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7일, 플랑드르 화가 다비트 테니르스 주변 화가가 그린 작은 그림 《부엌 하녀를 어루만지는 노인》이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미술관은 1945년 이후 이 그림을 잃어버렸는데, 그림은 나폴리에서 나타나 그곳에서 압수되었고 드레스덴에 반환되었다. 1963년에 펴낸 손실 목록에서 미술관은 사라진 그림 507점을 꼽았고, 큐레이터 우타 나이트하르트의 집계로는 그 뒤 고전 거장 회화관으로 돌아온 그림이 약 63점이다.
컬렉션의 중심은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으로 1733년부터 1763년까지 다스린 아우구스트 3세 때 사들인 그림들이다. 그는 대신 하인리히 폰 브륄과 함께 약 15년 만에 아버지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회화 컬렉션을 유럽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으로 키웠다. 대리인들이 보헤미아, 파리, 베네치아, 모데나, 피아첸차에서 그를 위해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이기도 하고 그림을 한 점씩 사들이기도 했으며, 1747년부터 사들인 그림은 옛 마구간을 고친 건물, 지금의 요하네움에 걸렸다. 7년 전쟁 때 프로이센이 작센을 점령하고 1760년 드레스덴을 포격하면서 구입은 끊겼다. 1855년에는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로 츠빙거 궁 곁에 지은 회화관 건물이 그림들을 맞으며 문을 열었다.
궁정이 사들인 그림 (1741~1749)

1.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뚜쟁이》, 1656년
1656년 24세의 페르메이르는 그의 것으로 알려진 첫 풍속화를 그렸다. 그때까지 그는 성경과 신화를 다룬 큰 구성을 그려 왔는데, 이 그림에서도 그런 그림의 큼직한 인물들을 그대로 두고, 위트레흐트의 카라바조 추종자들에게서 익숙해진 선술집 장면의 형식과 결합했다.
캔버스는 거의 정사각형이고 위아래 절반으로 나뉜다. 아래 절반은 난간에 던져 놓은 커다란 무늬 양탄자가 차지하고, 그 위로 네 사람이 빽빽하게 서 있다. 왼쪽에서는 검은 베레모에 흰 레이스 깃을 단 젊은 남자가 관람자를 똑바로 보며 히죽 웃고, 호박색 음료가 든 잔을 들어 올린 채 작은 시턴의 목을 쥐고 있다. 그 옆에서는 검은 베일을 쓴 노파가 웃음을 띠고 처녀와 돈을 바라보는데, 노파의 얼굴에는 빛이 비친다. 진홍색 웃옷에 깃털 달린 넓은 회색 모자를 쓴 군인은 처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손바닥을 그녀의 가슴에 얹었으며, 그의 얼굴은 모자챙 그늘에 묻혀 있다. 샛노란 레몬빛 윗옷을 입은 처녀는 눈을 내리깔고 한 손에 백포도주 잔을 들었고, 다른 손은 손바닥을 위로 펼쳤는데, 그림 한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위, 바로 그 손바닥 위에서 군인이 손가락 사이에 금화 한 닢을 끼고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의 양탄자 위에는 백랍 뚜껑을 단 청백색 주전자가 놓여 있다.
미술사가 아서 휠록은 왼쪽의 젊은 남자를 아마 페르메이르의 자화상일 것이라고 본다. 이 해석의 근거는 베레모와 트임 장식이 있는 윗옷인데, 페르메이르가 《회화의 예술》에서 뒷모습으로 그린 화가의 옷차림과 닮았다.

그림은 보헤미아 둑스 성에 있던 발트슈타인 백작 가문의 컬렉션과 함께 드레스덴에 왔다. 화가 요한 고트프리트 리델은 1735~1737년에 백작을 위해 이 컬렉션의 그림들을 복원했고, 그 뒤 그림들을 작센 궁정에 파는 일을 주선했으며, 1741년 5월 그의 감독 아래 그림 268점이 2만 2000굴덴에 팔려 아우구스트 3세를 위해 둑스에서 실려 나갔다. 그 보상으로 리델은 1742년 미술관 감독관 자리를 얻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서명과 1656이라는 연도가 있는데, 이 그림은 페르메이르가 서명과 연도를 함께 적은 그림 세 점 가운데 하나다. 드레스덴에서는 처음부터 Meer라는 서명을 알고 있었지만, 이 메이르가 누구인지는 한 세기 동안 아무도 몰랐다. 1859년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거가 높이 걸린 그림 앞에서 사다리에 올라가 연도를 읽고 그림을 델프트와 연결했으며, 1862년 미술관 목록은 이 그림을 델프트의 얀 판 데르 메이르의 작품으로 올렸다.
2. 장에티엔 리오타르 《초콜릿 소녀》, 1744~1745년경
베네치아에서 아우구스트 3세를 위해 그림을 사들이던 프란체스코 알가로티 백작은 쟁반에 초콜릿을 받쳐 들고 가는 하녀를 그린 파스텔화 값으로 리오타르에게 120체키노를 치렀고, 화가의 영수증에는 1745년 2월 3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이 알가로티가 1743년에 드레스덴을 위해 《마이어 시장의 성모》를 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제네바 사람 리오타르는 그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4년을 살며 터키식 옷을 입고 긴 수염을 길렀고, 1743년부터는 빈의 마리아 테레지아 궁정에서 일했다. 이 파스텔화도 그는 아마 빈에서 만들었을 것이고, 팔려고 베네치아로 가져왔다. 미술관은 이 하녀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시녀로 본다.
1746년 알가로티는 대신 브륄에게, 베네치아의 파스텔 화가 로살바 카리에라가 《초콜릿 소녀》를 두고 자기가 본 파스텔화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고 알렸다.
소녀는 전신이 보이는 엄격한 옆모습으로, 밝은 널마루 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장식 없는 회베이지색 벽을 따라 앞쪽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레이스 주름 장식과 하늘색 리본을 단 분홍 비단 두건, 흰 목수건, 비단 광택이 도는 금빛 황토색 코르사주, 긴 흰 앞치마, 은회색 치마 차림이고, 치맛자락 아래로 굽 달린 연노랑 구두가 비죽 나와 있다. 금도금 테를 두른 작고 어두운 쟁반 위에는 키 큰 물잔과 꽃무늬를 그린 흰 자기 잔이 놓여 있는데, 거품 이는 초콜릿이 가득한 자기 잔은 은으로 투각한 받침에 끼워져 비스킷을 곁들인 받침 접시 위에 있다. 물잔에는 창유리의 밝은 사각형들이 비치고, 물 너머로 그녀가 쟁반 뒤쪽을 받치고 있는 엄지손가락이 비쳐 보인다. 무릎 조금 아래로는 가는 선 두 줄이 화면을 가로지르는데, 양피지 바탕을 이어 붙인 자리다.
구입하고 6년 뒤인 1751년, 알가로티는 파리의 감식가 피에르장 마리에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파스텔화를 묘사했다. 그의 말로는 그림에는 그림자가 거의 없고, 빛은 물잔에 비치는 두 창문에서 들어오며, 마무리의 정성으로 보면 파스텔로 그린 홀바인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옅은 회색 그림자가 치마 오른쪽 벽과 쟁반 아래, 그리고 발 둘레의 바닥에 드리워 있다.
1883년 매사추세츠의 미국 초콜릿 회사 월터 베이커 앤드 컴퍼니는 《초콜릿 소녀》를 ‘라 벨 쇼콜라티에르’라는 이름으로 자사 상표로 삼았다.


