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가 공공 박물관이 된 것은 1793년 8월 10일, 왕정이 무너진 지 꼭 한 해가 되는 날이었다. 날짜는 일부러 고른 것이었다. 프랑스 왕들의 궁전은 왕을 끌어내린 일을 기념하는 바로 그날 대중에게 문을 열었고, 왕실 소유였던 소장품은 국민의 재산으로 선포되었다. 다만 처음 몇 해 동안 ‘공공’이라는 말의 뜻은 지금과 달랐다. 열흘로 된 공화력 한 주의 절반은 화가와 모사가들의 몫이었고, 일반 관람객은 사흘만 들어올 수 있었으며, 나머지 이틀은 청소에 쓰였다.

오늘날 루브르의 소장품은 약 50만 점이고, 그중 3만 점가량이 전시실에 나와 있다. 한 번의 방문으로 전부 볼 수는 없으니 스물다섯 점을 골라 시대순으로 따라가 보려 한다. 4500년 된 이집트 조각상에서 시작해 1830년의 바리케이드에서 끝난다.

01. 19세기 프랑스인들이 파낸 것들

루브르 이야기는 보통 《모나리자》로 시작하지만, 이 궁전은 그 그림이 대표작이 되기 훨씬 전부터 채워지고 있었다. 소장품의 상당 부분은 19세기의 발굴로 들어왔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오스만 제국 영토에 나가 있던 프랑스 영사와 외교관들이 발굴을 조직하고 비용을 댔으며, 현지 인부를 고용하고, 출토품을 직접 골라 파리로 보냈다. 우리도 그렇게 들어온 다섯 점으로 시작한다. 이 목록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1. 앉아 있는 서기

이 조각상의 눈은 네 가지 재료를 짜 맞춘 것이다. 흰자위는 흰 마그네사이트, 홍채는 광을 낸 수정이고, 수정 뒤에는 동공 대신 어두운 판을 댔으며, 가장자리에는 눈꺼풀 대신 구리 테를 둘렀다.

이렇게 만든 것은 가까이서 보는 사람을 위해서였다. 멀리서 보면 눈은 여느 돌과 다를 바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정이 빛을 받아 조각상의 시선이 보는 사람을 따라온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한 것인데, 조각상이 정확히 어디에 서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멤피스 부근 사카라의 묘역에서 발견되었지만 당시 발굴 일지가 사라져 발견 경위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무덤을 꾸미던 부장품의 하나로,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

앉아 있는 서기
앉아 있는 서기Unknown Egyptian sculptor (Old Kingdom), -2600, 루브르 박물관
앉아 있는 서기
앉아 있는 서기Unknown Egyptian sculptor (Old Kingdom), -2600, 루브르 박물관

조각상 자체는 채색한 석회암이고 높이는 54센티미터가 조금 안 된다. 남자는 다리를 포개고 앉아 무릎 위에 파피루스를 펼쳐 놓았고, 등은 곧고 얼굴은 들려 있다. 이집트 조각은 몸을 이상적으로 다듬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어째서인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배가 조금 나왔고 턱은 두툼하며 얼굴은 젊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다. 오른손은 갈대 펜을 쥐도록 오므려져 있지만, 손에 펜은 없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서기’는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조각상 곁에서는 이름도 직함도 나오지 않았고, 이집트에서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높은 신분의 표시였을 뿐 반드시 그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각상을 찾아낸 사람은 프랑스 이집트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로, 1850년의 일이다. 그는 콥트어 필사본을 구하러 이집트에 왔다가 그대로 남아 발굴을 이끌었고, 루브르는 4년 뒤 이 조각상을 사들였다. 마리에트는 1858년 이집트 고대유물청의 수장이 되었고, 출토품을 나라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관철했다.

함무라비 법전 석비
함무라비 법전 석비Unknown Babylonian sculptor (reign of Hammurabi), -1771, 루브르 박물관

2. 함무라비 법전 석비

높이 2.25미터가 조금 넘는 검은 돌기둥이 위에서 아래까지 쐐기문자로 덮여 있다. 글자가 워낙 고르고 빽빽해서 몇 걸음 물러서면 짜 놓은 무늬처럼 보인다. 글 위에는 부조가 있다. 왕이 인사하듯 한 손을 들고 앉아 있는 태양신 샤마시 앞에 서 있고, 신은 왕에게 막대와 고리를 내밀며, 그 어깨에서는 불꽃이 솟는다. 한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 있는데도 두 얼굴은 같은 높이에 있다.

그 아래 새긴 법조문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빚, 상해, 혼인, 삯을 주고 빌린 소, 무너진 집, 뱃사공의 품삯에 관한 수백 개 조항이다. 위쪽 부조는 나머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당대의 바빌로니아인이라면 누가 풀이해 주지 않아도 그 뜻을 알았다. 이 법을 정한 것은 신의 손에서 권력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함무라비 이전에도 법전을 만들었고, 그중에는 300년이나 앞선 것도 있다. 다만 그런 법전은 점토판에 적어 궁전 문서고에 두었다. 함무라비의 법은 돌에 새겨 누구나 볼 수 있게 세워 두었다.

석비가 새겨지고 600년이 지난 기원전 1155년 무렵, 엘람의 왕 슈트루크나훈테가 바빌로니아군을 무찌르고 바빌론을 점령해 가져갈 만하다고 여긴 것을 모조리 실어 갔고, 이 석비도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오늘날 이란 남서부에 있던 자기 수도 수사에서 부조 아래의 법조문 일곱 단을 깎아 내게 했다. 자기 승전을 기록할 자리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 글은 끝내 새겨지지 않았고, 앞면 아래쪽에는 지금도 빈 면이 남아 그 둘레로 글이 이어진다.

1901년에서 190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자크 드 모르강이 이끄는 프랑스 고고학 조사단이 수사에서 세 조각으로 깨진 석비를 찾아냈다. 조각들은 파리로 보내져 다시 붙여졌고, 석비는 1904년부터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다.

3. 코르사바드의 라마수

코르사바드 사르곤 2세 궁전의 사람 머리를 한 날개 달린 황소상(라마수)
코르사바드 사르곤 2세 궁전의 사람 머리를 한 날개 달린 황소상(라마수)Unknown Assyrian sculptor (reign of Sargon II), -713, 루브르 박물관

이 황소는 다리가 다섯 개이고, 다섯 번째 다리는 조각가가 일부러 넣은 것이다.

사람 머리를 한 이 날개 달린 황소는 기원전 721년부터 705년까지 아시리아를 다스린 사르곤 2세를 위해 조각되었다. 놓일 곳은 그가 새로 짓고 있던 수도, 자기 이름을 따서 두르샤루킨이라 부른 도시의 궁전이었다. 수염 난 사람의 머리에 황소의 몸을 하고, 옆구리를 따라 날개를 접었으며, 뿔 달린 관을 썼다.

