 둘러싼 여러 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패널 뒷면에는 그리핀이 그려진 문장이 있다. 미술사학자 제프리 루다는 이것을 마르텔리 가문의 문장으로 보고 톤도의 연대를 10년쯤 늦춰 잡지만, 우피치 미술관은 이 문장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보며 여전히 바르톨리니를 주문자로 여긴다.

성모자와 성 안나의 생애 장면
성모자와 성 안나의 생애 장면필리포 리피, 1452, 팔라티나 미술관
임신한 여인
임신한 여인라파엘로, 1505, 팔라티나 미술관

19. 라파엘로 《임신한 여인》

젊은 여인을 그린 이 초상화는 1813년 대공의 과르다로바로 옮겨졌다가 다시 피티 궁전으로 돌아와, 프랑스군이 그림들을 파리로 가져간 뒤 비어 있던 미술관 자리 가운데 한 곳에 걸렸다. 1815년 목록에는 작가가 인노첸초 다 이몰라로, 1829년 목록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피렌체 화가로 적혀 있었다. 1839년, 라파엘로에게 《베일을 쓴 여인》을 되돌려 준 바로 그 독일 감식가 파사반트의 권위에 기대어 이 초상화도 라파엘로의 작품이 되었다. 이 패널에는 구입이나 선물의 기록도, 이전 소유자의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

여인은 몸을 반쯤 돌려 앉아 우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검은 벨벳의 넓은 띠를 두른 금빛 황토색 몸판에, 무늬 있는 붉은 비단으로 된 넓은 소매를 어깨에서 검은 리본으로 묶어 달았다. 그녀는 반지 두 개를 낀 왼손을 배 위에 주름 잡힌 흰 치마에 평평하게 얹었고, 그보다 조금 아래 오른손에는 구겨진 누르스름한 장갑을 쥐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은 이 자세와 곧은 시선이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본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에서 왔다고 본다. 엑스선 촬영으로, 라파엘로가 처음에는 검은 바탕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그렸다가 나중에 지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정이 있지만, 미술관은 어느 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구자 필리피니는 에밀리아 피아 다 몬테펠트로를 제안했고, 역사가 비르치는 그녀의 금빛 머리 그물에서 물소 두 마리를 찾아내, 성이 물소를 떠올리게 하는 치타디카스텔로의 부팔리니 가문 여인이라고 추정했다. ‘임신한 여인’이라는 이름은 19세기에 배 위에 얹은 손을 그렇게 읽어서 붙인 것인데, 미술관조차 이 이름을 의심한다. 불룩한 것은 앉은 여인의 치마 주름일 수 있고, 여인은 어쩌면 손으로 반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신한 여인
임신한 여인라파엘로, 1505, 팔라티나 미술관

사보이아 왕가의 궁정

20. 왕실 거처의 옥좌의 방

1865년 이탈리아의 수도가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옮겨지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피티 궁전에 들어와 살았다. 그는 따로 떨어진 방들에서 지내기를 택했고, 옥좌의 방으로는 의전용 방 하나를 내주었다. 메디치 시대에는 페르디난도 대공자의 알현실이었고, 로트링겐 시대에는 시종들의 방이던 곳이다. 1856년 토스카나 대공 자리의 계승자 페르디난도 4세 대공의 결혼식을 앞두고 이 방의 벽은 커다란 연분홍 꽃무늬가 있는 진홍색 비단으로 덮였고, 여러 단으로 초를 꽂는 거대한 금박 샹들리에가 걸렸다. 비단도 샹들리에도 로트링겐 가문이 남긴 것이다.

금박 입힌 닫집 아래의 옥좌는 긴 벽 쪽에 놓여 있다. 닫집 꼭대기에는 사보이아 가문의 문장인, 흰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 방패와 그 위의 왕관이 얹혀 있고, 그 아래에 붉은 벨벳을 씌운 작은 금박 의자가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의자는 대공들이 쓰던 것에 사보이아 가문의 문장을 더한 것이다. 옥좌와 방을 가르는 금박 난간은 수도가 로마로 옮겨 간 1871년 이후에 설치되었다. 이 방은 안내인과 함께 왕실 거처를 도는 관람에서 볼 수 있다.

Throne Room, Royal Apartments, Palazzo Pitti
Throne Room, Royal Apartments, Palazzo PittiDimitris Kamaras from Athens, Greece, 2016 (Wikimedia Commons), CC BY 2.0

사보이아 왕가 시대에도 궁전은 국가 소유였고, 왕실이 쓰도록 맡겨져 있었다. 1919년 10월 3일의 국왕 법률명령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피티 궁전과 그 앞 광장, 보볼리 정원을 국가에 돌려주었고, 미술관은 이를 기증이라고 부른다.

옥좌의 방의 진홍색 비단과 거대한 샹들리에는 로트링겐 가문이, 의자는 대공들이 남긴 것이고, 그 위에 사보이아 가문이 자기 문장을 올렸다. 나폴레옹의 욕실은 그가 몰락한 뒤에야 완성되었고, 팔라티나 미술관의 빽빽한 그림 배치는 대부분 로트링겐 가문이 만든 것이다.

더 볼 만한 작품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의 환상라파엘로, 1518, 팔라티나 미술관

이 스무 가지 이야기 말고도 궁전에는 일급 그림이 많다. 라파엘로의 《에스겔의 환상》과 《톰마소 인기라미의 초상》, 루벤스의 《네 명의 철학자》, 보티첼리의 여인 초상,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 유스투스 수스테르만스의 궁정 초상화들이 그렇다. 같은 궁전 안에는 근대 미술관, 패션·의상 박물관, 대공의 보물관도 있다. 피티 궁전에는 궁전 나름의 패션 역사도 있는데, 1952년 7월 22일부터 1982년까지 궁전의 ‘흰 방’에서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가 열렸다. 피렌체의 사업가 조반니 바티스타 조르지니가 그 한 해 전에 자기 저택에서 처음 시작한 행사였다. 1962년 7월에는 젊은 발렌티노가 이 흰 방에서 컬렉션을 선보여 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