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라 미술관은 1809년 밀라노에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소장품의 바탕이 된 것은 새 정권이 북이탈리아 곳곳에서 폐쇄한 성당과 수도원의 그림들이었다. 그래서 브레라에 있는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처음부터 미술관에 걸릴 생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제단화의 일부, 신심회가 주문한 거대한 캔버스, 한때 벽과 한 몸이었던 프레스코가 그렇다.
이곳의 작품은 거의 하나하나가 언제 자리를 옮겼는지, 언제 처지가 바뀌었는지 그 순간을 짚어 낼 수 있다. 어떤 그림은 수도원이 문을 닫은 뒤 옮겨 왔고, 어떤 그림은 맞바꾸거나 사들이거나 유증으로 받았다. 프레스코는 벽에서 떼어 냈고, 다폭 제단화는 낱낱의 패널로 해체했으며, 때로는 미술관이 나중에 그것을 다시 짜 맞추려 하기도 했다.
우리는 브레라 궁 안뜰에 선 청동 나폴레옹에서 시작해, 길 건너 치테리오 궁에 걸린 움베르토 보초니의 그림으로 끝낸다.
나폴레옹의 미술관

브레라로 처음 실려 온 그림들은 폐지된 성당과 수도원, 신심회에서 나왔다. 그 그림들은 거의 모두 특정한 제단이나 경당, 회의실을 위해 그려졌다.
1. 안토니오 카노바 《평화를 가져오는 마르스로 분한 나폴레옹》, 1807~1811년
1810년 10월 퐁텐블로에서 카노바는 황제를 벌거벗은 모습으로 보여 주어도 되는지를 두고 나폴레옹과 논쟁했다. 조각가가 1803년부터 1806년까지 매달렸던 대리석상은 그때 배에 실려 파리로 가는 중이었고, 카노바는 이 대화를 나중에 손수 기록해 두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프랑스식 바지를 입혀서는 하느님이라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의 언어가 시구이듯 조각가의 언어는 벗은 몸과 알맞게 걸친 천이며, 조각에 입힌 오늘날의 옷은 길거리 말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밀라노에 둘 청동 복제본은 1807년 봄, 로마의 카노바 작업실에서 대리석상을 본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가 주문했다. 조각상은 로마에서 프란체스코 리게티와 루이지 리게티 부자가 산탄젤로 성의 대포를 녹인 금속으로 주조했다. 첫 주조는 실패했고, 두 번째 주조를 1811년까지 마쳐 1812년에 청동상이 밀라노에 도착했다. 원로원 안뜰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조각상은 아카데미의 지하 창고로 치워졌다. 1857년 밀라노를 찾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국비로 시립 공원에 세우라고 명했으나, 이 명령은 1859년 전쟁이 날 때까지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1859년 8월 14일, 나폴레옹 3세가 밀라노에 입성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롬바르디아의 애국자들이 이 조각상을 브레라 궁 안뜰에 세웠다.
몸은 정면을 향하지만 머리는 홱 돌아가 앞으로 뻗은 오른손 쪽으로 숙여져 있고, 그 손에는 날개 달린 작은 승리의 여신을 얹은 구체가 놓여 있다. 나폴레옹은 왼손으로 긴 지팡이를 높이 들었고, 망토는 독수리 장식 걸쇠로 어깨에 여몄으며, 오른발 뒤 나무 그루터기에는 칼집에 든 칼이 칼띠와 함께 걸려 있다. 이렇게 거두어 둔 무기 때문에 이 마르스를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고 부른다. 2013~2014년 복원 때 조각상의 무게를 달아 보니 예상보다 무거운 3톤 남짓이었는데, 로마 주조소의 주형용 흙이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상은 1978년 구체 위에서 도난당해 끝내 찾지 못했고, 지금의 작은 조각상은 1980년대 초에 사진을 보고 새로 만든 것이다.

2. 라파엘로 《성모의 결혼》, 1504년
1798년 1월 29일, 움브리아의 소도시 치타디카스텔로 당국은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주세페 레키 장군에게 산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던 라파엘로의 제단화를 넘겨주었다. 그것이 자발적이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2022년에 공개된 레키 가문의 편지들은 이 일을 시 당국의 선물로 묘사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은 도시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본다. 레키는 그림을 브레시아로 가져갔다가 밀라노의 자코모 산나차리 델라 리파 백작에게 팔았고, 백작은 1804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밀라노의 큰 병원인 오스페달레 마조레에 남겼다. 1806년 부왕 정부는 병원에서 이 그림을 사서 아카데미에 넘겼다.
그림을 주문한 것은 알비치니 가문으로, 가문의 성 요셉 경당에 걸 그림이었다. 그래서 요셉이 앞쪽에 크게 나와 있다. 라파엘로는 그때 21세였고, 스승 페루지노가 페루자 대성당을 위해 그린 《성모의 결혼》을 본보기로 삼았다. 라파엘로는 신전을 뒤로 물리고, 신전의 둥근 평면을 따라 인물들을 활 모양으로 늘어세웠으며, 인물들과 건물 사이에 텅 빈 광장을 넓게 남겼다.

대사제가 마리아와 요셉의 손목을 잡고 있고, 요셉은 마리아에게 반지를 끼워 주는데, 그 반지가 그림의 정중앙, 다각형 신전의 문 바로 아래에 온다. 문은 열려 있어 건물 너머 반대편 하늘이 보이고, 포석의 선은 모두 이 문으로 모인다. 아케이드 위 프리즈에는 라틴어로 ‘라파엘 우르비나스’라는 서명이 있고, 연도는 그 아래 아치 양쪽에 나뉘어 왼쪽에 로마 숫자 M, 오른쪽에 DIIII로 적혀 있다. 요셉의 손에는 꽃이 핀 지팡이가 들려 있는데, 그가 신랑으로 뽑혔다는 표시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진홍색 긴 양말을 신은 뽑히지 못한 구혼자가 꽃이 피지 않은 자기 지팡이를 무릎에 대고 부러뜨린다.
1958년 6월, 화가 눈치오 굴리엘미는 망치로 이중 보호 유리를 깨고 송곳으로 패널을 두 번 찔렀다. 한 번은 마리아의 팔꿈치 옆을, 한 번은 신전 계단 한가운데를 찔렀고, 그러고는 “이탈리아 혁명 만세, 성직자 정부 타도!”라고 쓴 전단을 패널에 붙였다. 충격은 대부분 유리가 받아 냈고, 굴리엘미는 볼테라의 정신병원에 1년 가까이 갇혀 있었다.

