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다. 1890년 7월 29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림들은 파리에서 화상으로 일하던 동생 테오에게 넘어갔고, 1891년 1월 테오마저 세상을 떠나자 컬렉션은 그의 미망인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의 몫이 되었다. 집안에서 ‘요’라고 불린 그녀는 작품을 가려 가며 팔았고, 1914년 빈센트의 편지를 책으로 펴냈으며, 그의 명성을 쌓는 데 누구보다 큰 몫을 했다. 요와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럼은 1962년 이 컬렉션을 빈센트 반 고흐 재단에 넘겼고, 네덜란드 정부가 컬렉션을 위해 미술관을 지어 1973년에 문을 열었다. 미술관과 재단은 지금도 별개의 기관이며, 이 글에 나오는 작품 스무 점은 모두 재단의 소유로, 재단이 미술관에 영구 대여한 것이다.
무엇을 남겨 둘지는 가족이 정했다. 1920년대에 가족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반 고흐의 의자》를 팔았다. 한낮의 빛 속에 놓인 소박한 짚 의자로, 앉는 자리에 파이프와 담배가 놓여 있는 그림이다. 그와 짝을 이루는 《고갱의 의자》, 촛불과 소설책 두 권이 놓인 밤의 의자는 가족이 간직했다.
이 스무 점에는 빈센트의 삶에 등장한 사람들이 거듭 나온다. 그가 그림을 그려 준 사람, 함께 작업한 사람, 모델로 그린 사람, 또는 나중에 편지로 그림을 설명해 준 사람이다. 이 글은 다리가 부러진 어머니를 위해 그린 교회에서 시작해, 지금은 아마 그의 마지막 작품일 것으로 여겨지는 오베르의 비탈 위 나무뿌리에서 끝난다.
뉘넌, 1884~1885년

1. 빈센트 반 고흐 《뉘넌 개혁교회를 나서는 회중》, 1884~1885년
1884년 1월 17일 빈센트의 어머니 안나 반 고흐카르벤튀스가 기차에서 내리다가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빈센트는 전해 12월부터 뉘넌의 부모님 목사관에서 지내고 있었고,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뼈를 맞추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테오에게 날마다 어머니 소식을 써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2월 초에는 얼마 전 어머니를 위해 “산울타리와 나무들이 있는 작은 교회”를 그렸다고 동생에게 알리며 스케치를 곁들였다. 그것은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 목사의 교회로, 가톨릭 마을에 있는 작은 개신교 예배당이었다.
1885년 3월 테오도뤼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해 가을, 첫 그림을 그리고 스무 달이 지나 빈센트는 다시 이 그림을 손보았다. 편지 속 스케치에서는 교회 앞에 삽을 든 농부가 서 있는데, 이제 빈센트는 그 농부를 덧칠해 지우고, 오솔길에 교인들을 그려 넣고, 헐벗은 가지에 잎을 더하고, 색을 더 따뜻하게 했다. 왜 이렇게 고쳤는지 그의 편지에는 아무 말도 없고, 이것을 미망인을 위해 그린 아버지의 추억이라고 보는 역사가들은 날짜에 기대고 있다.
앞쪽의 교인들은 이미 교회에서 나와 산울타리 앞 모랫길을 걷고 있다. 여덟 사람이 세 무리를 이루었고, 여자들은 흰 두건을 쓰고 갈색 숄을 둘렀으며, 한가운데 있는 세 여자 가운데 가운데 사람은 두건 달린 어두운 망토로 몸을 감쌌다. 이제 막 문을 나서는 사람들은 현관 앞에 아주 작고 어두운 형체로 보이고, 그중 한 사람에게서 빨간 점 하나가 언뜻 비친다. 가느다란 나무들의 잎은 드문드문 놓인 주황색과 황토색 붓질로 칠해졌고, 그 사이로 1884년에는 헐벗었던 가지들이 보인다.
어머니는 19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그림을 간직했다. 그 뒤 그림은 빈센트의 여동생 안나에게, 1930년 안나가 죽은 뒤에는 그 딸 사라 더용판하우턴에게 넘어갔다. 1958년 8월 사라는 라런에 있던 첫 빈센트 반 고흐 재단에 그림을 팔았고, 그림은 테오에게서 이어진 집안 갈래로 돌아왔다. 2002년 12월 도둑 두 명이 사다리를 타고 미술관 지붕에 올라가 큰 망치로 창문을 깨고, 초기작 《스헤버닝언 바다 풍경》과 함께 이 그림을 가져갔다. 두 그림은 2016년 나폴리 근처, 카모라와 손잡은 마약 밀매상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미술관의 복원가 카트린 필츠는 교회 그림의 상태가 뜻밖에 좋다고 보았다.
2017~2019년의 복원 때 1961년에 칠한 누렇게 변한 바니시는 벗겨 냈지만, 빈센트가 겨울에 그린 첫 번째 판본 위에 발랐던 얇은 달걀흰자 막은 그대로 두었다. 이 막은 지금도 그가 그린 두 겹의 그림 사이에 있다.

