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870년, 건물도 없고 소장품도 한 점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다. 뉴욕의 변호사와 은행가, 미술가들이 이 도시에도 유럽의 큰 미술관에 견줄 만한 곳이 필요하다고 뜻을 모아 5번가에 방을 빌리고 회화와 고대 유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처음 소장품이 된 것은 로마 시대의 석관으로, 키프로스 주재 미국 영사가 기증했다. 오늘날 소장품은 약 200만 점, 뗀석기부터 잭슨 폴록의 그림까지 있으며, 한 번의 방문으로 전부 도는 것은 체력적으로 불가능하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면 우선순위를 둘 만한 열다섯 점을 안내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세워진 이집트 신전에서 시작해 19세기 말 콩고의 목조상으로 끝맺는다.

1. 덴두르 신전

1968년 브루클린 부두에 화물선 한 척이 들어왔다. 실린 것은 이탈리아산 치즈, 토마토 통조림, 칵테일용 체리 병조림, 그리고 고대 이집트 신전이었다. 덴두르 신전은 640개가 넘는 나무 상자에 나뉘어 선창에 실려 있었다. 사암 블록의 무게는 800톤이 넘었다.

The Temple of Dendur in the Sackler Wing
The Temple of Dendur in the Sackler WingWikimedia Commons, CC BY 4.0
The Temple of Dendur: Augustus in pharaonic dress before Egyptian gods
The Temple of Dendur: Augustus in pharaonic dress before Egyptian gods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신전 벽에는 날짜가 붙은 이름이 수십 개 새겨져 있다. 19세기에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간 유럽인들이 남긴 것이다. 당시에는 고대 유적에 이름을 새기는 일이 여행자의 평범한 행동으로 여겨졌고, 덴두르에는 그런 서명이 유난히 많이 남았다.

신전은 기원전 10년 무렵에 세워져 이시스에게 바쳐졌다. 이시스는 이집트에서 오시리스의 아내이자 죽은 자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로마 시대에 이르러 그 신앙은 지중해 전역으로, 로마 시내에까지 퍼져 있었다. 여신과 함께 이 지역의 두 형제 페데시와 피호르도 모셔졌다. 누비아 족장의 아들들로, 나일강에서 익사한 이들이다. 이집트인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물이 택한 자, 신에게 가까운 자로 여겼기에 두 형제는 사후에 지역 신이 되었고 신전은 그들의 무덤 곁에 세워졌다.

문을 지나 들어가면 먼저 하늘이 열린 안뜰이 있고, 그다음이 기둥이 늘어선 현관, 그 안쪽이 봉헌실, 가장 깊은 곳이 신상을 모신 지성소다. 안으로 갈수록 바닥은 높아지고 천장은 낮아지며 빛은 줄고 방은 좁아진다. 이집트 신전은 거의 모두 이렇게 지어졌다. 건물 자체가 바깥 세계에서 신의 거처에 이르는 길을 나타냈고, 그 길의 끝에는 참배객이 남지 않고 사제만 남았기 때문이다.

입구의 부조에는 상하 이집트의 이중관을 쓴 통치자가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모습이 있다. 그 이전 천오백 년 동안 파라오를 그려온 자세와 똑같다. 이 통치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이며, 신전은 그의 치세에 지어졌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꺾은 뒤 로마는 이집트를 차지했고, 지방의 성소에서는 이 나라의 새 주인이 옛 왕들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집트 신전에는 제물을 바치는 파라오가 필요했고, 토가를 걸친 로마 황제는 그 자리에 아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이집트가 아스완 하이댐 공사를 시작하면서 이 일대의 계곡은 수십 곳의 유적과 함께 물에 잠길 처지가 되었다. 유네스코가 국제 구제 운동을 벌였고 미국이 상당한 자금을 댔으며, 그 답례로 이집트는 1965년 덴두르 신전을 미국에 선물했다. 그 시점에 신전은 이미 2년 전 이집트 복원가들의 손에 블록 단위로 해체된 상태였다. 이후 미국의 여러 도시가 각자의 계획을 들고 2년 동안 이 선물을 두고 다투었고, 1967년 존슨 대통령이 메트로폴리탄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재조립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두 가지 표시를 동시에 썼다. 하나는 1963년 해체 전에 이집트인들이 블록에 적어둔 번호이고, 다른 하나는 신전을 처음 세운 고대 석공들이 남긴 표식이다. 그 과정에서 돌을 물에 담가야 했다. 사암은 강가에서 2000년 동안 염분을 빨아들였는데, 이런 염분은 표면 가까이에서 결정으로 자라며 돌의 겉면을 얇게 들어올려 떨어뜨린다. 염분을 빼지 않았다면 부조는 뉴욕에서 맞는 첫여름에 부서졌을 수도 있다.

일반 공개는 1978년 9월, 센트럴파크를 향한 유리벽이 있는 새 전시관에서 이루어졌다. 신전 앞에는 나일강을 대신하는 얕은 수반이 놓였고, 뒤에는 2000년 동안 신전이 기대어 서 있던 절벽을 대신하는 비스듬한 벽이 세워졌다.

2. 한간 《조야백》

말은 말뚝에 매인 채 고삐에 저항하고 있다. 앞다리 하나가 들리고 머리는 옆으로 돌아갔으며 줄은 팽팽하고 눈은 크게 뜨였고 콧구멍은 벌어져 있다. 짙은 선은 머리와 갈기와 다리에 모여 있고 몸통은 거의 비워둔 채다.