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브레라의 성모》, 1472~1474년
성모의 머리 위에 가느다란 사슬에 매달린 흰 알이 걸려 있다. 사슬은 거대한 조가비 모양으로 만든 앱스의 반구형 천장 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알은 그림의 세로 중심축 위에 정확히 걸려 있으며 회색 돌을 배경으로 작아 보인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밀러드 마이스는 교회에 타조 알을 매달아 두던 관습을 근거로 이것을 타조 알로 보았고, 성모가 동정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일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해석했다. 타조는 우르비노의 영주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표장이기도 해서, 미술관은 설명문에서 기적 같은 모성과 주문자의 문장이라는 두 뜻을 함께 읽는다.
페데리코 자신은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다. 판금 갑옷을 빈틈없이 갖춰 입었고, 늘 그렇게 그려졌듯 왼쪽 옆얼굴을 보이는데, 마상 창시합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투구와 판금 장갑, 지휘봉은 그의 앞 바닥에 놓여 있다. 연구자들은 기도하려고 모은 두 손을 우르비노에서 일하던 다른 화가가 고쳐 그렸다고 보는데, 스페인 사람 페드로 베루게테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페데리코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아들 귀도발도를 낳고 반년 뒤인 1472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미술관은 성모의 무릎에서 잠든 아기 예수를 죽음의 예고로, 그림 전체를 죽은 이를 기리는 그림으로 본다.
피에로는 페데리코를 위해 이 그림을 패널에 템페라로 그렸다. 아마 우르비노 근처의 산도나토 델리 오세르반티 성당을 위한 그림이었을 텐데, 공작은 처음에 그곳에 묻혔다. 나중에 이 패널은 산베르나르디노 성당의 주제단에 놓였다. 그가 죽은 뒤 1482~1491년에 그의 무덤 위에 지은 성당이다. 언젠가 패널의 양옆과 아랫부분이 잘려 나갔는데, 그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잘린 흔적은 궁륭과 코니스가 중간에서 뚝 끊기는 위쪽 두 모서리와, 바닥의 갑옷에 거의 닿을 듯 지나가는 아래 가장자리에서 보인다. 1811년 수도원들이 폐지된 뒤 이 패널은 산베르나르디노의 제단에서 내려져 브레라로 옮겨졌다.

4. 스포르차 제단화의 대가(조반니 안젤로 미로폴리) 《스포르차 제단화》, 1494~1495년
‘일 모로’라는 별명으로 불린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왼쪽에 엄격한 옆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 소매가 아주 넓은 하늘색 다마스크 옷을 입고 무거운 금사슬을 걸쳤으며, 밀라노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우스가 흰 장갑을 낀 손을 그의 어깨에 얹는다. 미술관은 이 몸짓을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 제단화는 1494년 성벽 밖에 있던 산탐브로조 아드 네무스 성당, 곧 같은 성 암브로시우스에게 봉헌된 성당을 위해 그려졌다. 그해 10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 공작이 죽자, 루도비코는 그의 어린 아들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막시밀리안 황제에게서 자신을 공작으로 인정받으려 애썼다. 미술관은 이 제단화를 정치 선전 작전이라고 부르며, 여기서는 도시의 수호성인이 몸소 새 통치자를 성모에게 소개한다.
오른쪽에는 루도비코의 아내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역시 옆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 머리카락은 귀에 매끈하게 붙였고, 이마에는 펜던트가 달린 가느다란 띠를 둘렀으며, 끈을 감아 땋은 긴 머리가 등 뒤로 늘어져 있고, 드레스에는 금색과 검은색과 파란색의 넓은 세로 줄무늬가 나 있다. 아버지 뒤에는 네 살쯤 된 사내아이가 무릎을 꿇고 있고, 어머니 뒤에는 흰 강보에 싸인 아기가 있는데, 둘 다 어른들 곁에서 아주 작아 보인다. 이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미술관 안에서도 답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소장품 카드는 루도비코의 혼외 아들 체사레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교육 자료는 베아트리체가 낳은 적자들을 든다.
화가의 이름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아 이 그림을 따서 ‘스포르차 제단화의 대가’라고 불렀는데, 브레라의 소장품 목록에는 조반니 안젤로 미로폴리라는 이름이 올라 있다. 산탐브로조 아드 네무스의 수도원은 1798년에 폐지되었고, 제단화는 나폴레옹 시대의 폐지 조치 때 거두어들인 다른 성당 그림들과 함께 브레라로 들어왔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루도비코가 입은 하늘색 옷감의 무늬는 그의 표장인 다육식물 셈페르비붐과 ‘때가 되면’이라는 뜻의 독일어 표어 ‘미트 차이트’를 되풀이한 것이다.
5.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 1504~1507년
기린 한 마리가 둥근 지붕을 얹은 신전 앞의 거대한 광장을 가로지르고, 왼쪽 가장자리에는 낙타 한 마리가 서 있으며, 오른쪽 그늘에는 또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 캔버스는 높이보다 너비가 훨씬 길고, 그 아래쪽 3분의 1을 군중이 모두 차지한다. 왼쪽에는 검은 모자에 어두운 색이나 진홍색 망토를 걸친 베네치아 사람들이 빽빽한 벽처럼 서 있는데, 이 그림을 주문한 신심회의 회원들이다. 가운데에는 머리부터 흰 베일을 뒤집어쓴 여인들이 좁은 쐐기 모양으로 모여 앉아 있고, 이곳이 그림 아랫부분에서 가장 밝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흰 터번과 높은 붉은 모자를 쓴 남자들이 있다. 성 마르코는 작은 단 위에서 설교하고, 그 뒤의 신전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을 닮았다.
젠틸레 벨리니는 이집트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는 1486년에 나온 브라이덴바흐의 성지 순례기에 에르하르트 로이비히가 새긴 판화와, 자신이 동방에서 직접 본 것들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1479~1480년 베네치아는 술탄 메흐메드 2세의 요청으로 그를 콘스탄티노플에 보냈고, 술탄은 그에게 금사슬을 선물했다. 미술관 오디오 가이드는 앞쪽의 신심회 회원들 사이에서 붉은 옷을 입고 목에 바로 그 금사슬을 건 인물을 젠틸레 자신으로 가리킨다.
그림을 주문한 곳은 베네치아의 주요 신심회 가운데 하나인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였다. 1485년 화재로 예전 장식이 모두 타 버린 뒤, 임원들이 모이는 방에 걸 그림이었다. 젠틸레는 이 신심회의 회원이었고, 1504년 스쿠올라는 새 그림을 그리겠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폴레옹 치하에서 신심회가 폐지된 뒤 1809년 이 캔버스는 같은 방에 있던 조반니 만수에티의 《성 마르코의 아니아누스 세례》와 함께 브레라로 옮겨졌고, 연작의 나머지 그림들은 베네치아에 남았다.
젠틸레는 이 일을 끝내지 못했다. 1507년 2월 19일, 이미 병석에 있던 그는 유언장을 써서 캔버스를 마저 그리는 일을 형제 조반니에게 맡겼고, 미술관은 왼쪽의 신심회 회원 초상들을 조반니의 솜씨로 본다. 나흘 뒤 젠틸레는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의 대가로 아버지 야코포의 소묘집을 조반니에게 남겼다.


