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2년 구스타브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뮌헨을 점령했고, 스웨덴군은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4세가 1528년부터 뮌헨 레지덴츠 궁전을 위해 주문해 온 연작 가운데 세 점을 스톡홀름으로 가져갔다. 이 연작은 고대와 성경 역사의 영웅과 여걸들을 그린 것이었고, 스웨덴으로 건너간 그림은 루트비히 레핑거의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와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브라함 쇠퍼의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였다. 그때부터 세 점은 스톡홀름 국립미술관에 있다. 연작의 나머지 패널들은 뮌헨에 남았고, 알트도르퍼의 《알렉산드로스의 전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바이에른의 통치자들이 16세기부터 모아 온 그림을 위해 따로 건물을 지은 사람은 국왕 루트비히 1세였다. 설계는 건축가 레오 폰 클렌체가 맡았고, 1826년 4월 7일에 머릿돌을 놓아 1836년에 피나코테크가 문을 열었으며, 전시실에는 위에서 빛이 들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무너졌고, 1950년대에 건축가 한스 될가스트가 건물을 복구하면서 벽이 뚫린 자리를 맨 벽돌로 메웠다.
그림을 주문한 공작들 (1528~1616)

1.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소스 전투》, 1529년
1528년 레겐스부르크 시의회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를 시장으로 뽑았지만, 그는 바이에른의 빌헬름 공작을 위한 큰 작업을 맡았다며 자리를 사양했다. 알트도르퍼는 화가이자 건축가였고 시 내부 평의회의 일원이었으며, 시의 건축 책임자로서 튀르크의 침공에 대비한 성벽 공사를 관리했다. 시의회 기록에는 그림의 이름이 없지만, 흔히 1529년이라는 연도가 적힌 이 패널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
그림은 거의 세 세기 동안 바이에른 공작과 선제후들의 컬렉션에 있었다. 1800년 모로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뮌헨을 점령하자 프랑스 위원들이 파리로 보낼 그림을 골랐고, 《알렉산드로스의 전투》도 그 그림들과 함께 실려 갔다. 1803년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루브르의 복원 작업실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 그다음 일에 관해서는 아무도 문서를 찾지 못한 이야기가 전한다. 나폴레옹이 그림을 차지해 파리 근교 생클루 궁전의 욕실에 걸어 두었고, 1814년 궁전을 점령한 프로이센군이 그곳에서 그림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그림은 바이에른 국왕에게 돌아갔다.
패널의 아래쪽 절반은 창과 깃발의 숲 아래 빽빽이 들어찬 수천 명의 아주 작은 기병과 보병으로 가득하다. 위쪽 절반은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하늘과 바다와 산이 차지하고, 그곳의 지평선은 둥글게 휘어 있다. 왼쪽 위 짙푸른 하늘에는 가는 초승달이 걸려 있고, 오른쪽 지평선 위에서는 주황빛과 금빛으로 소용돌이치는 구름 속에서 해가 타오른다. 하늘 한가운데에는 빨간 끈에 매달린 명판에 라틴어 글이 적혀 있고, 그 아래로 빨간 술과 끝에 고리가 달린 긴 줄이 늘어져 아래쪽의 두 주인공을 가리킨다.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서는 옆면에 DARIVS라고 쓰인 황금 전차를 탄 다리우스가 흰 말 세 마리에 끌려 왼쪽으로 달아나고, 바로 뒤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달리며 그에게 긴 창을 겨눈다. 알트도르퍼가 주문을 받은 것은 오스만 군대가 빈을 포위하기 한 해 전인 1528년이었지만, 역사가들은 대개 하늘의 초승달과, 왼쪽 아래 다리우스 군대의 흰 터번과 빨간 터번을 근거로 이 그림을 튀르크와 연결 짓는다. 명판의 글은 전사한 페르시아인을 보병 10만 명, 기병 1만 명으로 헤아리고, 다리우스의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포로가 되었으며 다리우스 자신은 기병 1000명이 채 안 되는 수만 데리고 달아났다고 전한다.
2. 페테르 파울 루벤스 《하마와 악어 사냥》, 1616년경
루벤스와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하마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물이었다. 1601년 나르니 출신의 외과의 페데리코 체렝기는 로마와 나폴리에서 하마 두 마리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의 말로는 이집트에서 직접 잡아 베네치아에서 가죽에 속을 채운 것이었다. 미술관은 루벤스가 이 그림의 하마를 그런 박제를 보고 그렸다고 본다. 루벤스는 1600년부터 1608년까지 이탈리아의 만토바와 로마에서 살았으니, 그 박제를 직접 보았을 수도 있다. 1610년대 중반 그는 안트베르펜에서 다른 나라 군주들을 위해 거대한 캔버스를 그리는 큰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사냥 그림은 새로운 장르로 막 팔기 시작한 참이었다. 1616년 10월에도 그는 《늑대와 여우 사냥》을 사 갈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이 사냥 그림과 다른 세 점을 뮌헨 근교 슐라이스하임의 옛 성을 위해 주문했다. 막시밀리안이 선제후, 곧 황제를 뽑는 제후의 한 사람이 된 것은 1623년이 되어서였다. 루벤스 전작 도록에서 사냥 그림 편을 쓴 연구자 아르나우트 발리스는 슐라이스하임을 위한 네 점에서 조수들이 거장의 지휘 아래 많은 부분을 그렸다고 본다.

하마는 가운데에 서 있다. 거무스름한 회갈색 몸으로, 왼쪽에서 달려드는 흰 개를 향해 누렇게 휜 엄니가 난 분홍빛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빨간 터번에 황금빛 노란 망토를 걸친 기수가 그 입에 긴 창을 찔러 넣고, 오른쪽에서는 흰 터번을 쓴 흰 수염의 기수가 내리치려고 팔을 치켜든 채 찌푸린 얼굴로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하마는 앞발로 악어를 짓누르고 있고, 악어는 캔버스 아래쪽을 가로질러 누워 비늘 덮인 창백한 배를 뒤집어 드러냈다. 악어는 뒷발로 아래 가장자리에 엎어진 채 죽어 있는 남자의 흰 허리 두르개를 움켜쥐었고, 그 옆 천에는 붉은 핏자국이 보인다. 과학사가 다니엘 마르고치는 박제하면서 동물의 모양이 일그러졌기 때문에 루벤스가 하마의 몸을 거의 다 사람과 말과 개 뒤에 감추고 입만 앞으로 내세웠으리라고 추정했다.
1800년 8월 30일 프랑스 위원 뇌뵈가 사냥 그림 네 점을 모두 파리로 가져갔다. 그 가운데 세 점은 프랑스의 지방 미술관으로 보내졌고 돌려 달라는 요구도 없었으며, 뮌헨으로 돌아온 것은 하마 사냥 하나뿐이었다. 《멧돼지 사냥》은 지금 마르세유에, 《호랑이, 사자, 표범 사냥》은 렌에 있고, 《사자 사냥》은 보르도로 보내졌다가 1870년 12월 7일에 불타 버렸다.
뉘른베르크에서 뒤러를 가져간 막시밀리안 1세 (1613~1627)
3. 알브레히트 뒤러의 파움가르트너 제단화, 1500~1503년경
1988년 4월 21일, 이미 여러 차례 그림을 훼손한 적이 있고 그날 정신 병원에서 외출을 허락받은 한스요아힘 볼만이 알테 피나코테크에서 뒤러의 그림 세 점에 황산을 끼얹었다. 황산은 작은 리큐어 병 두 개에 담아 가져왔다. 마침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그를 밀쳐 냈고, 이어 경비원들이 붙잡았다. 볼만은 900마르크의 연금에서 예전의 손해 배상 소송 때문에 매달 158마르크 60페니히씩 떼어 가는 데 항의하려고 그랬다고 말했다. 법원은 그에게 치료를 병행하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제단화 말고도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와 《슬픔의 성모》에 황산이 묻었다. 바이에른 주립 컬렉션의 복원 연구소인 되르너 연구소의 복원가들은 먼저 이온 교환제로 산을 중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복원 자체에는 2만 3000시간의 작업이 들었다. 공격을 받은 지 10년 뒤인 1998년에 제단화가 다시 공개되었고, 《슬픔의 성모》는 2005년에야 복원이 끝났다.

