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를 내려다보는 카포디몬테 언덕의 궁전은 그림을 들이려고 지은 건물이다. 나폴리 왕 부르봉의 카를로스는 파르네세 가문의 컬렉션을 물려받아 1735년부터 파르마에서 남쪽으로 옮겨 왔고, 1738년 9월 10일 언덕에서는 건축가 조반니 안토니오 메드라노의 설계에 따라 궁전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궁전의 방들에 첫 그림이 걸린 것은 1758년 무렵이었는데, 벌써 1759년에 카를로스는 스페인 왕이 되어 떠났고, 컬렉션은 나폴리에 남아 아들 페르디난도 4세에게 넘어갔다.

1798년 12월 페르디난도는 프랑스군을 피해 팔레르모로 달아났고, 그림 일부가 궁정과 함께 그곳으로 갔으며, 1799년에는 남은 그림 가운데 일부를 프랑스군이 가져갔다. 나폴레옹 시대가 지나자 컬렉션은 언덕에서 시내의 팔라초 델리 스투디로 옮겨졌고, 그곳에 왕립 부르봉 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며(지금 그 건물에는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궁전은 왕의 거처가 되었다. 사보이아 왕가 때인 1862~1864년에 그림 약 900점이 다시 언덕 위로 돌아왔고, 시내 박물관에 남아 있던 나머지 그림은 1957년 카포디몬테에 국립 박물관이 문을 열 때 언덕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티치아노가 교황 바오로 3세 파르네세를 위해 그리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가족 초상에서 시작해, 다른 국가 기관이 소유하지만 1972년부터 박물관이 맡아 보관하고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으로 끝을 맺는다.

로마: 교황 일가와 그 집안의 사서 (1545~1600)

교황 파울루스 3세와 그의 손자들
교황 파울루스 3세와 그의 손자들티치아노, 1546, 카포디몬테 미술관

1. 티치아노 《교황 바오로 3세와 손자 알레산드로·오타비오 파르네세》, 1545~1546년

티치아노가 로마에서 바오로 3세를 두 손자와 함께 그릴 때 교황은 77세였다. 의자 뒤 왼쪽에 선 사람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으로, 할아버지가 교황이 된 1534년에 14세의 나이로 추기경 모자를 받았다. 바오로 쪽으로 몸을 숙인 사람은 동생 오타비오로, 1538년 카를 5세 황제의 서녀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1545년 8월 두 형제의 아버지이자 교황의 아들인 피에르 루이지가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었다.

티치아노는 1545년 가을 알레산드로 추기경의 초대를 받아 로마에 왔다. 그는 아마 1489년 무렵 피에베디카도레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의 벨리니 공방에서 배웠고, 그 뒤 조르조네의 화풍을 받아들였으며, 154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럽에서 가장 찾는 이가 많은 초상화가가 되어 카를 5세와 교황을 위해 동시에 일했다. 그가 로마에 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바사리와 베네치아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에게 도시와 고대 유적을 보여 주었고, 1546년 3월 19일 그는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로마에 온 데에는 볼일도 있었는데, 아들 폼포니오에게 교회 수입, 곧 성직록을 얻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가운데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다. 작고 등이 굽었으며, 긴 흰 수염에 카마우로라는 진홍색 벨벳 모자를 쓰고 모체타라는 붉은 어깨 망토를 둘렀다. 그는 오타비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래에서 비스듬히 그를 올려다본다. 알레산드로는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의자 등받이 맨 위 가까이에 오른손을 올리고 집게손가락을 위로 곧게 뻗었다. 오타비오는 할아버지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 다리를 굽혔다. 티치아노는 교황의 얼굴과 수염, 그리고 팔걸이에서 늘어진, 반지 낀 왼손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그렸다. 붉은 탁자 가장자리에 놓인 교황의 오른손은 묽은 갈색 붓질로 윤곽만 잡혀 있고, 오타비오의 다리와 교황의 흰 옷과 탁자보도 그렇게 넓고 빠른 붓질로 칠해져 있다.

초상이 왜 미완성으로 남았는지에 대해 역사가들의 설명은 저마다 다르다. 로베르토 차페리는 1990년에 낸 책에서 이 그림을 가문의 권력이 누구에게 넘어갈지를 보여 주는 공식 초상으로 읽고, 티치아노가 그리는 동안 파르네세 가문의 정책이 황제에게서 프랑스 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그림이 필요 없어졌다고 본다. 다른 연구자들은 미완성의 이유를 성직록과 연결한다. 1546년 3월 폼포니오는 베네치아 근처의 성직록을 얻었지만 세라발레 근처의 더 부유한 수도원은 끝내 얻지 못했는데, 티치아노가 원하던 것을 얻고 떠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더는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고 떠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미완성 초상은 가문에 남았다. 17세기 중반까지는 로마의 파르네세 궁전에 있었고, 1680년 이전에 파르마의 팔라초 델 자르디노로 옮겨졌으며, 그 뒤 필로타 궁전의 공작 미술관으로 갔다. 1731년 파르네세 가문의 마지막 파르마 공작 안토니오가 자식 없이 죽자,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아내인 조카딸 엘리자베타 파르네세가 상속자가 되었다. 같은 해 그녀의 아들 부르봉의 카를로스가 파르마를 얻었고, 1734년 나폴리 왕이 되어 1735년부터 파르네세 가문의 그림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 초상은 훗날 프랑스군을 피해 달아난 궁정과 함께 팔레르모로 갔다.

교황 파울루스 3세와 그의 손자들
교황 파울루스 3세와 그의 손자들티치아노, 1546, 카포디몬테 미술관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티치아노, 1543, 카포디몬테 미술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초상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초상티치아노, 1545, 카포디몬테 미술관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마르첼로 베누스티, 1549, 카포디몬테 미술관

2. 마르첼로 베누스티 《최후의 심판》(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모사), 1549년

만토바의 에르콜레 곤차가 추기경이 로마에 둔 대리인 니노 세르니니는 1542년 8월 5일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새 작품을 모사하고 있는 만토바 출신 젊은이를 보았다고 알렸다. 세르니니의 말로는 미켈란젤로가 그 나이에 이 젊은이에 견줄 만한 사람을 알지 못하며 이 젊은이는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고, 세르니니 자신은 그 젊은이가 그린 카론의 배 소묘를 추기경을 위해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만토바 사람이 마르첼로 베누스티였고, 세르니니의 편지는 그를 미켈란젤로와 연결하는 가장 이른 문서로 남아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 벽의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은 1541년 10월 31일에 공개되었다. 베누스티는 곧 미켈란젤로의 주변 사람이 되었고, 1540년대 중반부터는 미켈란젤로의 소묘를 바탕으로 작은 그림들을 그렸다.

바오로 3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549년, 그의 손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은 베누스티에게서 벽 전체를 패널에 기름 섞은 템페라로 옮겨 그린 모사화를 받았다. 베누스티는 프레스코 위쪽의 반원형 뤼네트 두 개를 빼고 화면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십자가를 든 천사들은 왼쪽 위 구석에, 기둥을 든 천사들은 오른쪽 위 구석에 놓였다. 그 사이에 그는 미켈란젤로의 벽화에 없는 인물들을 더했다. 맨 위에는 펄럭이는 망토가 이룬 타원 속에 성부가 떠 있고, 그 아래 둥근 노란 빛 속에 성령의 비둘기가, 다시 그 아래에 그리스도가 있어 패널의 중심축을 따라 삼위일체가 늘어서는데, 미켈란젤로의 벽화에서는 그리스도 혼자 심판한다. 모든 인물 위의 하늘은 고르고 짙은 파란색이다.

1563년 12월 트리엔트 공의회가 성화상에 관한 교령을 채택했고, 1564년 1월 21일 로마에서는 예배당 벽화에서 외설스럽다고 여긴 부분을 가리기로 결정했다. 미켈란젤로는 한 달도 지나지 않은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1564~1565년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벌거벗은 인물들 위에 옷자락을 그려 넣었다. 성녀 카타리나와 성 블라시오는 아예 새로 그렸다. 회반죽을 깨어 내고 두 인물을 다시 그리면서 카타리나에게 초록 옷을 입히고 블라시오의 고개를 위로, 그리스도 쪽으로 돌려 놓은 것이다.

