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하인리히 티센보르네미사의 컬렉션에 그림 세 점이 잇달아 들어왔고, 마드리드 미술관의 소장품 번호에서도 이 그림들은 1934.37, 1934.38, 1934.39로 나란히 붙어 있다. 카라바조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학자들 사이의 예수》, 소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이다. 앞의 두 점은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세 번째 그림은 잉글랜드에 있는 스펜서 가문의 영지 올소프에서 왔으며, 남작은 세 점 모두 같은 해에 루체른의 화상들에게서 샀다.

소장품 번호의 앞 네 자리는 그 그림이 당시 그림을 사던 사람의 컬렉션에 들어온 해를 뜻한다. 그림을 산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하인리히는 1920년대 말에 수집을 시작했고, 막내아들 한스 하인리히는 1961년부터 옛 거장들의 그림에 독일 표현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19세기 미국 회화를 더하며 컬렉션을 1970년대까지 이어 갔다. 그 안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과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초상도 있다.

우리는 1933년에 사들인 얀 반 에이크의 두폭화에서 시작해 카미유 피사로의 거리 풍경으로 끝을 맺는다. 이 그림의 예전 주인이었던 여성의 상속인들은 2005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미술관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루르 철강의 상속자가 오래된 가문들의 그림을 사들이다 (1933~1935)

1.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두폭화》, 1433~1435년경

수태고지
수태고지얀 반 에이크, 144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하인리히 티센은 1875년 루르의 실업가 아우구스트 티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그는 아들이 없던 헝가리 남작 보르네미사의 딸 마르기트와 결혼했고, 1907년 장인의 양자가 되어 티센보르네미사 남작이 되었다. 가족은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레히니츠인 로혼츠성에서 살다가, 1919년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난 뒤 네덜란드로 떠났다. 남작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20년대 말에 큰 규모로 그림을 사기 시작했으며, 미술관에 따르면 독일의 큰 미술관들, 무엇보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만큼 폭넓은 컬렉션을 모으고 싶어 했다. 1930년 7월 그의 그림들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테크에서 ‘로혼츠성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932년 그는 루가노의 빌라 파보리타를 사서 그 곁에 갤러리를 지었고, 1936년 9월 손님들에게 그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가장 많이 사들인 시기는 1933~1935년이었고, 미술관은 이 시기의 구입 목록을 반 에이크로 시작한다.

반 에이크는 따로 떨어진 작은 패널 두 장에 왼쪽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을, 오른쪽에는 마리아를 그렸고, 두 인물 모두 흰 돌로 깎은 조각상처럼 보이게 했다. 두폭화에 쓰인 색은 회색과 흰색, 검은색, 그리고 붉은 갈색 대리석 무늬를 낸 액자의 색이며, 이 액자도 반 에이크가 직접 칠했다. 두 인물은 각각 얕은 회색 벽감 속의 육각형 받침대 위에 서 있다. 가브리엘의 날개는 벽감 가장자리에 걸쳐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리아는 두 손으로 펼친 책을 들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 위로는 작고 흰 비둘기가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날고 있다.

벽감의 뒷벽은 저마다 윤이 나는 검은 돌처럼 그려져 있고, 거기에 인물들이 비친다. 마리아 오른편의 검은 면에는 비친 그녀의 어두운 등과 긴 머리카락, 망토가 보이고, 가브리엘 뒤에는 그보다 작게, 비친 곱슬머리와 손가락을 뻗은 손이 보인다. 미술관은 이 거울을 성모를 부르는 이름 가운데 하나인 “티 없는 거울”과 연결한다. 미술사가 루돌프 프라이메스베르거는 1991년 여기서 회화와 조각의 경쟁을 읽어 냈다. 조각상은 주위를 돌며 사방에서 볼 수 있지만 그림에서는 한쪽 면만 볼 수 있는데, 반 에이크는 반사를 이용해 등까지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인물들 위의 회색 돌에는 끌로 새긴 것처럼 루카 복음서의 라틴어 구절이 적혀 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처음과 끝, 곧 가브리엘의 인사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와 마리아의 대답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이다.

수태고지
수태고지얀 반 에이크, 144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카라바조, 159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두폭화를 사들인 해는 1933년이며, 이전 소유자에 대해 미술관이 밝히는 것은 프랑스의 한 개인 컬렉션이었다는 사실뿐이다. 초기 네덜란드 회화의 감식가 막스 프리들렌더가 이 작품을 반 에이크의 것으로 발표한 것은 구입 이듬해인 1934년이었다.

2. 카라바조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1598~1599년경

카라바조는 《성 카타리나》를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을 위해 그렸다. 1590년대 말 화가는 로마에 있는 추기경의 저택에서 살았고, 추기경은 16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그림을 곁에 두었다. 추기경의 상속인은 1628년 빚을 갚으려고 다른 그림들과 함께 이 그림을 팔았고, 그 뒤 그림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조카인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손에 들어갔다.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카타리나를 칼날 박힌 바퀴로 처형하려 했고, 바퀴가 부서져 흩어지자 칼로 목을 베었다. 카라바조는 이 모든 표지를 한꺼번에 그녀 주위에 모아 놓았다. 그녀는 무늬가 있는 붉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몸은 왼쪽으로 돌렸지만, 고개는 우리 쪽으로 돌려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왼쪽에는 테두리에 쇠 칼날을 박은 나무 바퀴가 서 있는데, 테두리는 금이 갔고 바큇살 하나는 부러졌다. 아래쪽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순교자의 창백한 종려나무 가지가 놓여 있고, 카타리나의 손에는 둥근 고리 모양 코등이가 달린 가는 칼이 들려 있다. 그녀는 왼손으로 칼자루를 가슴에 대고 누르고 오른손은 칼날에 살짝 대고 있을 뿐이며, 칼날 아래쪽은 붉은빛을 띤다. 머리 위에는 가느다란 금빛 고리 모양의 후광만 떠 있다. 빛은 왼쪽 위에서 얼굴과 흰 셔츠, 두 손과 강철 위로 떨어지고, 그녀 뒤의 배경은 거의 검다. 드레스는 금색 아라베스크 무늬가 있는 선명한 파란 천과 금실 자수 띠를 두른 짙은 갈색빛 자주 벨벳, 이렇게 두 가지 천으로 지어졌고, 그녀의 차림새는 카라바조가 살던 시대의 귀부인 그대로다.

미술관은 여러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화가와 알고 지내던 고급 창부 필리데 멜란드로니가 모델이었다고 보고, 그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만, 이 신원 확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1916년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는 카라바조의 추종자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카타리나》를 그렸다고 추정했지만, 그 뒤의 연구들은 카라바조의 작품임을 확인했다.

