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네 크뢸러뮐러(1869~1939)는 독일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의 해운·무역 거물 안톤 크뢸러와 결혼했다. 1907년 그녀는 ‘실용 미학’을 가르치던 헹크 브레머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브레머는 예술이 사실주의에서 이상주의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간다고 가르쳤고, 반 고흐를 바로 그 전환이 일어나는 화가로 여겼다. 1908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헬레네는 그의 조언에 따라, 때로는 그의 조언을 거슬러 그림을 사들였다. 1935년 그녀는 컬렉션을 국가에 넘기겠다고 제안했고, 1938년 호헤 벨루베 공원에 앙리 반 데 벨데가 설계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은 임시 건물로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건축가 베를라허가, 그다음에는 반 데 벨데 자신이 그녀를 위해 설계한 큰 미술관이 끝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는 반 고흐의 그림 88점과 종이 작품 172점이 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반 고흐 컬렉션이다.

헬레네는 1939년 12월 14일 성 후베르투스 사냥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영구차가 그녀를 미술관으로 옮겼고, 그 뒤를 안톤과 아들 보브, 삼 반 데벤터르, 그리고 그녀의 간병인이 걸어서 따랐다. 그녀는 아끼던 반 고흐 그림들 사이, 바로 《네 송이의 시든 해바라기》 앞에 안치되었다. 컬렉션을 모으기 시작한 첫해인 1908년에 사들인 파리 시절의 캔버스였다. 다시 하루 뒤 그녀는 프란서 베르흐 언덕 기슭, 큰 미술관을 짓기로 했던 자리의 기초 옆에 묻혔고, 묘석에는 “나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완전함을 믿는다”라는 그녀의 말이 새겨졌다.
이 글에 나오는 작품은 대부분 헬레네가 직접 샀다. 나머지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남긴 규칙에 따라 미술관이 사들였다. 우리는 그녀가 110휠던을 치른 어두운 습작에서 시작해, 조각가가 목숨을 잃고 18년 뒤에 주조된 청동 조각으로 끝맺는다.
컬렉션의 시작
1. 빈센트 반 고흐 《숲의 가장자리》, 1883년
빈센트 반 고흐는 1883년 7월 말 헤이그에서 야외용 이젤을 샀고, 동생 테오에게 이제는 무릎을 꿇고 자연 속에서 그릴 때처럼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편지했다. 미술관은 《숲의 가장자리》의 조금 높은 시점, 나무줄기 사이의 오솔길과 땅이 살짝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시점을 이 이젤과 연결한다. 9월 초 빈센트는 테오에게, 캔버스를 만들려고 천을 샀다가 그 천을 당시 함께 살던 여자 신 호르닉에게 주어 마른 아이들에게 조끼를 지어 입히게 했다고 이야기했다. 미술관은 이 습작이 바로 그 천의 자투리에 그려졌을 가능성을 열어 둔다. 며칠 뒤 빈센트는 신과 헤어지고 헤이그를 떠나 드렌터 지방으로 갔다.
그림의 왼쪽은 녹갈색으로 어두운, 높고 곧은 나무줄기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차지하고 있고, 우듬지는 위쪽 가장자리에 잘려 있다. 가운데로 가면서 줄기가 성글어져 그 사이로 창백한 하늘이 비치고, 오른쪽에는 회보랏빛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물결치는 우듬지를 단 가느다란 어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그림 전체를 가로질러 낮고 거의 검은 덤불 띠가 뻗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숲의 가장자리다. 분홍빛 도는 베이지색 모랫길은 왼쪽에서 들어와 아래로 휘며 아래쪽 가장자리를 따라 넓어진다. 뿌리 사이에는 녹슨 듯 붉은 흙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밝고 납작한 초록 풀밭이 띠를 이루며, 빛은 온통 땅거미가 질 때처럼 고르고 흐릿하다.

1908년 헬레네 크뢸러뮐러는 브레머의 권유로 경매에서 이 습작을 110휠던에 샀다. 그녀의 첫 번째 반 고흐였고, 그가 수없이 그리면서도 팔지 않았던 작고 어두운 사생 습작 가운데 하나였다.
예전 도록들은 《숲의 가장자리》를 1882년 8월 작품으로 보았다. 미술관은 편지에 나오는 이젤과 천을 근거로 제작 시기를 한 해 늦추어 1883년 8~9월로 잡았다.
2. 빈센트 반 고흐 《네 송이의 시든 해바라기》, 1887년
잘린 큰 해바라기 네 송이가 색을 칠한 바탕 위에 캔버스를 가로질러 한 줄로 놓여 있고, 미술관은 이 공간을 기묘하고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부른다. 맨 왼쪽 꽃은 옆으로 누워, 황토색 꽃잎이 술처럼 둘린 녹갈색 뒷면을 보인다. 가운데 두 송이는 씨가 박힌 어두운 원반을 보는 사람 쪽으로 향하고, 맨 오른쪽 꽃은 뒤집혀 있어서 한가운데 잘린 꽃대가 박힌 옅은 짚빛 꽃받침이 둥글게 펼쳐져 보인다. 잘린 꽃대 몇 개는 둥글고 밝은 단면을 곧장 보는 사람 쪽으로 향하고 있다. 꽃은 이미 시들어 꽃잎이 해졌고, 흐린 황토색과 올리브색, 짚빛으로 칠해졌으며, 주황색은 꽃잎 끝에만 남았다.
반 고흐는 1887년 늦여름이나 가을, 파리 르피크 거리의 테오 집에 살 때 이 그림을 그렸다. 한 해 전 그는 화가 호레이스 만 리븐스에게, 꽃을 색채 연구 연작으로 그리면서 파랑과 주황, 빨강과 초록, 노랑과 보라의 대비를 찾고 있으며 회색의 조화 대신 강렬한 색을 얻고 싶다고 알렸다. 이 그림에서는 꽃들 위로 짙은 파랑과 청록색 붓질이 띠를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주황빛 빨간 짧은 선이 섞여 있으며,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희끄무레한 초록 바탕 위에 선명한 주황색 빗금이 그어져 있다.

