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1년 바젤의 아메르바흐 집안 상속인들은 가문의 컬렉션을 암스테르담에 팔려고 했다. 컬렉션에는 그림이 50점가량 있었고 그중 15점이 소 한스 홀바인의 작품이었으며, 그 밖에도 드로잉, 판화, 주화, 편지, 장서가 있었다. 시장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의 권고에 따라 시와 대학은 이 컬렉션을 9000라이히스탈러에 직접 사들이기로 했다. 값의 3분의 2는 시 의회가, 나머지는 대학이 치렀고, 컬렉션을 맡아 보관하던 대학은 1671년 이를 일반에 공개했다. 미술관은 이 컬렉션을 시가 소유한 공공 미술 컬렉션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한 집안의 그림이 도시의 것이 되다 (1519~1661년)

1. 소 한스 홀바인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의 초상》
바젤의 인쇄업자 요한 아메르바흐의 막내아들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는 1519년 가을, 법학 공부를 이어 가려고 아비뇽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갈 길은 멀었고 프랑스 남부에는 흑사병이 돌고 있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래서 그는 길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가족에게 자기 얼굴이 남도록 초상화를 주문했다. 초상화에 넣을 라틴어 시는 아메르바흐가 직접 지었다.
홀바인은 그 시를 그림 왼쪽 가장자리의 나무줄기에 걸린 나무 명판에 써 넣었다. 시는 초상화 자신의 목소리로 쓰였다. 그려진 얼굴은 살아 있는 얼굴에 뒤지지 않고 주인과 꼭 같으며, 주인이 세 해를 여덟 번, 곧 24년을 사는 동안 예술은 자연이 그에게 준 것을 초상 속에 옮겨 놓았다는 내용이다. 그 아래에는 아메르바흐와 홀바인의 이름, 그리고 1519년 ‘10월 이두스 전날’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10월 14일, 아메르바흐가 24세가 되고 며칠 지난 날이다. 적외선 촬영으로 시를 패널 위에서도 고쳐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둘째 행은 처음에 ‘물감으로 그린’이라는 말로 끝났는데, 최종본에서는 초상을 ‘선으로 고귀한’ 그림이라고 불렀다.
아메르바흐 자신은 명판 쪽으로 몸을 돌려 거의 옆얼굴을 보이지만, 눈은 명판을 비껴 그림 가장자리 너머를 바라본다. 검은 모자와 검은 외투가 차가운 하늘색 하늘 위로 도드라지고, 그림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얼굴과 불그스름한 밤색 수염이며, 오른쪽 아래 나뭇가지 밑으로는 눈 덮인 작은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홀바인은 그때 22세 무렵이었다. 그는 이미 몇 해째 바젤에서 일하며 바젤의 인쇄업자들을 위해 속표지와 삽화를 그리고 있었고, 초상화의 날짜보다 세 주도 채 앞서지 않은 1519년 9월 25일 바젤 화가 길드 ‘춤 히멜’에 받아들여져 이제 자기 공방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1526년 그는 잉글랜드로 떠났다가 두 해 뒤 돌아왔고, 1532년에는 아예 런던으로 옮겨 갔다.
아메르바흐는 아비뇽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바젤에서 로마법을 가르쳤고, 에라스뮈스가 가장 믿는 사람이 되었으며, 에라스뮈스는 1536년 그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삼았다. 초상화는 집안에 남았고, 보니파키우스의 아들 바실리우스는 아버지의 그림과 드로잉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컬렉션을 모았다. 1661년 시가 사들인 바로 그 컬렉션이다. 보니파키우스가 자기 시의 첫머리를 20번가량 고쳐 쓴 종이는 같은 컬렉션에서 나온 책, 편지와 함께 바젤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 소 한스 홀바인 《무덤 속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
1867년 8월, 그해 2월에 결혼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제네바로 가는 길에 소문으로만 듣던 그림 한 점을 보려고 바젤에 하루 머물렀다. 그림은 1849년 바젤 공공 컬렉션을 위해 문을 연 아우구스티너가세의 건물에 걸려 있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그림을 더 가까이 보려고 의자 위에 올라섰고, 나는 그가 벌금을 물게 될까 봐 몹시 겁이 났다.” 한참 뒤에 쓴 회고록에서 그녀는 그림이 남편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주었다고 했다. 그녀 자신은 차마 그림을 볼 수 없어 다른 전시실로 갔다가 15~20분 뒤에 돌아왔는데, 남편은 ‘못 박힌 듯’ 같은 자리에 서 있었고, 얼굴에는 그녀가 간질 발작이 시작되는 첫 몇 분 동안 보아 온 그 겁에 질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팔을 붙들어 옆 전시실의 벤치에 앉혔다.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술관을 나서던 그는 다시 돌아가 그림을 한 번 더 보겠다고 고집했다.
바젤 컬렉션에서 가장 유명한 이 그림은 아주 길고 낮은 패널에 그려졌고, 시신은 실물 크기다. 시신은 비좁은 돌 벽감 안, 석판 가장자리로 흘러내린 흰 천 위에 홀로 누워 있다. 왼쪽 끝의 머리는 뒤로 젖혀졌고, 입은 벌어졌으며, 보이는 쪽 눈은 위로 돌아가 있고, 그늘진 얼굴은 잿빛 도는 초록색이며,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석판 아래로 늘어져 있다. 피부 밑으로 갈비뼈가 드러나고, 옆구리 상처 아래에는 멍이 거뭇하게 번져 있다. 오른손은 손등을 보는 사람 쪽으로 향한 채 허벅지를 따라 놓여 있는데, 손등에는 검붉은 못 자국이 있고, 가운뎃손가락은 석판 끝까지 뻗어 있다. 발 위쪽의 끝 벽에는 로마 숫자로 쓴 연도 ‘M.D.XXI’와 머리글자 ‘H.H’가 돌에 새긴 것처럼 그려져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아마도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가 주문했을 것으로 보며(두 사람에 대해서는 1번 참조), 그림은 1661년 매입 때까지 그의 집안에 남아 있었다. 2021년의 조사에서 벽감이 처음에는 더 작고 위가 아치로 둥글었는데, 홀바인이 이를 직사각형 상자로 고치고 새 벽면에 서명과 날짜를 다시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날짜는 처음에 MDXXII, 곧 1522로 읽혔고, 홀바인은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맨 끝의 I 한 획을 돌 색깔로 덮어 지웠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그림을 1868~1869년에 연재된 장편 소설 《백치》에 옮겨 놓았다. 로고진의 어두운 집에 이 그림의 모사본이 걸려 있고, 므이시킨 공작은 그것을 바라보며 저런 그림을 보면 어떤 사람은 믿음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 나중에 소설의 또 다른 인물 이폴리트는 이 그림을 자세히 묘사하며, 이런 시신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었겠느냐고 묻는다. 미술관이 세어 보니 이 그림은 소설에 다섯 번 나온다.
3. 소 한스 홀바인 《화가 가족의 초상》
취리히의 화가 한스 아스퍼는 1543년 홀바인이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이 그림을 가지고 있었고, 바실리우스 아메르바흐에게조차 팔려 하지 않았다. 홀바인의 아내 엘스베트가 그림을 내놓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림이 어떻게 아스퍼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려 주는 문서를 역사가들은 찾지 못했다. 바실리우스는 1571년 아스퍼가 죽은 뒤에야 취리히의 약제사 게오르크 클라우저를 통해 여섯 크로네에 그림을 얻었고,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그림이 아메르바흐 컬렉션에 들어온 것은 1579년이다.
홀바인은 첫 잉글랜드 체류에서 돌아온 1528년 무렵 엘스베트를 두 큰아이 필리프와 카타리나와 함께 그렸다(홀바인에 대해서는 1번 참조). 그는 종이에 그렸고, 나중에 인물들을 윤곽선을 따라 오려 내 피나무 패널에 붙였다. 엘스베트는 아이들을 비껴 아래를 내려다보고, 눈꺼풀은 무겁고 붉게 부어 있으며, 입꼬리는 처져 있다. 크고 묵직한 그녀의 오른손은 아들의 어깨 위에 얹혀 있다. 필리프는 엄격한 옆모습으로 고개를 젖혀 오른쪽 위를 올려다보고, 어머니 무릎에 앉은 어린 카타리나도 오른쪽, 그림 가장자리 너머를 바라본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림이 원래 더 컸고, 오른쪽에 이젤 앞에 앉은 홀바인 자신이 그려져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본다. 그들은 두 아이가 모두 오른쪽을 바라본다는 점, 그리고 필리프의 머리가 처음에는 다른 자리에 그려졌음을 보여 준 적외선 촬영을 근거로 든다. 오려 낸 종이의 가장자리는 윤곽을 따라 눈에 보인다. 엘스베트의 두건 둘레로 가늘고 밝은 선이 지나가고, 앞으로 내민 카타리나의 손가락은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반듯하게 잘려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의 불그스름한 벤치에는 ‘152’가 남아 있고, 연도의 마지막 숫자는 잘려 나간 조각과 함께 사라졌다.
4. 소 한스 홀바인 《코린토스의 라이스》
회색 돌 난간의 앞면을 따라 라틴어로 ‘라이스 코린티아카 1526’이라는 글자가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의 이름난 헤타이라, 곧 고급 기녀였던 코린토스의 라이스의 이름과 연도다. 젊은 여인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가락에 힘을 뺀 채 난간 위에 놓여 있고, 그 곁에 금화가 소복이 쌓여 있으며 한 닢은 따로 떨어져 있다. 여인은 펼친 자기 손바닥 쪽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다. 그녀는 트임 사이로 흰 아마포를 빼낸 붉은 벨벳 보디스를 입었고, 소매는 황토빛 주황색 비단으로 된 커다란 것이며, 머리에는 금실 망을 썼으며, 등 뒤로는 묵직한 초록 휘장이 드리워 있다. 홀바인은 잉글랜드로 떠난 해인 1526년 바젤에서 이 패널을 그렸다(홀바인에 대해서는 1번 참조).
전설에 따르면 라이스는 고대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아펠레스의 연인이었고, 바젤의 인문주의자들은 홀바인을 ‘아펠레스’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부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회화 그 자체와, 아름다움에는 값을 후하게 치러야 한다는 생각을 다룬 작품으로 읽는다.
홀바인의 모델이 누구였는지는 단 한 줄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패널이 그려지고 60년쯤 지난 1580년대에 바실리우스 아메르바흐는 컬렉션 목록에, 작은 패널 두 점에 오펜부르크 집안의 여인이 그려져 있고 그중 한 점에 ‘라이스 코린티아카’라고 쓰여 있다고 적었다. 오펜부르크는 바젤의 가문이었고, 그 뒤로 사람들은 모델을 과부 막달레나 오펜부르크로, 또는 그녀의 딸 도로테아로 보아 왔는데, 이 기록 말고는 두 사람과 그림을 잇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뒷날 막달레나가 홀바인의 정부였다는 전설이 생겼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같은 기록에 나오는 두 번째 패널 《비너스와 아모르》도 바젤에 있다. 미술사가 요헨 잔더는 기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 그림이 공방 조수가 《라이스》의 윤곽선을 좌우로 뒤집어 옮기고 손의 자세를 바꾸어 그린 반복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의회가 선제후의 청을 물리치다 (1529~1771년)

