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소묘학교는 1896년 10월 14일 소피아에서 문을 열었다. 그전까지 불가리아 화가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빈, 뮌헨, 피렌체 같은 외국에서 공부했다. 학교 설립 법안은 국민교육부 장관 콘스탄틴 벨리치코프, 문학 연구자 이반 시시마노프, 그리고 두 화가, 체코인 이반 므르크비치카와 불가리아인 안톤 미토프가 함께 준비했고, 초대 교장은 므르크비치카가 맡았다. 불가리아는 1878년까지 자기 국가를 갖지 못했으니, 해방된 지 20년도 지나지 않아 회화 학교를 연 셈이다.
우리는 이콘에서 시작해 불가리아만의 미술 학교에 이르기까지, 불가리아 회화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볼 수 있는 작품 15점을 골랐다. 그 길을 닦은 것은 교회, 사모코프의 이콘 화가 가문, 군주, 장관, 체코에서 초빙된 교사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나라에서 교육받은 첫 화가들이었다.
여기 소개하는 작품은 거의 모두 상설 전시 ‘크바드라트 500’에 속한다. 이 건물은 1880년대에 국립 인쇄소로 지어졌고, 뒤에 기술학교가 들어섰다가, 2015년 미술관의 주 전시장으로 문을 열었다. 첫머리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성당 지하 묘실에서 가져온 이콘 두 점으로, 이곳에서는 1965년부터 미술관의 분관인 기독교 미술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마지막은 이반 밀레프가 1926년에 그린 수채화다.
1. 성 게오르기우스 / 성 게론티우스와 성 폴리크로니아, 양면 이콘

이 이콘은 앞뒤 양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당 밖으로 들고 나가 십자가 행렬에서 받들고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양쪽에서 볼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쪽 면에는 성 게오르기우스가, 다른 면에는 그의 부모인 게론티우스와 폴리크로니아가 그려져 있다. 게오르기우스의 부모는 이콘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성인전에 따르면 게론티우스는 카파도키아 출신의 군인이자 이교도였고, 리다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던 폴리크로니아가 아들을 자신의 신앙으로 길렀다.
이콘은 13세기 말 네세바르에서 그려졌다. 흑해에 면한 비잔티움의 항구로, 당시 비잔티움과 불가리아 사이에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도시다. 화가들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화풍을 근거로 이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연결하며, 한 연구는 테살로니키와의 관련성도 찾아낸다. 나무판에 붙인 천 위에 템페라로 그렸다.
두 면은 서로 다른 상태로 전해졌다. 게오르기우스 쪽은 16~17세기에 덧칠되어, 그 위의 성인은 대부분 13세기 그림 위에 입힌 이 후대의 덧칠에 속한다. 게오르기우스는 금빛 바탕에 허리 위까지 그려졌으며, 푸른 갑옷 위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칼을 들었고, 어깨 뒤로 방패가 보인다. 부모 쪽에서는 후대의 덧칠이 확인되지 않았고, 13세기 말의 그림이 더 잘 남아 있다. 연구자들은 이 면의 얼굴들, 그중에서도 빛에서 그늘로 섬세하게 옮아가며 빚어낸 게론티우스의 얼굴을 특히 높이 평가한다.
이 이콘은 아마 네세바르에 있던 두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 가운데 한 곳에 모셔진 수호성인 이콘이었을 것이다. 미술관의 설명문은 ‘큰 교회’라고도 불린 옛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를 들고, 2008년 모스크바 전시회의 해설문은 작은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를 든다. 두 교회는 모두 헐렸다. 명문으로 보아 1704년 옛 기초 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옛 교회는 사회주의 시절 네세바르를 새 도시 계획에 따라 정비할 때 철거되었는데, 철거 직전에 미술사학자 아센 바실레프가 가까스로 실측을 마쳐 두었다.
2. 포가노보 이콘
앞면 아래쪽, 두 인물 사이에는 붉은 그리스 문자로 이 이콘을 바친 사람이 “그리스도 하느님 안에서 신실한 바실리사”, 곧 황후라고 적혀 있다. 칭호는 남았지만 이름은 지워졌고, 연구자들은 이를 헬레나로 복원한다. 들어맞는 헬레나가 둘이어서, 그중 누가 이콘을 주문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지금도 논쟁을 벌인다.