헬레네는 《숲의 가장자리》를 사고 몇 달 뒤인 1908년에 이 해바라기 그림을 샀고, 이것이 그녀의 두 번째 반 고흐가 되었다.
같은 여름 반 고흐는 작은 캔버스 두 점에 각각 잘린 해바라기 두 송이를 그렸다. 1887년 말이나 1888년 초 폴 고갱은 자기 그림 한 점을 주고 이 두 점을 모두 받아 가서 침대 위에 걸었다.
3.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델프트의 공장 경영자이자 수집가인 휘고 튀테인 놀테니위스는 1942년 브레머에게서 《감자 먹는 사람들》을 미술관에 팔라는 제안을 받았다. 브레머는 이 그림이 컬렉션에 더없이 중요한 보탬이 되리라고 했고, 미술관은 그에게 7000휠던까지 치를 수 있게 했지만, 튀테인 놀테니위스는 거절했다. 그가 1944년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그림은 헤이그의 화상 헤르만 다우드레츠에게 넘어갔고, 1946년 4월 미술관은 다우드레츠와 교환해 그림을 손에 넣었다. 그 대가로 헬레네가 사 두었던 반 고흐의 생레미 시절 후기작 《산책하는 두 사람과 초승달이 있는 풍경》을 내주고 2500휠던을 더 얹었다. 미술관장 빌리 아우핑은 《감자 먹는 사람들》을 반 고흐의 네덜란드 시절 작품 컬렉션의 정점이라고 불렀다.
오테를로에 있는 것은 암스테르담의 그림에 앞서 그린 큰 유화 습작이다. 1885년 봄 뉘넌에서 반 고흐는 먼저 네 사람이 나오는 작은 유화 스케치를 그렸고(이 스케치는 반 고흐 미술관에 있다), 그다음 완성작과 거의 같은 크기로 이 두 번째 습작을 그렸으며, 그 뒤에야 역시 암스테르담에 있는 최종판을 그렸다. 모델은 더 흐로트판로이 가족이었고, 반 고흐는 이 습작을 그들의 집에서 그렸다. 4월 9일 그는 테오에게, 감자 접시를 둘러싼 농부들을 다시 그리고 있으며 방금 그 집에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낮에 시작했지만 등잔불 아래서 계속 그렸다고 알렸다. 최종 그림은 습작과 기억에 기대어 작업실에서 그렸다.
다섯 사람이 막대에 매단 등잔 아래 식탁에 둘러앉아 있고, 그림 전체가 깊은 초록과 청록, 초록빛 황토색으로 칠해져 있다. 얼굴은 빠른 붓질 몇 번으로만 잡혀 있다. 한가운데에는 작은 인물이 등을 보이고 앉아 밝은 식탁보 앞에서 거의 검은 실루엣이 되었고, 식탁의 나이 든 남자는 펼친 손바닥 위에 잔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 여자는 금속 주전자를 기울여 따르고 있다. 왼쪽 벽에는 둥근 시계가, 오른쪽 위에는 숟가락 두 개와 포크 두 개를 꽂은 걸이가 걸려 있다.
2021년 반 고흐 미술관은 《감자 먹는 사람들》이 만들어진 과정을 다룬 전시를 열고 작은 스케치와 연필 드로잉을 선보였다. 오테를로의 미술관은 자기 습작을 이 전시에 빌려주지 않았다. 《아트 뉴스페이퍼》에 따르면 이 그림은 오테를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고, 관람객들은 그곳에서 이 그림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반 고흐: 보이는 것에서 의미로

4.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1888년 9월 30일 아를의 신문 《라 크로니크 아르티스티크 에 뮈지칼》은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씨가, 전해 들은 바로는 저녁마다 시내의 한 광장에서 가스등 불빛 아래 작업한다고 독자들에게 알렸다. 그 광장은 포룸 광장이었고, 반 고흐는 그 무렵 이미 그곳을 그린 그림을 끝낸 뒤였다. 9월 중순 그는 여동생 빌에게, 밤에 현장에서 바로 그리는 것이 몹시 좋다고 썼다. 예전에는 밤에 드로잉을 하고 그림은 낮에 그 드로잉을 보며 그렸지만, 자기는 곧바로 그리는 편이 낫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검은색 없는 밤, 파랑과 보라와 초록만으로 된 밤이라고 불렀고, 그 속에서 불 밝힌 광장은 옅은 유황빛과 레몬빛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고 했다.
커다란 노란 차양이 왼쪽 위에서 그림 안으로 들어와 가운데보다 조금 오른쪽에서 뾰족한 모서리로 끝나고, 그 아래 카페 벽은 황록색과 주황색으로 빛난다. 편지에서 거대하고 노랗다고 한 등불은 캔버스에서는 차양 아래 주황색 테두리를 두른 작은 다면체로 보인다. 둥근 탁자들 사이에는 길고 흰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서 있다. 오른쪽 절반은 보라색 집들이 늘어선 어두운 파란 거리로 이어지고, 그 끝에 창백한 말 한 마리가 보인다. 지붕 위의 별들은 옅은 빛무리를 두른 둥글고 흰빛 도는 노란 점으로 그려졌고, 몇몇은 가운데가 분홍이나 주황이다. 포석은 황토색, 하늘색, 회청색의 짧은 붓질로 쌓였고, 돌 하나하나를 거의 검은 어두운 호가 두르고 있다.
2025년 가을부터 거의 한 해 동안 이 그림은 자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일본의 전시에 나가 있었다. 그동안 미술관은 오테를로에 포룸 광장을 본뜬 무대 세트를 세웠고, 관람객들은 “빈센트네 테라스에서” 사진을 찍었다.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린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같은 9월 말에, 《별이 빛나는 밤》은 1889년 6월에 나왔고, 그는 생레미를 떠나기 며칠 전 길 위에 뜬 별로 다시 돌아왔다(8번).