1540년대에 줄리오 보나소네가 만든 판화와 다른 초기 모사본들에도 인물들은 가려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그 가운데 프레스코가 덧칠되기 전에 주문자를 위해 색채로 옮긴 모사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베누스티의 패널이다. 프레스코의 세척을 이끈 복원가 잔루이지 콜라루치에 따르면 카타리나와 블라시오 아래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회반죽은 더는 남아 있지 않고, 미켈란젤로가 두 인물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모사본으로만 알 수 있다. 베누스티의 그림에서 벌거벗은 카타리나는 부서진 바퀴 안에서 앞으로 몸을 숙이고, 그 뒤, 벽화에서라면 블라시오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붉은 옷의 인물이 몸을 굽혀 아래를 내려다본다.

3. 만노 디 바스티아노 스바리와 조반니 베르나르디 《파르네세 상자》, 1540년대~1561년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상자는 작은 건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휘어진 다리 위에 놓인 금도금 은제 직사각형 함으로, 뚜껑 자리에는 코니스와 끊긴 박공이 얹혀 있고, 금도금 틀 사이의 벽면은 푸른 청금석으로 채워져 있다. 맨 위 박공이 끊긴 자리에는 근육질에 수염 난 헤라클레스가 과일을 손에 들고 앉아 있다. 긴 쪽 면에는 수정 타원판 두 개가 박혀 있는데, 투명한 돌에 새긴 기마병들과 쓰러지는 몸들의 전투 장면이 무광의 회백색 그림처럼 보인다. 타원판 위의 카르투슈에는 라틴어 표어가 적혀 있고, 왼쪽 타원판 아래 테두리에서는 “…ANNES·DE·BERNARDI”라는 서명을 읽을 수 있으며, 두 타원판 사이의 헤르마 기둥에는 금 바탕에 푸른 백합 여섯 송이를 놓은 파르네세 가문의 에나멜 문장이 걸려 있다. 문장 위에는 술 달린 붉은 추기경 모자가 있어서, 이것이 알레산드로 추기경 자신의 문장임을 알 수 있다.

파르네세 상자
파르네세 상자만노 디 바스티아노 스바리, 1561, 카포디몬테 미술관

보석 조각가 조반니 베르나르디는 1535년 이후 추기경을 섬기게 되었고, 1543년과 1544년의 편지들에서 이미 수정판 작업을 추기경에게 알리고 있다. 피렌체의 금세공인 만노 디 바스티아노 스바리의 은 세공 작업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1548년이고, 상자가 완성된 것은 베르나르디가 세상을 떠나고 몇 해가 지난 1561년 무렵이었다. 바사리는 수정판의 장면들이 페리노 델 바가를 비롯한 여러 화가의 소묘를 따라 새겨졌다고 쓰고, 이만큼 완벽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달리 없다고 장담한다.

상자를 무엇에 쓰려고 만들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논쟁한다. 안에 벨벳 안감이 없으니 보석을 넣어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은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가 추기경을 위해 그린 기도서가 이 상자에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은 적이 있다. 박물관의 설명으로는 1565년 추기경이 조카 알레산드로, 곧 뒷날의 파르마 공작과 혼인하는 포르투갈의 마리아에게 결혼 선물로 이 상자를 주었는데, 제작을 시작하고 약 20년 뒤의 일이다.

19세기 왕립 부르봉 박물관에서는 이 상자를 금세공인이자 조각가인 벤베누토 첼리니의 작품으로 전시했는데, 스바리는 흔히 첼리니의 제자로 일컬어진다. 2018년 복원 때 상자는 처음으로 부품 하나하나까지 분해되었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복원가들은 장식 속 아주 작은 구멍으로 여는 비밀 자물쇠와, 바닥의 빈 공간에 밀어 넣은 1564년의 말린 문서를 찾아냈다. 처음에는 문서를 어떤 전갈로 여겼지만, 알고 보니 틈을 막으려고 끼워 넣은 종이에 지나지 않았다.

파르네세 상자
파르네세 상자만노 디 바스티아노 스바리, 1561, 카포디몬테 미술관

4. 엘 그레코 《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 1571년경

1570년 11월 16일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에게, 티치아노의 제자인 젊은 칸디아 사람이 로마에 왔다고 편지를 썼다. 클로비오가 보기에 그는 그림 솜씨가 보기 드물게 뛰어났고, 그가 그린 자화상은 로마의 화가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클로비오는 그의 생활비를 청하지 않고 파르네세 궁전에서 얼마 동안 지낼 방 하나만 부탁하며, 집사인 루도비코 백작에게 위층에 방을 마련해 주라고 일러 달라고 추기경에게 청했다. 칸디아 사람, 곧 크레타 태생인 이 젊은이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뒷날 엘 그레코라고 불리게 된다.

클로비오는 1498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1540년 무렵부터 추기경의 세밀화가로 파르네세 궁전에서 살았고, 바사리는 그를 새로운 작은 미켈란젤로라고 불렀다. 엘 그레코는 그를 노인의 모습으로, 가로로 긴 캔버스에 허리 위까지 그렸다. 클로비오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고 얼굴은 관람자 쪽으로 돌렸는데, 머리는 하얗고 수염은 희끗하며 코는 붉어졌고 눈꺼풀은 무겁다. 그는 한 손의 집게손가락으로 작고 두꺼운 책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그 책을 우리 쪽으로 펼쳐 들고 있는데, 펼친 면에는 빠른 붓질로 그린, 넓은 금테를 두른 세밀화가 보인다. 국가 문화재 목록에서는 이 책을 클로비오가 추기경을 위해 그림을 그려 1546년에 완성한 기도서로 보는데, 그 기도서 자체는 뉴욕의 모건 도서관에 있다. 오른쪽 위 구석의 창 너머로는 한 줄기 빛이 비치는 폭풍우 하늘과 푸른 산, 바람에 휜 가는 나무가 보인다.

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
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엘 그레코, 1571, 카포디몬테 미술관

클로비오가 편지에서 말한 자화상이 사라졌으니, 이 초상은 아마 현재 남아 있는 엘 그레코의 초상 가운데 가장 이른 작품일 것이다. 알레산드로 추기경이 주문자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초상의 첫 소유자로 알려진 사람은 파르네세 궁전의 사서 풀비오 오르시니였고, 오르시니는 1600년 이 초상을 포함한 자신의 컬렉션을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추기경에게 유증했다.

1572년 여름 엘 그레코는 파르네세 궁전에서 쫓겨났다. 7월 6일 그는 추기경에게 편지를 써서, 집사 루도비코 백작이 추기경 전하의 명령이라고 말하며 자기를 집에서 내보냈다고 알리고, 이런 모욕을 당할 만한 잘못이 자기에게는 짚이지 않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꼭 알고 싶다고 썼다. 1620년 무렵 화가들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줄리오 만치니는, 엘 그레코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벽에서 깨어 내고 점잖게 다시 그리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고 적었다. 몇몇 연구자는 엘 그레코가 쫓겨난 일을 이 제안과 연결하지만, 만치니는 날짜도 파르네세 가문도 언급하지 않는다. 1572년 9월 18일 엘 그레코는 화가들의 단체인 로마의 성 루카 아카데미에 세밀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
줄리오 클로비오의 초상엘 그레코, 1571, 카포디몬테 미술관

파르마: 처형된 음모자들의 그림 (1612)

5. 대 피터르 브뤼헐 《눈먼 자들의 우화》, 1568년

조반니 바티스타 마시는 1612년 5월 19일 파르마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라누초 1세 파르네세 공작을 죽이려던 귀족 음모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1611년 11월 10일 체포되어 1612년 1월 3일 고문이 두려워서라며 자백했다. 공작은 처형된 이들의 영지와 돈과 함께 그들의 그림도 몰수했는데, 마시의 재산 가운데에는 대 피터르 브뤼헐이 1568년에 그린 캔버스 두 점, 《눈먼 자들의 우화》와 《염세가》가 있었다.