앙드레 그라바르와 뒤이어 비세라 펜체바는 이 이름을 비잔티움 황후 헬레나 드라가시로 읽었다. 이 지역의 영주였던 그녀의 아버지 콘스탄틴 드라가시가 1395년 로비네 전투에서 전사했으므로, 이 해석에 따르면 이콘은 1395년 무렵 그를 기리며 그려졌다. 세르비아의 미술사학자 고이코 수보티치와 그를 따르는 연구자들은 또 다른 헬레나, 곧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의 옐레나를 든다.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전사한 데스포트 우글레샤의 미망인으로, 뒤에 수녀가 되어 예피미야라는 이름을 받은 인물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콘은 1371년 이후에 그려졌으며, 테살로니키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앞면에는 금빛 바탕 위에 성모와 성 요한이 전신으로 마주 서 있다. 여기서 카타피기, 곧 ‘피난처’라 불리는 성모는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십자가 곁에 설 때의 자세를 하고 있지만 이콘에 십자가는 없으며, 슬픔에 잠겨 고개를 숙였다. 요한은 요한묵시록을 쓴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십자가 곁의 요한은 보통 젊은이로 그리는 것이 관례다.
뒷면에는 ‘라토모스의 기적’이라는 글귀가 있다. 금빛 키톤을 입은 젊은 그리스도 임마누엘이 일곱 겹의 푸른 고리로 된 만돌라 안에서 무지개 위에 앉아 있고, 두 손과 두 발에는 상처가 보인다. 그 아래 언덕에서는 낙원의 네 강이 흘러나오고, 물속에서는 물고기 일곱 마리가 헤엄친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두 팔을 들고 서 있고, 예언자 하바쿡은 바위에 앉아 턱을 괴고 있다. 비잔티움 미술에서 이 구도가 알려진 예는 셋뿐인데, 테살로니키 호시오스 다비드 성당의 5~6세기 모자이크, 바치코보 수도원 납골당의 12세기 벽화, 그리고 이 이콘이다.
이콘은 오늘날 세르비아 땅인 예르마강 협곡의 포가노보 수도원, 곧 신학자 성 요한 수도원의 성당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혹은 그 직후에 공식적으로는 복원을 이유로 소피아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뒤로 수도원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콘은 그 국립박물관을 이어받은 불가리아 과학아카데미 국립고고학연구소 겸 박물관의 소유이며, 미술관은 연구소로부터 이콘을 위탁받아 여러 해 동안 지하 묘실의 박물관에서 전시했다.

3. 자화상 — 자하리 조그라프

사모코프의 이콘 화가 자하리 조그라프는 1838년, 1827년부터 가르침을 받아 온 스승이자 수도사이며 교사였던 네오피트 릴스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신 그가 1841년 그림을 배운 곳은 플로브디프였고, 그곳에서 두 프랑스 화가에게 수업을 받았다는 소식도 같은 네오피트에게 전했다. 그가 익힌 것은 나무판에 템페라로 그리는 이콘과 벽에 그리는 프레스코였으며,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법을 배운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1838년 그는 네오피트 릴스키의 초상을 유화로 그렸는데, 이것이 그의 첫 유화 초상이다. 자화상은 1840년 무렵에 그렸다. 자화상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아 연도는 추정이다. 1840년 자하리는 바치코보 수도원의 성 니콜라이 성당에 벽화를 그리면서 수도원장들 곁에 자기 모습을 그려 넣었고, 뒤에는 트로얀 수도원과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의 벽에도 자신을 그렸다. 이렇게 남은 자기 모습 가운데 캔버스에 그린 자화상은 이 작품 하나뿐이다. 자하리는 허리 위까지, 높은 검은 모자를 쓰고 깃을 세운 검은 옷을 입은 채 오른손에 붓을 든 모습으로 그려졌다. 왼손은 탁자 가장자리에 올려놓았고 배경은 고른 갈색으로 처리했으며, 그의 직업을 드러내는 것은 붓 한 자루뿐이다. 불가리아 미술사학자들은 이콘 화가가 자기 얼굴을 그리고 거기에 서명까지 했다는 사실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던 중세 이콘 제작 전통과의 단절을 읽는다.
