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은 1986년 12월, 건축가 빅토르 랄루가 1900년 만국박람회에 맞춰 지은 기차역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새 미술관의 소장품은 거의 전부 이미 국가가 가지고 있던 작품으로 꾸려졌다.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미술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1947년부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여 주던 주 드 폼 미술관에서,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많은 그림은 루브르에 들어가기 전 여러 해 동안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려 있었는데, 국가는 살아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그곳으로 보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는 살롱전에서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을 샀고, 같은 해 살롱 심사위원단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떨어뜨려 이 그림은 낙선전에 걸렸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43년 뒤 한 개인 수집가가 기증하면서 국가 소장품이 되었다. 프랑스가 무엇을 곁에 남길지는 시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정했다. 황제와 의회, 루브르의 학예관들과 개인 기증자들, 돈을 모은 화가들, 그리고 그림으로 상속세를 낸 상속인들이었다.

황제와 화가의 누이 (1879~1881)

1.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비너스의 탄생
비너스의 탄생알렉상드르 카바넬, 1863, 오르세 미술관

1870년 제2제정이 무너지자, 나폴레옹 3세가 황실비, 곧 황제 개인의 예산으로 사들인 재산은 압류되었다. 이를 둘러싼 다툼은 1879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황실 거처에 있던 작품들은 국가에 귀속된다는 결정이 났고, 루브르의 학예관들은 화가와 그림 자체의 명성을 기준으로 그 가운데 “역사적 또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골랐다. 황제가 1863년 살롱에서 자기 몫으로 산 《비너스의 탄생》은 그들이 남긴 작품이었다. 국가 목록에는 이 그림이 1879년 법원 판결에 따라 압수되어 국립 박물관에 넘겨졌다고 적혀 있다. 그림은 1881년 뤽상부르 미술관으로, 1923년에는 루브르로 보내졌다.

비너스는 작은 파도의 물마루 위에 다리를 왼쪽으로, 머리를 오른쪽으로 두고 누워 있다. 오른팔을 얼굴 위로 걸쳤고, 팔꿈치 아래로 아직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반쯤 감긴 눈이 보인다.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은 파도를 따라 물 위로 퍼져 있다. 그 위로 큐피드 다섯이 호를 그리며 날고, 그중 둘은 소라 나팔을 분다. 몸은 그림자가 거의 없이 매끈하게 칠해져 붓 자국을 알아볼 수 없고, 캔버스에서 이 몸보다 밝은 것은 어깨 밑의 흰 거품뿐이다.

이 매끈함을 두고 당시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테오필 고티에는 1863년, 이 몸이 마치 파도의 눈처럼 흰 거품으로 빚은 것 같다고 썼다. 에밀 졸라는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 그림을 보고 비너스를 “사랑스러운 로레트”, 곧 남자에게 얹혀사는 여자라고 부르며, 그녀가 젖빛 강물에 잠겨 있고 “희고 분홍빛인 아몬드 반죽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작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는 그녀에게 ‘크림 얹은 비너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비너스의 탄생
비너스의 탄생알렉상드르 카바넬, 1863, 오르세 미술관

2.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서른 살의 귀스타브 쿠르베는 프랑슈콩테 지방의 고향 오르낭에서, 외조부모가 살던 집의 다락방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다락은 이렇게 큰 캔버스를 펼치기에 비좁아서, 쿠르베는 나머지를 말아 둔 채 부분부분 나누어 그렸다. 그는 친구인 비평가 샹플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눈을 감고 그리는 것과 다름없고 그림에서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캔버스는 길이가 7미터에 가깝고, 인물들은 실물 크기다. 당시 이런 크기로는 역사화나 종교화를 그렸는데, 여기서는 시골 소도시가 주민 한 사람을 땅에 묻고 있다. 누구의 장례식인지는 그림만 보고 알 수 없어서, 역사가들은 1848년에 세상을 떠난 화가의 할아버지에서부터 공화국 그 자체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답을 내놓는다.

