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게세의 검투사
보르게세의 검투사에페소스의 아가시아스, -100, 루브르 박물관

1807년, 파올리나 보나파르트의 남편 카밀로 보르게세 공은 가문이 모아 온 고대 조각상과 흉상, 부조 700점 가까이를 처남 나폴레옹에게 팔았다. 거래는 9월 27일 자 칙령으로 확정되었고 값은 1300만 프랑으로 정해졌는데, 카밀로는 그 대금의 상당 부분을 토지로 받았다. 팔려 간 작품 가운데에는 《보르게세의 검투사》와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있었고, 두 조각상은 그 뒤로 줄곧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지금 이 별장에 누워 있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팔려 간 조각상 대신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이 소장품을 모으기 시작한 사람은 교황 바오로 5세의 조카로 1633년에 세상을 떠난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다. 그는 1613~1616년 핀초 언덕에 그림과 조각상을 보여 주기 위한 교외 저택을 지었고, 작품들은 돈으로 사들이기도 하고 힘으로 빼앗기도 했다.

19세기 말 보르게세 가문은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1901년 12월 26일 이탈리아 의회는 법률 두 건을 한꺼번에 통과시켰다. 하나는 국가가 소장품을 사들이는 것을 승인했고(문헌에서는 그 금액을 360만 리라로 전한다), 다른 하나는 공원을 따로 300만 리라를 넘지 않는 값에 사들여 로마시에 넘겼다.

교황의 조카 추기경이 가져가다 (1606~1613)

성 안나와 성모자
성 안나와 성모자카라바조, 1605, 보르게세 미술관

1. 카라바조 《성 안나와 성모자》

1605년 가을, 교황의 마부와 가마꾼들로 이루어진 팔라프레니에리 신심회는 새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자기들의 성 안나 제단에 걸 그림을 카라바조에게 주문했다. 1606년 4월 8일 그림은 신심회 대표에게 넘겨졌고, 4월 16일 신심회는 그림을 제단에서 떼어 바티칸 안에 있는 신심회 자체의 성당, 산탄나 데이 팔라프레니에리로 옮기는 삯을 짐꾼들에게 치렀다. 그림이 대성당에 걸려 있던 기간은 길어야 여드레였고, 어쩌면 제대로 설치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제는 하느님이 뱀을 저주하며 그 머리가 짓밟힐 것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구절에서 나왔다. 그 일을 할 이가 성모 마리아인지 그 아들인지를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논쟁을 벌였고, 1569년 교황 비오 5세는 아들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뱀의 머리를 부순다는 공식을 확정했다. 카라바조는 이 공식을 글자 그대로 그렸다. 마리아의 맨발이 검게 번들거리는 뱀의 머리를 밟고 있고, 아이가 그 발 위에 자기 발을 얹어 둘이 함께 짓누른다. 마리아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붙잡아 주듯 아들의 겨드랑이를 받치고 있다. 아이는 벌거벗었고 서너 살쯤 되어 보인다. 신심회의 수호성인 성 안나는 조금 떨어져 서 있다. 주름진 목에 노란 머릿수건을 쓴 늙은 여인이 두 손을 모은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본다.

그림이 왜 치워졌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지금도 의견이 갈린다. 카라바조와 같은 시대를 산 화가이자 전기 작가 조반니 발리오네는 대성당 건축을 맡은 추기경들의 지시로 그림이 치워졌다고 썼다. 로마의 전기 작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는 1672년, 성모와 벌거벗은 아기가 “천하게” 그려졌다고 불평했다. 20세기에 들어 어떤 연구자들은 캔버스가 제단에 비해 너무 높았다고 보았고, 다른 연구자들은 그림의 운명을 새 대성당의 제단 재배치와 연결했다. 마우리치오 마리니는 로마에서 얼굴이 알려진,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 레나 안토녜티가 성모의 모델이었다고 지적했고, 살바토레 세티스는 제단의 주인인 성 안나가 장면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반면 마우리치오 칼베시는 이 그림의 도상이 비오 5세의 공식을 엄격하게 따른다고 주장했다.

1606년 7월 20일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 이 그림을 사면서 신심회에 100스쿠디를 치렀는데, 신심회가 예전에 카라바조에게 준 돈보다 25스쿠디 많은 액수였다. 그 무렵 화가는 이미 로마를 떠나 도망친 뒤였다. 5월 28일 싸움 끝에 라누초 토마소니를 죽이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성 안나와 성모자
성 안나와 성모자카라바조, 1605, 보르게세 미술관
바쿠스로 분장한 자화상
바쿠스로 분장한 자화상카라바조, 1595, 보르게세 미술관

2. 카라바조 《바쿠스로 분장한 자화상》

카라바조가 처음으로 혼자 그린 그림들에 대해서는 그의 경쟁자이자 그를 그리 곱게 보지 않은 전기 작가 발리오네가 기록을 남겼다. 발리오네는 1642년에, 카라바조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의 작업장을 나온 뒤 “혼자 일해 보려” 했고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작은 그림들로 그렸다고 썼다. 발리오네에 따르면 그 첫 그림은 여러 종류의 포도송이와 함께 있는 바쿠스였다. 흔히 바로 이 그림을 가리킨다고 본다. 바쿠스는 손에 청포도를 들고 있고, 그 앞 돌판 위에는 검은 포도 한 송이와 노란 복숭아 두 개가 놓여 있다.

2011년에 발견된 문서들을 보면 카라바조는 1596년 3월에 이미 로마에 있었고, 미술관은 《바쿠스》를 1595년 무렵의 작품으로 본다. 의사이자 그림 감식가였던 줄리오 만치니는 이 시기를 가난했던 시절로 묘사한다. 카라바조는 몇 달 동안 다르피노 밑에서 일했다. 한번은 병에 걸려 돈 한 푼 없이 산타 마리아 델라 콘솔라치오네 병원에 들어갔고, 회복하는 동안 그곳에서 병원장을 위해 그림 몇 점을 그렸다.

바쿠스는 보는 사람에게 등을 돌린 채 앉아 어깨 너머로 돌아보고 있다. 빛을 받는 어깨는 따뜻한 황토색으로 칠했지만 얼굴과 입술은 잿빛이 도는 초록색이고, 흰자위는 누르스름하다.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는 1927년 이 색을 화가의 병과 연결했다. 훗날 마리니는 이 초록빛이 잘못된 복원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했지만, 2001년의 조사로 이 색이 화가가 칠한 그대로임이 밝혀졌다. 바쿠스의 머리에는 담쟁이 관이 씌워져 있고, 정수리의 잎 하나는 이미 누렇게 변했다. 그는 엄지로 청포도 알을 누르고 있어, 금방이라도 으깨려는 것처럼 보인다.