3. 코레조 《거룩한 밤》, 1528~1530년경
1522년 10월 14일 레조에밀리아에서 알베르토 프라토네로는 손수 쓴 메모로, 코레조 출신의 안토니오 알레그리에게 레조의 옛 화폐로 208리라를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과 거기에 들어가야 할 모든 인물을 그린 패널의 값이었고, 크기는 화가가 직접 가져온 소묘를 따르기로 했다. 같은 날 코레조는 계약금으로 40리라를 받았다. 패널은 산 프로스페로 성당에 있는 프라토네로 가문 예배당을 위한 것이었고, 미술관은 코레조가 파르마에서 돔 천장화를 그리던 무렵인 1520년대 말에 이 그림을 대부분 그렸다고 본다.
패널의 아래 절반은 거의 검고, 빛은 구유 속 짚과 이삭 위에 누운 아기에게서 나온다. 마리아는 아기를 감싸 안고 몸을 아주 낮게 숙여서, 그녀의 얼굴은 아래에서 빛을 받아 다른 어느 얼굴보다 밝다. 왼쪽에서는 지팡이를 든 거구의 맨발 목자가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고, 곁의 소년은 그를 돌아보며, 그 뒤 기둥 옆에서는 흰 머릿수건을 쓴 여인이 눈을 찡그리고 들어 올린 손바닥으로 광채를 가린다. 왼쪽 위 구름 위에서는 천사들이 아래로 쏟아지듯 굴러떨어지고, 오른쪽에서는 빨간 옷의 요셉이 당나귀 등에 손을 얹었으며, 오른쪽 가장자리의 어두운 언덕 위로만 차가운 청록빛 새벽 띠가 밝아 온다. 미술관은 《밤》을 이탈리아 회화 최초의 큰 야경 장면이라고 부른다.
1640년 모데나와 레조의 공작 프란체스코 1세 데스테는 제단화를 떼어 모데나로 가져가게 했다. 성당 장부의 내용을 옮긴 글에 따르면 장부에는 그림이 온 백성의 큰 슬픔 속에 실려 갔다고 적혀 있고, 같은 해 예배당에는 장 불랑제가 그린 복제화가 걸렸다.
한 세기도 더 지나, 큰 빚을 진 그의 후손 프란체스코 3세 데스테는 자기 미술관의 그림 100점을 10만 체키노에 아우구스트 3세에게 팔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이었고 모데나는 군대에 점령되어 있었으며, 거래는 베네치아에서 일하던 작센의 궁정 화가이자 복원가 보나벤투라(벤투라) 로시가 맡았다. 계약은 1745년 여름에 맺어졌다. 브륄의 편지들로 보면 대신은 한번은 비서 하이네켄에게 로시와 마지막으로 무엇을 합의했는지 잊어버렸다고 털어놓으며, 그 합의 내용을 가져간 그림 목록과 함께 보내 달라고 했다. 1746년 7월 그림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여름이 끝날 무렵 드레스덴에 도착했고, 미술관 감독관은 이 그림이 온 유럽이 유명한 《밤》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그림이라고 적었다. 19세기 초 《시스티나의 성모》에 밀려나기 전까지 이 그림은 드레스덴에서 가장 이름난 그림이었다.