조야백은 8세기 전반 중국을 다스린 현종 황제의 백마 이름이다. 황실 마구간의 말은 궁정 의례의 일부였고, 뛰어난 말은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사람의 초상을 주문하듯 말의 초상도 주문되었다.

이 그림은 같은 시기의 궁정화가 한간의 작품으로 전한다. 그는 거의 말만 그렸다. 어떻게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전설이 있다. 황제가 이름난 말 그림 화가에게 배우라고 명하자 한간은 이를 사양하며, 자기에게는 이미 스승이 있으니 황실 마구간의 말들이고 직접 가서 본다고 답했다. 후대 중국 비평가들은 이 일화를 되풀이해 인용하며 그의 말이 왜 무겁고 살집 있게 그려졌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전에는 가늘고 우아한 말이 통례였다.

조야백도
조야백도한간, 7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림 자체는 31×34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이 붙어 있는 두루마리는 11미터가 넘는다. 이 길이는 그림이 그려진 뒤 900년 동안 쌓인 것이다. 새 소장자는 저마다 옆에 몇 줄을 적어 이 작품이 어떻게 자기 손에 들어왔는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 남기고 그 옆에 붉은 인장으로 이름을 찍었다. 자리가 다하면 종이를 이어 붙였다. 그렇게 11미터가 되었다. 말이 차지하는 것은 전체 길이의 약 30분의 1이다.

조야백도
조야백도한간, 7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런 두루마리는 탁자에 펼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풀어가며 보았다. 한 손으로 다음 부분을 열고 다른 손으로 본 부분을 말아 넣었으므로 소장자를 포함해 누구도 전체를 한눈에 본 적이 없다. 제발은 그림과 같은 순서로 읽혔기 때문에 다음 수장가는 먼저 자기 앞에 누가 이 두루마리를 가졌는지 읽고 나서 끝에 자기를 적어 넣었다. 그 이름들 가운데 건륭제가 있다. 18세기에 중국 회화의 최대 수장을 이룬 황제로, 인장을 찍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유럽의 수장가가 걸작에 서명했다면 작품을 망치고 값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이 두루마리에서는 반대가 성립해서, 이름이 많이 붙을수록 값이 올랐다. 그 이름들이 어떤 손을 거쳐 왔는지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두루마리의 내력을 복원하는 근거도 바로 그 자취다.

조야백도
조야백도한간, 7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3. 두초 디 부오닌세냐 《성모자》

성모자
성모자두초 디 부오닌세냐, 130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04년 메트로폴리탄은 편지지만 한 크기의 그림에 약 4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지금까지도 미술관 역사상 가장 비싼 구입이며, 이 패널의 높이는 28센티미터다.

두초가 그린 것은 1300년 무렵이다. 당시 그는 시에나 제일의 화가였고 금색 바탕과 길쭉한 인물이라는 비잔틴식 방법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성모가 아기를 안고 있고, 아기는 손을 들어 어머니의 베일 자락을 밀치며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두초 이전의 이탈리아 성모는 꼿꼿이 앉아 정면을 보았고 아이를 만지지도, 아이와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여기서 아이는 아이답게 행동하며, 유럽 회화에서 모성을 그리는 긴 역사가 이 동작에서 시작된다.

이 패널은 집안에서 쓰던 물건이다. 이런 작은 그림은 개인 기도를 위해 주문해 자기 방에 두었다. 액자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그을음 자국과 탄 부분이 남아 있다. 수백 년 동안 그림 앞에 초를 세워둔 흔적이다.

성모자
성모자두초 디 부오닌세냐, 130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Duccio's Madonna and Child: candle burns along the frame
Duccio's Madonna and Child: candle burns along the frame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via Wikimedia Commons, CC0

2004년까지 이 작품을 아는 사람은 전문가뿐이었다. 20세기에는 벨기에 금융가 아돌프 스토클레의 소유였다.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이 브뤼셀에 클림트의 모자이크로 유명한 저택을 지어준 바로 그 인물이며, 그림은 그 집에 백 년 가까이 걸린 채 공개된 적이 없었다. 스토클레의 상속인들이 미술관에 직접 팔았다.

두초의 작품은 전 세계에 스무 점이 채 남지 않았고 거의 모두 유럽에 있다. 서반구에 있는 것은 이 한 점뿐이다.

4. 술탄 무함마드 《사데 축제》

「사다 축제」, 샤 타흐마스프의 『샤나메(왕들의 책)』 제22엽 뒷면
「사다 축제」, 샤 타흐마스프의 『샤나메(왕들의 책)』 제22엽 뒷면전칭 술탄 무함마드, 152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페르시아의 왕서 《샤나메》에는 사람들이 불을 얻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후샹 왕이 수행원들과 산을 걷다가 바위 위에서 눈이 불처럼 빛나는 검은 뱀을 보았다. 왕이 돌을 집어 던지자 뱀은 몸을 피해 바위 틈으로 사라졌고, 돌은 바위벽에 부딪쳐 불꽃을 튀겨 풀에 옮겨붙었다. 그날까지 사람들은 불을 몰랐고 불을 낼 줄도 몰랐다. 후샹은 불꽃이 어디서 생기는지 깨닫고 신이 자기에게 선물을 보여주었다고 선언한 뒤 그날 저녁에 잔치를 열었다. 그때부터 페르시아 사람들은 한겨울에 사데 축제를 열고 화톳불을 피운다.

