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프로이센 정부는 베를린에 살던 영국 상인에게서 그림 약 3000점을 한꺼번에 사들였고, 그와 함께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 날개 패널도 거의 전부 손에 넣었다. 제단화의 가운데 부분은 그동안 줄곧 헨트의 성 바보 대성당에 있었다. 1920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날개 패널을 벨기에에 넘겼다.
프로이센의 왕들은 드레스덴의 작센 선제후들이 남긴 것 같은 컬렉션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1830년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지은 구 박물관(알테스 무제움)에 문을 연 회화관은 사들인 컬렉션들과 왕궁에서 가져온 그림으로 채워졌다. 그곳에는 그림 약 1200점이 회화의 역사를 보여 주듯 유파별로 걸렸다. 그 뒤 미술관은 남의 경매에 나온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였고, 1945년에 작품 약 585점을 잃었으며, 반세기 가까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어 있다가 1998년 6월 12일 문화포럼(쿨투어포룸)의 새 건물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미술관이 생기기 전 (1755~1815)
1. 코레조 《레다와 백조》, 1530~1532년경
프랑스 섭정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나이가 들면서 신앙심이 깊어진 나머지, 집안 컬렉션에 있던 코레조의 《레다》를 칼로 난도질했다. 그는 레다의 머리를 없애 버렸고, 캔버스는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코레조는 유피테르의 연애 행각을 다룬 연작의 하나로 이 그림을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2세 곤차가를 위해 그렸고, 그림은 유럽 곳곳을 오래 떠돈 끝에 1721년 섭정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컬렉션에 들어갔다.
1753년 파리의 수집가 파스키에가 난도질된 캔버스를 사들여 화가 들리앵에게 새 머리를 그리게 했다. 2년 뒤 파스키에 컬렉션 경매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리인이 이 그림에 2만 1060리브르를 치렀고, 레다는 포츠담의 궁전들로 옮겨 갔다. 1806년 나폴레옹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프뤼동이 머리를 다시 그렸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그림은 프로이센으로 돌아왔고, 1829~1830년에 궁전에서 새 미술관으로 넘어갔으며, 1834~1835년에는 베를린의 복원가 야코프 슐레징거가 레다의 머리를 또 한 번 그렸다.
레다는 나지막한 바위 물가에 벌거벗고 앉아 있고, 그 아래에는 연한 라일락빛 천이 깔려 있다. 백조는 그녀의 두 허벅지 사이에 서서 목을 그녀의 가슴께로 들어 올렸고, 부리는 왼쪽 어깨 가까운 목덜미에 닿아 있다. 왼쪽 물가에서는 날개 달린 큐피드가 리라를 타고, 아래 구석에서는 통통한 푸토 둘 가운데 하나가 길게 휜 뿔피리를 분다. 오른쪽 바위 뒤에서는 푸른 베일을 쓴 나이 든 여인이 레다를 지켜보고, 빨간 옷의 하녀는 물에서 나오는 동무 위로 흰 천을 들어 올리며, 맨 가장자리에서는 한 처녀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백조 곁에 서 있고, 나무들 위로는 다른 백조 한 마리가 멀리 날아간다.
레다의 머리는 왼쪽 어깨 쪽으로 기울었고, 눈은 내리깔려 거의 감겼으며,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떠 있는데, 이 모두를 그린 사람은 슐레징거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는 잃어버린 머리의 모습을 바꾸었고, 코레조가 그렸던 관능도 장면에서 덜어 냈다.


2. 카라바조 《승리한 사랑》, 1601~1602년
독일의 화가이자 전기 작가 요아힘 폰 잔드라르트는 1630년대에 로마에 살면서 빈첸초 주스티니아니 후작 밑에서 일했다. 1675년에 나온 책에서 그는 이 그림을 짙은 초록 비단 휘장으로 가려 두었다가 다른 그림을 다 본 손님들에게 맨 마지막에 보여 주라고 주인에게 권한 사람이 바로 자기였다고 썼다. 그 방에 걸린 다른 그림 120점이 이 그림 옆에서는 빛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라바조는 1601~1602년에 주스티니아니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콘타렐리 예배당에 큰 그림들을 그려 이름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거의 실물 크기의 소년이 거의 검은 배경 앞에 벌거벗고 서 있고, 빛은 왼쪽 위에서 날카롭게 떨어진다. 등에는 짙은 흑갈색 독수리 날개가 달렸고, 오른손에는 화살 두 개를 쥐었으며, 왼쪽 다리를 들어 무릎을 구겨진 흰 시트에 대고 있다. 그는 관람자를 똑바로 보며 입을 벌리고 웃고, 왼쪽 날개 끝은 들어 올린 허벅지 위에 걸쳐 있다. 발밑에는 류트, 바이올린과 활, 펼쳐진 악보, 직각자와 컴퍼스, 월계수 가지 아래 글씨가 빽빽한 종이, 어두운 갑옷이 흩어져 있고,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금관과 홀이 놓여 있다. 시트 아래로는 금빛 별이 그려진 파란 지구의가 비죽 나와 있다. 미술관은 제목을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와 연결하고, 이 그림을 세속의 사랑이 학문과 예술, 명예와 권력을 비웃는 장면으로 읽는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패한 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파리에서 주스티니아니 컬렉션을 사들였다. 파리의 화상 페레올 본메종이 1812년부터 팔지 못하고 있던 컬렉션이었다. 왕은 54만 프랑을 치렀고, 베를린에는 그림 약 160점이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카라바조의 그림이 다섯 점 있었다. 그중 세 점은 1945년에 소실되었고(이 이야기는 《성 마태오와 천사》에서 다룬다), 살아남은 두 점 가운데 베를린 회화관에 있는 것은 《승리한 사랑》뿐이다. 다른 하나인 《의심하는 토마스》는 포츠담의 상수시 회화관에 있다.
상인 솔리의 컬렉션 (1821~1830)

3. 페트뤼스 크리스튀스 《젊은 여인의 초상》, 1465~1470년경
1819년 5월 시인 괴테의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테는 빌헬름슈트라세에 있는 에드워드 솔리의 베를린 집을 찾아가 그곳의 그림을 8000점이나 9000점으로 헤아렸지만, 실제로는 약 3000점이었다. 벽에 걸린 것은 400점이 채 안 되었고, 나머지는 30~40곳의 방과 부엌과 마차 창고에 세워져 있었다. 그의 말로는 그 속에서 완전히 갈피를 잃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솔리는 발트해의 곡물과 목재 무역으로 부를 쌓은 영국인으로, 1813년부터 베를린에 살면서 5년 만에 그림을 3000점 넘게 모았다. 그는 14~15세기 이탈리아 거장들과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 곧 조토와 보티첼리와 얀 반 에이크를 샀는데, 그 무렵 이런 유파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드물었다. 1821년 오랜 협상 끝에 프로이센 정부가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였고, 그 가운데 그림 약 677점이 장차 문을 열 회화관의 바탕이 되었다.