5.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다리(랑글루아 다리)》, 1888년
네덜란드 수집가 코르넬리스 호헨데이크의 컬렉션이 1912년 5월 21일 암스테르담에서 경매에 부쳐졌고, 브레머는 그곳에서 크뢸러 부부를 대신해 값을 불렀다. 그날 부부는 그림 15점을 손에 넣었는데, 그 가운데 네 점이 반 고흐였다. 브레머는 《아를의 다리》에 1만 6000휠던 가까이를 치렀는데, 시작가의 다섯 배가 넘는 값이었다. 헬레네는 이 그림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 있고, 가장 수정처럼 맑은 그림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반 고흐는 아를에 온 지 몇 주 되지 않은 1888년 3월 중순에 이 그림을 그렸고, 그 무렵 테오에게 일본에 와 있는 기분이라고 알렸다. 나무로 된 도개교가 그림 한가운데 서 있는데, 긴 들보를 단 노란 틀 두 개가 청록색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다. 다리 바닥은 내려져 있고, 그 위로 말 한 마리가 노란 덮개를 씌운 작은 마차를 끌고 간다. 왼쪽 아래 물가의 나무 발판에서는 하늘색, 분홍, 빨강, 흰색 두건을 쓴 여자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서서 빨래를 짜고 나머지는 물 쪽으로 몸을 숙였으며, 그들 곁의 파란 물 위로 동심원이 퍼져 나간다.
4월 초 반 고흐는 이 캔버스를 테르스테이흐에게 보내려고 골랐다. 테르스테이흐는 헤이그의 화상으로, 반 고흐가 십 대에 구필 화랑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상사였다. 테르스테이흐가 테오에게, 테오 자신이 가장 낫다고 여기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고, 빈센트는 옛 상사에게 자기도 인상주의 화가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이 그림을 위해 안쪽의 평평한 부분은 로열 블루로, 바깥 띠는 금색으로 칠한 액자를 구상했고, 캔버스에 테르스테이흐에게 바치는 헌사를 써 넣었다. 테르스테이흐는 이 그림을 받지 못했다. 헌사는 뒷날 누군가가 긁어냈고, 왼쪽 아래 구석 ‘빈센트’라는 서명 조금 위의 그 자리는 물감이 얇거나 캔버스의 올이 드러날 만큼 닳아 있다.
2026년 미술관이 1984년 이후 처음으로 소장한 반 고흐의 그림 88점을 모두 한자리에 선보였을 때, 앞을 보지 못하는 관람객들을 위해 《아를의 다리》를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부조 복제품으로 만들고 음성 해설도 녹음했다.
6.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반 고흐는 오래전부터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고 싶어 했고, 1888년 6월 21일 테오에게 오랜 바람이 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로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여러 번 모사했는데, 그의 말로는 밀레 다음에 남은 일은 씨 뿌리는 사람을 색채로, 큰 화면에 그리는 것이었다. 그때 아를에서 작업하던 캔버스 때문에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그것을 습작이라고 부르며, 나중에 이것으로 거대한 그림을 만들지 고민했다.
그림은 세 띠로 나뉜다. 노란 하늘, 익은 밀이 자란 좁은 띠, 그리고 화면 높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갈아엎은 밭이다. 거대한 옅은 노란 해가 가운데보다 조금 왼쪽, 바로 지평선 위에 걸려 있고, 해에서 옅은 초록 불티가 섞인 짧은 노란 붓질의 빛살이 하늘 전체로 퍼져 나간다. 캔버스 오른쪽 3분의 1에서 씨 뿌리는 사람이 왼쪽으로, 보는 사람 쪽을 향해 걸어오는데, 한 팔은 옆으로 내던지듯 뻗었고 다른 손은 회색 씨앗 자루에 넣었으며, 발밑에서 긴 파란 그림자가 뻗어 나온다. 밭은 파랑, 보라, 주황, 크림색, 흰색의 두꺼운 붓질로 칠해졌고, 아래쪽 흙덩이들은 거의 부조처럼 도드라진다. 밭의 왼쪽 절반 위로 검은 새 두 마리가 날고, 세 번째 새는 땅에 앉아 있다.
6월 19일 무렵 반 고흐는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이 그림을 설명했는데, 그때 하늘은 해와 거의 같을 만큼 밝은 크롬 옐로였고, 씨 뿌리는 사람의 바지는 흰색이었다. 노랑과 보라의 지나치게 강한 대비에서 눈이 쉴 곳을 주려는 것이었다. 6월 28일 무렵 반 고흐는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칠했고, 그래서 지금 캔버스의 하늘은 황록색, 바지는 파란색이다. 베르나르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그는 여전히 무한에 대한 그리움에 끌린다고 털어놓았고, 씨 뿌리는 사람과 곡식 단을 그 무한의 상징이라고 했다. 한 주 뒤 그는 베르나르에게, 모든 예술가 위에 있는 예술가인 그리스도와 그의 비유들에 대해, 그 씨 뿌리는 사람과 그 수확과 그 무화과나무가 얼마나 훌륭한지 썼다.
2025년 5월 21일 교황 레오 14세는 첫 일반 알현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며 《석양의 씨 뿌리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의 말로는 씨 뿌리는 사람은 한쪽에 비켜서 있고,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해다.


7. 빈센트 반 고흐 《조제프 룰랭의 초상》, 1889년
조제프 룰랭은 아를 역에 딸린 우체국에서 일하며 우편 자루를 싣고 분류했다. 반 고흐는 1888년 8월부터 1889년 봄까지 그를 여섯 번 그렸다. 1888년 12월 말 귀 사건이 일어난 뒤 룰랭은 그를 집에 데려다주고 병원에 입원시켰으며 그의 뒷일을 맡았다. 1889년 1월 21일 룰랭은 마르세유로 전근해 떠났고, 4월 4일 무렵 자신의 48번째 생일에 친구를 찾아왔다. 그때 반 고흐는 테오에게, 룰랭은 자기 아버지뻘이 될 만큼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늙은 병사가 젊은 병사를 대하듯 말없는 진지함과 다정함으로 자신을 대한다고 썼다.
1월 21일 이후에 룰랭이 모델을 섰다는 이야기는 편지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꽃무늬 배경이 있는 마지막 세 초상화를 반 고흐가 앞선 초상화와 기억에 기대어 그렸다고 본다. 미술관은 오테를로의 초상화를 1889년 2~3월 작품으로 보고, 다른 연구자들은 4월에 룰랭이 찾아온 일과 연결한다. 이미 1888년 9월에 반 고흐는 테오에게, 예전에는 후광이 상징하던 그 붙잡기 어려운 영원한 무언가를 지닌 남자와 여자를 그리고 싶다고, 이제 사람들은 광채 자체, 색의 떨림으로 그것을 이루려 한다고 썼다.
룰랭은 정면을 향해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고, 어깨는 캔버스 가장자리 밖으로 넘어간다. 파란 모자에는 주황색 글자로 프랑스어 ‘우편’이 쓰여 있다. 교차하는 빗금으로 칠한 초록 배경에는 벽지처럼 꽃이 흩뿌려져 있는데, 가운데가 검고 흰 빨간 양귀비, 흰 데이지, 파란 수레국화, 탐스러운 흰 장미, 그리고 휘어진 줄기 끝에 아직 피지 않은 양귀비 봉오리 세 개다. 얼굴과 수염은 따뜻한 황토색 하나로 칠해졌고, 턱 오른쪽에서는 수염 한 가닥이 검은 윤곽선에 둘린 채 촘촘한 나선으로 말려 있다.
이 초상화의 첫 소유자로 알려진 사람은 화가 에밀 쉬페네케르였다. 2003년 오테를로 컬렉션 도록의 저자들은, 반스 컬렉션에 있는 유일하게 서명된 룰랭 초상화는 반 고흐가 우편배달부 본인에게 주었고 이 초상화는 그의 아내 오귀스틴에게 주려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8.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년
그림 한가운데에 거의 검은 키 큰 사이프러스가 위쪽 가장자리 너머로 솟으며 화면을 둘로 나눈다. 그 왼쪽 하늘에는 옅은 노랑과 초록 붓질의 동심원으로 된 큰 별이 타오르고 그 아래에 조금 작은 별이 하나 더 있으며, 오른쪽에는 하늘색 붓질의 고리에 둘린 가느다란 주황색 초승달이 떠 있다. 하늘 전체가 별과 달을 중심으로 파란 붓질로 소용돌이친다. 왼쪽 아래에는 황토빛 노란 갈대가 높이 자라 있다. 옅은 회보랏빛 길을 따라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오른쪽 사람은 밝은 날이 달린 괭이인지 곡괭이인지를 어깨에 메고 있고, 그 뒤로 흰빛 도는 회색 말이 끄는, 위가 노란 마차가 오며,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초록 지붕의 낮은 집이 있다.
반 고흐는 1890년 5월 12~15일 무렵 생레미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5월 16일 요양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이라고 부르며, 지어낸 풍경이자 프로방스에서 받은 인상을 모은 결과로 본다. 6월, 이미 오베르에 있던 반 고흐는 고갱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해 그 안에서 이 그림을 설명했지만, 편지를 끝맺지도 부치지도 않았다. 이 초안은 나중에 테오의 미망인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가 그의 서류 사이에서 찾아냈다. “그곳에서 그린 사이프러스와 별도 하나 있는데, 마지막 시도로, 광채 없는 달이 뜬 밤하늘입니다. 가느다란 초승달이 땅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별은 말하자면 과장된 광채를 띠고, 구름이 흘러가는 군청색 하늘 속에 분홍과 초록의 부드러운 광채가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갈대가 자란 길, 주황색 창이 있는 오래된 여관, 노란 마차와 늦은 길을 가는 두 사람을 늘어놓고, 말하자면 무척 낭만적이지만 자기 생각에는 프로방스답기도 하다고 맺었다.
텍사스의 천문학자 도널드 올슨과 러셀 도셔는 1890년 4월 20일 무렵 저녁 생레미 하늘에 가느다란 초승달이 금성, 수성과 나란히 떠 있었다고 계산했다. 캔버스에서는 천체들의 자리가 좌우로 뒤바뀌어 있지만, 두 사람은 반 고흐가 이 하늘을 기억해 두었다고 본다.
그는 이 그림을 프로방스의 다른 추억들과 함께 에칭으로 만들어 고갱에게 보낼 생각이었지만, 에칭은 끝내 만들지 못했다.