세밀화에서 이 불은 한쪽 구석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이야기를 모르면 지나치기 쉽다. 남은 공간은 거의 전부 산이 가져간다. 산은 겹겹이 솟아올라 직사각형 테두리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 밖에 신하들, 음식을 준비하는 하인들, 구석에서 오가는 대화, 그리고 바위 틈에 숨어 한눈에는 찾기 어려운 짐승들이 있다. 이야기의 발단인 뱀은 바위 사이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이것은 책의 한 장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그림이 아니다. 이 사본은 1520년대부터 타브리즈에서 샤 타흐마스프를 위해 제작되었다. 서예가가 본문을 옮겨 쓰고 화가가 세밀화를 그렸으며, 별도의 장인들이 종이와 문양, 금, 장정을 맡았고 작업은 스무 해쯤 이어졌다. 완성된 것은 759장이며 그중 258장에 그림이 들어간, 우리가 아는 한 가장 호화로운 페르시아 사본이다. 술탄 무함마드는 이 책의 주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사데 축제》는 그가 그린 여러 장 중 하나일 뿐이다.

1568년 타흐마스프는 이 책을 술탄 셀림 2세에게 보내는 선물로 이스탄불에 부쳤다. 사절단은 예물을 실은 낙타 34마리를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쿠란, 자기, 직물, 양탄자가 있었고 《샤나메》도 그 안에 있었다.

사본은 20세기까지 톱카프 궁전 도서관에 있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넘어갔고, 1959년 미국의 실업가이자 수집가인 아서 호턴이 사들였다. 그는 장정을 뜯어 책을 한 장씩 팔기 시작했다. 낱장이 사본 전체보다 값이 나갔기 때문이다. 1972년 호턴은 78장을 메트로폴리탄에 기증하고 일부는 경매에 부쳤으며, 말년까지 손에 남아 있던 분량은 1994년 이란으로 돌아갔다. 이란 측이 그 대가로 빌럼 데 쿠닝의 그림 한 점을 내놓는 교환을 통해서였다.

「사다 축제」, 샤 타흐마스프의 『샤나메(왕들의 책)』 제22엽 뒷면
「사다 축제」, 샤 타흐마스프의 『샤나메(왕들의 책)』 제22엽 뒷면전칭 술탄 무함마드, 152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5. 대(大) 피터르 브뤼헐 《수확하는 사람들》

배나무 아래에서 아홉 사람이 점심을 먹고 있다. 땅에는 흰 천이 깔리고 그 위에 그릇과 빵, 숟가락, 큼직한 질그릇 물병이 놓였다. 먹는 사람도 있고 마시는 사람도 있으며, 한 여자가 옆 사람에게 빵을 떼어 건네고, 한 남자는 다리를 벌린 채 반듯이 누워 모자를 얼굴에 덮고 식후의 잠에 깊이 빠져 있다.

이 무리 둘레로 거대한 밭이 펼쳐진다. 밀은 사람 키보다 높은 벽처럼 서 있고 그 사이로 낸 길을 따라 남자들이 낫을 들고 나아가며, 여자들은 베어낸 것을 모아 단으로 묶고, 누군가는 단을 어깨에 메고 비탈을 내려간다. 밭 너머에는 교회가 있는 마을이 시작되고, 마을 뒤로는 과수원과 연못이 있어 사람들이 헤엄치고 논다. 지평선에는 물감 몇 번의 붓질로 항구의 배들이 찍혀 있다.

추수하는 사람들
추수하는 사람들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추수하는 사람들
추수하는 사람들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수확하는 사람들》은 1565년 안트베르펜의 상인 니클라스 용헬링크를 위해 그려졌다. 이탈리아와 거래하며 도시 밖에 시골집을 두고 있던 사람이다. 용헬링크는 브뤼헐에게 계절을 다룬 큰 패널 연작을 주문했다. 모두 여섯 점으로, 한 해를 두 달씩 나눈 구성이었다. 겨울 사냥, 이른 봄의 흐린 날, 건초 수확, 곡물 수확, 가을의 가축 귀환, 그리고 또 한 점의 겨울 풍경이다. 여섯 점은 같은 방에 걸렸고, 그래서 주인은 바깥 날씨가 어떻든 일 년 내내 나머지 다섯 계절 앞을 지나다녔다. 그는 본격적으로 수집한 사람이어서 브뤼헐만 열여섯 점을 갖고 있었다.

눈 속의 사냥꾼
눈 속의 사냥꾼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미술사 박물관
가축 떼의 귀환
가축 떼의 귀환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미술사 박물관

이 방을 누린 것은 일 년이었다. 1566년 용헬링크는 시의 세금을 걷던 지인의 빚에 대해 안트베르펜시에 보증을 서면서 자기 수집품 전부를 담보로 내놓았다. 지인은 갚지 못했고 그림은 시가 가져갔다.

연작 여섯 점 가운데 오늘까지 남은 것은 다섯 점이다. 세 점은 빈에, 한 점은 프라하에, 한 점은 뉴욕에 있다.

