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영국 의회는 새로 세울 내셔널 갤러리를 위해 런던의 금융가 존 줄리어스 앵거스타인의 수집품 가운데 그림 38점을 사들였고, 갤러리는 팰맬 거리에 있던 그의 집에서 문을 열었다. 왕실 소장품은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뒤로 새 갤러리는 조금씩 채워졌다. 경매에서 그림을 사고, 유증으로 받고, 공개 모금으로 돈을 모으고, 의회에 특별 보조금을 청했으며, 어떤 그림은 살지 말지를 두고 몇 년씩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여기 고른 스물다섯 점을 따라가면 국가의 첫 구입에서 개인의 기증, 경매, 유증, 공개 모금, 오늘날의 기금에 이르기까지 소장품이 얼마나 여러 길로 모였는지 보인다. 갤러리 소장품 목록에 1번으로 올라 있는 제단화로 시작해, 2019년 도서관과 학교, 동네 병원 대기실, 여성 교도소를 돌았던 자화상으로 끝낸다.

갤러리의 시작, 1824~1856년

나사로의 부활
나사로의 부활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17, 내셔널 갤러리

처음 30년 동안 갤러리에는 관장이 아예 없었다. 소장품은 기증과 유증, 그리고 이사회가 결정한 개별 구입으로 늘어났다.

1.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나사로의 부활》, 1517~1519년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 훗날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1516년 말에 같은 크기의 제단화 두 점을 주문했다. 자기 교구인 남프랑스 나르본의 대성당에 걸 그림이었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라파엘로에게, 《나사로의 부활》은 미켈란젤로의 친구인 베네치아 화가 세바스티아노 루치아니에게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와 겨루는 세바스티아노를 편들어 나사로의 형상을 위한 소묘를 그려 주었고, 아마 그리스도의 소묘도 그려 주었을 것이다. 세바스티아노는 라파엘로가 자기 그림을 끝내기 전에는 이 패널을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마무리를 미뤘다.

나사로는 오른쪽 아래 무덤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머리는 아직 수의 천에 감겨 있고, 한 손으로 가슴을 덮은 천을 잡아 뜯으며, 그림 맨 가장자리의 한 남자가 그의 다리에 감긴 흰 붕대를 풀고 있다. 나사로의 몸은 묵직하고 근육질이며 잿빛 도는 갈색인데,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 그리스도는 중앙에서 조금 왼쪽에 서서 그림 전체를 가로질러 팔을 뻗고 손가락으로 나사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발치에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있고, 그 뒤에서 붉은 망토를 두른 여인이 두 손바닥을 내밀며 몸을 뒤로 뺀다. 요한복음에서 시신에서 벌써 냄새가 난다고 일렀던 마르타인 듯하다. 어두운 띠가 지나가는 하늘은 거의 밤처럼 보이지만, 왼쪽의 폐허와 아치들은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고 있다. 세바스티아노는 짙은 푸른색을 의도했으나, 굵게 간 남동석이 세월이 지나면서 기름 속에서 어두워졌다.

1520년 4월, 라파엘로가 죽고 일주일 남짓 지났을 때 두 그림은 바티칸에 나란히 전시되었고, 세바스티아노는 미켈란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다”고 편지를 썼다. 2017년의 적외선 촬영으로, 구도는 세바스티아노가 스스로 짰고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끼어들어 이미 패널에 그려진 나사로를 소묘로 고쳐 그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로마에 남았고, 나르본으로는 《나사로의 부활》만 보내졌다.

나사로의 부활
나사로의 부활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17, 내셔널 갤러리
그리스도의 변용
그리스도의 변용라파엘로, 1518, 바티칸 박물관

1722년 프랑스의 섭정 오를레앙 공 필리프가 대성당에서 이 그림을 사들였다. 원래 액자의 아랫부분,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프레델라는 나르본에 남아 있었고, 2017년 갤러리는 그것을 나무에 새겨 본뜬 복제품을 《나사로의 부활》의 새 액자에 끼워 넣었다. 팔레루아얄에서 그림은 패널에서 캔버스로 옮겨졌다. 1793년 오를레앙 컬렉션의 이탈리아 그림들이 팔리려고 런던으로 실려 왔고, 1798년 앵거스타인은 《나사로의 부활》에 3500기니를 치렀다. 같은 컬렉션에서 나온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의 그림 여럿보다 비싼 값이었다. 1824년 이 그림은 그의 다른 그림들과 함께 국가 소유가 되었고, 갤러리 소장품 번호 1번을 받았다.

2. 카라바조 《엠마오의 저녁 식사》, 1601년

과일 바구니가 식탁 맨 가장자리에 놓여 곧 떨어질 듯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바구니에는 검은 포도와 청포도, 갈라진 석류, 사과, 배, 무화과가 담겨 있고, 흰 식탁보에 드리운 바구니의 날카로운 그림자에서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의 윤곽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저녁 식사에 청했고, 그가 빵을 축복할 때 부활한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았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를 수염 없는 젊은이로 그렸다. 왼쪽 제자는 팔꿈치가 찢어진 초록 윗옷 차림으로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반쯤 일어서고, 오른쪽 제자는 가슴에 순례자의 조가비를 달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여관 주인은 그 곁에 엄지를 허리띠에 걸고 서서 담담하게 바라본다.

엠마오의 저녁 식사
엠마오의 저녁 식사카라바조, 1601, 내셔널 갤러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얀 반 에이크, 1434, 내셔널 갤러리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로마 귀족 치리아코 마테이로, 카라바조는 당시 그의 집에 살고 있었다. 1672년 화가 전기 작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는 카라바조가 예법을 어겼다고 나무랐다. 여관 주인이 모자를 쓴 채 그리스도의 시중을 들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는 부활절 무렵에 익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림은 보르게세 컬렉션에서 나와 1801년 영국으로 건너왔고, 1839년 버넌 경이 갤러리에 기증했다. 1606년 살인을 저지르고 로마에서 달아난 카라바조는 같은 장면을 한 번 더 그렸다. 그 그림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에 있는데, 더 조용하고 어두우며, 그리스도는 더 나이 들고 수염이 있고, 식탁은 소박하게 차려져 있다.

3.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뒷벽 한가운데에 둥글고 볼록한 거울이 걸려 있고, 거울 테에는 아주 작은 원형 그림 열 개가 박혀 있다. 거울에는 반대편에서 본 방 전체가 비치는데, 부부의 뒷모습과 함께 문간에 선 작은 두 인물이 보인다. 하나는 파란 옷, 하나는 빨간 옷 차림이다. 거울 위 벽에는 멋을 부린 필체로 “요하네스 데 에이크 푸이트 힉 1434”, 곧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라는 라틴어 글귀가 적혀 있다. 놋쇠 샹들리에에는 초 하나만 타고 나머지 촛대는 비어 있다. 신발 두 켤레는 방의 서로 다른 끝에 놓여 있어서, 왼쪽 아래에는 끈 달린 밝은 색 나막신이, 안쪽 긴 의자 밑에는 빨간 실내화가 있다. 여인은 초록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배에 대고 있어서 오랫동안 임신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반 에이크의 드레스덴 세 폭 제단화 속 동정 순교자 성녀 카타리나도 똑같은 자세로 서 있다.