5. 소 한스 홀바인 《그리스도의 수난》
1641년 10월 4일 바젤 소평의회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의 사절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사절은 홀바인이 그린 그리스도 수난의 여덟 장면을 시에서 사들이려고 온 터였다. 회의록에 따르면 평의회는 사절을 ‘온갖 정중함으로’ 배웅하며 포도주를 대접하고 길잡이까지 붙여 주었다. 뒷날 1673년 프랑스 여행가 샤를 파탱은 선제후가 이 패널들 값으로 3만 플로린을 제시했다고 썼다. 막시밀리안의 초상을 그린 화가 요아힘 폰 잔드라르트는 1675년에 낸 책에서, 자신이 초상을 그리던 자리에서 선제후에게 이 패널들을 칭찬했고, 사절은 일을 서툴게 처리했으며, 거절한 뒤로 시는 패널들의 값어치를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홀바인(1번 참조)은 1520년대 중반, 아마도 바젤 대성당에 둘 조각 제단의 날개 바깥면으로 이 그림들을 그렸다. 날개가 덮고 있던 조각은 남아 있지 않고, 날개 자체는 1529년 바젤에서 교회의 성상들이 부서질 때 시청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운데 패널들이 양 끝 패널보다 높아서, 전체를 두른 액자의 윗선은 가운데로 갈수록 계단처럼 올라가며 사라진 제단의 윤곽을 따른다. 패널마다 장면이 위아래로 두 개씩 있고, 그 사이를 금박 장식 띠가 가른다. 윗줄의 처음 세 장면, 곧 겟세마네의 기도, 체포, 가야바 앞의 그리스도는 밤 장면이고, 빛은 그림 속 횃불과 불에서 나온다. 그중 두 번째 장면에서는 노란 옷의 유다가 횃불과 미늘창을 든 무리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에게 입을 맞추고, 왼쪽 아래에서는 흰 수염의 베드로가 쓰러진 말고 위로 칼을 치켜든다. 병사들은 1520년대에 입던 갑옷과 트임 있는 바지 차림이고, 주위의 건축은 이탈리아식이다. 잔드라르트는 이 패널들에 드러난 ‘낮빛과 밤빛’에 대한 이해를 칭찬했다.
1770년 평의회는 이 날개 패널들을 바젤 정부의 선물로서, 당시 대학이 관리하던 공공 컬렉션에 넘겼다. 1771년 대학은 슈투트가르트 태생으로 바젤에서 초상화가로 일하던 요한 니콜라우스 그로트에게 패널을 세척하고 손상을 고치는 일을 맡겼고, 여덟 장면은 아마 그때부터 한 액자에 모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부터 사람들은 그로트가 그림을 망쳐 놓았다고 비난했다. 1997년 미술사가 베른트 린데만은 패널을 조사하고도 뒷날 덧칠한 흔적을 찾지 못했으므로, 그로트가 욕을 먹은 그 고르고 매끄러운 표면은 홀바인 자신의 솜씨다.