작은 패널 속 젊은 여인은 4분의 3 각도로 왼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머리에는 원뿔 끝을 자른 모양의 높은 검은 벨벳 모자를 썼고, 턱 아래로는 같은 천의 검은 띠가 지나가며, 이마의 머리카락 선을 따라 모자 가장자리에는 잔 진주를 단 가는 띠가 둘러져 있다. 갈색 눈은 높이가 조금 어긋나 있다. 드레스는 짙은 파란색에 흰 모피 깃이 넓게 달렸고, 앞섶은 검은 천으로 막았으며, 그 위쪽 가장자리에서 금박 핀 하나가 투명한 베일을 고정하고 있다. 목에는 금과 진주를 섞은 짙은 고리 줄 세 가닥이 걸려 있고, 뒤에는 위쪽은 회갈색이고 아래쪽은 짙은 나무 판을 댄 평평한 벽 하나가 있을 뿐이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은 페트뤼스 크리스튀스가 그린 여성 초상으로 알려진 유일한 작품이다.
초상화가 베를린에 왔을 때는 아직 글이 적힌 옛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1825년 뒷날 회화관의 첫 관장이 되는 젊은 학자 구스타프 바겐은 액자의 서명을 Opus Petri Christophori, 곧 페트루스 크리스토포리의 작품이라고 기록했고, 그 뒤로 이 초상의 작가 판정은 바로 이 기록에 기대고 있다. 바겐은 액자에 모델이 이름난 탤벗, 곧 초대 슈루즈베리 백작의 조카딸로 적혀 있었다는 것도 전했다. 역사가 론 캠벨과 조엘 업턴은 바겐이 라틴어 nepos를 조카딸로 옮겼지만 이 말에는 손녀라는 뜻도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1468년 브뤼헤에서 열린 용담공 샤를과 요크의 마거릿의 결혼식에 온 탤벗의 손녀였을 수 있다. 증거는 없지만 미술관은 이 견해 쪽으로 기운다.
1833년 이 초상을 처음 학계에 소개한 미술사가 파사반트는 액자가 없어졌다고 적었다. 업턴의 계산으로는 액자가 사라진 것은 1825년과 1833년 사이, 곧 초상이 이미 미술관 소유였을 때다.


4. 소 한스 홀바인 《상인 게오르크 기제의 초상》, 1532년
패널 위쪽 한가운데에 라틴어 2행시가 적힌 쪽지가 붉은 밀랍으로 벽에 붙어 있다. “네가 보는 이 그림은 게오르크의 모습을 옮긴 것이니, 그의 눈은 이토록 생생하고 그의 뺨은 이러하다”라는 시구 아래에는 “34세, 주후 1532년”이라고 적혀 있다. 홀바인은 닮음에 대한 찬사를 초상 속에 직접 써 넣었다.
단치히의 상인 게오르크 기제는 1519년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에게서 귀족 작위를 받았고, 1522년부터 런던의 스틸야드에 살았다. 스틸야드는 템스강 가에 담으로 둘러싸인 한자 상인들의 거류지였다. 홀바인은 1532년 런던으로 돌아왔고, 그의 첫 주문자들은 이 거류지의 독일 상인들이었다. 미술관은 기제가 결혼을 앞두고 고향 단치히에 보내려고 이 초상을 주문했다고 보며, 꽃병의 카네이션은 아마 약혼을 암시하는 것이리라고 본다.
그는 빨강, 검정, 흰색이 어우러진 양탄자를 덮은 탁자 뒤에 서 있다. 검은 베레모를 쓰고 반짝이는 장밋빛 붉은 비단 소매 위로 넓은 검은 망토를 걸쳤으며, 봉함 날개가 찢긴 편지를 두 손으로 들고 있다. 수신인 주소에서는 저지 독일어 to lunden과 broder to handen, 곧 런던으로, 형제의 손에라는 말을 읽어 낼 수 있다. 탁자 위에는 카네이션을 꽂은 유리 꽃병, 북 모양의 금도금 시계, 금화와 잉크병과 깃펜을 담은 백랍 받침이 서 있고, 가위와 인장과 가죽끈을 두른 책이 놓여 있다. 벽과 선반에는 동전용 작은 저울, 긴 사슬에 달린 인장, 열쇠 꾸러미가 매달려 있고, 붉은 봉인이 찍힌 편지들이 가로대 뒤에 꽂혀 있다. 왼쪽 벽에는 흰 글씨로 그의 좌우명 Nulla sine merore voluptas, 곧 슬픔 없는 기쁨은 없다는 말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G. Gysze라고 쓰여 있다.
이 초상은 《레다》가 난도질당한 바로 그 오를레앙 컬렉션을 거쳐 베를린에 왔다. 1727년에 이미 오를레앙 공작 가문의 소유였고, 혁명 뒤 1792~1793년에 런던에서 그 집안의 그림들이 팔려 나갈 때 《기셋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바젤의 판화가이자 화상 크리스티안 폰 메헬에게 60기니에 넘어갔다. 뒤에 솔리가 이 그림을 샀고, 1821년 초상은 그의 컬렉션과 함께 회화관에 들어왔다.
1923년 2월 1일 발행된 라이히스방크의 10만 마르크 지폐에는 판화가 구스타프 아일러스가 이 그림을 바탕으로 새긴 기제의 얼굴 메달리온이 인쇄되어 있다.

5. 산드로 보티첼리와 공방 《비너스》, 1490년경
1490년 무렵 피렌체의 보티첼리에게는 큰 공방이 있었고, 공방은 성모상과 톤도처럼 스승의 성공한 구성을 찾는 사람이 많아 되풀이해 그렸다. 미술관은 이 비너스도 그렇게 태어났다고 본다. 인물은 지금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비너스의 탄생》에서 가져와, 바다와 조개껍데기와 바람 없이 따로 캔버스에 그렸다. 이런 그림은 세 점이 알려져 있는데, 베를린과 토리노의 사바우다 미술관, 스위스의 개인 컬렉션에 한 점씩 있다. 베를린은 자기 것이 가장 낫다고 보고 토리노도 자기 것을 두고 같은 말을 하며, 베를린의 작가 표기는 보티첼리와 공방이다. 1821년 솔리 컬렉션과 함께 회화관에 들어온 베를린의 비너스는 2016년 여름 토리노로 건너가 그곳의 비너스 옆에 걸렸는데,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려는 것이었다.
미술관은 이 그림에서 여신이 자기 이야기를 잃었고, 고대 이후 처음으로 여성의 나체가 오직 그 관능적인 매력 때문에 그릴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쓴다. 비너스는 납작한 검은 배경 앞, 좁은 회색 돌 턱 위에 온몸을 드러내고 서 있는데, 고대 조각에서 알려진 베누스 푸디카, 곧 정숙한 비너스의 자세다.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가리고, 왼손으로는 굵은 머리 타래를 음부 앞에 쥐고 있다. 고개는 살짝 기울었고, 연한 갈색 눈이 관람자를 본다. 금빛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몸 양쪽으로 엉덩이까지 길게 물결치며 흘러내리고, 머리 가닥마다 가는 금 붓질이 들어가 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그 머리 타래 속에는 관자놀이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가는 땋은 머리 두 가닥이 있는데, 놓치기 쉽다.