6. 야코포 틴토레토 《성 마르코 시신의 발견》, 1562~1566년
라벤나 출신 의사로 같은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 마르코의 수장이던 톰마소 랑고네는 1562년 6월 21일, 성 마르코의 기적을 다룬 그림 세 점을 자기 돈으로 주문하게 해 달라고 회원들에게 청해 허락을 받았다. 틴토레토는 세 점 모두에 랑고네를 그려 넣었다. 여기서 그는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있다. 흰 수염에 금실로 짠 묵직한 옷을 입었고, 그림 속에서 신분 높은 동시대인의 차림을 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 주문자가 너무 눈에 띄는 데 질린 회원들이 ‘라벤나에서 온 사람’을 지우라며 캔버스를 화가에게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흔히 전해진다. 정말 그랬다 해도 캔버스는 고친 데 없이 그대로 스쿠올라로 돌아왔다.
궁륭 천장을 인 긴 방이 대각선으로 깊숙이 뻗어 있다. 오른쪽에서는 남자들이 벽에 난 무덤을 열고 벌거벗은 시신을 머리부터 거꾸로 사다리로 내리고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성 마르코 자신이 창백한 얼굴로 누구보다 크게 서서 위엄 있게 팔을 쳐들고, 그의 발치 양탄자 위에는 그 자신의 시신이 발을 보는 사람 쪽으로 두고 누워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이 바닥에서 몸부림치고, 그 위로 가느다란 잿빛 연기가 피어오른다. 악령이 연기가 되어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림의 전통적인 제목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미술관은 역사가 아우구스토 젠틸리의 해석을 따른다. 그에 따르면 이 그림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서 마르코가 행한 기적들, 곧 병을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고 악령을 쫓아낸 일을 보여 준다.
스쿠올라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폐지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미술 행정을 맡고 있던 화가 안드레아 아피아니가 이 캔버스를 밀라노의 새 미술관에 걸 그림으로 골랐고, 그림은 1811년 7월 30일 밀라노에 도착했지만 전시되지는 않았다. 1847년 밀라노 산마르코 성당의 주임 사제가 이 그림을 맡아 두겠다고 청하자, 아카데미 위원회는 “드문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림이 너무 크고 “건축 배경이 흥미롭지 않다”고 보아 그림을 내주었다. 랑고네의 다른 두 캔버스는 베네치아에 남았다가 1920년에야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어갔다. 1886년 브레라 관장 주세페 베르티니는 취임 후 첫 결정 가운데 하나로 《성 마르코 시신의 발견》을 미술관에 되돌려 놓으며 이 그림을 “비극적 힘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7. 조반니 벨리니 《피에타》, 1460~1470년경
아래쪽 대리석 난간 앞면에 작은 종이쪽지가 돌에 붙어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고, 거기에 라틴어 시 두 줄이 적혀 있다. 벨리니는 로마 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시구를 고쳐 그 안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 글귀의 뜻은 대략, 이 장면 앞에서 보는 이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벨리니의 그림마저 울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것이다.
난간 너머로 세 인물이 허리 위까지 보인다. 죽은 그리스도가 가운데 서 있고 양쪽에서 그를 부축하며, 가시관을 쓴 머리는 어머니의 얼굴 쪽으로 떨어져 있다. 마리아는 뺨을 그의 뺨에 대고 두 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가슴께에 붙들고 있어서, 못 자국이 그림 한가운데에 온다. 오른쪽의 요한은 얼굴을 돌리고 있는데, 입은 벌어졌고 눈은 붉다. 그리스도의 왼손은 난간 위에 놓여 있고, 못 자국이 난 그 손의 손가락들이 돌 가장자리 너머 보는 사람 쪽으로 늘어져 있다. 하늘은 차갑고 옅은 파란빛이며 길게 늘어진 구름이 떠 있고, 왼쪽의 작은 풍경 속에서는 물이 마른 그루터기를 휘감으며 소용돌이친다.
벨리니의 누이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아내였고, 그리스도의 몸을 딱딱하고 거의 돌처럼 그린 선은 흔히 만테냐의 영향으로 설명된다.
연구자들은 《피에타》의 주문자도, 그림이 놓일 자리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 그림이 처음 알려진 것은 볼로냐의 삼피에리 가문 소장품에서였다. 1811년 삼피에리 가문이 소장품을 팔았고, 같은 해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가 거기서 나온 《피에타》를 브레라에 기증했다.