오르낭의 매장
오르낭의 매장귀스타브 쿠르베, 1850, 오르세 미술관

오르낭 주민들이 한 사람씩 모델을 섰다. 쿠르베는 편지에 시장, 주임 신부, 치안판사, 공증인, 자기 아버지, 성가대 소년들, 무덤 파는 인부, 그리고 1793년의 혁명가였던 두 노인을 꼽았다. 이 두 노인은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에, 무릎까지 오는 바지에 각반을 찬 반세기 전 옷차림으로 서 있고, 그들 앞에는 머리가 검은 흰 개가 있다. 흰 셔츠를 입은 무덤 파는 인부는 구덩이 가장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사제를 지나쳐 옆쪽을 바라본다. 검은 옷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붉은 제복에 높은 붉은 모자를 쓴 성당 관리인 두 사람뿐이다. 무덤 자체는 그림 아래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어서 보는 사람은 무덤의 맞은편 끝에 서 있는 셈이 되고, 그 곁 파헤친 흙 위에는 해골과 뼈가 놓여 있다.

쿠르베는 막 1849년 살롱에서 메달을 받은 참이었기 때문에, 1850~1851년 살롱에는 심사를 거치지 않고 《오르낭의 매장》을 내걸었다. 비평가들은 인물들의 얼굴이 추하다고 그림을 헐뜯었고, 사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1864년 쿠르베는 액자는 부서지고 틀은 다른 데 써 버렸으며 캔버스는 말린 채 상태가 나쁘다고 그림의 형편을 적었다.

파리 코뮌이 끝난 뒤 쿠르베는 방돔 광장의 기둥을 무너뜨린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고 기둥을 다시 세우는 비용을 물게 되었다. 그는 스위스로 떠났고, 1877년 12월 31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881년 그의 누이이자 상속인인 쥘리에트가 《오르낭의 매장》을 국가에 기증했고, 1882년 그림은 처음으로 루브르에 걸렸다. 그림을 기증한 바로 그해에 쥘리에트는 오빠의 또 다른 대작 《화가의 아틀리에》를 경매에 내놓아 팔았다.

오르낭의 매장
오르낭의 매장귀스타브 쿠르베, 1850, 오르세 미술관

2025~2026년 복원 때 누렇게 변한 바니시를 벗겨 내고, 그동안 틀 뒤로 접혀 있던 가장자리를 펼쳤다. 그러자 아래 가장자리에서 쿠르베가 그린 좁은 띠 하나가 드러났다.

미망인과 화가들과 시인 (1890~1891)

3. 장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랭스의 샴페인 회사 포므리를 이끌던 미망인 잔알렉상드린 포므리는 루브르를 위해 밀레의 《만종》을 사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89년 10월 3일, 그녀의 대리인인 랭스의 후원가 루이 기요탱이 편지 한 통을 전했는데, 그 대신 그녀가 《이삭 줍는 여인들》을 샀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그림 주인 비쇼프스하임에게 30만 프랑을 치렀고, 곧바로 그림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정했다.

이삭 줍는 여인들
이삭 줍는 여인들장프랑수아 밀레, 1857, 오르세 미술관

노르망디 농부의 아들인 밀레는 1849년부터 퐁텐블로 숲 가장자리의 마을 바르비종에 살며 농사일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는 세 여인이 추수를 마친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다. 두 사람은 머리가 등보다 낮아질 만큼 허리를 반으로 접었고, 세 번째 여인은 이삭 한 줌을 손에 쥐고 허리를 펴는 중이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손을 뻗고, 줍고, 몸을 일으키는 하나의 동작이 읽힌다. 해는 왼쪽에 낮게 걸려 있고, 그림자는 오른쪽으로 뻗으며, 얼굴은 그늘에 잠겨 있다. 멀리 금빛 안개 속에 거대한 짚더미와 수레, 추수하는 일꾼들이 보이고, 오른쪽 건물 곁에는 아주 작은 기수, 곧 감독관이 말을 타고 있다. 추수가 끝난 뒤 이삭을 줍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오래된 권리였는데, 지역마다 규칙으로 이를 제한했고, 감독관은 사람들이 그 규칙을 따르는지 살폈다.