6. 대 루카스 크라나흐 《젊음의 샘》, 1546년
노파들이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목욕장에 실려 온다. 패널 왼쪽 3분의 1에서는 말이 끄는 수레에 실려 오고, 말 탄 사람 뒤에 얹혀 오고, 말에서 내려지고, 들것에 실리거나 수염 난 남자의 등에 업혀 오며,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빨간 옷의 남자가 한 노파를 외바퀴 손수레에 태워 민다. 욕탕 가장자리에서는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안경을 쓴 긴 빨간 옷의 남자가 벌거벗은 노파에게 몸을 굽히고, 손바닥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든 채 그녀를 살핀다. 미술관은 그를 의사라고 부르며, 그가 환자에게 희망 없는 마지막 눈길을 보낸다고 쓴다.
회색 돌 욕탕 안에서 왼쪽의 여자들은 백발에 살이 늘어졌지만, 물을 건너 오른쪽으로 갈수록 길게 늘어뜨린 금발과 붉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된다. 물속에는 여자들만 있다. 분수 기둥 꼭대기에는 큐피드를 데린 작은 나체의 비너스가 서 있어서, 미술관의 말처럼 젊음의 샘은 사랑의 샘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또 남자들을 젊게 만드는 것은 아마 젊은 여인들과 어울리는 일일 것이라고 쓴다. 오른쪽에서는 트임 장식이 있는 밝은 옷차림의 궁정인이 물에서 나오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고, 다른 여자는 옷을 입혀 줄 빨간 천막으로 들어가며, 그 위쪽 나무 아래에서는 북 치는 사람과 피리 부는 사람이 연주하고, 남녀가 짝지어 춤을 추며, 식탁이 차려져 있다. 아래쪽 한가운데, 욕탕 가장자리 밑에는 크라나흐 공방이 서명으로 쓰던 날개 달린 아주 작은 뱀과 1546이라는 연도가 있다.
19세기 초 이 그림은 프로이센 왕들의 소유였고, 패널 뒷면에는 흰 분필로 쓴 번호들과 왕궁의 인장 I. 659가 찍힌 검은 도장이 보인다. 1829~1830년에 그림은 궁전에서 새 미술관으로 넘어갔는데, 회화관이 왕들에게서 물려받은 몇 안 되는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대 크라나흐의 작품으로 보지만, 20세기에는 1540년대에 이르러 아버지의 동업자가 된 아들 소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으로 여러 번 돌려졌다. 1937년 베를린 전시와 1974년 바젤 전시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었다. 미술사가 하르트라우프는 1943년 이 그림을 대 크라나흐의 작품으로 다룬 작은 책을 냈고, 1958년에는 소 크라나흐의 이름으로 두 번째 책을 냈다.

남의 경매에 나온 그림 (1850~1874)
7.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미라플로레스 제단화, 1445년 이전
1445년 카스티야의 왕 후안 2세는 부르고스 근처의 미라플로레스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에 패널 세 장으로 된 작은 제단화를 기증했다. 이 제단화에 관한 수도원의 기록은 1783년 안토니오 폰스가 《에스파냐 여행》에 실은 사본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라틴어로 된 그 기록은 위대하고 이름난 플랑드르 사람 로헬 거장이 제단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카스티야에서 로헬이라 불린 사람은 브뤼셀의 시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이었다.
크기가 같은 패널 세 장은 위가 둥글고, 장면마다 따뜻한 갈색의 조각된 성당 문처럼 그린 아치 안에 놓였으며, 아치에는 작은 회색 조각군이 붙어 있다. 아치마다 위에는 금관과 글귀가 적힌 띠를 든 천사가 떠 있고,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띠에는 마리아가 세 개의 관을 받게 되는 세 가지 덕목이 적혀 있다. 왼쪽은 성탄 장면으로, 연한 하늘색 망토를 입은 마리아가 아기 앞에 무릎을 꿇었고 오른쪽에서는 요셉이 지팡이에 두 손을 얹고 졸고 있다. 가운데에서는 새빨간 옷의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고 뺨을 그의 머리에 댄다. 오른쪽에서는 빨간 망토를 걸친 부활한 그리스도가 짙은 파란 옷의 어머니에게 나타나고, 그 뒤 높은 창 너머로는 그가 천사와 잠든 병사들 곁에서 무덤을 나서는 장면이 아주 작게 보인다. 마리아의 망토 가장자리를 따라 금빛 글자가 이어지고, 미술관은 그 글에서 마니피캇의 구절을 알아본다.
제단화는 19세기 초까지 미라플로레스에 있었고, 나폴레옹 시대에 역사가들이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경위로 에스파냐를 떠났다. 그 뒤 네덜란드 왕 빌럼 2세가 이 제단화를 소유했고, 1842년 화가 하위프 판 호버는 헤이그 왕궁의 고딕 홀을 그린 수채화 속에 이 제단화를 아주 작게 그려 넣었다. 빌럼 2세는 1849년 막대한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빚 가운데에는 그림을 담보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에게서 빌린 100만 휠던도 있었다. 1850년 8월 그의 컬렉션이 경매에 부쳐졌고, 제단화는 그 경매에서 베를린을 위해 구입되었다.
1853년 앞서 나온 파사반트가 베를린의 패널들을 옛 복제본이라고 선언했고, 1908년에는 에스파냐의 역사가 고메스모레노가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에 있는 똑같은 제단화를 발표하며 그것을 원본이라고 했다. 그 뒤 70년쯤 거의 모두가 이 견해를 따랐다. 1981년 적외선 촬영으로 베를린 패널에서 작업 도중에 크게 고친 흔적들이 드러났고, 연륜연대학 조사에서는 베를린 패널이 이미 1430년대에 그려졌을 수도 있는 반면 두 번째 제단화의 목재는 빨라야 15세기 맨 끝 무렵에 벤 것으로 밝혀졌다. 그 뒤 베를린 제단화는 다시 로히어르의 작품으로 인정되었다.


그라나다 제단화는 이제 후안 2세의 딸인 가톨릭 여왕 이사벨 1세가 1490년대에 주문한 정확한 복제본으로 여겨진다. 그 패널 가운데 두 장은 그라나다에 남았고, 세 번째 패널은 뒤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갔다.
8. 얀 반 에이크 《교회의 성모》, 1437~1440년경
바르톨트 쉬르몬트는 위트레흐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벨기에 스랭에 있는 공업가 존 코커릴의 공장에서 비서로 일했고, 아헨에 자리 잡은 뒤에는 석탄과 아연과 납 광산, 제강소, 은행 지분을 소유했다. 그는 1850년대 초부터 그림을 모았는데,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이 가장 많았다. 1873년 증시가 무너졌을 때 그가 돈을 넣은 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자, 쉬르몬트는 옛 거장들의 그림을 팔기로 했다. 1873~1874년 겨울 그는 그림 대부분을 브뤼셀에서 전시했고, 봄에는 바로 그곳에서 베를린 회화관 관장 율리우스 마이어, 그의 조수 빌헬름 폰 보데와 협상이 시작되었다. 뒷날 회화관 관장이 되고 1905년부터 1920년까지 베를린 박물관들의 총관장을 지낸 보데는 컬렉션을 통째로 사야 한다고 고집했다. 1874년 베를린은 쉬르몬트의 그림을 200점 넘게 샀고, 1875년 3월 10일 일반에 공개했다.