계약에 따라 모데나에는 주세페 노가리가 그린 《밤》의 복제화가 남았다.
4. 렘브란트 《탕자의 비유 속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1635년경
흰 타조 깃털을 풍성하게 꽂은 검은 벨벳 베레모의 남자가 우리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려 앉아, 고개를 돌리고 관람자를 똑바로 보며 껄껄 웃는다. 그는 한 손으로 굽이 넓게 퍼진 아주 높고 가는 술잔을 여자의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으며, 옆구리에는 금도금한 꼬인 손잡이의 장검을 찼다. 여자는 그의 무릎에 등을 보이고 앉아 옅은 미소를 띠며 어깨 너머로 돌아본다. 왼쪽, 무늬 양탄자를 덮은 탁자 위에는 공작 파이가 놓여 있는데, 금빛 껍질 위로 새의 머리와 목이 올라와 있고 꽁지깃은 여자의 등 뒤로 솟아 있다. 왼쪽 위 구석의 벽에는 캔버스 가장자리에 잘린 어두운 판이 걸려 있고, 공작의 볏 위로 옅은 서명 Rembra… f.를 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무릎에 사스키아를 앉힌 자화상》으로 불렸다. 렘브란트는 1634년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와 결혼했고, 지금의 제목을 붙인 미술관은 이 한 쌍을 선술집에서 유산을 탕진하는 비유 속 탕자와 몸 파는 여자로 본다.
1749년 파리에 있던 작센 궁정의 대리인 테오도르 르 뢰가 파리의 화상 노엘 아레뇽에게서 아우구스트 3세를 위해 이 그림을 샀다. 그때 캔버스는 이미 손질을 거친 뒤였는데, 엑스선 사진을 보면 처음에는 인물이 한 명 더, 곧 악사가 있는 더 넓은 선술집 장면이었다. 악사는 방 안쪽, 지금 공작 깃털이 솟은 자리에서 덧칠로 지워졌고, 캔버스의 왼쪽은 잘려 나갔으며 아래쪽에는 띠가 덧대어졌다. 이 모든 손질은 그림이 드레스덴에 오기 전에 이루어졌다.
렘브란트가 직접 고쳤는지를 두고 연구자들은 의견이 갈린다. 렘브란트 연구 프로젝트는 처음의 구성을 1635년 무렵에 그린 진품으로 인정하지만, 그 뒤의 큰 변경에 대해서는, 아마 왼쪽 가장자리를 잘라 낸 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그 변경이 렘브란트의 손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훨씬 덜 확실하다고 쓴다.
궁정 화가가 그린 도시 (1748~1765)
5. 베르나르도 벨로토 《아우구스트 다리 하류 엘베 강 우안에서 본 드레스덴》, 1748년
베르나르도 벨로토는 베네치아에서 카날레토라는 별명으로 불린 화가 안토니오 카날의 누이 피오렌차 카날의 아들로 태어났고, 1735년 무렵부터 외삼촌에게서 도시 풍경 그리기를 배웠다. 1747년 7월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이기도 한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그를 드레스덴으로 불렀고, 1748년 벨로토는 궁정 화가가 되었다. 작센과 폴란드에서는 그를 외삼촌의 별명을 따 카날레토라고 불렀고, 그 자신도 자기 이름에 이 별명을 붙여 서명했다. 이 그림에도 아래쪽 한가운데 어두운 강둑에 Bernardo Bellotto detto Canaleto, 곧 카날레토라 불리는 베르나르도 벨로토라고 적혀 있다.
벨로토는 드레스덴에 온 지 1년 뒤에 이 그림을 그렸다. 다리보다 하류 쪽 오른쪽 강둑에서 엘베 강 건너 구시가지를 바라본 모습이다. 왼쪽에는 아치가 여럿인 긴 돌다리 아우구스트 다리가 강을 가로지르고, 가운데 교각 위에는 십자가상이 서 있으며, 다리 앞 강가에는 돛대 높은 거룻배들이 매여 있다. 가운데 지붕들 위로는 랜턴과 네 모서리의 작은 탑을 갖춘 프라우엔키르헤의 돔이 솟아 있다. 이 교회는 1734년에 봉헌되었고, 랜턴은 1743년에 완성되었다. 오른쪽 강물에는 가톨릭 궁정 교회가 비치는데, 아래쪽은 푸르스름한 흰색이고 위쪽은 따뜻한 노란색이며 난간마다 조각상이 서 있고, 아직 다 짓지 못한 탑은 발판과 사다리를 갖춘 나무 비계에 둘러싸여 있다. 왼쪽 아래 판자 차양 옆에는 가난한 가족이 서 있다. 아기를 안은 여자, 지팡이를 든 남자, 아이들이다. 그보다 오른쪽에는 차려입은 남녀가 있는데, 밝은 웃옷의 남자가 일행인 여자에게 강을 가리킨다.
이 그림 때문에 드레스덴에서는 이런 풍경이 보이는 지점을 카날레토 전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지평선에 서 있는 건물 가운데 프라우엔키르헤와 궁전과 궁정 교회는 1945년 2월 드레스덴 폭격 때 파괴되었다. 아우구스트 다리는 5월에 나치 친위대 부대가 경간 두 개를 폭파하면서 피해를 입었다.

6. 베르나르도 벨로토 《드레스덴 옛 크로이츠 교회의 폐허》, 1765년
7년 전쟁 중이던 1760년 7월 19일, 프로이센의 드레스덴 포위전에서 가장 혹독했던 그날, 프리드리히 2세의 포탄이 구시장 광장의 성 십자가 교회, 곧 크로이츠 교회에 떨어졌다. 신랑과 성가대석은 불타 무너졌지만 돌로 된 서쪽 탑은 버텼다. 같은 포격으로 피르나 교외 지구에 있던 벨로토의 집도 그림, 에칭용 동판과 함께 불탔다(화가 이야기는 《엘베 강 우안에서 본 드레스덴》에서 했다).
1763년 아우구스트 3세와 브륄이 세상을 떠났다. 벨로토는 궁정 화가의 봉급을 잃었고, 새로 생긴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원근법 교사 자리만 얻었다.
1764년 새 크로이츠 교회 공사가 시작되었고, 1765년 6월 22일 큰비에 기초가 쓸려 나가면서 옛 탑의 일부가 무너졌다. 벨로토는 같은 풍경을 담은 자신의 에칭 밑글에 이 날짜를 적어 넣었고, 거기서 자신을 선제후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림에 그린 것은 무너진 뒤의 모습이다. 남은 탑은 사람 손으로 헐리고 있고, 앞쪽에서는 벌써 새 교회가 올라가고 있다.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 불에 타 껍데기만 남은 탑이 서 있다. 적갈색과 회색 돌로 지었고 아치형 창이 줄지어 났으며 톱니 모양 꼭대기는 부서졌는데, 한쪽 면이 뚫려 있어 안쪽 벽이 보인다. 오른쪽 면을 따라 긴 사다리가 거의 꼭대기까지 걸쳐 있고, 맨 위 턱에는 아주 작은 사람 하나가 서 있다. 탑 아래에는 부러진 들보가 뒤섞인 돌무더기 비탈이 쌓여 있다. 왼쪽 뒤편은 불탄 구역으로 지붕 없는 벽과 텅 빈 창들이 남았고, 오른쪽에는 빨간 지붕을 얹은 밝고 높은 집들이 햇빛을 받으며 길게 늘어서 있으며, 그 벽 아래에 모인 군중이 작업을 지켜본다. 가운데에서는 공사가 한창인데, 가대 위에 걸친 발판, 쌓아 올린 다듬은 돌, 판자 차양 아래의 둥근 돌 북통, 셔츠 차림의 일꾼들이 보인다. 2022년 건축 잡지 《바우벨트》는 이 그림을 벨로토의 작품 가운데 전쟁의 결과를 보여 주는 두 점 중 하나로 꼽았다.
아래쪽 한가운데, 새 교회를 위해 마련해 둔 맨 아래 돌 위에 남녀 한 쌍이 서로 바짝 붙어 앉아 있다.