6. 엘 그레코 《톨레도 풍경》

톨레도 풍경
톨레도 풍경엘 그레코, 159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톨레도에서 대성당은 왕성 알카사르의 오른쪽에 서 있다. 이 그림에서 엘 그레코는 대성당을 왼쪽으로, 강 쪽에 가깝게 옮겼다. 두 건물이 모두 온전히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감추지도 않았다. 같은 도시를 그린 그의 소묘가 남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탑이 시야를 가린다고 직접 써넣은 메모가 붙어 있다.

《톨레도 풍경》을 그린 것은 1600년 무렵이다. 푸른 언덕 위로 파랗고 검은 하늘이 덮이고 그 사이를 폭풍이 지나간다. 성벽에는 흰 빛의 얼룩이 떨어지고, 타호강이 도시 아래를 감돌며, 다리가 성문으로 올라간다. 이 풍경 안에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없다.

그 시절 스페인에서 이런 그림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풍경은 독립된 장르로 존재하지 않았고, 스페인의 주문자들이 사는 것은 제단화와 초상화였으며, 풍경화는 네덜란드에서 오는 물건이었다. 크레타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베네치아에서 배우고 1577년 톨레도에 정착한 엘 그레코가 그린 풍경은 두 점뿐이고, 다른 한 점은 도시와 거리 지도를 함께 담은 것으로 톨레도에 남았다.

누구를 위해 그린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14년 화가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 목록에 톨레도 풍경 한 점이 적혀 있고, 자료는 거기서 끊긴다.

이 그림이 뉴욕에 온 것은 1929년, 루이진 해브마이어의 유증에 의해서다. 미국에서 스페인 회화에 대한 관심이 막 시작될 무렵에 그것을 사 모으던 수집가다. 루이진과 그 수집품의 내력에 대해서는 뒤에 마네를 다루며 다시 이야기한다.

톨레도 풍경
톨레도 풍경엘 그레코, 159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7. 디에고 벨라스케스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디에고 벨라스케스, 16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후안 데 파레하는 1608년 무렵 스페인 남부 안테케라에서 태어났고 아프리카계였으며 벨라스케스에게 노예로 예속되어 있었다. 17세기 스페인 공방에서 이는 눈에 띄는 일이 아니었다. 노예가 된 사람들은 안료를 갈고 캔버스에 바탕을 칠하고 붓을 손질했으며, 공방 목록에는 이들이 양동이나 틀과 나란히 적혀 있다.

1649년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를 위해 회화와 고대 조각을 사들이는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파레하를 데려갔다. 두 사람은 그곳에 2년 넘게 머물렀고 초상은 1650년 초 로마에서 그려졌다. 벨라스케스는 같은 해 3월 이 그림을 판테온에서 선보였다. 해마다 성 요셉 축일에 열려 화가들이 자기 작품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내걸던 전시였다. 초상은 눈길을 끌었고 화제가 되었으며, 몇 달 뒤 벨라스케스는 로마의 성 루카 아카데미에 받아들여졌다. 외국인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닳은 회색 상의에 흰 깃을 단 남자가 고개를 조금 돌린 채 앞을 바라본다. 배경은 비어 있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해줄 물건도 곁에 없다.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는 반세기 뒤 스페인 화가들의 생애를 다룬 책을 썼고 지금도 벨라스케스에 관한 주된 전거로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로마에서 오가던 말을 적어두었다. 전시의 나머지는 그림이었지만 이것은 진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벨라스케스가 전시 전에 닮았는지를 시험한 이야기도 전한다. 벨라스케스는 파레하에게 캔버스를 들려 로마의 지인들 집을 돌게 했고, 파레하는 초상을 앞에 든 채 문간에 섰다. 문을 연 사람은 잠깐 둘 중 누구를 보아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팔로미노는 파레하 본인에 관한 이야기도 하나 남겼다. 노예가 붓을 잡을 일은 아니었으므로 파레하는 밤에 주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몰래 그림을 배웠다. 자기 그림이 제법 잘 나왔을 때 그는 그것을 펠리페 4세가 지나갈 방의 캔버스 더미 사이에 앞면을 벽으로 돌려 세워두고 기다렸다. 왕이 와서 그림을 돌려 세우고 누구 것이냐 묻자 파레하는 그 발치에 엎드려 사실을 고했다. 펠리페는 캔버스를 보고 벨라스케스에게, 이렇게 그리는 사람을 노예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것은 1650년 11월 23일 로마에서 서명된 문서다. 4년을 더 봉사한 뒤 파레하에게 자유를 준다는 내용이다. 1654년 그는 자유인이 되어 자기 이름으로 일하며 큰 주문도 맡기 시작했다. 1661년에는 폭이 3미터에 가까운 《성 마태의 소명》을 그렸고, 화면 왼쪽 주요 장면에서 비켜난 자리에 자기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림 안에서 보는 이를 똑바로 마주 보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의 손에는 자기 이름을 적은 종이가 들려 있다.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디에고 벨라스케스, 16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성 마태오를 부르심
성 마태오를 부르심후안 데 파레하, 1661, 프라도 미술관

8. 렘브란트 《호메로스 흉상에 손을 얹은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의 흉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의 흉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렘브란트, 165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그림은 주문으로 그려졌고 주문은 시칠리아에서 왔다. 1652년 메시나의 귀족 돈 안토니오 루포는 집에 천 점이 넘는 그림을 두고 있던 사람인데, 암스테르담으로 편지를 보내 렘브란트에게 철학자를 한 점 청했다. 어느 철학자인지는 정하지 않고 선택을 화가에게 맡겼으며, 렘브란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골랐다.