그림을 모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 코시모 마시였다. 피렌체 사람인 코시모는 추기경의 조카이자 뒷날 파르마 공작이 되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섬겼다. 그는 알레산드로의 수석 비서였고, 1571년 레판토 해전에 그를 수행했으며, 1577년부터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그의 일을 많이 맡아 보았고, 1591년 파르마 영지에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 알레산드로가 죽은 뒤 코시모는 1594년 9월까지 브뤼셀에 붙잡혀 있다가, 1590년대 중반 네덜란드 그림들을 가지고 파르마로 돌아왔다. 아들은 그 그림들과 함께 아버지의 빚도 물려받았다.

눈먼 자들의 우화
눈먼 자들의 우화대 피터르 브뤼헐, 1568, 카포디몬테 미술관

눈먼 사람 여섯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대각선을 그리며 줄지어 걷는데, 저마다 앞사람의 어깨나 함께 쥔 지팡이를 붙잡고 있다. 맨 왼쪽의 두건 쓴 사람은 아직 눈을 감은 채 차분히 걷는다. 챙 넓은 모자를 쓴 노인은 고개를 젖혔고, 허옇게 된 그의 눈은 하늘을 향한다. 다섯째 사람은 벌써 앞으로 고꾸라지며 입을 벌린 얼굴과 텅 빈 눈구멍을 우리 쪽으로 돌렸고, 길잡이는 오른쪽 아래 구석의 도랑에 벌렁 누워 있다. 넷째 사람의 지팡이와 쓰러지는 다섯째 사람 사이로 높고 가는 첨탑이 선 시골 교회가 보인다.

브뤼헐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아교 템페라로 아마포 캔버스에 이 《우화》를 그렸다. 이런 캔버스화는 빠르고 싸게 만들었기에 대부분 사라졌고, 그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몇 점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는 물감이 얇게 칠해져 있어서, 넷째 사람의 밝은 망토 위로 천의 올이 비쳐 보인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BRVEGEL M.D.LXVIII”이라고 작게 적혀 있다. 1943년 가을 스폴레토 근처에서 독일 병사들이 나폴리 그림이 든 상자들을 열었을 때(이 이야기는 티치아노의 《다나에》 장에서 한다), 《눈먼 자들의 우화》는 1번 상자에 들어 있었다.

염세가
염세가대 피터르 브뤼헐, 1568, 카포디몬테 미술관

6. 안드레아 델 사르토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 루이지 데 로시의 초상》(라파엘로 원작 모사), 1525년경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바사리이고, 그 밖의 증인은 없다. 그는 소년 시절 피렌체에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그의 말로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가 모사화를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1520년대 중반 만토바의 군주 페데리코 2세 곤차가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만나러 가는 길에 피렌체를 지나다가 메디치 저택의 문 위에 걸린 라파엘로의 레오 10세 초상을 보고 교황에게 그것을 청했고, 클레멘스는 승낙했다. 피렌체에서 가문의 일을 돌보던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는 이 초상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액자가 변변치 않으니 금도금한 새 액자를 주문하겠다고 말했고, 그사이 피렌체 화가 안드레아가 그의 집에서 몰래 모사화를 그리며 때 얼룩까지 모든 것을 똑같이 옮겼다. 오타비아노 자신도 그것을 원본과 구별하지 못했다. 모사화는 똑같은 액자에 담겨 만토바로 갔고, 원본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는 그 그림을 칭찬했다.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 루이지 데 로시의 초상(라파엘로 원작 모사)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 루이지 데 로시의 초상(라파엘로 원작 모사)안드레아 델 사르토, 1525, 카포디몬테 미술관
레오 10세의 초상
레오 10세의 초상라파엘로, 1518, 우피치 미술관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 루이지 데 로시의 초상(라파엘로 원작 모사)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 루이지 데 로시의 초상(라파엘로 원작 모사)안드레아 델 사르토, 1525, 카포디몬테 미술관

여러 해 뒤 바사리가 줄리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줄리오는 믿지 않고, 자기가 손수 칠한 붓 자국을 자기가 못 알아볼 리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바사리는 그림을 뒤집게 하고 뒷면에 피렌체에서 해 둔 표시를 보여 주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줄리오는 이 그림을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높이 친다고 대답했는데, 뛰어난 거장이 남의 화풍을 이토록 잘 흉내 내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오 10세는 흰 다마스크 옷 위에 붉은 벨벳 모자를 쓰고 흰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망토를 걸친 채 앉아 있다. 한 손은 세밀화가 든 펼친 필사본 위에 얹었고, 다른 손에는 금테 돋보기를 들었으며, 책 앞에는 붉은 비단 술이 달린 금도금 은종이 놓여 있다. 왼쪽에는 뒷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 곧 이 초상을 곤차가에게 내준 바로 그 사람이 서 있고, 오른쪽 의자 뒤에는 루이지 데 로시 추기경이 있다. 의자 등받이 끝에는 금도금한 공이 달려 있고, 그 공에 창문이 비친다.

모사화가 어떻게 만토바에서 콜로르노의 바르바라 산세베리노 컬렉션으로 들어갔는지는 역사가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산세베리노는 라누초 1세에 맞선 바로 그 음모에 연루되어 1612년 2월 12일 체포되었고, 5월 19일 마시와 같은 날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 가운데 맨 먼저 처형되었으며, 그녀의 컬렉션은 모사화와 함께 공작에게 넘어갔다. 패널 뒷면에는 붓으로 “p. leon. X / ma[no] di rafaelo d'urbino”, 곧 “교황 레오 10세, 우르비노의 라파엘로의 손”이라고 적혀 있다. 1841년 니콜리니는 왕립 부르봉 박물관 해설서에서 라파엘로의 원본은 바로 나폴리의 이 그림이라고 주장했고, 피렌체의 그림을 델 사르토의 모사화로 보았다.

나폴리: 남쪽으로 옮겨 온 컬렉션, 왕, 그리고 혁명 (1734~1803)

7. 로렌초 로토 《주교 베르나르도 데 로시의 초상》, 1505년

베네치아의 젊은 화가 로렌초 로토는 1505년 트레비소 주교 베르나르도 데 로시를 그리면서, 초상에 씌울 덮개로 우의화를 그린 패널을 따로 만들었다. 덮개 한가운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거기에 주교의 문장이 걸려 있다. 나무 한쪽에서는 푸토가 책과 도구들을 만지작거리고 가파른 돌길이 산꼭대기로 이어지며, 다른 쪽에서는 술 취한 사티로스가 술 그릇들 사이에 널브러져 있고 먼바다에서는 폭풍 속에 배가 가라앉는다. 덮개를 액자의 홈에 끼워 밀어 빼는 방식이었는지, 경첩으로 초상에 달았는지를 두고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주교 베르나르도 데 로시의 초상
주교 베르나르도 데 로시의 초상로렌초 로토, 1505, 카포디몬테 미술관
미덕과 악덕의 우의
미덕과 악덕의 우의로렌초 로토, 1505,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주교 베르나르도 데 로시의 초상
주교 베르나르도 데 로시의 초상로렌초 로토, 1505, 카포디몬테 미술관

덮개 아래에는 허리 위까지 그린 초상이 있었다. 주교는 몸을 왼쪽으로 돌렸지만 밝은 회청색 눈으로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얼굴은 혈색 좋고 통통하며 턱이 묵직하고, 어두운 모자 아래 귀 언저리로 붉은 기 도는 곱슬머리가 삐져나와 있다. 그는 작고 둥근 단추를 단 연어빛 빨간 망토를 입고 오른손으로 작게 만 종이 한 장을 가슴에 대고 있으며, 손가락에는 무늬를 새긴 묵직한 금반지를 꼈다. 배경은 온통 짙은 초록 휘장이다.

로시는 1468년에 태어나 1499년 트레비소 주교가 되었고, 1509년 베네치아로 밀려났으며, 1511년부터 로마의 교황청에서 일하다가 1527년 로마 약탈 뒤 파르마로 가서 같은 해 6월 24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초상이 어떻게 파르네세 가문에 들어갔는지 알려 주는 문서는 찾지 못했다.

1734~1739년 파르네세 가문의 그림들이 파르마에서 나폴리로 옮겨질 때 초상은 떠났고 덮개는 남았다. 1791년에는 덮개가 이미 파르마의 안토니오 베르티올리 개인 컬렉션에 있었고 1803년에도 그곳 목록에 올라 있었는데, 덮개가 언제 초상과 떨어졌는지는 어느 목록에도 적혀 있지 않다. 1880년 무렵 덮개는 베르가모에 있었고, 1935년 뉴욕의 크레스 재단이 사들였으며, 1939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들어갔다.