이 캔버스는 1939년까지 화가의 상속인들이 갖고 있었다. 그해 미술관은 자하리의 소묘 아카이브와 함께 이 그림을 사들였는데, 불가리아 언론에 따르면 소장품 가운데 어떤 그림보다도 비싼 값을 치렀다. 아카이브에는 소묘가 약 400점 들어 있다. 화가 탄생 200주년을 맞은 2010년에 이 소묘들을 정리하면서, 약 200점은 확실한 자하리의 작품으로 남기고 나머지 200점가량은 그의 아버지 흐리스토 디미트로프의 작품으로 분류했다.
4. 흐리스티야니야 조그라프스카의 초상 — 자하리 조그라프
이 초상화를 두고 전해지는 사랑 이야기는 문학에서 나온 것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지금까지 누구도 단 한 건 내놓지 못했다. 주된 출처는 1969년에 나온 파벨 스파소프의 책 『이콘 화가 자하리의 죄 많은 사랑』이며, 이 줄거리는 뒤에 1인극과 연극, 오페라로 무대에 올랐다.
전설에 따르면 자하리는 형 디미타르의 아내 흐리스티야니야를 사랑했다. 1853년 봄 사모코프에 발진티푸스가 돌았다. 흐리스티야니야가 병에 걸려 집 안에 격리되자 자하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갔고, 한 이야기에서는 작별의 입맞춤까지 했다. 흐리스티야니야는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고, 병이 옮은 자하리도 같은 해 6월 14일에 숨을 거두었다.
미술관의 현재 연대 추정으로는 자하리가 이 초상을 그린 것은 1844년 무렵이고(옛 문헌에는 1840년으로 나온다), 근대 불가리아 미술에서 여성을 단독으로 그린 최초의 초상으로 꼽힌다. 흐리스티야니야는 허리 위까지, 홀로, 차분한 얼굴로 그려져 있다. 분홍빛이 도는 붉은 드레스에 소매가 긴 초록 윗옷을 입었는데, 윗옷은 안에 모피를 대고 가장자리를 꽃 자수 띠로 둘렀다. 머리에는 수놓은 꽃과 브로치로 꾸민 높은 머리쓰개를 썼다. 목에는 가운데 큰 메달을 단 금화가 여러 줄 걸려 있고 진주 목걸이와 작은 십자가도 보이며, 귀에는 초록 보석 귀걸이를,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었다.
흐리스티야니야는 사모코프의 부유한 가축상이자 초르바지였던 코스토의 딸이다. 초르바지는 공동체의 부유한 원로를 부르던 말이다. 그녀는 1822년 디미타르와 결혼했고, 1823년 12월 아들 자피르가 태어났다. 아버지 디미타르는 아들의 출생을 자신의 에르미니아에 적어 두었는데, 에르미니아는 공방이 작업의 기준으로 삼던 이콘 화가의 필사본 지침서다. 자피르는 러시아에서 공부해 스타니슬라프 도스페프스키가 되었다.

5. 마리올라 도스페프스카의 초상 — 스타니슬라프 도스페프스키

마리올라의 아버지 보즈코는 금세공인이자 타타르파자르지크, 지금의 파자르지크에서 이름난 인물이었고, 마리올라는 1837년 그곳에서 태어났다. 1850년대 말, 어떤 자료에 따르면 1857년,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58년에 그녀는 화가 스타니슬라프 도스페프스키와 결혼했고, 도스페프스키는 아내의 고향에 자리를 잡았다. 1869년 그는 아내의 초상을 그렸다.
도스페프스키는 흐리스티야니야 조그라프스카의 맏아들이자 자하리 조그라프의 조카였다. 세례명은 자피르였고, 성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사모코프 근처 도스페이 마을에서 따왔다. 1851년부터 1853년까지 모스크바 회화조각학교에서, 이어 1856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흔히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최초의 불가리아 화가로 불린다.