9. 빈센트 반 고흐 《슬퍼하는 노인(‘영원의 문턱에서’)》, 1890년
헤이그 양로원에서 연금으로 살던 참전 용사 아드리아뉘스 자위덜란트는 대머리에 구레나룻을 길렀고, 반 고흐의 모델을 마흔 번쯤 섰다. 1882년 11월 반 고흐는 이틀 연달아 그를 그렸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앉은 모습이었다. 이 자세는 한 해 전 에턴에서 다른 노인을 모델로 이미 그린 적이 있었는데, 테오에게 쓴 대로 그는 언젠가 더 잘 그리고 싶어서 그 종이를 간직해 두었다. 헤이그의 드로잉들에는 《기진맥진》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는 그중 한 점으로 석판화를 만들었고, 알려진 일곱 장의 인쇄본 가운데 하나에 영어로 ‘영원의 문턱에서’라는 말을 적어 넣었다. 며칠 뒤 그는 테오에게, 밀레가 믿었던 ‘저 위의 무언가’, 곧 하느님과 영원이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자기 난롯가에 조용히 앉아 있는 노인의 말할 수 없이 뭉클한 표정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석판화로 말하려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덟 해 뒤인 1890년 4월 말, 생레미의 반 고흐는 아홉 주가량 이어진 발작에서 벗어나 테오에게 인물을 그린 옛 드로잉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5월에 그는 이 노인을 유화로 그렸다. 석판화의 제목은 이 그림에도 이어졌고, 미술관은 자체 제목 《슬퍼하는 노인》 뒤 괄호 안에 그 제목을 적는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몸을 반으로 접고 두 주먹을 눈에 누르고 있어서, 초록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은 크림색 대머리 정수리만 보인다. 옅은 하늘색 옷은 짙은 파란 윤곽선 안에 길고 나란한 붓질로 칠해졌고, 의자는 겨자빛 올리브색이며, 닳아 빠진 밝은 구두는 벌어져 놓여 있다. 그의 정강이 바로 곁 난로에서는 작은 불이 타고 있다. 주황색 선 몇 개와 붉은 숯 몇 개인데, 이 그림에서 빨간색으로 칠한 것은 그 숯뿐이다.
미술관은 반 고흐가 의자와 난로를 요양원의 살림에서 가져왔고, 어쩌면 환자 가운데 누군가가 모델을 섰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조상과 이웃들
10. 한스 발둥 그린 《비너스와 아모르》, 1524~1525년
1940년 여름 친위대원 카예탄 뮐만이 미술관장 삼 반 데벤터르를 찾아와 ‘조국 귀환’이라는 명목으로 16세기 독일 그림 세 점을 요구했다. 한스 발둥 그린의 《비너스와 아모르》, 대 루카스 크라나흐의 《꿀을 훔치는 아모르와 비너스》, 그리고 대 바르텔 브루인의 두 폭 패널이었다. 요구의 근거는 이 그림들이 독일에 소중하다는 것이었고, 헤르만 괴링은 여기에 더해 크뢸러 부부가 제1차 세계 대전 뒤에 이 그림들을 헐값에 샀다고 주장했다. 발둥의 그림은 헬레네가 전쟁이 나기 전인 1913년에 브레머의 권유로 산 것이었다. 7월에 제국판무관 자이스잉크바르트가 미술관에 왔고, 독일의 압력 아래 미술관은 세 그림을 60만 휠던에 넘겼다. 이 거래는 연례 보고서에 올리지 않고 ‘비밀 보고서’에만 기록했다. 발둥의 그림은 괴링의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패널은 높고 좁아서 사람 키보다 크고, 그 위에 벌거벗은 비너스가 거의 검은 어두운 바탕 앞에 대략 실물 크기로 서 있다. 그녀는 초록 새틴 천의 양 끝을 잡고 있는데, 한쪽은 허리께로 들어 올린 손에, 다른 쪽은 옆으로 내린 손에 쥐었고, 천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등 뒤로 늘어져 있다. 왼쪽 아래에는 아모르가 크고 옅은 공 위에 앉아 있다. 그는 한 손에 끝이 불타는 화살을 들고 다른 손으로 초록 천을 붙잡았으며, 눈가리개는 이마 위로 밀려 올라가 있고, 한쪽 눈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하나의 교훈으로 풀이한다. 눈가리개를 한 아모르는 진리, 곧 자신이 깔고 앉은 공을 보지 못하며, 만약 보았다면 하느님을 향한 영적인 사랑이 육체의 사랑보다 오래가고 비너스의 아름다움은 덧없다는 것을 알았으리라는 것이다. 반 고흐를 모으던 수집가에게 왜 16세기 독일 거장이 필요했는지는 헬레네도 브레머도 설명하지 않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렇게 받은 돈으로 1946년까지 그림 20점가량을 샀는데, 먼저 마네의 남자 초상과 세잔의 호수로 가는 길을, 그다음 드가, 고갱, 피사로, 코로를 샀다. 그 가운데 두 점은 베를린과 파리의 유대인 수집가들에게서 빼앗은 그림이어서 전쟁이 끝난 뒤 돌려주어야 했다.
1945년 11월 7일 《비너스와 아모르》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 뒤로 이 그림은 전쟁 뒤 되찾은 미술품을 모은 국가 컬렉션에 속해 NK2640이라는 번호를 받았고, 장기 대여 형식으로 오테를로에 있다.

