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아테네에 처음으로 공공 회화 갤러리가 문을 열었을 때 걸린 그림은 117점이었고, 그 대부분은 외국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국립 미술관은 1900년 4월 10일의 법률로 비로소 세워졌고, 한 해 뒤에는 자기 재산을 회화 박물관에 쓰라고 남긴 알렉산드로스 수초스의 컬렉션을 넘겨받았다. 1954년 수초스 재단이 미술관과 합쳐지면서 그의 이름도 미술관의 정식 명칭에 들어갔다.

19세기 그리스 화가들은 뮌헨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리스의 왕 오토가 바이에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세기의 그리스 화가는 거의 모두 뮌헨 아카데미를 거쳤다. 어떤 이들은 돌아와 아테네에서 가르쳤고, 어떤 이들은 독일에 남아 기억에 기대어 그리스의 시골을 그렸다. 이 목록의 첫머리에는 베네치아로, 다시 톨레도로 떠나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않은 크레타 사람이 있고, 마지막에는 1925년 무렵 한여름 더위 속에 어느 섬 집의 마당에서 그린 그림이 있다.

1.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엘 그레코, 1570, 아테네 국립 미술관

젊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가 칸디아에서 금빛 바탕에 그린 이콘 《그리스도의 수난》은 1566년 12월에 값이 매겨져 금화 70두카트에 팔렸다. 칸디아는 지금의 이라클리오로, 크레타의 중심 도시였고, 섬은 그때 베네치아의 영토였다. 국립 미술관이 2014년 도록에 쓴 바에 따르면 그 무렵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의 그림 한 점이 받던 값과 비슷한 액수였다. 이콘 자체는 사라졌다. 화가는 곧 베네치아로 건너갔고, 1570년 로마로 옮겼으며, 거기서 다시 스페인으로 가서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614년 톨레도에서 죽었고, 끝내 크레타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평생 그리스 문자로 서명했다.

《그리스도의 매장》 역시 미술관이 사들이기 전에는 한 번도 그리스에 온 적이 없었다. 이 패널의 내력은 미술관 복원부를 이끄는 미할리스 둘게리디스가 되짚었다. 뒷면에는 1710년 스페인 왕에게서 백작 작위를 받은 레데스마 데 라 푸엔테 가문의 문장이 있고, 그 뒤 패널은 멕시코의 한 컬렉션과 19세기 프랑스 수집가의 손을 거쳤는데, 언제 어떻게 주인이 바뀌었는지는 둘게리디스도 적지 않았다. 1995년 1월 패널은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팔렸고, 곧 런던의 미술상 데릭 존스에게 넘어갔으며, 2000년 무렵 미술관이 이를 사들였다. 둘게리디스에 따르면 값은 70만 달러였다. 돈은 그리스 전역에서 모은 성금과 국영 기업들의 기부금, 오나시스 재단의 출연금, 그리고 미술관 자체 예산으로 마련되었다.

미술관은 이 패널을 화가가 베네치아에 있던 시기인 1568~1570년 무렵의 것으로 본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콘 제작에서 남은 것은 나무 바탕과 달걀 템페라뿐이고, 그 템페라에도 그는 베네치아 화가들처럼 기름을 섞었다. 구도는 두 판화, 파르미자니노의 《십자가 강하》와 바티스타 프랑코의 《매장》을 합쳐서 짰다. 하얀 돌 석관은 모서리가 보는 사람 쪽을 향하도록 비스듬히 놓였는데, 시선을 안쪽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석관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창백하고 무거운 몸에 머리는 어깨로 떨어지고 눈은 감겼으며, 왼팔은 늘어지고 맨발 하나는 땅을 딛고 있다. 왼쪽에서는 머리에 흰 천을 두른 갈색 옷의 남자가 등을 보인 채 몸을 숙이고 수의를 무덤 가장자리 너머로 끌어당긴다. 몸 뒤쪽 여인들 사이에서는 회녹색 베일을 쓴 성모가 고개를 뒤로 젖혔는데, 미술관은 성모가 정신을 잃어 가는 중이라고 쓴다. 석관 앞 땅바닥에는 가시관과 검은 못 세 개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다른 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불타는 듯한 주황색 망토를 두른 젊은이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사도 요한으로, 다른 인물들보다 나중에 구도에 들어왔다. 미술관 복원가들이 적외선으로 패널을 조사해 보니, 화가는 작업의 첫 단계를 마친 다음에야 요한을 넣기로 했다. 둘게리디스는 엘 그레코가 참고했다고 알려진 판화 어느 것에도 이 인물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매장
그리스도의 매장엘 그레코, 1570, 아테네 국립 미술관

2. 엘 그레코 《천사들의 합주》

천사들의 합주
천사들의 합주엘 그레코, 1600, 아테네 국립 미술관
수태고지
수태고지엘 그레코, 1614, 산탄데르 은행 재단

《천사들의 합주》는 원래 《수태고지》의 윗부분이었다. 1608년 엘 그레코는 톨레도 타베라 병원 성당의 제단화들을 주문받았고, 《수태고지》는 오른쪽 곁제단에 들어갈 그림이었다. 1614년 화가가 죽었을 때 병원을 위한 그림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캔버스는 아마 19세기 말에 잘린 것으로 보인다. 성모와 대천사 가브리엘이 있는 아랫부분은 마드리드의 산탄데르 은행 컬렉션에 있고, 아테네로 온 것은 그 위의 하늘이다.