아내의 초상은 결혼한 지 11년인가 12년 뒤에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마리올라는 고른 회색 배경 앞에, 흰 레이스 깃과 흰 단추가 달린 갈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다. 귀에는 금귀걸이를 달았고, 손으로는 긴 금사슬을 쥐었는데 그 끝에 달린 시계가 허리께에 늘어져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도스페프스키가 서명과 연도를 적었다. 미술관은 이 초상을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에서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불가리아 민족부흥기 화가들의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민족부흥기는 해방 이전 민족의식이 고양되던 시대를 불가리아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초상을 그리고 몇 달 뒤인 1870년 2월 2일, 마리올라는 파자르지크 최초의 여성 단체 ‘프로스베타’를 세우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77년 8월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한창일 때, 오스만 당국은 러시아를 위해 첩보 활동을 한다는 혐의로 파자르지크에서 도스페프스키를 체포했다. 그는 플로브디프에 갇혔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메흐테르하네 감옥으로 보내졌고, 1878년 1월 6일 그곳에서 숨졌다. 그가 이루려 싸웠던 불가리아 국가를 탄생시킨 3월 3일의 산스테파노 조약보다 두 달 앞선 때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불가리아 교회, 성 스테판 교회의 마당에 묻혔다.
6. 다뉴브강으로 진군하는 아스파루흐 칸과 그의 수행단 —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다뉴브 강변의 스비시토프에서 태어난 니콜라이 파블로비치는 1860~1861년 겨울을 오데사에서 보내며 그곳의 불가리아인들에게 불가리아 역사를 주제로 한 석판화를 팔았다. 1860년 베오그라드에서 그가 만든 이 석판화들은 그런 주제를 다룬 최초의 석판화였다. 역사화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빌헬름 폰 카울바흐와 카를 폰 필로티에게 배웠다. 하지만 오스만 지배 아래에서는 불가리아 역사를 유화로 주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역사는 판화로 퍼져 나갔다. 파블로비치는 오데사, 부쿠레슈티, 베오그라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 판화를 불가리아인들에게 직접 팔았다.
〈아스파루흐 칸〉을 유화로 그린 것은 1860년대 말, 해방을 10년쯤 앞둔 때였다. 681년 아스파루흐는 불가르족을 이끌고 다뉴브강을 건너 나라를 세웠고, 불가리아인들은 이 나라를 자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파블로비치는 아직 자기 국가가 없던 불가리아를 위해 그 역사의 첫 장면을 그린 것이다.
아스파루흐는 행렬 한가운데서 검은 말을 타고 간다. 곁에는 지팡이를 짚은 흰 수염의 원로들과 투구를 쓴 전사들, 아이들을 데린 여인이 걸어가고, 뒤로는 포장을 씌운 수레들이 이어지며, 그 너머로 넓은 골짜기가 펼쳐진다. 군대 위 구름 속으로는 천사들이 날고 있고 그중 몇몇은 방패와 칼을 들었지만, 아스파루흐의 불가르족은 이교도였으며 세례는 864년 보리스 공 때에야 받았다.

이 그림은 불가리아 최초의 유화 역사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파블로비치는 이미 1860년부터 역사 석판화를 펴냈고, 첫 역사 구성화인 〈프레슬라프에서 형제들과 만나는 라이나〉도 1865~1866년에 만들었다.
1911년, 화가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 뒤에 국민교육부는 국립박물관을 위해 그의 유족에게서 역사화들과 그 밑그림 대부분을 포함한 작품 23점을 사들였고, 〈아스파루흐〉도 아마 이때 소장품이 되었을 것이다. 파블로비치는 1870년 같은 주제를 〈아스파루흐〉라는 제목의 대형 석판화로 따로 펴내기도 했다.
7. 루시퍼 — 프란츠 폰 슈투크

1891년 페르디난트 공이 정치가와 은행가들을 만나러 뮌헨에 왔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고 열강은 아직 그를 불가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는 이 여행에서 뮌헨의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작업실에 들러 소피아의 궁정 컬렉션을 위해 〈루시퍼〉를 사들였다. 1889년 뮌헨 유리궁전 전시회에서 슈투크의 〈낙원의 수호자〉, 곧 낙원의 문 앞에 선 빛나는 천사 그림이 금메달을 받았는데, 1890년에 그린 〈루시퍼〉는 흔히 이 천사와 짝을 이루는 어두운 그림으로 여겨진다.
루시퍼는 거의 정사각형인 캔버스에 홀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화면을 거의 다 채우고 있다. 벌거벗은 몸은 근육질이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으며, 옆으로는 푸른 빛이 어린 밝은 날개가 늘어져 있다. 캔버스는 거의 검고, 그 안에서 가장 밝은 것은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희게 빛나는 두 눈이다. 왼쪽 어둠 속에서는 작은 푸른 불꽃이 타오른다.