2.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빈센트가 몇 해 동안 가깝게 지낸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는 1885년 봄 《감자 먹는 사람들》의 석판화를 받고, 5월 24일 위트레흐트에서 답장을 보냈다. “당신은 더 잘할 수 있고, 다행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을 그렇게 피상적으로 보고 그립니까?” 그 뒤로는 목록이 이어졌다. 안쪽 여자의 교태 어린 작은 손은 “얼마나 거짓된가”, 오른쪽 남자에게는 “무릎도, 배도, 폐도” 없고, 그의 팔은 있어야 할 길이보다 한 미터는 짧으며, 왼쪽 여자는 코 대신 “끝에 작은 네모가 달린 담뱃대 같은 것”을 달고 있다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이튿날 바로 그 편지 위에, 방금 받았는데 놀라서 돌려보낸다고 적어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그 뒤로 화가 난 편지 몇 통이 더 오갔고, 여름이 끝날 무렵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영영 끊겼다.
빈센트는 1885년 봄 뉘넌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먹여 살리던 테오에게 여러 인물이 나오는 구성도 해낼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그 전에 그는 겨우내 농부들의 머리와 손을 그렸는데, 머리만 수십 점이었다. 5월 초에는 동생에게, 머리들을 모두 아주 공들여 마쳤다가 곧바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물론 껍질도 벗기지 않은 감자” 색으로 가차 없이 다시 칠했다고 털어놓았다. 모델은 고르디나 더 흐로트와 아마도 그 가족이었고, 그림은 뉘넌에 있던 그들의 집에서 그렸다. 빈센트는 등잔불 아래서 감자를 먹는 이 사람들이 접시로 내미는 바로 그 손으로 땅을 일구었다는 것이 보이기를 바랐다.
방 안의 빛은 천장 아래 납작한 갓을 씌운 작은 등잔 하나에서만 나오고, 그 빛 속에 보이는 것은 얼굴과 손, 흰 두건, 감자뿐이다. 왼쪽의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는 포크를 함께 먹는 접시로 뻗고, 나이 든 남자는 펼친 손바닥 위에 잔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의 나이 든 여자는 주전자를 기울여 늘어선 잔들에 따르고, 한가운데에는 여자아이가 등을 보이고 앉아 불 밝힌 식탁 앞에서 거의 검은 실루엣이 되었다. 왼쪽 벽에는 추가 달린 시계와 십자가상을 담은 작은 그림이 걸려 있다.
빈센트는 그 뒤에도 이 그림을 두둔했다. 1887년 10월, 이미 파리에 있던 그는 여동생 빌에게 감자를 먹는 농부들이 그래도 자기가 그린 것 가운데 가장 낫다고 썼다. 테오는 이 그림을 파리 아파트의 벽난로 위에 걸었고, 테오가 죽은 뒤 요는 그림을 식당에 두었다.
3. 빈센트 반 고흐 《성경이 있는 정물》, 1885년
펼쳐진 성경의 오른쪽 면, 빈센트가 회색 붓질로 줄만 그어 놓은 글줄 위에는 프랑스어로 쓴 두 글귀, ‘이사야’와 ‘53장’을 읽을 수 있다. 이사야서 53장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버림받은 하느님의 종을 다룬 장이다. 성경은 가죽 장정의 무거운 책으로 탁자 위에 놓여 있고, 그 뒤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초를 꽂은 촛대가 서 있으며, 앞쪽에는 책장 모서리가 말려 올라간 레몬빛 노란 표지의 작고 낡은 책 한 권이 성경에 기대어 있다. 표지에서는 ‘에밀 졸라’와 ‘삶의 기쁨’이라는 글자가 읽힌다. 졸라의 소설 《삶의 기쁨》이다.
빈센트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 목사는 1885년 3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0월 말 빈센트는 이 정물화를 테오에게 보내면서 편지에 “검은 배경 위에 펼쳐져 있어서 회백색을 띤 가죽 장정의 성경, 황갈색 앞쪽, 그리고 레몬 노랑이라는 음 하나를 더한 것”이라고 적었다. 그의 말로는 하루 만에 그린 그림이었다. 이 편지는 검은색을 두고 형제가 오래 벌여 온 논쟁의 일부였는데, 테오는 마네의 습작 이야기를 하며 형에게 파리 사람들처럼 팔레트를 밝게 하라고 권하던 참이었다. 빈센트는 이제 어떤 형태, 어떤 색의 대상이든 망설이지 않고 그린다고 답했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도, 성경과 졸라의 소설을 나란히 놓은 뜻에 대해서도 이 편지에는 쓰지 않았다.
나머지는 역사가들이 그려진 사물들에서 읽어 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세상을 보는 두 시선, 곧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아들의 현대적인 자연주의를 나란히 놓은 것으로 이해하고, 꺼진 초를 죽음의 표시로 본다. 역사가 클리프 에드워즈와 캐슬린 파워스 에릭슨은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졸라의 여주인공이 서로 닮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자신을 거둬 준 집안에 재산을 빼앗기는 고아 폴린 크뉘는 그런데도 그 집안을 돌보는 데 자신을 바친다.

파리, 1886~1888년

4. 존 피터 러셀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1886년
시드니 태생의 존 피터 러셀은 기술자 집안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살았고, 남의 그림을 사들일 형편도 되었다. 그는 런던의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세 학기를 공부했고, 1885년 초 파리 클리시 대로에 있던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 들어갔다. 빈센트는 한 해 뒤에 신입생으로 그곳에 왔다. 두 사람 모두 외국인이자 학생이었고, 1886년 러셀은 몽마르트르의 자기 작업실에서 빈센트를 그렸다.
빈센트는 거의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어두운 재킷과 어깨가 캔버스 오른쪽 절반을 차지하고,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어깨 너머로 눈을 흘기듯 이쪽을 본다. 붉은 갈색 수염이 이 그림에서 가장 따뜻한 부분이다. 그는 가슴께로 들어 올린 손에 가느다란 막대, 연필인지 붓인지 모를 것을 쥐고 있고, 손은 얼굴보다 자유롭게, 거칠게 끊어지는 분홍색과 흰색 붓질로 그려졌다.
머리 위 어두운 배경에는 옅은 불그스름한 물감으로 큼직하게 ‘빈센트’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에 라틴어로 ‘화가’를 뜻하는 ‘픽토르’, 왼쪽 위에는 러셀의 서명과 ‘파리 1886’, 오른쪽에는 프랑스어로 ‘우정’을 뜻하는 ‘아미티에’가 있다. 글자들은 거의 배경색만큼 바래서, 머리카락 바로 위를 찾아보아야 보인다.