헝가리의 수집가이자 화상인 마르첼 네메시는 20세기 초 엘 그레코를 다시 발견하고 스페인에서 그의 그림들을 사들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930년에 죽었고, 1931년 6월 그의 컬렉션은 뮌헨 경매에서 팔려 나갔다. 그리스 정부는 그 경매에서 천사 악사들이 그려진 긴 캔버스 띠를 5,900,775드라크마에 샀고, 미술관은 이 구입을 작가 자하리아스 파판토니우가 미술관을 이끌던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일로 꼽는다.

천사들의 합주
천사들의 합주엘 그레코, 1600, 아테네 국립 미술관

천사들에게는 날개가 없고, 미술관도 이 점을 따로 짚는다. 천사들은 어두운 회녹색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며, 미술관은 그들의 악기로 스피넷, 하프, 플루트, 비올라 다 감바를 든다. 스피넷은 아마 왼쪽 가장자리에서 거의 통째로 잘려 나간 듯하고, 보이는 것은 분홍빛 보라색 옷을 입은 맨 끝 천사가 손을 얹은 어두운 나무 뚜껑뿐이다. 그 옆에서는 노란빛 초록 옷을 입은 곱슬머리 천사가 네모난 음표가 적힌 악보를 펼쳐 들고 있고, 가운데에는 키 큰 하프가 솟아 있으며, 그 오른쪽에서는 은빛 흰 옷의 천사가 등을 보인 채 플루트를 입술로 가져가고, 오른쪽 가장자리에서는 연한 하늘색 옷의 천사가 위를 올려다보며 비올을 들고 있는데, 그 밝은 몸통이 오른쪽 아래 구석을 차지한다. 옷은 긴 빛의 줄로 그려졌고, 한 주름 안에서도 색이 분홍에서 흰색으로, 초록에서 노랑으로 바뀐다. 미술관은 이 캔버스를 미완성으로 본다. 아래쪽 구름 속에서는 작은 벌거숭이 푸토들이 버둥거리는데, 캔버스의 아래 가장자리가 바로 그들 위를 지나간다. 이 띠를 《수태고지》에서 잘라 낸 자리다.

3. 외젠 들라크루아 《그리스 독립전쟁의 한 장면》

그리스 독립전쟁의 한 장면
그리스 독립전쟁의 한 장면외젠 들라크루아, 1856, 아테네 국립 미술관

흰 푸스타넬라 치마를 입은 그리스 봉기군 병사가 밝은 크림색 말을 타고 달리고, 말은 뛰어오르며 앞다리를 접어 올렸다. 기수는 노란 수건을 감은 붉은 모자를 썼고, 수건 끝자락과 붉은 안감을 댄 초록 망토가 등 뒤로 휘날린다. 고삐를 쥔 손에는 은 손잡이가 달린 작은 무기가 들려 있는데, 아마 권총인 듯하다. 말발굽 아래, 캔버스 아래쪽 가장자리를 따라 흰 터번을 쓴 튀르크인이 죽어서 엎드려 있다. 오른쪽에서는 걸어서 싸우는 그리스 병사가 등을 보이고 서서 긴 소총으로 무너진 둥근 탑을 겨누어 쏘고 있고, 탑은 흰 화약 연기에 싸여 있으며, 그 옆 땅에는 죽은 말 두 마리가 쓰러져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반영웅적이고 반서사시적인 그림이라고 부르며, 기수에게서는 이상이 구현된 모습을 본다.

들라크루아는 1820년대에 그리스를 다룬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다. 《키오스섬의 학살》은 1824년 살롱에 내놓았고, 《메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는 1826년에 그렸다. 그리스의 봉기는 그 무렵 파리의 미술계와 사교계에서 눈에 띄는 화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그리스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 이 캔버스는 전쟁이 끝나고 30년 뒤인 1856년, 이미 인정받는 대가가 되어 그렸고, 같은 해에 그리스 기수와 항복하는 튀르크인을 그린 비슷한 그림도 한 점 그렸는데, 그 그림은 하버드 미술관에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서명과 날짜가 있는데, 줄여 쓴 이름 ‘외젠 들라크루아’와 1856이라는 연도다.

1978년 이 그림이 파리 경매에 나왔고, 그리스 정부는 선주 바실리스 굴란드리스와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의 도움을 받아 이 그림을 샀다. 그리스 텔레비전 방송국 에르테는 당시 값이 약 370만 프랑이었고, 경매에서 맞선 사람들 가운데 배우 알랭 들롱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4. 이반 아이바좁스키 《튀르크 기함에 불을 지르는 카나리스》

카나리스의 튀르크 기함 방화
카나리스의 튀르크 기함 방화이반 아이바좁스키, 1881, 아테네 국립 미술관

1822년 봄 튀르크군은 키오스섬에서 학살을 저질렀고, 두 해 뒤 들라크루아가 그린 것이 바로 그 학살이다. 6월에는 튀르크 함대가 섬 앞바다에 머물며 라마단이 끝났음을 기리는 바이람 축제를 지내고 있었다. 6월 19일 밤, 불붙을 것을 가득 실은 그리스 화공선 두 척이 함대에 다가갔다. 프사라섬 출신의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는 자기 화공선을 오스만 함대 사령관인 카푸단 파샤 나수흐자데 알리 파샤의 기함에 붙들어 매고 불을 지른 뒤 작은 배를 타고 빠져나왔다. 불이 화약고에 이르자 배는 폭발했다. 흔히 드는 숫자로는 약 2000명이 죽었고, 카푸단 파샤는 치명상을 입고 뭍에서 숨졌다. 카나리스는 뒤에 제독이 되었고, 여러 번 정부 수반을 지냈으며, 1877년에 죽었다.