제단화를 주문한 사람은 뉘른베르크의 도시 귀족인 슈테판 파움가르트너와 루카스 파움가르트너 형제로, 뉘른베르크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들의 성 카타리나 교회에 두려는 것이었다. 1498년 뒤러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판화 연작 《묵시록》을 펴냈고, 같은 무렵 이 제단화를 그렸다. 17세기의 한 연대기에 따르면 뒤러는 날개 패널의 성인 기사들을 두 형제를 모델로 그렸고, 사람들은 왼쪽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 슈테판을, 오른쪽의 성 에우스타키우스에서 루카스를 알아본다. 게오르기우스는 발치에 앉아 부리를 벌린 작은 갈색 용의 목을 쥐고 있고, 에우스타키우스의 깃발에는 뿔 사이에 십자가가 달린 사슴 머리가 그려져 있다. 가운데 패널에 뒤러는 큰 건물의 폐허 속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렸는데, 이 장면은 흔히 밤으로 그렸지만 그는 왼쪽 위의 흰 해로 대낮처럼 밝혔다. 그의 모노그램 AD는 요셉의 등불 오른쪽 나무 기둥에 작고 흐리게 적혀 있다.
1613년 뉘른베르크는 막시밀리안 1세 공작의 호의를 얻으려고 이 제단화를 그에게 넘겼고, 시를 위해서는 화가 욥스트 하리히에게 복제화를 주문했다. 뮌헨에서 막시밀리안은 제단화를 자기 취향대로 고치게 했다. 가운데 패널의 주문자 가족을 덧칠해 지우고, 날개 패널에는 띠를 덧대어 넓혔으며, 기사들에게는 투구와 말과 풍경을 그려 넣었다. 나중에 이 덧칠을 걷어 내자 기사들은 다시 검은 배경 앞에 서게 되었고, 탄생 장면의 아래쪽 양 귀퉁이에는 인형만 한 크기의 주문자들이 각자의 문장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왼쪽에는 1478년에 죽은 아버지 마르틴 파움가르트너와 아들들, 그리고 미술관의 견해로는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 한스 쇤바흐가 무릎을 꿇고 있고, 오른쪽에는 어머니 바르바라가 딸들과 함께 있다.
4. 알브레히트 뒤러 《네 명의 사도》, 1526년
1526년 가을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아무 주문 없이 그린 높고 좁은 패널 두 점을 내놓았다. 그는 편지에서 다른 그림들보다 이 두 점에 더 공을 들였다고 하며, 자신을 기억하는 뜻으로 시가 간직해 달라고 청했다. 10월 6일 시의회는 그림을 받아들이고, 화가에게 100굴덴, 그의 아내에게 12굴덴, 하인에게 2굴덴을 치렀다. 그 한 해 전에 뉘른베르크는 공식적으로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다. 뒤러는 이 뒤로 큰 그림을 더 그리지 않았고, 1528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왼쪽 패널 앞쪽에는 수염 없는 젊은 요한이 초록 옷 위에 커다란 빨간 망토를 걸치고 서서 펼친 책을 읽고, 그의 어깨 너머로 커다란 황금 열쇠를 든 늙은 베드로가 벗어진 이마를 하고 같은 책을 들여다본다. 오른쪽 패널 앞쪽에는 대머리에 수염을 기른 바울이 무거운 회백색 망토를 두르고 옆모습으로 서서, 덮은 책을 가슴에 대고 긴 칼을 든 채 곁눈으로 관람자를 본다. 그 뒤에서 검은 곱슬 수염의 마가는 흰자위가 보일 만큼 눈을 크게 뜨고, 이가 드러나게 입을 살짝 벌렸다. 마가는 복음서 저자로, 사도로 꼽히지 않으므로 그림의 제목은 나중에 붙은 것이다. 일찍이 1547년에 이 패널의 글을 써 넣은 뉘른베르크의 습자 장인 요한 노이되르퍼는 네 인물에서 네 가지 기질을 보았다. 요한은 다혈질, 베드로는 점액질, 마가는 담즙질, 바울은 우울질이었다.
인물들 아래, 각 패널의 아래 가장자리를 따라 밝은 띠가 있고 거기에 노이되르퍼가 손으로 쓴 독일어 글이 적혀 있다. 루터가 1522년에 번역한 신약 성경에서 가져온 구절들로, 맨 앞에는 세상의 모든 통치자에게 거짓 예언자를 경계하라는 당부가 놓여 있다. 뒤러가 누구를 염두에 두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논쟁한다. 예전에는 가톨릭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았고, 20세기 중반부터는 한 해 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은 급진 개혁가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뒤러 자신의 주변에 있던 화가들도 있었다.
1627년, 30년 전쟁이 한창일 때, 이제 선제후가 된 가톨릭 신자이자 집요한 뒤러 수집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이 패널들을 손에 넣으려 했다. 개신교 도시 뉘른베르크에는 힘 있는 가톨릭 이웃의 호의가 필요했고, 석 달가량 협상한 끝에 시는 양보했다. 시의회는 꾀를 내어 화가 피셔에게 실물 크기의 복제화를 주문했고, 선제후가 복제화를 가지기를 바라며 원본과 함께 뮌헨으로 보냈지만, 그는 원본을 가졌다. 루터의 번역 글이 적힌 띠는 뮌헨에서 톱으로 잘려 나갔는데, 그 글 때문이기도 했고, 막시밀리안이 그림에서 원래 있던 장소와 용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대체로 다 없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띠가 패널과 다시 합쳐진 것은 1922년이 되어서였다.
욥스트 하리히가 1613년에 그린 파움가르트너 제단화 가운데 패널의 복제화는 뉘른베르크의 성 로렌츠 교회에 있고, 날개 패널의 복제화는 뉘른베르크의 게르만 국립박물관에 있다. 1627년에 그린 《네 명의 사도》 복제화는 뉘른베르크의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으며, 퀴프너가 그렸다고 하는 18세기의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복제화도 뉘른베르크에 남았다.