11. 조르주 쇠라 《르 샤위》, 1889~1890년
1922년 헬레네는 나중에 그녀의 미술관장이 되는 삼 반 데벤터르에게 그림 한 점을 변호하는 긴 편지를 썼다. 작은아들은 어머니가 하고많은 그림 가운데 왜 춤 그림을 샀는지 의아해했고, 헬레네의 말로는 처음으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르 샤위》를 보고 나서 춤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전까지 춤은 그녀에게 늘 영혼 없이 팔다리를 휘두르는 것으로만 보였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1922년 2월 파리의 드루오 경매장에서 리하르트 괴츠의 컬렉션을 팔 때 샀다. 괴츠는 1900년부터 파리에 살던 독일 화가이자 수집가였다. 전쟁 중 프랑스는 그의 컬렉션을 독일 국민의 재산으로 압류했고, 1922년 경매에 부쳤다. 헬레네에게 이 경매를 알려 준 사람은 당시 그녀를 위해 큰 미술관을 설계하던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였다. 《르 샤위》는 1922년 금융 위기 전 그녀의 마지막 대형 구매가 되었고, 이 위기로 그 미술관 공사는 멈추었다.
조르주 쇠라는 1889~1890년 겨울에 《르 샤위》를 그려 1890년 봄 앵데팡당전에 내놓았다. 그가 끝마친 마지막 대작으로, 그는 1891년 3월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 네 개가 똑같은 대각선을 이루며 나란히 왼쪽 위로 차올라 간다. 눈을 감은 무용수들의 입꼬리, 짙은 붉은 재킷을 입은 남자의 콧수염, 옷에 달린 리본이 모두 위로 휘어 올라가 있다. 쇠라는 위로 향하는 선이 즐거움을 전한다는 과학자 샤를 앙리의 이론을 따랐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모자를 쓴 남자가 무용수들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다. 모든 것이 작고 서로 떨어진 점으로 칠해졌고, 캔버스 가장자리를 따라 짙은 파란 점으로 된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데, 이 테두리는 위쪽에서 완만한 아치로 휘어진다.
바세나르에 있던 크뢸러 부부의 저택 흐로트 하세브룩에서 《르 샤위》는 화려하게 꾸민 거실의 소파 위에 걸려 있어서, 그 액자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다.


12.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 1914년경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는 바다의 요정 갈라테이아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아키스를 사랑하고, 결국 키클롭스는 바윗덩이로 아키스를 죽인다. 르동은 그보다 앞선 순간, 폴리페모스가 아직 바라보기만 하던 때를 그렸다.
산등성이 위로 머리털 없는 둥근 황토빛 주황색 머리가 솟아오르고, 얼굴 거의 전부를 외눈 하나가 차지한다. 그 눈은 회백색에 어두운 홍채와 검은 동공을 지녔고, 빨간 테가 둘려 있다. 동공이 정확히 한가운데 있어서 키클롭스는 아래를 내려다본다기보다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다. 갈라테이아는 그보다 오른쪽, 화면 높이의 중간쯤 꽃이 핀 비탈에 벌거벗고 누워 있는데, 몸이 비탈과 같은 따뜻한 분홍빛이어서 그 속에 녹아든다. 하늘은 창백하고 초록 기가 도는 회청색이며, 보라색으로 칠한 것은 왼쪽의 바위다. 아래쪽 비탈은 초록, 청록, 빨강, 주황, 노랑, 분홍 얼룩으로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꽃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미술관은 이 시선에서 엿보기와 위협을 읽어 내며, 밝고 낯선 색들이 그 느낌을 한층 키운다고 본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 거인을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줍은 연인으로 여긴다.
르동은 여러 해 동안 검은색, 곧 목탄과 석판화로만 작업했고, 그가 ‘누아르’, 곧 ‘검은 것들’이라고 부른 이 작품들에는 공중에 뜬 눈이 따로 떨어져 자주 나온다. 미술관에 따르면 르동에게 눈은 흔히 독자적인 존재가 되어 인간의 영혼과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뜻한다. 네덜란드에서는 르동이 일찍부터 알려졌고, 브레머는 1920년 무렵 그의 판화 복제본을 펴냈다. 미술관은 《키클롭스》를 화가가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14년 무렵의 작품으로 보고, 다른 도록들에서는 1898년부터 여러 연도가 나온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옅은 황록색 글자로 ‘오딜롱 르동’이라는 서명이 있고, 그보다 조금 왼쪽에는 ‘오딜로…’까지만 읽히는 더 흐린 파란 글씨가 비쳐 보이는데, 먼저 했던 서명으로 보인다.