아이바좁스키는 59년 뒤인 1881년에 이 밤을 그렸다. 1822년 그는 다섯 살이었고 페오도시야에 살고 있었다. 그의 그림에서 하늘과 바다와 바위는 차가운 푸른 보랏빛이고,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서만 노란 주황색 불길이 타오른다. 붉은 깃발을 단 세 돛대 배는 고물을 보는 사람 쪽으로 돌리고 있고, 불길은 부서진 나뭇조각들과 함께 이물에서 솟구치며, 불티는 돛대와 활대보다 높이 날아오르고, 왼쪽 위 구석은 검은 연기로 덮였다. 오른쪽에서는 캔버스 가장자리에 잘린 작은 배가 멀어져 가는데, 배에는 여섯 명쯤 타고 있다. 그중 흰 셔츠에 붉은 허리띠를 맨 한 사람이 일어서서 위쪽의 불을 올려다보고, 불길에서 배까지 물 위로 금빛 길이 뻗어 있다. 시점은 노 젓는 사람들의 눈높이로 낮게 잡혔다.

미술관 기록에는 이 그림이 아테네 공과대학의 기증품으로 올라 있다. 1841년부터 나라가 가진 그림들이 그곳으로 모였고, 아이바좁스키의 캔버스도 아마 1900년 공과대학이 그 그림들을 새 미술관에 넘길 때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그림이 어떻게 공과대학에 들어갔는지는 연구자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1900년 아이바좁스키가 페오도시야에서 죽었을 때 그의 이젤에는 미완성의 《배의 폭발》이 놓여 있었는데, 그 그림에서도 카나리스는 키오스섬 앞바다에서 튀르크 기함을 폭파하고 있다.

5. 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 《메솔롱기 탈출》

메솔롱기 탈출
메솔롱기 탈출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 1853, 아테네 국립 미술관

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의 아버지 페트로스는 봉기 첫해인 1821년 튀르크인들에게 교수형을 당했고, 미술관은 화가의 약력을 그가 독립전쟁의 고아였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 아이기나섬의 고아원에서 지냈고, 1832년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가 세운 그리스 고아 학교에 들어가도록 뮌헨으로 보내졌으며, 1844년 뮌헨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미술관은 그가 태어난 해를 1814년 또는 1819년, 두 가지로 적는다. 브리자키스는 전쟁을 거의 모두 바이에른에서, 기억과 판화, 그리고 1848~1851년 그리스에서 그린 습작에 기대어 그렸다.

튀르크군과 이집트군은 메솔롱기를 꼬박 한 해 동안 포위했다. 1826년 봄이 되자 도시에 굶주림이 닥쳤고, 종려 주일 전날인 4월 23일 밤 수비대는 주민들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가려 했다. 튀르크군은 이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도시를 빠져나가다가 죽었다.

브리자키스는 1853년 뮌헨에서 위쪽이 둥근 세로로 긴 캔버스에 《탈출》을 그렸고, 화면을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위쪽에서는 그리스도가 구름 위 옥좌에 앉아 두 팔을 넓게 벌렸고, 그 둘레에는 월계관과 종려 가지를 든 천사들이 있다. 아래쪽에서는 전사들이 나무 다리를 건너 돌격하는데, 흰 푸스타넬라를 입은 지휘자가 굽은 칼을 치켜들었고, 그 위로 파란 십자가가 그려진 흰 깃발이 날린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붉은 페즈를 쓴 젊은 여인이 총을 겨누고, 오른쪽에서는 칼을 입에 문 남자가 벽을 타 넘으며 깃대에 초승달이 달린 붉은 깃발을 쥐고 있고, 다리 밑에는 쓰러진 여인들과 아이들이 누워 있으며, 한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있다. 미술관은 구도가 깊이 없이 세로로 펼쳐진다고 쓰는데, 짜임새로 보면 이 그림은 이콘을 닮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은 1853년 빈에서 1등상을 받았다.

브리자키스는 이 주제를 세 번 그렸고, 남은 것은 이 캔버스뿐이다. 그의 작품을 연구한 카테리나 스페치에리베스키에 따르면 이 그림은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가 샀고, 그 뒤 뮌헨 컬렉션을 떠나 개인의 손을 거쳐 로마 주재 그리스 대사관에 이르렀으며, 1977년 스페치에리베스키가 그곳에서 이 그림을 찾아냈다. 언제 어떻게 미술관에 넘겨졌는지는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의 말로는 나머지 두 점은 1929년 메솔롱기 시청에 누군가 불을 질렀을 때 함께 타 버렸다. 그래도 그림의 모습은 남았는데, 1856년 파리에서 이 그림을 바탕으로 석판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화재 뒤 23세의 앙겔로스 카솔라스가 그 석판화를 보고 메솔롱기를 위해 모사본을 그렸고, 이 모사본은 탈출의 거룩한 이콘으로 모셔져 해마다 십자가 행렬과 함께 도시를 돈다.