위가 둥근 패널은 높이가 공책 한 장만 하고 폭은 그 절반인데, 그 안에 고딕 대성당 하나가 통째로 들어 있다. 파란 보석과 빨간 보석이 박힌 높은 금관을 쓴 성모가 신랑 한가운데에 건물에 비해 너무 큰 모습으로 서 있고, 빨간 드레스에 넓은 청록색 망토를 둘렀다. 그녀의 팔에 안긴 아기는 두 손으로 수놓은 드레스 깃을 붙잡고 있다. 성모 뒤에는 돌로 된 칸막이가 있고, 그 벽감 속 제단 위 불 켜진 두 촛불 사이에 금박을 입힌 작은 성모자상이 서 있는데, 미술관의 말처럼 그 앞의 살아 있는 성모를 되풀이한 모습이다. 칸막이에 뚫린 문으로는 천사 둘이 책을 보며 노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빨간 드레스 자락의 바닥 가까운 단에는 금빛 글자들이 이어지고, 그 가운데 SOL이 또렷이 읽힌다. 치마 오른쪽 바닥 타일에는 밝은 햇빛 자국이 두 군데 떨어져 있다.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교회가 보통처럼 지어졌다면 이곳의 빛은 북쪽에서 들어오는 셈이라고 지적하며 이 빛을 상징으로 보았고, 미술관도 그를 따라 해와 별의 움직임과 상관없는 영원한 빛에 관해 쓴다.
반 에이크 연구자인 역사가 엘리자베트 다넨스는 1877년 이 패널이 도난당했다가 며칠 뒤 원래의 액자 없이 돌아왔다고 쓴다. 돌처럼 보이게 칠한 그 액자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거기 적힌 글은 옛 기록으로만 전한다. 액자를 따라 Mater hec est filia, pater hic est natus, quis audivit talia, Deus homo natus, 곧 “이 어머니는 딸이요 이 아버지는 태어난 이니, 누가 이런 일을 들어 보았는가, 하느님이 사람으로 나셨도다”라는 글이 이어졌고, 아래쪽에는 Flos florum appellaris, 곧 “그대는 꽃 중의 꽃이라 불리도다”라고 적혀 있었다.


9. 프란스 할스 《말레 바베》, 1633~1635년경
17세기 하를럼 사람들은 말레 바베라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이 이름은 미쳤다는 뜻의 malle와 바르바라의 애칭 Babbe에서 왔다. 2013년 하를럼의 헤트 돌하위스 박물관에서 일하는 플로리스 뮐더르는 문서고에서 그녀의 진짜 이름 바르바라 클라스를 찾아냈고, 그녀가 1646년 시의 노역소에 수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곳은 정신병자 수용소이자 구빈원이었고 감옥이자 교정원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15년쯤 지내다 1663년에 세상을 떠났다.
할스는 그보다 앞서 그녀를 그렸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1633~1635년 작으로 보고, 최근의 한 연구는 1640년대 초로 늦추어 잡는데, 어느 쪽이든 바르바라 클라스가 갇히기 전에 그린 초상이다.
그녀는 몸을 오른쪽으로 반쯤 돌려 앉았다가 어깨 너머 반대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고, 윗니가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려 웃는다. 뺨은 붉고 눈은 실처럼 가늘어졌다. 할스는 얼굴을 노랑과 분홍과 회색으로 두툼하게 빚어 냈고, 흰 두건과 헝클어진 깃은 빠른 지그재그 붓질로 휘갈겼으며, 옷과 배경은 넓게 드러나는 붓자국으로 칠해 군데군데 바탕칠이 비친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뚜껑이 젖혀진 키 큰 백랍 맥주잔이 있고, 그녀의 어깨, 관람자가 보기에 오른쪽에는 연갈색 올빼미가 앉아 우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미술관은 올빼미처럼 취했다는 네덜란드 속담으로 이 올빼미를 설명한다. 예전에는 올빼미를 마녀의 동반자로 보았고, 그래서 이 그림은 오랫동안 《하를럼의 마녀》라고 불렸다.
1869년 이 그림은 쉬르몬트의 소유였고, 그가 뮌헨 국제 전시회에 빌려준 이 그림을 그곳에서 귀스타브 쿠르베가 모사했다. 그 모사본은 지금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 있다. 1874년 베를린은 쉬르몬트 컬렉션과 함께 《말레 바베》를 사들였다(이 구입 이야기는 《교회의 성모》에서 했다).
할스가 이 그림을 그리고 여러 해 뒤, 바로 그 하를럼 노역소에 그의 아들과 맏딸이 들어갔다.

미술관이 가문과 영국 귀족 집안에서 산 그림 (1884~1918)

10. 알브레히트 뒤러 《히에로니무스 홀츠슈어의 초상》, 1526년
초상은 밀어서 여닫는 뚜껑이 달린 액자에 끼워져 있다. 뚜껑은 어두운 안쪽 틀과 밝은 바깥쪽 틀 사이의 홈을 따라 움직이고, 뚜껑을 밀어 닫으면 얼굴이 가려진다. 검은 뚜껑 위쪽에는 금빛 로마 숫자로 MDXXVI라는 연도가 적혀 있고, 그 아래 짙은 잎사귀 화관 안에서는 금빛 방패 두 개가 투구 하나 아래 서로를 향해 기울어 있다. 왼쪽 방패에는 굽이 둘인 나무 밑창의 검은 신발이 있는데, 이름 자체가 나무 신발을 뜻하는 홀츠슈어 가문의 문장이다. 오른쪽 방패에는 뱀이 감긴 검은 기둥이 있는데, 홀츠슈어 아내의 친정인 뮌처 가문의 문장이다. 투구 위로는 빨간 옷에 금빛 챙이 달린 높은 빨간 모자를 쓴 흑인의 흉상이 솟아 있다.
뚜껑 아래에서는 커다란 머리가 패널을 거의 다 채운다. 홀츠슈어는 몸을 왼쪽으로 돌렸지만 회녹색 눈동자는 오른쪽으로 날카롭게 쏠려 있어, 곁눈질하는 그의 눈길에는 경계심이 서려 있다. 얼굴은 붉고 묵직하며, 미간에는 짧은 세로 주름이 패었고, 희끗희끗한 밝은 곱슬머리가 귀까지 내려오는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가늘고 밝은 고리로 그려져 있다. 하얀 수염은 가는 철사로 엮은 듯 촘촘하게 말려 있다. 청록색 배경 왼쪽 위에는 금빛 글자로 이름과 1526년이라는 연도, 57세라는 나이가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뒤러의 모노그램이 있다.
히에로니무스 홀츠슈어는 뉘른베르크의 도시 귀족으로 시장을 지냈고, 1514년부터는 도시를 다스리는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미술관에 따르면 뒤러와 친구 사이였다. 뒤러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이 초상을 그렸다.
가문은 이 초상을 350년 넘게 간직했다. 1651년 주스티니아니에게 《승리한 사랑》을 휘장으로 가리라고 권했던 바로 그 잔드라르트가 자기 말로는 홀츠슈어 가문에서 이 그림을 사려다 거절당했고, 1675년의 책에서는 뉘른베르크 사람들이 이 그림을 크게 감탄하며 보여 준다고 썼다. 1812년 무렵 수집가 술피츠 부아세레는 뒤러의 수법이 이 그림에 지나치게 빽빽하게 모여 있다고 여겨 위작으로 판단했고,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류 사기꾼의 솜씨라고 썼다. 뒤에 문서들로 뒤러가 그렸음이 확인되었다. 1884년 베를린은 홀츠슈어 가문에게서 뚜껑과 액자까지 함께 이 초상을 샀다.