황소는 성문에 서 있었고, 사람들은 두 방향에서 그것을 보았다. 정면에서는 나란히 놓인 앞다리 두 개가 보인다. 짐승이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길을 막는 모습이다. 옆에서는 걸음을 옮기는 다리 네 개가 보이고, 황소는 통로를 따라 걸어간다. 그래서 탄원하러, 협상하러, 항복하러 사르곤의 궁전을 찾은 사람은 누구나 먼저 버티고 선 짐승과 마주쳤고, 문을 지나면서는 걸어가는 짐승을 보았다.

이 황소를 루브르로 보낸 사람은 모술 주재 프랑스 영사 폴에밀 보타다. 그는 1843년 코르사바드에서 발굴을 시작해 무엇을 가져갈지 직접 골랐고, 1846년 고른 것들을 파리로 보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사모트라케의 니케Unknown Greek sculptor (Hellenistic, Rhodian), -190, 루브르 박물관

다음 화물은 운이 나빴다. 1855년 5월, 아시리아 조각을 실은 뗏목들이 티그리스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쿠르나 부근에서 현지 부족의 습격을 받았다. 화물 대부분이 가라앉아 지금도 강바닥에 있으며, 정확히 무엇이 얼마나 가라앉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4. 사모트라케의 니케

이 조각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오른다리는 앞으로 내디뎌 힘이 들어가 있고, 젖은 천이 허벅지에 달라붙어 그 형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반대쪽에서는 같은 천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두 날개 사이로 길게 뒤로 날린다. 상체는 날개와 반대 방향으로 틀어져 있고 가슴은 앞으로 내밀었다. 니케는 아직 공중에 있고, 하늘에서 뱃머리로 막 내려앉는 중이다.

이 상은 기원전 190년 무렵 파로스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사모트라케섬의 위대한 신들의 성소에 세워졌다. 머리와 두 팔은 떨어져 나갔는데,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리는 끝내 찾지 못했고, 오른손은 1950년 사모트라케에서 발견되어 조각상 옆에 전시되어 있다. 그래도 움직임의 느낌은 거의 줄지 않았다. 그 느낌은 자세와 옷자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소에서 니케는 높은 곳에 세워져, 이 섬의 비의에 입문하러 온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 비의에 관해서는 남은 기록이 많지 않다. 사람들은 하늘을 배경으로 선 니케를 아래에서, 멀찍이 떨어져 올려다보았다.

니케는 파편 더미가 되어 파리에 도착했다. 아드리아노플 주재 프랑스 부영사로 발굴에 열심이던 샤를 샹푸아조가 1863년 사모트라케에서 이 상을 파내 루브르로 보냈다. 니케가 딛고 서 있던 뱃머리의 회색 대리석 덩어리들은 건축 잔해로 여겨 섬에 남겨 두었고, 그것을 가지러 다시 간 것은 1879년이었다. 전체를 하나로 조립한 것은 1880년대였고, 조각상은 대계단 맨 위 층계참에 올려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성소에서처럼 아래에서, 거리를 두고 올려다보게 된다.

왼쪽 날개는 고대부터 남아 있던 것이고, 오른쪽 날개는 박물관에서 왼쪽 날개를 좌우로 뒤집어 석고로 떠 만든 것이다.

5. 밀로의 비너스

1820년 밀로스섬의 한 농부가 땅속에서 대리석 여인상을 찾아냈다. 이 소식을 프랑스 해군 장교가 전해 들었고, 리비에르 후작이 조각상을 사들여 루이 18세에게 바쳤으며, 왕은 1821년 이를 루브르에 넘겼다. 때가 좋았다. 다섯 해 전 나폴레옹이 모은 수집품이 해체되어 유럽 각지로 되돌아갈 때 《메디치의 비너스》가 파리를 떠나 토스카나로 돌아갔다. 한때 피렌체에서 가져왔던 이 조각은 당시 유럽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비너스로 꼽혔다. 루브르는 대표적인 고대 미인을 잃었고, 새 조각상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Unknown Greek sculptor (Hellenistic), -137, 루브르 박물관

그다음부터 홍보가 시작되었다. 조각상은 판화로 복제되었고, 전문 출판물에서 자세히 다뤄졌으며, 이름난 고고학자와 비평가들이 차례로 고대 조각의 정점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했다. 박물관에 들어온 지 한 해쯤 지나자 이 조각상은 벌써 루브르의 한 전시실 천장화에 그려져 있었다.

키는 2미터가 조금 넘는다. 여인은 허리에서 몸을 틀었고, 옷자락은 엉덩이를 타고 흘러내리다 떨어지기 직전에 멈춰 있다. 두 팔은 없고, 그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 상이 과연 비너스인지, 밀로스섬 어디에 서 있었는지, 무엇에 쓰였는지도 모른다. 여러 복원안이 그 손에 사과를, 거울을, 방패를, 창을, 자기 옷자락 끝을 쥐여 주었고, 그때마다 다른 조각상이 되었다.

반면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려져 있다. 이런 조각상에 쓸 대리석을 필요한 크기의 한 덩어리로 구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여러 덩어리를 이어 만들었고, 이음매는 옷자락 주름 아래 가려진 채 엉덩이를 지나간다.

02. 첫 그림들, 그리고 드농이라는 사람

천사들에 둘러싸여 위엄 있게 앉은 성모자
천사들에 둘러싸여 위엄 있게 앉은 성모자치마부에, 1300, 루브르 박물관

6. 치마부에 《마에스타》

성모가 무릎에 아기 예수를 앉히고 옥좌에 앉아 있고, 여섯 천사가 그 옥좌를 떠받쳐 들고 있다. 양쪽에 셋씩, 위아래로 층층이 늘어선 천사들이다. 배경은 온통 금빛이고, 얼굴은 길쭉하며, 옷 주름은 물감 위에 금선으로 그어져 있다. 패널의 높이는 4미터가 넘고, 1280년 무렵 피사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을 위해 그려졌다.

치마부에는 이탈리아에서 여러 세기 동안 이어진 비잔틴 양식으로 그렸다. 공간 대신 금빛을 깔고, 자세는 엄격하며, 화면에 깊이가 없는 양식이다. 그런데도 그의 천사들은 하나씩 뒤로 물러서며 계단처럼 서 있고, 옥좌는 화면 안쪽으로 들어간다. 한 세대 뒤 그의 제자 조토는 다르게 그리기 시작한다. 조토의 인물들은 무게와 부피를 얻고, 공간 속에 자리를 잡으며, 사람이 행동하듯 행동한다. 그래도 금빛 바탕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브르에도 금빛 바탕 위에 그린 조토의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가 있다.

《마에스타》가 파리에 온 것은 1812년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했고, 군대의 뒤를 따라 루브르의 박물관에 들일 작품을 고르는 위원들이 왔다. 이 일을 지휘한 사람은 도미니크비방 드농이었다. 박물관 관장이자 판화가이자 외교관으로, 그림을 보는 눈이 뛰어났다. 그는 이름난 베네치아와 로마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이탈리아 원시파의 그림도 가져갔다. 13세기와 14세기의 화가들로, 당시 유럽에서는 이들을 진짜 미술이 나오기 전의 서툰 선구자로 여겨 거의 수집하지 않았다.