나폴리에서는 이 초상의 작가 이름이 잊혔고, 미술사가 카발카셀레는 이 그림을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으로 보았다. 1886년 이 초상을 따라 그린 조지프 린던 스미스는 자기 소묘에 “한스 홀바인, 나폴리 박물관”이라고 적었는데, 이 소묘는 하버드 미술관에 있다.

8.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스》, 1745년

1744년 8월 11일 나폴리 왕 부르봉의 카를로스의 군대는 로마 남쪽 교황령의 벨레트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아 냈고, 이 승리로 카를로스는 나폴리 왕위를 지켰다. 같은 해 11월 3일, 파르네세 가문의 유산을 남쪽으로 옮기고 언덕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한 바로 그 왕 카를로스가 로마에 와서 성 베드로 대성전 앞 광장으로 들어섰고, 교황 베네딕토 14세를 예방했다. 1745년 그는 로마 화가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에게 이날을 그린 그림 두 점을 주문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스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스조반니 파올로 파니니, 1745, 카포디몬테 미술관

파니니는 대성전 앞 광장에 있는 카를로스를 그렸다. 왼쪽에는 캔버스 가장자리에 잘린 대성전 정면이 가파르게 솟아 있는데, 그 프리즈에서 “PAVLVS V BVRGHESIVS”라는 글귀의 일부를 읽을 수 있고, 발코니와 창문은 아주 작은 구경꾼들로 가득하다. 가운데에는 곧게 뻗은 열주랑 한쪽 날개 위로 시계탑이 달린 벽돌 건물인 사도 궁전이 솟아 있고, 오른쪽에는 오벨리스크와 분수의 물줄기가 보인다. 붉은 제복에 삼각모를 쓴 기마병들이 광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지르고,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는 붉은 옷의 기수가 밝은 회색 말에 앉아 있으며, 푸른 옷의 남자가 모자를 벗어 들고 그의 말 쪽으로 손을 뻗는다. 파니니는 앞쪽의 군중을 그늘 속에 두었고, 광장과 기마병들과 대성전 정면에는 햇빛이 가득하다.

파니니는 그림에 1745년이라고 서명했고, 목록들에서는 이 그림을 흔히 《성 베드로 대성전의 카를로스 3세》라고 부르지만, 그가 카를로스 3세가 된 것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은 1759년의 일이다. 1943년 이 그림은 스폴레토에서 티치아노의 《다나에》와 함께 3번 상자에서 꺼내졌다. 이 그림에 교황은 나오지 않는다. 퀴리날레 궁전 정원의 커피하우스에서 베네딕토 14세를 만나는 장면은 파니니가 1746년이라고 서명한 짝 그림에 그렸다.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스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스조반니 파올로 파니니, 1745, 카포디몬테 미술관
로마 퀴리날레의 커피하우스에서 교황 베네딕토 14세를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 3세
로마 퀴리날레의 커피하우스에서 교황 베네딕토 14세를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 3세조반니 파올로 파니니, 1746, 카포디몬테 미술관

9. 안니발레 카라치 《헤라클레스의 선택》, 1596년

1662년 파르네세 가문이 로마의 그림들을 파르마로 옮길 때, 파르네세 궁전의 작은 서재 천장에서 안니발레 카라치의 캔버스를 떼어 내고 그 자리에 모사화를 달았다. 안니발레는 1596년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추기경을 위해 궁륭 한가운데에 들어갈 이 그림을 그렸고, 둘레의 벽과 궁륭은 헤라클레스, 오디세우스, 페르세우스의 이야기를 담은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다. 박물관에 따르면 주제를 제안한 사람은 클로비오의 초상을 오도아르도에게 유증한 바로 그 사서 풀비오 오르시니였다. 1595년 로마로 옮겨 와 같은 궁전에 자리 잡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에게 이것은 파르네세 갤러리 천장화보다 앞선 첫 로마 주문이었다.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디코스에게서 나와 크세노폰이 전한 것으로, 젊은 헤라클레스가 미덕과 쾌락 사이에서 길을 고르는 내용이다. 젊고 벌거벗은 헤라클레스는 야자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 곤봉을 쥐고, 두 여인을 지나쳐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왼쪽에는 연푸른 옷에 붉은 주황색 망토를 두르고 짧은 검을 든 미덕이 서서, 치켜든 손으로 위쪽의 헐벗은 비탈을 가리키는데, 길이 난 그 비탈 꼭대기에는 흰 말이 서 있다. 오른쪽에서는 비치는 희고 분홍빛 천을 두른 쾌락이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어깨 너머로 헤라클레스를 돌아본다. 오른쪽 아래 구석의 탁자 위에는 히죽 웃는 가면과 펼친 책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탬버린과 바이올린과 카드가 있으며,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월계관을 쓰고 깃펜을 든 남자가 주인공들을 올려다본다.

헤라클레스의 선택
헤라클레스의 선택안니발레 카라치, 1596, 카포디몬테 미술관

캔버스는 파르네세 가문의 유산과 함께 파르마에서 나폴리로 왔다. 1799년 프랑스군이 그림을 가져갔고, 박물관에 따르면 도메니코 베누티가 로마에서 그림을 찾아내어 1801년에는 그림이 이미 나폴리로 돌아와 있었다. 1801~1802년 무렵 나폴리의 왕립 도자기 공장에서는 《헤라클레스의 선택》의 구도 전체를 피에트로 아퀼라의 1674년 판화에서 옮겨 그린 플라토, 곧 커다란 장식 쟁반을 만들었고, 2021년 카포디몬테 친구회가 모금한 기부금으로 이 쟁반을 사서 박물관에 기증했다.

파르네세 유산 너머로 커 가는 박물관 (1808~1827)

10. 콜란토니오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1444~1446년경

콜란토니오의 패널은 1808년 프란치스코회의 산 로렌초 마조레 성당 제의실에서 팔라초 델리 스투디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프랑스가 나폴리를 다스리면서 왕국의 수도회들을 폐지한 때였다. 이 패널이 제의실로 간 것은 1639년 무렵으로, 패널이 아랫부분을 이루던 큰 제단화가 그때 해체되었다. 패널 위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자기 수도회들에 회칙을 건네는 장면을 그린 패널이 있었고, 양옆에는 프란치스코회 복자들을 그린 작은 패널 열 점이 있었다.

프란치스코회 회칙의 수여
프란치스코회 회칙의 수여니콜로 안토니오 콜란토니오, 1445, 카포디몬테 미술관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니콜로 안토니오 콜란토니오, 1444, 카포디몬테 미술관

콜란토니오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모두 1524년 피에트로 숨몬테가 베네치아 사람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온다. 숨몬테에 따르면 콜란토니오는 플랑드르로 공부하러 떠나고 싶어 했는데, 그 무렵 나폴리에 있던, 자신도 그림을 그리던 앙주의 르네가 그를 붙잡고 플랑드르식 화법을 보여 주었다. 콜란토니오를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스승이라고 한 것도 숨몬테다. 박물관에 따르면 제단화는 아마 아라곤의 알폰소 왕이 주문했을 것이다. 알폰소는 지금은 사라진 얀 반 에이크의 세폭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궁정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파치오는 1456년 그 그림 속 서재의 히에로니무스가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썼고, 많은 연구자는 콜란토니오가 이 히에로니무스를 본보기로 삼았으리라고 본다. 19세기 중반 나폴리의 박물관에서는 이 《히에로니무스》 자체를 반 에이크나 그 주변 화가의 작품으로 여겼다.

제단화의 윗부분 패널은 1922년에야 같은 박물관으로 넘어왔다(이 이야기는 시모네 마르티니 장에서 한다). 1943년 《성 히에로니무스》는 스폴레토에서 라파엘로의 《신성한 사랑의 성모》와 함께 10번 상자에 들어 있었고, 1957년 제단화의 두 부분이 모두 카포디몬테로 옮겨졌다. 복자들을 그린 작은 패널 열 점 가운데 연구자들은 이탈리아와 미국의 개인 컬렉션에서 여덟 점을 찾아냈고, 2024년 12월 국가가 그중 복자 모리코와 레오네를 그린 두 점을 카포디몬테를 위해 사들였다.