안트베르펜에서 그림을 산 선제후 (1698)

5.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포도와 멜론을 먹는 아이들》, 1645년
오른쪽 소년이 무릎에 올려놓고 날이 검은 칼로 자르는 반쪽 멜론의 하얀 속살에 파리 두 마리가 앉아 있다. 한 마리는 칼날보다 조금 위에, 다른 한 마리는 칼끝 바로 옆에 있다. 소년은 나지막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풀어 헤친 셔츠 위에 올리브색 윗옷을 입었고, 멜론을 문 볼이 불룩한 채 옆 아이를 곁눈질한다. 옆 아이는 땅바닥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검은 포도송이를 입에 넣고 있고, 다른 손에는 한 입 베어 문 멜론 조각을 들었다. 왼쪽 아래에는 잎이 붙은 초록 포도와 검은 포도가 가득 담긴 고리버들 바구니가 있다. 두 아이 모두 셔츠가 해졌고 바지는 무릎이 찢어졌으며 맨발은 더럽고, 땅바닥에는 씨와 껍질이 흩어져 있다. 빛은 왼쪽 위에서 얼굴과 셔츠, 발과 과일에 떨어지고, 배경은 거의 검다.
무리요는 평생 세비야에서 살았고, 미술관은 이 그림을 1645년 작으로 보는데, 그해 화가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작은 회랑을 위한 연작으로 첫 큰 주문을 받았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은 아이들을 그린 그의 세속화 가운데 가장 이른 축에 든다.
이 그림은 아마도 1698년 무렵 안트베르펜에서, 당시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총독이던 바이에른 선제후 막스 에마누엘을 위해 구입되었을 것이다. 미술관 문서에는 판매자의 이름이 없다. 같은 1698년에 안트베르펜의 상인 히스베르트 판 콜런이 막스 에마누엘에게 또 다른 그림 《주사위 놀이를 하는 소년들》을 팔았고, 아이들을 그린 무리요의 그림 두 점이 1768년 궁정 고문관 프란츠 요제프 폰 뒤프렌의 유증으로, 한 점이 1799년 만하임에서 더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거리의 아이들을 그린 무리요의 그림으로 알려진 20점가량 가운데 다섯 점이 뮌헨에 모였고, 이는 다른 어느 컬렉션보다 많은 수다.
뮌헨으로 옮겨 온 팔츠 가문의 미술관 (1806년까지)

6. 페테르 파울 루벤스 《대 최후의 심판》, 1617년경
노이부르크의 팔츠 백작 볼프강 빌헬름은 161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처음에는 비밀리에 했고, 미술관의 표현으로는 정치적 계산에서였다. 같은 해 그는 자기 수도인 도나우 강변의 노이부르크에 있는 궁정 교회를 가톨릭 측에 넘겼고, 1618년에는 그 교회를 예수회에 맡겼으며, 중앙 제단을 위해 루벤스에게 최후의 심판을 주문했다.
루벤스는 공방과 함께 여러 폭의 천을 이어 붙인 높이 6미터가 넘는 캔버스를 그렸다. 그림 한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연한 하늘빛 틈이 가른다. 그 왼쪽에서는 천사들이 창백한 알몸의 구원받은 이들을 위로 끌어 올리고, 오른쪽에서는 거무스름하고 근육질인 저주받은 자들의 몸이 거꾸로 떨어진다. 그리스도는 가운데 어두운 구름 위에 장밋빛 도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앉아, 오른손으로 위쪽의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저주받은 자들 쪽 위로 뻗었다. 그 아래로 대천사 미카엘이 손에 불타는 번개를 들고 거꾸로 날아 내려온다.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흰 수의를 입은 수염 난 남자가 무덤에서 일어나고, 그 곁에 해골이 있으며, 두 남자가 무거운 회색 석판을 밀어 젖힌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괴물 같은 청회색 머리가 비명을 지르는 사람을 턱으로 물고 있다.
그림이 노이부르크를 떠난 까닭은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로만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그림은 나체가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가 가려졌고, 1653년에는 아예 내려졌다. 볼프강 빌헬름의 손자인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이 그림을 뒤셀도르프의 자기 미술관으로 가져갔고, 1806년 그림은 뒤셀도르프 미술관 전체와 함께 뮌헨에 왔다.

미술관은 클렌체가 피나코테크를 설계할 때 루벤스의 주 전시실을 이 캔버스의 크기에 맞추어 계산했다는 전해 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쨌든 모든 그림 가운데 1836년 건물이 문을 열 때 걸렸던 자리에 지금도 걸려 있는 것은 이 그림뿐이다.
7.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얀 빌던스 《레우키포스의 딸들의 납치》, 1618년경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는 레우키포스의 딸 포이베와 힐라에이라를 납치했는데, 두 자매는 형제의 사촌인 이다스와 린케우스와 약혼한 사이였다. 약혼자들과의 싸움에서 형제 가운데 죽을 운명이던 카스토르가 죽었고, 유피테르의 아들이어서 죽지 않는 폴룩스는 형제와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으며,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별이 되었다.
루벤스는 납치 장면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도록 그려서, 언덕과 나무가 있는 지평선이 인물들의 무릎 높이를 지나고 말들은 관람자 위로 우뚝 솟아 있다. 왼쪽에는 이마에 흰 줄이 있고 등에 표범 가죽을 걸친 적갈색 말이 서 있고, 캔버스 가장자리 바로 곁에서 짙은 회색 날개를 단 푸토가 그 말의 고삐를 잡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둥근 얼룩이 박힌 회색 말이 기수 없이 모두의 위로 뒷발을 딛고 일어선다. 검은 갑옷에 등 뒤로 휘날리는 빨간 망토를 걸친 형제 한 사람이 자매 하나를 허벅지와 등 밑으로 받쳐 들어 올리고, 그녀는 그림을 가로질러 몸을 펼친 채 진주를 꽂은 붉은 금빛 머리를 뒤로 젖혔다. 햇볕에 그을리고 수염을 기른, 허리까지 벗은 다른 형제는 다른 자매의 허리를 뒤에서 붙잡고 있다. 그녀는 황금빛 주황색 천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고, 아래 한가운데에서는 발바닥을 우리 쪽으로 향한 그녀의 맨발이 빨간 끈으로 묶은 그의 샌들 곁에서 발가락 끝으로 땅을 딛고 있다.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풍경은 얀 빌던스가 그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회화와 조각 사이의 오랜 논쟁에서 회화 편에 선 논거로 본다. 인물들이 얽혀 있어서 관람자는 하나의 조각 군상을 여러 방향에서 한꺼번에 보는 듯하다.