빈센트는 이 초상화를 파리의 테오에게 맡겨 두었다. 1889년 9월 생레미의 정신 요양원에서 그는 동생에게 초상화를, “무엇보다 화가들의 초상화”를 모으라고 권하며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러셀이 그린 내 초상화”를 잘 간직해 달라고 부탁했다.
5. 빈센트 반 고흐 《카페 탕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1887년
클리시 대로의 카페 겸 카바레 ‘탕부랭’의 탁자들은 탬버린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미술관 도록에 따르면 이 사실은 이 그림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홀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그림 속 탁자 상판은 둥글고, 두꺼운 붉은 주황빛 테두리를 따라 방울처럼 보이는 어두운 동그라미들이 박혀 있으며, 앞쪽의 걸상 두 개도 같은 모양이고, 왼쪽 걸상 위에는 접은 우산이 놓여 있다. 탁자에는 카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가 혼자 앉아 상판 위에 팔을 포개고 있다. 그녀는 높은 적갈색 모자를 쓰고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끼웠으며, 오른쪽에는 받침 접시 더미 위에 맥주잔이 놓여 있고, 그녀 뒤의 벽에는 긴 파란 옷을 입은 인물이 있는 일본 판화가 걸려 있다.
이탈리아 사람인 아고스티나는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나폴리 출신으로, 1860년 무렵부터 모델 일을 했고, 1866년에는 코로가 그녀를 그렸다. 1887년 상반기에 빈센트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그는 식사값을 그림으로 치렀고, 손님들이 사 주기를 바라며 ‘탕부랭’에 꽃 정물화를 걸었으며, 늦겨울에는 그곳에서 일본 판화 판매전을 열었는데, 그 전시를 그 자신이 나중에 실패였다고 했다.
1887년 7월, 테오가 네덜란드에 가 있는 동안 빈센트는 카페에 들렀다. 동생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러지 않으면 겁이 나서 못 온다고들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가토리는 “밀랍처럼 창백했고”, 그림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면서, 카페의 누군가가 그에게 시비를 걸려 한다고 귀띔했다. 그림들은 형제 두 사람의 것이었으므로 그는 테오를 기다리기로 하고 당장 가져가지 않았고, 다음 편지에서 여전히 그녀에게 정이 간다고 덧붙였다. 카페는 파산으로 치달아 주인이 바뀌고 있었다.
거기 남은 그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빈센트가 파리에서 사귄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가 여러 해 뒤에 남긴 이야기로만 알려져 있고, 미술관은 “아마도”라는 단서를 달아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베르나르의 말로는 그림들이 빚 대신 넘어가 헐값에 팔려 나갔다.


6. 빈센트 반 고흐 《기녀(에이센을 따라)》, 1887년
파리의 잡지 《파리 일뤼스트레》 1886년 5월호는 일본 특집이었고, 그 표지에는 게이사이 에이센이 그린 최고 등급 기녀의 판화가 컬러로 복제되어 실렸다. 1887년 가을 빈센트는 트레이싱지에 기녀의 윤곽을 따라 그리고 그 종이에 격자를 그은 뒤, 격자를 따라 인물을 두 배로 키워 캔버스에 옮겼는데, 격자를 그은 이 트레이싱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기녀는 높고 좁은 직사각형 안에 자리 잡은 평평한 겨자빛 노란 바탕 위에 서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채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본다. 높이 올린 머리에는 긴 하늘색 비녀가 잔뜩 꽂혀 머리 둘레로 햇살처럼 뻗어 있고, 초록, 빨강, 검정 얼룩무늬의 두꺼운 겉옷 기모노는 옷자락에서 소용돌이처럼 감긴다. 파란 줄무늬 띠는 앞에서 매어져 있는데,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기녀는 띠를 이렇게 앞에서 맸고 정숙한 여인은 뒤에서 맸다.
수련이 핀 연못, 대나무, 왼쪽 위에 있는 다리가 붉은 흰 두루미 두 마리, 아래쪽 잎 위의 큰 두꺼비와 작은 개구리, 위쪽의 두 사람이 탄 붉은 배는 빈센트가 다른 일본 판화들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직접 덧붙인 것이다. 판화는 형제가 함께 가진 것이었다. 1886~1887년 겨울 형제는 파리의 화상 지크프리트 빙에게서 판화를 사들였는데, 처음에는 되팔 생각이었고, 1888년 3월 빈센트는 여동생에게 자신과 테오가 “그런 일본 판화를 수백 장”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림은 테오에게 남았다. 미술관은 당시 프랑스 속어에서 두루미와 개구리가 매춘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데 주목하고, 기녀를 둘러싼 이 테두리를 빈센트의 농담으로 읽는다.

7.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또는 테오 반 고흐의 초상》, 1887년
1943년 스웨덴의 미술사가 칼 노르덴팔크는 요의 컬렉션에 있던 작은 초상화 두 점, 밀짚모자를 쓴 초상과 펠트 모자를 쓴 초상에 그려진 사람이 테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집안에서 ‘엔지니어’라고 불리던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럼은 가족 가운데 누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1958년 반 고흐 작품 목록을 만든 야코프 바르트 드 라 파유가 펠트 모자를 쓴 판지 그림을 테오의 초상이라고 발표하자, 엔지니어는 “어머니는 그게 빈센트라고 하셨다”며 날카롭게 반박했다. 1960년 그는 미술사가 아브라함 마리 하마허르에게, 어머니가 테오의 초상화가 없다는 것을 늘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2011년 미술관 연구원 루이스 반 틸보르흐는 밀짚모자를 쓴 남자를 테오라고 판정했다. 그 남자의 수염은 황토색으로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빈센트의 수염은 붉고 덥수룩했으며, 귀는 둥근데 빈센트의 귀는 “살집이 두툼했다”는 것이다. 초상화의 제목이 바뀌었고, 세계 곳곳의 신문이 테오를 그린 유일한 그림에 관해 기사를 썼다. 2019년에는 미술관 소장품 책임자를 지낸 시라르 반 회흐턴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밀짚모자를 쓴 남자의 눈은 빈센트처럼 청록색인데 테오의 눈은 옅은 회청색이었다는 것이고, 그는 빈센트가 동생에게는 허술한 여름 차림을 입히고 자신은 점잖은 신사로 그렸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초상화는 판지에 그린 작은 그림이고, 모서리가 닳아 있다. 넓은 밀짚모자는 짧은 레몬색과 크림색 붓질로 쌓아 올렸고, 눈은 선명한 파란색에 눈꺼풀에는 붉은 기가 돌며, 목에는 옅은 하늘색 나비매듭이 매여 있고, 얼굴 오른쪽으로는 바로 그 둥근 귀가 분홍빛 도는 주황색으로 보인다. 얼굴은 잘고 정확한 붓 터치로 그려져, 재킷이나 짧은 소용돌이로 채운 회청색 배경보다 훨씬 섬세하다.
2019년 7월 미술관은 그림 속 인물이 누구인지 가릴 수 없다고 인정하고, 그림에 두 이름을 함께 담은 제목을 붙였다. 펠트 모자를 쓴 짝 초상화는 미술관에서 지금도 자화상으로 본다.
8. 에밀 베르나르 《할머니의 초상》, 1887년
에밀 베르나르와 빈센트는 1887~1888년 겨울, 빈센트가 남프랑스로 떠나기 전 파리에서 그림을 맞바꾸었다. 베르나르는 빈센트의 자화상 한 점을 받았는데 십중팔구 지금 디트로이트에 있는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이었고, 빈센트는 이 초상화를 받았다. 1888년 가을 그는 아를에서 테오에게, 베르나르가 이미 자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고 일깨우며 그것이 “그때 그의 할머니 초상화와 바꾼” 그림이라고 썼다.
베르나르는 최근 남편을 잃고 파리 근교 아니에르로 옮겨 온 할머니 소피 알베르틴 보댕랄망을 1887년 가을 세 번 그렸다. 부모가 정원에 지어 준 나무 작업실에서였다. 베르나르는 열아홉 살이었고, 같은 해 루이 앙크탱과 함께 뒷날 클루아조니슴이라고 불리게 되는 방식, 곧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어두운 윤곽선으로 두른 평평한 색면을 고안했다. 세 판본 가운데 암스테르담의 것이 가장 공들여 완성되었다.