전설에 따르면 히에로니무스는 사자의 발에서 가시를 뽑아 주었다. 이 그림에서 갈색 수도복을 입은 백발의 성인은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고, 그와 키가 거의 같은 사자가 그의 무릎에 앞발을 올려놓았는데, 히에로니무스는 왼손으로 그 발을 발바닥이 위로 오게 받치고 오른손으로 가늘고 뾰족한 도구를 갖다 댄다. 추기경 모자는 궤짝 뚜껑 위에 놓여 있는데, 패널에서 선명한 붉은색은 이것뿐이다. 둘레의 선반에는 눕히거나 기울이거나 가죽끈으로 묶은 책들이 가득하고, 모래시계와 유리병과 가위도 있으며, 장 옆면에는 붉은 밀랍 네 점으로 쪽지가 붙어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 의자 다리 옆의 어두운 아치 안에는 작은 회색 쥐가 빵 껍질을 물고 앉아 있다.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니콜로 안토니오 콜란토니오, 1444, 카포디몬테 미술관
성 에우페미아
성 에우페미아안드레아 만테냐, 1454, 카포디몬테 미술관

11. 안드레아 만테냐 《성 에우페미아》, 1454년

그림 왼쪽 아래 구석의 사자가 순교자 에우페미아의 오른팔, 금팔찌 바로 위를 물고 있고, 붉은 테를 두른 사자의 눈이 보인다. 전신으로 그려진 에우페미아는 돌 벽감 안에 서서 차분히 관람자를 바라본다. 치켜든 왼손에는 흰 백합을, 내린 오른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고, 가슴 높이의 옆구리에는 짧은 검이 꽂혀 있다. 그녀 위의 아치에는 흐린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고, 아치에서는 석류, 사과, 포도, 배로 엮은 과일 꽃줄이 늘어져 있으며, 발밑 계단에는 “OPVS ANDREAE MANTEGNAE”라는 글귀와 MCCCCLIIII, 곧 1454년이라는 연도가 적힌 패가 하얗게 보인다.

만테냐는 이때 23세 무렵이었다. 그는 파도바에서 자신을 양자로 삼은 프란체스코 스콰르초네에게 배웠고, 1448년 무렵 보수를 둘러싼 소송 끝에 스승과 갈라섰으며, 이 무렵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 오베타리 예배당에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과일 꽃줄은 스콰르초네의 공방에서 그의 그림으로 들어왔다. 그림은 많이 어두워졌고, 옷의 무늬는 거의 사라졌으며, 얇은 캔버스의 올이 물감 사이로 곳곳에 비쳐 보인다.

그림에 관한 첫 확실한 기록은 벨레트리에서 가문의 박물관을 운영하던 스테파노 보르자 추기경의 컬렉션에서 나온다. 1814년 나폴레옹이 앉힌 나폴리 왕 조아킴 뮈라가 이 컬렉션을 사기로 했고, 그가 몰락한 뒤 돌아온 페르디난도가 구입을 승인하여, 1817년 추기경의 상속자들이 왕립 부르봉 박물관을 위해 컬렉션의 거의 전부를 그에게 팔았다. 보르자의 고대 유물은 지금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그림들은 카포디몬테에 있다.

그림이 어떻게 추기경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문서에 적혀 있지 않은데, 1980년대에 이 그림의 이전 역사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나타났다. 바티칸 문서고에서 대부제 파스콸레 베로네가 1592년에 성녀 에우페미아에 관해 쓴 라틴어 시가 발견된 것이다. 시에 따르면 1454년 몬테펠로소, 지금의 바실리카타주 이르시나 출신의 고위 성직자 로베르토 데 마빌리아가 고향 대성당을 위해 베네치아에서 배로 그림들을 실어 왔는데, 그 가운데 만테냐의 작품이 두 점 있었다. 몇몇 저자는 나폴리의 《에우페미아》를 그중 한 점으로 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목록은 없다. 이르시나 대성당에는 그림과 자세가 비슷한 사람 크기의 채색 석상 성녀 에우페미아가 서 있는데, 1996년 클라라 젤라오는 이 석상을 만테냐가 직접 만든 조각으로 발표했고, 다른 연구자들은 피에트로 롬바르도가 그림을 보고 만든 작품으로 본다.

성 에우페미아
성 에우페미아안드레아 만테냐, 1454, 카포디몬테 미술관

12.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2~1613년경

이 그림은 1827년 나폴리의 사베리아 데 시모네 컬렉션에서 부르봉 왕실 컬렉션으로 사들였는데, 살 때는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림은 그 이름으로 왕립 부르봉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16년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게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롱기는 이 그림을, 아르테미시아가 1620년 무렵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를 위해 그린, 더 크고 서명이 있는 피렌체의 《유디트》를 되풀이한 그림으로 보았다. 뒷날 메리 개러드는 엑스선 사진을 근거로, 나폴리 그림에는 유디트의 팔 위치와 옷 주름에 고친 흔적이 많은데 피렌체 그림에는 그런 흔적이 없음을 보여 주었고, 나폴리 그림이 먼저 그려졌다고 보았다.

어두운 배경 앞에서 세 인물이 캔버스를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까지 채운다. 짙은 붉은 옷을 입은 둥근 얼굴의 젊은 하녀는 위에서 덮쳐 홀로페르네스를 침대에 짓누르고, 홀로페르네스는 주먹으로 하녀의 턱 밑을 밀어낸다. 금색 끈 장식이 달린 짙은 파란 옷을 입고 팔을 드러낸 유디트는 한 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아 머리를 요에 짓누르고, 화면을 가로질러 뻗은 다른 손으로는 칼자루를 수직으로 움켜쥐었으며, 칼날은 그의 목으로 파고든다. 세 사람의 팔이 모두 그림 한가운데에서 만난다. 유디트의 얼굴은 차분하고 집중해 있으며, 피는 흰 시트를 따라 긴 줄기로 흘러내린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3, 카포디몬테 미술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20, 우피치 미술관

아르테미시아는 1593년 로마에서 태어나 카라바조를 따르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에게 그림을 배웠으니, 박물관의 연대 추정을 따르면 이 그림을 그렸을 때 20세 무렵이었다. 1630년 무렵 그녀는 나폴리로 옮겨 가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새 국가가 거둬들인 기증품, 방, 교회 패널화 (1862~1921)

13.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또는 그의 공방(밑그림), 빌럼·얀 데르모이언(직조) 《파비아 전투》 태피스트리 연작, 1528~1531년경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근처에서 카를 5세의 황제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국왕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았다. 1531년 3월 네덜란드 전국 의회는 브뤼셀의 쿠덴베르크 궁전에서 카를에게 이 전투를 그린 태피스트리 일곱 점을 바쳤다. 태피스트리는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가 그렸거나 그의 지휘 아래 그려진 밑그림에 따라 브뤼셀의 빌럼 데르모이언과 얀 데르모이언의 공방에서 짠 것이었다.

카를은 태피스트리를 스페인으로 가져가지 않았고, 태피스트리는 네덜란드 총독인 그의 누이 헝가리의 마리아에게 남았다. 1549년 왕자 펠리페, 곧 뒷날의 펠리페 2세가 찾아오자 뱅슈에 있는 마리아의 궁전에서는 그의 거처와 곁방에 태피스트리를 나누어 걸었는데, 일곱 점이 한 방에 다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1556년 2월 쿠덴베르크 궁전에서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맺을 때는 태피스트리를 큰 홀에 걸었고, 프랑스 사절 콜리니 제독은 자기 왕의 아버지가 사로잡히는 장면을 보여 준다며 불평했다. 같은 해 마리아는 태피스트리를 스페인으로 가져갔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태피스트리는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에게 넘어갔다.