그림은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 걸려 있었고, 그곳에는 루벤스의 그림이 46점 있었다. 미술관은 그의 후계자인 비텔스바흐 가문 팔츠 계열에 상속되었고, 이들은 1777년에 바이에른까지 물려받았다. 1805년, 뒤셀도르프가 나폴레옹의 베르크 대공국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그림들은 키르히하임볼란덴으로 옮겨졌다가 거기서 다시 뮌헨으로 갔고, 1806년 바이에른 컬렉션에 들어왔다.
미술관은 모서리 장식과 작은 거울이 달린 금박 액자를 뮌헨의 궁정 건축가 요제프 에프너의 작품으로 본다. 에프너는 1745년, 그림이 뮌헨에 오기 6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8. 라파엘로 《카니자니 성가족》, 1505~1508년경
이 패널의 위쪽 양 귀퉁이에 있던 천사들은 18세기 중반 뒤셀도르프의 한 복원가가 손상시킨 뒤 파란 하늘로 덧칠해 가려 버렸다. 라파엘로 탄생 500주년을 맞은 1983년에야 후베르투스 폰 조넨부르크가 이끄는 바이에른 주립 컬렉션의 복원가들이 덧칠을 걷어 냈고, 구름 위의 천사들이 다시 나타났다. 왼쪽에는 천사들이 빽빽이 모여 있고 오른쪽에는 둘이 있는데, 일부는 패널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으며, 미술관은 모두 여덟으로 센다. 오른쪽의 두 천사는 분필처럼 희미해서 거의 밑그림 같고, 왼쪽 무리도 아래쪽 인물들보다 부드럽고 투명하다.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피렌체 사람 도메니코 카니자니를 위해 그렸다고 썼고, 미술관은 아마도 1507년 그가 루크레치아 프레스코발디와 결혼할 때에 맞춘 것이라고 본다. 젊은 라파엘로는 그 무렵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일하던 피렌체에 살면서 피렌체 상인들을 위해 성모를 그렸고, 1508년 말 로마로 떠났다.
다섯 인물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짜여 있다. 꼭대기에는 요셉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벗어진 머리를 엘리사벳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엘리사벳은 왼쪽에 무릎을 꿇고 어린 요한을 안고 있고, 오른쪽에는 장밋빛 도는 붉은 옷에 파란 망토를 두른 마리아가 낮게 앉아 있다. 두 아이 사이에는 두루마리가 있어서, 요한은 그 아래쪽 끝을 잡고 아기 그리스도는 위쪽 고리를 움켜쥔다. 마리아 옷의 목둘레 금빛 테두리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뜻의 RAPHAEL VRBINAS가 적혀 있다.
바사리 시절에 그림은 아직 카니자니의 상속자들에게 있었다. 그림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가 새 사위인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에게 보낸 선물로 뒤셀도르프에 왔고, 1806년 미술관과 함께 뮌헨으로 옮겨졌다. 조넨부르크는 1983년 전시 도록의 부제에서 이 그림을 독일에 들어온 첫 라파엘로 그림이라고 불렀다.
9.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짐》, 1632~1633년
네덜란드 공화국의 군사와 정치를 이끈 총독 오라녜 공 프레데릭 헨드릭이 렘브란트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짐》과 《십자가를 세움》을 주문했다. 주문은 1631~1632년 무렵에 들어왔고, 아마도 일찍부터 젊은 렘브란트를 칭찬해 온 총독의 비서 콘스탄테인 하위헌스를 거쳤을 것이다. 화가는 스물다섯 살 안팎이었고, 그 무렵 레이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갔다.
렘브란트는 구도를 루벤스의 그림, 곧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 가져왔고, 그 그림은 1620년 뤼카스 보르스테르만의 판화로 알고 있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늘어뜨린 흰 천과 위에서 그 천을 붙잡은 사람이라는 루벤스의 구성은 그대로 두고, 그리스도의 몸은 무겁고 여위고 힘없게 그렸다.
패널은 위쪽이 둥글고, 빛은 그림 밖 어딘가 앞쪽 왼편 위에서 들어와 천과 몸만 비추며, 그 주위는 모두 갈색과 검은색 속에 잠긴다. 모피 모자를 쓴 남자가 가로대 위로 몸을 숙여 천을 내리고, 천은 길고 흰 띠가 되어 떨어진다. 그리스도는 그 천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는데, 오른팔은 아직 들려 있고 머리는 왼쪽 어깨로 떨어졌으며 다리는 늘어져 있다. 왼쪽 사다리 위에서는 파란 웃옷을 입은 젊은이가 그리스도의 들린 팔을 끌어안고 손목에 뺨을 대고 있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오랜 전통에 따라 사람들은 그를 렘브란트 자신으로 본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진주 끈을 감은 터번에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검은 망토를 입은 노인이 옆모습으로 서서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시간이 흐르며 총독을 위한 연작은 일곱 점으로 늘었다. 렘브란트는 그 가운데 나중 그림들에 관해 하위헌스에게 편지를 썼고, 1636~1639년의 이 편지 일곱 통은 화가의 편지로 지금까지 남은 유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1639년 그는 마지막 두 그림이 늦어진 것은 그 그림들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얻으려 애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68년 프레데릭 헨드릭의 미망인 아말리아 판 솔름스의 재산 목록에는 검은 액자에 든 일곱 점이 모두 올라 있고, 1719년 요한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미술관 인쇄본 목록에도 일곱 점이 모두 실려 있다. 그림들이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 알려 주는 문서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1719년에서 1756년 사이에 《할례》가 사라져 지금은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는 복제화로만 알려져 있고, 1806년 뮌헨에는 여섯 점이 왔다. 1755~1756년 만하임의 궁정 화가 필리프 히에로니무스 브링크만이 여섯 점을 모두 복원했고, 《부활》 뒷면에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만들었고 자신이 되살렸다는 라틴어 글을 1755년이라는 연도와 함께 남겼다.
그림을 내놓은 도시와 수도원 (1805~1812)

10.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1800~1801년 프랑스군이 뉘른베르크를 점령했을 때 뒤러의 자화상은 시청에 걸려 있었고, 위원 뇌뵈는 자화상을 징발해 파리로 가져갔는데, 그 그림은 나중에 복제화로 밝혀졌다. 1805년, 뉘른베르크가 바이에른에 편입되기 얼마 전에, 두 뉘른베르크 사람, 곧 시 관리 게오르크 구스타프 페츠 폰 리히텐호프와 그림상 아브라함 볼프강 퀴프너가 원본을 600굴덴에 뮌헨에 팔았다.
원본이 정확히 어떻게 시청을 떠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후대의 전설에 따르면 복원가 퀴프너가 패널을 톱으로 켜서 뒷면에 봉인이 찍힌 복제화를 시에 남기고 원본을 팔았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뒤러 하우스의 관장 토마스 샤우에르테는 2012년 다른 설을 내놓았는데, 페츠와 퀴프너가 원본이 프랑스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부러 그림을 바꿔치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르만 국립박물관의 다니엘 헤스는 더 단순한 설명도 가능하다고 본다. 1711년 재산 목록에 그 그림이 없으므로, 점령 당시 원본은 이미 시의 소유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뒤러는 성화에서 구세주를 그리던 방식대로 자신을 정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그렸고, 미술관도 이 본보기를 분명히 밝힌다. 머리카락은 가르마를 타서 고른 나선형 곱슬이 되어 어깨까지 내려오고, 갈색 모피 코트에는 넓은 모피 깃이 달려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라가 집게손가락이 모피를 만진다. 왼쪽 눈높이에는 금색으로 1500이라는 연도와 모노그램 AD가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네 줄짜리 라틴어 글이 있는데, 미술관의 번역에 따르면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스물여덟 살에 알맞은 물감으로 자신을 이렇게 그렸다는 내용이다. 뉘른베르크의 사치 금지법에 따라 담비 모피는 도시의 최상층만 입을 수 있었는데, 뒤러는 신분상 장인이었고 1509년에야 대평의회에 들어갔다. 미술사가 필리프 치츨슈페르거는 2008년 이 점을 근거로 초상화가 1509년 무렵에 그려졌고 연도가 든 글은 나중에 덧붙였다고 추정했다. 미술관은 1500년이라는 연도를 고수한다.
뇌뵈가 가져간 복제화는 1815년 프랑스가 돌려주었는데, 그사이 뉘른베르크가 바이에른 땅이 되었으므로 뮌헨으로 보내졌다. 바이에른 컬렉션에는 원본과 함께, 미술관 기록으로 16세기나 17세기에 만들어진 이 복제화도 있다.