그림은 1934년까지 바르베리니 가문에 남아 있었다. 바르베리니 컬렉션은 피데이코미숨, 곧 집안의 유산을 팔거나 나누지 못하게 한 가문의 제약에 묶여 있었는데, 1934년 왕령이 이 제약을 풀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작품 17점을 넘겨받고 그림 106점에 대해 세금 없이 해외로 반출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으며, 같은 해 《성 카타리나》는 루체른의 한 화랑에서 티센 컬렉션을 위해 팔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카라바조, 159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3. 알브레히트 뒤러 《학자들 사이의 예수》, 1506년

패널 한가운데에서 네 개의 손이 만난다. 열두 살의 그리스도는 마치 논거를 하나씩 꼽듯 오른손으로 왼손 손가락을 잡고 있고, 흰 모자를 쓴 추한 노인은 두 손을 그에게 뻗어 한 손바닥은 소년의 손 위에 대고 다른 손의 집게손가락으로는 아래에서 그 손을 쿡 찌른다. 노인의 손은 소년의 손보다 더 창백하고 잿빛이다. 그리스도 주위에는 율법학자 여섯 명이 빽빽하게 모여 있어 얼굴들이 패널 가장자리에 거의 닿고, 어두운 배경은 위쪽 두 모서리와 머리들 사이로만 보인다. 1926년 무렵 바르베리니 궁전 안내서를 쓴 빈첸초 골치오는 뒤러의 이름 뒤에 물음표를 붙였고, 그림 한가운데를 손가락들이 괴물처럼 뒤엉킨 덩어리라고 불렀으며, 모자를 쓴 노인은 악몽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다고 했다.

학자들 사이의 그리스도
학자들 사이의 그리스도알브레히트 뒤러, 1506,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뒤러는 1506년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 중에 베네치아에서 이 패널을 그렸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독일 상인들의 교회에 놓일 제단화 《장미 화관의 축제》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손들을 미리 푸르스름한 베네치아 종이에 붓으로 그려 두었고, 그 소묘들은 빈과 뉘른베르크에 남아 있다. 왼쪽 아래, 세워 놓은 책에서 흰 종이쪽지가 비죽 나와 있고, 거기에 1506이라는 연도와 AD 모노그램이, 그 아래에는 “opus quinque dierum”, 곧 ‘닷새 동안의 작업’이라는 라틴어 한 줄이 적혀 있다. 티센 컬렉션의 복원가 에밀 보스하르트는 1993년 이 글귀가 이미 마른 물감 위에 쓰였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그 자신은 뒤러가 나중에 덧붙였다고 생각했다. 뒤러 연구자 토마스 샤우어테는 2009년 Q 자의 꼬리가 깊은 균열을 피해 돌아간다는 점에 주목했다. 표면에 이미 금이 간 뒤에 이 줄을 썼다는 뜻이고, 누가 썼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아무 단서 없이 뒤러의 작품으로 올려 두고 있다.

17세기 무렵 이 패널은 이미 로마의 바르베리니 컬렉션에 있었지만, 미술사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37년이 되어서였다. 독일의 역사가 게오르크 카스파어 나글러가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이 그림을 찾아낸 것이다. 그림은 《성 카타리나》와 같은 1934년의 왕령에 따라 이탈리아를 떠났고, 같은 해 루체른의 메르쿠리아 화랑을 거쳐 티센을 위해 팔렸다. 패널 뒷면에는 바르베리니 컬렉션의 인장 두 개가 남아 있다.

학자들 사이의 그리스도
학자들 사이의 그리스도알브레히트 뒤러, 1506,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헨리 8세의 초상
헨리 8세의 초상소 한스 홀바인, 1537,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4. 소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초상》, 1537년경

홀바인이 1537년 런던 화이트홀 궁전에 있는 왕의 개인 거처 벽에 완성한 벽화는 1698년 궁전과 함께 불에 탔다. 벽화에는 네 인물이 있었는데, 앞쪽에 헨리 8세와 제인 시모어가, 뒤쪽에 헨리의 부모인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섰다. 이 벽화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남아 있는 홀바인 자신의 밑그림과, 찰스 2세를 위해 벽 전체를 작게 옮겨 그려 영국 왕실 컬렉션에 보관된 모사화로 알려져 있다.

마드리드의 패널은 이 벽화와 관련이 있고, 미술관에 따르면 벽 모사화 속 왕의 머리는 이 그림의 머리와 같다. 헨리는 허리까지 그려졌고, 모피를 두른 어깨는 작은 패널의 양쪽 가장자리를 넘어 나간다. 그는 챙에 진주와 금 장식을 꿰매 단 납작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흰 타조 깃털이 오른쪽 귀 위로 말려 있다. 은회색 상의는 촘촘한 검은 자수로 덮여 있고, 트임 사이로 부풀린 흰 셔츠 천과 금에 박힌 붉은 보석이 번갈아 보인다. 긴 금사슬은 한쪽에서는 비스듬히 내려오고 다른 쪽에서는 곧게 떨어지며, 두 줄기는 네모난 검은 보석이 박힌 둥근 메달에서 만난다. 왕은 오른손에 접은 장갑을 쥐고 있고 손가락에는 어두운 보석이 박힌 반지들을 꼈으며, 그 뒤의 배경은 얼룩진, 고르지 않은 짙은 파란색이다.

홀바인 유형의 헨리 초상은 공방과 후대의 모사가들이 그린 것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마드리드의 패널은 전문가들이 이견 없이 홀바인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헨리 회화 초상이다. 미술관은 이 초상이 왕 자신의 소유였을 가능성을 열어 두지만, 왕실 재산 목록에서는 이 초상이 확인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초상은 노샘프턴셔에 있는 스펜서 가문의 영지 올소프에 걸려 있었고, 1913년 아서 체임벌린이 쓴 홀바인 연구서 제2권에 컬러 권두화로 실렸는데, 그림 설명에는 올소프의 스펜서 백작 컬렉션 소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펜서 가문은 1933년 무렵까지 이 초상을 갖고 있었고, 1934년 초상은 루체른의 메르쿠리아 화랑에 있다가 같은 해 로혼츠 컬렉션을 위해 팔렸다.

기사의 초상
기사의 초상비토레 카르파초, 151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디 아트 뉴스페이퍼』의 보도에 따르면, 1988~1989년 당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이사였던 찰스 왕세자는 남작의 아들 한스 하인리히(그에 대해서는 코사의 초상 이야기에서 다룬다)에게서 이 초상을 런던으로 빌려 오려 했다. 협상은 보험 평가액에서 틀어졌는데, 갤러리는 3000만 달러를 제시했고 소유자는 5500만 달러를 원했다.

5. 비토레 카르파초 《풍경 속의 젊은 기사》, 1505년경(그림에는 1510년으로 적혀 있음)

이 기사는 1919년까지 요크셔에 있는 버넌웬트워스 가문의 영지 웬트워스성에 뒤러의 작품으로 걸려 있었다. 그림에는 가짜 AD 모노그램이 있었고, 카르파초의 서명은 덧칠로 가려져 있었다. 1919년 11월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컬렉션이 팔려 나갈 때 그림은 이미 카르파초의 작품으로, 물가의 사슴 때문에 《성 에우스타키오》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그 뒤 그림은 런던의 화상 설리의 손에 있었고, 그동안 가짜 모노그램이 지워졌다. 이어 뉴욕의 은행가 오토 칸이 그림을 샀고, 칸이 죽고 1년 뒤인 1935년 하인리히 티센보르네미사가 사들였다.

작가를 입증하는 증거는 1958년에 나타났다. 하인리히의 아들 한스 하인리히가 뉴욕의 복원가 윌리엄 수어에게 그림을 맡겼고, 덧칠 아래에서 캔버스에 그려 넣은 종이쪽지 두 장이 드러났다. 오른쪽, 둘로 갈라진 가는 나무에 붙은 쪽지에는 VICTOR CARPATHIVS FINXIT M.D.X., 곧 ‘비토레 카르파초가 그렸다, 1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왼쪽 아래 물가의 갈대 사이에 놓인 접힌 쪽지에는 MALO MORI QUAM FOEDARI, 곧 ‘더럽혀지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적혀 있고, 쪽지 아래에는 개구리가 앉아 있으며, 아래쪽 가장자리를 따라 흰 담비가 달려간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것은 담비 기사단의 표어이며, 기사가 그 기사단의 일원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 미술관 자신은 그림의 제작 시기를 1505년경으로 본다.