이름이 바뀐 그림들 (1837~1972)
7.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잠자는 비너스》, 1508~1510년경
베네치아의 개인 컬렉션들을 기록으로 남긴 베네치아 사람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은 1525년 지롤라모 마르첼로의 집에서 본 그림을 적어 두었다. 큐피드와 함께 풍경 속에서 잠든 벌거벗은 비너스를 그린 캔버스로, 카스텔프랑코의 조르초, 곧 조르조네가 그렸고 풍경과 큐피드는 티치아노가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미술관은 마르첼로가 1507년 자기 결혼을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조르조네는 1510년 가을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여자는 캔버스 아래 절반을 가로질러 누워 있는데, 머리는 왼쪽 가장자리에, 발은 오른쪽 가장자리 가까이에 있다. 눈은 감겼고, 우리 쪽으로 돌린 얼굴은 머리 뒤로 들어 올린 오른팔의 굽은 안쪽에 얹혀 있으며, 왼손은 음부 위에 놓여 있다. 머리 아래에는 짙은 진홍빛 천이 쌓여 있고, 몸 아래에는 공단처럼 흰 구겨진 시트가 깔려 아래쪽 가장자리를 따라 줄곧 풀밭까지 늘어져 있다. 그 뒤로는 나무가 드문드문 선 골짜기, 푸른 산, 지붕이 가파른 시골 건물들, 아치가 있는 무너진 담이 보인다. 오른쪽, 그녀의 발 너머에서 시트는 고르게 짙은 초록빛 풀밭으로 이어지는데, 큐피드가 앉아 있던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이 그림은 강건왕 아우구스트 때 드레스덴에 왔다. 1699년 1월 26일 암스테르담의 화상 샤를 르 루아는 그림 15점에 대한 영수증을 써 주었는데, 그 가운데 한 점이 작은 큐피드가 있는 조르조네의 비너스로 적혀 있었다. 1722~1728년의 궁정 목록에서는 이 그림이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올라갔다. 1837년 큐피드는 풀밭의 초록으로 덧칠되었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손상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무렵 미술관 목록들은 이 그림을 사소페라토의 복제화라고 했고, 1880년 이탈리아의 감식가 조반니 모렐리가 이 그림이 미키엘이 기록한 캔버스임을 알아보고, 티치아노가 이어받아 완성한 조르조네의 그림으로 되돌려 놓았다.
엑스선 사진에서는 풀 밑에 남은 큐피드의 흔적이 조각조각 보인다.
8. 얀 반 에이크 《드레스덴 세폭화》, 1437년
닫힌 세폭화는 두 손바닥에 들어간다. 바깥쪽 날개에는 얕은 벽감 속 돌 조각상처럼 회색 물감으로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가 그려져 있고, 마리아 위의 비둘기는 벽감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세폭화를 열면 신랑을 따라 바라본 성당 안이 펼쳐진다. 짙은 초록과 장밋빛 갈색 대리석 기둥, 까치발 위의 작은 조각상들, 위쪽의 색유리를 낀 뾰족한 창 세 개가 보인다. 신랑 한가운데 짙은 초록 닫집 아래 옥좌에는 마리아가 앉아 있고, 그녀의 빨간 망토는 계단을 타고 패널 맨 아래까지 흘러내리며, 아기 예수의 무릎에는 마태오 복음서의 구절 “나에게 배워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가 적힌 두루마리가 놓여 있다. 왼쪽 날개에서는 금도금 갑옷의 미카엘 대천사가 무릎 꿇은 기증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오른쪽 날개에서는 높은 관을 쓴 성녀 카타리나가 책을 읽는데, 옆구리에는 검이 있고 구석에는 바퀴가 있으며, 그녀 뒤 창 너머로는 탑이 선 아주 작은 도시와 먼 언덕이 보인다. 액자의 문장을 몇몇 연구자는 제노바의 주스티니아니 가문과 연결하지만, 미술관은 기증자를 미상이라고 한다.

날개의 액자는 원래의 것이고, 그 위로 라틴어 글귀가 이어진다. 가운데 액자의 안쪽 턱, 타일 바닥 바로 앞에는 Johannes de eyck me fecit et complevit, 곧 “요하네스 데 에이크가 나를 만들고 완성했다”라는 서명과 1437이라는 연도, 그리고 반 에이크의 좌우명 ALC IXH XAN, 곧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적혀 있다. 이 줄은 몇 세기 동안 갈색 물감에 덮여 있었고, 그동안 작가의 이름은 계속 바뀌었다. 쾰른의 은행가 에버하르트 야바흐의 컬렉션에서는 얀의 형제 휘버르트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기록되었고, 1754년 드레스덴 목록에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으로 올라 있으며, 1830년 베를린의 학자 알로이스 히르트가 이를 얀 반 에이크에게 돌렸다. 그 뒤에도 드레스덴의 목록들은 한동안 휘버르트를 작가로 적다가 1846년 무렵에야 얀으로 정했다.
1959년, 그림들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드레스덴의 복원가들이 갈색 물감을 걷어 내고 서명과 연도와 좌우명을 드러냈다. 그 전에는 세폭화를 1430년 이전 작품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었지만, 1959년부터는 1441년에 세상을 떠난 반 에이크의 거의 말년 작품으로 본다.
9. 소 한스 홀바인 《모레트 영주 샤를 드 솔리에의 초상》, 1534~1535년경
모레트 영주 샤를 드 솔리에는 1534년 4월부터 1535년 7월까지 헨리 8세의 궁정에 와 있던 프랑스 대사였고, 초상은 바로 그때 그려졌다. 홀바인은 그 무렵 이미 런던에 살고 있었고, 얼마 뒤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모레트는 패널의 폭을 가득 채운 허리 위 모습으로 관람자를 마주 보고 서서, 무겁고 흔들림 없는 눈길로 그를 바라본다. 뒤에는 구김진 짙은 초록 비단이 이쪽 가장자리에서 저쪽 가장자리까지 드리워 있다. 초상의 거의 모든 것이 검다. 이마까지 깊이 눌러쓴 납작한 모자, 갈색 모피 깃을 단 넓은 망토, 윗옷, 트임 사이로 흰 아마포를 끌어낸 소매가 모두 그렇다. 밝은 곳은 많지 않다. 가운데는 붉은 기가 돌고 양옆은 희끗한, 두 갈래로 갈라진 수염의 얼굴, 흰 소맷부리, 모피, 그리고 곳곳에 흩어진 금붙이, 곧 모자와 소매 트임에 한 쌍씩 단 끝장식, 모자에 단 작은 부조 인물의 타원형 배지, 얽힌 모노그램이 들어간 단추, 둥근 투각 펜던트가 달린 긴 사슬이다. 아래쪽에서 장갑을 끼지 않은 오른손은 접은 장갑을 든 채 단검 자루를 움켜쥐었고, 밝은 장갑을 낀 왼손은 금도금한 긴 칼집을 쥐고 있다.
17세기 중반 파르마와 로마에서 데스테 가문의 대사를 지낸 마시밀리아노 몬테쿠콜리 후작이 이 초상을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1세에게 선물했다. 드레스덴의 역사가 헤르만 뤼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657년 작가 프란체스코 스카넬리는 이 그림을 여전히 올베노라는 어느 뛰어난 북방 화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뤼케의 말로는 그 뒤 모레트가 모로로 바뀌었고, 초상은 일 모로라는 별명의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로 여겨졌으며, 작가로는 그의 궁정에서 일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지목되었다. 초상은 레오나르도의 이름을 단 채 1746년 모데나의 그림 100점과 함께 드레스덴에 왔다(이 구입 이야기는 《거룩한 밤》에서 했다).
19세기 전반 미술사가 카를 프리드리히 폰 루모어가 초상을 홀바인에게 돌려주었다. 그의 근거는 벤첼 홀라르가 1647년에 만든 에칭이었는데, 홀바인의 준비 소묘를 바탕으로 한 이 에칭에는 Mr. Morett라는 글귀가 있었고, 그 소묘는 드레스덴이 1860년에 사들였다. 이 글귀를 사람 이름으로 읽었고, 19세기에 그림은 헨리 8세의 금세공사 휴버트 모레트의 초상으로 이름이 났다. 1881년 연구자 소푸스 라르펜트가 그를 프랑스 대사로 밝혀냈다. 뒤에 크리스토프 바이디츠가 만든 회양목 메달 모형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Carolus de Solario dominus Morety, 곧 “모레트의 영주 카롤루스 데 솔라리오”라고 새겨져 있다.