1607년까지 이 그림은 당시 로마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 곧 주세페 체사리의 것이었다. 그해 교황청 재무 관리들은 화승총을 불법으로 소지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만치니는 다르피노가 실제로 훌륭한 화승총 수집품을 갖고 있었다고 쓰지만, 이탈리아 인명사전 트레카니는 그 혐의를 구실로 본다. 사건은 거래로 끝났다. 다르피노는 자기 그림들, 미술관의 집계로는 107점쯤을 교황청 재무원에 넘겼고, 교황은 그것을 조카 시피오네에게 주었다. 《바쿠스》는 그 목록에 54번으로 올라 있다. 이 체포를 꾸민 사람이 교황인지 추기경 자신인지는 역사가마다 해석이 다르다. 1790년 목록에는 이 그림이 ‘사티로스’로 적혀 있고, ‘병든 바쿠스’라는 별명은 바로 그 롱기가 붙인 것이다.

바쿠스로 분장한 자화상
바쿠스로 분장한 자화상카라바조, 1595, 보르게세 미술관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카라바조, 1594, 보르게세 미술관

3.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캔버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흰 물감으로 606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고, 왼쪽에 있는 소년의 흰 소매에는 갈색으로 쓴 두 번째 숫자 475가 비친다. 1693년 보르게세 소장품 목록은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의 그림을 “번호가 두 개, 하나는 606, 다른 하나는 475”라고 적고 있는데, 두 번호는 지금도 캔버스에서 보인다.

벨로리는 카라바조가 생계 때문에 카발리에르 다르피노 밑에 들어가 꽃과 과일을 그렸다고 썼다. 연구자들은 대개 이 그림을 그 몇 달 동안의 작품으로 보지만, 다르피노의 작업장에서 그렸다는 문서는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이 그림이 1607년까지 다르피노의 것이었고, 주인이 체포되었을 때 《병든 바쿠스》와 함께 시피오네 보르게세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바구니는 캔버스 아래쪽 절반을 다 차지하고, 그림에서 가장 꼼꼼하게 그려진 부분이다. 2004년 미국 퍼듀 대학교의 원예학자 줄스 재닉이 바구니 속을 하나하나 가려냈다. 붉게 물든 복숭아 한 개, 검은 포도 두 송이와 붉은 포도, 청포도를 합한 포도 네 송이, 알갱이가 쏟아지는 갈라진 석류, 무화과 네 개, 서양모과 두 개, 사과, 작은 배가 달린 가지들이다. 그의 말로는 열매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고, 병든 것은 잎이다. 포도잎 하나에는 곰팡이 얼룩이, 다른 하나에는 잎말이나방이 낳은 하얀 알 무더기가 있고, 복숭아 잎에는 반점이 있으며, 오른쪽 아래 바구니 가장자리 너머로 늘어진 포도잎은 누렇게 변해 가장자리가 말라 있다. 미술사가 줄리오 카를로 아르간은 1962년 이 잎들에서 시듦과 죽음에 대한 암시를 보았다.

소년은 전통적으로 마리오 민니티라고 불린다. 로마에서 카라바조 곁에 살았고 뒷날 고향 시칠리아에서 화가가 된 사람이다. 이 추정은 카라바조의 다른 초기 그림들 속 얼굴과 닮았다는 점 하나에만 기대고 있다.

이 그림은 1607년부터 끊김 없이 보르게세 목록에 올라 있었는데도, 1921~1922년 미술사가 마테오 마랑고니는 이것을 옛 모사본으로 발표했고, 1942년 루트비히 슈트가 그에 동의했다. 1924년 헤르만 포스, 1927년 롱기, 1950년대 초 데니스 마혼이 이에 맞섰고, 지금은 모두가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인정한다. 1790년 목록에는 《소년》 옆에 카라바조가 그린 ‘꽃바구니를 든 남자’도 적혀 있지만, 1833년 목록에서는 이미 빠졌고 지금 소장품 가운데에도 없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카라바조, 1594, 보르게세 미술관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라파엘로, 1507, 보르게세 미술관

4.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매장》

1608년 3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페루자의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성당 수도사들은 라파엘로의 제단화를 성당 밖으로 내가는 일을 도왔다. 그림은 로마의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보내졌고, 교황은 그것을 조카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주었다. 누구의 이야기를 읽느냐에 따라 명령을 내린 사람이 교황 자신이 되기도 하고, 실제로 움직인 것이 추기경의 사람들이 되기도 하며, 모든 일을 꾸민 것이 수도사들이 되기도 한다. 도시에는 그 대신 모사본 두 점을 그려 주기로 했다. 한 점은 조반니 란프랑코가 그렸는데 행방을 알 수 없다. 다른 한 점은 한 해 전에 자기 그림들을 보르게세 가문에 넘긴 바로 그 카발리에르 다르피노가 그렸고, 이 모사본은 지금 페루자의 움브리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제단화 꼭대기에 얹혔던 성부 하느님 그림도 그곳에 있고, 세 가지 덕을 그린 프레델라는 바티칸에 있다.

이 제단화는 아탈란타 발리오니가 아들 그리포네토가 이미 묻혀 있던 가문의 경당을 위해 주문했다. 스위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후로 이 그림은 아들의 죽음과 연결되어 왔지만, 보르게세 미술관은 이 연결을 조심스럽게 본다. 아들이 죽은 때와 제단화 사이에 7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1500년 7월 그리포네토는 페루자 사람들이 ‘피의 결혼식’이라고 부르게 된 음모에 가담했다. 결혼 축제가 열리던 며칠 동안 음모자들은 그의 친척인 발리오니 일가 사람들을 죽였고, 며칠 뒤 보복에 나선 쪽이 그마저 죽였다. 이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오른쪽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붙들며 온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붉은 옷의 젊은 운구자를 그리포네토로 본다.

이 패널에 서명할 때 라파엘로는 스물셋이나 스물넷이었다. 이 제단화를 위한 준비 소묘가 열여섯 점가량 남아 있는데, 이것들을 보면 페루지노 풍의 움직임 없는 ‘애도’가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장면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두 남자가 흰 천에 그리스도를 싣고 패널 왼쪽 끝의 동굴로 옮긴다. 수염 난 남자는 돌계단에 발을 버티고, 젊은 남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막달라 마리아는 늘어진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있고, 오른쪽에서는 성모가 정신을 잃고 세 여인의 팔에 쓰러진다. 오른쪽 위 푸른 언덕에는 빈 십자가 세 개가 서 있고, 가운데 십자가에 사다리가 기대어 있다. ‘우르비노의 라파엘로, 1507년’이라는 뜻의 라틴어 서명은 왼쪽 아래 돌 위에 금색으로 쓰여 있다.