어두운 강철 갑옷을 입은 젊은이가 모래 깔린 길 위에 전신으로 서 있다. 검은 모자 밑으로 불그스름한 긴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고, 눈은 오른쪽으로 흘기듯 돌아가 있으며, 두 손은 허리에 찬 칼 위에 놓여 있다. 왼쪽에서는 성문 달린 탑 앞에 검고 노란 체크무늬 상의를 입은 사람이 어두운 말을 타고 있고, 그의 투구 위쪽 성벽에는 공작이 앉아 있다. 하늘에서는 매가 왜가리를 덮쳐 왜가리가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고, 호숫가에는 사슴이 서 있으며, 풀밭에는 토끼와 개들이 있고, 기사의 발치에는 흰 백합과 붓꽃이 피어 있다.

미술관은 이 젊은이가 누구였는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동안 제시된 이름들을 나열한다. 사람들은 그를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나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으로 보았고, 최근의 견해로는 그리스의 모돈 요새를 지휘하던 베네치아인 마르코 가브리엘이다. 1500년 모돈이 함락되자 가브리엘은 비겁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의 가족이 명예를 되찾으려고 이 그림을 주문했다. 만약 이것이 초상화라면 이탈리아 회화에서 알려진 가장 이른 전신 초상이다. 엑스선 사진에서는 캔버스 뒷면, 나중에 덧댄 배접 천 아래에 물감으로 쓴 “A. Durer”라는 글씨가 확인되었는데, 이 그림이 뒤러의 작품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남은 것이다.

기사의 초상
기사의 초상비토레 카르파초, 151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8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6.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조반나 델리 알비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 1489~1490년

조반나 델리 알비치는 1486년 피렌체 사람 로렌초 토르나부오니와 결혼해 1487년 아들을 낳았고, 1488년 10월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는 둘째 아이를 가진 몸이었다.

기를란다요는 그녀를 어두운 벽을 배경으로, 왼쪽을 향한 엄격한 옆모습으로 그렸다. 옅은 금발은 뒤로 매끈하게 빗어 넘겼고, 관자놀이와 뺨 옆으로는 단단하게 말린 나선형 곱슬머리가 늘어져 있으며, 뒷머리에는 땋은 머리를 틀어 올렸다. 그녀는 금빛 브로케이드로 지은, 앞이 트인 겉옷 조르네아를 입었는데, 어깨에는 남편의 머리글자 L이 짜여 있다. 두 손은 아래로 내려 모았고, 손에는 흰 손수건이 들려 있다. 그녀 뒤로는 금색 술이 달린 산호 목걸이 한 줄이 못에 걸려 있고, 벽의 돌출부에는 덮인 초록색 책과, 붉은 보석과 진주가 박힌 날개 달린 용 모양의 금 브로치가 놓여 있는데, 그녀는 이 브로치를 달지 않았다. 오른쪽에는 라틴어 글귀가 적힌 흰 종이쪽지가 붙어 있다.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시를 고쳐 쓴 것으로, “예술이여, 네가 성품과 영혼까지 그릴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그림은 없었으리라”라는 뜻이다. 시 아래에는 그녀가 죽은 해인 1488년이 적혀 있으며, 미술관은 초상의 제작 시기를 1489~1490년으로 본다.

기를란다요는 로렌초의 아버지가 주문한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토르나부오니 예배당의 프레스코화에서도, 《성모 방문》 장면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머리 모양과 장신구를 한 그녀를 전신으로 세워 놓았다. 패널 속 인물이 누구인지는 니콜로 피오렌티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녀의 옆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메달로 확인되었다.

초상은 토르나부오니 가문에 남아 있다가 17세기에는 피렌체의 판돌피니 가문에 있었고, 19세기에는 아실 세예르 남작과 사강 공비의 컬렉션을 거쳐 브라이턴의 헨리 윌렛에게, 이어 파리의 수집가 로돌프 칸에게 갔으며, 1907년 미국의 금융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 사들였다. 모건은 1913년에 죽었고, 1935년 초상은 뉴욕의 모건 컬렉션을 떠나 하인리히 티센보르네미사에게 갔다.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8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나뉜 유산을 되사들이고 직접 사기 시작한 아들 (1947~1957)

반지를 든 남자의 초상
반지를 든 남자의 초상프란체스코 델 코사, 1477,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7. 프란체스코 델 코사 《반지를 든 남자의 초상》, 1472~1477년경

1947년 하인리히 티센보르네미사가 세상을 떠나자 상속인들은 컬렉션을 나누었다. 가장 큰 몫은 하이니라고 불리던 막내아들 한스 하인리히에게 돌아갔고, 그는 그 뒤 몇 해 동안 형제자매들이 내놓은 그림들을 경매에서 되사들였다. 1921년에 태어난 그는 유산을 나눌 때 26세였고, 1948년 빌라 파보리타의 갤러리가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취향대로, 아버지와 같은 조언자 루돌프 하이네만의 도움을 받아 옛 거장들의 그림을 샀다.

그는 1956년 《반지를 든 남자의 초상》을 샀는데, 그가 스스로 고른 첫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2015년 잡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이 그림을 그가 가족 컬렉션 바깥에서 처음 사들인 그림이라고 했다. 패널은 네덜란드 베네브루크의 폰 판비츠 컬렉션에서 왔고, 18세기에는 볼로냐의 보스키 후작 궁전에 걸려 있었다.

젊은 남자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지만 눈은 다시 관람자 쪽으로 향하고 있다. 구릿빛 붉은 머리카락은 턱선에 맞춰 가지런히 잘렸고 한 올 한 올 그려져 있으며, 머리에는 검푸른 벨벳 모자를 썼고 어깨에는 매끈한 회색 망토를 둘렀다. 그가 몸에 지닌 장신구는 반지 하나다. 작은 보석이 박힌 가느다란 금반지가 그의 집게손가락 끝에 똑바로 세워져 있다. 손은 아래쪽 가장자리의 돌 난간 위에 놓여 있고, 새끼손가락은 난간 모서리 너머 우리 쪽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소매는 돌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뒤로는 붉은 돌판을 겹겹이 쌓은 듯한 탑 모양의 바위들이 솟아 있고, 그 꼭대기에는 자연 아치와 가늘고 앙상한 나무들이 있다. 바위 아래에는 두건을 쓴 아주 작은 사람이 서 있고, 만에는 돛 없이 돛대만 드러난 배가 떠 있으며, 그 너머로 도시와 눈 덮인 산이 보인다.

누가 이 초상을 그렸는지를 두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했다. 1913년 이 그림은 1470년대에 볼로냐에서 활동한 페라라 화가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작품으로 발표되었다. 버나드 베런슨은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의 작품으로 보았고, 로베르토 롱기는 코사를 지지했으며, 이탈리아 인명사전은 이 초상을 코사가 그렸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초상이라고 부른다. 1915년 영국의 미술사가 허버트 쿡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에스테 왕가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다는 이유로 그림 속 인물이 에스테 가문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보스키 가문의 재산 목록에서 이 초상은 볼로냐의 금세공인이자 화가인 프란체스코 프란차의 초상으로 올라 있었다.