워털루 이후 동맹국들은 프랑스에 가져간 것의 대부분을 돌려주게 했다. 《마에스타》는 돌아가지 않았다. 피사는 찾으러 오지 않았고, 프랑스도 굳이 일깨워 주지 않았다. 드농은 대체로 요구받은 것보다 눈에 띄게 적게 돌려주었는데, 그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뒤에서 보게 된다.

롤랭 대법관의 성모
롤랭 대법관의 성모얀 반 에이크, 1435, 루브르 박물관

7. 얀 반 에이크 《롤랭 대법관의 성모》

그림의 왼쪽 절반에는 금란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펼친 책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있다. 오른쪽 절반에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앉아 있고, 천사가 그 머리 위로 관을 받쳐 들고 있다. 두 사람은 패널을 정확히 반씩 나눠 차지하고, 같은 크기로, 서로 마주 보며, 같은 바닥 위, 같은 로지아 안에 그려져 있다.

남자의 이름은 니콜라 롤랭, 부르고뉴의 대법관이다. 선량공 필리프 곁의 제1인자였고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다. 주문자는 전에도 그림에 들어갔지만, 대개 구석에 성인들보다 눈에 띄게 작게 그려서 신분의 차이가 한눈에 드러나게 했다. 롤랭은 자신을 성모와 같은 높이로 그려 달라고 주문했고,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는 1435년 무렵 고향 오툉의 성당을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고, 그림은 혁명 때까지 그곳에 있다가 1800년 루브르로 옮겨졌다.

반 에이크는 유화 물감을 얇고 투명한 층으로 쌓아 놀라운 정밀함을 얻었다. 66×62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패널에 모피 테두리의 털 한 올 한 올, 책의 글자, 타일 바닥의 무늬, 관에 박힌 보석이 그려져 있다.

로지아의 기둥 너머로 도시가 펼쳐진다. 섬이 있는 강, 사람들이 건너는 다리, 지붕과 탑, 들판, 그리고 지평선의 산들이다. 이 도시는 여러 곳을 모아 짜 맞춘 것이라 지도에는 없지만, 건물 가운데 몇몇은 실제 건물로 확인되었다. 다리 위 인물들은 쌀알만 한데도 저마다 어느 쪽으로 걸어가는지가 보인다.

8. 조르조네 또는 티치아노 《전원의 합주》

젊은 남자 둘이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그중 한 사람은 류트를 들고 있다. 그 곁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유리 주전자로 우물에 물을 붓고, 다른 한 사람은 등을 보이고 앉아 피리를 들고 있다. 남자들은 여인들을 쳐다보지 않고, 아무리 봐도 그들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전원의 합주
전원의 합주티치아노, 1510, 루브르 박물관

이 여인들은 아마 뮤즈이거나 음악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로,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고, 그림은 이런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잘 풀던 베네치아의 소수 감식가들을 위해 그려졌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누구도 결정적인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누가 그렸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2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이 그림은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조르조네는 1510년 33세 무렵에 페스트로 죽은 베네치아 화가로, 열 점이 채 안 되는 작품을 남겼고 그중 서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뒤 붓질을 꼼꼼히 분석한 많은 연구자가 이 그림을 젊은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보게 되었다.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의 제자이자 동료였고, 스승이 죽은 뒤 미완성으로 남은 그림들을 마무리했다. 오늘날 루브르는 이 그림을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올려 두었지만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고, 일부 전문가는 여전히 조르조네로 보거나 두 사람이 함께 그렸다고 본다.

이 그림이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된 것은 1671년, 루이 14세가 돈에 쪼들리던 쾰른의 은행가 에버하르트 야바흐의 수집품을 사들였을 때다. 이 이름은 뒤에서 한 번 더 나온다.

03. 그림을 넘겨주지 않은 레오나르도

암굴의 성모
암굴의 성모레오나르도 다 빈치, 1484, 루브르 박물관

9.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암굴의 성모》

1483년 밀라노의 무염시태 형제회는 레오나르도와 데 프레디스 형제 두 사람에게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 성당 안 자기들 예배당에 걸 큰 제단화를 주문했다. 계약서에는 기한과 보수는 물론 액자의 금박까지 적혀 있었다. 그 뒤 돈을 둘러싼 다툼이 시작되어 20년 넘게 이어졌고, 소송과 프랑스 왕에게 올리는 청원에까지 이르렀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그림은 이렇다. 어스름한 동굴 속에서 성모가 무릎을 꿇고, 한 팔로 아기 세례 요한을 감싸고 다른 손은 아기 예수의 머리 위로 내밀고 있다. 예수는 땅에 앉아 손을 들어 요한을 축복한다. 그 곁에서 천사가 예수의 등을 받치며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킨다. 인물들 뒤로는 물에 깎인 바위가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물과 안개 낀 빛이 트여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동굴은 오랜 공부에서 나왔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지질과 물의 움직임, 바위가 깎여 나가는 과정을 기록했고, 이 그림의 바위는 실제 암석이 쌓이는 방식 그대로 층을 이루고 있다.

역사가들도 소송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설은 여러 가지다. 형제회는 화가가 약속보다 많은 돈을 요구했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그림이 늦게 넘어왔다고 여겼을 수도 있으며, 그림이 주문 내용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을 수도 있다. 이 그림의 인물들에게는 후광이 없어서 몸짓으로만 성인들을 구별할 수 있다.

모나리자
모나리자레오나르도 다 빈치, 1503, 루브르 박물관

결국 예배당에는 같은 구도의 두 번째 판본이 걸렸다. 후광이 있고 요한이 십자가를 든 다른 그림으로, 오늘날 런던에 있다. 첫 번째 판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남아 있는 문서로 알 수 없다. 이 그림은 소송이 끝나기 전에 밀라노를 떠났고, 17세기에는 이미 퐁텐블로의 프랑스 왕실 소장품 목록에 올라 있다. 어떤 경로로 그곳에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0.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도 마찬가지로 주문자에게 넘기지 않았다.

초상 속 여인은 거의 틀림없이 피렌체의 비단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이고, 레오나르도는 1503년 무렵 남편을 위해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완성된 그림은 자기가 간직해 거처를 옮길 때마다 가지고 다녔고, 그 뒤로도 여러 해 동안 손을 보았다. 그는 이런 일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어서 주문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곤 했다. 1516년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갔고, 초상화도 함께 갔다. 왕은 아마 1518년에 이 그림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 뒤로 그림은 왕실 소장품이었다가 국가 소장품이 되었고, 다른 그림들 사이에 걸려 감식가와 화가와 수집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400년 가까이 인파라고는 없었다.

그 미소에 관해서는 유럽 회화의 다른 어떤 것보다 헛소리가 많이 쓰였으니,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편이 낫다. 레오나르도는 반투명한 물감을 수십 겹 올렸는데, 한 겹 한 겹이 앞의 것보다 얇았다. 경계는 붓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문질러 흐렸고, 그래서 입술과 눈의 윤곽이 번지듯 풀려 있다. 풍경이 그렇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녀 뒤의 바위와 물과 안개 낀 먼 곳은 지도 어디에도 없는 곳이고, 난간에서 먼 곳으로 이어지는 길도 없으며, 머리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보다 눈에 띄게 낮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여러 해에 걸쳐 한 겹씩 덧칠해 가며 그렸고, 풍경을 한 장소로 맞춰 놓을 이유가 없었다.