메솔롱기 탈출
메솔롱기 탈출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 1853, 아테네 국립 미술관

6.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세르피에리 부인의 초상》

세르피에리 부인의 초상
세르피에리 부인의 초상니키포로스 리트라스, 1869, 아테네 국립 미술관

클레망스 세르피에리는 높이가 2.5미터에 가까운 캔버스에 실물 크기의 전신으로 서 있다. 1869년의 이 초상은 리트라스가 그린 초상 가운데 가장 격식을 갖춘 그림이다. 그녀는 어깨를 드러낸 짙은 포도주색 벨벳 드레스를 입었고, 옷자락은 왼쪽 아래 구석으로 흘러내리며, 빛을 받은 치마 주름은 새빨갛게 타오르고 나머지 벨벳은 거의 검다. 두 팔 위로는 검은 레이스 숄을 걸쳤고, 머리에는 보석 박힌 작은 별 장식 세 개, 목에는 두 줄 진주 목걸이를 했으며, 내린 오른손에는 반쯤 펼친 부채를 들었다. 왼쪽에는 격식 있는 초상화의 관례대로 세로 홈이 파인 거대한 기둥이 솟아 있고, 옷자락 곁 동방 양탄자 위에는 흰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다. 그녀는 웃음 없이 차분하게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금속공학 기술자 조반니 바티스타 세르피에리의 아내였다. 세르피에리는 1864년 마르세유의 동업자들과 함께 아테네 남쪽 라브리오에서 은과 납을 캐는 회사를 세웠다. 회사는 주로 고대 광산에서 남은 광재를 다시 녹이는 일을 했다. 세르피에리는 아테네의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 저택을 두었고, 프랑스 이름을 가진 아내와 이 이탈리아 사람은 리트라스가 그린 아테네 신흥 사교계의 맨 윗자리에 속했다.

니키포로스 리트라스는 1832년 티노스섬의 피르고스에서 태어나 아테네 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1860년 뮌헨으로 가서 아카데미에서 카를 폰 필로티에게 배웠다. 1865년 아테네로 돌아온 그는 1866년부터 같은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쳤고, 1904년 죽을 때까지 거의 4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미술관은 그를 근대 그리스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에게서 뒤에 나올 알타무라스와 야코비디스가 배웠고, 역시 화가였던 그의 아들 니코스는 이 목록의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미술관 기록에는 가문의 일원인 이오안니스 세르피에리가 기증한 그림으로 올라 있다. 2011년 이 초상은 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보물들을 모은 전시에 나왔고, 미술관장 마리나 람브라키플라카는 이 그림을 전시의 대표작으로 골랐다. 잡지 《리포》에 따르면 초상의 금박 액자는 외국에 주문해 만든 것으로, 너무 무거워서 그림을 거는 데 여덟 사람이 필요했다.

세르피에리 부인의 초상
세르피에리 부인의 초상니키포로스 리트라스, 1869, 아테네 국립 미술관

7. 이오아니스 알타무라스 《스페체스의 카이키 배》

스페체스의 카이키 배
스페체스의 카이키 배이오아니스 알타무라스, 1877, 아테네 국립 미술관

이 작은 그림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이오아니스 알타무라스는 그리스어로 장소와 날짜를 적었다. 스페체스, 1877년 6월 16일이다. 가운데에는 가로돛을 단 범선이 서 있는데, 그리스어에서 카이키는 일하는 범선이면 무엇이든 가리키는 말이었다. 돛은 모두 바람 없는 날처럼 구겨지고 늘어져 있고, 맨 아래의 가장 큰 돛만 따뜻한 크림빛 황토색 빛을 받고 있다. 바다는 평평하고 창백하다. 뱃전 곁 어두운 작은 배에는 두 사람이 있고 흰 셔츠를 입은 한 사람이 노를 저으며, 고물 뒤 물 위에는 빈 보트가 떠 있고, 하늘의 얇은 물감층 사이로 캔버스 올이 비쳐 보인다. 오른쪽 가장자리, 위쪽 3분의 1 높이에는 하늘 위로 불투명한 올리브빛 황토색 작은 직사각형이 덮여 있는데, 그림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고 뒷날의 덧칠이나 메운 손상 자리처럼 보인다.

알타무라스는 1852년 이탈리아에서, 나폴리 화가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알타무라와 스페체스섬 선주 집안의 그리스 여인 엘레니 부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갈라서자 1857년 무렵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테네로 갔다. 1871~1872년 그는 니키포로스 리트라스의 반에서 배웠고, 1873~1876년에는 왕실 장학금을 받아 코펜하겐 왕립 아카데미에서 해양화가 칼 프레데리크 쇠렌센에게 배웠다. 베나키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그 장학금을 준 사람은 그 자신이 덴마크 왕자였던 국왕 요르요스 1세였다. 1876년 알타무라스는 결핵에 걸린 몸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고향 섬 스페체스에 자리를 잡고 배를 그렸다. 그는 1878년 26세의 나이로 스페체스에서 죽었다.

그의 어머니 엘레니 부쿠라알타무라는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첫 그리스 여성 화가로 불리며, 그녀 자신이 거의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여자가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배우려고 머리를 자르고 남자 행세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를 특히 널리 알린 것은 1998년에 나온 레아 갈라나키의 소설 《엘레니, 또는 아무도 아닌 자》였다. 2011년 베나키 박물관 전시에는 수녀복을 닮은 옷차림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결혼반지를 낀 그녀의 자화상이 나왔다. 딸 소피아는 1872년에, 아들은 1878년에 죽었고,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아이들이 죽은 뒤 엘레니는 자기 그림들을 불태웠다. 그 전시의 큐레이터 엘레니 키프레우는 생각이 달라서, 1900년 엘레니가 죽은 뒤 스페체스의 집을 정리하던 친척들이 그림과 서류를 태웠다고 본다.