반지를 든 남자의 초상
반지를 든 남자의 초상프란체스코 델 코사, 1477,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베누스와 큐피드
베누스와 큐피드페테르 파울 루벤스, 160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8. 페테르 파울 루벤스 《베누스와 아모르》, 1606~1611년경

1636년의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전 재산 목록에는 국왕 펠리페 4세의 침실에 걸린 티치아노의 그림이 올라 있다. 가슴을 드러낸 베누스가 막 침대에서 일어난 듯한 차림으로 붉은 옷을 입고 오른팔에는 진주 팔찌를, 왼손 새끼손가락에는 반지를 꼈으며, 그 앞에서 벌거벗은 아모르가 거울을 들고 있고 그녀는 그 거울을 들여다본다는 내용이다.

루벤스의 캔버스에는 같은 장면과 같은 세부가 있고, 미술관은 이를 근거로 여러 티치아노 가운데 어느 그림이 본보기였는지를 가려낸다. 베누스는 왼쪽에 앉아 있는데,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흰 셔츠를 입고 짙은 모피로 안을 댄 진홍색 망토를 걸쳤다. 왼손은 가슴 위에 평평하게 얹혀 있고 새끼손가락에는 작은 보석이 박힌 가느다란 금반지가 끼워져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무릎께의 모피를 움켜쥐었고 손목에는 진주 두 줄이 감겨 있다. 아모르는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돌출부 위에 서서 어두운 테의 좁은 거울을 들고 있다. 베누스는 옆으로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에는 그녀의 얼굴이 정면으로 비쳐 한쪽 눈이 보이고, 그 눈은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아모르의 화살통과 활은 오른쪽 아래, 부조가 새겨진 돌출부 위에 놓여 있다.

미술관은 이 캔버스의 제작 시기를 1606~1611년으로 본다. 그렇다면 루벤스는 왕의 침실을 직접 보기 아마 20년쯤 전에 이 그림을 그렸고, 어쩌면 이탈리아나 안트베르펜에서 보았을지도 모르는 같은 구도의 다른 판본을 보고 그렸을 것이다. 그는 평생 티치아노를 모사했고 그 모사화들을 곁에 두었으며, 미술관은 이 캔버스를 1640년 루벤스가 죽은 뒤 작성된 그의 재산 목록에 있는 그림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 캔버스에 관한 다음 기록은 1914년의 것으로, 그때 그림은 브뤼셀의 수집가 레옹 카르동에게 있었다. 1921년 6월 그림은 브뤼셀의 경매에서 팔렸고, 1956년에는 뉴욕의 로젠버그 앤드 스티블 화랑이 전시했으며, 그 뒤 루체른 근처 헤르기스빌의 한 화상에게 있다가 1957년 한스 하인리히가 루가노의 컬렉션을 위해 사들였다. 왕의 침실에 있던 티치아노는 1734년 알카사르 화재에서 살아남았으나 19세기 초 반도 전쟁 중에 사라졌다.

베누스와 큐피드
베누스와 큐피드페테르 파울 루벤스, 160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아버지가 사지 않던 그림을 사들이는 아들 (1961~1983)

조각된 의자 앞의 프렌치
조각된 의자 앞의 프렌치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191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9.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조각된 의자 앞의 프렌치》, 1910년

1961년 5월 초, 화상이자 경매 회사 슈투트가르터 쿤스트카비네트의 주인인 로만 노르베르트 케테러는 한스 하인리히 부부에게 흰 카네이션을 선물했다. 남작은 막 케테러의 경매에서 끈질긴 경합 끝에 에밀 놀데의 수채화 《젊은 연인》을 당시 놀데의 종이 작품으로는 최고가에 산 참이었고,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산 20세기 미술품이었다. 미술관 잡지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20세기 미술을 별로 흥미롭지 않게 여겼고, 한스 하인리히 자신은 나치가 표현주의 화가들의 미술을 ‘퇴폐 미술’로 낙인찍었다는 사실도 자기를 그들에게 끌리게 했다고 여러 번 말했다. 곧이어 케테러는 미술관에 따르면 당시 돈이 필요했던 터라, 자기 컬렉션에 있던 키르히너의 그림 두 점, 《주름 깃을 단 도리스》와 《조각된 의자 앞의 프렌치》를 남작에게 내놓았다.

드레스덴의 미술가 그룹 다리파를 세운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1910년, 프렌치가 아홉 살이던 해에 그녀를 그렸다. 얼굴은 독한 빛깔의 황록색이고, 눈은 붉게 테를 둘렀으며 그 아래에는 파란 붓질이 있고, 입은 새빨갛다. 초록빛 가닥이 섞인 짙은 머리카락은 어깨로 흘러내리고, 가슴에는 마름모꼴 붓질로 된 커다란 파란 목걸이가 놓여 있다. 그녀의 머리 뒤에는 검은 의자 등받이가 있고, 거기에 분홍색 여인상이 새겨져 있다. 검은 틈으로 눈과 입을 낸 분홍색 얼굴이 소녀의 머리 바로 위에 있고, 긴 분홍색 팔이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아래로 뻗어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의자는 키르히너가 직접 깎았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해가 지난 뒤 그는 드레스덴 민족학 박물관에서 팔라우 제도에서 온 조각된 들보를 보았는데, 그 인물들이 자기 인물들과 같은 형태 언어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썼다. 붓질은 빠르게 놓였고, 옷의 색면 사이와 머리카락 주위로 칠하지 않은 캔버스가 환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까지 이 소녀는 별명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키르히너 연구자 게르트 프레슬러가 화가의 1926년 기록에서 페르만이라는 성을 찾아냈고, 교회와 시의 기록부를 뒤져 그녀가 1900년 드레스덴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리나 프란치스카 페르만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조각된 의자 앞의 프렌치
조각된 의자 앞의 프렌치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191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세 개의 반점이 있는 그림, 196번
세 개의 반점이 있는 그림, 196번바실리 칸딘스키, 1914,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10. 바실리 칸딘스키 《세 개의 반점이 있는 그림, 196번》, 1914년

칸딘스키는 1914년 상반기에 뮌헨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때 그는 이미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그리는 일을 거의 그만둔 상태였다.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이틀 뒤인 8월 3일, 러시아 국민이었던 그는 뮌헨을 떠나 스위스로 갔다.

캔버스는 거의 정사각형이고, 가장자리를 따라 분홍, 진홍, 황토, 갈색 띠들이 들쭉날쭉한 고리를 이루며, 그 바깥 모서리들에는 짙은 파랑과 선명한 초록이 있다. 안쪽에는 제목에 나오는 세 반점이 있다. 왼쪽에 비스듬히 놓인 큰 초록 반점, 오른쪽의 짙은 군청색 반점(면적은 이것이 가장 크다), 그리고 위쪽의 둥근 진홍 반점인데, 진홍 반점은 다른 두 반점에 반쯤 가려져 있다. 그 위로 가는 파란 선 다발이 쏟아져 내리고, 가운데에는 배처럼 생긴 노르스름한 주황 초승달이 놓여 있으며, 왼쪽 아래 구석에는 알록달록한 작은 붓질이 흩어져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준비 스케치에서는 이 구석에 사람이 탄 배들이 있었다. 왼쪽 아래에는 “KANDINSKY 1914”라고 작게 적혀 있다.