파비아 전투: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생포
파비아 전투: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생포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1530, 카포디몬테 미술관

1568년 봄, 그 무렵 아버지에게 감금되어 있던 돈 카를로스는 카메오를 박은 금단추 66개,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의 두상을 새긴 에나멜 금반지 하나, 금메달 하나를 받고 태피스트리 일곱 점을 프란체스코 페르디난도 다발로스 후작에게 넘겼다. 다발로스 가문은 파비아 전투에서 황제군을 지휘한 페스카라 후작의 상속자들이었다. 1701년 무렵 체사레 미켈레 안젤로 다발로스는 음모가 실패한 뒤 나폴리에서 달아나 베네치아에서 태피스트리를 저당 잡혔다. 뒷날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의 남편이 되는 스페인 왕 펠리페 5세가 태피스트리를 되사려 했지만, 그의 대사가 왕이 자기 조상의 굴욕을 보면 불쾌해할까 걱정한 탓에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피스트리는 그 뒤 다발로스 가문에 돌아왔고, 1862년 가문의 마지막 후손 알폰소 다발로스가 자기 컬렉션 전체와 함께 나폴리의 국립 박물관에 유증했으며, 1957년 카포디몬테로 옮겨졌다.

왕이 사로잡히는 장면을 담은 태피스트리에서는 가운데보다 조금 왼쪽에 금빛 백합을 수놓은 짙은 파란 마의를 걸친 말이 땅에 쓰러져 있고, 그 곁에서 갑옷 입은 사람 몇이 깃털 장식 투구를 쓴 기수를 부축한다. 지휘관들의 이름은 마구와 칼집에 금실로 짜 넣었다. 1549년 뱅슈에서 태피스트리를 본 비센테 알바레스는 장수마다 이름이 적혀 있는데 스페인 사람들만 빠졌으니 그들은 그날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적었다.

파비아 전투: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생포
파비아 전투: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생포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 1530, 카포디몬테 미술관

14. 조반니 바티스타 나탈리와 주세페 그리치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의 도자기 방》, 1757~1759년

부르봉의 카를로스의 아내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는 작센 선제후 강건왕 아우구스트의 손녀였고, 강건왕의 마이센 공장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경질 자기를 만들었다. 1743년 카를로스와 마리아 아말리아는 카포디몬테 언덕의 궁전 정원에 직접 도자기 공장을 세웠고, 그곳에서는 독자적인 제법으로 연질 자기를 만들었다. 1757~1759년 이 공장은 베수비오산 기슭 포르티치의 별궁에 왕비를 위한 방 하나를 통째로, 약 3000개의 자기 조각으로 꾸몄다. 밑그림은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나탈리가 그렸고, 부조는 공장의 수석 원형 제작자 주세페 그리치가 빚었다.

방은 1759년,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아 아내와 함께 마드리드로 떠나기 몇 달 전에 완성되었다. 그와 함께 그리치를 비롯한 공장 장인 52명이 떠났고, 거푸집과 기계와 재료도 함께 실려 갔으며, 공장은 마드리드에서 부엔 레티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가동되었다. 그곳에서 그리치는 아란후에스 궁전을 위해 두 번째 도자기 방을 만들었다.

방의 벽은 온통 흰 유약을 입힌 자기로 덮여 있고, 그 위로 금도금한 가는 띠와 분홍빛 보라색 로카유 틀이 섬세한 격자를 이루며, 격자 위에는 꽃, 과일, 잎, 리본이 빚어져 채색되어 있다. 리본에는 악기 묶음이 매달려 있다. 틀 안에는 노랗고 파란 긴 옷을 입은 중국인들이 앉아 있는데, 흰 부채를 든 여인이 야자나무 아래 챙 넓은 어두운 모자를 쓴 남자 곁에 있고, 격자 위에는 작고 까만 원숭이들이 걸터앉아 있으며, 이 중국은 모두 유럽에서 지어낸 것이다. 꽃줄 장식이 달린 자기 틀 속의 거울들은 뿌옇게 흐려지고 얼룩이 졌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데, 흰 자기 줄기 끝에 선명한 초록 야자잎이 달린 모양이다. 1943년 폭탄이 터지면서 이 샹들리에는 부서졌고, 조각들을 상자 두 개에 주워 담아 복원가들이 2년에 걸쳐 다시 맞추었다.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의 도자기 방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의 도자기 방주세페 그리치, 1759, 카포디몬테 미술관
십자가에 못 박힘
십자가에 못 박힘마사초, 1426, 카포디몬테 미술관

사보이아 왕가 시대가 된 1866년, 나폴리의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안니발레 사코는 부르봉 왕가 거처들의 보물을 카포디몬테로 모으기로 했다. 방은 포르티치에서 조각조각 해체되어, 100여 년 전 그 자기를 만든 언덕 위에서 다시 조립되었다. 자기처럼 보이도록 채색하고 금도금한 마티아 가스파리니의 치장 벽토 천장은 그때 떼어 내지 못해 1957년까지 포르티치에 남아 있었고, 1957년에 18조각으로 잘라 카포디몬테로 옮겨 와 벽과 이어 붙였다.

15. 마사초 《십자가에 못 박힘》, 1426년

1901년 나폴리 국립 박물관은 오랜 협상 끝에 금 바탕에 십자가 처형을 그린 작은 패널을 15세기 무명 피렌체 화가의 작품으로 알고 800리라에 사들였다. 그 뒤 이 그림에서 마사초의 솜씨를 알아보게 되었고, 1906년 미술사가 빌헬름 주이다는 이것이 마사초가 1426년 피사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을 위해 그린 제단화의 꼭대기 부분임을 밝혀냈다.

지불 기록이 남아 있어서, 이 제단화에 관해서는 마사초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피사의 공증인 줄리아노 디 콜리노 델리 스카르시가 자기 예배당을 위해 주문했고, 계약은 1426년 2월 19일에 맺어졌으며, 제단화 값은 모두 80플로린으로 정해졌는데 그 안에서 금과 울트라마린 값까지 치러야 했고, 마지막 지불은 같은 해 12월 26일에 이루어졌다. 마사초는 그때 24세였고, 26세 무렵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사리는 온전한 제단화를 보고 1568년에 묘사했는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쩌면 성당을 고쳐 짓던 1574년 이전에 제단화는 해체되었다. 가운데의 《성모자》는 지금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성 바오로와 성 안드레아는 피사와 로스앤젤레스에, 프레델라는 베를린에 있으며, 엑스선 사진에서는 나폴리 패널의 나뭇결이 런던 패널의 나뭇결로 이어진다.

십자가에 못 박힘
십자가에 못 박힘마사초, 1426, 카포디몬테 미술관
성모자
성모자마사초, 1426, 내셔널 갤러리

이 패널은 높이 5미터쯤 되는 제단화의 맨 꼭대기에 있었고, 마사초는 그리스도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으로 그렸다. 머리는 치켜 올라간 두 어깨 사이로 푹 꺼져 목이 거의 보이지 않고, 무릎은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다리는 짧아 보인다. 십자가 발치에는 불꽃 같은 주황색 망토를 입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활짝 벌렸는데, 긴 금발이 등으로 흘러내린다. 그녀의 후광은 가늘고 매끈해서, 그리스도와 성모와 요한의 후광에 있는 새김 무늬가 없다. 로베르토 롱기는 금박에 무늬를 새기는 작업은 채색을 시작하기 전에 했으므로 막달레나는 조금 뒤에 덧그려졌다고 보았다.

마사초의 그림에서는 십자가 위로 작고 둥근 나무가 자라는데, 이 나무는 생명의 나무로 읽힌다. 17세기에 이 나무는 INRI라는 글자를 적은 흔한 명판으로 가려졌고, 그 명판은 1956~1957년 복원가 레오네토 틴토리가 카포디몬테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패널을 손질할 때에야 제거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힘
십자가에 못 박힘마사초, 1426, 카포디몬테 미술관
앙주의 로베르에게 관을 씌우는 툴루즈의 성 루이
앙주의 로베르에게 관을 씌우는 툴루즈의 성 루이시모네 마르티니, 1317, 카포디몬테 미술관

16. 시모네 마르티니 《앙주의 로베르에게 관을 씌우는 툴루즈의 성 루이》, 1317년경

나폴리 왕 앙주의 샤를 2세의 둘째 아들 루이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1296년 12월 몰래 프란치스코회 수도 서원을 했으며, 엿새 뒤 툴루즈 주교로 임명되었고, 1297년 8월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317년 4월 7일 교황 요한 22세가 그를 시성했다. 이 시성을 밀어붙인 사람은 1309년부터 나폴리 왕이던 동생 로베르였고, 바로 그 로베르가 시에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에게 새 성인이 자기에게 왕관을 건네는 그림을 주문했다.