1857년 살롱에서 보수적인 비평가 폴 드 생빅토르는 세 여인을 “가난의 세 운명의 여신”이라고 불렀고, 자유주의자 에드몽 아부는 그림의 엄격한 단순함을 칭찬했다. 살롱이 끝난 뒤 그림은 2000프랑 또는 3000프랑에 팔렸는데, 자료마다 두 액수가 모두 나온다.

포므리 부인은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곁에 둘 권리를 남긴 채 그림을 국가에 기증했다. 루브르 학예관들은 1890년 1월 30일 기증을 받아들였고, 3월 15일 칙령이 서명되었으며, 3월 18일 포므리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4.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올랭피아
올랭피아에두아르 마네, 1863, 오르세 미술관

여인은 커다란 흰 베개 두 개에 기대 누워 보는 사람을 정면으로, 담담하고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몸에 걸친 것은 진주 펜던트가 달린 목의 검은 리본, 금팔찌, 머리에 꽂은 분홍 꽃, 그리고 뒤축 없는 슬리퍼뿐이다. 왼손은 허벅지 위에 꼭 눌러 얹었다. 피부가 검은 하녀가 흰 종이에 싼 꽃다발을 내밀지만, 주인은 꽃을 쳐다보지 않는다. 침대 발치에는 등을 둥글게 세우고 꼬리를 치켜든 작은 검은 고양이가 서 있는데, 어두운 벽에 묻혀 거의 분간되지 않고 노란 두 눈만 보인다. 빛은 몸 앞쪽에서 평평하게 비쳐 몸에는 그림자가 거의 없고, 형태는 윤곽선이 붙잡고 있다.

포즈를 취한 사람은 마네가 자주 쓰던 모델 빅토린 뫼랑으로, 그녀는 뒤에 스스로 화가가 되어 살롱에 작품을 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 앉아 있는 사람도 그녀다. 미술사가 드니즈 머렐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하녀의 이름은 로르였고, 마네의 집에서 멀지 않은 바티뇰 구역에 살았다.

마네는 1863년에 《올랭피아》를 그렸고 1865년 살롱에 내놓았다. 신문 《르 시에클》은 이 여인이 “적어도 이틀은 시체 안치소의 탁자 위에 누워 있었던” 것 같고 “배가 초록빛을 띠기 시작했다”고 썼다. 한 달 뒤 운영진은 사람들 눈에서 멀어지도록 그림을 문 위 높은 곳으로 옮겨 걸었다. 그림은 끝내 팔리지 않았고, 1883년 마네가 죽은 뒤 그의 미망인 쉬잔에게 넘어갔다.

올랭피아
올랭피아에두아르 마네, 1863, 오르세 미술관
휘슬러의 어머니
휘슬러의 어머니제임스 맥닐 휘슬러, 1871, 오르세 미술관

1889년 7월 화가 클로드 모네는 작가 옥타브 미르보와 함께, 미망인에게서 《올랭피아》를 사서 국가에 기증하려고 모금을 시작했다. 에드가 드가는 100프랑을,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25프랑을 냈는데, 로댕은 편지에서 명단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860년대부터 신문 지면에서 마네를 옹호해 온 졸라는 참여를 거절했다. 1890년 2월 7일 모네는 기부자들을 대표해 공교육부 장관 아르망 팔리에르에게 그림을 제안했다. 모인 돈은 모두 1만 9415프랑이었다. 기부자들은 루브르를 원했지만, 국가는 뤽상부르 미술관에 두기로 하고 선물을 받았다. 1907년 모네의 친구로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가 《올랭피아》를 루브르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5. 제임스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1번 (휘슬러의 어머니)》