10. 바르톨로메우스 자르부르크(소 한스 홀바인 원작) 《마이어 시장의 성모》(드레스덴의 《홀바인 성모》), 1635~1637년경
프랑크푸르트 출신으로 암스테르담에 살던 판화가이자 그림 상인 미셸 르 블롱은 1633년 바젤의 시장 야코프 마이어 춤 하젠을 위해 홀바인이 그린 《성모》를 바젤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져왔고, 당시 헤이그에서 일하던 트리어 출신의 초상화가 바르톨로메우스 자르부르크에게 그 복제를 주문했다. 미술관에 따르면 상인은 이 복제화를 원본으로 속여 팔려고 주문했고, 복제화에는 원본과 같은 커다란 참나무 패널을 썼다.
연구자들은 1743년 이전의 복제화에 관한 기록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1743년 9월 4일, 뒷날 《초콜릿 소녀》를 사게 되는 바로 그 알가로티 백작이 베네치아에서 주안 돌핀에게서 이 그림을 홀바인의 원본으로 알고 금화 1000두카트에 샀고,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림의 진위와 내력을 여러 자료로 확인했다. 드레스덴에서는 이 그림을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와 짝을 이루는 독일의 성모로 우러러보았다.
1822년 두 번째 판본이 나타났다. 이 그림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를 위해 구입되었다가 혼인을 통해 헤센다름슈타트 대공 가문으로 넘어갔고, 그 뒤로 둘 중 어느 쪽이 원본인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1871년 여름 드레스덴의 홀바인 전시회에서 두 판본이 나란히 걸렸고, 9월 1~3일 그곳에서 전문가 회의가 열렸으며, 9월 5일 미술사가 14명이 원본은 다름슈타트 판본뿐이고 드레스덴 패널은 자유로운 복제화라는 성명에 서명했다. 화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화가이기도 한 미술관 관장 율리우스 휘브너는 드레스덴 그림을 홀바인이 나중에 더 낫게 고쳐 그린 판본으로 보고 그것을 옹호하는 소네트를 썼고, 성명에 서명한 미술사가 카를 뵈르만이 소네트로 답했으며, 두 시는 모두 회의록에서 지워졌다. 학자 구스타프 테오도어 페히너는 전시장에 두 성모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 묻는 설문지를 놓아두었는데, 관람객 1만 1842명 가운데 113명이 답했다. 1910년 스위스의 연구자 에밀 마요르가 복제화를 그린 화가 자르부르크의 이름을 밝히고 1635~1637년 작으로 보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1871년의 논쟁은 학문으로서 미술사가 태어난 순간으로 여겨진다.