The empty wall in the Salon Carré after the theft of the Mona Lisa
The empty wall in the Salon Carré after the theft of the Mona LisaUnknown photographer, 1911; published in Century Magazine, Feb 1914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리고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빈첸초 페루자가 이 패널을 들고 박물관을 나갔다. 그는 하청을 받아 루브르에서 그림에 보호 유리를 끼우던 이탈리아인 칠장이였고, 전에도 이 그림을 손에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월요일에는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 페루자는 살롱 카레의 벽에서 패널을 떼어 내 직원용 계단에서 액자를 벗기고, 그림을 옷 속에 숨겨 걸어 나갔다. 박물관 사람들은 누가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가져간 것이려니 했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하루가 넘게 걸렸다.

전시실이 다시 열리자 사람들은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를 보러 왔다. 벽은 비어 있었고 쇠고리 네 개만 튀어나와 있었다. 1911년 가을에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프란츠 카프카와 막스 브로트도 있었다. 두 사람은 일부러 빈자리를 보러 왔고, 나중에 그 일을 글로 남겼다. 흔히 빈 벽을 보러 온 사람이 한 해 전 그림을 보러 온 사람보다 많았다고들 하는데, 마치 누가 세어 본 것 같은 말이다. 세어 본 사람은 없다. 기록으로 남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시기는 그림이 그 자리에 없던 두 해였다.

그림은 1913년 피렌체에서 나타났다. 페루자가 골동품상에게 팔려고 했던 것이다. 재판에서 그는 이탈리아 그림을 고국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기 동기에 대한 그의 설명이고, 그 뒤로 여러 가지로 달리 전해져 왔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모나리자》는 나폴레옹의 전리품이 아니었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두 세기 반 전에 이미 프랑스 왕실 소장품에 들어와 있었다.

11. 파올로 베로네세 《가나의 혼인 잔치》

이 그림을 《모나리자》 바로 다음에 꼽는 데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날마다 수천 명이 이 그림에 등을 돌리고 서 있기 때문이다. 폭이 10미터에 가까운 화폭이 같은 전시실의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1563년부터 이 화폭은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 식당의 안쪽 벽을 덮고 있었다. 베네딕도회 규칙에 따라 수사 한 사람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 동안 나머지는 말없이 식사했다.

그림 속 잔치는 시끌벅적하다. 한가운데서 악사들이 연주하고, 하인들은 접시를 들고 난간 너머로 몸을 숙이며, 식탁 위에는 개가 올라서 있고, 누군가는 잔을 빛에 비춰 보고, 위쪽 테라스에서는 고기를 손질하며, 손님들은 모두 한꺼번에 떠든다. 그리스도는 식탁 한가운데에 정면을 보고 앉아 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항아리의 물이 방금 포도주로 바뀌었는데, 잔치에 온 사람 가운데 그것을 알아챈 이는 거의 없다.

가나의 혼인 잔치
가나의 혼인 잔치파올로 베로네세, 1563, 루브르 박물관

앞쪽 악사들 사이에 모래시계가 놓여 있다. 날마다 이 그림 아래에서 식사하던 수사들을 위한 세부다. 포도주는 모두에게 넉넉하고 손님들은 즐거운데, 모래는 흘러내린다. 이 수사들은 끼니때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일깨우는 낭독을 들었다.

1797년 이탈리아 원정군에 딸린 프랑스 위원들이 이 화폭을 벽에서 떼어 냈다. 통째로는 옮길 수 없어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둘둘 말아 파리까지 가져간 뒤 그곳에서 다시 꿰매 붙였다. 루브르는 이를 감추지 않는다. 박물관의 소장품 기록에도 입수 경위가 군사적 정복으로 적혀 있다.

워털루 이후 이 그림은 돌려보내야 할 목록에 올랐다. 동맹국들은 약탈품을 유럽 곳곳으로 돌려보내고 있었고 베네치아도 제 것을 요구했다. 그때 드농은 이미 한 번 잘린 이 화폭이 알프스를 다시 넘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대신 프랑스 화가 샤를 르브룅의 큰 그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베네치아는 르브룅을 받았다.

드농이 자기 논리를 스스로 믿었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04. 로마의 주문자들

12. 미켈란젤로 《죽어가는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자기 무덤을 주문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한가운데에 따로 서는 3층 구조물로, 조각상이 마흔 점 넘게 들어갈 계획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카라라 채석장에서 여덟 달 동안 대리석을 골랐는데, 그사이 교황은 이 계획에 흥미를 잃고 대성당 자체를 다시 짓는 일로 관심을 돌렸다.

그 뒤로 일은 40년 동안 질질 끌었다. 율리우스 2세는 1513년에 죽었고, 상속자들은 계약대로 작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계약서는 여섯 번 다시 쓰였고 그때마다 계획은 줄어들었으며, 미켈란젤로는 이 일 전체를 ‘무덤의 비극’이라 불렀다. 1513년 상속자들은 규모를 줄인 기념물로 그와 새 계약을 맺었고, 그는 이 계획에 맞춰 노예상 두 점을 깎았다. 계약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다시 쓰였고 무덤은 점점 더 작아져서, 1542년의 마지막 계약에는 두 조각상이 들어갈 자리가 더는 없었다. 결국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의 소박한 벽면 기념물로 마무리되었고, 처음 계획에서 남은 것은 《모세》 하나뿐이다.

《죽어가는 노예》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에서 깬 사람이 기지개를 켜듯 한 팔을 머리 뒤로 넘긴다. 《반항하는 노예》는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몸통을 비틀며 버티고 있고, 몸의 표면은 군데군데 끌 자국이 남은 채 다듬어지지 않았다.

죽어가는 노예
죽어가는 노예미켈란젤로, 1514, 루브르 박물관
반항하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미켈란젤로, 1514, 루브르 박물관

이들이 누구를 나타내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율리우스 2세가 정복한 지방들, 교황이 죽은 뒤 후원자를 잃은 자유 학예, 육체에 갇힌 영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1546년 미켈란젤로는 두 조각상을 로마에 망명해 있던 피렌체 사람 로베르토 스트로치에게 선물했다. 미켈란젤로가 두 번이나 병으로 누워 지낸 집의 주인이었다. 스트로치는 조각상들을 프랑수아 1세에게 보냈고, 왕에게서 프랑스 대원수 안 드 몽모랑시에게 넘어갔다. 1632년 몽모랑시의 손자가 반란죄로 처형되자 왕실은 그 영지를 몰수해 조각상을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주었다. 조각상은 혁명 때까지 추기경의 후손들 곁에 있었는데, 가문의 수장이 망명하자 망명자의 재산으로 몰수되었고, 1794년 루브르에 들어왔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라파엘로, 1515, 루브르 박물관

13. 라파엘로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에서 처신하는 법에 관한 책을 썼고, 그 책의 핵심 규칙은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스틸리오네는 공들인 흔적을 감추는 이 태연함에 따로 이름까지 붙였다. 《궁정인》은 1528년에 나와 유럽 전역에 퍼졌고, 런던에서 크라쿠프까지 귀족들이 이 책을 보고 말하는 법, 농담하는 법, 옷 입는 법, 지는 법을 익혔다.