철학자는 반신으로, 소매가 넓은 흰 셔츠에 검은 겉옷을 걸친 모습이다. 오른손은 앞쪽 탁자에 놓인 호메로스의 대리석 흉상 위에 얹혀 있고, 손가락은 조각의 머리카락 위에 산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듯 놓여 있다. 렘브란트는 산 손과 돌을 다르게 그렸다. 살갗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관절에 주름이 잡히는 반면 대리석은 매끈하고 고르고 차갑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때에 호메로스는 이미, 우리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하듯 먼 과거에 속해 있었다.

철학자의 가슴에는 굵은 금사슬이 걸려 있고 거기 달린 메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옆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고, 고대의 전승에 따르면 이런 사슬을 준 사람은 바로 그 제자였다. 렘브란트 시대의 군주들도 화가에게 은총의 표시로 비슷한 사슬을 내렸고, 렘브란트 자신도 그런 사슬을 건 모습으로 여러 번 자화상을 그렸다. 실제로 받은 적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호메로스의 흉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의 흉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렘브란트, 165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그림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 년 뒤에도 읽히는 시인의 명성과, 죽자마자 제국이 무너진 정복자의 명성을 저울질하는 중이라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마케도니아 왕자의 스승으로 간 일이 철학에 쓸 시간과 맞바꿀 만했는지, 자기 선택을 되짚고 있다고 읽는 이들도 있다. 1652년에 빚이 많았고 몇 해 뒤 재산을 경매로 넘긴 렘브란트 자신의 생각을 여기서 보는 이들도 있다. 어느 해석도 증명할 수는 없다.

루포가 이 그림에 치른 값은 500휠던이었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이탈리아 화가들이 부르던 값의 여덟 배였고, 암스테르담 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가격에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루포는 렘브란트에게 두 점을 더 주문했고 평생에 걸쳐 그의 판화를 사 모아 이백 점가량을 갖추었다.

그 뒤 이 그림은 열 명 남짓한 소장자를 거쳐 영국에 이르렀고, 18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실이 잊혔다. 흉상에 손을 얹은 남자는 시인 타소로도, 베르길리우스로도, 그저 학자로도 불렸다. 올바른 확인이 회복된 것은 20세기에 루포 가문의 문서와 서한이 간행되고 나서다.

1961년 11월 메트로폴리탄은 뉴욕 경매에서 이 그림을 230만 달러에 사들였다. 호가는 4분쯤 이어졌고 장내는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으며, 이튿날 아침 이 액수가 신문 1면에 올랐다. 공개 경매에서 그보다 비싸게 팔린 그림은 그때까지 한 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흉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의 흉상을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렘브란트, 165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9.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물주전자를 든 젊은 여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세계에 약 35점이 남아 있고 그중 다섯 점이 메트로폴리탄에 있다. 이만큼 가진 미술관은 어디에도 없다.

《물주전자를 든 젊은 여인》이 그려진 것은 1662년 무렵이다. 흰 두건을 쓴 여인이 탁자 옆에 서서 한 손은 은주전자에 얹고 다른 손으로 창을 밀어 연다. 들어온 빛은 방을 가로질러 흰 천에 내려앉고 금속에 튕겨 나와 여인의 얼굴을 아래에서 밝힌다. 탁자에는 양탄자 무늬의 푸른 천이 덮여 있고 벽에는 지도가 걸려 있다.

그가 무엇을 하는 중인지는 가늠할 수 없고, 페르메이르에게 그것은 늘 있는 일이다. 화초에 물을 주려는 참일 수도, 창을 여는 중일 수도, 동작 도중에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긴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인물은 언제나 무언가의 한복판에 붙들려 있다.

죽은 뒤 이백 년 동안 페르메이르는 거의 잊혀 있었다. 1675년 델프트에서 세상을 떠나며 아내와 열한 명의 아이와 빚을 남겼고, 작업이 느려 팔린 그림도 적었으며, 작품들은 다른 화가의 이름을 달고 개인 집으로 흩어졌다. 그를 되찾아온 사람은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토레로, 1866년에 발표한 글에서 흩어진 작품들을 한 이름 아래 모았다.

그 글이 나온 지 스물세 해 뒤, 뉴욕의 은행가 헨리 마퀀드가 《물주전자를 든 젊은 여인》을 800달러에 사서 메트로폴리탄에 기증했다. 미국 수집품에 들어온 첫 페르메이르였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0. 오가타 고린 《야쓰하시 붓꽃 병풍》

여섯 폭짜리 병풍 두 틀이 온통 금박으로 덮여 있다. 금 바탕 위에 푸른 붓꽃과, 그것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널다리가 그려져 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도, 기슭도, 사람도, 하늘도 없다.