상속인들이 소송에서 지다 (1667~1823년)

6. 한스 발둥 그린 《죽음과 소녀》
법학 교수이자 세 차례 대학 총장을 지낸 바젤의 법률가 레미기우스 페슈는 그림, 주화, 책, 판화, 드로잉을 갖춘 바젤의 두 번째 대형 개인 컬렉션을 모았고, 발둥의 이 패널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그의 것이었다. 1667년 결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그는, 법학 박사 학위를 가진 후손이 관리할 수 있는 동안에는 컬렉션을 집안에 두라고 유언했다.
젊은 시절 뉘른베르크의 뒤러 공방에서 도제로 일했던 발둥은 이 패널에 1517년이라고 적었다.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 대성당의 주제단을 위해 다섯 해 가까이 일한 뒤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해였다. 맨 위에는 금빛 글자로 독일어 ‘히 무스트 두 인’, 곧 ‘너는 이리로 들어와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죽음은 맨 해골에 텅 빈 눈구멍, 갈비뼈에 찢긴 구멍이 난, 갈색 가죽만 남은 반쯤 썩은 시체로 그려졌다. 시체는 소녀의 오른쪽 어깨 뒤에 서서 불그스름한 그녀의 머리채 한 움큼을 주먹에 쥐고 있고, 머리채는 아래로 흘러내려 그의 다리에 붙은 너덜너덜한 살점과 하나로 이어진다. 창백한 알몸의 소녀는 울고 있다. 눈은 위로 치떠 있고 뺨으로 눈물이 흐르며, 깍지 낀 두 손을 시체의 앙상한 팔뚝에 대고 누르는 모습이 마치 죽은 자에게 직접 애원하는 것 같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시체는 다른 손으로 아래쪽, 열린 무덤을 가리킨다. 그녀의 허리께에 걸친 투명한 베일은 흰 선 몇 개로만 그려져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대학은 여러 번 페슈 컬렉션을 손에 넣으려 했고, 박사 학위가 없는 법률가 요한 야코프 페슈가 관리자가 되자 구실을 찾았다. 그는 바젤에서는 학위를 받을 수 없었는데, 법학 교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1심 법원은 가족의 손을 들어 주었다. 1823년 항소 법원은 그사이 상속인이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에서 법학 박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페슈 집안에서 컬렉션을 빼앗아 대학에 넘겼다.
미술관이 화가의 이름을 찾아내다 (1890년대)

7. 콘라트 비츠 《시나고그(‘구원의 거울’ 제단화)》
이 제단화의 바젤 패널들은 1890년대 중반까지 하를럼에서 활동한 네덜란드 화가 헤이르트헌 토트 신트 얀스의 ‘화파’ 작품으로 여겨졌다. 진짜 작가의 이름은 그때 이미 읽혀 있었는데, 다만 제네바에서였다. 1444년에 만든 제네바 제단화의 액자에는 바젤의 콘라트 비츠라는 이름의 라틴어 형태인 ‘콘라두스 사피엔티스 데 바실레아’가 쓰여 있고, 1845년 제네바의 연구자 블라비냐크가 이 글귀를 읽고 거기 적힌 것이 화가의 이름이라고 추정했다. 그것을 바젤과 연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90년대 중반 바젤 컬렉션의 관리자 다니엘 부르크하르트와 제네바 사람 자크 마요르가 제네바의 날개 패널들과 바젤의 패널들이 같은 손으로 그려졌음을 알아보았다. 마요르는 1896년에, 부르크하르트는 1901년에 이를 발표했다. 바젤 제단화에는 서명이 없고, 미술관은 제네바 제단화와 닮은 점을 근거로 비츠가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 제단화는 1435년 무렵 바젤의 성 레온하르트 성당을 위해 그려졌다고 여겨지며, 《시나고그》는 오른쪽 날개 바깥면의 일부였다. 회색 벽으로 둘린 텅 빈 돌방에, 눈이 시릴 만큼 쨍한 노란색의 거대한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서 있고, 옷은 각진 주름을 이루며 바닥에 내려앉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고, 그 위를 가는 흰 선 몇 개로 그린 투명한 눈가리개가 가로지르는데, 놓치기 쉽다. 얼굴은 분필처럼 희고 고개는 숙여져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회색 돌로 된 율법 석판 두 개가 기대어 있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허리께에서 석판을 아래로부터 받치고 있다. 석판의 글자는 히브리 문자처럼 보이지만, 미술관은 이를 ‘상상의 히브리어’라고 부른다. 왼손에는 꼭대기 근처에서 부러진 가느다란 금빛 깃대를 들었는데, 깃대에는 빨간 깃발이 달려 있고, 오른쪽 가장자리의 틈새로는 선명한 파란색 띠가 보인다.
눈가리개, 부러진 창, 미끄러져 내리는 석판은 중세 미술에서 시나고그의 흔한 표지였다. 중세 미술은 시나고그를 교회를 의인화한 여인과 한 쌍으로 세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을 그렇게 표현했다. 비츠는 이 표지들을 모두 남겨 두면서도 시나고그를 짝을 이루는 패널의 《교회》와 같은 키와 자태를 지닌 젊고 우아한 여인으로 그렸다. 그 교회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눈을 뜬 채 성배와 십자가를 들고 있다.
《시나고그》는 1843년 바젤의 수집가 페터 피셔파사방이 미술관에 기증했고, 다른 패널들도 19세기에 바젤 가문들의 선물로 들어왔다. 《교회》는 1928년 미술관이 정부와 두 재단, 그리고 많은 미술 애호가의 돈을 모아 샀고, 수태고지의 천사는 같은 해부터 고트프리트 켈러 재단의 기탁품으로 이곳에 있다(재단에 대해서는 8번 참조). 남아 있는 제단화의 14개 부분 가운데 아홉이 바젤에 있다. 제단화는 언젠가 해체되었고, 패널들은 두께 방향으로 켜져 앞면과 뒷면이 갈라졌다. 그렇게 《시나고그》의 뒷면은 베를린에 있는 별개의 그림 《솔로몬 앞의 시바 여왕》이 되었다.
스위스 연방이 바젤 화가의 그림을 사다 (1920년)
8. 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첫 번째 판본)
바젤 태생으로 당시 피렌체에 살던 뵈클린은 1880년 봄 후원자 알렉산더 귄터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지만, 귄터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캔버스가 아직 미완성인 채 작업실에 서 있을 때 금융가의 미망인 마리 베르나가 찾아와 ‘꿈꿀 수 있도록’ 그림을 달라고 청했고, 뵈클린은 그녀를 위해 두 번째 판본을 그렸다. 이 판본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다. 판본은 모두 다섯 점이다.
섬은 가로로 넓은 캔버스의 가운데 띠를 차지하고, 그 위로는 텅 빈 어두운 밤하늘이, 아래로는 거의 검고 잔잔한 물이 있다. 따뜻한 금갈색 빛을 받은 두 바위 덩어리가 양옆으로 벌어지고, 그 사이로 키 큰 검은 사이프러스들이 솟아 있으며, 바위에는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네모난 입구들이 파여 있다. 바위 사이의 하얀 선착장으로 작은 배 한 척이 다가간다. 배 한쪽 끝에는 어두운 옷의 사공이 노를 젓고, 그 뒤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흰 천에 싸인 인물이 보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으며, 다른 쪽 끝, 오른쪽에는 흰 덮개를 씌운 관이 놓여 있다. 왼쪽 아래 구석의 어두운 물속에 A와 B를 엮은 모노그램이 희미하게 보인다.
1920년 이 그림은 고트프리트 켈러 재단이 샀다. 재단은 1890년 리디아 벨티에셔가 스위스 연방에 넘긴 재산으로 세워졌고, 시인 고트프리트 켈러의 이름을 땄다. 무엇을 살지는 연방 평의회가 임명한 위원회가 정하며, 재단은 사들인 작품을 스위스의 미술관들에 맡기는데, 작품과 연고가 있는 곳으로 보내는 일이 많다. 《죽음의 섬》의 소유자는 재단, 곧 스위스 연방이고, 바젤 미술관은 1920년부터 이 그림을 기탁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첫 현대 회화들 (1931~1937년)