프랑스가 이 그림을 사기 전,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고 런던에 살던 미국인 제임스 휘슬러는 이 그림을 몇 번이나 저당 잡혔다. 1878년 그는 비평가 존 러스킨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겼지만, 판결로 받은 돈은 영국에서 가장 작은 동전인 1파딩이었고, 소송 비용 때문에 파산했다. 1878~1879년 어머니의 초상은 런던의 판화 상점 그레이브스에 저당물로 맡겨져 있었고, 파산 때 500파운드로 평가되었으며, 휘슬러는 여러 차례에 나누어 그림을 되찾았다. 1886년 그는 다시 그림을 저당 잡혔는데, 이번에는 극장 흥행주 리처드 도일리 카트에게 같은 500파운드를 받고서였다.

휘슬러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71년 첼시에서였다. 모델이 오지 않자 그는 예순이 넘은 어머니 애나 휘슬러에게 모델을 부탁했다. 어머니는 처음엔 서서 포즈를 취했지만 지쳐 버렸고, 아들은 어머니를 앉혔다. 어머니는 오른쪽에 엄격한 옆모습으로, 얼굴을 왼쪽으로 향한 채 앉아 있다. 검은 드레스는 어깨에서 바닥까지 하나의 평평하고 어두운 덩어리로 칠해져 실루엣처럼 읽힌다. 따뜻한 색은 얼굴과 손에만 있다. 머리에는 긴 끈이 달린 흰 레이스 모자를 썼고, 포갠 손에는 흰 손수건을 쥐었으며, 발은 낮은 발받침 위에 놓여 있다. 회색 벽에는 넓은 흰 매트를 두른 검은 액자 속에 템스강 가의 창고들을 새긴 휘슬러 자신의 에칭이 걸려 있고, 왼쪽 어두운 커튼의 잔꽃무늬 사이에는 그의 서명인 원 안의 나비가 희미하게 보인다.

휘슬러는 색이 맨 앞에 오도록 제목을 골랐다. ‘화가의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부제는 1872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첫 전시 때부터 이미 붙어 있었다.

1891년 이 초상화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전시되었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비평가 테오도르 뒤레와 로제 마르크스,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가 구입을 추진했다. 국가가 동의하도록 일부러 값을 낮게 매겼고, 1891년 11월 30일 국가는 그림을 4000프랑에 사들이며 “나이 든 부인의 초상”으로 기록했다. 말라르메는 뤽상부르 미술관이 이 그림에게는 루브르로 가는 대기실일 뿐이라고 썼다. 1892년 초 휘슬러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휘슬러의 어머니
휘슬러의 어머니제임스 맥닐 휘슬러, 1871, 오르세 미술관

1934년 미국 우정국은 어머니의 날을 맞아 이 그림으로 우표를 냈는데, 구도를 잘라 내고 꽃병을 그려 넣었다.

카유보트의 유증 (1894~1896)

6.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르누아르의 친구인 기자 조르주 리비에르는 이 그림 속 탁자에 둘러앉은 무리 가운데 그려져 있고, 뒷날 이 그림에 대해 직접 글을 썼다. 1921년의 회고에 따르면 1876년 여름 르누아르는 몽마르트르의 코르토 거리에 낡은 작은 집을 빌렸다. 옛 풍차들 곁의 무도장 정원 물랭 드 라 갈레트 가까이였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곳에서 지냈다. 모델은 그의 친구인 화가와 문인들, 그리고 몽마르트르의 아가씨들이었다. 리비에르는 탁자에 앉은 사람으로 자신과 화가 프랑라미, 노르베르 괴뇌트, 그리고 잔과 에스텔 자매를 꼽는다. 벤치에 앉은 줄무늬 드레스의 아가씨는 흔히 에스텔로 본다. 1877년 봄 그림은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걸렸고, 리비에르는 자기가 내던 작은 신문 《인상주의자》에 이 그림이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파리 생활의 귀중한 기념물이며,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썼다.