이 그림은 나중에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으로 갔고, 1971년 재단은 당시 보도에 따르면 칸딘스키 작품으로는 최고가에 이 그림을 팔았다. 1975년 한스 하인리히가 밀라노에서 그림을 샀다. 196번은 칸딘스키가 손수 쓴 작품 목록에서 이 그림에 붙은 번호이고, 198번부터 201번까지는 같은 1914년 미국인 에드윈 캠벨이 뉴욕의 자기 아파트를 위해 주문한 큰 패널화 네 점에 화가가 매긴 번호다.

11. 프란츠 마르크 《꿈》, 1912년

칸딘스키는 1911년 여름 말 탄 사람이 그려진 그림 《즉흥 12》를 프란츠 마르크에게 보냈고, 7월 31일 마르크는 그림이 무사히 도착해 벽에 걸렸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칸딘스키에게 편지를 썼다. 마르크는 《꿈》을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2년이나 1913년 초에 답례로 이 그림을 칸딘스키에게 주었다. 마르크와 칸딘스키(앞의 이야기에서 다루었다)는 함께 『청기사』 연감을 엮었고, 연감은 1912년 5월에 나왔다.

꿈
꿈프란츠 마르크, 1912,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가운데의 초록 언덕 위에는 분홍빛 자주색 살결의 벌거벗은 여인이 무릎을 세우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왼쪽에는 꼬리를 등 위로 고리처럼 말아 올린 노란 사자와, 붉은 지붕에 어두운 창이 난 노란 집 한 채가 있다. 오른쪽에서는 여러 면으로 쪼개진 커다란 파란 말 두 마리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위쪽에는 붉은 주황색 말이 한 마리 더 있으며, 그 뒤로 연분홍 말이 보인다. 미술관에 따르면 마르크의 색에는 그가 1910년 화가 아우구스트 마케에게 편지로 쓴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에게 파랑은 남성적이고 정신적인 원리, 노랑은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관능적인 원리, 빨강은 물질, 곧 무겁고 거친 힘이었다.

마르크는 1916년 3월 4일 베르됭 근처에서 36세로 전사했다. 그때 칸딘스키는 러시아에 있었고, 그림은 뮌헨에서 그의 반려자였던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가 맡고 있었다. 마르크의 미망인 마리아는 1916년 뮌헨과 비스바덴에서 남편의 추모 전시를 열면서 뮌터에게서 《꿈》을 빌려 갔고, 미술관의 연구자 마르타 루이스 델 아르볼에 따르면 그 뒤 적어도 4년 동안 리트의 집에 《즉흥 12》와 함께 두었다. 1926년에는 그림이 다시 칸딘스키에게 있었고, 미국의 수집가 캐서린 드라이어가 바우하우스에서 그에게서 이 그림을 골라, 자신의 단체 소시에테 아노님이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연 대규모 현대 미술 전시에 내놓았다. 그 뒤 반세기 동안 그림이 어디에 있었는지 연구자들은 추적하지 못했고, 1978년 한스 하인리히가 뉴욕에서 그림을 샀다.

12. 피트 몬드리안 《뉴욕 시티 3(미완성)》, 1941년

뉴욕 시티 3(미완성)
뉴욕 시티 3(미완성)피트 몬드리안, 1941,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뉴욕 시티
뉴욕 시티피트 몬드리안, 1942, 국립근대미술관
뉴욕 시티 3(미완성)
뉴욕 시티 3(미완성)피트 몬드리안, 1941,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이 캔버스의 띠들은 색 접착테이프로 만들어졌다. 빨간 세로 띠 네 줄이 위에서 아래까지 지나가고, 노란 띠, 파란 띠, 흰 띠 여러 줄과 빨간 띠와 검은 띠 한 줄씩이 가로로 이들을 가로지른다. 교차점마다 어떤 때는 이 테이프가, 어떤 때는 저 테이프가 위에 놓여 있어서 격자가 엮어 짠 것처럼 보인다. 흰 띠는 거의 흰 바탕칠 위에 붙은 흰 테이프라서 놓치기 쉽다. 붓으로 칠한 곳은 두 면으로, 왼쪽 위의 노란 직사각형과 오른쪽 가장자리의 파란 면이며, 파란 면의 아래 가장자리는 마른 붓으로 문질러 들쭉날쭉하다. 이 두 면에는 붓 자국이 보이고, 테이프는 고르고 매끈하게 붙어 있다. 띠들 사이로는 연필 표시와 지운 직사각형의 흔적이 남은 맨 캔버스가 드러난다.

몬드리안은 균형이 마음에 들 때까지 테이프를 옮겨 붙일 수 있었고, 마지막 단계에서야 테이프를 물감으로 바꾸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몬드리안이 연작 전체에서 물감으로 끝까지 마무리한 캔버스는 파리 퐁피두 센터에 있는 1942년의 《뉴욕 시티》 하나뿐이다. 이 캔버스는 어쩌면 이미 1938년 무렵 런던에서 《노랑과 파랑의 구성》으로 시작되었을 수 있으며, 1940년 런던 폭격 뒤 몬드리안이 뉴욕으로 가져가 계속 고쳐 그린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그를 뉴욕으로 부른 사람은 미국 화가 해리 홀츠먼이었다. 몬드리안은 1944년 2월 1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 캔버스는 59번가의 마지막 작업실에서 발견되었으며, 유산 관리는 홀츠먼이 맡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1977년 홀츠먼은 빌 스티브스와 함께 떨어진 테이프를 제자리에 다시 붙이고, 찢어진 테이프는 같은 색의 새 테이프로 같은 자리에 바꾸어 붙였다. 그래서 테이프의 일부는 몬드리안이 죽은 뒤에 붙은 것인데, 어느 띠가 새것인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한스 하인리히는 1983년에 이 그림을 샀다. 오른쪽 가장자리 아래, 아래쪽 노란 가로 띠와 흰 가로 띠 사이의 검은 세로 띠는 캔버스에서 떨어져 물결처럼 휘었고, 그 아래로 그림자가 진다.

같은 시기: 옛 거장들, 미국 화가들, 그리고 누이에게서 되산 그림 (1971~1986)

흔들리는 무희(녹색 옷의 무희)
흔들리는 무희(녹색 옷의 무희)에드가 드가, 1879,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13. 에드가 드가 《흔들리는 무희(녹색 옷의 무희)》, 1877~1879년

1886년 무렵 영국 화가 월터 시커트가 이 파스텔화를 샀는데, 미술관은 미술사가이자 수집가인 샤를 에프뤼시를 통해 샀을 것으로 본다. 시커트는 1883년 파리에서 에드가 드가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소묘와 기억을 바탕으로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림을 사기 얼마 전 시커트의 아내 엘런은 화가 자크에밀 블랑슈에게, 드가가 그림을 판다니 기쁘다고 편지를 썼다. 1886년 봄부터 이 작품은 웨스트햄스테드에 있는 시커트 부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걸렸다.

이것은 종이에 파스텔과 구아슈로 그린 작품이다. 드가는 무대를 박스석에서처럼 위와 옆에서 내려다보았고, 그래서 그림 속 바닥은 위로 솟아올라 오른쪽 아래 구석 전체를 텅 빈 회갈색 무대 널빤지가 차지한다. 가운데에서는 파란 허리띠를 맨 연녹색 튀튀 차림의 무희가 한쪽 발끝으로 돌고 있는데, 금팔찌를 찬 한 팔은 오른쪽 위 모서리를 향해 솟구쳤고 다른 팔은 아래 뒤쪽으로 젖혀졌다. 왼쪽은 종이 가장자리에 잘린 다른 무희들의 초록 튈로 온통 덮여 있고, 그 튈 사이로 분홍 타이츠를 신은 다리들이 머리도 몸통도 없이 삐져나와 있다. 위쪽 무대 배경막 앞에서는 주황색 치마를 입은 무희들이 기다리고 있다.