9. 파울 클레 《세네시오》
그림을 거의 가득 채운 것은 짧은 목 위의 둥근 머리이고, 그 얼굴은 평평한 색면들로 나뉘어 있다. 옅은 노란색의 머리 오른쪽 절반, 두 뺨을 가로지르는 분홍 띠, 흰색과 크림색과 노란색 네모들로 된 턱이다. 두 눈은 가는 선 하나로 둘러져 있는데, 이 선은 콧등에서 엇갈리며 8자를 이루고, 눈동자는 평평한 짙은 빨간 동그라미이며,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높이 있다. 왼쪽 눈 위에는 꼭짓점이 뾰족한 흰 삼각형이, 오른쪽 눈 위에는 짙은 초록 호가 있어서 한쪽 눈썹을 치켜든 것처럼 보인다. 입은 계단처럼 어긋나게 놓인 작은 짙은 보라색 네모 두 개다. 물감이 얇게 발려 있어 그 밑으로 분필 바탕과 판지에 붙인 거즈의 올이 비치는데, 눈의 흰자위에서 가장 잘 보인다.
‘세네시오’는 라틴어로 개쑥갓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개쑥갓은 잡초로, 하얗고 보송보송한 씨앗 뭉치가 센 머리처럼 보이며, 이 식물 이름은 ‘노인’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에서 왔다. 클레는 자기 작품 목록에 이 그림을 독일어 제목 ‘발트그라이스’로도 올렸는데, 대략 ‘머지않아 노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왼쪽 가장자리에 ‘클레’라고 쓰고, 그 아래에 연도 1922와 자기 작품 목록의 번호 181을 사선 세 개로 나누어 적었다.
클레는 1879년 베른 근교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독일인이었으므로 평생 독일 시민이었다. 1921년부터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고, 그곳에서 일한 지 두 해째에 바이마르에서 《세네시오》를 그렸다. 1933년 나치는 그를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해임했고, 그해 말 그는 베른으로 떠났다. 1937년 독일 미술관들에서 그의 작품이 몰수되었다(그중 한 점인 《빌라 R》은 13번에서 다룬다). 1939년 클레는 스위스 시민권을 신청했고, 끝내 스위스인이 되지 못한 채 1940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미술관은 1931년 뮌헨의 화상 귄터 프랑케와 조피 프랑케 부부에게서 《세네시오》를 샀다. 에밀 놀데의 《푸른 붓꽃 I》과 함께 이 그림은 컬렉션에 들어온 최초의 현대 회화에 속했고, 1936년 문을 연 미술관의 새 본관에는 이 두 점과 다른 몇 점 말고는 현대 미술이 거의 없었다.


10. 빈센트 반 고흐 《피아노 앞의 마르그리트 가셰》
이 그림은 40년 넘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아버지 폴 가셰 박사의 집, 마르그리트 가셰의 침실에 걸려 있었다. 1934년 바젤 미술관 미술 위원회의 두 위원인 관장 오토 피셔와 수집가 루돌프 슈테헬린이 가셰의 집에서 그림을 직접 보려고 오베르까지 갔고, 미술관은 같은 해에 그림을 샀다.
반 고흐는 1890년 5월 가셰 박사 가까이에서 지내려고 오베르로 왔고, 그해 여름 박사의 딸을 그렸으며, 7월 말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색을 하나하나 꼽았다. “드레스는 분홍색이다. 뒤쪽 벽은 주황색 점이 찍힌 초록색이고, 양탄자는 초록색 점이 찍힌 빨간색이며, 피아노는 짙은 보라색이다.” 캔버스는 좁고, 높이가 너비의 두 배다. 마르그리트는 옆모습으로 건반 위에 몸을 숙이고 앉아 있고, 머리는 틀어 올렸다. 피아노는 왼쪽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고, 그 위에 악보와 불을 켜지 않은 초가 놓여 있다. 주황색 점들이 캔버스 중간 높이까지 벽을 덮고, 오른쪽 아래에는 짧은 초록 붓질이 찍힌 빨간 양탄자가 깔려 있다.
드레스에 쓴 빨간 물감이 세월이 흐르며 바래서, 분홍 드레스는 연초록과 노란 붓질이 섞인 거의 흰 옷으로 보이고, 그 사이 군데군데 분홍빛 도는 빨간 줄이 남아 있다.