다음 이야기는 이를 즐겨 들려주던 슈투크 본인의 말로만 전해진다. 페르디난트가 슈투크에게, 장관들이 그림을 처음 보고 성호를 긋더라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사제들이 그림 앞을 지나며 성호를 긋고, 귀부인들은 기절한다.
〈루시퍼〉는 1930년 12월 25일까지 궁정 컬렉션에 있었고, 이날 페르디난트의 아들인 차르 보리스 3세가 그림을 국립박물관에 넘겼다. 1948년 그림은 국립미술관 소장품으로, 1985년에는 국립외국미술관으로, 2015년에는 크바드라트 500으로 옮겨졌다.

8. 피렌체 남자 — 콘스탄틴 벨리치코프

1886년 8월 친러시아파 장교들이 불가리아 군주 알렉산다르 바텐베르크를 몰아냈고, 쿠데타 주도자들은 작가 콘스탄틴 벨리치코프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자리를 거절했다. 러시아파에 맞서던 스테판 스탐볼로프가 정부를 이끌게 되자, 이름난 친러파였던 벨리치코프는 나라를 떠나 1880년대 후반을 피렌체에서 망명객으로 지냈다.
그보다 10년 앞선 1876년, 그는 파자르지크에서 4월 봉기에 가담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봉기 진압 과정을 조사하던 유럽 위원회의 요구로 풀려났다. 이미 서른을 넘긴 벨리치코프는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스승은 그곳 미술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던 역사화가이자 풍속화가 주세페 차란피였다. 1888년 그는 캔버스에 유채로 습작 〈피렌체 남자〉를 그렸다. 동그란 안경에 작은 검은 모자를 쓰고, 흰 목수건을 두르고 붉은 조끼를 입은 나이 든 피렌체 사람이 꽃무늬 초록 벽지를 배경으로 웃으며 기타를 친다. 모델은 기타에 빠져 화가를 잊은 듯하다.
1894년 스탐볼로프가 물러난 뒤 벨리치코프는 돌아와 콘스탄틴 스토일로프 내각의 국민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소묘학교 법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는 1897년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1907년 그르노블에서 세상을 떠났다.
9. 라체니차 — 이반 므르크비치카
2000년대 말 소피아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아폴론과 메르쿠리우스’ 경매에서 이반 므르크비치카의 〈라체니차〉가 7만 5100유로에 팔렸고, 당시 불가리아에서 경매로 팔린 그림 가운데 가장 비싼 그림으로 불렸다. 이때 낙찰된 것은 1906년에 그린, 거의 똑같은 두 번째 판본이었다. 1894년의 첫 판본은 국립미술관에 있으며, 미술관은 이를 불가리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라고 부른다.
1881년, 오늘날 불가리아 남부에 있던 자치주 동루멜리아의 정부가 체코인 므르크비치카를 플로브디프의 미술 교사로 초빙했고, 스물다섯 살의 화가는 그 뒤 40년을 이 나라에서 살았다. 1889년부터는 소피아에 살았는데, 〈라체니차〉를 그린 것도 이곳에서였다. 소묘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기 2년 전이었다.
소피아 근교의 사람들로 붐비는 시골 선술집, 검은 들보가 드러난 낮은 천장 아래 한가운데서 농부 차림의 두 남자가 빠른 불가리아 춤 라체니차를 추고 있다. 키가 큰 한 사람은 흰 셔츠와 흰 바지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선 채로 춤춘다. 다른 한 사람은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흰 손수건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둘레의 긴 의자와 탁자에 앉은 구경꾼들이 춤을 지켜본다.

2010년대 불가리아 언론에 퍼진 한 설은 오직 그의 초상들과 닮았다는 점만을 근거로, 흰 옷의 춤꾼을 아일랜드 태생으로 런던 《더 타임스》의 발칸 특파원이던 제임스 부처라고 본다. 미술관도 이 설을 되풀이한다. 부처는 1888년부터 소피아를 드나들다 1892년 그곳에 정착했으며, 므르크비치카와 친구로 지냈고 농부 옷을 입고 시내를 다녔다.