시커트 부부의 결혼이 깨지자 파스텔화는 엘런에게 갔고, 이어 그녀의 자매 제인 코브던언윈에게 넘어갔으며, 1902년 코브던 집안은 이 그림을 파리에 팔았다. 그 뒤 그림은 파리의 화상들과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카길의 컬렉션, 1963년 런던 경매를 거쳐 패서디나의 수집가 노턴 사이먼에게 갔고, 1971년 5월 5일 뉴욕의 경매 회사 소더비 파크 버넷에서 열린 그의 소장품 경매에서 한스 하인리히가 샀다. 두 번째 제목 《녹색 옷의 무희》는 시커트가 붙였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드가 자신이 일러 준 이름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두초 디 부오닌세냐, 1311,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14. 두초 디 부오닌세냐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1310~1311년

1777년 8월 1일 시에나의 산탄사노 인 카스텔베키오 성당에서 두초의 《마에스타》를 톱으로 잘랐다. 시에나 대성당의 주 제단을 위해 그린 양면 제단화였는데, 톱이 미끄러지면서 성모의 얼굴이 상했다. 두초는 1308년 10월 9일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쉬지 않고 일하고 다른 주문은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1311년 6월 9일 주교가 이끄는 행렬이 촛불과 등불을 들고 완성된 제단화를 도시를 가로질러 대성당으로 옮겼다. 앞면에는 성인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은 성모가, 뒷면에는 수난 장면들이 있었고, 아래쪽 프레델라에는 그리스도의 생애 일화들이 긴 판자 위에 잇달아 그려져 있었다. 남아 있는 프레델라 장면은 하나하나 그런 판자에서 잘라 낸 것이며, 뒷면의 여덟 장면은 지금 시에나, 뉴욕, 워싱턴, 런던, 포트워스, 마드리드에 있다.

그리스도는 초록 대리석으로 된 팔각형 우물 가장자리에 옆으로 앉아 있다. 붉은 튜닉에 파란 망토를 걸쳤고, 맨발은 계단 위에 놓였으며, 오른손을 여인 쪽으로 들어 올렸다. 연노랑 긴 옷에 흰 베일을 쓴 사마리아 여인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분홍빛 성벽에 총안이 늘어선 도시의 성문에서 사도들이 걸어 나오는데, 먹을 것을 구하러 도시에 갔던 이들이다. 맨 앞의 수염 없는 젊은 사도의 망토 주름 속에는 작은 빵 몇 덩이가 들어 있다. 성문 아치 아래에는 작은 등불이 걸려 있다. 배경의 금박은 닳아서, 금박을 붙이려고 먼저 바른 붉은 점토 바탕이 줄무늬와 긁힌 자국으로 드러나고, 그래서 하늘이 얼룩덜룩해 보인다.

1879년 이 패널은 콜레 디 발 델사의 디니 형제가 소유하고 있었고, 이 소도시의 전시에 나왔다. 1886년 화가이자 화상인 찰스 페어팩스 머리는 이 패널을 프레델라의 다른 세 장면과 함께 런던의 수집가 로버트·이블린 벤슨 부부를 위해 샀다. 1927년 듀빈 브라더스 상사가 벤슨 부부의 이탈리아 컬렉션 전체를 사들이면서 두초의 패널 네 점은 미국 구매자들에게 흩어졌다. 《산 위의 유혹》은 뉴욕의 프릭 컬렉션이 샀고,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은 지금 워싱턴에 있으며, 《라자로의 부활》과 《사마리아 여인》은 뉴욕의 록펠러 컬렉션에 들어갔다. 《라자로》는 1975년 포트워스의 킴벨 미술관이 샀고, 《사마리아 여인》은 그보다 앞선 1971년에 이미 한스 하인리히가 록펠러 컬렉션에서 사들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왼손에 흰 밧줄 한 타래와 작은 구리 두레박을 들고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자, 그녀는 그에게는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고 우물은 깊다고 대답한다.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두초 디 부오닌세냐, 1311,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모자와 두 개의 목걸이를 한 자화상
모자와 두 개의 목걸이를 한 자화상렘브란트, 1642,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15. 렘브란트 《베레모를 쓰고 두 개의 사슬을 건 자화상》, 1642~1643년경

1968년 미술사가 호르스트 헤르손은 패널의 상태가 마음에 걸린다며 이 자화상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래서 1976년 한스 하인리히가 이 그림을 샀을 때 렘브란트가 그렸는지는 이미 의문시되고 있었다. 1987~1988년의 엑스선과 적외선 촬영에서는 코와 눈, 베레모, 옷, 배경에서 나중에 덧칠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 목재를 분석한 결과 패널은 1630년대나 1640년대 초의 나무로 만들어져 그림이 17세기의 것임이 밝혀졌고, 1990년 아이번 개스켈이 엮은 이 컬렉션 자체의 도록은 초상을 렘브란트 공방의 작품으로 분류했다.

렘브란트는 자신을 허리까지, 거의 정면으로 그렸고, 빛은 왼쪽 위에서 얼굴로 떨어진다. 그는 넓고 납작한 검은 베레모를 썼고, 그 밑으로 불그스름한 곱슬머리가 삐져나와 있다. 윗입술 위에는 콧수염이, 아랫입술 밑에는 작은 수염 한 줌이 있고, 목에는 두툼한 모피 깃이 둘러져 있다. 둥근 고리를 이은 짧은 금사슬은 모피 위에 얕은 고리를 그리며 놓여 있고, 긴 사슬은 가슴 전체를 가로질러 깊은 호를 그리며 늘어져 있다.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한 손이 모피 단을 댄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이 손은 거의 스케치처럼 빠르게 그려졌다. 2022년 이 그림이 전시되었던 리스본의 굴벤키안 미술관은, 렘브란트가 1572년 히에로니무스 코크가 펴낸 판화 두 점 속의 옛 네덜란드 화가 디르크 바우츠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다고 적었다.

1994년 두 번째 연륜연대 측정에서 패널의 목재가 렘브란트의 다른 패널 네 점의 목재와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미술관에 따르면 렘브란트 연구 프로젝트로서는 그의 작품임을 부정할 이유가 더는 남지 않았다. 2005년 이 자화상은 자화상을 다룬 『렘브란트 회화 총람』 제4권에 실렸다.

16.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레 베스노》, 1890년

1900년 무렵 이 풍경의 작은 수채 모사화를 그린 사람은 블랑슈 드루스였다. 그녀는 폴 가셰 박사의 가정부의 조카딸이자 그의 제자로, 박사의 컬렉션에 있는 그림들을 작게 줄여 모사했다. 이 모사화는 루브르 박물관 소묘·판화부에 보관되어 있고, 그것을 보면 이 그림이 가셰의 집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관은 박사를 이 그림의 첫 소유자로 본다. 가셰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반 고흐를 치료했고, 미술관에 따르면 레 베스노는 박사 자신이 살던 마을 구역이었다.