초상은 1515년 무렵 로마에서 그려졌다. 카스틸리오네는 그때 우르비노 공작의 대사로 교황청에 머물며 라파엘로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몸을 반쯤 돌려 앉아 있고, 검은 윗옷에 회색 벨벳과 모피를 걸쳤으며, 두 손은 아래쪽에 모았고, 눈은 보는 사람을 똑바로 향한다. 색은 거의 회색과 검정과 흰색으로 좁혀져 있고, 그림에서 유일하게 밝게 빛나는 곳은 그의 눈이다.

책에 적힌 그 태연함을 그림으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평생 애쓰지 않은 듯 보이려고 공을 들인 사람이, 그 자연스러움을 그려 낼 줄 아는 화가에게 초상을 주문한 것이다.

성모의 죽음
성모의 죽음카라바조, 1603, 루브르 박물관

그 뒤 그림은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1639년 그곳 경매에 나왔고, 경매장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렘브란트가 있었다. 그는 펜으로 그림을 재빨리 스케치하고 같은 종이에 얼마에 팔렸는지 적어 두었다. 그 스케치는 지금도 남아 있고, 두 손과 정면을 향한 시선의 자세는 그 뒤 몇 해 동안 그린 렘브란트 자신의 자화상들로 이어졌다.

그때 초상을 산 사람은 스페인 상인 알폰소 로페스였다. 그 뒤 그림은 마자랭 추기경의 손에 들어갔고, 1661년 추기경이 죽자 루이 14세에게 넘어갔다.

14. 카라바조 《성모의 죽음》

이 그림이 걸릴 성당의 수도자들은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거슬리게 했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카라바조는 1601년에서 1606년 사이에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주문자는 교황청 법률가 라에르치오 케루비니였다. 성모는 맨발에 붉은 옷을 입고 탁자 위에 누워 있다. 몸은 부어 있고, 고개는 뒤로 젖혀졌으며, 배는 부풀었고, 한 팔은 아래로 늘어졌다. 둘레에는 사도들이 서 있다. 무거운 얼굴의 노인들로, 누구는 손으로 눈을 가렸고 누구는 그저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앞에는 젊은 여인이 몸을 반으로 접은 채 울며 앉아 있다. 그 모든 것 위로 거대한 붉은 휘장이 화폭 위쪽 3분의 1을 차지하며 드리워 있다.

성당을 맡고 있던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그림을 거절했다. 당대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들었다. 성모의 다리가 민망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 몸이 부어 있다는 것, 승천을 암시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성모를 고급 창부를 모델로 그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 소문은 화가와 같은 시대 사람이 기록해 두었고, 테베레강에서 건진 익사한 여인 이야기는 나중에 생겼는데, 어느 쪽도 확인할 방법은 없다.

거절당하자마자 동료 화가들이 이 그림을 두둔하고 나섰다. 당시 로마에서 만토바 공작을 위해 일하던 루벤스가 고용주에게 이 그림을 사라고 권했고, 빈첸초 곤차가는 그림을 샀다. 만토바로 보내기 전에 로마의 화가들은 그림을 일주일 동안 대중에게 보여 달라고 청했고, 온 도시가 그 전시를 보러 갔다.

그림은 만토바에서 영국의 찰스 1세에게 갔다. 찰스 1세가 처형된 뒤 그의 수집품은 팔려 나갔고, 이 그림을 산 사람이 에버하르트 야바흐였다. 1671년 루이 14세가 《전원의 합주》와 함께 그 수집품을 사들인 바로 그 은행가다.

05. 자기 과거를 주문하는 법

15.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 연작

1619년 2월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밤,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왕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는 블루아성에서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녀를 그곳에 보낸 것은 아들의 정부였다. 그날 밤 그녀는 창문으로 빠져나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밧줄 사다리를 타고 말을 끌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로 내려갔다.

그녀는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였고, 그런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탈출은 성공했다. 그녀는 루이 13세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다가 패했고, 협상을 거쳐 아들과 화해했다. 조건은 궁정으로는 돌아오되 권력으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3년 뒤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비싼 화가를 고용했다.

1622년부터 1625년까지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그녀의 새 뤽상부르 궁전 갤러리를 위해 거대한 화폭 스물네 점을 그렸다. 그중 스물한 점은 그녀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나머지 세 점은 그녀와 그녀 부모의 초상이다. 대사와 신하, 친척과 경쟁자들이 갤러리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순서대로 걸으며 그녀의 생애가 어떠했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블루아 탈출의 밤 장면도 있다. 검은 드레스에 흰 베일을 쓴 왕비가 나무 경사판을 밟고 내려오고, 금빛 투구를 쓴 미네르바가 그녀의 어깨를 받쳐 주며, 위에서는 밤의 여신이 어두운 망토를 장면 위로 펼친다. 왼쪽 아래에서는 반갑옷 차림의 에페르농 공작이 모자를 벗고 왕비에게 손을 내민다. 화폭에서 실제로 그 사건에 관여한 인물은 그 한 사람뿐이다. 탈출을 꾸민 것이 그였는데, 정작 그날 밤 그는 로슈 근처에서 왕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밧줄 사다리도 그림에 있고, 그것을 타는 사람은 시녀다. 오른쪽 위 구석에서 시녀가 사다리를 타고 탑을 내려온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초상
마리 드 메디시스의 초상페테르 파울 루벤스, 1623, 루브르 박물관
마리 드 메디시스의 블루아 탈출, 1619년 2월 21–22일, 1622–1625년
마리 드 메디시스의 블루아 탈출, 1619년 2월 21–22일, 1622–1625년페테르 파울 루벤스, 1623, 루브르 박물관

실제로는 밤에 벽을 타고 내려갔던 여인이 평평한 널빤지를 밟고 차분히 내려오고, 여신이 어깨를 받쳐 주고, 공작이 손을 내민다. 루벤스는 연작 전체를 이렇게 그렸다. 사건은 그대로 두고, 위험과 굴욕은 신들의 보호로 바꾸어 놓았다.