10.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 야로슬라프 베신
야로슬라프 베신은 국민교육부 장관 콘스탄틴 벨리치코프의 초청을 받아, 갓 문을 연 소묘학교에서 가르치려고 1897년 가을 소피아에 왔다. 그는 프라하 아카데미와 뮌헨에서 공부했고, 1884년부터 여러 해 동안 슬로바키아의 농촌과 그곳의 결혼식, 사냥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들이 프라하의 잡지 《즐라타 프라하》에 실렸기 때문에, 불가리아에 왔을 때 그는 이미 농민의 삶을 그리는 화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은 도착한 지 1년 뒤인 1898년에 그렸다. 그림 속 계절은 겨울이다. 양가죽 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어깨에 막대를 걸친 농부가 말을 타고 눈 덮인 들판을 지나며 말 네 마리를 몰고 가는데, 맨 뒤의 말에는 빈 길마가 얹혀 있고, 들판 너머로는 눈 덮인 산들이 솟아 있다. 체코인 베신은 왼쪽 아래 구석에 키릴 문자로 서명했다. 이 그림은 그가 1898~1899년에 그린 시장 그림들 가운데 하나로, 이 무렵 그는 대작 〈소피아의 말 시장〉과 〈장이 서기 전〉도 그렸다. 불가리아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그림이 될 만한 인물과 장면에 이끌려 시장을 찾았다고 쓴다.
베신은 1904년까지 소묘학교에서 가르쳤고, 그의 제자 가운데는 이 목록에 〈성 소피아 교회〉가 실린 니콜라 페트로프도 있었다. 1904년 이후에는 페르디난트 공의 제안으로 그를 위해 새로 만든 자리인 전쟁부 소속 화가가 되어 공식 초상화와 군사 기동 훈련을 그렸다. 1912~1913년 발칸 전쟁 때 그는 대령 계급으로, 총사령부 명부에 ‘종군 화가’로 올라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11. 에욱시노그라드의 포도 시장 — 안톤 미토프
바르나 근교에 있던 불가리아 군주의 여름 궁전은 원래 산드로보라 불렸다. 불가리아의 초대 군주 알렉산다르 바텐베르크를 가까운 이들이 산드로라고 부른 데서 딴 이름이다. 1893년 페르디난트는 궁전의 이름을 에욱시노그라드로 바꾸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흑해를 부르던 이름 폰토스 에욱세이노스에서 따온 것이다. 궁전에는 넓은 국영 포도밭이 딸려 있었고, 1891년부터는 궁정에 포도주를 대는 저장고도 있었다. 이름이 바뀐 이듬해, 안톤 미토프는 〈바르나 근교 에욱시노그라드의 포도 시장〉을 그렸다.
미토프의 그림에서 시장은 언덕 아래 탁 트인 들판에 펼쳐져 있다. 수레 위에는 큰 통들이 놓였고 그 옆에는 포도송이를 담은 바구니가 있으며, 앞쪽 땅바닥에는 검은 물소 두 마리가 엎드려 있고, 웅덩이 곁에서는 거위들이 어슬렁거리며, 수레들 사이로는 페즈를 쓰거나 민속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미토프는 1890년부터 바르나의 남자 중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고, 바르나의 포도 수확은 그의 1893~1894년 그림에 여러 번 등장한다. 그림은 이탈리아에서 배웠다. 전기 작가들이 전하는 그의 유학길 이야기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에 따르면 그는 전신 기사로 일해 여비를 마련했고, 피렌체에서는 가장 좋은 옷이라고 차려입은 목동의 망토 야무를루크와 각반 차림이 그곳 산적처럼 보여 체포되었다. 그는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서 훗날 벨리치코프도 가르친 바로 그 주세페 차란피에게 배웠고, 1885년에 졸업했다.

1893년 미토프는 불가리아 최초의 미술가 단체인 불가리아 예술지원협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므르크비치카와 함께 불가리아 최초의 미술 잡지 《이즈쿠스트보》(‘예술’)를 펴냈다. 소묘학교에서 처음으로 미술사를 가르친 사람도 그였으며, 1912~1918년과 1924~1927년에는 학교를 이끌었다.