할머니는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곁눈질하듯 보는 사람을 바라보며, 입꼬리는 처져 있다. 그녀는 등 뒤로 긴 자락이 늘어진 검은 두건을 쓰고 턱까지 주름 장식이 올라온 밋밋한 검은 옷을 입었으며, 손은 그려지지 않았고 옷은 아래쪽 가장자리 너머로 이어진다. 얼굴은 가느다란 세로 빗금으로 덮였고, 코와 눈썹은 짙은 파란 선으로 그어졌으며, 입술은 주홍색 붓질 한 번으로 표시되었다. 뒤에는 청록색 큰 장미 무늬가 있는 벽돌색 천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두꺼운 세로 붓질로 그린 흰 베개가 검은 옷에 바짝 붙어 놓여 있는데, 캔버스에서 가장 밝은 곳이다. 그 앞에는 끈으로 묶은 높은 모자 상자가 서 있다.
1888년 여름 빈센트는 아를에서 베르나르에게 “자네 할머니의 초상화 두 점”에 관해 썼고, 이 초상화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친구여, 자네가 그때만큼 렘브란트에 가까웠던 적은 없었네.” 보스턴과 캔자스시티에 있는 다른 두 판본에는 베르나르가 서명했지만 이 그림에는 서명이 없는데, 미술관 도록은 그가 서명하기도 전에 그림이 교환으로 그의 손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9. 빈센트 반 고흐 《이젤 앞의 자화상》, 1887~1888년
빈센트는 아를로 옮겨 온 지 넉 달 뒤인 1888년 6월, 이젤 앞에 선 자기 초상화를 여동생 빌에게 말로 그려 보였다. 그가 가리킨 것은 “거울을 보며 그렸고 지금은 테오가 가지고 있는 초상화”였고, 그는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분홍빛 도는 회색 얼굴, 초록 눈, 잿빛 머리카락, 이마와 입가의 주름, 모든 것이 “나무토막 같다”는 것, 아주 붉고 손질하지 않아 서글픈 수염, 두툼한 입술, 거친 리넨으로 만든 파란 작업복, 그리고 팔레트 위의 레몬 노랑, 주홍, 베로나 그린, 코발트였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그가 파리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본다.
이젤 위의 캔버스는 오른쪽에 옆면을 이쪽으로 향한 채 서 있고, 틀의 노란 나무 막대에는 붉은 주황색 물감으로 ‘빈센트’라는 서명과 숫자 ‘88’이 쓰여 있다. 그림 속 손은 하나뿐이고, 그 손이 팔레트와 붓 한 묶음을 함께 쥐고 있다. 파란 작업복에는 주황색과 노란색 짧은 선들이 흩어져 있고, 붉은 수염은 파란색 곁에서 타오르며,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팔레트 위에는 초상화 전체를 그린 것과 같은 보색 쌍, 곧 빨강과 초록, 노랑과 보라, 파랑과 주황이 놓여 있다. 그는 거울을 보고 그렸지만, 미술관 연구자들이 알아차린 대로 옷의 여밈만은 남자 옷에서 제자리인 쪽으로 옮겨 그렸다.
빈센트가 남프랑스로 떠날 때 이 그림은 테오의 아파트에 남았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여동생에게 지금 자기 모습을 들려주었다. 머리와 수염은 짧게 깎았고, 얼굴빛은 초록빛 도는 회분홍색에서 회색 섞인 주황색으로 바뀌었으며, 파란 옷 대신 “늘 먼지투성이인” 흰 옷을 입고, 막대기와 이젤과 캔버스를 온몸에 매단 채 “호저처럼” 다닌다는 것이었다.

아를, 1888~1889년
10.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거리)》, 1888년
빈센트는 1888년 5월 1일 아를 라마르탱 광장 2번지 집의 오른쪽 부분을 한 달에 15프랑에 빌렸다. 그가 테오에게 쓴 대로 이 집은 “겉은 노랗고 안은 하얗게 칠했으며 햇볕을 한가득 받는” 집이었고, 아래층에는 작업실과 부엌으로 쓸 큰 방 두 개, 위층에는 작은 방 두 개가 있었다. 그가 그곳에 들어가 살 수 있게 된 것은 테오의 돈으로 침대를 산 9월 중순이 되어서였다. 그는 이 집에 남쪽의 작업실을 꾸릴 생각이었고, 첫 손님으로 화가 폴 고갱을 초대했다.
9월 말 빈센트는 거리에서 본 집을 그리고, 동생에게 그림을 설명하면서 “유황빛 햇살 아래, 순수한 코발트빛 하늘 아래” 선 집과 그 주변이라고 썼으며, 소재가 어려워서 오히려 이겨 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의 친구인 주아브 부대 중위 폴외젠 밀리에는 이 그림을 끔찍하다고 여겼고, 이런 평범한 식료품 가게를 어떻게 즐겁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빈센트는 그 대답으로 졸라의 《목로주점》에 나오는 대로와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에 나오는 강변길을 들었다.
노란 집은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 초록 덧창과 모퉁이의 초록 문을 달고 서 있고, 2층 창문 두 개의 덧창은 서로 달라서 왼쪽은 거의 닫혔고 오른쪽은 활짝 열려 있다. 왼쪽에는 나무에 반쯤 가려진, 초록 덧창을 단 분홍 집이 보이는데, 빈센트가 날마다 저녁을 먹던 식당이다. 오른쪽에서는 기차가 철교 위를 지나며 파란 하늘에 길고 흰 연기 띠를 남기고, 거리 안쪽 두 다리 사이에는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이 살았는데, 빈센트는 12월에 그의 가족을 그렸다. 앞쪽에는 거리를 가로질러 낮은 회갈색 더미 두 개가 놓여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것을 빈센트가 고갱이 오기 전에 집에 끌어들인 가스관을 묻을 도랑으로 여겼지만, 2025년 미술관 연구원 테이오 메덴도르프는 아를에 가스관이 그보다 훨씬 전에 깔렸으며 더미에 쌓인 것은 말똥 위에 뿌리던 모래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1944년 6월 25일 미군이 다리와 역을 폭격할 때 폭탄 하나가 이 집에 떨어졌고, 폐허는 헐렸지만 그림 속의 철교들은 지금도 서 있다.