11. 로비스 코린트 《제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초상》
1937년 이 초상화를 살 돈은 노동조합들과 바젤슈타트주 교육청이 냈고, 그림은 미술관장 오토 피셔가 로비스 코린트의 미망인에게서 샀다. 미술관에 따르면 미술 위원회는 이 매입에 ‘강한 반대’를 나타냈고, 매입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피셔 자신의 표가 필요했다. 같은 해 독일 미술관들에서 코린트의 그림이 몰수되기 시작했다(15번 참조).
사회민주당원 에베르트는 당시 독일의 제국 대통령이었고, 코린트는 1924년 3월 베를린의 그의 집에서 그를 그렸다. 화가는 대통령을 앉히려 했지만, 에베르트는 그 자세로 좋지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며 거절했고, 그래서 코린트는 그를 선 모습으로 그렸다. 자서전에서 코린트는 에베르트의 머리에 깃든 ‘흥미로운 추함’에 마음이 끌렸다고 회상했다. 에베르트는 거의 정면으로 서서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왼쪽 가장자리의, 얇은 망사 커튼이 드리운 창에서 들어온 빛이 얼굴의 절반을 비추고, 나머지 절반은 갈색 그늘에 잠긴다. 짙은 더블 정장은 빛을 받은 쪽이 선명한 군청색과 청보라색 줄로 칠해졌고, 오른팔은 재킷 앞으로 늘어져 있으며, 왼손은 허리에 짚었고, 캔버스 아래쪽 3분의 1의 다리는 대강 윤곽만 잡혀 있다. 오른쪽 위 구석의 벽에는 독일어로 ‘로비스 코린트, 1924년 3월에’라고 쓰여 있다.
코린트는 그때 65세였다. 1911년 12월 뇌졸중을 겪은 뒤로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지만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25년 7월 세상을 떠났다.
1939년 여름, 제국의 창고에서 사들인 그림들
12. 프란츠 마르크 《동물들의 운명》
이 캔버스의 오른쪽 3분의 1은 1916~1917년 겨울 베를린의 한 미술품 운송 회사 창고에서 불에 탔다. 그림은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서 열린 마르크의 유작전이 끝난 뒤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르크 자신은 1916년 3월 4일 베르됭 근처에서 전사했다. 죽기 한 해 전 전선에서 이 그림의 복제가 실린 엽서를 받은 그는 아내 마리아에게 이렇게 썼다. “이건 이 전쟁의 예감 같아요. 소름 끼치고 가슴을 뒤흔들어요. 내가 이걸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마르크는 1913년 봄 이 그림을 그리고 처음에는 ‘나무들은 나이테를, 짐승들은 핏줄을 보여 주었다’라고 이름 붙였다. 첫 전시를 앞두고 그는 친구 파울 클레(9번 참조)의 권유로 제목을 바꾸었고, 1919년 클레는 준비용 수채화와 사진을 보며 불탄 부분을 복원했다. 미술관에 따르면 클레는 눈에 띄게 더 어두운 색조로 칠해 손실된 자리가 드러나도록 남겨 두었다. 마르크가 그린 왼쪽 3분의 2에서는 대각선들이 캔버스를 가로지른다. 거대한 적갈색 나무줄기가 위에서 오른쪽 가장자리 쪽으로 쓰러지고, 한가운데에서는 파란 사슴이 고개를 젖히고 뒷발로 일어서며, 그 왼쪽에는 입을 벌린 초록 말머리 두 개가 있다. 그 아래에는 가는 빨간 핏줄이 지나가는 흰 삼각형이 있는데, 첫 제목에 나온 바로 그 ‘핏줄’이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나이테가 드러난 통나무 단면이 있다. 클레가 칠한 오른쪽 3분의 1은 탁한 갈색 도는 올리브색에 옅은 빨간 선과 회녹색 선이 지나가고, 이 부분과 마르크의 짙은 색채 사이의 경계는 불탄 가장자리처럼 들쭉날쭉하다.
마르크가 죽은 뒤 그림은 미망인에게 남았고, 1930년 할레 시립 미술관이 샀으며, 1937년 제국 선전부가 ‘퇴폐 미술’로 몰수했고, 1938년에는 베를린 쇤하우젠 궁의 창고로 보내졌다. 당국이 외국에 팔 만하다고 본 작품들을 모아 둔 곳이었다. 1939년 여름 바젤은 독일 미술관에서 나온 작품 21점을 샀는데, 여덟 점은 6월 30일 루체른의 테오도어 피셔 화랑 경매에서, 13점은 베를린의 화상 카를 부흐홀츠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를 통해서였고, 값은 주 정부가 마련한 5만 프랑의 특별 예산으로 치렀다. 7월 미술관의 새 관장 게오르크 슈미트는 비평가 파울 베스트하임에게, 이 모든 일이 동화처럼 느껴진다고 쓰면서 ‘이렇게 되기까지의 사정이 그토록 충격적으로 현실적이고 잔인하지만 않다면’이라고 덧붙였다. 《동물들의 운명》은 이 매입들 가운데 첫 번째였다. 슈미트는 5월 쇤하우젠 창고에서 이 그림을 보았고, 주가 예산을 승인하기도 전에 매입을 합의했다. 1939년 5월 10일 그는 선전부를 대신해 그림을 팔던 구를리트에게 전보로 6000프랑을 제시했고, 결국 6900프랑을 치렀다.


13. 파울 클레 《빌라 R》
프랑크푸르트의 화가이자 수집가 파울리네 코바르치크는 클레가 이 그림을 그린 바로 그해인 1919년 11월에 그림을 샀다. 1916년부터 그녀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 시립 미술관의 구입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1926년 인플레이션으로 재산을 잃은 코바르치크는 현대 미술 컬렉션의 거의 전부인 34점을 평생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슈테델 안에 자리한 이 시립 미술관에 팔았다. 1937년 8월 《빌라 R》은 슈테델에서 몰수되었다.
그림은 작고, 거의 검은 바탕 위의 밤 풍경이다. 가운데 조금 왼쪽에 흰색, 분홍빛, 차가운 파란색, 보라색의 평평한 블록으로 쌓은 빌라가 서 있고, 짙은 빨간 네모들로 나뉜 큰 창이 나 있다. 넓은 빨간 길이 왼쪽 아래에서 들어와 집 앞을 지나고, 점점 좁아지며 오른쪽 가장자리 위쪽으로 올라간다. 집 오른쪽의 길 위에는 세리프가 달린 커다란 회녹색 글자 R이 서 있는데, 언덕과 같은 탁한 초록색이다. 왼쪽 위 구석에는 초록 반원이, 오른쪽 위에는 노란 보름달이 떠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은 클레가 처음 그린 유화 가운데 하나로, 그전까지 그는 오랫동안 종이에만 작업했다. 같은 해 그는 커다란 검은 글자가 들어간 《도시 R》도 그렸는데, 이 그림을 소장한 뮌헨의 렌바흐하우스는 그 글자의 뜻이 암호처럼 감추어져 있다고 본다.
1939년 6월 30일 테오도어 피셔 화랑은 루체른에서 독일 미술관에서 몰수된 작품 125점을 경매에 부쳤고, 그중 86점이 독일 밖의 컬렉션으로 팔려 갔다. 바젤 대표단은 도록에 59번 《길가의 집》으로 올라 있던 《빌라 R》에 응찰할 생각이 없었지만, 계획한 매입을 마치고 남은 돈으로 이 그림을 샀다. 이 경매에 나온 클레의 유화는 《빌라 R》과 《수도원 정원》 두 점뿐이었고, 《수도원 정원》은 1940년 불에 타 사라졌다.