빛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땅바닥과 밀짚모자, 어두운 재킷의 등 위에 옅은 파란색과 노란색 얼룩으로 떨어진다. 르누아르는 그림자를 파란색으로 칠했다. 앞쪽의 얼굴들은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뒤로 갈수록 군중은 붓 자국과 흔들리는 모자들로 흩어진다.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젊은 여인과 금발 아이의 얼굴이 우연히 찍힌 사진처럼 그림 가장자리에 걸려 잘려 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1876, 오르세 미술관

이 그림을 산 사람은 부유한 집안 출신의 화가로 친구들의 작품을 사들이고 그들의 전시회 비용을 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였다.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그가 그림을 산 시기는 1877년에서 1879년 4월 사이다. 카유보트는 1894년 2월 21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소장품을 뤽상부르 미술관에 들였다가 그 뒤 루브르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유증했다. 유언 집행인으로는 르누아르를 지명했다. 국가는 소장품 가운데 일부만 받아들였고, 그림들은 1896년에 인계되어 1897년부터 뤽상부르 미술관 별관에 전시되었다.

더 작고 더 자유롭게 그린 《무도회》의 두 번째 판본은 개인 소장으로 남았다. 1990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가 이 그림을 7810만 달러에 샀다.

7. 클로드 모네 《생라자르 역》

생라자르 역
생라자르 역클로드 모네, 1877, 오르세 미술관

르누아르의 아들인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1962년에 낸 아버지에 관한 책에서, 아버지가 들려준 모네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 일이 있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나 기록된 것이니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돈이 없던 모네는 가장 좋은 옷에 레이스 달린 소맷부리를 차려입고 금 손잡이 지팡이를 든 채 서부철도회사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은 화가를 어찌나 정중하게 맞았는지, 열차를 붙잡아 두고 승강장을 비우고 기관차 화실에 석탄을 가득 채워 연기를 되도록 짙게 뿜게 하라고 지시했다.

문서로 확인되는 사실은 1877년 1월 모네가 서부철도회사로부터 생라자르 역에서 작업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역에서는 노르망디로, 그리고 그가 당시 살던 아르장퇴유로 가는 열차가 떠났다. 1877년 첫 몇 달 동안 그는 그곳에서 열두 점쯤 되는 그림을 그렸다. 시카고 미술관에 따르면, 역 근처 몽세 거리의 작은 아파트 집세는 카유보트가 대신 내 주었다.

그림은 역의 지붕 아래, 안쪽에서 바라본 광경이다. 무거운 두 지붕면이 가운데에서 만나 높은 삼각형을 이루고, 그 안에 한낮의 빛과 푸른 증기 기둥이 거의 정확히 가운데에 있다. 아래쪽에서는 흰 연기에 반쯤 가려진 검은 기관차가 보는 사람을 똑바로 향하고 있다. 지붕 그림자 사이로 햇빛이 레일에 떨어지는데, 모네는 이를 노란색과 황토색, 보라색 얼룩으로 옮겼다. 쇠와 증기와 하늘은 모두 똑같은 짧은 붓질로 그려졌다.

생라자르 역
생라자르 역클로드 모네, 1877, 오르세 미술관

1878년 3월 10일 카유보트는 이 그림을 모네에게서 685프랑에 샀고, 1896년 그림은 그의 유증 작품들과 함께 뤽상부르 미술관에 들어갔다.