갤러리는 1625년에 완성되었다. 5년 뒤 마리는 리슐리외 추기경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졌고, 1631년 프랑스를 영영 떠났으며, 1642년 유럽 곳곳의 채권자들에게 빚을 진 채 쾰른에서 죽었다. 스물네 점의 화폭은 파리에 남았다. 2026년 5월부터 메디시스 갤러리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연작 전체를 전시실 안에서 그대로 복원하는 중이며, 작업에는 4년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16. 자크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로마식 갑옷을 입은 세 형제가 칼 세 자루를 쥔 아버지를 향해 팔을 뻗는다. 다리는 벌려 버티고, 등은 팽팽하며, 팔이 이루는 선이 그림 전체를 가로지른다. 오른쪽에는 그들과 떨어져 여인들이 앉아 있다. 누이들과 어머니로, 몸을 웅크린 채 힘없이 늘어져 있다. 이야기는 티투스 리비우스에게서 가져왔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가 이웃 도시의 세 형제와 로마를 걸고 싸우겠다고 나섰는데, 누이 하나가 상대편 형제와 약혼한 사이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자크루이 다비드, 1784,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는 1780년대 초 왕실 행정부에서 이 그림을 주문받았고, 1784년 그림을 그리러 로마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합의된 크기보다 화폭을 제멋대로 키웠고, 넘기는 날짜도 미뤘으며, 파리로 보내기 전에 로마의 자기 작업실에서 먼저 그림을 공개했다. 작업실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하는 말로는 1785년 살롱에서 이 그림이 처음에는 구석에 걸렸다가, 관객들의 요구로 눈에 잘 띄는 자리로 옮겨 걸렸다고 한다.

모든 것이 더할 수 없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다. 아치 세 개와 돌바닥이 전부이고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으며, 빛은 날카롭고 색은 붉은색과 갈색과 강철색으로 좁혀져 있다. 앞선 수십 년의 화려한 그림에 익숙한 눈에는 뺨을 한 대 맞은 것 같았고, 당대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4년 뒤 혁명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 전조로 읽기 시작했다. 맹세, 국가에 대한 의무, 죽을 각오가 거기 있었다. 이 그림을 주문하고 값을 치른 사람은 왕이었다. 그 왕은 9년 뒤 처형되고, 다비드는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처형에 찬성표를 던지게 된다.

17. 자크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화가는 같고 권력은 바뀌었다. 1804년 9월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자신의 대관식을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대관식은 그해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렸다. 다비드는 조수들과 함께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이 그림을 그렸고, 화폭은 높이 6.21미터, 너비 9.79미터에 이르러 인물이 150명 넘게 들어갔다. 그중 상당수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나폴레옹의 대관식자크루이 다비드, 1807, 루브르 박물관

의식은 나폴레옹이 직접 정한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그는 제단에서 관을 집어 스스로 머리에 썼고, 곧바로 조제핀에게 관을 씌웠다. 다비드가 그린 것은 이 두 번째 장면이다. 화폭 한가운데에 흰옷의 조제핀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고, 긴 옷자락이 그녀 뒤로 펼쳐져 있으며, 붉은 옷에 흰 담비 모피를 두른 나폴레옹이 그녀의 머리 위로 관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 그림 속 황제는 권력을 내려 주는 사람이다.

더 오른쪽에는 흰옷의 교황 비오 7세가 앉아 오른손을 들어 축복한다. 구도의 첫 판본에서 교황의 두 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당대 사람들이 전하기로는, 나폴레옹이 교황을 로마에서 모셔 왔으면 적어도 뭐라도 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고, 다비드는 손을 고쳐 그렸다.

그 위, 왼쪽 군중 위로 관람석이 마련되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밝은 옷을 입은 여인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차분하게 앉아 있다. 황제의 어머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다. 그녀는 파리에 오지 않았다. 아들이 형제들을 대한 방식을 두고 다툰 끝에 로마에 머물러 있었다. 그림에서 그녀는 위쪽 관람석 한가운데, 한 집안의 어른이 일을 지켜보기에 알맞은 바로 그 높이에 앉아 있다. 그녀가 끝내 발을 들이지 않은 대성당 안에서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나폴레옹의 대관식자크루이 다비드, 1807, 루브르 박물관

다비드가 그곳에 없던 사람까지 대성당 안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면, 다른 인물들의 배치도 기록으로 읽을 수는 없다. 누가 어디에 서는지는 사건이 있고 3년 뒤, 나폴레옹을 위해 일하던 화가가 작업실에서 정한 것이다.

같은 관람석을 따라 조금 더 가면 화첩을 든 구경꾼 무리가 앉아 있는데, 다비드는 그 사이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덧붙이자면 이 그림은 두 점이다. 다비드는 같은 크기의 두 번째 판본을 1822년에 완성했고, 그 그림은 베르사유에 걸려 있다.

06.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한 그림

18. 조르주 드 라 투르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든 사기꾼》

오른쪽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카드와 금화 한 무더기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왼쪽에서는 우리에게 등을 돌린 남자가 허리띠 뒤에서, 엉덩이 높이에서 카드 한 장을 빼내고 있다. 젊은이가 볼 수 없는 자리다. 그 카드는 다이아몬드 에이스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머리 장식을 한 여인이 포도주를 따르는 하녀를 곁눈질하고, 하녀도 곁눈으로 마주 본다.

셋은 한패이고, 넷째는 자기 패만 들여다보며,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는 허리띠 뒤의 카드와 오가는 눈짓이 한꺼번에 보인다.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든 사기꾼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든 사기꾼조르주 드 라 투르, 1635, 루브르 박물관

이 그림은 1635년 무렵 로렌에서 그려졌다. 라 투르는 그곳에서 활동했고, 생전에 이름난 부자였다. 로렌 공작과 프랑스 왕에게서 주문을 받았고, 재산을 모아 땅을 샀다. 죽은 뒤 그는 세 세기 동안 잊혔다. 그의 그림들은 스페인 화가나 네덜란드 화가의 이름으로 떠돌았고, 이름 자체가 미술 문헌에서 사라졌다. 그를 되살려 낸 사람은 독일 미술사학자 헤르만 포스였다. 포스는 1915년 서명이 있는 작품 몇 점을 서로 대조해 이 화가를 다시 찾아냈다.

루브르는 1972년에 《사기꾼》을 사들였다. 같은 구도의 두 번째 판본도 있는데, 그쪽에서는 사기꾼이 클로버 에이스를 빼낸다. 그 그림은 텍사스에 있고,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그려졌는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목욕하는 밧세바
목욕하는 밧세바렘브란트, 1654, 루브르 박물관

19. 렘브란트 《목욕하는 밧세바》

1654년 암스테르담 교회 위원회는 렘브란트의 하녀이자 반려였던 헨드리케 스토펠스를 세 번 불러, 화가와 함께 사는 일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세 번째에 그녀는 출석했고, 음행으로 유죄 판정을 받아 성찬에서 배제되었다. 몇 달 뒤 그녀는 딸을 낳았다. 같은 해 렘브란트는 밧세바를 그렸는데, 모델이 헨드리케였다는 데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밧세바는 다윗 왕이 보낸 편지를 손에 들고 앉아 있다. 성경 이야기에서 다윗은 지붕 위에서 목욕하는 그녀를 보고 사람을 보내 불렀다. 그녀는 왔고, 임신했으며, 왕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싸움터에서 틀림없이 죽을 자리로 보냈다. 렘브란트 이전의 화가들은 대개 엿보는 순간을 그렸다. 물속에는 여인이, 위에는 왕이 있는 장면이다. 렘브란트는 편지를 다 읽은 뒤의 한순간을 골랐다.