14. 파울라 모더존베커 《호박 목걸이를 한 반신 누드 자화상 II》
1906년 2월 파울라 모더존베커는 화가인 남편 오토 모더존을 떠나 브레멘 근교의 화가 마을 보르프스베데를 나왔고, 파리에서 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해 그녀는 자화상을 15점가량 그렸다. 그중 몇 점을 위해 그녀는 알몸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은 아마 여동생 헤르마였을 것이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자화상도 사진을 보고 그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역사상 최초의 누드 자화상 가운데 하나로 보며, 그녀가 이 그림을 대중에게 보일 생각은 아마 없었으리라고 여긴다.
그녀는 크고 검은 눈으로 보는 사람을 바라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으며, 단단하고 새빨간 입술에는 작고 절제된 미소가 걸려 있다. 머리에는 분홍 꽃 세 송이가 꽂혀 있다. 굵은 호박 구슬을 꿴 긴 목걸이는 평평한 겨자빛 황토색 동그라미들로 그려져 가슴 아래까지 말굽 모양으로 늘어진다. 들어 올린 오른손은 손가락 끝으로 줄기가 짧은 분홍 꽃 한 송이를 쥐고 있고, 왼팔은 몸을 가로질러 놓여 손목이 위로 가파르게 꺾여 있다. 그녀 뒤로는 옅은 회청색 바탕 위에 잎이 달린 짙은 남색 줄기들이 빽빽하다. 미술관은 여기서 정면을 향하고 눈이 크며 손에 꽃을 든 고대 미라 초상화의 영향을 본다.
1907년 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보르프스베데로 돌아갔고, 11월 2일 딸을 낳았으며, 11월 20일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자화상은 1913년 처음 전시되었고, 같은 해 하노버의 수집가 헤르베르트 폰 가르벤스가르벤스부르크가 샀다. 1928년 하노버의 케스트너 미술관이 그에게서 그림을 사들였고, 1937년 그림은 그곳에서 몰수되었다.

1939년 6월 30일 루체른 경매에서 이 그림은 97번으로 나왔다. 경매 전날 주는 요청받은 10만 프랑 가운데 5만 프랑을 승인했고, 미술 위원회는 가격이 위원회가 정한 한도를 넘었는데도 이 그림을 샀다. 같은 날 바젤은 피카소의 《솔레르 가족》을 포기했는데, 그 그림을 사면 예산을 거의 다 써 버리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바젤에는 1939년 부흐홀츠를 통해 산 모더존베커의 그림이 두 점 더 있고, 그중 하나인 《고양이와 소년》도 케스트너 미술관에서 몰수된 그림이었다.

15. 로비스 코린트 《에케 호모》
1937년 7월 19일 뮌헨에서 《퇴폐 미술》전을 열면서 화가 아돌프 치글러는, 코린트가 ‘두 번째 뇌졸중 이후로는 병적이고 알아볼 수 없는 환칠만 했다’고 말했다. 전시에 나온 코린트의 그림 일곱 점 가운데 세 점이 베를린 국립 미술관의 소장품이었고, 《에케 호모》도 그중 하나였다. 이 그림은 뮌헨 전시에 낼 작품을 모으던 첫 번째 몰수 때인 7월 7일 국립 미술관에서 몰수되었다. 독일 미술관들에서 몰수된 코린트의 그림은 모두 45점이었다. 바젤 미술관의 큐레이터 에바 라이퍼트는 2017년, 뮌헨 전시를 찍은 수많은 사진에 이 그림이 나오기는 하지만 당시 이 그림을 ‘퇴폐적’이라고 볼지를 두고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코린트는 생애 마지막 해인 1925년에 이 그림을 그렸고(코린트에 대해서는 11번 참조), 미술관에 따르면 지인들이 모델을 섰다. 실물 크기의 세 인물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고,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무릎께가 잘려 있다. 가운데에는 가시관을 쓰고 소매 없는 붉은 옷을 입은 젊은 그리스도가 서 있는데, 얼굴과 어깨와 팔에 피가 튀어 있고, 엇갈린 손목은 굵은 밧줄로 묶여 있다. 왼쪽에서는 이마에 노란 띠를 두르고 연백과 차가운 푸른 색조로 칠한 흰 가운을 입은 빌라도가 펼친 손바닥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오른쪽에는 어두운 강철 갑옷을 입은 대머리 병사가 서 있고, 그리스도의 묶인 손에서 그에게로 밧줄이 이어진다. 빨강, 검회색, 흰색이 세 개의 큰 덩어리를 이루고, 붓질은 어디서나 빠르고 두꺼우며, 가장 공들여 그린 곳은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왼쪽 위 구석에 코린트는 캔버스에 직접 ‘에케 호모’, ‘로비스 코린트’, ‘1925’라고 세 줄로 썼다.
코린트가 죽은 뒤 그림은 미망인에게 남았고, 1929년 국립 미술관이 샀으며, 몰수된 뒤인 1938년 8월에는 쇤하우젠 창고에 들어가 있었다. 1939년 5월 말 게오르크 슈미트는 베를린에 가서 화상 카를 부흐홀츠와 함께 작품들을 골랐고, 그 작품들은 나중에 검토용으로 바젤에 보내졌다. 6월 12일 부흐홀츠는 바젤을 위해 선전부로부터 《에케 호모》를 사들였고, 루체른 경매가 끝난 뒤 미술 위원회는 보내온 작품 가운데 12점을 더 골랐는데, 이 그림도 그중에 있었다. 1949년, 그림이 몰수될 당시 국립 미술관장이었던 파울 오르트빈 라베는 《에케 호모》를 자신의 책 《제3제국의 예술 독재》 표지에 실었다. ‘퇴폐 미술’ 캠페인을 다룬 초기 책 가운데 하나다.

망명자들은 기증하고, 미술관은 놓친 그림을 사들이다 (1941~1977년)
16. 폴 고갱 《타 마테테(시장)》
로베르트 폰 히르슈는 1940년 스위스 시민권을 받으면서 이 그림을 바젤에 기증했고, 그림은 1941년 미술관 소장품 목록에 올랐다. 히르슈는 1883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동화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오펜바흐에 있는 친척들의 가죽 회사에 들어갔고, 1913년 헤센 대공에게서 귀족 칭호 ‘폰’을 받았으며, 1917년 회사의 단독 소유주가 되었다. 그는 1907년 무렵부터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의 컬렉션에는 중세의 금세공품과 에나멜, 뒤러의 드로잉, 필사본, 근대 프랑스 회화가 있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미술관들에 큰 기증을 할 생각이었지만,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회사의 지점이 있던 바젤로 이주했고, 그림 한 점을 빼고 컬렉션을 모두 그곳으로 옮겼다(그 그림은 19번에서 다룬다).