1809년 토리노 총독으로 임명된 카밀로 보르게세는 이 패널을 토리노의 자기 거처로 가져갔다. 패널은 그곳에서 파리로 건너갔고, 1816년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운송 중에 손상을 입은 뒤였다. 1874년 복원가 루이지 라이스는 패널 뒷면에 무거운 금속 구조물을 고정했는데, 이 구조물은 1966~1972년에야 중앙복원연구소의 복원가 라우라 모라와 파올로 모라가 떼어 냈다.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라파엘로, 1507, 보르게세 미술관

5. 티치아노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티치아노, 1514, 보르게세 미술관

베네치아 10인 위원회의 서기 니콜로 아우렐리오는 파도바 출신 라우라 바가로토와의 결혼을 앞두고 티치아노에게 그림을 주문했다. 신부의 아버지인 파도바의 법률가 베르투초 바가로토는 1509년 캉브레 동맹 전쟁 중에 다른 파도바 사람들과 함께 반역자로 몰려 베네치아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고대의 긴 석관을 고쳐 만든 분수 양쪽 끝에 두 여인이 앉아 있고, 그 사이에서 큐피드가 가장자리 너머로 몸을 숙여 손으로 물을 휘젓는다. 왼쪽 여인은 붉은 소매가 달린 은백색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장갑을 꼈으며 버클 달린 허리띠를 매고 도금양 화관을 썼는데, 미술관은 이것들을 신부의 표지로 본다. 오른쪽 여인은 흰 천으로 허리 아래만 가린 알몸이고, 어깨 뒤로 커다란 붉은 망토가 휘날리며, 치켜든 손에 등잔을 들고 있다. 미술관은 두 여인을 같은 신부로, 곧 사람들 앞에 선 모습과 남편과 단둘이 있는 모습으로 보고,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1939년 두 여인에게서 천상의 비너스와 지상의 비너스를 보았다. 티치아노는 아우렐리오와 그 아내의 문장을 석관 앞면과, 석관 가장자리에 놓인 은 그릇 바닥에 그려 넣었다.

보르게세 가문에 이 그림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확실하게 증언한 사람은 1648년 베네치아의 화가 전기 작가 카를로 리돌피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미술사가 파올라 델라 페르골라를 따라, 시피오네가 1608년 파올로 에밀리오 스폰드라토 추기경의 그림들을 한꺼번에 사들일 때 이 그림도 함께 샀다고 보지만, 그때 넘어온 그림들의 목록은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티치아노, 1514, 보르게세 미술관
세례자 성 요한
세례자 성 요한카라바조, 1610, 보르게세 미술관

가문이 이미 소장품을 국가에 파는 협상을 하고 있던 1899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가들은 이 그림 한 점에 400만 리라를 제시했다. 후대 저자들이 전하는 바로는 국가가 소장품 전체에 치른 값보다 많은 액수였다.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까닭은 이야기마다 다르다. 널리 퍼진 이야기로는 공이 이 그림을 별장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기자 로더릭 콘웨이 모리스는 1995년 정반대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 그림을 가문이 계속 소유하고 해외로 가져가게 해 준다면 소장품 전체를 국가에 거저 넘기겠다고 가문이 제안했지만 국가가 거절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보르게세 가문은 이 그림을 개인 구매자에게 팔 수 없었다. 1633년부터 소장품은 처분할 수 없는 가문의 세습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6. 카라바조 《세례자 성 요한》

1610년 7월 카라바조가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겨 나폴리를 떠날 때 탄 작은 돛배 펠루카에는 시피오네 보르게세에게 보낼 그림 세 점, 《세례자 요한》 두 점과 《막달라 마리아》 한 점이 실려 있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화가가 로마 북쪽 팔로에서 뭍에 내렸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었고, 돈을 내고 풀려났을 때는 펠루카가 그림들을 싣고 그를 두고 떠나 버린 뒤였다. 역사가 프란체스카 쿠르티는 2023년, 그가 체포된 곳은 포르토 에르콜레였고 그가 길을 나선 것은 살해된 토마소니의 가족과 화해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법에 따르면 그 화해 없이는 사면을 청할 수 없었다. 카라바조는 같은 해 7월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림들의 행방은 나폴리 주재 교황 대사 데오다토 젠틸레가 시피오네에게 보낸 편지들로 재구성되는데, 이 편지들은 1991년 역사가 빈첸초 파첼리가 공개했다. 1610년 7월 29일 대사는 펠루카가 나폴리로 돌아왔으며 그림 세 점은 무사하고, 카라바조가 떠나기 전에 머물던 키아이아의 코스탄차 콜론나 후작 부인 집에 있다고 알렸다. 이틀 뒤 젠틸레는, 옛 기사였던 카라바조의 상속자를 자처한 몰타 기사단의 이름으로 카푸아 수도원장 빈첸초 카라파가 그림들을 가져갔다고 썼다. 그 뒤 그림을 직접 차지하고 싶어 한 새 나폴리 부왕 레모스 백작이 끼어들었다. 백작은 《세례자 요한》 한 점을 자기가 가졌고, 시피오네는 다른 한 점이 자기 주문으로 그려진 것임을 증명했다. 1611년 8월 29일 이 《세례자 요한》이 로마로 떠났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카라바조, 1605, 보르게세 미술관

소년이 어두운 비탈에 거의 비스듬히 누운 듯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두 팔을 포갠 채, 지치고 시무룩한 눈길로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카라바조는 세례자의 상징물 가운데 가느다란 갈대 지팡이 하나만 남겼다. 성인을 알아보게 해 주는 지팡이 끝의 십자가도,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적힌 띠도 없다. 캔버스의 절반을 거대한 붉은 망토가 차지하고, 왼쪽 소년의 등 뒤에서는 숫양이 주둥이를 위로 뻗어 포도잎을 뜯어 먹는다. 몇몇 연구자는 숫양과 포도 덩굴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키는 표지를 본다.

편지가 발견되기 전에는 이 그림의 연대가 제각각이었다. 데니스 마혼은 1602~1604년으로 보았고, 롱기는 처음에는 로마 시절 말기로, 나중에는 팔레르모 시절로 보았으며, 1991년 이후에야 연대가 1609~1610년으로 좁혀졌다.

7.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채를 잡고 팔을 쭉 뻗어, 보는 사람 바로 앞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거인의 한쪽 눈은 반쯤 감겼고 다른 쪽 눈은 뜬 채 초점을 잃었으며, 입은 이가 보일 만큼 벌어져 있고, 이마에는 돌에 맞은 붉은 자국이 있다. 캔버스 아래 가장자리에서는 목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는데, 그림 전체에서 붉은색은 그것뿐이다. 이미 1650년에 보르게세 별장의 안내서를 쓴 자코모 마닐리는 카라바조가 이 머리에 “자기 자신을 그리려 했다”고 썼고, 1672년 벨로리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다윗은 입꼬리를 늘어뜨린 채 슬프게 머리를 바라본다. 마닐리는 다윗의 모델을 “그의 카라바지노”, 곧 화가 주변의 소년이라고 불렀고, 연구자들은 그 후보 가운데 하나로 체코 델 카라바조를 꼽는다. 다윗이 든 칼의 칼날에는 H.AS O S라는 글자가 있는데, 마우리치오 마리니는 1987년 이것을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라는 라틴어 격언의 약자로 읽었다.

이 그림에 대한 가장 유명한 해석은 어떤 문서의 뒷받침도 없지만, 미술관은 그럴 법하다고 본다. 1985년 칼베시는 이 그림을, 시피오네 보르게세가 삼촌인 교황 바오로 5세에게서 토마소니 살해에 대한 사면을 얻어 내 주기를 바라며 보낸 증표로 보자고 제안했다. 벨로리가 시피오네가 아직 로마에 있던 카라바조에게 직접 주문했다고 썼기 때문에, 이 그림은 오랫동안 1605~1606년 작품으로 여겨졌다. 나중에 연대는 나폴리 시절로 옮겨졌고, 미술관은 1606~1607년과 1609~1610년, 곧 화가가 나폴리에 처음 머문 때와 두 번째로 머문 때의 두 가능성을 남겨 둔다. 물감층 아래의 바탕칠은 카라바조가 1606~1607년에 쓰던 것과 비슷하다.