미술관은 패널이 유난히 잘 보존된 까닭을 뚜껑 아래 보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1. 렘브란트 《메노파 설교자 코르넬리스 안슬로와 그의 아내》, 1641년
1641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찾는 사람이 많은 초상화가 가운데 하나였고, 부유한 직물 상인이자 메노파 설교자인 코르넬리스 안슬로를 그의 아내 아엘트여 스하우턴과 함께 그렸다. 넓은 캔버스의 왼쪽은 금빛 노란 천과 긴 술이 달린 적갈색 양탄자를 덮은 탁자가 차지한다. 탁자 위 독서대에는 그림에서 가장 밝은 부분인 거대한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는 책장 모서리가 접힌 두 번째 책이 놓여 있으며, 그 뒤로는 흰 초 하나를 꽂은 촛대가 받침 접시에 심지 가위를 얹은 채 서 있다. 높은 검은 모자를 쓰고 모피 안감을 넓게 댄 망토를 걸친 안슬로는 아내 쪽으로 몸을 돌려 입을 조금 벌리고, 왼손을 손바닥이 위로 가게 그녀 쪽으로 내밀며 집게손가락을 살짝 들고 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몸짓이 구성 전체의 중심이다. 아내는 오른쪽에 옆모습으로 앉아 레이스 두건과 넓고 납작한 깃 차림으로 그의 손과 얼굴을 바라보고, 무릎 위에 구겨진 흰 손수건을 쥐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관람자 쪽을 보지 않는다.
같은 해 렘브란트는 안슬로의 초상을 에칭으로도 만들었고, 시인 요스트 판 덴 폰델은 설교자의 초상에 관한 4행시를 썼다. 역사가 미힐 프랑컨에 따르면 시만 보아서는 그것이 에칭을 두고 쓴 것인지 그림을 두고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폰델은 화가에게 코르넬리스의 목소리를 그려 보라고 했다. 그에게서 눈에 보이는 것은 가장 작은 부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귀로만 알 수 있으니, 안슬로를 보고 싶은 사람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흔히 그 도전에 대한 렘브란트의 대답으로 읽힌다.
1894년 보데는 런던에서 애시버넘 경에게서 이 그림을 베를린을 위해 샀고, 이듬해 프로이센 박물관 연보에 발표했다. 미술관의 구입 보고서에는 《과부를 위로하는 코르넬리스 안슬로》로 적혀 있는데, 영국에서 이 그림은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12. 히에로니무스 보스 《파트모스섬의 성 요한》, 1490년대 초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고향 도시 스헤르토헨보스에서 이름을 따왔고, 1487~1488년에 이 도시의 성 요한 성당에 자체 제단을 둔 고귀한 성모 형제회의 소수 서약 회원이 되었다. 이 패널은 보스가 그 제단을 위해 그린 작은 바깥 날개 두 장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고, 다른 하나인 《명상하는 세례자 요한》은 마드리드의 라사로 갈디아노 미술관에 있다. 다른 것은 모두 꼼꼼히 적은 형제회 회계 장부에 보스에게 준 돈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른쪽 아래의 서명 Jheronimus는 연구자들이 보스의 서명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보며, 연륜연대학 조사에서는 이 패널이 1491년보다 앞서 그려졌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긴 적갈색 머리의 젊은 요한이 품이 넉넉한 분홍 망토를 입고 언덕에 앉아, 펼친 책을 무릎에 얹고 펜을 든 채 위를 올려다본다. 그곳의 옅은 해 원반 속에는 별의 관을 쓴 성모가 아기를 안고 가는 초승달 위에 앉아 있다. 요한 뒤 언덕 꼭대기에는 온통 희고 푸른 천사가 서 있고, 그 날개에는 공작 깃털처럼 검은 눈 무늬가 덮여 있다. 왼쪽 아래에서는 보스가 요한의 상징인 독수리 대신 그린 매가 땅에 내던져진 잉크병과 필통을 바라본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창백한 노인 얼굴에 머리에는 불붙은 공을 이고, 화살이 꿰뚫은 둥근 몸통에 도마뱀 꼬리를 단 악마가 앉아 있다. 미술관은 악마가 요한의 필기도구를 훔쳐 가려 하고 매가 그것을 지킨다고 쓴다. 언덕 너머로는 넓은 강이 흐르고, 강 위에서는 배 한 척이 불타며 그 옆에서 작은 배가 뒤집혔고, 곶에는 장대 위에 아주 작은 바퀴가 서 있는데, 미술관에 따르면 처형에 쓰던 바퀴다.
패널 뒷면에도 그림이 있다. 검은 바탕 위에 거의 갈색조 그리자유만으로 그린 밝은 원반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더 작고 밝은 원이 있어 둘을 합치면 눈처럼 보인다. 가운데의 가파른 바위 위에서는 펠리컨이 새끼들 위로 날개를 펼쳤고, 미술관은 펠리컨이 새끼들을 제 피로 먹이려고 부리로 자기 가슴을 찢는다고 설명한다. 둘레의 고리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겟세마니의 기도에서 그리스도의 매장까지 수난 장면들이 이어지고, 원반 바깥 검은 바탕에는 악마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1907년 베를린은 런던의 미술상들에게서 이 패널을 샀다. 마드리드의 날개는 뒤에 사방이 잘리고 얇게 깎인 뒤 뒷면에 나무 격자를 대어 보강되었고, 그때 뒷면 그림이 사라졌다.
13. 휘호 판 데르 후스 《동방박사의 경배》(몬포르테 제단화), 1470~1475년경
1890년 독일 미술사가 카를 유스티는 갈리시아의 작은 도시 몬포르테 데 레모스에서 작가를 아무도 모르는 초기 네덜란드의 큰 패널을 찾아냈다. 패널은 1593년 로드리고 데 카스트로 추기경이 세운 학교의 성당에 있었고, 이 학교는 1873년부터 피아리스트회 수도사들이 운영했다. 패널이 16세기에 어떤 경로로 에스파냐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10년 학교는 후원자인 알바 공작의 동의를 얻어 마드리드에서 패널을 매물로 내놓았고, 베를린 박물관들의 대리인이 낙찰을 받았다. 반출은 3년을 끌었다. 에스파냐에서는 그림을 나라 안에 남기려고 모금이 벌어졌고 화가 소로야도 1000페세타를 냈지만, 1913년 9월 판매는 적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베를린은 약 100만 마르크를 치렀는데, 회화관 큐레이터 슈테판 켐퍼디크는 이것이 베를린 컬렉션이 그림 한 점에 치른 값 가운데 가장 높다고 말한다. 1913년 성탄절에 패널이 베를린에 도착했고, 1914년 1월 2일 처음 일반에 공개되었다.
휘호 판 데르 후스는 헨트의 화가로, 1470년대 중반 성공의 절정에서 브뤼셀 근처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이 패널을 그의 이름과 연결하는 문서는 남아 있지 않고, 양식을 근거로 그의 작품으로 본다.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은 휘호의 작품이라기에는 이 패널이 너무 늦은 시기의 것이라고 여겼다고 전한다.