로베르의 왕위 계승권에는 이의가 있었다. 장자 상속의 원칙대로라면 왕관은 맏형 샤를 마르텔의 아들인 헝가리 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몫이었고, 1309년 로베르는 서둘러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대관을 받았다. 미술사가 줄리언 가드너는 이 패널에서 그 이야기가 크게 압축되어, 성인이 된 형이 직접 로베르의 머리 위에 왕관을 들고 있다고 쓴다.

루이는 관람자를 마주 보고 꼿꼿이 앉아 있고, 작은 천사 둘이 그의 주교관 위로 관을 받쳐 들고 있으며, 루이 자신은 왼손으로 작은 금빛 왕관을 무릎 꿇은 로베르의 머리 위에 들고 있다. 옆모습으로 두 손을 모은 로베르는 형 곁에서 아주 작아 보인다. 넓은 금빛 단을 두른 주교 제의 아래로 갈색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이 보이고, 그 가운데로 매듭진 흰 끈 허리띠가 늘어져 있다. 액자에는 청록색 바탕에 금빛 백합이 촘촘히 박혀 있고, 아래쪽에는 성인의 생애를 담은 다섯 장면이 있으며, 그 위에 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가드너는 제의가 한때 유리알과 반짝이는 은박으로 덮여 있었는데, 유리알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은박은 산화되어 적갈색이 되었다는 점도 적었다.

그림이 처음에 어디 놓여 있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가드너는 산타 키아라 성당의 성 루이 예배당이었다고 보고, 대성당에 딸린 예배당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16세기 말에 패널은 이미 프란치스코회의 산 로렌초 마조레 성당 기록에 올라 있었고, 1921년 그곳에서 국립 박물관으로 들어갔으며, 1957년 카포디몬테로 옮겨졌다. 이 패널보다 한 해 늦게 같은 성당에서 콜란토니오의 성 프란치스코 패널이 박물관으로 넘어갔는데, 이것은 1808년에 박물관에 먼저 들어간 《성 히에로니무스》와 한 제단화를 이루던 윗부분이다.

몬테카시노에서 오스트리아의 소금 광산까지 (1943~1947)

17. 티치아노 《다나에》, 1544~1546년

1943년 가을 스폴레토 근처에서 독일군 헤르만 괴링 사단 병사들이 연 3번 상자에는 나폴리의 그림 세 점, 곧 바티스텔로 카라촐로의 《이집트로의 피신》, 파니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방문하는 부르봉의 카를로스》, 티치아노의 《다나에》가 들어 있었다. 나폴리의 그림들은 1940년부터 카바데티레니와 메르콜리아노에 보관되어 있었고, 1943년 9월 6~7일 상자들은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사단이 트럭에 싣고 북쪽으로, 스폴레토 근처의 마리뇰리 별장으로 가져갔다. 사단은 나중에 상자 대부분을 로마의 이탈리아 당국에 넘겼고, 1944년 1월 4일 베네치아 광장에서 인도식이 열렸지만, 그 전에 가장 좋은 그림들은 꺼내져 독일로 보내졌다.

다나에
다나에티치아노, 1545, 카포디몬테 미술관

티치아노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을 위해 《다나에》를 그렸다. 1544년 9월 20일 베네치아 주재 교황 대사 조반니 델라 카사는 추기경에게, 티치아노가 추기경을 위한 누드화를 거의 끝냈는데 그 곁에 두면 추기경이 페사로의 우르비노 공작 거처에서 보았던 누드화가 엄격한 테아티노회 수녀처럼 보일 것이라고 알렸다. 페사로의 그 누드화가 지금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알려진 그림이다. 델라 카사는 티치아노가 새 그림에 추기경의 연인인 고급 창부 안젤라의 얼굴을 그려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농담 삼아 제안하기도 했다. 엑스선 사진을 보면 《다나에》 아래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닮은 첫 구도, 곧 하녀들과 작은 개가 있는 방이 있는데, 티치아노는 그것을 나중에 신화 장면으로 고쳐 그렸다. 그가 그림을 완성한 곳은 로마의 벨베데레였고, 때는 교황과 손자들의 초상을 그리던 1545~1546년이었다. 바사리는 자신이 미켈란젤로와 함께 《다나에》를 보러 갔을 때 미켈란젤로가 색채를 칭찬했지만, 밖으로 나와서는 베네치아에서 처음부터 소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다나에는 흰 시트 위에 대각선으로 누워 오른쪽 팔꿈치를 괴고, 엷은 미소를 띤 채 어두운 구름을 올려다본다. 구름에서는 작은 금화들이 쏟아지는데, 멀리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손목에는 검붉은 보석을 박은 금팔찌를, 귀에는 진주 귀걸이를 했다. 오른쪽에는 검은 날개를 단 벌거벗은 큐피드가 서 있는데, 그는 다나에에게서 몸을 돌려 구름을 올려다보며 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티치아노가 펠리페 2세와 다른 주문자들을 위해 그린 후기의 《다나에》들에서는 큐피드 대신 늙은 하녀가 앞치마로 금화를 받는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우르비노의 비너스티치아노, 1538, 우피치 미술관
다나에
다나에티치아노, 1545, 카포디몬테 미술관
다나에
다나에티치아노, 1560, 프라도 미술관

《다나에》는 파르네세 가문의 유산과 함께 파르마에서 나폴리로 왔고, 프랑스군을 피해 달아난 궁정이 팔레르모로 가져갔으며, 돌아온 뒤에는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왕립 부르봉 박물관의 비공개 전시실에 갇혔다.

역사가 엘레나 피라촐리에 따르면 《다나에》는 1943년 12월 베를린 근교에 있는 괴링의 별장 카린할로 옮겨졌는데, 1944년 1월 12일 괴링의 51번째 생일을 맞아 사단 장교들이 보내는 선물이었다. 괴링이 이 그림을 자기 침실 천장에 붙여 두었다는 로돌포 시비에로의 이야기가 자주 되풀이되지만, 침실 사진을 보면 그렇지 않다. 침대 위에 걸려 있던 것은 독일 화가 베르너 파이너의 《에우로페와 황소》였다. 1945년 붉은 군대가 다가오자 괴링의 그림들은 오스트리아의 알타우제 소금 광산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연합군이 그림들을 찾아냈으며, 1947년 8월 7일 뮌헨에서 나폴리의 그림들이 이탈리아 측에 인도되었다. 이탈리아의 미술품 반환 업무를 이끈 시비에로는 《다나에》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1947년 11월 그림은 로마의 빌라 파르네지나에서 다른 반환 그림들과 함께 전시되었는데, 피라촐리는 이 빌라를 1579년에 산 사람이 바로 티치아노가 《다나에》를 그려 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이었다는 점을 짚는다.

다나에
다나에티치아노, 1545, 카포디몬테 미술관
안테아
안테아파르미자니노, 1535, 카포디몬테 미술관

18. 파르미자니노 《젊은 여인의 초상》(《안테아》), 1535년경

안테아라는 이름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1671년 그림 애호가를 위한 안내서를 쓴 자코모 바리로, 그는 파르마의 팔라초 델 자르디노에서 본 이 그림을 파르미자니노가 그린, 안테아라는 이름의 연인 초상이라고 적었다. 1680년의 파르네세 목록에는 안테아라고 불리는 여인으로 올라 있고, 1784년 화가의 전기를 쓴 이레네오 아포는 그녀가 로마의 이름난 고급 창부 안테아라고 결론지었다. 연구자들은 고급 창부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안테아라는 이름은 그림에 그대로 남았다.