1613년에는 이 그림이 시피오네에게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해 시인 시피오네 프란추치는 추기경의 갤러리를 노래한 시에서 이 그림을 묘사했고, 가구 장인 안니발레 두란테는 추기경에게서 액자 값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거인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을 위한 것이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카라바조, 1605, 보르게세 미술관

추기경이 주문하고 강요하다 (1617~1632)

8. 도메니키노 《디아나와 님프들》

디아나와 님프들
디아나와 님프들도메니키노, 1616,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치의 제자였던 볼로냐 화가 도메니키노는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인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조카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그림을 빼앗겼다. 이 일을 기록한 사람은 전기 작가 조반니 바티스타 파세리로, 그의 화가 전기는 17세기에 쓰였지만 1772년에야 출간되었고, 보르게세 미술관도 그의 기록을 인용한다. 시피오네 보르게세는 그림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도메니키노는 알도브란디니의 주문으로 그린 그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기분이 상한 추기경은 사람들을 보내 화가의 집에서 그림을 힘으로 가져오게 했고, 도메니키노 자신은 감옥에 가두게 해 며칠 동안 붙잡아 두었다.

1617년 4월 21일 자 문서에 따르면 도메니키노는 150스쿠디를 받았고, 문서에는 그것이 이 그림과 《시빌》 두 점에 대한 대금 전액이라고 적혀 있다. 미술관은 전기 작가가 전한 40스쿠디라는 금액도 함께 소개하는데, 연구자들은 이것을 셈을 마무리한 마지막 잔금으로 본다.

이 그림은 흔히 ‘디아나의 사냥’이라고 불리지만, 도메니키노는 주제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제5권에서 가져왔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 안키세스를 기리는 경기에서 사람들은 돛대에 줄을 매어 비둘기를 묶어 두었고, 궁수들이 차례로 활을 쏘았다. 첫 화살은 돛대에 꽂혔고, 두 번째 화살은 줄을 끊었으며, 세 번째 화살은 풀려난 새를 떨어뜨렸다. 도메니키노는 이 시합을 디아나의 님프들에게 맡겼다. 디아나는 가운데 둔덕 위에 서서 머리 위로 활과 화살통을 치켜들고 있고, 오른쪽 끝에는 화살이 박히고 끊어진 줄이 달린 장대가 솟아 있으며, 거기서 화살에 꿰뚫린 비둘기가 떨어진다. 앞쪽 물속에는 님프 둘이 서 있고, 그중 한 명은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오른쪽의 분홍 옷 님프는 금빛 목줄을 잡아 회색 그레이하운드를 붙들고 있고, 개는 그림 맨 가장자리의 덤불을 향해 달려들려 하는데, 그 덤불 속에서 두 남자가 내다보고 있다.

디아나와 님프들
디아나와 님프들도메니키노, 1616, 보르게세 미술관
아이네이아스, 안키세스와 아스카니우스
아이네이아스, 안키세스와 아스카니우스잔 로렌초 베르니니, 1619, 보르게세 미술관

9. 잔 로렌초 베르니니 《아이네이아스, 안키세스와 아스카니우스》

피렌체 출신 조각가 피에트로 베르니니는 1605년이나 1606년에 가족을 데리고 나폴리에서 로마로 옮겼다. 교황 바오로 5세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파올리나 경당에 들어갈 부조를 맡기려고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 공사 현장에서 교황과 조카 시피오네는 조각가의 아들 잔 로렌초를 눈여겨보았다. 소년은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배우면서 바티칸과 보르게세 소장품의 고대 조각상을 소묘했고, 1618~1619년 스무 살에 시피오네를 위해 첫 대형 군상을 조각했다.

독일의 화가이자 미술사가 요아힘 폰 잔드라르트는 1675년, 잔 로렌초가 이 군상을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다고 썼다. 후기 피렌체 매너리즘 풍의 빽빽한 수직 구도 때문에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이 군상을 오히려 피에트로의 작품에 가깝다고 여겼다. 초기 전기 작가인 필리포 발디누치(1682년)와 조각가의 아들 도메니코 베르니니(1713년)는 군상을 잔 로렌초의 것으로 보았지만, 그가 열다섯 살이던 1613년의 작품으로 잡았다. 논쟁을 끝낸 것은 1950년대에 역사가 이탈로 팔디가 공개한 1619년 문서들이었다. 잔 로렌초 본인에게 지급된 대금 기록과, 같은 날짜로 된 석공의 받침대 청구서다. 일부 전문가는 지금도 군상의 구상에서 아버지의 손길을 본다.

아이네이아스는 《아이네이스》 제2권에서처럼 아버지를 짊어지고 불타는 트로이아를 빠져나온다. 늙은 안키세스는 아들의 어깨에 앉아 트로이아의 가정 수호신인 아주 작은 페나테스상 두 개가 든 그릇을 들고 있고, 어린 아스카니우스는 아이네이아스의 다리 뒤에서 얼굴을 내민 채 베스타의 불이 담긴 등잔을 들고 간다. 미술관은 세 나이의 피부에 주목한다. 소년의 피부는 부드럽고 통통하며, 아이네이아스의 피부는 근육 위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안키세스의 피부는 늘어져 그의 팔에 핏줄이 도드라진다. 미술관은 이 군상을 주문자에 대한 암시로도 읽는다. 젊은 시피오네가 늙은 삼촌 교황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라틴어 ‘스키피오’는 ‘지팡이’라는 뜻이다.

1619년 군상의 받침대로는 황소 두개골과 꽃줄 장식이 새겨진 둥근 고대 제단이 골라졌다. 미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석공 주세페 디 자코모는 군상을 벽에 바짝 붙여 세우려고 제단의 5분의 1가량을 잘라 냈다(미술관 관장을 지낸 크리스티나 헤르만 피오레는 잘라 낸 것이 나중인 19세기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 제단은 지금도 미술관에 있지만, 군상과는 따로 놓여 있다.