1934년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이 부부를 조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와 조반나 체나미로 보고, 그림을 결혼 증명서로 읽었다. 그 뒤 부르고뉴 문서가 나오면서 이 부부는 반 에이크가 죽고 6년이 지난 1447년에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은 남자를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로, 여자를 아마 그의 두 번째 아내로 보는데, 이 아내에 관한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아르놀피니라는 성 자체는 1516년의 재산 목록에서 되살려 냈다. 목록에는 이 패널이 ‘방 안의 에르눌 르 팽과 그 아내’로 적혀 있다.

63세의 자화상
63세의 자화상렘브란트, 1669, 내셔널 갤러리

패널은 스코틀랜드 장교 제임스 헤이의 손에 들어갔다. 1816년 그는 초상화가 토머스 로런스를 통해 이 그림을 섭정 왕세자에게 팔겠다고 제안했고, 왕세자는 1년 반 동안 그림을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었다. 그림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한 헤이의 이야기는 미심쩍다. 그는 워털루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브뤼셀에서 샀다고 했다. 그보다 흔히 나오는 추측은 1813년 비토리아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영국 병사들은 스페인 왕실 소장품의 그림을 싣고 가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수송대를 약탈했다. 1842년 갤러리는 헤이에게서 이 그림을 600기니에 샀고, 이 그림은 소장품 가운데 첫 초기 네덜란드 회화가 되었다.

4. 렘브란트 《63세의 자화상》, 1669년

렘브란트는 생애 마지막 해, 아들 티투스가 죽고 몇 달 뒤에 이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어깨 너머로 보는 사람을 바라보고, 짙은 붉은색 웃옷은 그늘 속으로 가라앉으며, 빛은 거의 얼굴과 모자의 흰 띠에만 떨어진다. 얼굴에는 물감이 두껍게 뭉쳐 올라 있고, 오른쪽 눈 밑의 처진 살은 물감을 듬뿍 묻힌 붓으로 한 번 휘감아 그렸다. 캔버스의 왼쪽 가장자리는 언젠가 잘려 나갔고, 왼쪽 아래 구석의 서명에서 남은 것은 알파벳 ‘티’ 한 글자뿐이다.

엑스선 촬영에서 두 군데 고친 흔적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모자가 더 크고 온통 하얀, 제대로 된 화가 모자였고, 두 손은 붓을 쥐고 있어서 초상은 일하는 화가의 모습이었다. 그 뒤 렘브란트는 모자를 줄이고 붓을 덧칠해 지웠으며 두 손을 모았다. 붓이 사라지자 그림에는 렘브란트의 직업을 곧바로 알려 주는 것이 남지 않았고, 이제는 거의 모든 시선이 얼굴로 간다. 한 세기 넘게 이 그림은 서리에 있던 미들턴 자작 가문의 영지에 걸려 있었고, 1851년 갤러리는 이 가문의 소장품 매각에서 그림을 샀다.

5.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1839년

1838년 8월 해군성은 낡은 전열함 테메레르호를 경매에 부쳐 선박 해체업자 존 비트슨에게 5530파운드에 팔았다. ‘테메레르’는 ‘대담한 자’라는 뜻이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테메레르호는 넬슨의 기함 빅토리호를 도우러 나섰고, 1820년부터는 시어니스에 정박해 식량을 쌓아 두는 창고선이 되어 있었다. 9월에 예인선 두 척이 이 배를 템스강 상류 쪽, 로더하이드에 있는 비트슨의 조선소로 끌고 갔다.

터너는 예인선 두 척 대신 한 척을 그렸고, 그 무렵에는 이미 떼어 냈을 가능성이 큰 돛대를 배에 되돌려 주었다. 그의 테메레르호는 창백해서 거의 유령처럼 보이고, 그 앞의 예인선은 낮고 검으며, 높은 굴뚝에서 연기와 불똥이 날린다. 그림 속 단 하나의 깃발, 작고 흰 깃발은 예인선에 달려 있다. 1839년 왕립 미술원에 이 그림이 전시될 때는 시인 토머스 캠벨의 시구가 함께 붙었는데, 더는 그 배의 것이 아닌 깃발을 노래한 구절이었다. 오른쪽에서는 해가 물속으로 지고, 왼쪽 위 구석에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걸려 있다. 강을 거슬러 로더하이드로 가는 배는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해넘이는 배의 앞쪽에 있어야 했고, 예인선들이 조선소에 닿은 것은 오후 1시 무렵이었다.

전함 테메레르
전함 테메레르J. M. W. 터너, 1839, 내셔널 갤러리

터너가 그때 영국에 있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8월과 9월이면 그는 대개 대륙을 여행했고, 그가 배 위에서 스케치를 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생겼다. 그는 이 그림을 끝내 팔지 않았고, 1845년 무렵에는 “내 귀염둥이”라 부르며 다시 빌려주기를 거절했다. 터너는 완성한 그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남겼다. 1851년 그가 죽자 친척들이 유언에 이의를 제기했고, 1856년에야 형평법 법원이 합의를 승인했다. 그 합의에 따라 돈은 친척들에게 가고, 그가 손수 그린 작품 전부, 곧 유화 300점 가까이와 종이 작품 약 3만 점이 국가로 넘어왔다.

이스트레이크가 유럽을 돌며 그림을 사다, 1857~1861년

갤러리의 첫 관장은 화가 찰스 이스트레이크였다. 그는 기증을 기다리는 대신 이탈리아를 돌며 그림을 한 점 한 점 사들였고, 갤러리의 순회 대리인 오토 뮌들러가 미리 그림을 찾아 두었다.

6. 파올로 베로네세 《알렉산드로스 앞의 다리우스 가족》, 1565~1567년

알렉산드로스 앞의 다리우스 가족
알렉산드로스 앞의 다리우스 가족파올로 베로네세, 1565, 내셔널 갤러리

1857년 여름, 그림이 아직 런던에 오지도 않았을 때 엘코 경은 하원에서 이 그림을 “이류 화가의 이류 견본”이라고 불렀다. 이스트레이크는 그해 봄 베네치아에서 비토레 피사니 백작에게 약 1만 2280파운드를 주고 이 그림을 샀다. 엘코는 뮌들러가 값을 부풀린다고 비난했고, 다른 의원은 갤러리가 모작을 샀다고 주장했다. 비평가 존 러스킨은 《타임스》에 글을 실어 이 구입을 옹호했고, 1858년 1월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이 그림을 보러 일부러 찾아왔다.