11.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레 미제라블)》, 1888년
1888년 9월 빈센트는 아를에서, 당시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작업하던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에게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 달라고 부탁하며, 그 대신 자기 작품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는 일본 화가들이 그렇게 작품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은 이것이 고갱의 도착을 재촉하는 방법이기도 했다고 보는데, 빈센트는 퐁타방의 무리가 고갱을 놓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갱은 마흔 살이었고,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며, 빚에 쪼들렸고, 그의 주위에는 젊은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베르나르는 스무 살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 방식대로 했다. 각자 자신을 그리고, 상대의 초상은 배경에 넣은 것이다. 10월 1일 고갱은 빈센트에게,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장 발장, 곧 사회에 억눌리고 법 밖으로 내몰린 전과자로 자신을 그렸다고 설명하며, 자기 얼굴을 “장 발장처럼 옷차림은 초라하고 힘센 도둑의 가면, 그 안에 고귀함과 내면의 온유함이 있는” 얼굴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말로는 벽지의 앳된 꽃들이 “우리 화가들의 순결”을 뜻했다.
그림은 며칠 뒤 아를에 도착했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 그림이 무엇보다 죄수를 그린 것 같고 “명랑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얼굴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푸른빛을 띠며 고갱이 병들고 지쳐 보인다고 썼고, 자신은 베르나르가 보낸 초상화가 더 좋다고 했다. 그는 테오가 이 그림을 사 주기를 바랐지만, 고갱은 이 그림은 팔 것이 아니며 빈센트를 위해 그린 것이라고 답했다.
고갱의 머리는 왼쪽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있고, 눈은 무거운 눈꺼풀 아래에서 보는 사람 쪽으로 흘깃 향해 있다. 얼굴은 날카로운 면들로 쪼개져, 코와 뺨은 뜨거운 주황색이고 다른 쪽 절반은 차가운 초록 그림자인데 그 사이에 아무런 전환이 없으며, 코 밑에는 짙은 불그스름한 콧수염이 늘어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잔 꽃다발 무늬가 있는 평평한 크롬 옐로 벽지가 차지하고, 오른쪽 위 구석에는 가장자리에 잘린 초록 직사각형이 걸려 있는데 그 안에 붉은 선으로 윤곽을 두른 베르나르의 옆얼굴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어두운 물감으로 ‘레 미제라블’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에 프랑스어로 ‘친구 빈센트에게’, 그리고 ‘88’이라는 연도를 붙인 고갱의 서명이 있다.
12. 빈센트 반 고흐 《침실》, 1888년
“눈이 아직도 피곤하다.” 1888년 10월 16일 빈센트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시작했다. 그는 몇 주 동안 고갱이 오기 전에 노란 집에 가구를 들이고 그림으로 꾸몄는데, 그 뒤 이틀 반 동안은 거리에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쉬어야 했고, 고갱 본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한 대로 그사이 집을 꾸밀 그림으로 자기 침실을 그렸다. 그의 말로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쉬어야 했고, 그는 억지로 쉬게 된 데 대한 앙갚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테오에게는 이 그림을 색깔별로 설명했다. 벽은 옅은 보라색, 바닥은 붉은 타일, 침대와 의자는 신선한 버터 빛깔, 시트와 베개는 아주 밝은 레몬빛 초록, 이불은 진홍색, 창문은 초록색, 세면대는 주황색, 대야는 파란색, 문은 라일락색이며, 그림자는 “일본 판화처럼” 없다고 했다.
오늘날 벽과 문은 하늘색이다. 보라색 혼합물에 들어 있던 빨간 물감이 바래 파란색만 남았고, 바닥은 붉은색에서 회색 도는 분홍색으로 변해서, 원래의 라일락색은 오른쪽 가장자리 액자 밑에 있는 붓질 한 곳에만 남아 있다. 나머지는 그대로여서, 창 왼쪽 벽에는 검은 테 거울이, 왼쪽 문 옆에는 수건이, 오른쪽 벽에는 주황색 액자에 든 남자 초상화 두 점이, 침대 머리맡 뒤 못에는 밀짚모자가 걸려 있다.
1889년 초 빈센트가 발작을 일으킨 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론강이 범람했고, 불을 때지 않은 집 벽에서는 물과 초석이 스며 나왔다. 《침실》의 물감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빈센트는 그 위에 신문지를 붙였고, 4월 말 이 그림을 자기 그림 가운데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라고 부르며 테오에게 보냈다. 2010년 미술관의 복원가 엘라 헨드릭스는 물감층에서 인쇄용 잉크의 미세한 흔적을 찾아냈다. 1889년 9월 생레미에서 빈센트는 《침실》을 두 번 다시 그렸는데, 하나는 원작과 같은 크기(지금 시카고에 있다)였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빌을 위한 조금 작은 그림(오르세 미술관에 있다)이었으며, 이는 원작에 새 캔버스를 덧대 배접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1931년 네덜란드의 복원가 얀 코르넬리스 트라스가 이 그림을 새로 배접했는데, 그 전의 배접에 대해서는 트라스가 가망 없을 만큼 형편없다고 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뒤로 아래쪽 가장자리는 가는 테이프로 덮여 있고, 그 밑에서 바닥은 예전의, 좀 더 복숭아빛에 가까운 색을 간직하고 있다.
13. 빈센트 반 고흐 《고갱의 의자》, 1888년
영국 잡지 《그래픽》 1870년호에 실린 루크 필즈의 삽화 《빈 의자》, 디킨스가 죽은 날의 서재를 그린 이 그림을 빈센트는 이미 1882년에 가지고 있었다. 그해 12월 그는 동생에게 빈 의자는 많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며, 언젠가는 필즈와 다른 화가들 대신 “빈 의자만 남을 것”이라고 썼다.
1888년 11월 고갱은 노란 집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었고, 11월 19일 무렵 빈센트는 테오에게 새 습작, “빨강과 초록으로 된 고갱의 안락의자, 밤의 효과, 앉는 자리에 소설 두 권과 촛불”에 대해 알렸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고갱처럼 영리한 사람과 함께 지내며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썼다.
안락의자는 적갈색으로, 높이 휜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고, 나무 위로는 푸른 보랏빛 반사광이 흐르며, 앉는 자리는 초록색으로 엮여 있다. 그 위에서는 파란 촛대에 꽂힌 흰 초가 타고 있고, 곁에는 노란 책과 옅은 크림색 책 두 권이 놓여 있다. 왼쪽 위 벽에서는 크고 둥근 노란 빛무리 속에 가스등이 타고 있다. 빈센트는 겨울에도 고갱과 함께 밝은 데서 작업하려고 10월에 작업실에 가스를 끌어들였다.
1890년 2월, 이미 생레미에 있던 빈센트는 막 자기에 관한 글을 쓴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두 사람이 헤어지기 며칠 전, 병 때문에 병원에 들어가야 했을 때 “그의 빈자리”를, 곧 불 켜진 초와 현대 소설들이 떠난 사람의 자리에 놓인 안락의자를 그려 보려 했다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그의 기억은 틀렸다. 이 그림은 두 사람이 갈라서기 한 달 전, 고갱이 아직 집에 살고 있을 때 그려졌다.
요는 이 그림을 전시하지 않았고, 1905년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도 내놓지 않았다. 루이스 반 틸보르흐는 그 이유를, 요가 고갱을 좋아하지 않았고 12월에 빈센트가 무너진 데에 고갱의 탓도 있다고 여겨 그의 안락의자를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된 것은 요가 세상을 떠나고 세 해 뒤인 1928년, 베를린의 파울 카시러 화랑에서였다.