프로세르피나의 납치
프로세르피나의 납치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2, 보르게세 미술관

10. 잔 로렌초 베르니니 《프로세르피나의 납치》

시피오네 보르게세는 이 군상이 자기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남에게 선물했다. 베르니니는 1621년 6월 첫 300스쿠디를 받았고, 1622년 9월 군상이 완성되자 10월에 조각가의 작업장에서 곧장 핀차나 문 곁의 루도비시 별장, 루도비코 루도비시 추기경에게로 옮겨졌다. 1년 반 전에 그의 삼촌이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되었으므로, 이제 교황의 조카 추기경은 루도비시였고 보르게세는 끝난 교황 재위기의 추기경으로 남았다. 미술관은 시피오네가 서둘러 결정한 까닭을 이 변화로 설명한다. 미술사가 크리스티나 슈트룽크는 좀 더 어두운 해석을 내놓았다. 땅 위의 모든 생명이 시드는 동안 저승으로 끌려가는 처녀의 신화가 병든 교황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5세는 1623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수염을 기르고 뾰족뾰족한 관을 쓴 플루톤은 프로세르피나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땅에서 들어 올리며 앞으로 걸어 나간다. 프로세르피나는 몸을 비틀며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를 밀어내고, 그 바람에 플루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수염이 한쪽으로 쏠린다. 플루톤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쥐는데,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어 그 사이로 살이 부풀어 오른다. 프로세르피나의 뺨에는 눈물 한 방울이 새겨져 있다. 뒤쪽 플루톤의 다리 사이에서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가 이빨을 드러내는데, 개의 털은 정으로 판 가느다란 평행 홈을 남긴 채 광택 없이 두어, 매끈하게 윤을 낸 사람들의 살갗과 나란히 놓인다.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시가 새겨진 첫 받침대는 사라졌고, 지금의 받침대는 1911년 조각가 피에트로 포르투나티가 만들었다. 1883년 본콤파니 루도비시 가문이 별장을 건설 회사에 팔자 정원은 여러 필지로 쪼개졌고, 군상은 가문이 베네토 거리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옮겨졌다. 그 저택에는 훗날 마르게리타 왕비가 살았다. 1908년 이탈리아 국가가 이 군상을 사들였고, 군상은 그때 처음으로 보르게세 별장에 들어왔다.

프로세르피나의 납치
프로세르피나의 납치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2, 보르게세 미술관
다비드
다비드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4, 보르게세 미술관

11. 잔 로렌초 베르니니 《다비드》

교황 식스토 5세의 조카 알레산드로 페레티 몬탈토 추기경은 1623년 3월 자기 별장에 둘 다비드상을 베르니니에게 주문했고, 같은 해 6월 2일 세상을 떠났다. 미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주문은 시피오네 보르게세가 이어받았다. 발디누치는 몬탈토를 언급하지 않고, 베르니니가 보르게세를 위해 일곱 달 만에 이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쓴다. 미술관은 조각가가 이 작업 때문에 《아폴론과 다프네》를 잠시 미뤄 두었다고 덧붙인다.

베르니니는 다비드가 돌을 던지기 직전, 팔을 크게 휘두르는 순간을 조각했다. 두 다리는 넓게 벌어져 있고, 한 발은 바닥을 평평하게 딛고 다른 발은 멀리 뒤쪽에서 발끝으로 받침대를 버티며, 몸통은 비틀려 기울어 있다. 두 손은 투석기를 잡고 있는데, 대리석으로 깎은 투석기 끈이 두 손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다비드는 눈썹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깨문 채, 돌이 날아갈 쪽을 어깨 너머로 바라본다. 다비드의 발치에는 사울 왕의 갑옷이 놓여 있다. 《사무엘기 상권》에서 사울은 결투를 앞둔 다비드에게 몸소 자기 갑옷을 입혀 주었지만, 다비드는 그것을 입고 걷는 데 익숙하지 않아 벗어 버렸다. 그 옆에는 하프가 놓여 있고, 하프 끝은 작은 독수리 머리로 굽어 있다. 독수리는 보르게세 가문 문장의 새였다. 조각상은 처음에 벽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등과 망토 뒷자락은 넓은 면으로 더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60년 가까이 지나서 글을 쓴 발디누치는 베르니니가 다비드의 얼굴을 자기 얼굴을 보고 새겼으며,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여러 번 작업장에 찾아와 손수 거울을 들어 주었다고 전한다. 1623년 8월 바르베리니는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라는 이름을 택했다.

아폴론과 다프네
아폴론과 다프네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4, 보르게세 미술관

12. 잔 로렌초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 님프 다프네는 아폴론에게서 달아나다가, 그가 거의 따라잡자 강의 신인 아버지에게 쫓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모습을 거두어 달라고 빈다. 그 순간 다프네의 몸은 나무껍질에 덮이고, 머리카락은 잎이, 팔은 가지가, 다리는 뿌리가 된다. 베르니니는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의 허리께에 닿았고 그 손 아래에서 나무껍질이 이미 닫혀 버린 순간을 골랐다. 나무껍질은 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발가락은 뿌리로 변해 바위를 움켜쥐며, 손가락과 머리 타래에서는 빛이 비쳐 보일 만큼 얇은 월계수 잎이 돋아난다. 아폴론의 얼굴은 아직 평온하지만, 다프네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비명을 지른다.

시피오네는 1622년 8월 2일 이 군상에 쓸 대리석을 샀다. 베르니니가 《다비드》를 만드는 동안 작업은 1년쯤 중단되었고, 1625년 8월 군상이 별장에 설치되었으며, 11월 24일 베르니니는 마지막 대금을 받았다. 그가 받은 돈은 모두 1000스쿠디였다.

흔히 마페오 바르베리니가, 벌거벗은 몸들이 벌이는 이교의 추격 장면을 추기경의 집에 둘 수 있도록 이 군상에 붙일 글을 지었다고 본다. 받침대의 용 가죽 모양 카르투슈에는 그의 라틴어 2행시가 새겨져 있다. “사랑에 빠져 달아나는 아름다움의 기쁨을 좇는 이는 손에 잎을 가득 쥐거나 쓰디쓴 열매를 딸 뿐이다.” 1785년 군상을 방 한가운데로 옮겨 방향을 돌려 놓을 때, 조각가 로렌초 카르델리가 보르게세 가문의 독수리 모양으로 된 두 번째 카르투슈를 더해 오비디우스의 시구를 새겼고, 지금 받침대에는 두 카르투슈가 다 있다.

전기 작가 파세리는 잎과 뿌리를 베르니니의 조수 줄리아노 피넬리가 조각했다고 썼지만, 미술관은 그것이 작업장의 통상적인 도움 이상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1996~1998년 복원 때, 베르니니가 작업하는 동안 가장 얇은 부분들이 끌질의 충격에 금 가지 않도록 석고 받침으로 감싸 두었다가 맨 마지막에야 떼어 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폴론과 다프네
아폴론과 다프네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4, 보르게세 미술관

13. 잔 로렌초 베르니니,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흉상 두 점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 (첫 번째 버전)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 (첫 번째 버전)잔 로렌초 베르니니, 1632, 보르게세 미술관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 (두 번째 버전)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 (두 번째 버전)잔 로렌초 베르니니, 1632, 보르게세 미술관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 (두 번째 버전)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 (두 번째 버전)잔 로렌초 베르니니, 1632, 보르게세 미술관

대리석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이마에는 머리털이 난 선에서 추기경 모자 밑으로 가느다란 검은 금이 올라가 있다. 이 금은 1997년 세척 뒤에 뚜렷이 드러났지만, 작업장에서 이미 발견된 것이었다. 발디누치는 마지막 광내기 때 추기경의 이마에 머리카락처럼 가는 금이 갔고, 그런 흉상은 내보일 수 없었다고 전한다. 베르니니는 열닷새 밤 만에, 아들 도메니코의 말로는 사흘 만에 새 흉상을 깎았다. 발디누치에 따르면 조각가는 먼저 망가진 흉상을 시피오네에게 보여 주었고, 추기경은 속이 상했지만 조각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내색하지 않았다. 그제야 베르니니는 두 번째 흉상의 덮개를 벗겨 보여 주었다. 1632년 12월 시피오네는 초상 값으로 500스쿠디를 치렀고, 1633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흉상에서 추기경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술을 살짝 벌려, 마치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미술관은 이 흉상을 베르니니의 ‘말하는 초상’ 가운데 첫 작품이라고 부른다. 이중 턱이 진 묵직한 얼굴은 옷깃 위로 흘러내리고, 콧수염은 위로 말려 올라가 있으며, 턱수염은 뾰족하고, 작은 단추가 줄지어 달린 짧은 어깨 망토 모제타에는 깊은 주름이 구겨져 있다. 두 번째 흉상에서 추기경은 거의 정면을 바라보고, 모제타는 아래쪽에 가로 주름 하나만 진 채 더 차분하게 놓여 있으며, 대리석도 더 희다. 이 모제타에도 비스듬히 금이 가 있다.