야쓰하시(여덟 다리)의 제비붓꽃
야쓰하시(여덟 다리)의 제비붓꽃오가타 고린, 171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주제는 《이세 이야기》에서 왔다. 짧은 이야기와 노래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일본인들은 수백 년 동안 외우고 있었다. 주인공인 귀족은 세 사람 모두 교토에 더 남을 이유가 없다고 결론지은 벗 둘과 함께 도읍을 떠나 살 곳을 찾아 동쪽으로 간다. 도중에 야쓰하시라는 곳에 이르렀다. 여덟 개의 다리라는 뜻의 이름으로, 강이 여덟 갈래로 갈라지고 갈래마다 널다리가 놓였으며 기슭에는 붓꽃이 빽빽이 피어 있었다. 나그네들은 그늘에 앉아 요기를 했고, 벗 하나가 주인공에게 여정의 쓸쓸함을 노래로 지어보라 했다. 다만 와카 다섯 구의 첫음절을 이으면 붓꽃을 뜻하는 '가키쓰바타'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지어보니 노래는 도읍에 두고 온 아내에 관한 것이 되었다. 셋이 다 울었다. 저마다 교토에 한 사람씩 두고 왔기 때문이고, 눈물은 먹고 있던 마른밥 위에 떨어져 밥을 불렸다.

고린은 이 장면에서 주인공도, 벗들도, 말도, 강도, 여덟 갈래 물길도 걷어냈다. 남은 것은 붓꽃과 다리뿐이며, 18세기의 일본인에게는 그것으로 대목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셰익스피어의 독자가 발코니와 사다리만 보고도 로미오와 줄리엣인 줄 아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꽃은 빽빽한 무리로 나타났다가 성글어지고 그 사이로 맨 금빛이 열린다. 다리는 병풍의 접히는 자리에서 끊겼다가 다른 각도로 다시 나타난다. 병풍은 평평하게 세우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그재그로 세웠고 그려진 선은 나무틀과 함께 꺾였다. 종이 등롱과 초의 빛은 금박에 반사되어, 창이 없는 방에서 붓꽃은 아래에서 밝혀졌다.

야쓰하시(여덟 다리)의 제비붓꽃
야쓰하시(여덟 다리)의 제비붓꽃오가타 고린, 171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고린은 궁중에 물건을 대던 교토 비단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값비싼 물건들 사이에서 자랐고, 마흔을 넘겨 가업이 기울면서 함께 몰락했다. 그림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이 그때이며 생계에 몰린 결과였다. 《야쓰하시 붓꽃》은 1705년 무렵, 이미 주문을 받아 일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병풍은 교토의 니시혼간지에 수백 년 동안 전해지다가 1953년 메트로폴리탄이 사들였다.

11. 에마누엘 로이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 그림은 독일에서 그려졌고, 첫 번째 것은 불에 탔다.

에마누엘 로이체는 슈바벤에서 태어나 어려서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건너갔고, 화가 수업을 마친 뒤 일하러 다시 유럽으로, 뒤셀도르프로 돌아갔다. 그림을 시작한 것은 1849년으로, 미국 혁명의 한 장면이 독일인들을 자기들의 혁명으로 밀어주기를 바라서였다. 1850년 작업실에 불이 나 캔버스가 크게 상했고 로이체는 그것을 고쳤으나, 그림은 브레멘에 남아 있다가 1942년 영국군의 공습으로 없어졌다. 1851년에 그린 두 번째 것을 그는 뉴욕으로 부쳤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몇 주 사이에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보러 왔고, 이 그림을 따라 만든 판화가 전국으로 퍼졌으며 지금도 미국 학교에 걸려 있다.

그려진 것은 1776년 12월 26일 밤, 워싱턴이 군대를 델라웨어강 건너로 옮기고 새벽에 트렌턴의 헤센 수비대를 궤멸한 장면이다. 워싱턴은 배 위에 꼿꼿이 서서 앞을 바라보고, 곁에서 병사가 깃발을 받치며, 둘레에는 얼음덩이가 떠다닌다.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에마누엘 로이체, 185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가운데 정확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조기는 도하 이후에 정해진 도안이다. 델라웨어강의 얼음은 이런 모습이 되지 않는다. 로이체가 보고 그린 것은 라인강의 얼음이었다. 도하에 이런 형태의 배는 쓰이지 않았고, 짐을 잔뜩 실은 배 위에서 유빙 사이에 그렇게 서 있을 사람도 없다. 그림의 빛은 아침 빛인데 군대가 건넌 것은 밤이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그와 달리 일부러 고른 것이다. 스코틀랜드 모자를 쓴 남자, 흑인 선원, 남장한 여자, 서부 정착지에서 온 농부가 있으니, 로이체는 대륙군을 이루던 사람들의 축소판을 배 한 척에 담은 셈이다.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에마누엘 로이체, 185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그림이 메트로폴리탄에 기증된 것은 1897년이다. 높이 3미터, 너비 5미터가 넘어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다.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에마누엘 로이체, 185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2. 에두아르 마네 《뱃놀이》

1873년 뉴욕 제당업자의 딸인 열여섯 살 루이진 엘더가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 와서 메리 커샛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에 살면서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하고 그들 모두와 친분이 있던 미국인 화가다. 커샛은 이 소녀에게 드가의 파스텔을 사라고 권했고, 루이진은 용돈을 거의 다 털어 그것을 사서 드가를 소유한 첫 미국인이 되었다.

루이진은 뒤에 제당 제국을 이끌던 헨리 해브마이어와 결혼했고, 이후 삼십 년 동안 커샛의 조언을 따라 그림을 샀다. 커샛은 그를 작업실마다 데리고 다녔고 무엇을 사둘 만한지 편지로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브마이어 부부에게 쿠르베, 세잔, 모네, 드가, 그리고 마네 여러 점이 모였고 《뱃놀이》도 그중 하나였다. 이 그림에 대한 커샛의 평은 평소보다 짧았다. 회화의 마지막 한마디라는 것이었다.