이야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애에서 나왔다. 이소스 전투가 끝난 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어머니는 알렉산드로스의 벗 헤파이스티온을 왕으로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실수를 용서하며 헤파이스티온도 알렉산드로스라고 말했다. 가족은 중앙에서 조금 왼쪽에 무릎을 꿇고 있고, 어머니가 우리 쪽에 가장 가깝게, 넓은 흰 담비 모피 깃이 달린 커다란 어두운 망토 차림으로 등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 중앙에서는 장밋빛 도는 붉은 옷의 젊은이가 한 손으로 여인들을 달래며 다른 손으로 뒤쪽의 일행을 가리킨다. 대개 이 젊은이를 알렉산드로스로, 검은 갑옷에 주황 망토를 두른 남자를 헤파이스티온으로 본다. 공주들 머리 위, 왼쪽의 돌출부에는 사슬에 매인 원숭이가 앉아 있다.

1786년 베네치아의 피사니 궁에서 이 그림을 본 괴테는 집안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는 그 이야기가 사랑스럽지만 사실 같지는 않다고 여겼다. 베로네세가 궂은 날씨를 피해 피사니 집에 머무는 동안 몰래 이 그림을 그려 둘둘 말아 침대 밑에 숨겨 두고는, 환대의 값으로 주인들에게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알렉산드로스 앞의 다리우스 가족
알렉산드로스 앞의 다리우스 가족파올로 베로네세, 1565, 내셔널 갤러리

1858년 엘코와 그 지지자들은 하원에서 순회 대리인 자리를 없애는 결의를 통과시켰고, 뮌들러는 일자리를 잃었다.

7.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38~1440년경

1432년 피렌체군과 시에나군이 맞붙은 산 로마노 전투를 그린 큰 패널 세 점은 피렌체 사람 리오나르도 바르톨리니 살림베니의 집에 걸려 있었다. 그가 죽은 뒤 로렌초 데 메디치가 이 패널들을 차지했다. 상속자 한 사람은 자기 몫을 합법적으로 넘겼지만, 그 형제 다미아노의 몫은 1484년 무렵 주인의 뜻을 거슬러 집 밖으로 실려 나갔다. 패널들은 높은 곳에 걸려 있었고 윗부분이 둥글었다. 메디치궁에 걸기 위해 윗부분을 잘라 내고 모서리에는 나무를 덧대어, 세 그림이 한 줄로 걸리게 했다. 지금 이 패널들은 런던과 우피치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에 나뉘어 있다.

산 로마노 전투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
산 로마노 전투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파올로 우첼로, 1439, 내셔널 갤러리
비너스, 큐피드, 우매함과 시간
비너스, 큐피드, 우매함과 시간브론치노, 1545, 내셔널 갤러리

런던 패널 한가운데에서 피렌체의 용병 대장 니콜로 다 톨렌티노가 뒷발로 선 흰 말을 타고 지휘봉을 치켜든 채 돌격을 이끈다. 투구는 쓰지 않았고, 금빛 무늬가 들어간 커다란 붉은 모자를 썼다. 말굽 아래 분홍빛 땅에는 부러진 창들이 안쪽으로 뻗어 나가는 반듯한 격자를 이루며 놓여 있고, 왼쪽 아래 구석에 얼굴을 땅에 박고 쓰러진 기사만 반대 방향으로 단축되어 있다. 우첼로의 색은 많이 변했다. 마구는 선명한 주홍색이었다가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어두워졌고, 갑옷에는 진짜 은을 입혔는데 그 은이 갈색 도는 회색이 되었으며, 장미가 핀 초록 생울타리는 거의 검게 변했다. 위쪽 두 모서리의 어두운 나뭇잎은 바로 그 덧댄 부분에 그려져 있다.

이스트레이크는 1857년 피렌체의 화상들에게서 런던 패널을 샀다. 1598년 무렵 피렌체에서는 이미 이 전투를 잊었고, 그해의 재산 목록은 세 패널을 ‘옛 마상 시합을 그린 큰 그림 세 점’이라고 적었다.

8. 브론치노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 1545년경

비너스는 그림 한가운데에 보는 사람 쪽으로 몸을 돌리고 무릎을 꿇은 채, 어깨 너머로 큐피드에게 입을 맞춘다. 브론치노의 큐피드는 벌써 사춘기 소년이다. 그는 분홍 방석 위에 등을 보이고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비너스의 젖가슴을 쥐고, 다른 손은 그녀의 관 쪽으로 뻗는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리스도의 세례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48, 내셔널 갤러리

1860년 이스트레이크가 파리에서 이 그림을 사자 곧바로 그림의 두 부분이 덧칠로 가려졌다. 복원가 라파엘레 핀티가 십중팔구 이스트레이크의 지시를 받아, 입술 사이로 보이던 비너스의 혀와 큐피드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젖꼭지를 덧칠해 지웠다. 그림은 그 상태로 거의 한 세기 동안 갤러리에 걸려 있었고, 덧칠은 1958년 세척 때에야 벗겨졌다.

그러는 사이 비너스는 큐피드의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고, 다른 손에는 황금 사과를 들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웃는 소년이 한 줌의 장미를 던지려고 팔을 치켜들었고, 그 뒤에서 초록 옷의 소녀가 벌집을 내밀고 있는데, 그녀의 옷자락 아래로 비늘 덮인 몸통과 사자 발, 뱀 꼬리가 보인다. 등에 모래시계를 진 대머리에 수염 난 노인, 곧 시간이 그림 위쪽 전체에 걸쳐 팔을 펼치고 있다. 왼쪽 그늘 속에서는 잿빛 도는 초록색 인물이 머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른다. 이 인물은 오랫동안 질투로 불렸는데, 1986년에 매독의 증상을 보인다는 해석이 나왔다.

바사리에 따르면 브론치노는 벌거벗은 비너스와 그녀에게 입 맞추는 큐피드를 그렸고, 이 그림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아마 바로 이 그림을 두고 한 말일 것이고, 그림을 보낸 사람은 피렌체 공작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였을 것이다.

9.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세례》, 1440년대

이스트레이크는 1858년 피에로의 고향 산세폴크로의 대성당 성구 보관실에서 이 패널을 보고 “햇볕과 습기로 거의 망가졌다”고 판단해 사지 않았다. 1859년 대성당 참사회가 패널을 팔았고, 그림은 철도 금융가 매슈 우지엘리의 소장품이 되었다. 1861년 우지엘리가 죽은 뒤 이스트레이크는 매각 경매에서 《그리스도의 세례》를 개인적으로 샀고, 이틀쯤 지나 갤러리에 넘기기로 했다.

그리스도는 정확히 한가운데에 정면을 향해 서서,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옆모습으로 얕은 그릇을 들어 올리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그리스도의 정수리에 떨어진다. 그릇 바로 위에는 흰 비둘기가 날개를 납작하게 펴고 떠 있는데, 그 모양이 하늘의 납작한 구름과 닮았다. 그리스도 왼쪽의 나무줄기는 매끈하고 밝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창백한 빛깔이다. 나무 뒤에는 천사 셋이 서 있고, 그중 둘은 손을 잡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한 젊은이가 몸을 숙여 셔츠를 머리 위로 벗고 있고, 그 뒤 잔잔한 물에는 강가에 선 남자들의 빨강, 파랑, 황토색 옷이 거꾸로 비친다. 강물은 그리스도의 발끝까지 와서 멈추고, 그리스도와 요한은 마른 갈색 땅 띠 위에 서 있다.