흉상들은 가문의 처분 불가 재산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1892년 상속자들은 두 점을 한데 묶어 341번 경매품으로 로마의 경매에 내놓았다. 이를 산 것은 국가였고, 흉상들은 1908년까지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별장으로 돌아왔다. 미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시피오네 자신은 금이 간 흉상을 아래층 로마 황제 흉상들 사이에 두고, 흠 없는 흉상은 위층 회화 갤러리로 올려 보냈다.

보르게세 가문이 팔고 사들이다 (1804~1839)

14. 안토니오 카노바 《승리의 베누스로서의 파올리나 보르게세》

카밀로 보르게세 공은 1804년 카노바에게 아내 파올리나 보나파르트의 조각상을 주문했고, 1807년에는 가문의 고대 조각들을 나폴레옹에게 팔았다. 그 가운데에는 젊은 베르니니가 대리석 매트리스를 깎아 준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있었고, 카노바는 파올리나가 누운 매트리스를 베르니니의 매트리스를 본떠 깎았다고 여겨진다. 미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카노바는 1808년 5월 15일 이 조각상의 대금으로 6000스쿠디를 받았지만, 다른 자료에는 그 지급이 1809년으로 되어 있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미상의 고대 로마 조각가(제정기), 125, 루브르 박물관
승리의 베누스로서의 파올리나 보르게세
승리의 베누스로서의 파올리나 보르게세안토니오 카노바, 1806, 보르게세 미술관

파올리나는 베개 두 개에 기대 비스듬히 누워, 오른손으로 귀 뒤쪽 머리를 만지고 왼손에는 작은 사과를 허벅지 곁에 들고 있다. 파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 베누스에게 준 것이 바로 이런 사과였고, 그래서 이 조각상의 이름이 ‘승리의 베누스’다. 얇은 천이 허리 아래에서 발목까지 덮고 있어 그 너머로 무릎의 윤곽이 드러나고, 매트리스와 베개에는 솔기와 가장자리 장식, 모서리의 술까지 새겨져 있다. 카노바는 숫돌에서 받은 물로 몸을 연마했고, 미술관은 대리석의 불그스름한 광택이 촛불 빛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쓴다. 당대의 어떤 증언으로도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파올리나가 어떻게 거의 벗은 채로 모델을 설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자, 작업실에 난로를 피워 두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1809년 조각상은 카밀로가 살던 토리노의 키아블레세 궁전으로 보내졌고, 1814년 로마의 보르게세 궁전으로 돌아왔으며, 1838년에야 별장으로 옮겨졌다. 대리석 매트리스 아래의 나무 침대는 돌처럼 보이게 칠하고 금박 장미 장식을 달았다. 그 안에는 관람객 앞에서 조각상을 돌리던 장치가 숨어 있는데, 이 장치는 토리노에서 만들어졌다.

15. 코레조 《다나에》

다나에
다나에코레조, 1531, 보르게세 미술관

1827년 교황청 세관에서 《다나에》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코레조 작품으로 신고되어 로마에 들어왔다. 이 그림은 카밀로 보르게세 공이 파리의 화상 보네메종에게서 285파운드에 샀는데, 미술관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대리인 에바시오 고차니가 교황청 관세를 줄이려고 일부러 작가 판정을 낮춰 적었다. 로마에서 화가들이 코레조의 작품임을 확인했고, 화가 빈첸초 카무치니는 그 명암법과 투명하게 빛나는 색채를 칭찬했다. 《다나에》는 1891년까지 로마의 보르게세 궁전에 걸려 있다가 그 뒤에야 별장으로 옮겨졌다.

코레조는 이 그림을 1530~1531년 무렵 만토바의 페데리코 2세 곤차가 공작을 위해 ‘유피테르의 사랑’ 연작 네 점 가운데 하나로 그렸다. 바사리에 따르면 공작은 이 연작을 카를 5세 황제에게 선물할 생각이었지만, 일부 연구자는 페데리코가 자기 자신을 위해 주문했다고 본다. 그 뒤 《다나에》는 밀라노의 조각가 레오네 레오니에게, 이어 프라하의 루돌프 2세 황제에게 넘어갔고, 1648년 스웨덴군이 프라하를 약탈했을 때 스톡홀름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로 실려 갔다. 크리스티나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이 그림을 가지고 로마로 왔다. 여왕이 죽은 뒤 《다나에》는 그녀의 상속자 데치오 아촐리노 추기경, 리비오 오데스칼키 공, 프랑스의 섭정 오를레앙 공작, 영국의 수집가들, 그리고 파리의 화상에게로 차례로 넘어갔다.

다나에는 흰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 시트 한쪽 끝을 잡고 있고, 다른 끝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날개 달린 소년이 잡고 있다. 미술관은 이 소년을 결혼의 신 히멘이라고 부르지만, 안내서에서는 대개 큐피드라고 한다. 소년은 닫집 아래의 어두운 구름을 올려다보는데, 이 구름이 아버지가 가둔 다나에에게 황금 비가 되어 스며든 유피테르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푸토 둘이 돌 위로 몸을 숙이고 있다. 미술관의 해석으로는 에로스와 아마도 안테로스이고, 시금석에 금과 화살촉을 문질러 시험하는 중이다.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서 말한 그림이 이것임을 알아보는 것도 이 푸토들 덕분이다. 바사리는 돌에 화살을 시험해 보는 사랑의 신들을 언급한다.

다나에
다나에코레조, 1531, 보르게세 미술관

16. 3~4세기 로마의 모자이크 장인들 《검투사 모자이크》

1834년 로마 남동쪽 카실리나 가도 곁의 보르게세 가문 영지 토레노바에서, 검투사들의 싸움과 맹수 사냥이 그려진 고대 로마의 큰 저택의 주랑 바닥이 발굴되었다. 발굴을 명한 사람은 카밀로의 동생이자 상속자인 프란체스코 보르게세 알도브란디니 공이었다. 카밀로는 1832년에 세상을 떠났다. 1807년의 매각 뒤로 별장의 방들은 텅 비었고, 카밀로와 그 뒤를 이은 프란체스코는 창고와 시장, 가문의 영지에서 가져온 조각상들로 방을 채웠다. 모자이크는 바닥에서 떼어 내어 직사각형 패널로 잘렸고, 별장 공원 안의 카지노 델 오롤로조에서 복원된 다음, 1839년까지 중앙 홀의 대리석 바닥과 높이를 맞추어 깔렸다.