흰 셔츠에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돛단배의 키 앞에 앉아 몸을 뒤로 젖힌 채 아딧줄을 쥐고 있다. 곁에는 여름 옷차림에 베일을 쓴 여자가 앉아 시선을 다른 데로 두고 있다. 배는 캔버스의 위아래 가장자리에서 잘려 나갔고 기슭도 수평선도 보이지 않으며, 인물들 뒤로는 청록색 물의 평평한 면이 화면 위쪽 끝까지 솟아 있다. 흰 돛이 화폭 전체를 비스듬히 가로지른다.

뱃놀이
뱃놀이에두아르 마네, 187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네가 이것을 그린 것은 1874년 여름,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에서다. 뱃놀이하는 사람들이 즐겨 모이던 곳이며, 그는 그곳에 살던 모네를 찾아가 있었다. 그해 여름 두 사람은 나란히 작업했고, 모네는 배에 작업실을 꾸며 물 위에서 그렸다.

루이진은 1929년에 세상을 떠나며 메트로폴리탄에 2000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회화, 일본 판화, 유리, 아시아 청동기 등이다. 미술관 역사에서 손꼽히는 큰 기증이며, 오늘날 프랑스 회화 전시실에 걸린 것의 절반은 5번가의 해브마이어 저택에서 나왔다.

뱃놀이
뱃놀이에두아르 마네, 187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3. 에드가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에드가 드가, 188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드가는 이 소녀를 밀랍으로 빚고 진짜 천으로 만든 튀튀를 입혔으며, 천 신발을 신기고 머리에는 비단 리본을 맨 진짜 머리카락 가발을 붙였다. 그런 다음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밀랍을 입히고, 자연사박물관에서 박제를 늘어놓듯 유리 상자에 넣어 내놓았다.

모델은 마리 반 괴템이었다. 벨기에인 세탁부와 재단사의 딸이자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 학생이었다. 이런 소녀들은 여덟아홉 살에 연습을 시작해 버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고, 집에서는 딸이 무용수로 자리를 잡거나 오페라의 단골 가운데 후원자를 찾아주기를 기대했다. 마리는 결국 결석이 잦아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 뒤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1881년 인상주의 전시에서 관객은 분개했다. 비평가들은 이 아이가 못생겼고 범죄자의 얼굴에 원숭이의 몸가짐을 하고 있으며, 이런 상은 해부학 진열실에 둘 물건이지 미술 전시에 낼 것이 아니라고 썼다. 한편으로는 범죄 성향을 두개골 모양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당시 유행하던 이론에서 나온 반응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드는 방식 때문이었다. 조각은 대리석이나 청동이어야 하는 물건이었는데 이것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후 남은 서른여섯 해 동안 드가가 조각을 공개적으로 내놓은 일은 한 번도 없다. 밀랍상은 그의 작업실에 그대로 남았고 1917년 그가 죽은 뒤에 발견되었다. 그때 함께 나온 밀랍 작품이 백오십 점쯤 되었는데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속인들은 청동 주조를 맡겨 스물여덟 점가량을 만들게 했다. 원래의 밀랍상은 오늘날 워싱턴에 있고,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것은 그 청동 가운데 하나다. 드가가 원한 대로 진짜 천 튀튀와 진짜 리본을 달고 있다.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에드가 드가, 188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4.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

1884년 파리 살롱에서 사전트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사교계 여성의 초상을 내놓았다. 오른쪽 어깨끈이 팔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소동을 일으킨 것은 이 어깨끈이었다. 당시의 눈에는 방금 옷이 벗겨졌거나 곧 벗겨질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비쳤고, 전시장은 그에 걸맞게 반응했다. 모델의 어머니가 작업실로 찾아와 그림을 전시에서 내리라고 요구했다. 사전트는 거절했으나 살롱이 끝나자 어깨끈을 제자리에 다시 그려 넣었고 지금까지 그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려진 사람은 비르지니 고트로다. 루이지애나 출신 미국인으로 프랑스 은행가와 결혼했고, 외모와 자신을 내보이는 솜씨로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보랏빛이 도는 분을 발라 부자연스러울 만큼 창백한 피부를 만들고 머리는 붉게 물들였는데, 사전트는 분까지 포함해 그대로 그렸다.

마담 X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뉴 고트로)
마담 X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뉴 고트로)존 싱어 사전트, 188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담 X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뉴 고트로)
마담 X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뉴 고트로)존 싱어 사전트, 188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주문은 없었다. 사전트가 거듭 설득해 고트로를 앉힌 것이며, 이 초상으로 이름을 얻을 셈이었기 때문이다. 작업은 한 해가 넘게 이어졌고 모델은 자꾸 연회로 빠져나갔으며 스무 가지가 넘는 자세를 시험했다.

살롱 이후 사전트는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갔고 프랑스에서의 경력은 사실상 거기서 끝났다. 초상은 자기가 간직해 서른두 해 동안 작업실에 두었다.

1916년, 고트로가 죽은 이듬해에 그는 이 그림을 메트로폴리탄에 팔면서 설명판에 모델의 이름을 넣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그는 '마담 X'로 남았다. 미술관에 보낸 편지에서 사전트는 이것이 자기 평생에 만든 것 중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썼다.