고갱은 첫 타히티 체류 때인 1892년에 《타 마테테》를 그렸다. 타히티어로 ‘시장’이라는 뜻이고, 미술관도 이 그림을 그렇게 부른다. 이 그림은 《오늘은 시장에 가지 않으리》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 제목은 타히티어 낱말을 옮긴 것이 아니다. 목이 높은 긴 드레스를 입은 여인 다섯이 초록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고, 드레스는 저마다 평평한 한 가지 색으로, 왼쪽의 거의 검은 초록부터 오른쪽의 노랑까지 이어진다. 여인들의 머리는 엄격한 옆모습이기도 하고 돌아가 있기도 하며, 들어 올린 손은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가운데 여인만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고갱은 이 줄을 이집트 벽화, 곧 영국 박물관에 있는 서기 네바문의 무덤에서 나온 연회 장면을 본떠 짰는데, 그는 그 벽화의 사진을 타히티까지 가져갔다. 그는 황마 천에 그렸고, 얇고 무광인 물감 사이로 거친 올이 그림 전체에 비친다.
바젤에서 히르슈는 1945년 조각가 마르타 드레퓌스코흐와 결혼했고, 1955년 바젤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미술관과 멀어졌다. 히르슈는 현대 미술은 개인 수집가가 사야 하고 미술관은 이미 인정받은 작품을 지켜야 한다고 여겼고, 프란츠 마이어 관장 시절 바젤 미술관이 새로운 미국 회화를 사들이기 시작하자 컬렉션 전체를 시에 남기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는 1977년 11월 1일 바젤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컬렉션의 대부분은 1978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팔렸다.
17. 후안 그리스 《만돌린을 든 여인(코로를 따라)》
카미유 코로는 1860~1865년 무렵 작업실에서 이탈리아 의상을 입은 모델을 그렸다. 모델은 무릎에 만돌린을 올려놓고 앉아 생각에 잠긴 채 악기를 바라보고 있고, 이 그림에는 나중에 《만돌린을 든 몽상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1916년 이 그림은 부다페스트의 모르 리포트 헤르초크 남작의 컬렉션에 걸려 있었고, 소장처는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이다. 같은 1916년 9월 후안 그리스는 이 그림을 바탕으로 자기 그림을 그렸다.
그리스는 코로의 세부를 되풀이했다. 작은 구슬을 한 줄로 꿴 머리띠, 진주 귀걸이, 어두운 보디스 밑의 흰 슈미즈, 몸통은 왼쪽으로 목은 오른쪽으로 향한 채 무릎을 가로질러 놓인 만돌린, 그리고 기울어진 고개다. 코로의 색은 거의 남기지 않아서, 그림은 점판암 같은 회색, 검정, 분필 같은 흰색, 짙은 병록색, 녹슨 갈색으로 칠해졌다. 얼굴은 밝은 절반과 어두운 절반으로 나뉘고, 한쪽 눈은 가는 흰 선으로 둘려 있으며, 만돌린은 흰색으로 긁어 낸 현이 달린 녹슨 갈색 판이 되었고, 흰 소매의 둥근 끝에는 분무한 듯한 잘디잔 회색 점들로 그늘이 졌다.

1887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그리스는 1906년부터 파리에 살았다. 1916년 그의 화상이자 독일 국적자인 다니엘앙리 칸바일러는 스위스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5월에 그리스는 레옹스 로장베르와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그는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드로잉을 했다.
이 그림을 바젤에 기증한 사람은 바젤 은행가의 아들로 1911년부터 1954년까지 파리의 은행에서 일한 라울 라 로슈다. 1918년부터 그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화가 아메데 오장팡과 친구로 지냈고, 두 사람은 그가 입체파 그림을 모으는 것을 도왔으며, 르코르뷔지에는 파리 오퇴유에 그와 그의 컬렉션을 위한 라 로슈 저택을 지었다. 1952년, 1956년, 1963년에 라 로슈는 입체주의와 순수주의 작품 90점을 바젤에 넘겼고, 그 뒤로 사람들은 입체주의를 보러 바젤을 찾게 되었다. 그리스는 《만돌린을 든 여인》을 합판에 유채로 그렸고, 배경의 얇은 회색 물감 사이로 나무의 세로 결이 비치는데, 오른쪽 위 구석에서 가장 잘 보인다.
18. 앙리 마티스 《강둑》
1939년 6월 30일 루체른에서 바젤 미술관장 게오르크 슈미트는 마티스의 《강둑》이 96번으로 경매에 나와 아스코나의 막스 뮐러에게 팔려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날 바젤은 다른 작품 여덟 점을 샀다. 그림은 폴크방 미술관의 소장품이었다. 미술관 설립자 카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는 1908년 2월 파리의 베른하임죈 화랑에서 이 그림을 샀는데, 그보다 몇 달 앞서 그는 미술관에 들어간 최초의 마티스 그림을 사들인 터였다. 오스트하우스가 죽은 뒤 1922년 그의 컬렉션은 하겐에서 에센으로 옮겨 갔고, 1937년 그림은 그곳에서 ‘퇴폐 미술’로 몰수되었다.

마티스는 1907년 봄, 스페인 국경 근처 지중해의 어촌 콜리우르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앙드레 드랭과 함께 그 무렵 야수주의에 이르렀다. 위쪽 가장자리를 따라 아몬드 모양의 커다란 짙은 초록 잎이 달린 가지가 뻗어 있다. 가는 나무줄기들은 벽돌빛 빨강과 분홍 선으로 그려졌고, 먼 강기슭의 주홍빛 띠 아래에서 파란 물에 비친 그림자로 이어지므로, 나무 하나하나가 두 번씩 그려진 셈이다. 초록, 보라, 주홍, 파랑이 검정 없이 순수한 색면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의 나무줄기 사이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옅은 연보랏빛 옷을 입은 아주 작은 인물이 무릎에 무언가 흰 것을 얹고 앉아 있다. ‘앙리-마티스’라는 서명은 오른쪽 아래 구석의 물 위에 파란색으로 쓰여 있다.
1939년부터 1953년까지 그림의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미술관은 밝혀내지 못했다. 루체른 경매에서 14년이 지난 1953년, 화상 에른스트 바이엘러를 통해 한 개인 컬렉션의 이 그림을 사라는 제안이 바젤에 들어왔고, 여전히 관장이던 슈미트는 이 그림을 마티스의 고전적인 야수주의 시기의 ‘특히 귀중한 작품’이라고 불렀다.
19. 대 루카스 크라나흐 《파리스의 심판》
《파리스의 심판》은 1933년 독일의 국가 귀중 미술품 목록에 올라 있었고, 그래서 로베르트 폰 히르슈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바젤로 갈 때(히르슈에 대해서는 16번 참조) 이 그림만은 나머지 컬렉션과 함께 가지고 나가도록 허가받지 못했다. 1936년 3월 그림은 베를린의 화상 요하네스 힌리히센을 통해 헤르만 괴링에게 넘어갔고, 괴링 컬렉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 거래가 강제 매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흔히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를 찾지 못했다. 히르슈가 나머지 컬렉션의 반출 허가를 받는 대가로 이 크라나흐를 괴링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다. 1937년 괴링은 베를린의 크라나흐 전시에 이 그림을 빌려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림은 1954년 8월 31일 반환 절차에 따라 히르슈에게 돌아왔고, 1977년 마르타 폰 히르슈와 로베르트 폰 히르슈의 기증품으로 바젤에 들어왔다.
왼쪽에는 은빛 갑옷을 입은 파리스가 앉아 있다. 곱슬머리에 수염을 길렀고, 발치에는 흰 타조 깃털을 꽂은 모자와 칼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조개껍데기와 나선 무늬로 뒤덮인 기상천외한 구릿빛 주황색 갑옷 차림의 흰 수염 노인 메르쿠리우스가 유리 구슬을 손에 들고 서 있다. 오른쪽에는 세 여신이 투명한 베일만 걸친 알몸으로 서 있는데, 베일은 허리와 팔 언저리에 가는 선으로만 보인다. 가운데 여신은 등을 돌리고 서서 넓은 붉은 모자를 쓰고 묵직한 금목걸이를 걸쳤으며, 어깨 너머로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위쪽 구름 속에서는 아모르가 그들을 겨누고 있고, 나무들 너머로 바위 위의 성과 도시, 푸른 산들이 보인다. 오른쪽 여신이 발을 디딘 돌 위에 크라나흐는 ‘15’와 ‘28’을, 그 사이에는 자기 공방의 표지인 날개 달린 뱀을 그려 넣었다.
패널 뒷면에는 1937년 베를린 전시 때 타자기로 쳐서 붙인 라벨이 남아 있고, 거기에는 그림의 소유자가 ‘총리 괴링’으로 적혀 있다.