검투사 모자이크
검투사 모자이크미상의 고대 로마 모자이크 장인(제정기), 300, 보르게세 미술관

싸우는 사람마다 머리 위에 검은 대문자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떤 이름 뒤에는 그리스어로 ‘죽음’이라는 낱말의 첫 글자인 세타가 붙어 있는데, 죽은 자를 표시한 것이다. 이긴 자에게는 장인이 승리를 뜻하는 약자 VIC를 붙였다. 가장 유명한 패널에서는 검투사 아스타키우스가 두 손으로 단검을 치켜든 채, 거대한 직사각형 방패에 발이 걸려 벌렁 누운 아스티부스 위에 서 있고, 아스티부스의 이름 아래에는 세타가 있다. 패널 가장자리에 뒤로 넘어진 로단의 이름 아래에도 같은 표시가 있다. 다른 패널에서는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를 흘리는 표범이 사냥꾼 세르펜티우스의 팔을 물고 있다.

모자이크는 사람들이 오가던 주랑에 긴 프리즈처럼 깔려 있었고, 미술관은 저택 주인이 자신이 비용을 댄 경기를 이렇게 기렸다고 본다. 1845년 독일의 금석학자 빌헬름 헨첸이 이 모자이크를 라틴어로 자세히 기술한 글을 냈다. 흰 바탕의 곧은 이음매와 색조 차이를 보면 조각들을 새로 짜 맞춘 자리를 알 수 있고, 일부 연구자는 19세기 복원가들이 이 바닥을 주랑에 깔려 있던 원래 순서와는 크게 다르게 맞추었다고 본다.

미술관의 시대: 구입, 복원, 새로 붙은 이름들

시간에 의해 드러난 진실
시간에 의해 드러난 진실잔 로렌초 베르니니, 1649, 보르게세 미술관

17. 잔 로렌초 베르니니 《시간에 의해 드러난 진실》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에 세우기 시작한 종탑은 1646년 새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명령으로 헐렸다. 종탑 건축을 명한 것은 우르바노 8세였지만, 정면에 금이 가기 시작해 1642년 공사가 중단되었고, 1644년 우르바노가 세상을 떠나면서 베르니니는 후원자를 잃었다. 베르니니 편에 섰던 전기 작가 발디누치는 조사 과정에서 앞장서 그를 비난한 사람이 그의 경쟁자인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였다고 쓴다. 같은 1646년 베르니니는 자기 돈을 들여 카라라 대리석 한 덩어리로, 시간이 베일을 벗겨 내는 진실의 조각상을 깎기 시작했다.

진실은 바위 위에 벌거벗은 채 앉아 고개를 젖히고 입을 크게 벌려, 거의 웃음을 터뜨릴 듯이 미소 짓는다. 쭉 뻗은 오른손에는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을 들고, 왼발은 지구 위에 올려놓았으며, 등 뒤로는 누가 위에서 잡아당기는 듯 베일이 위로 솟구친다. 날개 달린 노인인 시간은 그 위를 날고 있어야 했지만 끝내 조각되지 않았다. 베일은 꼭대기에서 톱니 정 자국이 남은 거친 네모 대리석 덩어리로 끝나는데, 바로 시간의 손이 베일을 잡고 있어야 할 자리다. 1665년 파리에서 베르니니는 프랑스 궁정인 폴 프레아르 드 샹틀루에게, 이 조각상은 가족에게 남기려고 만드는 것이고, 시간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으며, 모형에서는 기둥과 오벨리스크와 영묘들이 시간을 떠받치고 있었다고 말하고는 “그에게 날개가 있는데도”라고 덧붙이며 웃었다.

종탑이 헐리고 2년 뒤 베르니니는 같은 인노첸시오 10세를 위해 4대강 분수를 만들고 있었고, 주문이 잇따르면서 시간의 조각상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시간을 깎으려고 준비해 둔 대리석 덩어리는 조각가가 죽을 때까지 그의 집 곁에 놓여 있다가, 뒤에 상속자들이 팔았다. 베르니니는 진실의 조각상을 남계의 맏상속자들에게 물려주면서 팔지 못하게 했다. 1846년 그의 후손 프로스페로 베르니니는 이 조각상을 새 받침대에 올리고, 베르니니가 “한때 비방에 상처 입고 제 고통을 달래려고 이것을 깎았다”는 라틴어 비문을 새겼다.

가문의 계보 연구에 따르면 이 조각상의 처분 금지는 1841년 무렵 풀렸고, 1858년 프로스페로가 죽은 뒤 조각상은 그의 수양딸을 거쳐 다른 가문들로 넘어갔다. 그래서 20세기의 ‘베르니니 상속자들’은 이미 남계 직계 후손이 아니었다. 1924년 그들은 조각상을 보르게세 미술관에 맡겼고, 미술관의 영문 기록에 따르면 조각상은 수장고에 들어갔다. 1958년 국가가 이 조각상을 사들였다.

시간에 의해 드러난 진실
시간에 의해 드러난 진실잔 로렌초 베르니니, 1649, 보르게세 미술관
일각수를 안은 젊은 여인
일각수를 안은 젊은 여인라파엘로, 1505, 보르게세 미술관

18. 라파엘로 《일각수를 안은 젊은 여인》

1833년 목록에 이 그림은 ‘페루지노 화파의, 바퀴를 든 성녀 카타리나를 그린 초상’으로 올라 있다. 누군가 초상 위에 순교자의 상징물을 덧그려, 일각수 자리에 톱니바퀴를 그리고 어깨에는 무거운 망토를 둘렀던 것이다. 로베르토 롱기는 1927년 이 덧칠 아래에서 라파엘로를 알아보았다. 1933년 미술관 관장 아킬레 베르티니 칼로소가 엑스선 사진을 찍었고, 사진에는 덧칠 아래의 인물이 드러났다. 1934~1936년 복원가 아우구스토 체코니 프린치페는 망가진 패널에서 물감층을 캔버스로 옮기고, 나중에 덧그린 그림을 메스로 벗겨 냈다. 바퀴와 망토가 사라지자 여인의 무릎 위에 일각수가 나타났다. 캔버스로 옮겼기 때문에 하늘과 얼굴에는 천의 올이 비친다.

1959~1960년 중앙복원연구소의 엑스선 사진은 일각수 아래에 개가 그려져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개는 충실을, 일각수는 순결을 뜻했고, 둘 다 약혼녀나 젊은 아내의 초상에 어울리는 상징이다. 개 위에 일각수를 그린 사람이 라파엘로 자신인지 다른 화가인지는 연구자들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초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논란이다. 피렌체 사람 아뇰로 도니의 아내 마달레나 스트로치, 일각수가 파르네세 가문의 표장이었다는 이유로 줄리아 파르네세, 그리고 카테리나 곤차가 디 몬테베키오가 거론되었다. 시드니 프리드버그와 루이트폴트 두슬러 이래로 소수의 연구자는 리돌포 델 기를란다요를 화가로 본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가 그 무렵 피렌체에서 그리고 있던 《모나리자》에서 구도를 가져왔다. 여인은 두 기둥 사이 로지아에 앉아 있고, 낮은 난간 너머로 호수와 푸른 언덕이 있는 풍경이 펼쳐지며, 애완견만 한 작은 금빛 일각수가 여인의 품에 안겨 있다. 초상에서 가장 정밀하게 그려진 것은 펜던트다. 느슨하게 매듭지은 가는 금사슬에 금테를 두른 네모난 루비와 모양이 고르지 않은 큰 진주가 매달려 있다.