에밀 졸라는 1877년 모네의 역 그림들을 두고, 그 안에서 열차의 굉음이 들리고 거대한 지붕 아래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인다고 썼다. 1890년 그는 생라자르 역을 소설 《인간 짐승》의 무대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8. 귀스타브 카유보트 《마루를 깎는 사람들》

마루를 깎는 사람들
마루를 깎는 사람들귀스타브 카유보트, 1875, 오르세 미술관

1875년 살롱 심사위원단은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을 떨어뜨렸다. 흔히 심사위원들이 웃통을 벗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장면이라는 주제를 천박하다고 여겼다고 본다. 카유보트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살롱 화가 레옹 보나에게 배웠고 1873년에는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갔으니, 이 그림은 살롱에 정식으로 데뷔하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낙선한 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 편에 섰고, 1876년 4월 그들의 제2회 전시회에 《마루를 깎는 사람들》을 내놓았으며, 이 무리의 주요 구매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1876년 이 그림을 본 졸라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지나치게 정확하다는 이유로 이 그림을 “부르주아적”이라고 불렀다.

카유보트의 유언은 친구들의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이 그림은 1894년 그의 상속인들과 유언 집행인 르누아르가 따로 국가에 기증했고, 1896년 뤽상부르 미술관에 들어갔다.

바닥은 마치 보는 사람이 노동자들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보이고, 먼 벽을 향해 가파르게 솟아 있어서 벽은 위쪽에 좁은 띠로만 남는다. 허리 위로 옷을 벗은 세 남자가 무릎을 꿇고 마루에서 낡은 바니시를 긁어낸다. 왼쪽과 앞쪽 널빤지는 이미 밝아져 거의 맨나무가 드러났고, 오른쪽은 아직 어두운데, 그 어두운 널빤지 위로 창문이 비친 긴 밝은 줄무늬가 뻗어 있다. 손 주위에는 돌돌 말린 대팻밥이 흩어져 있고, 오른쪽 끝에는 포도주 병과 마시다 만 잔이 놓여 있다. 오른쪽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머리를 기울이고 있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마루를 깎는 사람들
마루를 깎는 사람들귀스타브 카유보트, 1875, 오르세 미술관

수집가들 (1906~1911)

9.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화가이자 수집가인 에티엔 모로넬라통은 1906년 7월 자신이 가진 그림 100점가량과 수채화, 파스텔화, 소묘 20점가량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 가운데에는 모네의 《개양귀비》, 코로의 작품 40점가량, 그리고 1900년 화상 뒤랑뤼엘에게서 그의 손에 들어온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있었다. 그 뒤 그는 1907년과 1919년 두 차례 더 작품을 보태면서, 미술관이 이를 전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소장품은 루브르에 속하게 되었지만, 1907년부터 1934년까지는 루브르궁의 한 날개인 마르상관의 장식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루브르 본관 전시실에 들어간 것은 1934년에 이르러서였다.

1863년 낙선전에서 이 그림은 《목욕》이라는 제목으로 걸렸고, 사람들은 그림을 비웃었으며,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1871년 마네는 이 그림의 값을 2만 5000프랑으로 매겼지만, 1878년에는 그의 그림을 모으던 오페라 바리톤 가수 장바티스트 포르에게 2600프랑에 팔았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두아르 마네, 1863, 오르세 미술관

벌거벗은 여인이 옆으로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얼굴을 보는 사람 쪽으로 똑바로 돌렸다. 그녀의 몸은 남자들의 어두운 프록코트 옆에서 밝고 평평해 거의 분필처럼 보인다. 남자들은 그녀를 지나쳐 다른 곳을 보고, 오른쪽에서 술 달린 부드러운 모자를 쓴 남자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손을 내밀며 무언가 말하고 있다.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 것은 왼쪽 아래의 정물로, 파란 드레스와 밀짚모자, 과일이 쏟아져 나온 엎어진 바구니, 둥근 빵, 은 술병이 놓여 있다. 가운데쯤 개울 속에 있는 여인은 그 거리에 있기에는 너무 커서 앞쪽의 세 인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위쪽 나뭇가지 사이로는 피리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모델은 《올랭피아》와 같은 빅토린 뫼랑이다. 남자들은 조각가이자 마네의 처남인 페르디낭 렌호프, 그리고 마네의 동생 외젠이나 귀스타브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그렸는데, 누가 어느 쪽인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구도는 당시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여겨졌고 지금은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보는 루브르의 《전원 음악회》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을 새긴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판화를 바탕으로 짰다.