스페체스의 카이키 배
스페체스의 카이키 배이오아니스 알타무라스, 1877, 아테네 국립 미술관

8. 콘스탄티노스 볼라나키스 《그물 걷기》

국립 미술관을 이끌었던 마리나 람브라키플라카는 잡지 《리포》에, 미술관이 2002년 이 그림을 좋은 값에 샀다고 이야기했다. 볼라나키스의 그림은 대개 그리스 선주들이 사는데, 그녀의 말로는 그들은 배가 그려진 그림을 좋아하고 낡은 작은 배 위의 어부들에게는 관심이 덜하다.

그물 걷기
그물 걷기콘스탄티노스 볼라나키스, 1871, 아테네 국립 미술관

작은 배는 가운데보다 조금 오른쪽에 무겁고 낡은 모습으로 떠 있다. 빛이 그림 안쪽, 바다 위로 동이 트는 수평선에서 오기 때문에 배는 거의 검은 실루엣으로 보인다. 배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팔을 드러낸 어부가 그물 쪽으로 몸을 숙였고, 다른 한 사람은 낮게 엎드려 머리와 등만 보이며, 혼자 서 있는 챙 넓은 모자의 남자는 머리가 수평선보다 조금 위에 걸리고, 넷째는 뱃전 너머로 몸을 굽혀 그물을 당기며, 고물에는 모자를 쓴 작은 사람이 파란 유리 주전자 뒤에 앉아 있다. 뱃전에는 젖은 그물이 걸쳐 있고, 고물 위로는 찢어진 돛을 단 활대가 비스듬히 솟아 있는데, 그림에서 이보다 강한 대각선은 없다. 왼쪽 멀리에는 가로돛을 단 범선이 서 있고, 구름은 진주빛 회색과 크림색이며 수평선 가까이에서는 연노랑이다. 왼쪽 아래 구석의 서명에는 화가의 이름과 함께 뮌헨이라는 지명과 7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1871년, 어느 바다에서도 먼 뮌헨에서 그려졌다.

볼라나키스는 1837년 크레타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트리에스테에 있던 매부 요르요스 아펜둘리스의 상회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다. 그리스 신문들은 아펜둘리스가 장부에 그려진 배 그림들을 발견하고 그 뒤 그의 학비를 대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1864년 볼라나키스는 뮌헨 아카데미에 들어가 필로티에게 배웠고, 몇 해 뒤 리사 해전을 그리는 오스트리아의 공모전에서 이겼으며, 그 그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샀다. 미술관은 《그물 걷기》를 그리스 회화가 처음으로 인상주의를 향해 내디딘 걸음의 하나로 보고,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그림의 하나로 꼽는다. 볼라나키스는 1883년에야 그리스로 돌아와 피레우스에 자리를 잡았고, 1895년 그곳에 자기 학교를 열었다.

9. 니콜라오스 기지스 《아이들의 약혼》

아이들의 약혼
아이들의 약혼니콜라오스 기지스, 1877, 아테네 국립 미술관

검은 사제복을 입은 시골 사제는 이미 사내아이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고, 미술관의 설명대로라면 이제 여자아이가 자기 반지를 집도록 펼친 손바닥을 내밀고 있다. 붉은 재킷에 헐렁한 흰 바지를 입은 사내아이는 가슴에 댄 제 손을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고, 온통 흰옷에 작은 모자를 쓴 여자아이는 눈을 내리깐 채 작은 탁자 위의 펼친 책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아이들은 천장 낮은 시골 방 한가운데 서 있고, 어른들은 그 둘레에 반원을 이루어 앉거나 서 있다. 오른쪽에서는 콧수염 난 남자가 둥근 박 술병을 들고 크게 웃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그 안에는 축배를 들 포도주가 들어 있다. 왼쪽의 남자들은 서로 눈짓하며 히죽거리고, 문간에는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모여 있으며,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수놓은 조끼를 입은 젊은 여인이 갓난아기가 잠든 요람 위로 몸을 숙이고 있다.

미술관은 이 풍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들을 일찍 약혼시킨 것은 어쩌면 데브시르메를 피하려는 뜻이었을 수 있는데, 데브시르메는 오스만 당국이 그리스도교도 사내아이들을 데려가 예니체리와 관리로 길러 낸 징집 제도였다.

니콜라오스 기지스는 1842년 티노스섬의 스클라보호리 마을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가족과 함께 아테네로 옮겼고,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865년 그는 티노스의 가장 중요한 순례 성당인 에방겔리스트리아 성당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뮌헨으로 갔고, 1868년부터 필로티에게 배웠다. 1872년 기지스는 두 해 동안 그리스로 돌아왔고, 1873년에는 미술관이 그의 친구이자 고향 사람이자 스승이라고 부르는 니키포로스 리트라스와 함께 동방, 곧 소아시아를 여행했다. 1874년 그는 뮌헨에 아주 자리를 잡아 그곳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다시는 그리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들의 약혼》은 1877년 뮌헨의 작업실에서 기억과 그 여행 때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렸으며,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에는 두 가지 판본이 있고 둘 다 상을 받았다.