경매와 개인 소장품, 1874~1890년

이스트레이크 이후 갤러리는 점점 더 자주 경매에서, 그리고 그림을 팔아 치우던 옛 소장품 상속자들에게서 그림을 샀다. 때로는 개인 후원자들이 국가 예산에 돈을 보탰다.

10.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와 마르스》, 1485년경

비너스와 마르스
비너스와 마르스산드로 보티첼리, 1485, 내셔널 갤러리

마르스는 깊이 잠들어 있어서, 사티로스 하나가 그의 귀에 소라고둥을 대고 불어 대는데도 깨지 않는다. 그는 허리에 흰 천 하나만 두른 알몸으로 고개를 젖히고 누워 있고, 맞은편의 비너스는 깨어 있다. 금빛 테를 두른 흰 드레스 차림의 비너스는 차분하게 그를 바라본다. 다른 사티로스는 그의 투구 속에 머리를 통째로 들이밀었고, 세 번째 사티로스는 오른쪽 아래 구석의 빈 갑옷 속에 들어가 보는 사람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오른쪽 위 구석, 마르스의 머리 곁 나무 구멍에는 말벌 집이 있고, 말벌들이 그의 얼굴 주위를 맴돈다.

보티첼리는 무기를 가지고 노는 사티로스들을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에게서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루키아노스는 사라진 고대 그림 하나를 묘사했는데, 그 그림에서는 어린 큐피드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창과 갑옷을 가지고 놀았다. 이렇게 길쭉한 패널은 침실 벽 판재에 끼워 넣었고, 아마 결혼에 맞춰 만들었을 것이다. 역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말벌이 주문자인 피렌체의 베스푸치 가문을 암시한다고 추측했다. 이탈리아어로 말벌을 ‘베스파’라고 하고, 벌집이 그려진 자리는 결혼 패널에서 보통 가문의 문장을 넣던 곳이기 때문이다.

1874년 갤러리는 수집가 알렉산더 바커의 소장품을 처분하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그림을 샀다.

11.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암굴의 성모》, 1491~1508년경

밀라노의 무염시태 형제회는 1483년 레오나르도, 그리고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에반젤리스타 데 프레디스 형제와 이 그림의 계약을 맺었다.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 성당에 있던 형제회 예배당에는 조각하고 금박을 입힌 제단 틀이 이미 서 있었고, 거기에 패널 세 점을 끼워 넣어 가운데에는 성모를, 양옆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을 둘 계획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첫 성모를 1480년대 중반까지 완성했는데, 그것이 지금 루브르에 있는 《암굴의 성모》다. 그 뒤 화가들과 형제회는 돈 문제로 다투었고, 내셔널 갤러리의 설명에 따르면 1491년 무렵 첫 그림은 알려지지 않은 구매자에게 팔렸으며, 예배당을 위해 두 번째 그림, 곧 런던의 그림이 시작되었다. 1501년부터 1506년까지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살았고, 1506년 이 패널은 미완성 판정을 받았으며, 그는 1508년에 마지막 보수를 받았다.

루브르의 그림에서 오른쪽 천사는 손가락으로 어린 요한을 가리키며 보는 사람을 바라보지만, 런던의 그림에서는 눈을 내리깔고 아기 예수의 등을 받쳐 줄 뿐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에 가느다란 금빛 후광이 나타나고, 요한은 긴 막대 끝에 달린 가느다란 금빛 십자가를 들고 있다. 2004년 적외선 촬영은 이 구도 아래에서 버려진 첫 구상을 찾아냈다. 성모가 경배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은 구상이었고, 2019년 새로 찍은 사진은 그것을 더 자세히 보여 주었다.

암굴의 성모
암굴의 성모레오나르도 다 빈치, 1484, 루브르 박물관
바위 위의 성모
바위 위의 성모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4, 내셔널 갤러리

형제회는 황제 요제프 2세 때 해산되었고, 18세기 말 스코틀랜드의 화가이자 화상 개빈 해밀턴이 그림을 사서 영국으로 가져갔으며, 1880년 갤러리는 서퍽 백작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같은 제단의 천사 패널들은 1898년 밀라노에서 따로 샀다. 레오나르도는 이 패널을 마무리하던 무렵 성 안나를 그린 커다란 밑그림, 곧 카르통 작업도 하고 있었는데, 그 카르통도 지금은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이다.

패널은 고르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오른쪽 위 바위 틈새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마지막 작업 때 거칠게 칠했고, 물감은 위쪽 가장자리의 곡선을 따라 끊겨 있어서, 그때 패널은 이미 액자에 끼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발 옆 성모의 파란 망토에는 갈색 얼룩이 남아 있는데, 레오나르도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수정 흔적이다.

12.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년

‘건초 마차’라는 제목은 컨스터블의 친구 존 피셔에게서 나왔다. 1821년 피셔가 편지에서 “건초 마차”는 잘 되어 가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왕립 미술원에서 이 그림은 《풍경, 정오》라는 제목으로 걸렸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1824년 컨스터블은 다른 그림 두 점과 함께 이 그림을 화상 존 애로스미스에게 250파운드에 넘겼고, 애로스미스는 그림들을 파리로 가져갔으며, 살롱에서 《건초 마차》는 샤를 10세에게서 금메달을 받았다.

건초 마차
건초 마차존 컨스터블, 1821, 내셔널 갤러리

왼쪽에는 분홍 기와지붕을 얹은 농부 윌리 로트의 집이 있고, 그 옆 물가에는 아주 작은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허리를 굽히고 있다. 얕은 물방앗간 연못 한가운데에는 빈 마차가 서 있다. 커다란 두 바퀴는 반쯤 물에 잠겼고, 마차를 끄는 검은 말 세 마리의 목사리에 달린 붉은 술 장식은 그림에서 거의 유일한 붉은색이다. 가까운 둑에서는 갈색 얼룩이 있는 흰 개가 마차를 바라본다. 컨스터블은 나뭇잎과 물 위의 반짝임을 흰 물감으로 톡톡 찍어 나타냈고, 비평가들은 이 흰 점들을 눈송이에 빗대어 ‘컨스터블의 눈’이라 불렀다.

프랑스에서 이 그림은 14년가량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친 뒤 영국으로 돌아왔고, 1866년 모자 제조업으로 모은 재산의 상속자 헨리 본의 것이 되었다. 1886년 본은 이 그림을 갤러리에 기증했다.

대사들
대사들소 한스 홀바인, 1533, 내셔널 갤러리

13. 소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갤러리는 1890년 이 패널을 사면서도 홀바인이 누구를 그렸는지 몰랐다. 두 남자는 영국 궁정 신하로, 심지어 팔츠 백작 두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1895년 연구자 메리 허비가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밝힌 17세기 문서를 찾아냈다. 왼쪽은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이고, 오른쪽은 1533년 봄 그를 찾아왔던 라보르의 주교 조르주 드 셀브다.