관을 쓴 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조개껍데기 모양 벽감 앞에 서 있고, 왼쪽에는 마이어 시장이 무릎을 꿇었으며, 오른쪽에는 흰 두건을 쓴 그의 두 아내와 긴 산호 묵주를 든 딸이 있다. 복제화를 가장 쉽게 가려낼 수 있는 곳은 관 위의 공간이다. 자르부르크의 그림에서는 조개껍데기가 어두운 아치 안에 놓여 인물 둘레와 위로 빈 공간이 넉넉하고, 폭은 같지만 패널이 원본보다 높다. 홀바인의 그림에서는 조개껍데기가 바로 까치발 위에 얹혀 있고, 인물들 전체가 더 높이, 더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다. 복제화는 색도 더 어둡다. 마리아의 옷은 거의 검고 허리띠는 연어빛 주황, 양탄자는 짙은 빨강인 반면, 홀바인의 그림에서는 옷이 청록색이고 양탄자는 노란 테두리를 두른 밝은 색이다.
다름슈타트의 원본은 2011년 수집가 라인홀트 뷔르트가 샀다.
11. 알브레히트 뒤러 《베른하르트 폰 레젠의 초상》, 1521년
젊은 남자가 접은 편지를 들고 있고, 편지에 적힌 주소 줄은 그의 엄지손가락 밑으로 사라진다. 미술관은 앞부분을 Dem pernh… zw…로 읽고, 그 뒤의 글자들은 손가락에 가려 있다. 물결치는 챙의 커다란 검은 베레모는 패널 왼쪽 가장자리에 잘린 채 밝은 얼굴 위로 드리워 있고, 배경은 납작한 벽돌빛 빨강이며, 그는 관람자를 비껴 왼쪽을 본다. 위쪽 한가운데에는 금색으로 뒤러의 모노그램과 연도가 적혀 있다.
뉘른베르크 사람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 무렵 판화가 온 유럽에 알려진, 자기 세대에서 단 한 사람뿐인 독일 화가였고, 이탈리아에도 두 번 다녀왔다. 1519년 막시밀리안 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 뉘른베르크는 황제가 정해 준 연금 100굴덴을 더는 지급하지 않았고, 1520~1521년 뒤러는 새 황제 카를 5세에게서 연금을 다시 인정받으려고 아내 아그네스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지냈다. 그는 여행 중에 일기를 썼는데, 수입과 지출을 적은 장부에 더 가까워서 받은 보수, 식사, 선물, 그리고 자기가 그린 사람들이 적혀 있다. 1521년 안트베르펜에서 그는 베른하르트라는 사람의 초상을 유화로 그렸다고 적었는데, 일기의 사본마다 그 성이 다르게 전한다. 그 사람은 뒤러에게 8플로린을 치르고 그의 아내에게 크라운 금화 한 닢을 선물했다.
1743년 이 초상은 같은 대리인 르 뢰를 통해 파리에서 드레스덴을 위해 구입되었다. 19세기에는 그림 속 인물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궁정 화가였던 네덜란드 화가 베르나르트 판 오를레이로 보았다. 판 오를레이의 초상도 같은 일기에 적혀 있지만, 뒤러는 그것을 1520년 브뤼셀에서 목탄으로 그렸다. 20세기 중반 미술관은 이 그림을 《젊은 남자의 초상》이라는 중립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1970년대 초 드레스덴 컬렉션 연보에 에르나 브란트의 연구가 실려 모델을 폰 레젠으로 보았고, 지금 미술관은 그의 이름을 붙여 부른다.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베른하르트 폰 레젠은 안트베르펜에서 장사하던 단치히 상인 집안 출신으로 1491년에 태어나, 초상이 그려진 해인 1521년에 세상을 떠났다.

총알과 터널, 모스크바에서 보낸 10년 (1920~1956)

12. 페테르 파울 루벤스 《분수 옆의 밧세바》, 1635년경
1920년 3월 15일, 실패로 끝난 군사 쿠데타 시도인 카프 폭동 때 츠빙거 궁 가까운 드레스덴의 포스트 광장에서 시가전이 벌어져 59명이 죽었다. 총알 하나가 미술관 안으로 날아들어 이 그림에 맞았다. 1955~1968년에 드레스덴 국립 미술 컬렉션 총관장을 지낸 막스 자이데비츠가 인용한 미술관 보고서에 따르면, 총알은 밧세바의 머리카락 부분에서 패널을 뚫었다. 복원가 테오도어 크라우제가 구멍에 나무 마개를 끼우고 뒤에서 막대를 대어 패널을 보강했고, 3월 27일 미술관 관장 한스 포세는 그림이 완전히 복구되었다고 보고했다.
1919년부터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 교수였던 오스카어 코코슈카는 드레스덴 시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펴냈다. 그는 총알이 루벤스의 그림을 다치게 했다고 쓰고, 무기로 정치적 견해를 증명하려는 사람이라면 좌파든 우파든 온건파든 그런 연습은 미술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 이를테면 사격장에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베를린의 다다이스트 게오르게 그로스와 존 하트필드는 《예술 건달》이라는 팸플릿으로 그에게 답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집 대신 미술관과 궁전과 루벤스의 걸작으로 날아드는 총알이라면 기꺼이 환영한다고 썼다.
밧세바는 돌 분수 곁에 앉아 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흰 속옷 차림에 무릎에는 검은 천을 덮었고, 한쪽 맨발을 다른 발 위에 얹었다. 등 뒤의 하녀는 붉은 리본을 엮어 넣은 그녀의 밝은 금발 한 타래를 손에 들어 올리고 빗을 쥐고 있다. 왼쪽에서는 흑인 시동 소년이 접은 편지를 내밀고, 아래에서는 작은 개가 짖으며, 왼쪽 위 구석의 궁전 난간에는 그 편지를 보낸 다윗 왕이 아주 작게 그려져 팔꿈치를 괴고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루벤스는 아마 두 번째 아내 엘레나 푸르망의 아름다움에 영감을 받아 밧세바를 그렸을 것이다.