아이들의 약혼
아이들의 약혼니콜라오스 기지스, 1877, 아테네 국립 미술관

빛은 왼쪽의 깊고 하얀 창문에서 방 안으로 들어오고, 그림에서 가장 밝은 것은 여자아이의 옷과 수놓은 식탁보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기지스는 줄무늬 천과 붉은 천과 금빛 천, 구리 솥, 주석 접시, 붉은 페즈를 한데 쌓아 두었는데, 미술관은 이 더미를 반짝이는 구리에서 비단까지 갖가지 질감을 보여 주려던 뜻으로 설명한다.

10. 니콜라오스 기지스 《보라, 신랑이 오신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니콜라오스 기지스, 1899, 아테네 국립 미술관

‘보라, 신랑이 한밤중에 오신다’는 정교회 성당에서 성주간 첫 며칠 동안 부르는 성가이고, 그 말은 복음서의 열 처녀 비유에서 나왔다. 기지스는 이 트로파리온의 이름을 1899~1900년 뮌헨에서 그린 마지막 대작의 제목으로 삼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림의 주제는 요한 묵시록에 그려진 재림이며, 미술관이 인용하는 편지에서 기지스는 자신의 그리스도를 세상에 빛과 구원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감미로운 신이라고 부른다.

캔버스는 높이와 너비가 모두 2미터인 정사각형이고, 모든 것이 세로축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넓은 청흑색 띠 두 개 사이로 붉은 주황색 바탕이 솟아오르고, 그 한가운데 옥좌에는 금빛 후광을 두른, 작고 거의 하얀 그리스도가 앉아 있다. 그 둘레로 붉고 주황빛인 구름이 궁륭처럼 호를 그리며 퍼져 나가고, 그 위로는 날개 달린 인물이 두 팔을 들고 떠 있으며, 양옆에는 천사들이 서 있는데 그중 둘은 나팔이 뚜렷이 보인다. 아래에서 옥좌로 넓은 연하늘색 계단이 올라가고, 계단에는 가는 금빛 선이 그어져 있다. 계단은 비어 있고, 그 양쪽으로 금빛 후광을 두른 작은 인물들이 무릎을 꿇고 모여 있다. 많은 인물이 얇은 물감층 위에 윤곽선만 그어져 있어서, 그 사이로 캔버스가 비쳐 보인다.

기지스는 이 구도를 훨씬 전부터 구상했고, 이미 1894년의 편지에서 낙원, 곧 《보라, 신랑이 오신다》를 그릴 힘이 자기에게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1900년 이 그림은 뮌헨에서 전시되었다. 그림은 기지스가 끝내지 못한 큰 종교 연작의 일부였고, 연구자 스피로스 페트리타키스에 따르면 그는 《사탄의 추락》을 담을 아래쪽 영역을 끝내 그리지 못했다. 기지스는 1901년 1월 뮌헨에서 죽었다. 같은 페트리타키스는 1910년 뮌헨에서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이 그림 하나만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쓴다.

11. 야코보스 리조스 《테라스에서》

테라스에서
테라스에서야코보스 리조스, 1897, 아테네 국립 미술관

대리석 테라스 위 어두운 의자에 장교가 옆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깃이 선 검은 군복 상의에 넓은 진홍색 줄이 들어간 파란 바지를 입고, 박차 달린 긴 장화를 신었다. 손바닥을 편 오른손은 말을 하다 만 듯 들려 있고, 늘어뜨린 왼손에는 손가락을 끼워 읽던 쪽을 표시한 작은 빨간 책이 들려 있다. 미술관은 그를 잘생긴 기병 장교라고 부른다. 비평가 흐리스토포로스 마리노스는 2023년 잡지 《리포》에 실은 글에서 그의 깃에 달린 표장, 곧 불타는 수류탄과 별 셋을 풀이하고, 그가 포병 대령이라고 판단했다. 이 그림은 그리스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한 달 만에 진 1897년에 그려졌고, 마리노스는 이 그림을 그 전쟁의 그늘 아래 있는 장면, 패전한 해에 장교가 여인들 사이에서 쉬는 모습으로 본다.

그 곁에 젊은 여인 둘이 있다. 소매가 풍성한 흰 블라우스를 입은 한 사람은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 있고, 분홍 드레스를 입은 다른 한 사람은 곡목 팔걸이의자에 몸을 기대고 발을 발받침 위에 올렸다. 마리노스는 두 사람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고 지적하며, 리조스 앞에서 한 모델이 두 사람 모두를 위해 포즈를 취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른쪽 자개 상감 탁자 위에는 로제 와인이 든 유리병과 잔 셋이 놓여 있고, 왼쪽 멀리 나무들 위로는 저녁 빛에 분홍빛으로 물든 아크로폴리스가 솟아 있다. 미술관은 이곳이 아크로폴리스 아래 옛 동네인 플라카의 신고전주의 주택 테라스라고 쓰지만, 마리노스는 이 풍경을 지어낸 것으로 본다.

마리노스에 따르면 리조스는 1875년부터 파리에 살았고, 이 그림의 아테네는 기억과 사진첩에 기대어 짜 맞춘 것이다. 그는 알렉상드르 카바넬에게 배웠고, 응접실과 정원에 있는 우아한 여인들을 그렸다. ‘리조 97’이라는 서명은 왼쪽 아래 바닥 타일 위에 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이 그림은 은메달을 받았고, 뒷날 화가가 미술관에 기증했으며, 2021년 루브르는 전시 《파리-아테네, 근대 그리스의 탄생 1675~1919》의 포스터에 이 그림을 썼다.