11. 미하엘 파허 《교부 제단화》, 1480년경
네 교부, 곧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암브로시우스 위로 금박 잎사귀가 달린 분홍빛 고딕 닫집이 솟아 있고, 양옆 벽감에는 회색 석조 성인 조각상들이 서 있는데, 이 모두가 스위스잣나무 패널에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파허는 조각 제단을, 그것도 돌을 깎아 만든 제단을 그렸다. 그 자신이 조각가이자 화가였고, 1467년부터 티롤의 브루네크에서 당대에 가장 일이 많은 제단 공방 가운데 하나를 운영했다. 같은 무렵 그는 장크트볼프강을 위해 가운데 부분은 나무로 조각하고 날개는 그림으로 채운 제단을 만들었다.
역사가들은 파허가 파도바에서 만테냐의 작품을 보았다고 여기며, 색 타일 바닥의 가파른 원근법과 관람자 쪽으로 내민 독서대와 요람을 그 영향으로 본다. 히에로니무스의 발치에서는 등을 보인 사자가 가시 박힌 발을 들고 있고, 그 발에서 피가 타일 위로 떨어진다. 그레고리우스의 패널에서는 아래 가장자리의 노란 불꽃 속에서 왕관을 쓴 흰머리의 거의 벌거벗은 남자가 두 팔을 위로 뻗으며 올라오고, 교황이 그의 손에 손을 댄다. 이 남자는 그레고리우스의 기도로 연옥에서 풀려났다고 전해지는 트라야누스 황제다.
제단화는 남티롤 브릭센 근처 노이슈티프트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참사 수도회 교회를 위해 그려졌고, 주문자는 수도원장 레온하르트 파허로 여겨진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티롤이 바이에른에 넘어가자 바이에른 정부는 티롤의 수도원들을 해산했고, 노이슈티프트는 1807년에 문을 닫았다. 수도원이 스스로 전하는 역사에는 바이에른 사람들이 수도원을 약탈하고 책과 미술품을 몇 톤씩 실어 갔다고 적혀 있으며, 그 가운데 파허의 제단화가 이름으로 나온다.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제단화는 1812년 세속화된 수도원의 재산으로 뮌헨에 들어왔다.
1814년 티롤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갔고, 1816년 프란츠 황제가 노이슈티프트를 다시 세워 황폐해진 수도원에 크게 줄어든 공동체가 돌아왔지만, 제단화는 뮌헨에 남았다.

공공 미술관을 위해 그림을 산 왕 (1820년대)
12.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성 콜룸바 제단화, 1455년경
쾰른 상인의 아들인 줄피츠 부아세레와 멜히오르 부아세레 형제는 1808년 쾰른의 성 콜룸바 교회에 있던 삼면 제단화를 샀다. 형제는 프랑스의 세속화로 쾰른 시장에 쏟아져 나온 교회 미술품을 모으고 있었다. 교회 자체는 프랑스 치하에서도 본당으로 남아 1943년 폭격으로 거의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서 있었고, 제단화를 판 사람은 연구자들도 끝내 찾지 못했다.
부아세레 형제는 이 제단화를 얀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여겼고, 그것은 그들 컬렉션의 대표작이었다. 컬렉션은 1810년부터 1819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 있었고, 1814년과 1815년에 괴테가 그곳에서 컬렉션을 보고 그 ‘반 에이크’에 감탄했다. 그 뒤 컬렉션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전시되었고, 1827년 국왕 루트비히 1세가 뮌헨에 짓고 있던 미술관을 위해 컬렉션 전체를 사들였다. 제단화가 브뤼셀의 시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은 1841년이었다.

쾰른은 동방 박사 세 사람을 공경했고, 그들의 유해는 1164년부터 대성당에 모셔져 있었다. 로히어르는 삼면 제단화의 가운데 패널에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그렸다. 지붕에 구멍이 난 초가 마구간이 돌 폐허 사이에 서 있고, 짙푸른 옷을 입은 마리아가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 아기를 무릎에 안고 앉아 있으며, 그녀의 머리 바로 위 가운데 기둥에는 작은 십자가상이 걸려 있다. 검은 옷에 금빛 장식을 한 가장 나이 많은 박사는 무릎을 꿇고 아기의 손을 입술로 가져가고, 그의 빨간 모자는 바닥에 놓여 있다. 붉은 바탕에 금실을 넣은 비단옷을 입은 가장 젊은 박사는 오른쪽 가장자리에 서서 긴 흰 스카프가 달린 모자를 높이 들었고, 그의 발치 구석에는 흰 그레이하운드가 누워 있다. 왼쪽의 낮게 무너진 담장 뒤에는 빨간 묵주를 든 검은 옷의 주문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 역사가들은 지금도 논쟁한다. 오른쪽 위 구석 바깥으로는 밝은 원형 성전이 보이고, 그 안, 곧 오른쪽 날개에서는 시메온이 마리아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는다.
13. 라파엘로 《템피 마돈나》, 1507~1508년경
마리아는 두 손으로 아기를 가슴에 꼭 안고 뺨을 아기 뺨에 대고 있으며, 눈은 거의 감았고 입술에는 미소가 어려 있다. 아기는 어머니 얼굴에 얼굴을 묻었지만 검은 눈으로 관람자를 곁눈질하고, 둘 가운데 바깥을 보는 것은 아기뿐이다. 마리아는 소매가 부푼 분홍빛 윗옷을 입고, 아래로 갈수록 거의 검게 변하는 청록색 망토를 둘렀으며, 망토 왼쪽 아래 가장자리에는 가는 금빛 테두리가 있다. 후광은 머리카락처럼 가는 금빛 고리로 그어져 있어서 하늘 배경에서는 놓치기 쉽다. 배경은 거의 전부 초록빛 도는 옅은 하늘색이고, 아래쪽 양옆으로만 물과 작은 마을과 탑이 있는 풍경이 좁게 보인다. 같은 피렌체 시절에 그린 《카니자니 성가족》에서 라파엘로는 인물을 다섯 그렸고, 여기서는 둘만 그렸다.
1808년 8월 20일, 바이에른 왕세자 루트비히의 부탁으로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던 요한 게오르크 폰 딜리스는 왕세자에게 편지를 보내, 피렌체의 템피 후작 저택에 라파엘로 전성기의 그림으로 아기를 어루만지는 성모가 있다고 알리고 그 그림의 판화를 함께 보냈다. 1809년부터 루트비히는 편지가 뜯겨 읽힐까 염려해 편지에서 이 그림을 ‘비둘기’라고 불렀다. 협상은 피렌체에서 뮌헨의 대리인으로 일하던 요한 메츠거가 맡았다. 1811년 템피가 팔기를 거절하자, 메츠거는 후작의 애인인 넨치니 부인에게 그를 설득해 주면 체키노 금화 100닢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1824년 메츠거는 후작이 시에나 근처 온천에서 요양하는 동안 다시 흥정에 나서, 중개인을 통해 그에게 이름난 컬렉션은 라파엘로 한 점 없이도 지낼 수 있고 그림 한 점이 컬렉션을 이루지는 못한다고 설득했다. 게다가 그림이 불에 탈 수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는데, 한 주 전에 같은 거리의 저택에 벼락이 떨어진 일이 있었다. 1820년대 말, 프로이센 사람들까지 이 그림을 노리기 시작했을 때 메츠거는 마침내 그림을 샀다. 딜리스의 첫 편지로부터 거의 20년 만이었다.
피렌체의 한 관리는 이 그림을 도시의 뛰어난 기념물로 보고 반출을 막으려 했지만,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는 판매 사실을 몰랐다고 답했고, 그의 말로는 오로지 바이에른 국왕의 바람을 들어주려고 반출을 허락했다. 뮌헨에서 루트비히는 이 그림을 개인 기도를 위해 레지덴츠 궁전의 성 체칠리아 예배당에 두었고, 1835~1836년에야 국왕의 소유물로서 피나코테크에 넘겼다. 1923년 바이에른주와 옛 왕가가 재산을 나눈 뒤로 이 그림은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의 소유이며, 장기 대여로 주에 맡겨져 있다.