1945년 소련의 수색대가 이 그림을 찾고 있었고, 그림을 찾아낸 경위는 레오니트 볼린스키(본명 라비노비치)의 회상기 《일곱 날》에 나온다(그와 그의 이야기를 둘러싼 논쟁은 《시스티나의 성모》 장에서 다룬다). 볼린스키에 따르면 《밧세바》는 포카우렝게펠트 근처 석회암 채석장의 축축한 구역에서 실려 나왔는데, 머리카락 부분의 물감이 물집처럼 부풀어 있었고, 복원가 스테판 추라코프가 바로 그 자리에서 손상 부위에 첫 번째 박엽지 띠를 붙였다.
13. 티치아노 《세금》, 1516년경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복원 공방을 이끈 화가 파벨 코린은 1947년 아내 프라스코비야 코리나, 복원가 샤호프와 함께 티치아노의 《세금》을 복원했고, 미술관은 세 사람이 이 작업을 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포플러 패널은 축축한 전시 보관소에서 손상을 입은 채 1945년 8월 10일 다른 드레스덴 그림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복원의 역사를 연구한 크노레는 1982년, 코린이 직접 복원했거나 그의 지도 아래 복원된 그림들만으로도 미술관 하나를 꾸릴 수 있을 것이며, 그 범위는 푸시킨 미술관 소장품인 이름난 《포르나리나》에서 드레스덴의 티치아노 《세금》까지 이른다고 썼다.
티치아노는 1516년 무렵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를 위해 이 패널을 그렸는데, 젊은 베네치아 화가가 페라라를 위해 막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화가들의 전기를 쓴 바사리는 티치아노가 그리스도의 머리를 장 문짝에 그렸다고 쓰고, 1559년 페라라에서 온 편지에는 그의 그리스도 초상이 그려진 문짝 뒤의 작은 서랍들이 언급되어 있어서, 미술관은 그것이 아마 공작의 동전 컬렉션을 넣어 두던 장의 문짝이었을 것으로 본다. 1598년 페라라가 교황령에 넘어가자 데스테 가문은 컬렉션을 모데나로 옮겼고, 그림은 1746년 모데나의 그림 100점과 함께 드레스덴에 왔다(이 구입 이야기는 《거룩한 밤》에서 했다).
거의 검은 배경 앞에 두 인물이 허리 위까지만 보이게 바짝 붙어 서 있다. 붉은 주황빛 튜닉에 어두운 망토를 걸친 그리스도가 패널 왼쪽 3분의 2를 차지하고, 그의 머리 위로는 가는 금빛 광선 몇 줄만 보인다. 오른쪽에서는 머리가 벗어지고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피부에 작은 금귀걸이를 한 바리사이가 옆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얼굴 바로 앞까지 몸을 기울였다. 이야기 전체는 아래쪽 한가운데에 담겨 있다. 바리사이의 굵고 그을린 손가락이 동전을 쥐고 있고, 그리스도의 길고 창백한 손가락이 그 동전을 가리키며 가장자리에 거의 닿을 듯하다. 바리사이의 셔츠 깃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작고 밝은 글자의 서명 TICIANVS F.가 이어지는데, 이 그림은 티치아노가 이름을 다 적어 서명한 가장 이른 그림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도 다른 그림들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돌아왔고, 1957년 동독은 소련에서 그림들이 돌아온 것을 기리는 우표 연작에 이 그림을 넣었다. 그런데 1963~1964년 패널은 이번에는 드레스덴에서 다시 치료를 받아야 했고, 복원가 쿠르트 벨테의 기록 보관소에 있는 1963년 사진에는 날카로운 능선처럼 부풀어 오른 물감을 제자리에 눌러 붙이는 모습이 담겨 있다. 1964년 벨테는 잡지 《말테히니크》에 「복원가들의 골칫거리, 티치아노의 《세금》」과 「티치아노의 《세금》, 복원되다!」라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14. 라파엘로 《시스티나의 성모》, 1512~1513년
아우구스트 3세가 이 그림을 맞이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없고, 이 이야기는 주로 독일 화가 아돌프 멘첼의 1855년 파스텔화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림이 궁전에 도착했을 때, 왕은 가장 좋고 가장 밝은 자리를 자기 옥좌가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손수 옥좌를 옆으로 밀어내며 위대한 라파엘로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외쳤다. 1859년에 이 그림을 완성한 멘첼은 자기 그림의 주인공을 집안에서처럼 소탈한 아우구스트라고 묘사했고, 그가 더 숭고한 것을 위해 잠시 손수 가구를 옮겼다고 썼다.
실제로 구입은 거의 2년을 끌었고 여러 번 무산될 뻔했다. 라파엘로는 1512~1513년 피아첸차의 산 시스토 수도원 성당 주제단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는데, 미술관은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문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이 그림은 피아첸차에서 두 세기 반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림을 판 것은 빚을 갚아야 했던 산 시스토의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었다. 계약은 1753년 3월 9일 대리인 비안코니의 중개로 맺어졌고, 12월 1일 그림을 액자에서 떼어 상자에 세워서 포장했으며, 1754년 3월 1일 그림은 드레스덴 궁전에 도착했다. 산 시스토에는 피에트로 안토니오 아반치니의 복제화가 남았다. 이 그림이 유명해진 것은 드레스덴에 온 뒤인 1800년 무렵이다.


위쪽 가는 커튼 봉에 고리들이 걸려 있고, 묵직한 초록 휘장이 좌우로 젖혀져 있다. 마리아는 맨발로 구름을 밟으며 관람자를 향해 곧장 걸어오고, 그녀도 그녀 팔에 안긴 아기도 우리 눈을 똑바로 본다. 왼쪽에는 금란 제의를 입은 교황 식스토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손으로 그림 바깥을 가리키고, 금관 세 개를 두른 그의 흰 삼중관은 왼쪽 아래 구석에 놓여 있다. 오른쪽에서는 성녀 바르바라가 고개를 돌려 아래 가장자리 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마리아 뒤의 창백한 하늘은 가까이서 보면 겨우 알아볼 만한 회청색 천사 얼굴들로 가득하다. 아래쪽 좁고 어두운 띠에는 날개 달린 두 소년이 기대어 있는데, 하나는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하나는 팔짱 낀 팔 위에 턱을 얹었으며, 미술관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이 둘을 마지막에 그려 넣었다. 1803년 처음으로 두 소년만 성모와 떼어 모사되었고, 그 뒤로 둘은 온갖 물건에 복제되었다.
1939년 9월 11일 그림은 벽에서 내려져 마이센의 알브레히트성으로 옮겨졌고, 1943년 12월 15일에는 그림 크기에 맞춰 짠 합판 상자에 담겨 피르나 근처 로트베른스도르프의 버려진 철도 터널로 옮겨졌다.
1945년 5월에 일어난 일은 모스크바와 드레스덴에서 서로 다르게 이야기된다. 소련 쪽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레오니트 볼린스키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 소위 레오니트 라비노비치로, 그는 1958년 책으로 나온 회상기 《일곱 날》에 그 일을 적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5월 초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암호로 된 지도를 따라 터널을 찾아냈고, 안에는 짙은 붉은색 화물칸이 서 있었으며, 문 바로 맞은편에 천장에 닿을 만큼 높고 납작한 칠하지 않은 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에 《시스티나의 성모》가 있었다. 레프 아른시탐 감독은 이 회상기를 바탕으로 소련과 독일의 합작 영화 《다섯 낮 다섯 밤》을 만들었고, 1984~1985년에는 미하일 코르네츠키가 성모를 구출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2015년 푸시킨 미술관은 드레스덴의 그림들을 구해 낸 걸작들이라고 불렀다. 회화관이 속한 드레스덴 국립 미술 컬렉션은 2012년 그림 탄생 500주년을 맞아 소련의 성모 구출 이야기를 구출의 전설이라고 불렀다. 전 미술관 관장 베르너 슈미트는 2005년, 소련 영화는 축축한 갱도를 보여 주었지만 성모는 터널 안 공조 장치를 갖춘 화차에 있었고 축축했던 곳은 포카우렝게펠트의 채석장이었다고 반박했다. 우타 나이트하르트는 드레스덴에 남아 있던 독일 박물관 직원들이 소련 수색대에 보관소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고 쓰며, 독일 역사가들은 비밀 지도가 정말 있었는지 의심한다.
그림들은 드레스덴 근교의 필니츠 성에 모였고, 1945년 7월 소련의 전리품 수거반이 그림들을 도시 밖으로 실어 갔으며, 8월 10일 그림들은 푸시킨 미술관에 도착했다. 다른 일부는 1946년 2~3월 필니츠에서 키이우로 보내졌다. 그림들은 10년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렀고, 소련 복원가들이 그림들을 치료했다. 1955년 3월 31일 소련 각료회의가 그림들의 반환을 발표했다. 1955년 5월 2일부터 8월 말까지 푸시킨 미술관은 그 가운데 약 350점을 쉬는 날 없이 아침 7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열어 전시했고, 푸시킨 미술관의 집계로는 약 120만 명이 전시를 보았다. 8월 25일 인도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드레스덴 회화관의 자료로는 1955~1956년에 약 1200점이 드레스덴으로 돌아왔고, 러시아 자료는 1240점이라고 한다. 액자의 역사를 다루는 블로그 ‘더 프레임 블로그’에 따르면 《시스티나의 성모》는 1955년 11월 27일부터 동베를린의 국립 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1956년 6월 3일 젬퍼 건물이 다시 문을 열 때 드레스덴 회화관으로 돌아왔다.