해체하고, 떼어 내고, 다시 짜 맞추다

브레라에 들어온 제단화는 해체되는 일이 많았다. 다폭 제단화는 낱낱의 그림으로 나누었고, 필요 없는 패널은 다른 화파의 작품과 맞바꾸었으며, 프레스코는 벽에서 떼어 새 바탕으로 옮겼다.
8.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성인들과 함께한 성모의 대관》(발레 로미타 다폭 제단화), 1406~1410년경
발레 로미타라고 불리는 파브리아노 근교의 엄수파 프란치스코회 수도처 산타 마리아 디 발디사소는 1810년 6월 4일에 폐지되었고, 재산 목록은 나폴레옹 정부의 관리 카를로 로세이가 작성했다. 그는 제단화 윗단의 작은 패널 네 점을 자기 손에 두었고, 이 패널들은 거의 한 세기 동안 그의 후손들이 간직했다. 1811년 9월 24일 브레라에는 큰 패널 세 점, 곧 《성모의 대관》과 성인을 두 명씩 그린 패널 두 점이 들어왔다. 미술관은 두 성인을 그린 패널을 톱으로 켜서 성인마다 따로 액자에 넣어 걸었고, 그리하여 패널 세 점이 그림 다섯 점이 되었다. 1901년 10월 브레라는 관장 코라도 리치의 권유로 로세이의 상속인들에게서 작은 장면 네 점을 샀고, 1925년에는 모든 부분을 새 바탕에 보강해 새로 만든 금박 신고딕 양식 액자에 다시 짜 맞추었다.
이 고장 출신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는 베네치아에 살며 일하던 시절에 이 제단화를 그렸다. 주문에 관한 문서는 남아 있지 않고, 대부분의 연구자는 파브리아노의 영주 키아벨로 키아벨리를 주문자로 본다. 그는 1405년 버려진 수도처를 사들여 가문의 묘소를 꾸미려 했다.

붉은 망토를 두른 그리스도가 깊이 숙인 마리아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로는 붉은 세라핌에 둘러싸인 성부가, 두 사람 사이에는 비둘기가 있다. 그리스도와 마리아 아래에서는 작은 천사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그보다 더 아래로는 금빛 별이 촘촘히 박힌 짙은 파란 호가 지나가, 대관은 별이 뜬 하늘보다 높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금빛 바탕에는 가느다란 빛살이 긁어 새겨져 있고, 후광에는 꽃무늬가 타각으로 찍혀 있다. 아랫단의 히에로니무스,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마리아 막달레나는 조그만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따로 그린 어두운 풀밭 위에 서 있다.
《성모의 대관》 위 액자의 박공은 조각 장식만으로 채워져 있다. 이 자리에는 사라진 맨 윗단 패널이 있었는데, 문서상의 증거 없이 간접적인 정황만으로 젠틸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이 자리와 연결하는 견해가 있다. 브레라는 1994년 런던 미술 시장에서 이 그림을 사서 별개의 작품으로 소장하고 있다.

9. 카를로 크리벨리 《촛불의 성모》, 1490년경
왼쪽 가장자리, 옥좌의 계단 위에 불 붙이지 않은 가느다란 초가 촛농 한 방울에 붙어 서 있다. 이 그림을 ‘마돈나 델라 칸델레타’, 곧 작은 초의 성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초 때문이며, 미술관의 설명문은 이 초를 그려진 세계의 문턱에 보는 사람이 몸소 놓고 간 봉헌물로 묘사한다. 그 위 대리석 옥좌에는 관을 쓴 성모가 큼직한 금색 무늬로 덮인 짙은 파란 망토를 입고 앉아 아기 예수에게 배를 내민다. 위쪽에는 잎과 배, 사과, 오이, 체리로 엮은 묵직한 꽃줄이 걸려 있는데, 열매들이 그림 밖으로 늘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다. 맨 아래 계단에는 백합과 장미를 꽂은 어두운 꽃병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체리 몇 알과 장미 한 송이가 있다. 아래 한가운데의 작은 종이쪽지에는 서명이 있는데, 크리벨리는 여기서 자신을 기사라고 부른다. 1490년 카푸아 공 페르디난도가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고, 서명 속의 이 말을 근거로 그림의 연대를 정한다.
베네치아 태생인 크리벨리는 1457년 유부녀와 정을 통한 죄로 베네치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 뒤로 베네치아를 영영 떠났다. 그는 달마티아에서, 이어 마르케 지방에서 일했고, 1480년대 초부터는 카메리노에 살았다. 카메리노 대성당의 주제단을 위해 그는 2단으로 된 큰 다폭 제단화를 그렸지만, 이미 1548년에 사제석을 고치던 주교가 이 제단화를 제단에서 치웠을 가능성이 크다. 1799년 지진으로 대성당이 무너지자 다폭 제단화의 남은 부분은 산도메니코 성당으로 옮겨졌다. 1811년 9월 24일 나폴레옹의 위원회는 크리벨리의 패널 13점을 브레라로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12점이 카메리노에서 나온 것이었다.
1820년부터 미술관은 이 패널들을 각각 독립된 그림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 수가 너무 많다고 판단했다. 브레라가 직접 쓴 2009년 전시 설명문에 따르면, 미술관은 이 패널들을 수집용 카드처럼 내주고 소장품에 모자라던 화파의 그림을 받아 왔다. 몇십 년 뒤에는 성모 곁에 있던 성 안소비노와 성 히에로니무스의 패널 차례가 왔고, 이 패널은 크리벨리의 작품이 한 점도 없던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베드로와 바오로를 그린 다른 쪽 옆 패널은 무너진 대성당 잔해 밑에서 따로 발견되었고, 이것도 베네치아로 갔다. 그렇게 해서 브레라에는 다폭 제단화의 가운데 패널 하나만 남았다.
2026년 4월 카메리노시는 1811년에 실려 간 크리벨리의 패널 여덟 점을 모두 돌려 달라고 이탈리아 문화부에 공식 요청했다. 그 가운데 다섯 점은 브레라에, 나머지는 베네치아와 베를린에 있다. 베를린에 한 점이 가 있는 것은 19세기에 브레라가 스스로 그것을 맞바꾸어 내보냈기 때문이다.