14. 빈센트 반 고흐 《마르셀 룰랭의 초상》, 1888년
아를에서 빈센트의 이웃이자 친구였던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은 딸이 태어난 날 그의 모델이 되었다. 1888년 7월 31일 빈센트는 여동생 빌에게, 노란색이 들어간 짙은 파란 제복 차림의 우편배달부 초상화를 그리고 있으며, 오늘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아 그가 만족감으로 환하게 빛난다고 썼다. 아기의 이름은 마르셀이었고, 세 아이 가운데 막내였다.
12월, 마르셀이 넉 달인가 다섯 달 되었을 때 빈센트는 아기를 혼자 있는 모습으로 세 번, 어머니 오귀스틴의 무릎에 안긴 모습으로 두 번 그렸다. 12월 초 그는 테오에게 우편배달부 가족 전체, 곧 남편과 아내, 아기, 작은 사내아이, 16살 난 아들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알리며, “모두 개성이 있고 아주 프랑스적인데, 러시아 사람들처럼 보인다”고 썼다.
아기는 둥글고 짙푸른 눈으로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고, 두 눈에는 작은 노란 반사광 점이 하나씩 찍혀 있다. 크림색 아기 모자가 두건처럼 얼굴을 감싸고, 입술은 작은 주황빛 빨간 나비매듭처럼 오므려져 있으며, 밝은 황록색 배경은 두텁게 도드라진 붓질로 칠해졌다. 아래쪽에서는 통통한 두 손이 모여 있고, 손목에는 가는 금팔찌, 손가락에는 붉은 보석 반지가 끼워져 있다.
1889년 5월 이 초상화는 다른 아를 그림들과 함께 상자에 담겨, 4월에 요와 결혼한 테오에게 보내졌다. 7월 요는 빈센트에게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쓰면서 이 초상화 이야기를 했다. 손님들은 왜 그림을 이렇게 눈에 안 띄는 구석에 걸었느냐고 물었지만, 식탁의 자기 자리에서 그녀는 “아이의 커다란 파란 눈과 예쁜 손, 동그란 뺨”을 볼 수 있었고, 자기 아이도 그렇게 튼튼하고 건강하고 예쁘기를 바랐다. 빈센트는 룰랭네 아기가 부모가 겨우 입에 풀칠하던 때에 웃으며 건강하게 태어났다고 답했다.
15.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년
빈센트가 해바라기를 그린 것은 1888년 8월이었고, 10월 23일 노란 집에 온 고갱은 해바라기가 이미 다 지고 없던 12월에 해바라기 꽃병 앞 이젤에서 작업하는 그를 기억에 의지해 그렸다. 기억으로 그리느냐가 바로 두 사람이 다툰 문제였다. 고갱은 머릿속에서 그렸고 빈센트는 실물을 보고 그렸으며, 11월 말로 갈수록 논쟁은 점점 달아올라 빈센트 스스로 “지나치게 전기가 통한다”고 할 정도였다. 고갱은 베르나르에게, 빈센트는 두꺼운 붓질에서 우연히 생기는 효과를 높이 치지만 “나는 이리저리 주물러 대는 것을 질색한다”고 불평했다.
고갱은 빈센트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렸다. 빈센트는 오른쪽 아래 구석에 끼어 있고, 고개를 숙였으며, 눈은 거의 감긴 채 손 쪽으로 내리깔려 있다. 오른팔은 그림을 가로질러 뻗어 있고, 가는 붓끝이 위쪽 꽃 옆의 이젤 다리에 닿는다. 해바라기는 짚으로 엮은 의자 위 짙푸른 꽃병에 꽂혀 있고, 그 가운데 가장 큰 꽃의 한가운데에는 눈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미술관 도록은 이 눈을 지금 런던에 있는 빈센트의 해바라기와 연결한다.
12월 20일 무렵 고갱은 초상화를 마쳤다. 12월 23일 빈센트는 발작을 일으켜 그 와중에 자기 귀를 훼손했고, 고갱은 파리로 떠나 1월 초 이 그림을 테오에게 건넸다. 테오는 당시 아직 약혼녀였던 요에게, 빈센트를 그린 초상화 가운데 이것이 그의 내면을 가장 잘 담아냈다고 썼다.