12. 체핀스코의 수확 — 이반 안겔로프
소묘학교에 목탄 소묘를 들여온 사람은 1900년부터 그곳에서 가르친 이반 안겔로프였고, 이후 여러 세대의 불가리아 화가들이 목탄 소묘로 공부했다. 안겔로프 자신은 뮌헨에서 먼저 응용미술학교를, 이어 아카데미에서 카를 폰 필로티에게 배워 1886년에 졸업했으며, 그 뒤 14년 동안 중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는 처음부터 추수 장면을 그렸고, 그의 〈수확〉과 〈추수하는 여인〉은 1892년 플로브디프 박람회에서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체핀스코의 수확〉은 1905년에 그렸다. 체피노 분지는 서부 로도피산맥, 지금의 벨린그라드 근처에 있다. 그림에는 잘 익은 곡식밭에서 일하는 세 여인이 있다. 붉은 옷의 여인은 허리를 굽혀 이삭을 베고, 오른쪽의 두 번째 여인은 곡식 사이에 거의 파묻혀 있으며, 세 번째 여인은 허리를 펴고 검은 항아리로 물을 마신다. 발치에는 묶어 놓은 곡식 단이 놓였고, 이삭 사이로 양귀비가 보인다. 캔버스는 옆으로 길며, 미술관은 이 그림을 하나의 색조로 통일한 풍경 파노라마이자 정확하고 고전적으로 짜인 구도라고 설명한다.
2016년 10월 미술관은 시각장애인과 저시력 관람객을 위한 작품 네 점 가운데 하나로 이 그림을 골라, 손으로 만져 읽는 부조 도판과 불가리아어·영어 음성 해설을 만들었다.

13. 성 소피아 교회 — 니콜라 페트로프
성 소피아 바실리카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지어졌고, 훗날 도시 이름도 이 교회에서 따왔다. 16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인들은 이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었다. 1818년과 1858년의 지진으로 건물이 손상되었고, 1858년에는 미나레트가 무너져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뒤로 건물은 버려졌다. 19세기 말에는 창고로 쓰였고 시 소방대의 망루도 설치되었다. 니콜라 페트로프가 1909년에 그린 것이 바로 이 버려진 바실리카다. 그의 그림에서 교회는 도시 변두리의 헐벗은 노란 공터에 서 있고, 뒤로는 붉은 지붕과 초록 정원이 이어지며, 그 모든 것 위로 무겁고 어두운 하늘이 드리워 있다. 교회 벽 아래의 사람들은 아주 작다.
페트로프는 1881년 비딘에서 태어나 1898년 9월 소묘학교에 들어가 베신에게 배웠지만, 병 때문에 졸업장은 1913년에야 받았다. 그는 소피아와 사자 다리, 국립극장, 반스키 광장을 그렸고, 불가리아 도시 풍경화의 창시자로 불린다. 미술관은 그의 소피아 풍경을 두고, 표현력 있는 붓질로 회화적인 모자이크에 가까워졌다고 쓴다. 불가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 화가로 추앙받는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마이스토라는 페트로프를 가장 재능 있는 화가이자, 화가로 태어난 유일한 불가리아인이라고 불렀다.
1911년 국가가 이 그림을 사들였고, 이것이 국가 소장품에 들어간 그의 첫 작품이 되었다. 페트로프는 1916년 12월 10일, 가난 속에 결핵으로 서른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1911년 고고학자 보그단 필로프가 이 바실리카를 조사하며 복원을 추진했고, 1926년부터는 교회 운영위원회가 건물의 전면 복원을 요구했으며, 복원 공사는 건축가 라셰노프가 이끌었다.

14. 장식적 풍경 — 니콜라이 라이노프

‘로드노 이즈쿠스트보’, 곧 ‘고국의 예술’ 협회는 1919년 소피아에서 창립되었고, 불가리아 미술에 민족적 성격을 부여한다는 과제를 강령에 적어 넣었다. 창립자 가운데에는 니콜라이 라이노프가 있었다. 불가리아 대중에게 그는 무엇보다 동화와 상징주의 산문을 쓴 작가로, 그리고 신지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10년 무렵, 1909년부터 예술산업학교라 불리던 소피아의 옛 소묘학교에서 하랄람피 타체프와 스테판 바조프에게 장식미술을 배워, 불가리아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최초의 장식미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장식과 조형예술의 관계가 언어와 문학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1925년 그의 책 『플로브디프 국립도서관 소장 슬라브 필사본의 장식과 문자』가 나왔는데, 이 책을 위해 그는 중세 필사본의 첫머리 장식과 머리글자, 문양을 손수 옮겨 그렸다.