왼쪽에는 장밋빛 붉은 옷을 입은 늙은 요셉이 무릎을 꿇고 갈색 모자를 가슴에 대고 있고, 그 곁에는 짙은 파란 망토의 마리아가 앉아 있으며, 그녀 무릎 위의 벌거벗은 아기는 가장 나이 든 동방박사에게 손을 뻗는다. 그 동방박사는 거대한 빨간 망토 차림으로 두 손을 모으고 옆모습으로 무릎을 꿇었고, 그 앞 바닥에는 금관을 두른 그의 모피 모자가 놓여 있으며 돌 위에는 금 그릇이 서 있다. 오른쪽에는 왕관을 얹은 빨간 베레모의 두 번째 동방박사가 있고, 오른쪽 끝에는 초록 옷에 붉은빛과 금빛의 망토를 걸친 흑인 동방박사가 금잔을 든 손을 치켜들고 서 있다. 나무 울타리 너머로는 구경꾼들이 기웃거리고, 무너진 벽 틈으로는 햇살 비치는 비탈 위의 목자들이 보이며, 왼쪽 위 창턱에는 무늬를 그린 주전자와 나무 숟가락을 담은 질그릇이 놓여 있고,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파란 붓꽃과 보라색 매발톱꽃이 자란다.
제단화의 날개는 패널이 몬포르테에 오기 전에 이미 사라졌다. 1666년 에스파냐식 제단 장식벽(레타블로) 위에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의 그림을 담은 작은 틀을 올리면서, 위로 솟아 있던 휘호 패널의 가운데 부분을 틀 높이에 맞춰 톱으로 잘라 냈다.

14. 대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1559년
그림 한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빨간 드레스의 젊은 여인이 등이 굽은 노인에게 두건 달린 청록빛 파란 망토를 씌우고 있는데, 이 망토가 마을 전체에서 가장 밝은 색이다. 남편에게 파란 망토를 씌운다는 것은 남편을 속인다는 뜻이었고, 안트베르펜에서는 이 주제를 파란 망토라는 이름으로 알았다. 같은 두 사람이 가운데에 서 있는 프란스 호헨베르흐의 1558년 판화에 그런 제목이 붙어 있다. 한 해 뒤 브뤼헐은 미술관의 집계로 100가지가 넘는 속담을 패널 하나에 모아,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 곳곳에 흩어 놓았다. 왼쪽에는 지붕이 가파른 여관, 가운데에는 청록빛 기와를 얹은 정자, 위쪽에는 벽돌 탑과 다리, 오른쪽에는 범선이 뜬 바다가 있다.
여관 벽의 받침대에는 십자가가 아래를 향하도록 거꾸로 매단 파란 구가 걸려 있는데, 뒤집힌 세상의 표시이며, 미술관은 이를 그림 전체를 푸는 열쇠로 본다. 여관 지붕에는 기와 대신 둥근 파이가 깔려 있다.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빨간 옷의 여자가 방석에 무릎을 대고 뿔 달린 작은 악마를 묶고, 그보다 조금 오른쪽에서는 가슴받이가 달린 흰 셔츠 차림의 남자가 벽돌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같은 벽 앞에서는 갑옷 입은 기사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 그 아래에서는 한 사람은 양털을 깎고 다른 사람은 돼지털을 깎으며, 아래쪽 가운데에서는 송아지가 이미 빠져 죽은 우물을 메우고, 그 오른쪽 오두막에서는 수도사가 앉아 있는 그리스도에게 아마로 만든 수염을 달아 준다. 탑 꼭대기에서는 빨간 옷의 남자가 검은 망토를 바람에 내건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한 남자가 판자 위에 몸을 뻗고도 빵 한 덩이에서 다른 덩이까지 손이 닿지 않는데, 살림의 앞뒤를 맞추지 못한다는 뜻이며, 그 옆에 밝은 글씨로 BRVEGEL 1559라고 적혀 있다.
미술관은 1914년 영국인 소유자에게서 이 패널을 샀는데, 그때는 아직 보데가 베를린 박물관들의 총관장이었다.
15. 티치아노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있는 비너스》, 1550~1552년경
카를 몰은 빈의 화가로 빈 분리파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1904년부터 미트케 화랑의 예술 감독을 지냈으며, 뒤에는 부유한 고객들을 상대로 옛 거장의 그림을 팔았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티치아노의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있는 비너스》가 그를 거쳐 베를린에 왔고, 1904년에 문을 열어 지금은 보데 박물관이라 불리는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을 위해 그림을 산 사람은 빌헬름 폰 보데 자신이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그림은 뉴욕의 《류트 연주자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소장 이력이 같아서, 두 점 모두 로마의 피오 디 사보이아 공작 가문의 것이었다.
티치아노는 누워 있는 비너스와 음악가를 여러 주문자를 위해 공방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 그렸고, 미술관은 베를린의 그림을 그가 1550~1551년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던 카를 5세 황제의 궁정을 두 번째로 다녀온 뒤에 그린 그림들로 분류한다. 비너스는 캔버스 가운데부터 오른쪽 끝까지 짙은 빨간 벨벳 위에 온몸을 뻗고 누워 있고, 엉덩이에 투명한 베일을 걸쳤으며, 진주 귀걸이와 가슴 위의 가는 금 사슬, 두 팔의 팔찌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는 짙은 빨간 벨벳 웃옷을 입은 젊은 오르간 연주자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그녀를 보려고 의자 위에서 몸을 크게 비틀었는데, 그 바람에 그의 손도 건반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맨 오른발은 그의 허벅지에 닿아 있다. 그녀의 어깨 뒤에서는 큐피드가 얼굴을 그녀의 뺨에 대고 손을 그녀 가슴에 얹었고, 그녀의 눈길은 큐피드를 비켜 아래 왼쪽으로 미끄러진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털이 부스스한 흰 강아지가 입을 벌리고 관람자를 보고, 왼쪽 위에서는 오르간의 은빛 파이프가 반짝이며, 난간 너머로는 갈색 언덕이 이어지고 그 위로 흰 말이 아주 작은 수레를 끌고 간다.
역사가 찰스 호프는 베를린의 그림을 공방의 약한 작품으로 보았고, 미술관은 그에 맞서 그림의 질과 오르간 연주자의 모습에서 작가가 직접 고친 흔적을 든다.
프라도에 있는 이 구성의 두 판본에서는 오르간 연주자가 연주를 하고 있는데, 하나에는 큐피드 없이 강아지가, 다른 하나에는 강아지 없이 큐피드가 있다. 베를린 그림에는 큐피드와 강아지가 모두 있다.