이 그림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말은 고갱만이 15년 뒤 책 《전과 후》에 적어 두었고, 미술관 도록은 이 말을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고갱에 따르면 빈센트는 초상화를 보고 “이건 나야, 하지만 미쳐 버린 나지”라고 말했고, 그날 저녁 카페에서 압생트 잔을 고갱의 머리에 던졌다. 빈센트 자신은 1889년 9월 동생에게 자기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초상화를 보았느냐고 물으며, 거기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당시 그대로의 “극도로 지치고 전기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고 썼다.
16.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9년
아를을 떠난 고갱은 빈센트에게 편지를 보내, 노란 집의 자기 방에 걸려 있던 노란 배경의 해바라기 그림을 달라고 하면서 대신 아를에 두고 온 습작들을 주겠다고 했다. 1889년 1월 17일 빈센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해바라기 그림을 내놓으라고 한다며 분개했고, 그 해바라기는 “단연코 내가 가지겠다”며, 고갱은 이미 해바라기 그림을 두 점 가지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썼다.
고갱 본인에게는 나흘 뒤 더 부드럽게 답했다. 그 그림에 대한 고갱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안목은 칭찬하며, 모란이 화가 자냉의 것이고 접시꽃이 코스트의 것이라면 해바라기는 남들보다 먼저 자기가 차지했다고 말하고, 똑같은 그림을 두 점 그려 보겠다고 약속했다. 1월 28일 그는 테오에게 “완전히 동등하고 똑같은 반복작”을 마쳤다고 알렸다. 이 캔버스가 그 가운데 하나로, 지금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8월 그림을 되풀이한 것이며, 빈센트가 병원에서 돌아오고 몇 주 뒤에 그려졌다.
여기에는 노란색이 세 가지 있다. 옅은 레몬빛 벽, 더 진한 노란색 탁자, 그리고 아래쪽에 크림색 띠를 두른 주황빛 황토색 꽃병인데, 그 띠에는 하늘색 물감으로 ‘빈센트’라고 쓰여 있다. 탁자와 벽이 만나는 곳에는 가는 검붉은 선이 지나간다. 열다섯 송이 남짓한 꽃 가운데 어떤 것은 아직 꽃잎을 온전히 두르고 있고, 어떤 것은 꽃잎이 다 떨어져 씨앗 머리만 남았으며, 한 송이는 꽃병 가장자리 너머로 늘어져 있다.
위쪽 가장자리에는 캔버스 전체를 가로질러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이음매가 있다. 빈센트는 작업하는 도중에 위쪽에 좁은 소나무 막대를 덧대고 거기에 꽃다발 윗부분을 이어 그렸는데, 2016~2019년의 조사에서 이것이 그 자신의 작업임이 밝혀졌다. 그의 붓질이 이음매를 넘어 이어지고, 막대 위 물감에 그의 지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61년 복원가 얀 코르넬리스 트라스, 곧 1931년에 《침실》을 배접한 바로 그 사람이 이 막대를 떼어 냈다가 볼트 세 개로 다시 고정했고, 그 뒤로 이음매는 더 눈에 띄게 되었다.
2019년 1월 미술관은 이 그림을 더는 전시회에 빌려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바탕과 물감층은 안정되어 있지만 진동과 습도,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1973년 이후 이 그림이 대여된 것은 여섯 번뿐이고, 마지막은 2014년 런던이었는데, 그곳에서 이 그림은 8월 판본 곁에 걸렸다.

생레미와 오베르, 1889~1890년

17. 빈센트 반 고흐 《피에타(들라크루아 모작)》, 1889년
1889년 5월 빈센트는 스스로 원해서 생레미의 정신 요양원에 들어갔고, 7월에 시작된 발작은 8월 말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빈센트가 가지고 있던 값싼 판화, 셀레스탱 낭퇴유가 들라크루아의 《피에타》를 옮긴 석판화가 다른 종이들과 함께 기름과 물감 속에 떨어져 망가졌다. 9월 10일 그는 테오에게, 그 일로 슬펐지만 그 뒤 이 “피에타”를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고 썼다.
그는 이미 두 달째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여동생 빌에게는 침실에서 자기 그림을 보는 것이 싫어서 들라크루아 한 점과 밀레 몇 점을 베껴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먼저 작은 판본을 그렸고(나중에 빌과 어머니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이 그림은 지금 바티칸에 있다), 다음으로 자신을 위해 이 큰 판본을 그려 자기 방에 걸었다. 동생에게는 들라크루아나 밀레의 흑백 판화를 모티프로 앞에 놓고 그 위에서 색으로 즉흥 연주를 한다고, 베토벤을 자기 식으로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한다고 설명했다.
마리아는 창백한 두건이 달린 짙푸른 망토를 두르고 앉아 손바닥을 편 두 팔을 벌린 채 보는 사람을 바라본다. 빌에게 빈센트는 그녀의 얼굴을 걱정과 눈물과 밤샘에 지친 사람의 넋 나간 듯 흐릿한 눈길을 한 창백한 얼굴로, 손은 “일하는 여자의 착하고 튼튼한 손”으로 묘사했다. 죽은 그리스도는 왼쪽 아래 구석을 향해 대각선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그의 다리는 푸른 주름이 진 옅은 노란 천에 덮여 있으며, 오른쪽 위 구석에는 동굴 입구 같은 어두운 바위가 드리워 있고, 캔버스에서 가장 따뜻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수염이다.
석판화는 흑백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머리색은 빈센트가 직접 고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자화상을 보지만, 빈센트는 편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닮았다는 것은 해석으로 남아 있다. 망가진 석판화도 기름과 물감 얼룩이 묻은 채로 가족의 컬렉션에 남아 있다.
18.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년
테오와 요의 아들은 1890년 1월 31일 파리에서 태어났고, 대부가 된 큰아버지를 따라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월 19일 빈센트는 생레미에서 어머니에게, 아기 이름을 “요즘 그토록 많이 생각했던” 아버지를 따라 지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곧바로 아기를 위해 “그들 침실에 걸도록” 그림을 시작했다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아몬드 꽃의 큰 가지들”이라고 썼다. 프로방스에서 아몬드는 가장 먼저, 2월에 꽃을 피운다.
캔버스에는 가지와 청록빛 하늘뿐이고, 하늘은 왼쪽 위가 가장 밝다. 굵은 회녹색 가지들이 아래에서 들어와 아래쪽 3분의 1에서 엇갈리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오른쪽 위에서는 따로 떨어진 가는 가지 하나가 늘어지고, 가지들은 모두 가장자리 너머로 이어진다. 윤곽은 일본 판화처럼 어두운 선으로 둘렀다. 꽃은 크림색과 흰색으로, 어떤 것은 피었고 어떤 것은 아직 봉오리이며, 오른쪽 가장자리의 꽃은 분홍빛을 띠고,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아래, 굵은 가지 끝에는 그림에서 가장 흰 꽃이 피어 있다.
2월 22일 아를에 다녀온 빈센트는 가장 긴 발작으로 쓰러졌고, 과수원의 꽃이 이미 다 진 4월 말에야 정신을 차렸다. 4월 말 그는 테오에게 작업이 잘되고 있었고 꽃 핀 가지를 그린 마지막 캔버스가 아마 자신이 그린 것 가운데 가장 끈기 있고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며, 바로 아몬드를 그리던 때에 병이 났다고 썼다.
이 그림을 받은 아기가 바로 1962년 가족의 컬렉션을 재단에 넘긴 그 빈센트 빌럼이다. 1890년 5월, 파리 근교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가는 길에 빈센트는 동생 집에 들러 벽에 걸린 이 그림을 보았고, 6월에는 여동생 빌에게 테오와 요가 그림을 피아노 위에 걸었다고 썼다.