그녀는 모든 것을 비껴 아래를 내려다본다. 몸은 무겁고 젊지 않게 그려져 있어서, 가슴 아래에 주름이 지고 배가 묵직하다. 발치에는 노파가 앉아 그녀의 발을 닦는데, 그 일에만 몰두해 있다.

그림은 개인 수집가들의 손을 이리저리 거치다가 1869년 루이 라 카즈의 유증으로 루브르에 들어왔다. 라 카즈는 파리의 의사로, 40년 동안 그림을 600점 가까이 모아 한꺼번에 박물관에 넘겼다.

헨드리케는 1663년, 아마도 페스트로 죽었고, 렘브란트는 그녀보다 6년을 더 살았다.

레이스 짜는 여인
레이스 짜는 여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9, 루브르 박물관

20. 페르메이르 《레이스 짜는 여인》

그림의 높이는 24센티미터다. 젊은 여인이 작은 레이스 틀 위로 몸을 숙이고, 손가락에 보빈을 쥔 채 손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작업에 눈을 두고 있다.

그 좁은 영역 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더없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실도, 핀도, 실이 당겨진 정도까지도 그렇다. 반면 앞쪽, 여인보다 보는 사람에게 더 가까운 자리에서는 바느질 쿠션 밖으로 붉은 실과 흰 실이 쏟아져 나와 있고, 이 실들은 윤곽 없는 흐릿한 빛의 얼룩으로 그려져 있다. 눈의 초점이 다른 평면에 맞춰져 있을 때 사물은 그렇게 보인다.

이 그림에서 빛은 오른쪽에서 들어오는데, 페르메이르의 다른 그림에서는 거의 언제나 창이 왼쪽에 있다.

피에로
피에로장앙투안 와토, 1718, 루브르 박물관

그는 느리게 작업해 35점가량의 그림을 남겼고, 1675년 그가 죽은 뒤 그 이름은 200년 동안 잊혔다. 루브르는 1870년 7270프랑에 《레이스 짜는 여인》을 샀다.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토레가 여러 글에서 흩어져 있던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한 이름 아래 모으고 그를 회화사에 다시 올려놓은 직후였다.

21. 앙투안 와토 《피에로》

와토는 36년을 살고 1721년 결핵으로 죽었는데, 거의 평생 같은 것을 그렸다. 공원에 모인 차려입은 사람들, 음악, 사랑의 밀고 당기기, 줄거리 없이 조금 쓸쓸한 장면들이다. 아카데미는 그를 위해 따로 부문을 만들어야 했다. 이런 그림은 기존의 어느 부문에도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 붙인 이름은 ‘우아한 연회’, 곧 페트 갈랑트였다.

《피에로》는 그의 다른 그림들과 별로 닮지 않았다. 흰 새틴 옷을 입은 배우가 보는 사람 바로 앞에 전신으로 서 있다. 팔은 늘어뜨리고, 두 발은 모으고, 모자는 뒤통수로 밀려 있으며,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는 화폭을 거의 다 차지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로 그려져 실제보다 커 보인다. 그 아래, 그의 다리 뒤편에서는 이탈리아 희극의 다른 인물 넷이 저마다 자기 일에 몰두해 있다.

이 그림을 무엇에 쓰려고 그렸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지금도 논쟁한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장터 극단의 간판이라는 설과 피에로 역을 맡았던 특정 배우의 초상이라는 설인데, 어느 쪽도 짐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19세기에 이 화폭은 도미니크비방 드농의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소장품을 실어 오고 동맹국들에게서 《가나의 혼인 잔치》를 지켜 낸 바로 그 루브르 관장이다. 그가 죽은 뒤 그림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고, 1869년 루이 라 카즈의 유증에 포함되어 《밧세바》와 함께 루브르에 들어왔다.

22. 장바티스트 샤르댕 《가오리》

1728년 스물여덟 살의 샤르댕은 소개도, 후원자도, 아카데미 교육도 없이 그림 두 점을 옆구리에 끼고 왕립 회화 아카데미의 회의에 나타났다. 그는 그날로 입회를 허락받았다. 부문은 동물과 과일 화가였고, 역사화와 초상화보다 아래인 위계의 맨 밑이었다. 두 점 가운데 하나가 《가오리》였다.

돌 탁자 위로 내장을 뺀 가오리가 갈고리에 걸려 활짝 펼쳐져 있다.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틈으로 내장과 피가 보이고, 구멍 두 개와 가느다란 입으로 이루어진 가오리의 주둥이는 사람 얼굴 비슷한 모양을 띤다. 왼쪽에서는 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간 고양이가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오른쪽에는 칼과 주전자와 구리 냄비가 놓여 있다.

가오리
가오리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1727, 루브르 박물관

그 뒤 그는 평생 부엌 살림살이, 잡은 사냥감, 빵, 물 잔, 집안일을 하는 아이들을 그렸고, 그런 주제를 낮은 장르로 여기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았다. 디드로는 그에 대해 감탄하며 글을 썼고, 어떻게 그렇게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샤르댕은 아주 느리게 작업하며 작고 촘촘한 붓질로 물감을 올렸고, 한 해에 몇 점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가오리》는 혁명으로 아카데미의 소장품이 국가에 넘어갈 때 다른 소장품과 함께 루브르에 들어왔다.

07. 판단은 관객이 내린다

23. 앵그르 《그랜드 오달리스크》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나폴리 왕비인 카롤린 뮈라가 1814년 이 그림을 주문했다. 그녀는 값을 치를 겨를이 없었다. 1815년 뮈라 부부는 왕위를 잃었고, 남편 조아생은 칼라브리아에서 총살당했으며, 화폭은 화가의 손에 남았다.

벌거벗은 여인이 등을 보이고 누워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고 있고, 둘레에는 공작 깃털과 터번, 두꺼운 휘장과 물담배가 있다. 이 실내는 판화와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짜 맞춘, 오스만 실내에 대한 유럽인의 상상이다. 앵그르는 터키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랜드 오달리스크
그랜드 오달리스크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1814, 루브르 박물관

1819년 살롱에서 이 그림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그 해부학을 두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등의 선은 실제 사람의 등보다 길다. 비평가 케라트리는 그녀의 척추뼈가 정상보다 세 개 많다고 썼고, 2004년에는 의사들이 무려 다섯 개가 더 많다고 셌다. 앵그르에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는 뼈대보다 선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방의 주제를 마지막까지 계속 그렸다. 수십 명의 벌거벗은 여인을 담은 둥근 화폭 《터키탕》을 앵그르가 완성한 것은 1862년, 그의 나이 여든두 살 때였다.

24.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이 그림에 착수했을 때 제리코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그다음에 한 일은 살롱에 낼 대작을 그리는 화가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것이었다. 그는 생존자 두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고, 함께 살아남은 배 목수에게 뗏목 모형을 만들어 달라고 했으며, 몇 달 동안 병원과 시체 안치소를 드나들며 환자와 죽어 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관찰했고, 작업실에는 해부학 강의실에서 가져온 신체 부위를 두었다.