복원가들이 걷어 낸 덧칠 (2017~2021)

15.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 1657~1659년경
파리 주재 작센 공사관 서기관 사뮈엘 드 브레는 1742년 봄 대신 브륄을 위해 카리냥 공의 컬렉션에서 그림을 사들였다. 그는 그림 30점을 샀고,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은 거래와 별도로 렘브란트의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덤으로 받았다. 그 뒤 드레스덴에서는 이 그림을 렘브란트 유파(1765), 호버르트 플링크(1783), 1826년부터는 피터르 더 호흐의 작품으로 적었고, 1859년 《뚜쟁이》의 연도를 읽어 낸 바로 그 토레뷔르거가 이 그림에서 페르메이르를 알아보았으며, 1862년 미술관 목록이 페르메이르를 작가로 올렸다.
1979년 엑스선 촬영으로 소녀의 머리 위 뒷벽에 덧칠로 가려진 큐피드 그림이 드러났다. 미술관 큐레이터 안넬리제 마이어마인첼이 1982년 그 사진을 발표했고, 그 뒤 40년 가까이 사람들은 페르메이르가 마음을 바꿔 직접 큐피드를 덮었다고 여겼다.
2017년 5월 복원가 크리스토프 쇨첼이 그림에서 누렇게 변한 바니시를 걷어 내기 시작했는데, 벽 위의 덧칠이 페르메이르의 물감과는 다르게 용제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페르메이르의 그림과 덧칠 사이에서 바니시층과 때층이 발견되었고, 미술관은 그림이 완성되고 수십 년 뒤에 큐피드가 덮였다고 결론 내렸다. 누가 언제 덮었는지는 미술관도 밝혀내지 못했다. 1742년의 구입 관련 편지들에는 큐피드가 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언급되지 않았고, 미술관은 판매 때 이미 덮여 있었다고 본다. 2018년 초 여러 미술관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덧칠을 없애기로 한 결정을 승인했고, 덧칠은 현미경을 보며 메스로 걷어 냈으며, 2021년 무렵 큐피드는 다시 벽에 나타났다. 연구자 줄러 케메니는 장작으로 불을 때고 촛불을 켜던 방에서라면 바니시와 때가 페르메이르 생전에 이미 쌓였을 수도 있다고 반박했다.
소녀는 열린 창을 향해 옆모습으로 서서 두 손으로 쥔 편지를 읽는다. 납 창살을 낀 창짝은 방 안쪽으로 활짝 열려 있고, 창 위에는 빨간 커튼이 걸쳐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마치 그림 바로 앞에 드리운 듯 커다란 노란빛 초록 휘장이 고리에 걸려 있다. 탁자 위 구겨진 터키 양탄자 위에는 복숭아와 사과를 담은 자기 접시가 엎어져 있다. 복원 뒤 소녀의 머리 위에는 액자에 든 큰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안에는 벌거벗은 금발의 큐피드가 활을 들고 서 있으며 발치에는 가면들이 놓여 있다. 미술관은 이를 거짓과 위선을 이기는 진실한 사랑의 표시로 읽는다.
같은 큐피드는 페르메이르의 다른 실내화 세 점에도 벽에 걸려 있고, 미술관은 이 그림이 화가 자신의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한다.
《뚜쟁이》, 《잠자는 비너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시스티나의 성모》는 피르나 근처 터널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는 쾨니히슈타인 요새에서, 《밧세바》는 볼린스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포카우렝게펠트 근처 채석장에서 전쟁을 견뎠다. 1945년 2월 13~14일 폭격의 밤에 드레스덴 궁전 안뜰에 놓여 있던 그림들은 불타 버렸다. 우타 나이트하르트는 소실된 그림을 174점으로 헤아리고, 그보다 오래된 집계들은 가구 운반차 안의 154점과 궁전 안의 42점을 꼽는다. 1945년 2월에는 컬렉션의 근대 부분, 지금의 근대 거장 회화관에 속한 귀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도 불타 사라졌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들
《거룩한 밤》과 같은 1746년 모데나 구입으로 들어온 그림으로는 코레조의 제단화 세 점, 곧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한 성모》,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성모》, 《성 게오르기우스의 성모》가 더 있고, 베네치아의 쿠치나 가문 저택을 위해 그려져 지금도 한데 모여 있는 베로네세의 캔버스 네 점도 있다. 아우구스트 3세는 《초콜릿 소녀》를 칭찬한 바로 그 로살바 카리에라의 파스텔화를 가장 많이 가진 수집가였다. 벨로토의 그림으로는 같은 엘베 강 우안에서 아우구스트 다리 상류 쪽을 그린 1747년 작 짝 그림도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으로는 《사스키아》 말고도 1751년 하이네켄을 통해 사들인 《가니메데스의 납치》가 있다. 뒤러의 그림은 1687년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서 작센의 쿤스트카머로 옮겨진 《드레스덴 제단화》에서도 볼 수 있고, 대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 가운데서는 독일 회화 최초의 실물 크기 전신 초상인 경건공 하인리히와 메클렌부르크의 카타리나의 한 쌍 초상을 찾아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