시장에 나선 미술관 (1889~1917)

14. 레오나르도 다 빈치 《카네이션의 성모》, 1475년경
약사 아우구스트 베츨러는 1865년부터 1881년까지 바이에른 슈바벤 지방, 도나우 강변의 귄츠부르크에서 오베레 약국을 운영하며 화석을 모았다. 그가 이 패널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881년 그가 죽은 뒤 패널은 미망인에게, 이어 결혼하지 않은 그의 누이 테레제에게 넘어갔고, 1885년 11월 테레제마저 죽자 집안 재산이 모두 경매에 부쳐졌다. 1886년 4월 6~7일 경매에서 아무 작가 표시 없는 이 패널은 5마르크로 평가되었고, 의사 알베르트 하우크가 다른 주민과 값을 겨룬 끝에 47마르크 50페니히에 샀다.
1889년 4월 하우크는 이 패널을,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배운 스승 베로키오의 공방 작품으로서 알테 피나코테크에 800마르크에 팔았다. 같은 해 가을 연구자 하인리히 폰 가이뮐러가 레오나르도 본인을 작가로 지목했다. 논쟁은 그 뒤로도 반세기 동안 이어져, 패널은 베로키오, 로렌초 디 크레디, 공방, 사라진 레오나르도 그림을 베낀 사람 등에게 돌려졌고, 1937~1938년 에밀 묄러가 연구를 발표한 뒤에야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인정되었다. 독일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이것 하나뿐이다.
젊은 마리아는 패널 가운데, 가슴의 검은 브로치 곁에 가는 줄기에 달린 작은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있고, 왼쪽 아래 쿠션에 앉은 묵직한 벌거숭이 아기가 두 손을 꽃으로 뻗으며 한쪽 다리를 치켜든다. 카네이션은 흔히 그리스도가 앞으로 겪을 수난의 표시로 읽힌다. 마리아 뒤 어두운 벽에는 가는 기둥으로 나뉜 아치 창이 둘씩 모두 넷 있고, 그 창으로 금빛 산기슭 위에 솟은 청회색의 들쭉날쭉한 봉우리들이 보인다. 오른쪽 아래 턱 위에는 금박 받침에 꽂힌, 꼬인 다리의 유리 꽃병이 연한 빛깔의 꽃을 가득 담고 서 있다. 바사리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가지고 있던 레오나르도의 성모 그림에 그려진 꽃병을 칭찬했는데, 미술관은 이 꽃병을 근거로 뮌헨의 패널을 그 그림과 연결한다. 다만 교황과 귄츠부르크의 약국 사이에는 문서 한 장 없는 3세기 반이 놓여 있다.
마리아의 얼굴과 목과 가슴은 물감이 쪼그라든 듯 잔주름으로 덮여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실험이라고 부르며, 2006년 되르너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젊은 레오나르도가 기름과 안료의 비율을 잘못 잡아서 물감이 마르면서 주름이 졌다.
15. 엘 그레코와 공방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엘 엑스폴리오), 1580~1595년
엘 그레코는 1577~1579년 톨레도 대성당의 성구실을 위해 큰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을 그렸고, 이것이 그가 이 도시에서 받은 첫 큰 주문이었다. 대성당 참사회는 보수를 두고 화가와 다투었고, 아래쪽의 세 마리아와, 그리스도보다 머리가 높이 올라간 인물들에 이의를 제기했다.