모로넬라통은 훗날 마네의 전기 작가가 되었고, 그의 책 《마네, 스스로 말하다》는 1926년에 나왔다.

10. 장프랑수아 밀레 《만종》

1889년 7월 1일 파리에서는 그해 봄 구리 값이 폭락하면서 파산한 기업가 외젠 세크레탕의 소장품 경매가 열렸다. 경매는 만국박람회에 맞춰 열렸고, 미국인들을 끌어들이려고 도록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찍었다. 《만종》을 두고 겨룬 사람은 마네의 친구이자 전 미술부 장관으로 미술 애호가 모임을 대표해 루브르를 위해 값을 부르던 앙토냉 프루스트와, 뉴욕 미국미술협회의 제임스 서턴이었다. 그림은 55만 3000프랑에 프루스트에게 낙찰되었고, 경매장에서는 “프랑스 만세!”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만종
만종장프랑수아 밀레, 1858, 오르세 미술관

구입 대금은 의회가 내주어야 했다. 하원 의원 에두아르 로크루아는 그러지 않으면 그림이 “프랑스 하원이 거부함”이라는 팻말을 달고 미국을 돌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자크 살리스는 55만 3000프랑이 공화국에 너무 비싸다고 주장했다. 법안은 상원에 넘어가지도 못한 채 7월 중순 철회되었다. 프루스트는 그림을 미국인들에게 넘겼고, 1889~1890년 그림은 미국에서 전시되었다. 1890년 파리의 루브르 백화점을 세운 알프레드 쇼샤르가 자료에 따라 75만 프랑에서 80만 프랑이라는 값을 치르고 그림을 사서 프랑스로 되가져왔다. 쇼샤르는 1909년에 세상을 떠나며 거의 모두 프랑스 작품인 그림과 청동상 100점 넘는 소장품을 루브르에 유증했고, 1910년 1월 15일 유증은 칙령으로 승인되었다.

1875년 1월에 세상을 떠난 밀레는 이 그림의 착상이 어린 시절에서 왔다고 회상했다. 그의 할머니는 들에서 성당 종소리가 들리면 언제나 일손을 멈추고 모두에게 가엾은 죽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를 바치게 했다. 삼종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이 아침, 정오, 저녁에 종소리에 맞춰 바치는 기도다. 그림 속에서 해는 이미 졌다. 남자와 여자가 감자밭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자는 턱 밑에 두 손을 모았고, 남자는 모자를 가슴에 대고 있다. 둘 사이 땅바닥에는 감자 바구니가 있고, 왼쪽에는 쇠스랑이 땅에 꽂혀 있고, 오른쪽에는 자루를 실은 손수레가 있으며, 지평선 위 여자의 머리 오른쪽으로 성당 첨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1932년 8월 11일 기술자 피에르 기야르가 루브르에서 주머니칼로 그림을 여러 번 그어 찢었다. 그때 복원가들은 하늘에 난 찢어진 자리를 빼고는 손상을 눈에 띄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종
만종장프랑수아 밀레, 1858, 오르세 미술관
압생트
압생트에드가 드가, 1875, 오르세 미술관

살바도르 달리는 밀레가 처음에는 바구니 자리에 어린아이의 작은 관을 그렸다고 믿었지만, 이를 뒷받침한 미술관이나 연구소의 발표는 하나도 없다. 달리의 요청으로 루브르 연구소가 엑스선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는 바구니 아래에 덧칠해 가린 어둡고 길쭉한 형태가 보이고, 달리는 1963년에 낸 책 《밀레의 〈만종〉의 비극적 신화》에 이 사진을 실었다.