12. 테오도로스 랄리스 《전리품》

전리품
전리품테오도로스 랄리스, 아테네 국립 미술관

테오도로스 랄리스는 1885년에 이 주제를 처음 그렸는데, 개인 소장품인 그 그림에서 포로가 된 그리스 처녀는 튀르크 병사들과 약탈한 물건들 사이에 순순히 서 있다. 1906년 파리 살롱을 위해 그는 이 장면을 다시 그리면서 병사들을 없앴다. 처녀는 약탈당한 정교회 성당에 홀로 맨발로 서 있다. 블라우스는 허리까지 찢겼고, 두 손은 등 뒤로 묶였으며,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조금 벌린 채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머리에는 금화를 한 줄 단 흰 머릿수건을 썼고, 땋은 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리며, 허리에는 넓고 붉은 띠를 맸다.

랄리스는 185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오스섬 출신의 상인 집안에 태어나 런던의 집안 회사에서 잠시 일했고, 그 뒤 파리로 가서 장레옹 제롬에게 배웠다. 1875년부터 그는 살롱이 열릴 때마다 출품했고, 1904년까지 겨울을 카이로에서 보내며 하렘과 여자 포로들과 그리스 성당을 그려 파리의 관객에게 동방을 팔았다. 그는 1909년 로잔에서 죽었다. 살롱 도록에서 《전리품》 곁에는 사슬에 묶인 그리스 여인을 노래한 프랑스어 시가 실렸는데, 그녀가 전리품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튀르크 승리자에게 맞서며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림은 사업가이자 수집가인 에브리피디스 쿠틀리디스의 재단 소유이고, 미술관은 장기 협약에 따라 재단의 컬렉션을 자기 컬렉션과 함께 전시한다.

성당 바닥에는 은잔과 금도금 잔, 촛대, 등잔 같은 성물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제단 계단을 가로질러 금도금한 큰 촛대가 넘어져 있다. 천장에서는 빈 사슬 세 개가 늘어져 있는데, 흐리스토포로스 마리노스는 거기에 등잔이 걸려 있었다고 지적한다. 세례자 요한 이콘 아래에는 무늬를 두드려 새긴 은 이콘 덮개가 기대어 있고, 얼굴 자리에는 구멍이 비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붉은 단면의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옆 바닥에는 흰 초가 놓여 있으며, 꺼져 가는 심지 끝에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른다.

전리품
전리품테오도로스 랄리스, 아테네 국립 미술관

13.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디스 《어린이 음악회》

맨발의 사내아이 넷이 시골 방에서 악단을 꾸렸다. 하나는 등을 보이며 의자에 걸터앉아 북채를 들었고, 빨강 머리 아이는 몸을 뒤로 젖히고 놋쇠 나팔을 불며, 그 뒤의 작은 아이는 입가에 두 손을 모았고, 넷째인 남루한 아이는 한쪽에 서서 놋쇠 물뿌리개의 긴 주둥이를 부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그 아이에게는 진짜 악기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은 붉은 옷을 입은 어린 딸을 걸상 위에 붙들고 있는 젊은 어머니와 식탁에 앉은 금발의 누나이고, 어린 딸은 악사들에게 두 팔을 뻗는다. 미술관은 이 방을 바이에른의 시골집이라고 부른다.

어린이 음악회
어린이 음악회게오르기오스 야코비디스, 1900, 아테네 국립 미술관

빛은 초록 덩굴이 감긴 왼쪽 창문과 가운데의 깊은 창문, 두 방향에서 들어와, 방 전체가 주황빛으로 물들었고 그림자는 푸르다. 북 치는 아이의 흰 셔츠는 빛이 속까지 비친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야코비디스의 가장 대담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보고, 여기서 그가 인상주의에 다가갔다고 쓴다. 그는 이 주제를 두 번 그렸다. 더 이른, 차가운 색조의 판본은 1890년대에 여러 곳에서 전시되었고 1896년 아테네에서도 걸렸는데, 전하는 묘사로 보아 그 그림에서는 할머니가 귀를 막은 채 아이들의 연주를 들었다. 밝은 판본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그렸고, 이 그림은 그곳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야코비디스는 1853년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니키포로스 리트라스에게 배웠고, 1877년부터 뮌헨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20년 넘게 뮌헨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메달을 받은 1900년, 그리스 정부는 막 세워진 국립 미술관의 기틀을 잡으라고 그를 고국으로 불렀다. 그의 직함은 관리자라는 뜻의 에포로스였고, 1900년 7월 28일 아테네 공과대학과 아테네 대학교는 그에게 작품 258점을 넘겼다. 미술관은 이 작품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오른쪽 아래 마룻바닥에 그리스어 대문자로 이름의 머리글자와 성, 그리고 연도를 적었는데, 성의 첫 글자를 라틴 문자 제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썼다. 뮌헨에서 그는 라틴 문자로 야코비데스라고 서명했다.