오베르 인근 레 베스노의 풍경
오베르 인근 레 베스노의 풍경빈센트 반 고흐, 1890,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반 고흐는 1890년, 생애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이 마을 변두리를 그렸다. 캔버스 아래쪽 3분의 2는 짧고 휘어진 붓질로 된 연둣빛 들판이 차지하고, 그 안에 레몬빛 노란 점 수백 개가 박혀 있다. 오른쪽에는 도랑처럼 보이는 물결 모양의 하늘색 띠가 들판을 가로질러 뻗어 있고,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소용돌이치는 올리브색 덩어리로 된 큰 나무가 화면 끝에 잘린 채 서 있다. 그 위로 초가지붕과 회색 지붕을 인 흰 집들이 캔버스를 가로질러 늘어서 있고,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에 있는 집 한 채의 지붕은 빨간색인데, 그림에서 유일하게 강한 따뜻한 색이다. 이 집 아래 오른쪽, 들판 너머의 옅은 띠 위에는 말과 수레를 거느린 아주 작은 사람이 몇 번의 붓질로 그려져 있다. 집들 위로는 줄무늬 진 언덕 비탈이 솟아오르고, 하늘은 위쪽 가장자리의 좁은 띠로만 남았으며, 거기에 짙은 흰 구름이 두꺼운 물감으로 쌓여 있다.

한스 하인리히는 1978년에 이 그림을 샀다. 2023년 7월 미술관은 《레 베스노》를 바탕으로 첫 NFT 컬렉션을 내놓았는데, 디지털 토큰 100개로 가격은 개당 3만 유로였다.

17. 토머스 콜 《추방: 달빛과 불빛》, 1828년경

추방: 달빛과 불빛
추방: 달빛과 불빛토머스 콜, 182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토머스 콜은 낙원에서의 추방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렸다. 가운데에는 낭떠러지 위로 거대한 천연 돌다리가 걸려 있고, 그 뒤 협곡으로는 가느다란 흰 폭포가 떨어지는데, 다리와 폭포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모습에서 미술관은 십자가를 본다. 오른쪽에는 탑처럼 솟은 어두운 바위가 있고, 그 좁은 틈 안에서 노르스름한 흰 불길이 뿜어져 나온다. 캔버스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틈에서 나온 빛이 다리 오른쪽 끝으로 번진다. 탑 너머 오른쪽 위 모서리는 낮이다. 분홍 구름이 뜬 파란 하늘, 햇살을 받은 비탈, 초록 골짜기가 있고, 미술관에 따르면 이것이 낙원이다. 왼쪽, 타락 이후의 세계는 밤이며, 가장자리 가까이 가운데보다 조금 아래에 작은 보름달이 물빛이 반짝이는 먼 평원 위에 떠 있다. 바위 봉우리 위로는 연기 낀 먹구름 속에 붉은 불빛이 번져 있는데, 미술관의 학교용 자료는 이를 화산이라고 부른다. 앞쪽에는 비틀린 죽은 나무가 하얗게 서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토머스 콜, 1828, 보스턴 미술관
추방: 달빛과 불빛
추방: 달빛과 불빛토머스 콜, 1828,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콜은 1827년 뉴햄프셔의 화이트산맥에서 낭떠러지 위의 다리를 보았다. 1828년 그는 뉴욕에서 《낙원에서의 추방》을 전시했는데, 지금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에서는 빛나는 문 안에 아주 작은 아담과 하와가 보인다. 마드리드의 캔버스에도 같은 다리와 빛이 비치는 같은 문이 있지만, 콜은 사람들을 지우고 왼쪽 절반을 달밤으로 바꾸었다. 콜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181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허드슨강 화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한스 하인리히는 1970년대 말부터 19세기 미국 회화를 사기 시작했다. 잡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에 따르면 그때 시장은 이 그림들에 아직 별 관심이 없었고, 그의 컬렉션은 유럽에서 이런 그림을 갖춘 몇 안 되는 컬렉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미술사가 바버라 노박의 책 『자연과 문화』에 자극을 받았다고 썼고, 1984년 도록에서는 델라웨어 출신인 할머니 쪽으로 자신이 어쩌면 4분의 1은 미국인이라며 이 관심을 설명했다. 그는 1980년에 《추방》을 샀다. 노박의 책 후대 판본 가운데 하나의 표지에 이 그림이 실려 있다.

18. 대 루카스 크라나흐 《샘의 님프》, 1530~1534년경

샘의 님프
샘의 님프대 루카스 크라나흐, 1534,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왼쪽 위 모서리의 밝은 명판에는 라틴어 대문자로 FONTIS NYMPHA SACRI SOMNVM NE RVMPE QVIESCO, 곧 ‘나는 신성한 샘의 님프이니 내 잠을 깨우지 마라, 나는 쉬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15세기에 사람들은 이 경구를 진짜 고대 비문인 양 베껴 전했고, 명판의 글은 그 경구를 줄인 것이다. 지금은 보통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조반니 안토니오 캄파노가 이 경구를 지었다고 본다. 1518년부터 크라나흐의 공방은 이 님프를 거듭 그렸고, 알려진 판본만 20점이 넘는다.

여기서 님프는 패널의 폭 전체에 걸쳐 머리를 왼쪽에 두고 진홍색 벨벳 위에 한 팔을 머리 뒤로 젖힌 채 누워 있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그 사이로 어두운 눈동자가 보여서, 님프가 조는 것인지 몰래 엿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몸은 투명한 베일로 덮여 있는데, 베일은 이마와 배, 허벅지, 정강이를 가로지르는 가늘고 밝은 선으로만 보인다. 왼쪽에서는 황토색 바위틈에서 물줄기가 활처럼 휘며 뿜어져 나오고, 연못 너머 숲 가장자리에는 사슴 네 마리가 서 있거나 누워 있다. 오른쪽의 매끈한 회색 나무줄기에는 활과 화살이 든 붉은 화살통이 걸려 있고, 님프의 발치 풀밭에서는 자고새 두 마리가 모이를 쪼고 있다.

이 패널은 베를린의 화가 빌헬름 트뤼브너의 것이었고, 1918년 베를린 경매에서 팔렸다. 그 뒤 베를린의 하버슈토크 화랑과 암스테르담의 하우트스티커르 상사를 거쳐 1928년 하인리히 티센보르네미사가 샀는데, 1933~1935년의 큰 구입이 있기 5년 전이었다. 1930년 님프는 뮌헨에서 열린 그의 컬렉션의 첫 전시에 나왔다. 유산을 나눌 때 이 그림은 그의 딸 마르기트, 곧 버차니 백작 부인에게 갔고, 1986년 한스 하인리히가 빌라 파보리타를 위해 누이에게서 되사들였다.

샘의 님프
샘의 님프대 루카스 크라나흐, 1534,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패널은 언젠가 네 변이 모두 잘려 나가서, 글귀가 적힌 명판이 위쪽과 왼쪽 가장자리에 맞닿아 있다. 아래쪽에는 좁은 띠를 덧대었는데, 구부린 다리의 발뒤꿈치가 바로 이 덧댄 띠에 닿아 있다.