몬드리안, 그리스, 레제
13. 피트 몬드리안 《흑백 구성 10(부두와 대양)》, 1915년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은 전쟁 전 파리에서 입체주의에서 자라난 격자 그림을 그리다가 1914년 여름 가족을 만나러 네덜란드에 왔고, 그사이 시작된 전쟁 때문에 파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신지학자였고, 미술관은 그의 목표를 수평과 수직이라는 대립하는 것들의 조화와 리듬으로 설명한다. 1914년 그는 바닷가 마을 돔뷔르흐와 스헤버닝언에 살며 바다와 방파제,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렸고, 이 드로잉들에서 1915년 10월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의 전시에 맞추어 완성한 캔버스가 나왔다.
캔버스 거의 전체를 짧은 검은 선들로 된 타원이 차지한다. 선은 가로와 세로뿐이고, 홀로 있거나 더하기 표나 T자, H자 모양으로 겹쳐 있으며, 똑같은 것은 둘도 없다. 미술관의 해석으로는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가로선들은 파도를, 아래 가운데의 세로선 다발은 바다로 뻗어 나간 방파제를 뜻한다. 검은 선들 곁에는 덧칠해 지웠거나 반투명하게 남겨 둔 옅은 회색 선들도 보인다. 타원 안쪽의 흰색은 분홍빛 도는 회색 모서리보다 밝고 차가우며, 왼쪽 아래 구석에는 ‘P. 몬드리안’이라는 서명과 ‘15’라는 연도가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몬드리안이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그린 첫 그림으로 본다.
브레머는 첫 공개 뒤 몇 주 만에 헬레네를 위해 이 그림을 샀다. 전시에서 이 캔버스를 본 화가 테오 반 두스부르흐는, 몬드리안이 수단을 흰 캔버스 위의 흰 물감과 수평선, 수직선으로 줄였는데도 순수한 인상을 주었다고 썼고, 그림에서 받은 느낌을 평온, 영혼의 고요라고 불렀다. 이 전시에서 두 사람은 처음 알게 되었고, 1917년 함께 잡지 《데 스테일》을 펴내기 시작했다.
1915년 12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에서 열린 예술 대회에서 브레머는 이 그림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풀이했다. 화가 오토 반 튀센브룩은 객석에서, 해석하는 사람보다 작가 자신이 더 잘 안다고 반박했다. 몬드리안은 대회에 없었고, 1916년 1월 브레머에게 그의 말에 동의한다고 편지를 썼다. 여름에 브레머는 자신의 잡지에 크리스마스 밤의 매끄럽고 흰 분위기에 관한 글을 실었고, 몬드리안은 그 글을 칭찬했다.

헬레네의 컬렉션 목록에서 이 그림은 네덜란드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라는 뜻의 《케르스트스템밍》으로 올라 있었고, 이 제목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몇 해 뒤까지 공식 제목으로 남았다.
14. 피트 몬드리안 《색채 구성 A》, 1917년
브레머는 1916년 3월부터 앞으로 받을 그림 값을 미리 치르는 셈으로 몬드리안에게 다달이 생활비를 주었고,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크뢸러뮐러 부부의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몬드리안은 그때 화가 마을 라런에 살았고, 그곳에서 헬레네가 같은 방식으로 생활비를 대던 바르트 반 데르 레크를 알게 되었다. 반 데르 레크는 이미 흰 바탕에 순수한 색의 평평한 면을 그리고 있었고, 헤이그 시립미술관의 글에 따르면 몬드리안은 그의 색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영향은 양쪽으로 오갔고, 반 데르 레크는 몬드리안에게서 ‘구성’이라는 말과 추상으로 내딛는 걸음을 받아들였다.
살짝 따뜻한 흰 바탕 위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 25개가량이 흩어져 있고, 색은 황토색, 선명한 군청색, 차분한 진홍빛 분홍 세 가지다. 몇몇은 따로 떨어져 있고 다른 것들은 서로 겹쳐서, 오른쪽 위에서는 빨간 사각형이 파란 사각형의 모서리에, 왼쪽 아래에서는 황토색 사각형이 빨간 사각형 위에 놓여 있다. 그 사이에는 《흑백 구성 10》에서와 같은 짧고 어두운 선이 27개가량 있다. 어떤 선은 빈 흰 바탕에 떠 있고, 어떤 선은 색면의 모서리에 걸쳐 있다. 캔버스 아래쪽 6분의 1은 거의 비어 있다. 흰 바탕은 잔금이 그물처럼 촘촘히 덮고 있지만 색면들은 덜 갈라졌고, 왼쪽 아래에는 머리글자를 짠 모노그램과 ‘17’이 있다.
1917년 5월 몬드리안은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 열린 네덜란드 예술가 협회 전시에 이 그림을 《색채 구성 B》, 《선의 구성》과 함께 내놓았다. 《데 스테일》 창간호가 나오기 몇 달 전이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순수한 신조형주의로 가는 길의 습작이라고 부르는데, 그 뒤 몬드리안은 움직임과 깊이의 느낌을 걷어 내고 빨강, 노랑, 파랑만 남기게 된다.

이 그림의 짝인 《색채 구성 B》는 같은 해에 같은 크기로 그려졌고 같은 서명이 있으며, 역시 오테를로에 있다.
15. 후안 그리스 《기름 램프가 있는 정물》, 1912년
호세 빅토리아노 곤살레스페레스는 1906년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와 피카소의 이웃으로 바토라부아르에 자리를 잡았고, 몇 해 동안 잡지에 풍자 그림을 그려 생계를 꾸렸다. 그가 후안 그리스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0~1911년 무렵이었고, 이 정물을 그린 1912년은 그가 입체주의 화가로 보낸 첫해였다.
램프와 그릇들은 여러 면으로 쪼개졌지만 알아볼 수 있다. 위쪽 거의 한가운데에 높고 좁은 회색 원통, 곧 램프의 유리 등피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램프의 기름통을 여러 높이에서 한꺼번에 본 듯 둥근 단면들이 겹겹이 쌓여 있으며, 오른쪽에는 뚜껑에 작은 꼭지가 달린 커다란 배 모양의 회색 그릇이 있다. 오른쪽 위 구석에서 왼쪽 아래 구석으로, 빛줄기처럼 보이는 옅은 대각선 띠들이 물건들을 가로지른다. 그림자는 짧고 나란한 붓질로 칠해져, 둥근 형태마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옅은 회색에서 거의 검은색으로 짙어진다. 따뜻한 색은 평평한 황토색 면들뿐이고, 아래쪽에는 옅은 하늘색 얼룩이 두 개 있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작은 갈색 글씨로 ‘후안 그리스’라고 쓰여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헬레네는 1913년 이 그림을 샀고, 이것은 그녀가 난생처음 본 입체주의 그림이었다. 그 뒤 그녀는 그리스의 작품을 여러 점 모아 큰 묶음을 이루었다.
헬레네가 1913년부터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이던 헤이그 랑어 포르하우트의 건물에서 가장 큰 방은 반 고흐의 차지였고, 그리스, 오귀스트 에르뱅, 반 데르 레크, 몬드리안 같은 ‘초현대’ 화가들의 그림은 한 층 위에 차츰 걸렸다.
16. 페르낭 레제 《카드놀이》, 1917년
병사 셋이 카드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데, 그들의 몸은 관과 원뿔과 원반으로 짜여 있다. 팔은 한쪽에 날카로운 흰 반사광이 있는, 강철빛과 회청색으로 윤을 낸 원통이고, 손은 납작한 널빤지를 포개 놓은 모양이다. 왼쪽에는 초록 띠를 두른 회색 모자를 쓴 인물이 앉아 있고, 가슴에는 붉고 흰 지그재그 줄무늬와 십자 모양의 작은 훈장이 있다. 가운데에는 파이프를 문 병사가 있고, 오른쪽에서는 어두운 둥근 철모를 쓴 거대한 병사가 줄무늬 팔로 파이프를 얼굴로 가져간다. 한가운데에는 빨간 다이아몬드가 그려진 카드들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고, 탁자는 비스듬히 기운 노란 면으로 바뀌어 그림에서 가장 밝은 곳이 되었다. 미술관은 병사들의 팔이 두들겨 만든 강철관 같고 병사들 자체는 로봇에 더 가깝다고 쓴다.
페르낭 레제는 1914년 8월 2일 동원되었다. 그는 공병으로 참호를 팠고, 나중에는 들것을 나르는 위생병이 되어 아르곤과 베르됭에서 싸웠으며, 전선에서 거친 포장지에 그림을 그렸다. 카드를 치는 병사들의 드로잉은 1916년 베르됭 근처에서 그렸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는 베르됭 근처에서 가스 공격을 당한 뒤 회복하던 중에 이 그림을 그렸다. 레제는 뒷날, 전선에서 햇빛을 받은 75밀리미터 포의 포미를 보고, 맨 금속 위에서 일어나는 빛의 마법에 눈이 멀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1917년 12월 5일 그는 이 그림과 그 드로잉, 습작들을 새 화상 레옹스 로장베르에게 팔았다.
1921년 브레머는 헬레네를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레제의 그림 세 점과 수채화 한 점을 샀다. 헬레네는 몽파르나스에 있는 레제의 작업실을 찾아갔고, 브레머는 그녀가 레제를 지나치게 높이 산다고 여겼지만 그녀는 계속 그의 작품을 샀으며, 1920년대 초에는 《카드놀이》도 사들였다.
그녀가 떠난 뒤의 검증