14. 콘스탄티노스 말레아스 《델포이》

델포이
델포이콘스탄티노스 말레아스, 1922, 아테네 국립 미술관

말레아스는 1922~1923년에 《델포이》를 그렸는데, 산과 골짜기와 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이다. 왼쪽에서는 비탈이 대각선으로 내려오는데, 회청색과 보라색 바탕에 어두운 청록색 골이 패어 있다. 골짜기 바닥은 커다란 짙은 초록 얼룩 하나가 차지하고, 그 사이를 가늘고 밝은 선 하나가 왼쪽 아래 구석에서부터 구불구불 올라가는데, 길 같기도 하고 물길 같기도 하다. 그 위로 연한 하늘색 물이 두 줄로 놓여 있고, 그 너머에는 모래빛 노란색과 분홍색 산들이 그림자 거의 없이 정면으로 빛을 받고 있다. 그림에서 가장 밝은 것은 먼 산들이고, 가까운 비탈과 골짜기는 회색과 짙은 초록으로 차갑다. 물감은 얇고 메마르게 칠해져 그 사이로 캔버스 올이 보이고, 형태는 가장자리가 부드러운 평평한 색면으로 단순해졌다. 왼쪽 아래에는 녹슨 듯한 붉은 그리스어 대문자로 이름의 머리글자와 말레아스라는 성이 적혀 있다.

콘스탄티노스 말레아스는 18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먼저 건축가 교육을 받았고, 회화는 1901~1908년 파리의 장식 미술 학교와 신인상주의 화가 앙리 마르탱에게서 배웠다. 1913~1917년 그는 테살로니키에서 시 기술자로 일했고, 그의 그림 여럿이 1917년 그곳의 대화재 때 불에 탔다. 같은 해 그는 니코스 리트라스가 아카데미 회화에 함께 맞서려고 꾸린 ‘예술’ 그룹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미술관은 말레아스를 화가 콘스탄티노스 파르테니스와 나란히 그리스 모더니즘의 창시자들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는 그리스 풍경을 뮌헨식 갈색 명암 대신 순수한 색면으로 그린 최초의 화가들 가운데 하나였고, 1923년 문학 예술 부문의 상을 받았다. 1919년 ‘예술’ 그룹은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전시를 개막했고, 말레아스와 파르테니스는 저마다 30점가량의 그림을 냈다.

15. 니코스 리트라스 《밀짚모자》

밀짚모자
밀짚모자니콜라오스 리트라스, 1925, 아테네 국립 미술관

미술관은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햇볕에 그을린 소녀라고 쓰고, 이 아이가 정말로 소녀라는 말을 곧바로 덧붙인다. 짧은 검은 머리에 앞머리 한 가닥이 이마로 내려온 아이는 웃음 없이 차분하게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데, 얼굴만 보면 사내아이로 여길 수도 있다. 얼굴은 볕에 검게 그을렸고 콧날을 따라 나뉘어, 한쪽은 짙은 갈색 그늘에, 다른 쪽은 따뜻한 주황빛 속에 있다. 올리브색과 노란빛 초록 밀짚으로 짠 넓은 모자가 원반처럼 머리를 둘러싸고, 소녀는 깊게 파인 헐렁한 회청색 셔츠를 입고 작은 연보라 리본을 달았다.

리트라스는 차가운 색을 아래쪽에, 따뜻한 색을 위쪽에 모았다. 회청색과 연보라색은 셔츠에서 등 뒤의 하얗게 회칠한 벽으로 이어지고, 그 위로는 금빛과 주황빛 마른 풀이 넓은 띠를 이루며, 그 노란색은 모자의 밀짚으로 이어지고, 그림의 맨 위는 섬마을의 하얀 상자 같은 집들이 막고 있다. 리트라스가 하늘도 바다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관은 닫힌 수평선이라는 말을 쓴다. 물감은 두껍고 붓질은 넓어서, 붓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가 보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에게해 섬의 그리스 여름을 나타낸 표의 문자라고 부르며, 그 섬은 화가의 집안이 나온 티노스일지도 모른다고 쓴다.

세르피에리 부인의 초상을 그린 니키포로스 리트라스의 아들 니코스 리트라스는 1883년 아테네에서 태어나 미술학교에서 아버지와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디스에게 배웠다. 1907년부터는 일찍이 아버지가 그랬듯 뮌헨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지만, 그가 그곳에서 만난 것은 이미 독일 표현주의와 청기사파의 화가들이었다. 그는 1912~1913년 발칸 전쟁에 나가 싸웠고, 1917년 ‘예술’ 그룹을 만드는 데 앞장섰으며, 1923년 아테네 미술대학의 회화 교수로 뽑혔는데, 그 선거에서 파르테니스를 앞섰다. 《밀짚모자》는 1925년 무렵에 그렸다. 니코스 리트라스는 1927년 12월, 44세에 죽었다.

밀짚모자
밀짚모자니콜라오스 리트라스, 1925, 아테네 국립 미술관

그 밖에 볼 만한 작품

니키포로스 리트라스의 작품으로는 《프사라의 애가》(1888), 브리자키스의 작품으로는 《메솔롱기에서의 바이런 경 환영》(1861)을 볼 만하고, 기지스의 그림 가운데서는 그리스 장면들 말고도 뮌헨 시절의 알레고리 《예술과 그 정령들》과 《봄의 교향곡》이 있다. 뮌헨 화가들보다 앞선 것으로는 비잔티움 제국 이후 시대의 이콘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15세기 후반에 그린 안드레아스 파비아스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있다. 20세기 작품으로는 콘스탄티노스 파르테니스의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의 신격화》(1930~1933)와 니코스 하지키리아코스기카스의 《작업실》(1960)이 있다. 피트 몬드리안의 《스탐머 풍차와 여름 별장》은 2012년 피카소의 《여인의 머리》와 함께 미술관에서 도난당했고, 2021년 케라테아 근처의 협곡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