일각수를 안은 젊은 여인
일각수를 안은 젊은 여인라파엘로, 1505, 보르게세 미술관

19. 잔 로렌초 베르니니 작으로 전하는 《아기 유피테르와 파우누스가 있는 암염소 아말테이아》

잔드라르트는 1675년 베르니니의 첫 유명 작품으로 “바쿠스를 따르는 아기 둘이 누워 있는 염소의 젖을 먹는 흰 대리석 군상”을 꼽았다. 그는 1620년대 말 로마에 살았고, 거의 반세기가 지난 뒤 기억에 기대어 이 글을 쓰면서 그 군상이 어디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1926년 롱기가 그의 말을 보르게세 소장품의 작은 대리석 군상과 연결했고, 루돌프 비트코버부터 훗날 오랫동안 미술관을 이끈 안나 콜리바까지 거의 모두가 이에 동의했다. 어빙 래빈은 이 군상의 연대를 베르니니가 열 살쯤이던 1609년 무렵으로 잡기까지 했다.

롱기 이전에 이 군상에는 작가가 없었다. 시피오네는 1615년 8월에 이미 이 군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목각가 조반 바티스타 소리아가 이 군상을 올릴 호두나무 받침대 값을 받았다. 자코모 마닐리는 1650년 조각가의 이름 없이 이 군상을 기술했고, 1796년 별장 조각 목록은 16세기의 작자 미상 작품이라고 했다.

아기 유피테르와 파우누스가 있는 암염소 아말테이아
아기 유피테르와 파우누스가 있는 암염소 아말테이아잔 로렌초 베르니니, 1615, 보르게세 미술관
남자의 초상
남자의 초상안토넬로 다 메시나, 1476, 보르게세 미술관

염소는 다리를 접고 엎드려 고개를 돌린 채 이가 보이도록 입을 벌리고 있고, 목에는 방울 달린 목걸이를 차고 있다. 포도잎 관을 쓴 유피테르는 등을 보인 채 염소 옆구리에 무릎을 꿇고 젖을 짜고, 염소 등 뒤에서는 작은 파우누스가 얼굴을 내밀고 그릇에 담긴 젖을 마신다. 염소의 털은 길게 물결치는 홈으로 새겨져 있고, 아이들의 몸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도록 다듬어져 있다.

2022년 콜리바가 엮은 미술관의 새 조각 도록이 나왔는데, 여기서 이 군상은 ‘미상의 조각가’의 작품으로 분류되었다. 콜리바는 베르니니의 초기 전기 작가 두 사람이 모두 이 군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 염소의 뿔과 파우누스의 꼬리가 따로 깎여 금속 핀으로 붙어 있다는 점, 베르니니가 처음부터 쓰던 톱니 정 없이 표면 전체가 평끌로만 다듬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잎이 납작하고 얼굴이 굳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2023년 역사가 마리아 그라치아 베르나르디니와 프란체스코 페트루치가 이에 반박했고, 미술관 웹사이트의 2024년 기록에서도 이 군상은 여전히 ‘베르니니 작으로 전하는’ 작품으로 올라 있다. 콜리바는 예전에는 자신도 이 결점들을 어린 베르니니의 미숙함으로 여겼다고 인정했다.

20. 안토넬로 다 메시나 《남자의 초상》

검은 모자를 쓰고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몸을 왼쪽으로 돌렸지만 눈은 오른쪽의 보는 사람을 곁눈질하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다. 윗입술과 턱의 짧은 수염은 아주 작은 점들로 그렸고, 눈썹은 한 올 한 올 그어져 있다. 붉은 주름의 마루에는 회색 연기 같은 얼룩이 보인다. 안토넬로는 옷의 밝은 부분을 진사로 칠했는데, 이 안료가 세월이 지나며 어두워져서 2002년 복원 전에는 이 부분들이 초록빛으로 보였다.

1790년 무렵 이 초상은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으로 보르게세 목록에 올랐다. 1869년 독일의 감식가 오토 뮌들러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미술 안내서 제2판에서 이 그림을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작품으로 보고, 내친김에 자화상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미술관은 이 추측에 근거가 없다고 본다. 시칠리아 사람인 안토넬로는 1475~1476년 베네치아에 머물며 상인과 부유한 시민들의 초상을 그렸고, 미술관은 이 초상을 1476년 무렵의 작품으로 본다. 붉은 옷과 긴 자락이 어깨로 늘어지는 검은 모자는 베네치아 귀족의 옷차림이었다. 이 초상이 1790년 전에 어떻게 보르게세 가문에 들어왔는지는 연구자들이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1871년 미술사가 조지프 크로와 조반니 바티스타 카발카셀레는 이 초상을, 베네치아의 감식가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1532년 베네치아의 어느 집에서 본 미켈레 비아넬로의 초상, 곧 “분홍 옷을 입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초상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미키엘이 기록한 초상들에는 서명과 날짜가 있었는데 이 초상에는 서명이 없어서, 크로와 카발카셀레는 패널이 잘려 나갔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물감은 네 면 모두 패널 가장자리보다 조금 앞에서 손대지 않은 반듯한 경계를 이루며 멈추고, 파올라 델라 페르골라는 이 경계를 근거로 패널이 잘린 적이 없음을 증명했다.

시피오네 보르게세는 교황의 권력과 돈, 때로는 노골적인 압력을 동원해 이 저택을 채울 그림과 조각상을 모았다. 두 세기 뒤 그의 후손들은 고대 조각상과 흉상, 부조 700점 가까이를 나폴레옹에게 팔았고, 1901년 국가는 가문에 남아 있던 소장품과 별장을 사들였다. 《보르게세의 검투사》와 1807년에 팔려 간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루브르에 남았다. 카라바조와 라파엘로, 티치아노의 그림과 베르니니의 대형 군상들은 보르게세 별장에 남았다.

남자의 초상
남자의 초상안토넬로 다 메시나, 1476, 보르게세 미술관

더 볼 만한 작품

젊은 시절의 자화상
젊은 시절의 자화상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3, 보르게세 미술관
중년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 자화상
중년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 자화상잔 로렌초 베르니니, 1635, 보르게세 미술관

이 스무 점에 들지 않은 작품 가운데에는 티치아노 말년의 《큐피드의 눈을 가리는 비너스》, 카라바조의 《성 히에로니무스》, 루카스 크라나흐의 《벌집을 든 비너스와 큐피드》, 도소 도시의 《멜리사》가 있다. 젊은 베르니니가 그린 자화상 두 점도 찾아볼 만하다. 한 점은 1911년 메싱거 남작이 미술관에 기증했고, 다른 한 점은 1919년 국가가 안드레아 사키의 작품으로 알고 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