17. 빈센트 반 고흐 《들꽃과 장미가 있는 정물》, 1886~1887년
크뢸러뮐러 미술관은 2003년 이 정물화를 스스로 반 고흐의 그림 목록에서 지우고, 소장품 도록에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올렸다. 이 그림은 사들일 때부터 의심을 받았다. 1974년 국가는 렘브란트 협회와 베른하르트 왕자 기금의 도움을 받아 에인트호번의 필립스더용 컬렉션에서 이 그림을 사서 미술관에 주었는데, 사람들은 그때 이미 흔치 않은 캔버스 크기, 지나치게 풍성한 꽃, 반 고흐의 발전 과정에 들어맞지 않는 화법, 낯선 서명을 미심쩍어했다.
1998년 엑스선 촬영으로 꽃 밑에서 다른 그림이 드러났다. 서로 손을 맞잡은 반쯤 벗은 레슬링 선수 두 사람이었다. 1886년 1월 말,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안트베르펜에서 반 고흐는 테오에게, 이번 주에 벌거벗은 상반신 둘, 곧 아카데미 원장 샤를 베를라가 잡아 준 자세의 레슬링 선수 두 사람을 그린 큰 그림을 그렸고 무척 마음에 든다고 썼다. 이 편지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때는 증명하지 못했다.
2010~2012년 델프트 공과대학교, 안트베르펜 대학교, 함부르크의 독일 전자 싱크로트론 연구소, 반 고흐 미술관, 그리고 크뢸러뮐러 미술관의 연구자들이 그림을 스캔해 두 층의 화학 원소 분포도를 만들었다. 두 층의 안료는 모두 그 시기 반 고흐의 팔레트와 일치했고, 레슬링 선수들에서는 그의 붓질이 확인되었으며, 흔치 않던 캔버스 크기는 아카데미에서 인물화에 쓰던 표준 규격으로 밝혀졌다. 그는 레슬링 선수들을 천천히 마르는 징크 화이트를 많이 써서 그렸고, 아래층이 굳기 전에 그 위에 리드 화이트로 꽃을 칠했기 때문에 위층에 금이 갔다. 2012년 3월 미술관은 이 정물화를 다시 반 고흐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옅은 초록 꽃병은 가운데보다 조금 오른쪽에 있지만 꽃에 거의 가려져 있다. 왼쪽 위에는 데이지가 하얗게 무리 지어 있고, 가운데에는 빨간 양귀비가 불타듯 피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파란 수레국화와 주황색 꽃송이들이, 아래에는 탐스러운 분홍빛 크림색 장미가 한 줄로 놓여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위쪽 가장자리에 조금 못 미친 자리에 가는 줄기 위의 빨간 양귀비 한 송이가 홀로 서 있다. 오른쪽 위의 ‘빈센트’라는 서명은 흐린 녹슨 황토색으로 쓰여 있어 어두운 배경에 묻힌다.

2025년 12월 미술관은 반대의 경우를 전시에 내놓았다. 헬레네가 반 고흐의 그림으로 알고 샀지만 미술관이 위작자 레온하르트 바커의 솜씨로 보는 《생트마리드라메르의 바다 풍경》이다.