〈장식적 풍경〉도 같은 1920년대에 펼친 책만 한 종이에 템페라와 먹으로 그렸다. 이 시기의 장식적 풍경화에서 라이노프는 고른 색면과 뚜렷한 선으로 화면을 짜고, 자연의 세부를 장식 문양으로 바꾸었다. 여기서는 검은 윤곽선을 두른 둥근 바위들 사이에 갈색 호수가 놓여 있고, 푸른 하늘의 구름은 자수의 소용돌이무늬를 닮았으며, 오른쪽에는 꽃송이를 층층이 쌓아 올린 나무가 솟아 있고, 왼쪽에는 동화 속 새가 날아간다. 종이 전체에 작은 금빛 점이 흩뿌려져 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그는 파리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고, 그 뒤 1950년까지 소피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사를 가르쳤다.
15. 우리 어머니들은 늘 검은 옷을 입는다 — 이반 밀레프
머리에 긴 검은 너울을 쓴 다섯 여인이 어두운 널빤지 울타리를 따라 한 줄로 걸어가는데, 모두 옆모습이다. 두 사람은 그릇인지 빵인지 둥근 것을 손에 들었고, 한 사람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으며, 마지막 사람은 몸을 굽히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검은색 아래로 노랑, 연보라, 갈색 줄무늬가 비쳐 나온다. 이반 밀레프는 이 수채화를 1926년에 그렸고, 미술관은 여기에 〈자두시니차〉라는 두 번째 제목을 붙인다. 자두시니차는 불가리아에서 음식을 들고 묘지를 찾아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는 위령의 날을 부르는 이름이다. 밀레프에게는 〈자두시니차〉라는 제목의 작품이 따로 있는데, 그것은 다른 그림이다.
이 수채화는 두 차례의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세 번의 전쟁이 지난 뒤에 그려졌고, 밀레프는 그 마지막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 1916년 카잔루크 출신의 열아홉 살 청년이던 그는 징집되어 항공 부대 본부에 화가로 배치되었고, 1917년에는 루마니아 전선에서 병사로 복무했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그는 소피아 미술 아카데미 장식미술과에서, 앞서 라이노프도 가르친 스테판 바조프에게 배웠고, 국립극장의 무대 미술도 맡았다. 1926년 12월 병에 걸린 그는 1927년 1월 25일, 서른 살을 몇 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죽기 3년 전인 1923년, 밀레프는 ‘로드노 이즈쿠스트보’ 협회를 향해 “불가리아에 예술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일기에 적었고, 1926년 봄에는 자신도 그 협회에 가입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화가들이 그린 네세바르의 이콘에서 밀레프의 수채화까지는 6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그중 이콘 공방에서 자기 나라의 미술 학교에 이르는 길은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밀레프가 그 물음을 적은 것은 소피아 미술 아카데미 학생 시절이었는데, 므르크비치카의 소묘학교가 그 무렵 자라서 된 곳이 바로 이 아카데미였다. 일기에는 답이 적혀 있지 않다. 그 답은 자기 얼굴을 그리고 서명한 이콘 화가의 자화상에서부터 이미 자기 나라에서 배운 화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맞추어 볼 수 있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
우리는 이콘에서 자기 나라의 미술 학교에 이르는 한 갈래의 길을 따라왔기에, 미술관의 뛰어난 그림 가운데 많은 수가 목록에서 빠졌다. 소장품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마이스토라의 작품이니, 두 번째 방문은 그에게서 시작할 만하다. 니콜라이 파블로비치의 작품으로는 1886년작 〈북부와 남부 불가리아의 통일〉도 있고, 자하리 조그라프의 소묘 아카이브에는 그의 소묘와 함께 그가 모은 서유럽 판화가 들어 있다. 1985년에 만들어진 외국 미술 부문에는 일본 판화와 인도 세밀화, 아시아 조각이 들어왔고, 유럽 회화로는 세잔의 〈오베르뉴의 풍경〉과 들라크루아의 〈라라의 죽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