그해는 헨리 8세가 로마와 결별하고 앤 불린이 왕비로 대관한 해였다. 두 대사 사이 아래 선반에는 줄 하나가 끊어진 류트와 독일어 찬송가집이 놓여 있다. 찬송가집은 루터의 찬송가 두 편이 실린 면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류트와 찬송가집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에 대한 암시로 읽는다. 위 선반에는 천구의와 해시계, 그 밖에 하늘과 시간을 관측하는 기구들이 놓여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올바른 시각을 가리킬 수 없게 놓여 있다.

아래쪽 바닥을 가로질러 길쭉한 회백색 얼룩이 뻗어 있다. 정면에서 보면 길게 늘인 뼈처럼 보이지만, 오른쪽 옆에서 그림 표면에 바싹 붙어서 보면 해골로 바뀐다. 지금의 액자는 1996년에 만들 때 옆에 서기 편하도록 일부러 테를 얕게 짰다. 왼쪽 위 구석, 초록 휘장 주름에 거의 가려진 곳에 작은 은 십자고상이 걸려 있다.

래드너 백작은 이 패널을 다른 그림 두 점과 함께 5만 5000파운드에 팔았다. 금액의 절반 가까이는 정부가 댔고, 나머지는 개인 기증자 세 사람이 냈다.

대사들
대사들소 한스 홀바인, 1533, 내셔널 갤러리

평소 예산으로 모자랄 때, 1906~1929년

20세기 초가 되자 옛 거장들의 그림값이 올랐고, 갤러리는 점점 더 자주 엄청난 부자인 미국 수집가들과 경쟁해야 했다. 이제 큰 구입에는 공개 모금이나 재무부의 특별 보조금, 또는 민간 기금이 필요했다.

14. 디에고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47~1651년경

1914년 3월 10일 여성 참정권 운동가 메리 리처드슨이 이 그림 앞의 유리를 깨고, 윗옷 속에 숨겨 온 작은 손도끼로 캔버스를 여러 번 내리쳤다. 바로 전날 글래스고에서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체포되었고, 리처드슨은 팽크허스트 부인을 파멸시키는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신화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을 없애려 했다고 밝혔다. 《타임스》는 칼자국을 예닐곱 개로 셌고, 가장 심한 자국은 목과 어깨에 났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디에고 벨라스케스, 1647, 내셔널 갤러리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소 한스 홀바인, 1538, 내셔널 갤러리

비너스는 짙은 청회색 공단 위에 등을 보이고 누워 있다. 머리는 오른쪽, 발은 왼쪽 가장자리에 있고, 어깨에서 발뒤꿈치까지 몸 전체가 끊기지 않는 한 줄기 선으로 이어진다. 무릎을 꿇은 큐피드가 그녀 앞에 검은 테 거울을 들고 있고, 거울 테에는 분홍 리본이 늘어져 있다. 거울 속 얼굴은 흐릿하고 보는 사람을 향해 있는데, 비너스가 이렇게 누워 있다면 거울에는 전혀 다른 것이 비쳐야 한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여성 누드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이 그림 하나뿐이다.

그림은 스페인의 여러 소장품을 거쳐 1813년 영국에 들어왔고, 요크셔의 로커비 파크 저택에 걸려 있었다. 영국에서 이 그림을 ‘로커비의 비너스’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05년 상속자는 상속세를 내려고 그림을 애그뉴 화랑에 팔았다. 애그뉴는 본드 스트리트에 그림을 내걸었고, 신문들은 “우리 나라의 비너스”를 지키자는 캠페인을 벌였으며, 2년 전에 세워진 국립 미술품 수집 기금이 모금을 열어 4만 5000파운드를 모은 뒤 1906년 그림을 갤러리에 기증했다.

2023년 11월 기후 단체 ‘저스트 스톱 오일’의 활동가 두 사람이 망치로 유리를 내리치고는 1914년의 행동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리 파편이 물감층을 조금 손상시켰고, 몇 주 뒤 그림은 다시 벽에 걸렸다.

15. 소 한스 홀바인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1538년

덴마크의 크리스티나가 1538년 3월 12일 브뤼셀에서 세 시간 동안 홀바인의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는 16세였다. 폐위된 덴마크 왕의 딸이자 황제 카를 5세의 조카딸인 그녀는 13세에 밀라노 공작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여전히 상복을 입고 있었다. 얼마 전 아내 제인 시모어를 잃은 헨리 8세는 네 번째 아내를 찾고 있었고, 신붓감 가운데 한 사람을 그려 오라고 궁정 화가를 보냈다. 홀바인이 가져온 습작은 “왕의 마음에 더없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실물 크기로 온몸을 드러내고 서 있다. 홀바인이 그린 여성 초상 가운데 이런 형식으로 남은 것은 이 그림 하나뿐이다. 그녀 뒤에는 아무 장식 없는 청록색 벽이 있고, 인물의 그림자가 그 벽 왼쪽으로 드리운다. 크리스티나는 소매가 커다랗고 안에 갈색 모피를 댄 검은 공단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을 가리는 꼭 맞는 검은 두건을 썼다. 패널 전체에서 밝은 곳은 얼굴과 두 손뿐이다. 두 손은 허리께에 모아 가죽 장갑을 쥐고 있고, 왼손 약지에는 붉은 보석 반지가 끼워져 있으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 있다.

혼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헨리는 초상화를 곁에 두었다. 초상화는 나중에 노퍽 공작 가문으로 넘어갔고, 1909년 15대 공작이 이를 콜나기 화랑에 팔았다. 콜나기는 이 그림을 미국 수집가 헨리 클레이 프릭에게 제안하면서, 6월 1일까지는 갤러리가 같은 값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남겨 두었다. 재무부는 보조금을 약속했고, 국립 미술품 수집 기금이 모금을 열었으며, 존 싱어 사전트와 버나드 쇼, 국왕 에드워드 7세까지 돈을 냈는데도 5월 말까지 돈이 모자랐다. 마지막 순간에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여인이 모자란 금액을 채웠다. 그녀는 독일의 한 온천 휴양지에서 편지를 보냈고, 돈은 마지막 날인 6월 1일에 도착했으며, 갤러리 관장 찰스 홀로이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한다. 모금 과정을 지켜본 헨리 제임스는 뒤에 이 이야기로 희곡을 쓰고, 이어 소설을 썼다.