메두사호의 뗏목
메두사호의 뗏목테오도르 제리코, 1819, 루브르 박물관

계기는 온 프랑스가 떠들던 참사였다. 1816년 7월 2일, 프리깃함 메두사호가 지금의 모리타니 앞바다에서 좌초했다. 함장 위그 뒤루아 드 쇼마레는 20년 동안 거의 바다에 나가지 않았는데, 궁정의 연줄로 지휘권을 얻은 사람이었다. 보트는 모두를 태우기에 모자랐다. 150명가량이 배의 목재로 급히 엮은 뗏목에 올랐고, 보트들이 그 뗏목을 끌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보트에서는 예인줄을 풀어 버렸고, 뗏목은 버려졌다. 12일 뒤 뗏목 위에 살아 있던 사람은 15명이었고, 그중 몇은 구조된 직후 죽었다. 그 12일 동안 뗏목 위에서는 갈증과 뙤약볕과 싸움이 이어졌고, 사람들이 바다로 떨어졌으며, 마지막에는 식인이 벌어졌다.

생존자 가운데 두 사람, 기술자 알렉상드르 코레아르와 외과의 앙리 사비니가 이 모든 일을 책으로 써서 1817년에 펴냈다. 두 사람은 함장의 무능도, 뗏목이 버려진 경위도 밝혔다. 책은 정부가 더는 사건을 덮을 수 없을 만큼 많이 팔렸는데, 쇼마레에게 프리깃함 지휘를 맡긴 것이 바로 그 정부였다. 제리코가 찾아간 두 생존자가 코레아르와 사비니였다.

화폭은 4.91×7.16미터가 되었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한 노인이 죽은 젊은이를 무릎에 뉘고 앉아, 한 손을 관자놀이에 대고 허공을 바라본다. 거기서부터 구도는 위로 오르는 대각선을 따라간다. 젖은 널빤지 위의 시신들, 그다음 팔꿈치로 몸을 일으킨 사람들, 무릎을 세운 사람들, 그리고 일어서서 서로를 붙드는 사람들이다. 꼭대기에서는 흑인 한 사람이 통에 발을 버티고 서서 두 팔로 천 조각을 수평선 쪽으로 흔든다. 앞쪽 가장자리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인물의 모델은 제리코의 젊은 친구 외젠 들라크루아였다.

이제 그들이 무엇을 향해 손을 흔드는지 찾아보자. 오른쪽 수평선 위에 손톱보다 작은 배가 한 척 있는데, 루브르의 그 무엇보다 알아보기 어렵다. 결국 생존자들을 구해 낸 아르귀스호다.

이 그림은 《난파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1819년 살롱에 나갔고, 무엇을 그린 것인지는 누구나 알았다. 루이 18세는 왕이라면 으레 그러듯 살롱을 한 바퀴 돌다가 이 화폭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제리코에게 한 말은 여러 판본으로 전하지만 당대의 어떤 문서에도 없으니, 전설로 봐야 한다. 가장 널리 퍼진 판본에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화가를 가라앉히지 않을 난파로군.”

메두사호의 뗏목
메두사호의 뗏목테오도르 제리코, 1819, 루브르 박물관

제리코는 1824년 말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32세에 죽었고, 같은 해 그의 작업실 경매에서 이 그림을 루브르를 위해 사들였다.

25.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한 여인이 포석과 시신으로 쌓인 바리케이드를 넘어 앞으로 나아간다. 왼손에는 총검을 꽂은 소총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삼색기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가슴을 드러내고 맨발인 것은 우의적 인물이기 때문이고, 그녀가 함께 걷는 사람들은 실제 사람들이다. 들라크루아는 그녀 곁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세웠다. 흰 셔츠에 장인의 허리띠를 매고 군도를 든 노동자, 실크해트에 잘 재단한 프록코트를 입고 사냥총을 든 부유한 신사, 그리고 양손에 권총을 하나씩 들고 탄약 주머니를 멘 아주 어린 소년이다. 세 계층을 한 바리케이드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운 것 자체가 이 그림의 정치적 발언이었다. 더 오른쪽 연기 속으로 노트르담의 탑들이 보이고, 그중 하나에 작은 삼색기가 올라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외젠 들라크루아, 1830,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가 이 그림에 붙인 제목에는 1830년 7월 28일이라는 날짜가 들어 있다. 그해 7월 말, 파리는 검열과 축소된 선거권에 반발해 샤를 10세에게 맞서 들고일어났고, 사흘간의 시가전 끝에 왕은 왕위를 잃었다. 들라크루아는 바리케이드에 나가지 않았고, 그해 가을에 이 그림을 그렸다. 화폭 속 사람들은 그 시대의 옷차림을 하고 있고, 이 사건은 1789년 혁명에서 40년이 지난 일이다.

1831년 8월 프랑스 정부는 이 그림을 3000프랑에 샀다. 루이필리프 정부는 바로 그 7월의 사흘 덕분에 들어선 정부였으니, 그림을 내걸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그 뒤 40년 넘는 동안 그림은 긴 공백을 두고 띄엄띄엄 걸렸다. 1832년과 1833년에는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렸고, 1834년 무렵 창고로 들어갔다. 대중이 이 그림을 다시 본 것은 1855년 만국박람회 때로, 나폴레옹 3세 정권이 자신감을 내보이고 싶어 한 해였다. 그 뒤 화폭은 다시 치워졌다가 1863년 뤽상부르 미술관으로 돌아가 11년 동안 걸려 있었고, 1874년 11월 루브르로 옮겨졌다.

나랏돈으로 사들이고, 걸었다가, 떼어 내고, 창고에 넣었다가, 만국박람회에 꺼내 놓고, 다시 치웠다가, 마침내 전시한 그림이다.

더 볼 것

우리가 이야기한 스물다섯 점은 가능한 여러 조합 가운데 하나다. 루브르에는 약 50만 점의 소장품이 있고 그중 3만 점가량이 전시되어 있으니, 볼 만한 것은 훨씬 많다. 얼마나 볼 수 있을지는 시간과 취향에 달렸다.

시간이 남는다면 같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보기를 권한다. 1827년의 거대한 화폭으로, 당시 관객과 관리들 모두에게 외면당한 뒤 화가가 18년 동안 가지고 있었고, 루브르는 1921년에야 사들였다. 이집트관에는 타니스의 대스핑크스가 있다. 여러 파라오가 차례로 앞사람의 이름 위에 자기 이름을 새긴 조각상이다. 아폴론 갤러리에는 프랑스 왕실 보석 가운데 남은 것들이 있고, 그중에는 ‘레장’ 다이아몬드도 있다.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는 가구와 샹들리에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하에서는 중세 요새의 기초와 해자를 볼 수 있다. 루브르는 12세기에 잉글랜드에 맞서는 방어 시설로 세운 이 요새에서 시작되었다. 그 밖에도 두 번째 페르메이르인 《천문학자》, 보스의 《바보들의 배》, 그리고 비스콘티 안뜰의 유리 지붕 아래 자리한 큰 이슬람 미술관도 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외젠 들라크루아, 1827, 루브르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