10. 페테르 파울 루벤스 《최후의 만찬》, 1631~1632년경
1812년 루브르 관장 비방 드농은 브레라에 이탈리아 그림 다섯 점을 북유럽 그림 다섯 점과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반대했지만,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 거래를 승인했다. 루브르로 간 그림 가운데에는 카르파초의 《성 스테파노의 설교》, 그리고 브레라가 얼마 전 베네치아의 한 신심회와 한 성당에서 가져온 모레토의 패널 두 점이 있었다.
루벤스는 메헬렌의 성 롬바우트 대성당 안 성체 경당 제단을 위해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그림은 이 경당 아래에 묻힌 아버지를 기리려던 카트린 레스퀴예가 주문했다. 1794년 프랑스 혁명 정부의 위원들이 이 그림을 메헬렌에서 루브르로 가져갔다. 프레델라의 두 패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리스도》와 《세족식》은 1803년 디종의 지방 미술관으로 보내졌는데, 교환 때 사람들이 이 두 점을 잊어버린 것으로 짐작되며, 그래서 두 그림은 그대로 디종에 남았다.
그리스도는 붉은 옷을 입고 식탁에 앉아 빵을 축복하며 사도들 너머 위쪽을 올려다보고, 그 곁에서 촛불이 타고 있다. 오른쪽 앞에 앉은 유다는 가장 크게 그려진 인물로, 파란 튜닉에 커다란 황토빛 노란 망토를 걸쳤다. 그는 손을 입가에 대고 보는 사람 쪽으로 곧장 몸을 돌리는데, 모든 인물 가운데 우리를 바라보는 것은 그 하나뿐이다. 식탁 아래, 그의 발 가까이에서는 개 한 마리가 뼈를 갉아 먹고 있다.
드농에게서 받은 그림 다섯 점 가운데 두 점은 알려진 것과 다른 그림으로 드러났다.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의 상수시 궁전에서 루벤스의 작품으로 알고 가져간 《이삭의 희생》은 브레라에서 야코프 요르단스의 그림으로 판명되었고,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보내온 《젊은 여인의 초상》은 그의 추종자의 작품으로 본다.
11. 베르나르디노 루이니 《목욕하는 님프들》(빌라 펠루카 프레스코), 1514년경
몬차 근교의 빌라 펠루카는 나폴레옹 시대에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가 머물던 곳으로, 1816년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국고로 넘어갔고, 곧 개인에게 팔기로 결정되었다. 브레라 아카데미의 상설 회화 위원회는 매각에 앞서 “회화관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벽의 프레스코를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1821~1822년 복원가 스테파노 바레치가 프레스코를 떼어 냈고, 목욕 장면은 1822년 6월 27일 브레라에 도착했다. 프레스코는 아직 국고 소유이던 건물에서 떼어 낸 것이어서 따로 값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브레라는 그전에도, 1808년부터 성당 벽에서 프레스코를 떼어 왔지만, 교외 빌라의 세속 연작 전체가 미술관에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같은 빌라의 다른 조각들은 나중에 저마다 다른 경로로 루브르, 샹티이, 런던의 월리스 컬렉션에 들어갔다.
빌라의 벽화는 1506년 무렵 빌라를 물려받은 밀라노 귀족 제롤라모 라비아를 위해 베르나르디노 루이니가 그렸다. 신화 장면과 성화가 여러 방과 경당에 걸쳐 이어졌다. 프레스코의 연대는 1509년에서 1520년대 초까지 다양하게 추정되며, 어느 연대를 택하느냐에 따라 브라만티노 주변에서 활동하던 젊은 루이니인지, 이미 원숙한 대가인지가 갈린다. 브레라의 소장품 목록에는 ‘1514년경’으로 적혀 있다.
개울에서 처녀 여덟 명이 목욕하고 있다. 한 명은 왼쪽 물가에서 팔을 베고 잠들어 있고, 또 한 명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물속에 서서 흰 속옷을 머리 위로 벗어 올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에서는 붉은빛 도는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가 물 위로 머리와 어깨를 내밀고 있는데,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그녀 하나뿐이다. 미술관은 이 장면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디아나와 님프들, 칼리스토일 수 있다고 본다. 표면 전체에는 프레스코를 새 바탕으로 옮길 때 생긴 잔금이 그물처럼 퍼져 있다. 나중에 피닌 브람빌라 바르칠론이 복원할 때는 19세기의 나무 바탕을 일부러 남겨, 프레스코를 벽에서 어떻게 떼어 냈는지 보여 주는 증거로 삼았다.


12. 도나토 브라만테 《전사들》(파니가롤라 저택 프레스코), 1486~1488년경
시인이자 인문주의자로 루도비코 일 모로의 궁정 고문이던 가스파레 암브로조 비스콘티는 1486년 산탐브로조 대성당 근처, 지금의 란초네 거리에 집을 한 채 샀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그 집에 머물렀는데, 1487년 그곳에서 이루어진 거래의 증인으로 이름이 올라 있고, 두 친구는 소네트를 주고받았다. 브라만테는 한 방의 벽에 벽감을 그려 넣고, 그 안에 사람 키보다 큰 무장한 남자들을 그렸다. 16세기에 이 방을 온전한 모습으로 본 화가이자 저술가 조반 파올로 로마초는, 그들이 당대에 가장 이름난 전사들이었고 저마다 곁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썼다. 미술관은 그들이 걸친 갑옷은 고대의 것인데 얼굴은 순하거나 우스꽝스럽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 아이러니를 의도된 것으로 본다. 이 집에 이름을 준 파니가롤라라는 성은 1548년에야 이 집에 붙었다.
다른 방의 문 위에는 브라만테가 커다란 지구의 양쪽에 두 철학자를 그렸다. 왼쪽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울고 있고 뺨에 눈물 한 방울이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의 데모크리토스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으로 지구의를 가리킨다. 우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레오나르도를, 웃는 데모크리토스는 브라만테 자신을 그린 것이라는 추정도 있었다. 《미늘창을 든 남자》라고 불리는 인물은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가슴 위까지의 조각만 남았다. 곱슬곱슬한 금빛 머리에 입을 살짝 벌린 젊은이이고, 미늘창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1901년 안노니 형제는 건축가 루카 벨트라미의 지휘 아래 스트라포 기법으로 벽화를 떼어 냈다. 물감층에 천을 붙여 벽에서 뜯어낸 뒤 캔버스로 옮기는 방법이다. 1901~1902년 브레라 관장 코라도 리치가 이 벽화들을 미술관을 위해 사들였다. 떼어 내는 과정에서 서 있는 여덟 번째 인물은 19세기에 덧그린 것으로 판단되어 버려졌다.
13. 모키롤로의 대가, 모키롤로 포로 가문 기도실의 프레스코, 1360~1370년경
벽에서 떼어 낸 프레스코를 브레라 안에서 다시 짜 맞춘 14세기의 작은 궁륭 앱스에는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궁륭에는 끝이 뾰족한 만돌라 안의 그리스도가 축복하며 펼친 책을 들고 있고, 그 둘레 짙푸른 바탕에 네 복음사가의 상징이 있다. 뒷벽 아치 아래에는 《십자가 처형》이 있고, 십자가 양옆 벽에는 좁고 뾰족한 창 두 개가 뚫려 있다. 기도실 원래 모습 그대로 만든 진짜 창이어서 빛이 제자리에서처럼 들어온다. 궁륭 꼭대기에서 파란 바탕을 가로질러 긴 균열이 아래로 뻗어 있고, 옮길 때 생긴 이음매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옆벽에는 옥좌에 앉은 성 암브로시우스가 두 이단자를 채찍질하고, 그 곁에 《성녀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이 있으며, 맞은편에는 주문자 가족이 빽빽이 서서 성모에게 자기들의 경당을 바친다.