1580년대부터 엘 그레코의 공방은 반응이 좋았던 구도를 작은 크기로 되풀이해 그렸다. 엘 그레코 작품 목록을 펴낸 웨시는 화가 자신과 공방, 그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저마다 다른 몫을 맡아 그린 《엘 엑스폴리오》 판본을 19점으로 셌다. 미술관은 뮌헨의 캔버스를 공방도 함께 작업한 진품 반복작으로 보며, 이 그림은 흔히 다른 후기 판본들보다 높이 평가된다.
그리스도는 그림에서 가장 밝은 부분인 진홍색 옷을 입고 가운데에 서서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들고 있으며, 그 주위와 위로 머리들, 투구, 빨간 터번, 깃털, 빽빽한 미늘창이 폭풍우 치는 하늘을 배경으로 몰려 있다. 초록 셔츠를 입은 남자가 근육질의 맨팔을 그리스도 앞으로 뻗어 허리께의 옷과 밧줄을 움켜쥔다. 왼쪽에는 흰 주름 깃을 단 검은 강철 갑옷 차림의 수염 난 남자가 꼼짝 않고 서서 관람자 너머를 본다. 왼쪽 아래에는 세 마리아가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밝은 색 땋은 머리에 큰 황금빛 노란 망토를 걸치고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오른쪽 아래에서는 흰 셔츠에 노란 윗옷을 입은 일꾼이 십자가 위로 몸을 굽혀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리스도의 맨발 곁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흩어져 있다.
1909년 바이에른 주립 컬렉션의 새 관장 후고 폰 추디가 파리의 미술상에게서 이 캔버스를 샀다. 추디는 얼마 전 독일 황제의 압력으로 베를린 국립미술관을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 당시 엘 그레코는 현대 회화의 선구자로 다시 발견되고 있었다. 미술사가 카를 유스티는 후기 엘 그레코를 병적인 퇴화의 사례라고 불렀고, 1908년 에스파냐를 다녀온 비평가 율리우스 마이어그레페는 그를 미켈란젤로, 루벤스, 렘브란트와 나란히 놓았다. 1911년 6월부터 1912년 1월까지 이 캔버스는 알테 피나코테크에서 수집가 마르첼 폰 네메시 컬렉션의 엘 그레코 그림 여덟 점과 함께 걸렸고, 많은 독일 화가들이 거기서 처음으로 엘 그레코를 보았다. 1912년에 나온 화가들의 연감 《청기사》에서 엘 그레코는 몇 안 되는 옛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실렸다.
16. 대 피터르 브뤼헐 《코케인의 땅》, 1567년
1917년 12월 4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작고한 수집가 리하르트 폰 카우프만의 컬렉션이 베를린에서 경매에 나왔고, 경매는 파울 카시러와 후고 헬빙이 진행했다. 스위스의 외과의이자 수집가 오토 란츠는 브뤼헐의 작은 패널에 31만 마르크를 불러 알테 피나코테크를 위해 낙찰받았다. 돈은 란츠 자신과 카시러, 헬빙,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부자 몇 사람이 함께 모았고, 수집가의 미망인 마리아 폰 카우프만은 판매 대금의 일부를 미술관을 위해 포기했다.
그 전에 이 패널은 프라하의 황제 루돌프 2세가 가지고 있었다.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 스웨덴군이 이 그림을 가져갔고, 그림은 스웨덴의 스코클로스테르성에 있게 되었다. 1900년 무렵 그림은 파리 미술 시장에 나타났고, 아마도 스위스 브베의 수집가 앙리 로시에의 손을 거쳐 카우프만에게 넘어갔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줄기를 둘러 둥근 식탁 판이 관람자 쪽으로 기울어진 채 고정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파이와 구운 새, 쓰러진 주전자가 놓여 있다. 그 아래에는 세 사람이 줄기를 중심으로 바퀴살처럼 뻗어 누워 있다. 사슬 갑옷 소매에 빨간 줄무늬 바지를 입은 병사는 빨간 쿠션 위에 반듯이 누워 자고, 그 곁에 창과 쇠 장갑이 있다. 흰 셔츠를 입은 농부는 얼굴을 돌린 채 도리깨를 깔고 옆으로 누워 잔다. 분홍 옷을 입은 학자는 모피를 댄 망토 위에 누워 있고, 곁에 책과 종이가 있으며 허리에 잉크병을 찼는데, 그는 눈을 뜨고 있어 혼자만 잠들지 않은 채 곧장 위를 바라본다. 왼쪽에서는 둥근 파이로 지붕을 인 차양 아래 투구를 쓴 남자가 입을 벌리고 앉아 있고, 오른쪽에서는 등에 칼이 꽂힌 구운 새끼 돼지가 풀밭을 달리며, 아래 가운데에서는 윗부분이 잘린 삶은 달걀이 속에 칼을 꽂은 채 두 다리로 걸어가고, 식탁 너머로는 소시지로 엮은 울타리가 이어진다. 이 세부들을 가져온 1546년의 플랑드르 책에 따르면, 게으름뱅이들의 나라 코케인에 가려면 죽으로 된 산을 먹어서 뚫고 나가야 하는데, 오른쪽 위 구석에서는 숟가락을 든 남자가 소용돌이치는 잿빛 구름에서 거꾸로 빠져나온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작은 글씨로 M.D.LXVII BRVEGEL이라고 적혀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의 구입 경위를 다룬 별도의 페이지에서 그 일에 관여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한다. 마리아 폰 카우프만의 아들은 1933년 아르헨티나 주재 대사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란츠의 미망인은 그의 컬렉션을 제값보다 싸게 팔아야 했으며, 후고 헬빙은 면허를 잃었다. 1938년 그의 회사는 문을 닫았고, 같은 해 11월 ‘수정의 밤’ 포그롬 때 그는 폭행을 당했으며, 몇 주 뒤 세상을 떠났다.

전쟁 뒤의 구입과 공격 (1953~1971)

17. 렘브란트 《자화상》, 1629년
렘브란트는 이마 위의 곱슬머리를 아직 마르지 않은 어두운 물감 위에 뾰족한 것으로 긁어 냈고, 긁힌 자국 사이로 밝은 황토색 밑층이 드러나 머리카락이 철사처럼 가늘고 밝은 고리 모양으로 말려 있다. 패널은 손바닥만 한 크기이고, 머리와 어깨만 그려져 있다. 스물세 살의 화가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어깨 너머로 관람자 쪽을 돌아본다. 빛은 왼쪽에서 귀와 뺨, 목과 옷깃에 떨어지고 코끝과 입술, 턱을 스치지만, 눈과 이마는 머리카락 아래 그늘에 남아 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다. 흰 옷깃은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하게 두텁게 칠해져 있어 그림 전체에서 물감이 가장 두껍다. 미술관은 이 패널을, 렘브란트가 자기 얼굴을 가지고 빛과 그림자, 표정, 그리고 젖은 물감을 긁어 내는 것 같은 기법을 시험한 레이던 시기의 습작으로 분류한다.
1803년에는 이미 이 패널이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2세의 컬렉션에 있었고, 1842년부터는 고타의 프리덴슈타인성에서 전시되었다. 전쟁 중에는 고타 근처의 라인하르츠브룬성으로 옮겨졌다가 1945년 공작 가문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1946년 1월과 2월, 공작 가문은 소련군의 전리품 수집반이 두렵다는 이유를 대며 그림을 소련 점령 지역이 된 고타에서 미국 점령 지역인 코부르크로 몰래 옮겼다. 반출을 꾸민 사람은 공작 가문 박물관의 전임 관장이었고, 그는 당시 관장 자리에 있던 사람의 동의도, 컬렉션을 소유한 재단의 동의도 얻지 않았다. 1953년 가문은 이 그림을 바이에른 주립 회화 컬렉션에 7만 5000독일마르크에 팔았다.
고타의 프리덴슈타인 재단은 이 반출이 불법이었다고 말한다. 뮌헨은 그림을 선의로 샀고, 독일 법에 따르면 이전 소유자의 청구권은 분실 뒤 30년이 지나면 소멸하는데, 고타의 경우 그 기한은 1976년에 끝났다.

18. 페테르 파울 루벤스 《지옥으로 떨어지는 죄인들》, 1620년경
1959년 2월 26일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서, 발터 파울 멘츨이 이 패널에 부식성 액체를 끼얹었다. 패널은 1806년 뒤셀도르프 미술관이 옮겨 올 때부터 뮌헨에 있었다. 신문들은 산이라고 썼지만, 아마 페인트 제거제였을 것이다. 멘츨은 자신을 철학자라고 했고, 1956년 무렵 보덴호 연안의 위버링겐에 ‘철학 아카데미’를 세웠지만 학생은 한 명도 오지 않았으며, 이 공격으로 자신의 세계 평화 학설에 관심을 끌려고 했다. 이튿날 그는 한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발견되었고,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했다.
2월 27일 패널은 피나코테크에서 실려 나가 복원을 위해 중앙미술사연구소 건물로 옮겨졌다. 신문들은 아마 복구가 어려울 것이라고 썼고, 그림이 보험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복원은 수석 복원가 헤르만 로에가 맡았고,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액체는 위쪽 가장자리 조금 아래에 맞았다.