15. 망가카

나무로 된 몸통에 못과 칼날, 갈고리, 쇳조각, 쐐기가 380개쯤 박혀 있다. 어떤 자리는 쇠가 촘촘해 아래의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쇠 하나하나가 누군가 가지고 온 사건 하나를 기록한다. 이 상은 콩고 지역 칠로앙고강 부근에서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조각되었고, 조각가의 일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완성된 몸통은 응강가라 불리는 의례 전문가에게 넘어갔고, 그가 상을 작동하게 하는 물질을 빈 공간에 채워 넣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약속을 맺으러, 맹세를 하러, 이웃을 고발하러,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러 이 상을 찾아왔고, 그 일을 확정하는 표시로 나무에 못이나 칼날을 박았다.

망가카 힘의 상(은키시 은콘디)
망가카 힘의 상(은키시 은콘디)욤베-콩고 미술가와 응강가(의례 전문가), 189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망가카 힘의 상(은키시 은콘디)
망가카 힘의 상(은키시 은콘디)욤베-콩고 미술가와 응강가(의례 전문가), 189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어느 사건이 어느 못에 해당하는지 알 길은 없다. 당사자의 이름도 다툼의 경위도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으므로, 그 모든 약속과 고발에서 남은 것은 쇠 그 자체뿐이다.

19세기 말 콩고 하류는 대서양 무역에 편입되어 있었고, 그래서 박힌 쇠 가운데는 유럽에서 공장으로 만든 못과 나사, 가구 철물이 섞여 있다. 그 지역에서 벼린 쇠와 똑같이 쓰였다.

유럽인들이 이런 상에 붙이게 된 '페티시'라는 말은 서아프리카 해안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서 왔고 그들에게는 부적이나 주술을 뜻했다. 말과 함께, 이런 물건은 숭배의 대상이라는 생각도 퍼졌지만, 마을 사람들이 망가카를 찾은 것은 다툼을 매듭짓고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같은 수십 년 동안 선교사들은 이런 상을 이교의 우상으로 여겨 모아다 태웠고, 살아남은 것의 일부는 바로 그들의 손을 거쳐 유럽의 수집품이 되었다.

망가카가 아프리카를 어떻게 떠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취를 좇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유럽의 개인 수집품에 들어와 있던 시점부터이며, 2008년 메트로폴리탄이 사들였다. 그때에는 수염과 옷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응강가가 물질을 넣던 배의 빈 공간은 비어 있었다.

더 볼 것

이 열다섯 점은 가능한 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다. 미술관에는 약 200만 점이 있어 볼 만한 것은 훨씬 많고, 얼마나 보게 될지는 일정과 취향에 달렸다.

시간이 남는다면 나머지 네 점의 페르메이르, 이탈리아 전시실의 카라바조와 티치아노, 그리고 반 고흐를 보시길 권한다. 메트로폴리탄에는 그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이 있다. 미국관에는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조명 기구가 놓여 있고, 루이스 설리번이 설계한 은행 정면을 들여놓은 유리 지붕의 안뜰도 있다. 무기와 갑옷 전시실에는 갑주를 갖추고 말에 오른 기사들, 일본 무사의 갑옷, 세계 각지의 의례용 무기가 모여 있다. 이집트 전시실에는 덴두르 신전 외에 사카라에서 통째로 옮겨온 관리 페르네브의 무덤이 있다.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빈센트 반 고흐, 188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188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빈센트 반 고흐, 188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한 가지 더 알아둘 것은 이 미술관에 두 번째 시설, 클로이스터스가 있다는 점이다. 맨해튼 최북단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공원 안에 있으며 본관에서 한 시간쯤 걸린다. 1930년대에 진짜 중세 건축물을 짜맞춰 지었다. 미국 조각가 조지 그레이 바너드가 프랑스에서 사 모은 수도원 회랑과 문, 예배당들이다. 메트로폴리탄은 1925년 그의 수집품을 사들였고, 존 D. 록펠러 2세가 건물 비용을 대는 한편 창밖으로 새 건물이 보이지 않도록 허드슨강 건너편 땅까지 사들였다.

The Cloisters seen from Fort Tryon Park
The Cloisters seen from Fort Tryon ParkBeyond My Ken,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음악가들
음악가들카라바조, 159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잠자는 소녀
잠자는 소녀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5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곳에 《메로데 제단화》가 있다. 15세기 초의 작은 가정용 세 폭 그림으로, 주인은 탁자에 두었다가 기도하고 싶을 때 펼쳤다. 안쪽에서는 수태고지가 그 시대의 평범한 방에서 일어난다. 마리아는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벽에는 수건이 걸렸으며, 탁자 위의 초는 방금 꺼졌고, 오른쪽 날개에는 요셉이 작업장에서 쥐덫을 만들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악마를 잡는 덫이라는 오래된 신학적 비유를 따른 것이다. 같은 건물에는 1500년 무렵에 짠 유니콘 사냥 태피스트리 일곱 점이 걸려 있다.

메로데 제단화
메로데 제단화로베르 캉팽, 1430, 클로이스터스
사로잡힌 유니콘 (유니콘 태피스트리 연작)
사로잡힌 유니콘 (유니콘 태피스트리 연작)작자 미상의 프랑스 밑그림 작가와 남네덜란드 직조공들, 1500, 클로이스터스
앵무새를 든 여인
앵무새를 든 여인귀스타브 쿠르베, 186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