이 그림들은 지금 누구의 것인가 (1984년부터)

마타 무아
마타 무아폴 고갱, 1892,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19. 폴 고갱 《마타 무아(옛날에)》, 1892년

2020년 팬데믹으로 미술관이 문을 닫은 동안 《마타 무아》는 마드리드를 떠나, 소유자인 한스 하인리히의 미망인 카르멘 세르베라가 사는 안도라로 옮겨졌다. 그는 컬렉션의 영구적인 거처를 찾던 1985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스위스는 빌라 파보리타의 확장 비용을 대지 않으려 했고, 영국, 게티 미술관, 독일의 여러 도시, 스페인에서 제안이 들어왔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스페인을 택하게 한 사람은 카르멘이었다. 1988년 남작은 스페인 정부와 계약을 맺고, 매각을 전제로 775점을 마드리드에 빌려주었다. 1992년 10월 8일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가 내부를 새로 고친 비야에르모사 궁전에서 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1993년 6월 정부는 이 775점을 3억 5000만 달러에 사들여 국가 재단에 넘겼다. 《마타 무아》는 이 거래에 들어 있지 않았고, 카르멘 티센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카르멘 세르베라 자신의 컬렉션에 속한다. 이 건물에서 가장 유명한 고갱은 한 번도 미술관의 소유였던 적이 없다.

고갱은 1892년 타히티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데, 다시 오세아니아로 떠날 돈을 마련하려고 작품들을 내놓은 1895년의 경매에서 이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1984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한스 하인리히와 볼리비아의 수집가 하이메 오르티스파티뇨가 이 그림을 절반씩 나누어 샀는데, 언론 보도로는 400만 달러가 채 안 되는 값이었다. 1989년에는 역시 뉴욕의 경매에서 한스 하인리히가 단독 소유자가 되었다. 카르멘 세르베라는 잡지 『올라!』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이 그림을 세 번 샀다고 말했다.

회청색 나무줄기가 캔버스를 반으로 가르며 위쪽 가장자리 너머로 뻗어 있다. 왼쪽 안쪽에는 커다란 짙은 자줏빛 우상이 앉아 있고, 그 주위에서 허리까지 벗은 여인 세 명이 춤을 춘다. 오른쪽 앞쪽에는 흰 파레오를 입은 두 여인이 짙은 초록 풀밭에 앉아 있고, 한 사람은 피리를 분다. 그 뒤로 붉은 주황색 땅의 띠와 선명한 초록 풀밭, 분홍빛 자주색 산들이 이어진다. 미술관에 따르면 우상은 달의 여신 히나를 나타내며, 고갱이 그 모습을 직접 지어냈다. 왼쪽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MATA MUA, 곧 타히티어로 ‘옛날에’라는 말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P Gauguin 92”라는 서명이 있다.

2022년 2월 7일 《마타 무아》는 마드리드로 돌아왔고, 이틀 뒤인 2월 9일 문화부는 작품 약 330점으로 이루어진 카르멘 티센 컬렉션을 15년 동안 해마다 650만 유로에 임차하는 계약에 서명했다. 그 뒤로 이 컬렉션은 2022년 스페인 정부와 맺은 15년 임차 계약에 따라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우선 매수권은 티센보르네미사 컬렉션 재단에 있고 재단은 이 권리를 정부에 넘길 수 있다. 계약에 따라 소유자들은 컬렉션에서 세 점을 자유롭게 팔 수 있고 어떤 작품을 고르든 상관없지만, 《마타 무아》만은 예외다.

마타 무아
마타 무아폴 고갱, 1892,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카미유 피사로, 1897,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20. 카미유 피사로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 1897년

1939년 릴리 카시러는 독일을 떠날 출국 비자를 얻으려고 베를린의 화상 야코프 샤이트비머에게 이 그림을 900라이히스마르크에 팔 수밖에 없었고, 그 돈은 그녀가 쓸 수 없는 계좌에 들어갔다. 그림은 베를린에 있는 그녀의 집에 걸려 있었다. 1900년 피사로의 작품을 팔아 주던 화상이 이 그림을 베를린의 미술상 집안 출신인 파울 카시러에게 팔았고, 그 뒤 릴리가 이 그림을 상속받았다. 2024년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판결문에서 나치가 릴리에게서 이 그림을 훔쳤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1943년 그림은 베를린의 경매에서 팔렸다. 전쟁이 끝난 뒤 릴리는 그림을 돌려받으려 했고, 그림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던 1958년 독일연방공화국은 그녀에게 보상금으로 12만 마르크를 지급했다. 그사이 1951년 그림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반출되었고, 1952년부터 1976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개인 컬렉션에 있다가, 1976년 한스 하인리히가 뉴욕의 스티븐 한 화랑을 통해 27만 5000달러에 샀다. 그림은 1992년부터 마드리드에 있고, 1993년 정부가 사들인 775점에 포함되었다.

피사로는 1897년 파리의 한 호텔 창문에서 생토노레 거리를 그렸고, 이 그림은 1897~1898년 겨울 같은 창문에서 그린 그림 15점 가운데 하나다. 거리는 아래에서 왼쪽 위로 비스듬히 뻗어 가다가 잿빛 안개 속으로 흐려지고, 왼쪽 보도를 따라 어두운 마차들이 줄지어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섬 위에 둥근 분수가, 왼쪽에는 진열창 위로 빨강과 흰색 줄무늬 차양이 있다.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분홍, 황토, 보라색 붓질로 칠한 젖은 포장도로로, 마차와 사람들 아래로 그 모습이 비친다.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 아래쪽 가장자리 가까이에는 실크해트를 쓴 남자가 혼자 걸어가고, 그 아래에 그의 반영이 있다.

릴리의 손자 클로드 카시러는 2005년 캘리포니아에서 티센보르네미사 컬렉션 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재단은 남작이 선의로 그림을 샀으며 그림이 재단의 소유라는 입장이고, 상속인들은 그림을 도난품으로 본다. 2024년 1월 9일 제9 연방항소법원은 스페인 법에 따라 재단의 손을 들어 주었는데, 스페인 법으로는 재단이 취득시효로 그림의 소유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2024년 9월 캘리포니아주는 이런 소송에 캘리포니아 법을 적용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고, 2025년 3월 1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2024년의 판결을 무효로 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냈다. 2025년 9월 12일 양측은 정식 재판 없이 판결을 내려 달라는 약식 판결 신청을 각각 냈고, 11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이 새 법을 지키겠다며 소송 참가를 신청했다. 2026년 4월 13일에는 홀로코스트 시기에 빼앗긴 미술품의 반환에 관한 연방법(약칭 HEAR법)이 서명되었는데, 이 법의 조문은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쓰였으며 취득시효를 근거로 한 항변을 배제한다. 2026년 9월 29일 현재 사건은 캘리포니아 중부 연방지방법원에서 심리 중이며, 최종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카미유 피사로, 1897,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그 밖에 볼 만한 작품들

하인리히가 사들인 그림 가운데서는 1935년 뉴욕의 모그마 미술 재단에서 산 프란스 할스의 《풍경 속의 가족 초상》과, 뒤러와 홀바인을 판 바로 그 루체른의 메르쿠리아 화랑을 거쳐 1937년 컬렉션에 들어온 한스 말러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안나의 초상》을 찾아볼 만하다.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부활절 아침》은 1973년 한스 하인리히가 경매에서 샀고, 미국 풍경화로는 콜의 《해 질 녘의 십자가》도 컬렉션에 있다. 20세기 회화로는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 로이 릭턴스타인의 《욕조 속의 여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거울 속의 조지 다이어》가 있다. 프라 안젤리코의 《겸손의 성모》는 한스 하인리히가 크라나흐의 님프를 되사들인 바로 그해인 1986년에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