16.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1868년경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에두아르 마네, 1867, 내셔널 갤러리

오트밀 빛깔의 커다란 빈 캔버스에 유화 조각 네 개가 붙어 있고, 화면의 3분의 1가량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천이다. 가운데에는 검은 제복에 흰 혁대, 흰 각반 차림의 총살대 병사들이 등을 보인 채 소총을 어깨에 대고 왼쪽을 겨눈다. 왼쪽 위에는 미라몬 장군의 머리가 담긴 조각이 따로 있고, 그 아래 좁은 띠 조각에는 화약 연기 속의 흰 셔츠와 맞잡은 두 손이 있다. 그중 한 손은 미라몬의 손을 잡은 막시밀리안의 왼손인 듯하며, 캔버스에 황제의 몸에서 남은 것은 그 손 하나뿐이다. 오른쪽에는 붉은 케피 모자를 쓴 하사관이 따로 떨어져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마지막 한 발을 위해 태연히 공이치기를 당긴다. 세 번째 사형수 메히아 장군이 서 있던 자리에는 빈 천만 남아 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 자리에 앉혔고, 1867년 막시밀리안은 케레타로에서 장군 두 사람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 처형에 분개한 마네는 그 장면을 네 가지 판본으로 그렸다. 런던의 캔버스는 두 번째 판본으로, 마네는 1868년 무렵 이 그림을 그리다 말았다. 마네가 죽은 뒤 그의 미망인이 낳은 아들 레옹 렌호프가 캔버스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따로따로 팔았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전한 이야기는 확인할 길이 없는데, 그에 따르면 렌호프는 막시밀리안의 머리 부분을 불쏘시개로 썼다.

해바라기
해바라기빈센트 반 고흐, 1888, 내셔널 갤러리

에드가르 드가가 이 조각들을 사 모아 원래 크기의 캔버스 한 장에 붙이고, 사라진 조각들의 자리는 비워 두었다. 드가는 1917년에 죽었고, 1918년 3월 그의 소장품이 파리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그 무렵 파리에는 독일군의 장거리포가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 재무부에서 일하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이 경매를 위해 갤러리에 특별 보조금을 주자고 제안했고, 갤러리 관장 찰스 홈스는 포격을 받는 파리로 그림을 사러 갔다.

갤러리에서는 처음에 이 조각들을 드가의 캔버스에서 떼어 내 각각 별개의 그림으로 걸었고, 20세기 말에 와서야 드가가 배치한 순서대로 다시 한데 모았다.

17.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1888년 8월 아를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린 네 번째 그림을 “노란 배경에 꽃 14송이를 꽂은 꽃다발”이라고 적었다. 캔버스에는 꽃이 15송이 있다. 왼쪽 아래로 거의 탁자까지 늘어진, 길게 휜 줄기의 작은 시든 꽃은 나중에 덧그린 것으로 보인다.

노란 도기 화병이 노란 벽 앞 노란 탁자 한가운데에 놓여 있고, 이 노란색을 깨뜨리는 것은 초록 줄기와 주황빛 도는 붉은 꽃심, 그리고 파란 선들뿐이다. 파란 선은 탁자 가장자리에 하나, 화병에 둘 그어져 있다. 화병 위쪽에는 파란색으로 ‘빈센트’라고 쓰여 있다. 어떤 꽃에는 아직 꽃잎이 뻗쳐 있고, 어떤 꽃은 꽃잎이 다 떨어져 두꺼운 붓질로 빚어 올린 볼록한 꽃판만 남았으며, 또 어떤 꽃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거나 고개를 떨구었다. 배경은 짧은 붓질을 엇갈려 칠해 마치 엮어 짠 것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폴 고갱이 올 날에 맞춰 작업실을 꾸미면서 이 그림을 고갱의 침실에 걸었다. 1889년 1월, 두 사람이 다투고 빈센트가 병원에 다녀온 뒤 고갱이 이 그림을 달라고 하자,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이 해바라기는 단연코 내가 가지겠다. 그는 이미 두 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 대신 그는 이 그림을 한 점 더 그렸고, 그 그림은 지금 암스테르담에 있다.

그림은 30년 넘게 테오의 미망인 요하나 반 고흐봉어의 집에 걸려 있었다. 1924년, 산업가 새뮤얼 코톨드가 현대 외국 회화를 사들이려고 세운 기금의 이사들이 런던의 화상을 통해 이 그림을 샀다.

18. 조르주 쇠라 《아니에르의 물놀이하는 사람들》, 1884년

아니에르의 물놀이하는 사람들
아니에르의 물놀이하는 사람들조르주 쇠라, 1884, 내셔널 갤러리

1884년 봄 살롱 심사위원단은 24세의 조르주 쇠라가 처음 그린 대작을 떨어뜨렸다. 쇠라는 이 그림을 거의 실물 크기의 인물이 들어가는 아카데미풍 대작으로 구상했고, 센강에서 그린 습작들을 바탕으로 작업실에서 그렸다. 낙선한 뒤 그는 심사 없이 운영되던 독립 미술가 그룹의 첫 전시회에 이 그림을 내놓았고, 그곳에서 폴 시냐크를 만났다.

한가운데 강둑 가장자리에는 분홍빛 도는 붉은 수영복 바지를 입은 청년이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그 뒤 풀밭에는 그의 옷가지, 곧 흰 셔츠와 밀짚모자, 세워 둔 갈색 장화가 놓여 있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중산모를 쓴 남자가 등을 보이며 옆으로 누워 있고, 그 곁에 적갈색 개가 있다. 그림 속 남자 일곱은 모두 옆모습이나 뒷모습으로 보이며, 건너편 강가에는 클리시의 공장들이 서 있고 그중 한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1887년 무렵 쇠라는 이 그림으로 돌아와 작은 색점들을 더했는데, 주로 물놀이하는 사람들 몸과 그 주변이었다. 오른쪽 물속의 소년은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강 건너로 소리치고 있고, 쇠라는 소년의 주황색 모자에 진 그림자를 파란 점과 노란 점으로 찍었다. 아연황으로 찍은 점 가운데 일부는 초록빛 도는 갈색으로 어두워졌는데, 시냐크는 이미 1887년에 이를 알아챘다.

아니에르의 물놀이하는 사람들
아니에르의 물놀이하는 사람들조르주 쇠라, 1884, 내셔널 갤러리

쇠라가 죽은 뒤 그림은 가족에게 남아 있었고, 1900년 무렵 처음부터 쇠라를 옹호해 온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이 그림을 샀다. 1924년에는 앞서 나온 코톨드 기금의 이사들이 런던의 화상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19. 작자 미상(잉글랜드 또는 프랑스) 《윌튼 두폭화》, 1395~1399년경

국왕 리처드 2세가 작은 흰 사슴들을 무늬로 짜 넣은 붉은 금빛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무언가를 막 받으려는 듯 손바닥을 펴 보이고 있다. 그 뒤에는 성인 셋이 서 있다. 화살을 든 에드먼드, 반지를 든 참회왕 에드워드, 그리고 새끼 양을 팔에 안은 세례자 요한으로, 요한은 왕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 리처드가 바라보는 오른쪽 날개에는 짙푸른 옷의 성모가 서 있고, 아기 예수가 리처드 쪽으로 손을 뻗는다. 성모 둘레에는 같은 푸른 옷을 입은 천사 열한 명이 빽빽이 모여 있다. 천사들은 장미 화관을 쓰고 가슴에 작은 흰 사슴을 달았으며, 치켜든 날개가 머리 위에서 맞닿아 깃털로 된 울타리 같다. 금빛 배경에는 작은 무늬가 되풀이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날개에서 특히 뚜렷하다.