1945년 봄

16.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1663~1665년경
미국 육군 대위이자 비스바덴 중앙 집결소 책임자였던 월터 파머는 1945년 11월 6일, 베를린 박물관들의 그림 202점을 포장해 ‘보관’을 명목으로 미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5년 봄 회화관의 작은 그림들은 베를린을 떠나 여러 광산으로 옮겨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튀링겐 메르커스의 카이저로다 칼리 광산이었고, 4월 그곳에서 미국 제3군이 그림들을 찾아냈으며, 그림들은 거기서 비스바덴으로 옮겨졌다. 미군의 기념물 보호 담당 장교들은 이에 항의했고, 그 항의문은 비스바덴 선언이라 불렸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한 민족의 유산 일부를 가져가는 일만큼 오래 쓰라리게 남을 역사적 원한은 없으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도 그 202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림 왼쪽에는 뚜껑 달린 높은 검푸른 항아리, 탁자,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짙은 파란 천이 어두운 덩어리를 이루고, 오른쪽에는 옆모습의 젊은 여인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왼쪽 위 창에서 들어온 빛을 받은 텅 빈 밝은 벽이 있다. 진주 목걸이는 이미 그녀의 목에 걸려 있고, 그녀는 노란 리본의 두 끝을 목 높이에서 하나는 턱 밑에, 다른 하나는 들어 올린 손에 쥔 채, 왼쪽의 창과, 거의 옆면만 보이는 어두운 테의 작은 거울을 바라본다. 그녀는 검은 꼬리 끝이 점점이 박힌 흰 담비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노란 공단 짧은 윗옷을 입었고, 진주 귀걸이를 했으며, 머리에는 빨간 리본을 맸다. 19세기에 이 그림은 페르메이르를 대중에게 다시 알린 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거의 소유였고, 그 뒤 쉬르몬트에게 넘어갔으며, 1874년 그의 컬렉션과 함께 베를린에 왔다(이 구입 이야기는 《교회의 성모》에서 했다).
1945년 12월 6일 그림을 실은 배가 자유의 여신상 앞을 지났고, 그림들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의 수장고에서 2년 넘게 머물렀다. 1948년 봄 내셔널 갤러리는 이 그림들을 일반에 공개했고, 40일 동안 거의 96만 5000명이 전시를 보았다. 그 뒤 그림들은 미국의 13개 도시를 더 돌아 모두 약 250만 명에게 공개되었고, 1949년 비스바덴으로 돌아왔다. 페르메이르는 그 뒤에도 1950년 암스테르담과 1951년 파리의 전시에 나갔고, 1956년에야 서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7.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그리스도》, 1613~1615년경
피터르 브뤼헐은 1569년 브뤼셀의 노트르담 들라 샤펠 성당에 묻혔다. 1613~1615년 무렵 그와 그 아내의 아들이자 루벤스의 가까운 친구인 대 얀 브뤼헐이 두 사람의 묘비를 위해 루벤스에게 그림을 주문했다. 성 베드로는 피터르 브뤼헐의 수호성인이었고, 루벤스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열쇠를 건네는 장면을 그렸다.
왼쪽에는 상체를 드러낸 그리스도가 머리 둘레에 가는 금빛 광선을 두르고 서 있고, 새빨간 망토가 그의 먼 쪽 어깨에서 큰 주름을 이루며 패널 맨 아래까지 흘러내린다. 그는 한 손을 높이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펴고, 다른 손으로는 금 열쇠와 은 열쇠 두 개를 아래로 내민다. 대머리에 흰 수염을 기르고 묵직한 금빛 노란 망토를 걸친 늙은 베드로는 그에게 몸을 굽혀, 내민 손바닥으로 열쇠 고리를 받는다. 베드로 뒤에는 사도 네 명의 머리가 빽빽이 모여 있고, 그 가운데 흰 수염의 노인 하나가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똑바로 본다.
1765년 성당 참사회는 구매자가 자기 비용으로 묘비에 걸 복제화를 주문한다는 조건으로 이 패널을 암스테르담에 팔았다. 그림은 여러 소유자를 거쳐 20세기에 뮌헨의 수집가 마르첼 폰 네메시에게 갔고, 그는 1930년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그림은 드레스드너 은행이 대출 담보로 잡아 둔 작품들 가운데 있었다. 1935년 8월 15일 프로이센은 이 은행에서 작품 약 4400점을 75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샀고,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은 이 거래를 나치 시대 최대의 미술품 거래라고 부른다.
1945년 5월 프리드리히스하인의 대공포탑에서 베를린의 루벤스 그림 열 점이 불탔다. 전쟁 뒤 컬렉션의 약 3분의 2는 서쪽으로 가서 서베를린의 달렘 지구에서 전시되었다. 나머지는 1958년까지 소련이 가지고 있었고, 1958년 가을 그림 약 200점이 동베를린으로 돌아와 1960년대부터 보데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루벤스의 이 패널은 동쪽 몫에 속했다. 1998년 6월 12일 두 몫은 건축가 힐머와 자틀러가 지은 문화포럼의 새 건물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고, 회화관의 전 관장 얀 켈히는 보데 박물관에서 온 큰 그림들이 바로 대형 그림에서 컸던 전쟁 손실을 그곳에서 얼마간 메워 주었다고 회고했다.
켈히는 그 그림들로 크라나흐의 《최후의 심판》, 파리스 보르도네의 《옥좌의 성모》, 루벤스의 이 패널, 게인즈버러가 실물 크기로 그린 존 윌킨슨의 초상을 꼽았다.
18. 장앙투안 와토 《춤》(《이리스》), 1718~1721년경
1941년 10월 14일 전 황태자 빌헬름은 와토의 그림을 9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감정가로 총통에게 넘기게 되어 기쁘다고 썼다. 넉 달 전 네덜란드 도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의 아버지 전 황제 빌헬름 2세가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있던 그림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협상은 드레스덴 회화관 관장이자 린츠 미술관을 위한 히틀러의 특별 전권 위원 한스 포세가 맡았고, 베를린의 화상 카를 하버슈토크가 중개했으며, 1941년 12월 호엔촐레른 가문 재산 관리청이 거래를 승인했다. 포세의 일기에 따르면 그림은 1942년 2월 13일 드레스덴 중앙역에 12시간 늦게 도착했다.
그 전까지 《춤》은 150년 넘게 호엔촐레른 가문의 것이었다. 지금 이 그림을 관리하는 연방 관청의 기록에 따르면, 그림은 1766년 수집가 헤릿 브람캄프가 컬렉션 일부를 팔 때 암스테르담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위해 구입되었고, 그림에 관한 첫 확실한 언급은 1802년에 작성된 그의 동생 하인리히 왕자의 유산 목록에 나온다. 1918년 이후에도 그림은 가문에 남았다.
오른쪽 탁 트인 풀밭에 어린 이리스가 홀로 서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분홍과 초록 줄무늬의 긴 드레스를 입고, 높이 올린 머리에 노란 리본과 분홍 꽃을 꽂았으며, 엷은 미소를 띠고 관람자를 본다. 왼쪽 큰 나무 그늘에는 목동 차림의 아이 셋이 앉아 있다. 긴 목동 지팡이를 든 빨간 웃옷의 소년, 이리스를 바라보는 소녀, 작은 피리를 부는 라일락빛 회색 옷의 소년이다. 피리 부는 소년의 발치에는 구리 목걸이를 한 흰 개가 잠들어 있고, 그 뒤에는 장미 바구니가 있으며, 왼쪽 아래 구석의 분홍 천 위에는 소용돌이 장식이 있는 은빛 물건과 화살이 놓여 있다. 미술관은 화살과 장미를 사랑과 마음의 아픔으로, 그리고 소녀가 곧 아이들 놀이를 졸업하리라는 암시로 읽는다. 이리스라는 제목은 샤를니콜라 코섕이 이 그림을 옮겨 새긴 판화 아래의 시에서 왔는데, 그 시가 이 이름으로 시작한다.