그녀가 보지 못한 정원

18. 오귀스트 로댕 《웅크린 여인》, 1882년 원형
헬레네는 미술관에 조건 하나를 남겼다. 그녀가 죽은 뒤에는 이미 컬렉션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만 컬렉션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40년대 말부터 미술관장을 맡은 브람 하마허르는 이 조건에 조각은 언급조차 없으니 회화에만 해당한다고 판단했고, 1950년 오귀스트 로댕의 청동 조각 세 점을 샀다. 일본 배우 하나코의 가면, 《칼레의 시민》 가운데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를 위한 작은 습작, 그리고 하마허르가 가장 아끼던 이 여인상이었다. 그에게 로댕은 현대 조각의 창시자였고, 그는 로댕의 경우 조각가의 정신이 표면을 다듬는 솜씨 속에 살아 있다고 썼다.
이 인물상은 1882년 무렵 《지옥의 문》을 위해 만들어졌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주제로 한 청동 문으로, 1880년 국가가 파리의 장식 미술관을 위해 로댕에게 주문했다. 그 미술관은 지어지지 않았고, 로댕은 수십 년 동안 이 문에 매달렸다. 문 위 팀파눔에서 이 여인은 작은 크기로 《생각하는 사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다. 오테를로에 있는 것은 그녀를 실물 크기로 키운 판본이다.
벌거벗은 여인이 울퉁불퉁한 청동 바위 위에 쪼그려 앉아 있다. 무릎은 높이 끌어당겨 넓게 벌렸고, 오른발은 바위 꼭대기를 딛고 왼발은 그보다 낮은 앞쪽에 있다. 그녀는 오른쪽 무릎에 뺨을 대고 눈을 내리깔았다. 왼손은 가슴을 누르고, 오른팔은 몸 앞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왼쪽 발목을 잡고 있어서, 온몸이 단단한 세로 덩어리 하나로 뭉쳐 있다. 작가 옥타브 미르보는 자신이 가진 이 인물상의 대리석 판본을 “나의 개구리”라고 불렀다. 청동은 거의 검은 짙은 갈색으로 윤이 나고, 바위의 움푹한 곳에서는 녹청이 배어난다.
1953년 이 조각상은 새로 지은 조각 전시실에 놓였다. 1961년 6월 3일 요 칼스 장관이 스티로폼 벽을 부수고 조각 정원을 열었을 때 조각상은 정원으로 옮겨졌고, 지금 그곳에서 거칠게 다듬은 분홍빛 회색 사암 덩어리 두 개로 된 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
19. 아리스티드 마욜 《공기》, 1939년(1962년 주조)
1938년 툴루즈시는 아리스티드 마욜에게, 복무 중 목숨을 잃은 아에로포스탈 승무원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주문했다. 아에로포스탈은 프랑스에서 남아메리카까지 우편을 실어 나르던 항공 노선이었다. 그보다 조금 전인 1936년 12월, 이 노선의 조종사 장 메르모즈가 남대서양 상공에서 실종되었다. 마욜은 77세였고, 새 인물상을 옛 인물상에서 만들어 냈다. 그는 오래전 만든 세잔 기념비의 누운 여인 석고상을 가져와 잘라 내고 다시 맞추어 고쳤고, 이 방식을 휘묻이에 견주었다. 아직 어미 나무에서 잘라 내지 않은 가지에 뿌리를 내리게 해 새 식물을 얻는 원예 기법이다. 석상은 1939년 바뉠스에서 완성되었다.
말년에 마욜은 그의 모델이었던 디나 비에르니와 함께 큰 석고상을 다시 손보아 옷 주름과 버팀대를 없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석고상으로 인물상 여섯 점이 주조되었고, 오테를로의 것은 1962년 납 합금으로 떴다. 《공기》는 처음에는 잠시 머물 예정으로 정원에 들여왔다가 나중에 미술관이 사들였다. 하마허르는 이 조각을 걸작이라고 부르고 작은 둔덕 위 콘크리트 받침대에 세웠다. 마욜은 헬레네가 살아 있을 때 직접 사들인 작가였으므로 그녀의 조건은 지켜졌다.
여인은 가슴을 보는 사람 쪽으로 향한 채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고, 판석에 닿는 곳은 오른쪽 허벅지뿐이다. 머리와 두 팔, 두 다리는 공중에 떠 있다. 위쪽 팔은 몸 위로 발끝을 향해 뻗었고 손목은 위로 젖혀져 있으며, 위쪽 다리는 들어 올려 곧게 폈고, 아래쪽 다리는 받침에 닿을 듯 말 듯하다. 얼굴은 옆모습이고, 그녀는 자기 몸을 따라 시선을 보낸다. 금속은 은회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배와 허벅지, 뻗은 팔에는 짙은 보랏빛 갈색 얼룩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다.
석조 기념비는 마욜이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고 네 해 뒤인 1948년 툴루즈의 왕의 정원에 세워졌다.

20. 오토 프로인틀리히 《구성》, 1933년(1961년 주조)
1937년 나치가 뮌헨에서 연 《퇴폐 미술》전의 안내 책자 표지에는 오토 프로인틀리히의 석고상 《큰 머리》 사진이 ‘새로운 인간’이라는 설명과 함께 실렸다. 그 머리상은 그 뒤 사라졌다.
프로인틀리히는 1878년 포메른의 슈톨프에서 태어났고, 최초의 추상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1908년부터 오랫동안 파리에 머물렀다. 독일계 유대인이자 좌파였던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의 억류 수용소에 갇혔고, 그 뒤 피레네산맥에 숨어 지냈다. 1943년 2월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된 그는 3월 4일 드랑시 수용소에서 제50호 수송 열차에 실려 떠났고, 1943년 3월 점령된 폴란드에서 살해되었다. 아마도 소비보르였을 것이고, 옛 문헌에서는 마이다네크라고 한다.
그는 1933년 파리에서 《구성》의 석고 원형을 만들었고, 살아서는 이 원형이 청동으로 떠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석고상은 작업실에서 전쟁을 견뎌 냈고, 전쟁이 끝난 뒤 그의 미망인 잔 코스니크클로스가 화가의 친구들과 함께 이 조각을 청동으로 뜨고 싶다던 그의 바람을 이루어 주기로 했다. 주조는 1961년 파리에서 이루어졌고, 조각 정원이 문을 연 같은 해에 미술관이 이 청동을 사들였다. 아마 이 원형으로 뜬 첫 청동일 것이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이 청동은 서로 겹쳐 쌓고 기대 세운 둥근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쪽에서 보면 아래에 물방울 모양의 뾰족한 덩어리, 둥근 기둥, 거의 정사각형인 덩어리가 서 있고, 맨 위의 가느다란 목 위에는 가장 무거운 덩어리가 얹혀 있다. 이 덩어리는 왼쪽으로 튀어나왔다가 부리나 뿔처럼 휜 끝으로 뒤로 굽어 있다. 반대쪽에서 보면 같은 청동이 다르게 짜여 있어서, 집 모양의 큰 덩어리 위에 원뿔이 서 있고 아래에는 기다란 각진 덩어리가 놓여 있다. 덩어리 사이의 틈으로 빛이 든다. 표면 전체가 자갈 같은 작고 납작한 알갱이로 덮여 있고, 햇빛을 받으면 알갱이 하나하나가 은회색으로 반짝인다.
헬레네는 자신이 죽은 뒤에는 이미 컬렉션에 들어와 있는 작가들의 작품만 사도록 허락했다. 브람 하마허르는 이 제한이 조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961년 조각 정원이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미술관은 오토 프로인틀리히가 살해되고 18년 뒤에 주조된 청동 《구성》을 사들였다.

스무 점 다음에
다시 찾는다면 반 고흐의 나머지 그림 78점과 종이 작품 172점부터 보고, 그다음 헬레네가 쇠라와 함께 모은 신인상주의 화가들로 넘어가 폴 시냐크의 《아침 식사》부터 보면 좋다. 컬렉션에는 그녀가 여러 해 동안 생활비를 대 준 바르트 반 데르 레크의 작품도 있고, 그녀가 1919년 경매에서 산 얀 토로프의 드로잉 《세 명의 신부》도 있다. 25헥타르에 이르는 조각 정원에는 200점이 넘는 작품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장 뒤뷔페의 《에나멜 정원》, 이 정원을 위해 만든 마르타 판의 《떠 있는 조각》, 앙투안 부르델의 《큰 페넬로페》가 있다. 나무들 사이에는 헤릿 리트벨트와 알도 반 에이크의 파빌리온도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