이 벽화는 밀라노 북쪽 브리안차 지방 모키롤로에 있는 포로 가문의 집들에 딸린 기도실의 사제석을 장식하고 있었다. 포로 가문은 비스콘티 가문을 섬겼고, 브레라는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고문 스테파노 포로를, 지역 역사가들은 란프랑코 포로를 주문자로 꼽는다. 미술관은 화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모키롤로의 대가’라고 부른다. 미술사학자 미클로시 보스코비츠는 그를 베르가모 출신 화가 페키노 다 노바로 보자고 제안했지만, 브레라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귀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습기가 건물과 그림을 함께 망가뜨리고 있었다. 1949년 저택 소유주들이 프레스코를 국가에 기증했고, 브레라 관장 페르난다 비트겐스는 로마에서 허가를 얻어 프레스코를 떼어 미술관으로 옮겼다. 미술관은 1943년 8월의 폭격 이후 막 다시 문을 연 참이었다. 벽화는 마우로 펠리촐리가 떼어 냈는데, 벽화를 그려진 자리에 보존한다는 원칙을 거스르는 결정이어서 당시에도 논란을 불렀다. 2000년 텅 빈 기도실에는 실물 크기의 프레스코 사진이 걸렸다. 보수 공사 때 기도실 벽에서는 프레스코 밑그림인 시노피아와, 옮길 때 제자리에 남겨 두었던 예언자 그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나폴레옹 이후
1814년 이후 소장품은 더 천천히, 다른 방식으로 늘어났다. 상속인과 골동품상에게서 그림을 사들이고, 기증을 받고, 기탁품을 맡았다.
14. 안드레아 만테냐 《그리스도의 애도》, 1483년경(연대 논란)
만토바 곤차가 가문의 궁정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아들 루도비코는 아버지가 죽고 3주 뒤인 1506년 10월 2일, 만토바 후작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에게 편지를 써서 작업실에 남은 그림들을 사 달라고 제안했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 가운데 ‘단축법으로 그린 그리스도’가 있었고, 이듬해 11월 무렵 이 그림은 추기경 시지스몬도 곤차가에게 넘어가 있었다. 17세기 로마의 문서에는 ‘단축법으로 그린 그리스도’가 한 점 더 나오는데, 브레라에 있는 것이 둘 중 어느 것인지를 두고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미술관은 자기 그림을 루도비코의 편지와 연결하고, 만테냐가 자신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보며, 연대를 1483년경으로 잡는다. 반면 국가 문화재 목록에는 1470~1474년으로 적혀 있다.
시신은 붉은 대리석 판 위에 발을 보는 사람 쪽으로 두고 누워 있다. 못 자국이 난 두 발은 아래쪽 한가운데에서 대리석 판 가장자리 너머로 나와 있는데, 실제 원근법대로라면 더 커야 할 것을 작게 그려 몸을 가리지 않게 했다. 손등의 상처는 가장자리의 살갗이 들린 작고 찢어진 구멍으로 그려져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슬퍼하는 세 사람이 비좁게 모여 있다. 요한, 눈물을 훔치는 늙은 마리아, 그리고 코와 벌린 입만 보이는 세 번째 인물이다. 그리스도 머리의 후광은 가느다란 선 하나로 그려져 있고, 오른쪽 위 구석에는 향유를 담는 작은 돌 단지가 놓여 있다.
브레라 아카데미의 서기 주세페 보시는 이 그림을 자기 소장품으로 손에 넣었다. 미술관의 한 설명문에 따르면 그는 1801년 로마에서 이 그림을 샀고, 다른 설명문에 따르면 1806년 카노바가 구입을 중개했다. 보시는 1815년에 세상을 떠났고, 1824년 7월 3일 아카데미는 오랜 협상 끝에 그의 상속인들에게서 이 그림을 사들였다.
2013년 영화감독 에르만노 올미는 이 그림의 독특한 단축 시점을 더 살리려고 그림을 어두운 벽감 안에 아주 낮게 걸었다. 이 결정은 논란을 불렀고, 2016년 전시 방식이 바뀌었다.

15. 로렌초 로토 《페보 다 브레시아의 초상》과 《라우라 다 폴라의 초상》, 1543~1544년
1543년 4월 19일 로렌초 로토는 자신의 지출 장부에 “고귀하신 페보 다 브레사 나리”가 “실물을 보고 그린 허리까지 오는 큰 초상화 두 점”의 선금으로 10두카트를 치렀다고 적었다. 모두 합쳐 30두카트와 공작 한 쌍으로 값을 정했다. 로토는 반년 전에 “좀 더 조용한 삶”을 찾아 트레비소로 옮겨 와 살고 있었고, 돈이 모자랐다. 1544년 3월 그는 페보에게 받는 돈으로는 작업에 들인 시간을 채울 수 없다고 적었지만, 그래도 그 돈을 받았다.
페보는 트레비소에 자리 잡은 브레시아 출신 집안 사람으로 마흔 살쯤이었고, 폴라 가문 출신인 아내 라우라는 스무 살쯤이었다. 두 초상은 늘 한 쌍으로 붙어 다녔다. 1596년 폴라 가문의 재산 목록에도 함께 올라 있고, 19세기에 시장에 나올 때도 함께였다. 1859년 밀라노의 한 골동품상에게서 브레라 아카데미를 위해 이 초상들을 사들였는데, 그 구매자들 가운데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가 있었다. 미술관은 하예즈가 이 초상들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로 넘어갈까 봐 걱정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1860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아카데미에 그 비용을 갚아 주었다.