《대 최후의 심판》에서 루벤스는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이들까지 그렸지만, 이 패널에는 추락만 남았다. 위쪽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는 빨강과 파랑 옷을 입은 대천사 미카엘이 날개를 활짝 펴고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는 둥근 방패를 들고 있고, 거기서 희미한 빛줄기가 검은 구름을 뚫고 왼쪽 아래로 뻗는다. 오른쪽 위에서 벌거벗은 몸들이 쏟아져 내리는데 상당수가 거꾸로 떨어지고, 그 흐름은 아래로 갈수록 넓어진다.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에서는 회녹색 악마들이 뚱뚱한 벌거벗은 남녀를 끌고 가는데, 그 가운데 한 여자는 둥근 얼굴로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 연구자 데이비드 프리드버그의 관찰에 따르면 루벤스는 이 뚱뚱한 인물들을 만테냐의 판화 《실레노스가 있는 바쿠스 축제》에서 가져왔다.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에는 아가리를 벌린 용과 뱀의 머리들이 엉켜 있고, 높이의 3분의 2쯤 되는 곳부터 몸들은 더 떨어지지 않고 그림을 가로질러 끌려간다. 오른쪽과 아래쪽에서는 노랗고 주황빛인 불이 타오른다.
1959년 7월 15일 뮌헨 법원은 멘츨에게 징역 3년과 80만 마르크의 손해 배상을 선고했고, 그는 그 돈을 끝내 갚지 않았다.
19. 프란스 할스 《빌럼 판 헤이트하위선의 초상》, 1625년경
하를럼의 모직물 상인 빌럼 판 헤이트하위선은 자기 집의 큰 방에 걸 초상화를 할스에게 주문했고, 1650년 그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 목록에도 초상화는 그 방에 올라 있다. 할스의 작품 가운데 남자 한 사람을 실물 크기 전신으로 그린 초상화로 알려진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1620년대 네덜란드에서 전신을 실물 크기로 그리는 초상화는 보통 제후와 귀족의 몫이었다.
헤이트하위선은 다리를 꼬고 서 있고, 우리는 그를 약간 아래에서 올려다본다. 그는 왼손을 허리에 짚어 팔꿈치를 내밀고, 오른손은 은으로 된 투각 칼자루에 얹었으며, 칼집에 든 레이피어의 끝은 바닥을 짚고 있다. 그에게는 군대 계급이 없었고, 할스 연구자 클라우스 그림은 이 레이피어를 의례용 선물로 본다. 검은 옷은 무늬 있는 다마스크로 지어, 빛이 떨어지는 곳에서는 큼직한 꽃무늬가 잿빛으로 반짝인다. 머리에는 챙 넓은 검은 모자를 썼고, 턱 밑에는 넓고 흰 주름 깃을, 손목에는 레이스 소맷부리를 둘렀다. 뒤로는 포도주 빛 붉은 휘장이 드리워 있고, 왼쪽 멀리 아케이드가 있는 정원에는 작은 사람 둘이 앉아 있는데, 클라우스 그림은 이 정원을 할스의 하를럼 동료 피터르 더 몰레인의 솜씨로 본다. 헤이트하위선의 오른발 곁 바닥에는 분홍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는데, 클라우스 그림에 따르면 이것은 할스가 직접 그린 것으로, 그의 작품에 남은 정물 부분 두 곳 가운데 하나다.
1800년 이 초상화는 하를럼에서 51굴덴에 팔렸다. 1821년 리히텐슈타인 공 요한 1세가 바르톨로메우스 판 데르 헬스트의 작품으로 알고 이 그림을 샀고, 1866년에야 독일의 감식가 구스타프 바겐이 이 그림을 할스의 것으로 되돌려 놓았다. 1969년 바이에른주는 체코의 영지를 잃은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그림을 팔고 있을 때 프란츠 요제프 2세 공에게서 이 초상화를 사서 알테 피나코테크에 들였다. 그 두 해 전인 1967년에는 같은 컬렉션에서 레오나르도의 《지네브라 데 벤치》가 워싱턴으로 갔다.


20.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6년
1938년 3월 14일, 오스트리아 병합 이틀 뒤, 게슈타포는 알퐁스 로스차일드와 클라리스 로스차일드 부부의 빈 저택을 봉인하고 이 초상화를 비롯한 그들의 그림을 몰수해 빈 미술사 박물관의 수장고로 옮겼다. 1939년 7월, 히틀러가 린츠에 세우려던 미술관을 위해 몰수된 그림들을 고르던 한스 포세는 이 후작 부인의 초상화를 포함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프랑스 그림들을 빈 미술사 박물관 몫으로 정했다.
루이 15세가 총애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캔버스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긴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고, 작은 분홍 장미 꽃줄과 주름 장식을 단 청록색 비단의 거대한 치마가 캔버스 아래쪽 절반에 펼쳐져 있으며, 보디스를 따라 분홍 리본이 사다리처럼 줄지어 내려간다. 그녀는 관람자를 비켜 옆쪽을 바라보며 무릎 위에 펼친 책을 들고 있다. 오른쪽 작은 책상 위에는 다 타서 꺼진 초가 꽂힌 은 촛대가 서 있고, 빨간 봉인을 찍은 접힌 편지, 빨간 봉랍 막대, 금박을 입힌 작은 도장이 놓여 있으며, 빼낸 서랍의 잉크병에는 깃펜이 꽂혀 있다. 왼쪽 치맛자락 곁에는 검은색과 적갈색 털의 스패니얼이 앉아 있고, 그 뒤로 판화와 악보가 보인다. 그녀 뒤의 큰 거울에는 그녀의 뒷머리와, 가죽 장정 책이 꽂힌 책장, 그 위에 놓인 큐피드 장식 시계가 비친다.
부셰는 그녀가 가장 아낀 화가였고 그녀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미술관에 따르면 후작 부인이 직접 이 초상화를 주문했고, 1757년 부셰는 이 그림을 살롱전에 내놓았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던 1756년 초, 그녀는 궁정에서 왕비의 시녀라는 공식 직위를 얻었다.
초상화는 후작 부인의 동생 마리니 후작에게 넘어갔고, 나중에 론즈데일 백작의 손에 들어갔으며, 1887년 론즈데일 컬렉션 매각 때 페르디난트 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사서 런던 피커딜리의 자기 집에 걸었다. 1898년 페르디난트가 죽은 뒤 그림은 빈의 형 나타니엘에게 갔고, 옛 액자는 영국 워즈던에 남았다. 나타니엘에게서 초상화는 알퐁스에게 넘어갔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림은 1942년에 남편을 잃은 클라리스 로스차일드에게 돌아갔고, 그녀는 그림을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림은 뉴욕의 와일든스타인 화랑을 거쳐 팔렸고, 1971년 바이에른 저당어음은행이 사서 그때부터 장기 대여로 알테 피나코테크에 맡겨 두었다. 이 은행은 지금 히포페어아인스방크라는 이름으로 우니크레디트 그룹에 속해 있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들
독일 회화로는 알트도르퍼의 《숲속의 성 게오르기우스》, 파움가르트너 제단화와 같은 날 황산 공격을 받은 뒤러의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와 그의 《루크레티아의 자결》, 그뤼네발트의 《성 에라스무스와 성 마우리티우스》를 찾아볼 만하다. 부아세레 컬렉션에서 온 작품으로는 멤링의 《성모의 일곱 기쁨》이 있다.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에는 세 번째 라파엘로인 《마돈나 델라 텐다》, 보티첼리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을 위해 그린 연작에 속한 틴토레토의 캔버스 여덟 점이 있다. 루벤스의 작품으로는 첫 아내 이자벨라 브란트와 함께 인동덩굴 그늘 아래 앉은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볼 만한데, 1609년 두 사람이 결혼한 직후에 그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