구입 뒤 그림은 뮌헨으로 보내졌고, 1944년 오스트리아의 소금 광산으로 피란했으며, 1945년 미군이 찾아내 뮌헨 중앙 집결소에 넘겼다. 1960년 그림은 기본법 제134조에 따라 독일 연방공화국의 재산이 되었고, 회화관은 연방에서 그림을 영구 대여받았다. 연방 관청은 나치에게 박해받은 소유자에게서 그림을 빼앗았을 가능성은 배제된다고 쓴다.
베를린에서 이 그림의 목록 번호 Mü.3644는 뮌헨 집결소에서 받은 번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9. 카라바조 《성 마태오와 천사》(첫 번째 판본), 1602년
화가들의 전기를 쓴 벨로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70년 뒤에 글을 썼다. 그에 따르면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사제들은 콘타렐리 예배당 제단에서 이 그림을 떼어 냈는데, 인물에 품위도 성인다운 모습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태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사람들 앞에 발바닥을 무례하게 내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카라바조는 절망했고, 그러자 빈첸초 주스티니아니 후작이 그림을 가져가고 카라바조에게 다른 그림을 그리게 했다. 미술관은 주스티니아니가 카라바조가 두 번째 판본을 그린다는 조건으로 사제들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고 덧붙인다. 2017년 이탈리아의 한 연구팀은 이 그림이 애초에 예배당과 상관없이 주스티니아니가 처음부터 자기 거처를 위해 주문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림이 거의 정사각형이고 두 번째 판본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팬 대머리 노인 마태오가 짙은 수염을 기르고 접이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커다란 책을 펼쳐 허벅지에 얹고 있으며, 들어 올린 발의 발바닥이 관람자를 정면으로 향한다. 몸에 달라붙는 얇은 흰 옷을 입은 곱슬머리 천사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뺨이 그의 관자놀이에 닿을 듯하고, 자그마한 손으로 펜을 쥔 그의 손을 이끈다. 관람자 쪽으로 돌려진 책장에는 히브리 문자가 네 줄 적혀 있는데, 미술관은 초기 문헌에 따르면 마태오가 복음서를 히브리어로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815년 이 그림은 주스티니아니 컬렉션과 함께 베를린에 왔다. 1945년 봄 회화관의 그림들을 광산으로 보낼 때 큰 캔버스 약 430점은 갱도에 들어가지 않아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 지구의 대공포탑에 남았는데, 사람 키보다 큰 이 캔버스도 그 가운데 있었다. 1945년 5월 2일 탑은 붉은 군대에 넘어갔고, 5월에 그 안에서 두 번 불이 났다. 한 번은 5월 6일, 또 한 번은 5월 14일에서 18일 사이였으며, 둘 다 베를린이 항복한 뒤였다. 미술관은 그림이 1945년 5월 사격 통제탑에서 아마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쓰며, 어느 불이 그림을 태웠는지, 불이 왜 났는지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 역사가 귄터 베르무슈는 탑의 그림들이 약탈당했다고 보았다. 같은 탑에서 주스티니아니 컬렉션의 다른 카라바조 두 점, 《코르티잔의 초상》과 《올리브 산의 그리스도》, 그리고 시뇨렐리의 《판의 학교》도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1925년부터 1944년까지 회화관 전체를 유리 원판에 담은 박물관 사진가 구스타프 슈바르츠가 찍었고, 원판들은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에서 전쟁을 견뎌 냈다. 2026년 미술관은 이 원판 약 430장을 새로 촬영했고, 마태오의 사진도 미술관의 온라인 컬렉션에 실렸다.
렘브란트의 이름을 거둬들인 미술관 (1985~1998)

20. 렘브란트 주변 《황금 투구를 쓴 남자》, 1650~1660년경
1985년 11월 베를린 회화관의 네덜란드·플랑드르 회화 큐레이터 얀 켈히는 회화관에서 가장 유명한 ‘렘브란트’를 다른 화가가 그렸다고 발표했다. 켈히는 1968년에 시작된 렘브란트 연구 프로젝트와 함께 작업했고, 1986년 렘브란트의 작품이라는 판정은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켈히에 따르면 이 그림은 위작이 아니며, 여전히 뛰어난 솜씨의 그림이다.
1897년 그해 창립된 카이저 프리드리히 박물관 협회가 보데의 제안으로 런던의 콜나기 상회에서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샀다. 협회는 지금도 이 그림과 그 밖의 그림 약 110점을 소유하며 회화관에 빌려주고 있다. 오랫동안 그림 속 인물은 렘브란트의 형제 아드리안으로 여겨졌고, 1948~1949년에 202점과 함께 미국을 순회할 때도 그렇게 표기되었으나, 뒤에 이 견해는 버려졌다. 서베를린의 달렘에서 이 그림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렘브란트’가 되었다.
높고 둥근 투구는 날카로운 볏과 아래로 처진 넓은 챙을 갖추었고, 두텁게 돋운 물감으로 그려져 소용돌이 장식, 수염 난 작은 가면이 달린 카르투슈, 테두리를 따라 늘어선 리벳이 도드라져 나온다. 투구 아래 얼굴은 얇고 매끄럽게 칠해 물감 너머로 캔버스 올이 보이고, 눈은 내리깔려 거의 감겼으며, 이마는 챙의 그늘에 잠겨 있다. 투구와 얼굴 모두 왼쪽 위에서 빛을 받지만, 투구가 훨씬 밝다. 1998년 《타게스슈피겔》의 전언에 따르면, 1986년의 조사 보고서는 이 차이를 마치 투구와 얼굴이 서로 다른 두 광원에서 빛을 받는 것처럼 묘사했다. 보고서는 또 투구의 물감이 그림의 다른 어느 곳보다 두껍게 올라가 있다고 적었고, 중성자 오토라디오그래피 조사에서는 밑칠이 몇 번의 단순한 붓질로 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1998년 이 그림은 렘브란트 주변이라는 표기를 달고 문화포럼의 새 건물로 옮겨졌고, 협회는 미술관과 함께 계속 이 그림을 전시했다.

《말레 바베》와 홀츠슈어 초상의 뒷면에는 똑같은 미국 라벨이 못으로 박혀 있는데, 거기에는 소유자 이름 ‘Kaiser Friedrich Museum, Berlin’, 화가 이름, 제목, 그리고 ‘National Gallery of Art’라는 줄이 적혀 있다. 《말레 바베》의 라벨에는 그림이 19세기에 불리던 이름인 Hille Bobbe로 적혀 있다.
그 밖에 볼 만한 작품들
《안슬로》 말고도 회화관에는 왕실 컬렉션에서 온 렘브란트의 《율법판을 든 모세》, 그의 《벨벳 베레모를 쓴 자화상》과 《수산나》가 있다. 회화관의 두 번째 페르메이르인 《와인 잔》은 1901년 호프 컬렉션과 함께 들어왔다. 라파엘로의 여러 성모 가운데 《테라누오바 성모》는 1845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샀다. 15세기 이탈리아 그림으로는 만테냐의 《성전 봉헌》, 조반니 벨리니의 《죽은 그리스도》, 마사초의 패널들을 찾아볼 만한데, 그 가운데에는 피사 다폭 제단화의 프레델라 패널들과 산모에게 선물하던 그림 쟁반이 있다. 조토의 《성모의 죽음》은 보데가 1914년에 산 것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산 14세기 이탈리아 그림이었고, 이 그림도 전쟁 뒤 광산과 미국을 거쳐 1950년에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