윌튼 두폭화
윌튼 두폭화작자 미상, 1397, 내셔널 갤러리

두 날개는 경첩으로 이어져 접을 수 있었고, 그중 한쪽 날개 바깥 면에는 리처드의 상징인 흰 사슴이 목에 금관을 두르고 사슬에 매인 채 엎드려 있다.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제작 연대를 두고도, 1395~1399년에 30세 안팎이던 리처드가 왜 두폭화에서는 소년처럼 보이는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린다. 두폭화가 처음 기록에 나오는 것은 찰스 1세 소장품 목록이고, 그 뒤 200년 넘게 윌튼 하우스의 펨브로크 백작 가문이 간직했다. 두폭화의 이름도 거기서 나왔다. 1929년 갤러리는 이 두폭화를 9만 파운드에 샀다. 절반은 정부가 댔고, 나머지는 몇몇 큰손 기증자와 한 기금이 모았다.

1991~1992년 세척 때, 천사 하나가 든 깃발의 깃대 꼭대기에서 손톱보다 작은 구슬이 발견되었다. 구슬에는 나무와 흰 성이 있는 섬, 배 한 척과 바다가 그려져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성모에게 바쳐진 잉글랜드로 본다.

‘이달의 그림’에서 복권 기금까지, 1942~1997년

놀리 메 탄게레 (나를 만지지 말라)
놀리 메 탄게레 (나를 만지지 말라)티치아노, 1514, 내셔널 갤러리

전쟁 중 소장품은 런던 밖으로 옮겨졌고, 전쟁이 끝난 뒤 큰 구입은 점점 더 정부 보조금과 민간 기금, 그리고 세기말에 가까워서는 복권 기금을 모아 이루어졌다.

20. 티치아노 《놀리 메 탄게레(나를 만지지 말라)》, 1514년경

전쟁 동안 내셔널 갤러리의 그림들은 북웨일스의 점판암 채석장에 보관되었고, 텅 빈 건물에서는 음악회가 열렸다. 1942년 런던 시민들이 그림 한 점만이라도 돌려 달라고 청하자, 관장 케네스 클라크는 대중에게 무엇을 보고 싶은지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답이 이 티치아노였고, 1942년 3월 《놀리 메 탄게레》는 첫 ‘이달의 그림’이 되었다.

티치아노는 두 인물을 캔버스 아래쪽 절반, 이른 아침의 언덕 비탈에 두었다. 그리스도는 거의 벗은 몸에 비치는 흰 천을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는 수의를 걸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수의를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거두며 엉덩이를 그녀에게서 빼지만, 머리와 어깨는 그녀 쪽으로 숙인다. 왼손에는 괭이를 들었는데, 마리아가 처음에 그를 동산지기로 알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짙은 진홍빛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손을 뻗고, 다른 손으로는 향유 단지를 붙들고 있다. 엑스선 사진을 보면 처음에 그리스도는 동산지기의 모자를 쓰고 마리아에게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웰링턴 공작의 초상
웰링턴 공작의 초상프란시스코 고야, 1813, 내셔널 갤러리

이 그림은 1856년 시인이자 은행가 새뮤얼 로저스의 유증으로 갤러리에 들어왔다. 로저스는 이 그림을 자기 소장품의 보석이라 불렀다.

21. 프란시스코 고야 《웰링턴 공작의 초상》, 1812~1814년

고야가 웰링턴을 그린 것은 1812년 8월, 웰링턴이 살라망카에서 이기고 마드리드에 입성한 직후였다. 초상 속 얼굴은 지쳐 있고, 뺨은 붉으며, 크게 뜬 눈은 초점이 조금 풀려 있다. 가슴에는 훈장이 빽빽이 달려 있고, 훈장들은 얼굴보다 두껍고 어수선하게 칠해져 있다. 웰링턴이 훈장을 받을 때마다 고야가 거의 2년 동안 하나씩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약장이 달린 육군 금십자 훈장은 1813년 10월에야 제정되었는데, 초상에는 이 훈장이 있다.

1961년 이 초상이 소더비 경매에 나와 미국으로 넘어갈 수도 있게 되자, 갤러리는 울프슨 재단의 도움과 재무부 특별 보조금으로 그림을 사들였다. 연금 생활자 켐프턴 번턴은 정부가 국고를 보탰다는 데 분개했고, 그해 8월, 초상이 전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림이 갤러리에서 도난당했다. 도둑은 익명의 편지에서 그림값으로 치른 돈을 가난한 연금 생활자들의 텔레비전 수신료에 쓰고 자신을 사면해 주면 그림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갤러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초상은 4년 동안 번턴의 옷장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성 안나와 성모자, 아기 세례자 요한 (벌링턴 하우스 카르통)
성 안나와 성모자, 아기 세례자 요한 (벌링턴 하우스 카르통)레오나르도 다 빈치, 1507, 내셔널 갤러리

1965년 누군가 버밍엄 기차역의 짐 보관소에 꾸러미를 맡기고 보관증을 신문사로 보냈으며, 경찰은 액자만 없을 뿐 멀쩡한 초상을 되찾았다. 번턴은 스스로 경찰에 출두했다. 법원은 그가 그림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림 절도에는 무죄를, 끝내 돌아오지 않은 액자의 절도에는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3개월 형을 받았다. 1969년 다른 사건으로 체포된 그의 아들 존이, 갤러리에서 초상을 들고 나간 사람은 자기였다고 자백했다.

22.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 안나와 성모자, 아기 세례자 요한》(벌링턴 하우스 카르통), 1506~1508년경

전시회와 부속 미술학교를 꾸릴 돈이 모자랐던 왕립 미술원은 1962년 레오나르도의 카르통을 경매에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카르통은 18세기 말부터 미술원 소유로 미술원 건물인 벌링턴 하우스에 걸려 있었고, 이름도 거기서 나왔다. 총리는 공개 모금이 진행되는 동안 기다려 달라고 미술원에 요청했다. 80만 파운드 가운데 절반 이상은 모금으로 모였고, 나머지는 재무부가 냈다.

이 카르통은 종이 여덟 장을 이어 붙인 색지에 목탄과 흰 초크로 그린 소묘다. 마리아는 성 안나의 무릎에 옆으로 앉아 있어서, 어디까지가 한 사람의 무릎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사람의 무릎인지 금방 가려내기 어렵다. 아기 예수는 어머니의 품에서 몸을 틀어 어린 요한 쪽으로 기울이며 두 손가락으로 요한의 턱을 만진다. 얼굴들과 아기의 몸은 부드러운 명암으로 다듬었지만, 검지를 위로 세운 안나의 들어 올린 손과 아래쪽의 맨발은 윤곽선으로만 잡혀 있다. 레오나르도가 이 카르통을 피렌체 정부에 제단화를 제안하려고 독립된 소묘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 주문은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1987년 7월, 갤러리가 문을 닫기 직전에 한 관람객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카르통을 향해 총신을 짧게 자른 산탄총을 쏘았다. 유리가 산탄을 막았지만 산산이 부서졌고, 파편이 성모의 가슴 부분에서 소묘 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갤러리의 복원가들은 종이를 평평하게 펴고, 손상된 자리에서 종잇조각들을 들어 올려 제자리에 다시 앉혔다.