젊은 여인은 우리를 마주 보고 꼿꼿이 서 있는데, 무릎 아래는 잘렸고 배경은 고른 올리브빛 초록이다. 얼굴은 작고 창백하며, 검은 눈이 똑바로 앞을 보고, 머리는 땋아서 머리둘레에 감아 올렸으며, 이마 위 가르마로는 붉은 보석을 박은 금 브로치에 매달린 진주 한 알이 내려와 있다. 옷은 소매가 엄청나게 큰 금빛 노란 공단 옷이고, 목에서 허리까지 긴 금사슬이 늘어져 있으며, 맨 왼손이 그 사슬 위에 납작하게 얹혀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담비 모피를 걸쳤는데, 그 아래의 어깨와 팔이 터무니없이 커 보인다. 아래쪽에서는 둥근 귀와 반짝이는 검은 눈, 작고 흰 이빨을 지닌 담비 머리가 갈색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물고 있고, 주둥이에서 장갑 위로 가는 금사슬이 늘어져 있다. 그 손에는 끼지 않은 장갑 한 짝도 쥐고 있다.

전쟁 뒤 나폴리 그림들의 귀환 과정을 기록한 브리지트 다프라는, 1943년 스폴레토에서 《안테아》를 꺼낸 상자가 이 그림 한 점만 들어 있던 29번 상자였다고 쓴다.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함께 북쪽으로 실려 갔고, 전쟁이 끝난 뒤 알타우제에서 발견되어 1947년 8월 7일 뮌헨에서 이탈리아 측에 인도되었으며, 11월에는 로마의 빌라 파르네지나에서 전시되었다.

누가 파르미자니노의 모델이었는지를 두고 연구자들은 지금도 논쟁한다. 그녀를 신부로, 하녀로, 파르마의 여러 귀부인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했고, 크리스티나 닐슨은 2008년 모피, 사슬, 브로치, 반지, 귀걸이가 연인들이 흔히 주고받던 선물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녀가 이상화된 미인이라고 주장했다. 메리 바카로는 2023년 파르마에서 여자아이들이 안테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데 주목했고, 파르마의 세례 대장에서 1516년에 태어난 안테아 스메랄디를 찾아냈다.

안테아
안테아파르미자니노, 1535, 카포디몬테 미술관
베일의 성모
베일의 성모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33, 카포디몬테 미술관

19.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베일의 성모》, 1533~1535년경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돌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바사리의 설명으로는 그런 그림은 영원히 남을 것 같고 불도 나무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서 주문자들이 좋아했다. 바사리는 또 그 그림들이 너무 무거워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였고, 세바스티아노 자신은 그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 그 기법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더 즐겼다고 덧붙인다.

베네치아 사람 세바스티아노 루치아니는 1511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의 초대로 로마에 와서, 지금은 파르네지나라고 불리는 키지의 별장에 뤼네트 그림을 그렸다. 로마에서 그는 라파엘로에 맞서 미켈란젤로 편에 섰고, 미켈란젤로가 그에게 소묘를 주면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1531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에게 교황의 납 인장을 관리하는 직책을 주었고, 납을 뜻하는 ‘피옴보’가 들어간 델 피옴보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다. 바사리의 말로는 그는 이 수입을 얻은 뒤로 일하기보다 쉬기를 더 즐겼다.

그는 1533~1535년 무렵 점판암 판에 《베일의 성모》를 그렸다. 마리아는 눈을 내리깔고 잠든 아기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데, 벌거벗은 아기는 그림 아래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누워 포갠 팔에 머리를 얹고 입을 살짝 벌렸다. 마리아는 오른손을 왼쪽 가장자리로 뻗어 투명한 베일을 두 손가락으로 쥐고 있는데, 베일은 그곳에 겨우 알아볼 만한 밝은 삼각형으로 늘어져 있고, 왼손으로는 아기 쪽으로 흘러내린 회록색 천을 움켜쥐었다. 왼쪽 위에서는 그녀의 팔 너머로 백발의 요셉이 내다보고, 오른쪽에서는 천사 하나가 어둠 속에 거의 묻혀 곱슬머리와 빛을 받은 손만 보인다. 색은 차가워서, 거의 검은 배경 위에 회색, 흰색, 회록색이 놓여 있다. 1568년 바사리는 아기를 천으로 덮는 세바스티아노의 성모 그림이 파르네세 추기경의 보관실에 있다고 썼고, 이 기록은 나폴리의 그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1943년 이 그림은 스폴레토에서 57번 상자에서 꺼내졌다. 전쟁이 끝나고 그림을 찾았을 때 로돌포 시비에로는, 자신들이 가장 애를 태운 그림이 더없이 아름다운 《베일의 성모》였으며 성모의 얼굴이 산화층 아래로 사라졌는데 당시로서는 그것을 걷어 낼 수 없었다고 썼다. 브리지트 다프라는 1947년 8월 볼차노에서 피렌체에서 온 복원가 두 사람, 로 불로와 소콜로프가 그림에서 이 결정화된 층을 걷어 내는 데 성공했다고 쓴다.

교회에서 온 그림 (1972)

그리스도의 채찍질
그리스도의 채찍질카라바조, 1607, 카포디몬테 미술관

20.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채찍질》, 1607년

나폴리에서 얼마 전 귀족 신분을 얻은 제노바 출신 가문의 톰마소 데 프랑키스는 1607년 5월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의 가문 예배당에 둘 제단화 값으로 카라바조에게 5월 11일 100두카트, 5월 28일 약 40두카트를 더 치렀다. 카라바조는 살인 사건으로 로마에서 달아난 뒤 1606년 가을부터 나폴리에 살았고, 1607년 여름 몰타로 떠났다가 1609년 가을에 돌아왔다. 그래서 로베르토 롱기를 따라 그가 두 번째 나폴리 체류 때 그림을 마무리했다고 보는 역사가들이 있는가 하면, 1607년을 고수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세로로 긴 캔버스는 거의 온통 어둡고, 한가운데에 회색 기둥이 솟아 있으며, 그리스도는 두 손이 등 뒤로 돌려진 채 그 기둥에 묶여 있다. 빛은 왼쪽 위에서 그의 가슴을 가로질러 띠처럼 떨어지고, 머리는 왼쪽 어깨로 늘어졌으며, 눈은 감겨 있고, 머리 뒤로 가는 금빛 후광 고리가 희미하게 보인다. 왼쪽의 형리는 소리치듯 입을 벌린 채 주먹으로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고, 오른쪽의 머리가 벗어진 형리는 그리스도의 팔 아래로 팔을 걸고 발로 그의 종아리 아래를 짓누르며, 세 번째 형리는 왼쪽 아래에 몸을 구부리고 회초리 다발을 쥐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수수한 작업복 차림이다.

엑스선 사진과 1998~1999년의 복원 작업에서, 오른쪽 형리 아래에 완성된 상태로 그렸다가 나중에 덧칠해 가린 남자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이 머리를 데 프랑키스 자신의 초상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고, 도미니코회 수도사로 보는 견해는 그보다 적다.

1827년 부르봉 왕실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를 카라바조의 이름으로 샀고, 카라바조의 진짜 그림은 1972년에야 언덕에 올랐다. 그 전까지 이 그림은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 안에서 이 예배당 저 예배당으로 옮겨 다녔고, 세 번째 도난 시도가 있은 뒤인 1972년 말 카포디몬테 박물관이 그림을 맡아 보관하게 되었다. 그림의 소유자는 이탈리아 내무부 산하의 종교 건물 기금으로, 수도원 폐지 뒤 국가에 귀속된 교회와 그 재산을 소유하는 국가 기관이다.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의 원래 자리에는 안드레아 바카로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복제화가 남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3, 카포디몬테 미술관
그리스도의 채찍질
그리스도의 채찍질카라바조, 1607, 카포디몬테 미술관

그 밖에 볼 만한 작품들

티치아노가 그린 파르네세 가문 초상으로는 카포디몬테에 교황이 모자를 쓰지 않은 1543년의 바오로 3세 단독 초상과 알레산드로 추기경의 초상이 더 있고, 브뤼헐의 《염세가》는 《눈먼 자들의 우화》와 같은 경로로 컬렉션에 들어왔다. 1612년의 몰수로 파르네세 가문은 코레조의 《성녀 카타리나의 신비로운 결혼》도 손에 넣었다. 조반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변모》는 1641년에 이미 로마의 파르네세 궁전 목록에 올라 있었다. 17세기 나폴리 회화, 곧 후세페 데 리베라, 루카 조르다노, 마티아 프레티의 그림은 두 번째 방문 때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 파르미자니노가 그린 갈레아초 산비탈레의 초상은 오랫동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초상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