라우라는 곧고 차분하게 앞을 바라본다. 어깨에는 술이 달린 금실 자수 덧깃을 둘렀고, 목에는 진주를 걸었으며, 허리에는 묵직한 금사슬을 감았다. 오른손에는 돋을새김한 금 손잡이가 달린 흰 깃털 부채를 들었는데, 손잡이에서 허리띠까지 가느다란 사슬이 이어진다. 그녀의 어깨 뒤로는 짙은 붉은 벨벳이, 오른쪽 위에는 선명한 초록 비단 휘장이 있는데, 이 초록이 두 그림을 통틀어 가장 강한 색이다. 페보는 거의 온통 검은 차림에 모피를 두른 넓은 외투를 입었고, 한 손은 구겨진 흰 손수건을 깐 돌 턱에 얹고 다른 손에는 장갑을 쥐고 있다. 그의 머리가 위쪽 가장자리에 거의 닿아 있는 것은 언젠가 그의 캔버스 윗부분이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16. 프란체스코 하예즈 《입맞춤》, 1859년
1859년 6월 8일, 마젠타 전투가 끝나고 나흘 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나폴레옹 3세가 밀라노에 입성했고, 도시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끝났다. 같은 해 9월 브레라 아카데미 교수였던 68세의 프란체스코 하예즈는 이곳 연례 전시회에서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 디 살리체토 백작의 주문으로 그린 《입맞춤》을 선보였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입을 맞추고, 그의 얼굴은 깃털 달린 챙 넓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왼발은 벌써 오른쪽 계단의 맨 아래 칸에 올려놓았고, 허리께에는 단검 손잡이가 삐죽 나와 있어, 미술관은 교육 자료에서 그를 싸우러 떠나는 사람으로 본다. 여자는 고개를 뒤로 젖혔고, 연한 파란색 새틴 드레스가 빛을 받아 날카로운 흰 광택을 낸다. 왼쪽 아래, 뾰족한 아치 밑 어두운 통로에는 두건을 쓴 작은 인물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겨우 알아볼 만큼 서 있는데, 이 인물을 첩자로 보기도 하고 함께 모의하는 동지나 하인으로 보기도 한다.
미술관은 붉은 긴 양말과 망토의 초록 안감이 드레스의 파란색, 흰색과 어우러져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본다. 하예즈는 이 그림을 여러 번 되풀이해 그렸다. 제노바 사람 페데리코 밀리우스를 위해 그린 1861년 판에서는 드레스가 흰색이고,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한 1867년 판에서는 흰 천이 계단 위에 놓여 있으며,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회화관에는 같은 구도의 타원형 수채화가 있다. 원작은 사반세기 넘게 주문자의 손에 있었고, 1886년 비스콘티 디 살리체토가 브레라에 넘겼다. 1862년 제롤라모 인두노가 그린 《슬픈 예감》도 브레라에 있는데, 이 그림 속 여주인공의 방 벽에 《입맞춤》을 옮긴 작은 판화가 걸려 있다.


17. 도나토 브라만테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1490년경
1927년 이 패널에서 들뜨는 물감을 몇 번이고 다시 고정해야 했던 복원가 마우로 펠리촐리는 이 그림을 “만성 환자”라고 불렀다. 패널은 1915년 이미 심하게 손상된 채 브레라에 들어왔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밀라노 근교의 키아라발레 수도원에서 이 그림을 가져온 것은 안전을 위해서였고, 또 보관 상태가 나빠 물감층이 크게 떨어져 나가고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시토회 수도사들은 이미 1798년에 그곳에서 쫓겨났고, 수도원 성당은 본당이 되었으며, 수도사들은 1952년에야 돌아왔다. 1915년부터 이 그림은 브레라에 기탁되어 있고, 미술관의 소장품 카드에는 키아라발레 수도원의 기탁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브라만테는 무엇보다 건축가로 알려져 있고, 이 패널은 흔히 그가 나무 패널에 그린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작품으로 불린다. 작가 귀속은 오랫동안 오락가락했다. 1871년부터 1958년까지는 그의 추종자인 브라만티노의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어느 도록에는 두 사람의 공동 작품으로 올라 있기까지 했다.
그리스도는 허리 위까지, 몸통이 패널을 거의 가득 채울 만큼 가깝게 그려져 있다. 두 손은 등 뒤로 돌려져 있고, 꼬아 만든 굵은 밧줄이 고리를 지어 목을 감고 가슴뼈 위에서 매듭지어져 있으며, 가느다란 다른 밧줄 하나는 어깨를 기둥에 붙들어 매며 근육을 파고든다. 입술은 살짝 벌어져 윗니가 보인다. 빛은 왼쪽에서 들어와 얼굴을 반으로 나눈다. 한쪽은 밝고 또렷하게 그려졌고, 다른 쪽은 초록빛 도는 그늘 속으로 잠겨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뒤의 기둥은 네모난데, 촛대와 아칸서스 잎을 금박 부조로 새긴 벽기둥이며, 잎은 머리 양쪽에서 휘감겨 오른다. 왼쪽 창 안에는 파란 산과 언덕 위 작은 마을, 배가 떠 있는 강이 있는 조그만 풍경이 보이고, 창턱에는 뚜껑 달린 키 큰 금 그릇, 곧 성체를 담는 성합이 놓여 있다.
1923년 오레스테 실베스트리가 이 패널을 복원했고, 펠리촐리 이후에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다시 손을 보았지만, 2017년 1월 실내 기후가 오르내리면서 물감이 다시 들떴다. 다섯 달 동안 브레라 자체 복원실에서 패널을 복원했고, 2017년 6월 1일 다시 전시하기 전에 고피온사가 온도와 습도의 변화로부터 패널을 지켜 주는 기후 조절 진열장을 액자 안에 짜 넣었다.
18. 카라바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1605~1606년
브레라의 감독관을 지낸 에토레 모딜리아니는 1935년 미술관에서 밀려났고, 1938년 말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종법에 따라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1939년 4월 27일, 이미 아무 직책도 없던 그는 교육부 장관 주세페 보타이에게 보낸 비공개 편지에서, 로마의 파트리치 가문이 3세기 넘게 소유해 온 카라바조의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를 브레라를 위해 사들이자고 제안했다. 페르난다 비트겐스도 그와 함께 이 일에 힘썼다. 같은 해 브레라의 친구들 협회와 밀라노 후원자들이 모은 돈으로 파트리치오 파트리치에게서 그림을 사서 회화관에 넘겼고, 얼마 뒤 정권은 이 협회를 해산했다.
카라바조는 1606년 5월 28일 저녁 로마에서 싸움 끝에 라누초 토마소니를 죽인 뒤 쫓기는 몸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부상을 입은 채 사형을 선고받고 로마 밖 콜론나 가문의 영지에 숨었는데, 그곳이 어느 마을이었는지는 자료마다, 심지어 미술관의 설명문마다 다르게 나오며, 10월 6일에는 이미 나폴리에 있었다.
캔버스 위쪽 절반은 거의 온통 어둡고, 다섯 사람과 식탁은 아래쪽에 비좁게 모여 있다. 그리스도는 눈을 내리깐 채 식탁에 앉아 두 손가락으로 빵을 축복한다. 미술관의 설명문에 따르면 그의 얼굴은 지치고 야위었으며, 미술관은 이 얼굴을 몇 해 앞서 그린 런던의 《엠마오의 저녁 식사》와 비교한다. 런던 그림 속 그리스도는 젊고 수염이 없으며 식탁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다. 여기 식탁에는 빵과 물병, 소박한 접시 두 개가 있다. 오른쪽 제자는 곧 일어설 듯 두 손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그리스도의 어깨 너머에서 여관 주인은 그의 손을 바라보고, 고기 접시를 든 노파는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다.
2010년 피렌체의 전문가들이 적외선으로 그림을 조사해, 왼쪽 위 구석에서 풍경과 잎이 무성한 나무가 보이는 창을 찾아냈다. 카라바조가 나중에 어두운 배경으로 덮어 버린 창이다.
새로운 브레라
마지막 두 작품은 브레라 거리 건너편, 20세기 소장품을 위해 2024년 12월에 문을 연 치테리오 궁에 걸려 있다. 치테리오 궁과 회화관을 합쳐 그란데 브레라라고 부른다.
19.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인간의 물결》, 1895~1896년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는 이 캔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완성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고, 1898년 같은 주제를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 새 캔버스가 1901~1902년에 완성된 《제4계급》이다. 두 그림보다 앞서 1891~1892년의 《굶주림의 사절들》이 있었는데, 세 그림 모두 화가의 고향인 피에몬테의 마을 볼페도에서 말라스피나 궁 앞 같은 광장을 그렸다.
넓은 캔버스의 아래쪽 3분의 1을 모두 차지하는 먼지 낀 흰 길을 따라 군중이 보는 사람을 향해 곧장 걸어온다. 조금 앞서 걷는 세 사람은 가슴에 팔짱을 낀 남자, 윗옷을 어깨에 걸치고 붉은 조끼를 입은 수염 난 남자, 노란 포대기에 싼 아기를 안은 검은 옷의 여자다. 그 뒤로 모자 쓴 얼굴들이 끝에서 끝까지 벽처럼 늘어서 있다. 군중의 가운데와 앞선 세 사람은 꼼꼼히 그려졌지만, 오른쪽 가장자리의 인물들은 윤곽만 잡혀 투명하고, 그 몸을 뚫고 옆 사람의 다리가 비쳐 보인다. 흰 길 위에는 발에서 길게 뻗은 보라색과 분홍색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1986년 밀라노의 금융가 안젤로 아본디오가 경매에서 이 캔버스를 사서 자기 회사를 통해 브레라에 기증했다. 그의 아들에 따르면 이 그림을 밀라노의 다른 컬렉션으로 보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아본디오는 그림을 누구나 볼 수 있기를 바랐다.