다시 검토된 매입 (1940년, 2021~2023년)

20.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40년 6월 12일 샤를로테 폰 베스델렌은 제네바에서 바젤의 화상 크리스토프 베르누이의 아내 알리스 베르누이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가진 그림 12점을 꼽고는 지금 그중 한 점을 팔고 싶다며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라이헨하임 집안 출신으로 베를린 수집가 부부의 딸인 유대인 샤를로테는 예전에 은행가 파울 폰 멘델스존바르톨디와 결혼했었고, 부부는 1913년 파리의 화상 폴 로장베르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1927년 이혼한 뒤 그림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1930년 그녀는 뇌샤텔 출신의 퇴역 프로이센 기병 대위 폰 베스델렌 백작과 결혼해 스위스 시민이 되었다. 캔버스 뒷면의 세관 스티커로 보아 그림은 1935년 10월 5일 브리크에서 스위스 국경을 넘었고, 샤를로테 자신은 1938년 베를린을 떠났다. 제국은 그녀에게 유대인 재산세와 출국세를 물렸고, 그 세금으로 그녀의 개인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독학한 화가로 파리 시 세관에서 일한 적이 있는 루소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09년 기욤 아폴리네르의 주문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2인 초상으로, 시인이 연인인 화가 마리 로랑생 곁에 서 있고, 로랑생은 뮤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 있는 첫 번째 판본에서 루소는 프랑스 사람들이 ‘시인의 카네이션’이라고 부르는 수염패랭이꽃 대신 비단향꽃무를 그렸고, 아폴리네르는 신문에 이를 두고 농담을 썼다. 바젤에 있는 두 번째 판본에서는 두 인물 앞에 수염패랭이꽃의 키 큰 줄기가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분홍, 흰색, 짙은 빨강의 잔꽃들이 평평한 꽃송이를 이루고 있다. 긴 회보랏빛 옷을 입은 뮤즈는 집게손가락을 위로 세운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머리와 목에는 초록 잎이 달린 짙은 색 꽃을 둘렀다. 검은 정장을 입은 아폴리네르는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손에는 흰 깃펜을, 왼손에는 둘둘 만 종이를 들었으며, 두 사람 위로는 잎사귀 하나하나를 따로 윤곽선으로 그린 나뭇가지들이 아치 모양으로 모인다. 아폴리네르는 처음 모델을 서던 날 루소가 자기의 코, 입, 귀, 이마, 손, 그리고 온몸의 치수를 재어 그 치수를 줄여서 캔버스에 옮겼다고 회상했다. 로랑생과 헤어지고 한 해 뒤인 1913년 아폴리네르는 이 그림을 팔아 달라며 로장베르에게 맡겼다.

1940년 여름 미술관장 게오르크 슈미트는 처음에는 샤를로테 폰 베스델렌에게, 소장품을 폭격에 안전한 보관소로 옮기는 데 돈이 다 들어가서 미술관에 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 7월 말 그는 직접 제네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8월 1일 그는 베르누이에게, 그녀를 ‘팔세토의 높은 음에서 현실의 땅으로’ 끌어내렸으며, 그녀는 ‘어떻게든 팔아야 하는’ 처지인 것 같고, 자기가 1만 2000프랑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 덥석 잡을 것이라고 썼다. 미술관에 돈을 미리 내준 수집가 루돌프 슈테헬린에게 슈미트는, 루소의 고전적인 대표작 가운데 하나를 두고 ‘이것이 사실상 부끄러울 만큼 싼 값이라는 것을 관계자 모두가 안다’고 썼다. 1940년 9월 2일 미술 위원회 회의록에서 슈미트는 이 제안을 ‘전쟁 때문에 예상할 수 있었던 행운’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다. 미술관은 1만 2000프랑을 치렀는데, 슈미트 자신의 말로는 평시라면 이 그림에 3만~4만 프랑은 주었을 것이다. 샤를로테 폰 베스델렌은 뒷날 이 매각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1946년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1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위스의 역할을 조사한 스위스 독립 전문가 위원회는 이 매입을 ‘도피 재산’의 전형적인 사례로 분석했다. 위원회는 독일을 떠난 망명자들이 나치의 지배 밖에 있는 나라에서 판 재산을 이렇게 부르며 약탈된 미술품과 구별했다. 2021년 샤를로테 폰 베스델렌의 권리 승계인 가운데 한 사람을 대리한 변호사들은 미술관에 이 거래를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했고, 2022년에는 그림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2023년 12월 20일 미술 위원회는 54쪽에 이르는 결정을 내렸다. 결정문에는 당시 미술관 직원들의 태도에서 ‘샤를로테 폰 베스델렌이라는 인격에 대한 섬뜩한 무례와 상당한 냉정함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과, 이것이 ‘바젤 미술관 역사의 일부’라는 말이 적혀 있다. 위원회는 박해가 없었다면 매각도 없었을 것이고 샤를로테 폰 베스델렌은 살아가기 위해 그 돈이 필요했다는 이유로, 이 매각이 박해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인정했다. 미술관은 이미 2020년, 1933년 수집가 쿠르트 글라저의 컬렉션 매각 때 산 판화들을 두고 비슷한 합의를 맺은 바 있었다. 위원회는 《뮤즈》의 반환은 거부했지만, ‘적절한 규모’의 금전 보상을 위한 협상은 지지했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
피카소의 그림 두 점, 《두 형제》와 《앉아 있는 아를캥》은 1967년 바젤 시민들이 주민 투표에서 매입에 찬성한 뒤 시가 샀고, 피카소는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미술관에 작품 네 점을 더 선물했다. 1939년 여름에 산 작품 가운데에는 오스카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 마르크 샤갈의 《코담배 한 줌》, 프란츠 마르크의 《두 마리 고양이, 파랑과 노랑》이 컬렉션에 있다. 홀바인은 1523년과 1532년의 에라스뮈스 초상화, 그리고 1516년의 초기작인 마이어 춤 하젠 2연 초상화로 마저 살펴볼 만하다. 《백치》에서 므이시킨 공작은 바젤에서 본 또 다른 그림 한 점을 떠올리는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역시 이 미술관이 소장한 한스 프리스의 1514년 작 《세례자 성 요한의 참수》로 본다. 30만 점이 넘는 미술관 소장품의 대부분을 보관하는 판화 전시실에는 아메르바흐 컬렉션의 드로잉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