19.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년
어빙 스톤의 1934년 소설 《열정의 랩소디》에서 빈센트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그리고 이튿날 자신에게 총을 쏘며, 커크 더글러스가 나온 1956년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었다. 미술관은 이 이야기를 끈질긴 신화라고 부른다. 빈센트가 이 그림 뒤에도 몇 점을 더 그렸기 때문이다.
1890년 7월 6일 빈센트는 오베르에서 파리로 가서 테오와 요, 그 아들을 찾았다. 아기는 심하게 앓고 있었고, 테오는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차릴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모두 지쳐 있어서 빈센트는 그날로 서둘러 오베르로 돌아왔다. 7월 10일 무렵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하는 동생과 제수씨”에게 편지를 써서, 요의 편지가 자기에게 복음과 같았고 함께 보낸 힘든 시간 뒤의 우울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고, 그리고 자기 삶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큰 캔버스 세 점, “불안한 하늘 아래 펼쳐진 광활한 밀밭”을 그렸다고 알리며, 일부러 그 안에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려 했고, 테오와 요가 그림을 보며 그가 시골에서 건강하고 힘을 북돋운다고 여기는 것을 알아보기를 바랐다. 편지에는 그림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이 그림은 묘사와 화면 비율로 알아본다.
캔버스는 폭이 높이의 두 배다. 하늘은 위쪽 가장자리에서 거의 검은색이다가 아래로 갈수록 밝아져 선명한 파란색이 되고, 그 안에 동그란 옅은 청록색 구름 두 덩이가 떠 있으며, 밭 위로는 짧게 꺾은 검은 붓질로 그린 까마귀 마흔 마리 남짓이 날아간다. 가운데 아래에서는 양옆에 선명한 초록 띠를 두른 적갈색 길이 올라와 오른쪽으로 휘다가 밭 한가운데, 밭 끝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끊기고, 다른 두 길은 왼쪽과 오른쪽 가장자리 너머로 사라진다. 1991년 4월 14일 미술관에서 그림 20점을 도난당했다가 같은 날 버려진 차 안에서 되찾았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심하게 찢겨 있어서 캔버스를 복원해야 했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나고 이틀 뒤 요는 테오에게, 그가 자기들 집에 머물렀을 때 더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된다고 썼다. 1914년 편지집 서문에서 그녀는 그의 마지막 그림들에서 다가오는 불행이 느껴진다고, 그 불행이 “폭풍 속에 밭 위를 질주하는 검은 새들처럼” 다가온다고 썼다.
20. 빈센트 반 고흐 《나무 뿌리》, 1890년
요의 오빠이자 테오의 가까운 친구였던 안드리스 봉어르는 1893년 서명 없이 발표한 글에서, 빈센트가 죽음을 앞둔 그날 아침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한 숲 속 덤불”을 그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2012년 미술관 연구원 루이스 반 틸보르흐와 식물 전문가 베르트 마스가 이 말을 이 그림과 연결했고, 그 뒤로 이 그림은 아마도 빈센트의 마지막 작품이었을, 미완성으로 남은 그림으로 여겨진다.
미술관 스스로도 이 그림이 처음 보면 밝은 색과 거친 형태가 뒤범벅된 것 같다고 쓴다. 그러다 그 속에서 위쪽 가장자리에 잘린 나무줄기들, 검은 윤곽을 두르고 옅은 하늘색에서 군청색까지 온갖 파란색으로 칠한 뿌리들, 주황색과 황토색 흙, 초록 잎이 하나씩 가려진다.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는 눈처럼 보이는 둥근 혹이 달린 옅은 하늘색 뿌리가 크게 옹이진 덩어리를 이루고, 아래쪽 군데군데에는 물감이 워낙 얇게 칠해져 캔버스의 올이 비쳐 보인다.
그림에 담긴 것은 비탈을 파고든 이회토 채석장 가장자리의 둔덕과, 비탈을 깎아 내면서 뿌리가 드러난 가지치기한 나무들이다. 봉어르는 아침이라고 썼지만, 미술관 연구원 테이오 메덴도르프는 뿌리에 비친 햇빛으로 보아 마지막 붓질은 오후 늦게 칠해졌다고 본다.
2020년 오베르의 반 고흐 연구소 학술 책임자 바우터르 반 데르 벤은 20세기 초의 도비니 거리를 찍은 옛 엽서에서 이 둔덕을 알아보았다. 빈센트가 묵던 라부 여관에서 15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미술관 연구자들은 이곳이 바로 그 장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인정했고,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지 130년 뒤인 2020년 7월 28일 이 발견을 발표했다. 그림 속 가장 큰 그루터기는 둔덕에 남아 있어서 지금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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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컬렉션은 이보다 크다. 빈센트의 그림이 200점 넘게, 소묘가 500점가량, 편지가 700통 넘게 남아 있다. 다시 찾는다면 형제가 빙에게서 사들인 일본 판화들과 에밀 베르나르의 작품들부터 보면 좋은데, 그 가운데에는 《레 미제라블》과 같은 빈센트의 부탁에 대한 답으로 그린 베르나르의 《고갱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도 있다. 1973년 이후 사들인 그림 가운데서는 밀레, 쥘 브르통, 모네, 쇠라, 시냐크를 찾아볼 만하다. 빈센트 자신의 후기작으로는 《천둥 구름 아래의 밀밭》을 권하는데,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테오와 요에게 보낸 7월 편지에 묘사된 밀밭 그림들 가운데 두 번째 그림으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