20. 움베르토 보초니 《갤러리아의 소란》, 1910년
불 켜진 카페 문 위의 간판은 ‘카페’의 앞 글자 CAFF와 그다음 글자의 첫머리에서 끊긴다. 밀라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의 밤이고, 그림 속 모든 것(벽기둥, 아치, 바닥, 사람들)이 주황, 보라, 분홍, 초록, 파랑의 점과 짧은 붓질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 위에는 둥근 전등 두 개가 걸려 있고, 저마다 점으로 된 빛무리를 퍼뜨린다. 군중은 하나의 대각선 물결을 이루며 빛나는 문 쪽으로 몰려가는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곳 캄파리 카페 앞에서 두 여자가 맞붙어 싸우고 있다. 앞쪽에는 꽃과 과일로 꾸민 커다란 모자를 쓴 여자들과 두 팔을 치켜든 검은 옷의 남자가 있고, 오른쪽 아래 구석 바닥에는 누가 떨어뜨린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레조칼라브리아 출신의 보초니는 로마에서 자코모 발라에게 배운 뒤 밀라노로 옮겨 왔고, 1910년 2월과 4월에 미래주의 화가들의 선언문 두 편에 모두 서명했다. 그는 몇 달 뒤 《갤러리아의 소란》을 그렸고, 이 그림은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넘어갈 무렵 밀라노의 예술가 단체 파밀리아 아르티스티카에서 ‘한바탕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전시되었다. 나중에 그림은 밀라노의 사업가 에밀리오 제시와 그의 아내 마리아의 손에 들어갔다. 남편이 죽은 뒤 마리아는 컬렉션을 흩뜨리지 말라는 그의 뜻에 따라 1976년 부부의 컬렉션을 브레라에 기증했고, 1984년에는 기증품을 더 보탰다. 2024년 12월 제시 컬렉션은 회화관에서 새로 문을 연 치테리오 궁으로 옮겨졌다.
브레라에서 이 스무 점을 보고 나면 그림의 가장자리와 표면에 눈이 가게 된다. 피에로의 패널은 잘려 나갔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제단화의 두 성인 패널은 톱으로 켜졌다가 나중에 다시 한 액자에 짜 맞춰졌다. 루이니와 브라만테와 모키롤로의 프레스코는 벽에서 떼어 냈다.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는 이제 기후 조절 진열장 안에 있다. 이 모든 이동의 흔적은 지금도 작품 자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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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무 점 말고도 브레라에는 발길을 멈출 만한 그림이 많다. 베네치아 화가 가운데서는 카르파초와 베로네세를 따로 찾아볼 만하고, 롬바르디아 화가 가운데서는 브라만티노, 그리고 일찍이 1808년에 산타 마리아 디 브레라 성당 벽에서 떼어 낸 빈첸초 포파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가 있다. 치테리오 궁에는 제시 컬렉션 말고도 비탈리, 유커, 마티올리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다. 《갤러리아의 소란》과 함께 브레라에 들어온 제시 컬렉션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모이즈 키슬링의 초상》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