23. 조지 스터브스 《휘슬재킷》, 1762년경

적갈색 수말이 기수도 안장도 풍경도 없이, 고른 연금빛 배경 위에 실물 크기로 그려져 있다. 말은 앞다리를 접어 올리고 뒷발로 일어섰으며, 몸은 오른쪽을 향한 옆모습이지만 머리는 보는 사람 쪽으로 돌렸고, 검은 눈에 흰자위 테가 드러난다. 밝은 갈기와 거의 흰 꼬리가 구릿빛 털 위에서 도드라지고, 캔버스 왼쪽 위 구석은 통째로 비어 있다. 나중에는 살아 있는 휘슬재킷이 완성된 초상을 보고 그림 속 말에게 달려들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오늘날에는 이 이야기를 전설로 여긴다.

휘슬재킷의 주인은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제2대 로킹엄 후작 찰스 왓슨웬트워스였다. 1759년 이 수말은 요크에서 2000기니가 걸린 경주에서 이겼고, 1762년 무렵 로킹엄은 스터브스에게 첫 그림들을 주문했다. 그에 앞서 스터브스는 링컨셔의 헛간에서 1년 반 동안 말을 해부하며 한 겹 한 겹 그려 두었다. 로킹엄은 고대 조각을 수집했고, 아마 그 자신이 고전 부조처럼 배경 없는 말 그림을 원했을 것이다.

휘슬재킷
휘슬재킷조지 스터브스, 1762, 내셔널 갤러리

로킹엄이 죽은 뒤 이 그림은 그의 저택에 따로 마련한 방의 흰 회반죽 장식 벽에 끼워 넣어졌고, 그의 상속자인 피츠윌리엄 백작 가문에 남았다. 1997년 갤러리는 이 가문에게서 약 1100만 파운드에 그림을 샀는데, 문화유산 복권 기금이 참여한 초기의 큰 구입 가운데 하나였다.

새로 사들인 그림들, 2014~2018년

마지막 두 점은 이미 21세기에 들어온 그림이다. 2014년 갤러리는 소장품 가운데 첫 주요 미국 회화인 조지 벨로스의 그림을 샀고, 4년 뒤에는 그때까지 연구자들이 알지 못하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을 샀다.

24. 조지 벨로스 《부두의 사내들》, 1912년

부두의 사내들
부두의 사내들조지 벨로스, 1912, 내셔널 갤러리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로 분한 자화상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로 분한 자화상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6, 내셔널 갤러리

벨로스는 겨울의 브루클린 부두를 그렸다. 얼음덩이가 가득 찬 이스트강 너머로 로어 맨해튼의 마천루들이 안개 속에 서 있고, 캔버스 오른쪽 절반은 흘수선에 적갈색 띠를 두른 거대한 여객선의 검은 선체가 차지한다. 진창이 된 눈 위에 검은 외투와 캡 모자 차림의 부두 노동자들이 서서 오늘 누가 짐 싣는 일에 뽑힐지 기다리고 있고, 거의 모두 그림 가장자리 너머 무언가를 향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명한 파란 스웨터를 입은 한 사람은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고, 노동자들 곁에는 흰 짐말 두 마리가 있다. 왼쪽 창고 벽 그늘에서는 외톨이 남자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 가는데, 오늘 뽑히지 못한 사람인 듯하다.

1920년 버지니아의 랜돌프메이컨 여자대학이 벨로스에게서 직접 이 그림을 샀다. 2007년 돈이 궁해진 대학은 그림 네 점을 팔겠다고 발표했다. 졸업생들이 법원의 판매 금지 명령을 얻어 냈지만, 2014년 《부두의 사내들》은 끝내 갤러리의 미국 후원자들과 게티 가문의 돈으로 내셔널 갤러리에 팔렸다. 매각 뒤 미국 미술관장 협회는 회원들에게 이 대학의 미술관과 협력하거나 전시를 교환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25.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로 분한 자화상》, 1615~1617년경

2017년 12월 파리의 드루오 경매장에 그때까지 역사가들이 알지 못하던 그림이 나왔다. 추정가는 30만~40만 유로였는데 낙찰가는 190만 유로에 이르렀고, 아르테미시아 작품의 최고가 기록이 되었다. 그림을 산 것은 화상들이었고, 2018년 내셔널 갤러리가 그들에게서 그림을 사들였다.

아르테미시아는 몸을 반쯤 돌리고 어깨 너머로 보는 사람을 곧장, 조금은 경계하듯 바라보는 자신을 그렸다. 머리에는 밝은 천을 터번처럼 감았고, 진주가 달린 작은 금관이 그 위에 약간 비뚜름하게 얹혀 있다. 한 손은 성녀 카타리나를 처형하려던, 쇠못이 박힌 부서진 나무 바퀴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순교자의 종려 가지를 가슴에 대고 있다. 그려진 바퀴 아래에서는 처음에 아마 책이었을 형체가 발견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처음에 자신을 무녀 시빌레로 그렸다가 나중에 바퀴와 종려 가지와 관을 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한 아고스티노 타시에 대한 1612년 로마 재판이 끝난 뒤 피렌체로 옮겨 갔고, 성 카타리나를 자기 얼굴로 그린 것도 그곳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캔버스 위쪽 가장자리는 언젠가 잘려 나갔고, 그때 관의 진주들과 종려 가지 끝도 함께 떨어져 나갔다. 2018년 복원가들은 종려 가지와 진주를 되살려 그릴 수 있을 만큼만 새 캔버스 띠를 위쪽에 이어 붙였고, 후광은 잘린 그대로 두었다.

2019년 아르테미시아의 대규모 전시회를 앞두고 갤러리는 이 그림을 들고 전국을 돌았다. 그림은 글래스고 여성 도서관, 뉴캐슬의 가톨릭 학교, 요크셔의 한 동네 병원 대기실, 서리의 여성 교도소에서 전시되었다.

1824년 사람들은 팰맬 거리의 앵거스타인 저택에서 처음 사들인 그림 38점을 보았다. 195년 뒤 갤러리는 가장 최근에 사들인 그림 가운데 하나를 도서관과 학교, 병원 대기실, 교도소로 보냈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거의 두 세기에 걸친 구입과 기증, 유증, 공개 모금, 그리고 때로는 특정 그림을 두고 아주 오래 이어진 논쟁이 놓여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로 분한 자화상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로 분한 자화상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6, 내셔널 갤러리

더 볼 만한 그림

여기 고른 스물다섯 점 밖에도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몇 점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라파엘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은 앵거스타인 컬렉션에서 왔는데, 오랫동안 모사본으로 여겨지다가 1970년 보르게세 컬렉션의 재고 번호로 원작임이 확인되었다.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앤드루스 부부》, 더비의 조지프 라이트가 그린 《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 그리고 1928년 테이트 갤러리가 물에 잠겼을 때 둘둘 말린 채 살아남은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도 찾아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