11. 에드가 드가 《카페에서 (압생트)》

여배우 엘렌 앙드레와, 1876년 무렵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이던 피갈 광장의 카페 ‘누벨 아텐’의 단골인 화가이자 판화가 마르슬랭 데부탱은 드가의 친구였고, 작업실에서 드가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드가는 두 사람을 그 카페의 탁자에 앉히고, 우연히 엿본 장면처럼 보이도록 구성했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 회백색 대리석 탁자 상판 세 개가 왼쪽 아래 구석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이어지고, 빈 대리석이 그림의 왼쪽과 아래쪽을 온통 차지한다. 두 사람은 오른쪽 위 구석에 앉아 있다. 밝은 드레스에 작은 모자를 쓴 여인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아래쪽 옆을 바라본다. 그녀 앞에는 뿌연 황록색 액체, 곧 압생트가 담긴 잔이 놓여 있는데, 자기 탁자보다 남자의 탁자에 더 가깝다. 파이프를 문 검은 옷의 남자는 오른쪽, 그림 바깥을 바라보고, 그의 손과 파이프는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다. 두 사람 뒤 거울에는 어둡고 흐릿한 뒤통수만 비친다.

드가 자신은 이 그림을 《카페에서》라고 불렀다. 1876년 브라이턴의 헨리 힐 대위가 런던의 한 화상을 통해 그림을 사서 그곳에서 《프랑스 카페의 스케치》라는 제목으로 선보였지만, 그때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92년 2월 19일 힐의 소장품이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을 때, 경매장은 이 그림에 야유를 보냈다. 1893년 그림은 런던의 그래프턴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압생트》라는 제목을 달고 전시되었고, 신문 지상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화가 월터 크레인은 이 그림을 “남녀를 막론한 인간 타락의 연구”라고 불렀다. 대중은 앙드레와 데부탱을 진짜 술꾼으로 여겼다.

같은 1893년 파리에서 은행가이자 수집가인 이자크 드 카몽도 백작이 이 그림을 샀고, 1911년 그림은 그의 유증에 따라 그가 가졌던 드가, 모네, 세잔의 작품들과 함께 루브르에 들어갔다.

압생트
압생트에드가 드가, 1875, 오르세 미술관

12. 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두 남자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자기 카드를 들여다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하얀 반사광 한 줄기가 비치는 어두운 포도주 병이 서 있고, 이 병이 캔버스를 거의 정확히 반으로 나눈다. 짧고 흰 점토 파이프를 입에 문 왼쪽 남자는 어둡고 꼿꼿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카드를 가슴께에 쥐고 있다. 밝은 재킷을 입은 오른쪽 남자는 더 길고 묵직한 몸을 탁자 위로 낮게 숙였고, 캔버스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몸이 잘린다. 식탁보는 탁자 앞쪽 가장자리에서 납작한 주름으로 늘어져 있고, 머리 위 배경은 올리브색, 초록색, 보라색 얼룩으로 번진다.

1890년대 초에서 중반 사이, 이미 쉰을 넘기고 주로 고향 엑상프로방스에서 작업하던 폴 세잔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을 다섯 점 남겼다. 두 점에는 여러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데, 이 두 점은 지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반스 재단에 있고, 나머지 세 점에는 카드를 치는 사람이 둘이다. 오르세의 그림은 이 세 점 가운데 가장 작고, 오랫동안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2010년 기술 조사가 나온 뒤로 그 순서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폴 세잔, 1890, 오르세 미술관

이 그림의 첫 주인은 1895년 세잔의 첫 개인전을 열어 준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였다. 1907년 5월 4일 이자크 드 카몽도 백작이 그림을 샀고, 1911년 그림은 그가 루브르에 남긴 유증에 포함되었다.

1961년 루브르는 엑상프로방스의 방돔관에서 열린 세잔 전시회에 이 그림을 빌려주었다. 8월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밤, 도둑들이 그곳에서 세잔의 그림 여덟 점을 가져갔고,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그 가운데 있었다. 당직은 아래층의 헌병 한 명뿐이었고, 경보기는 울리지 않았다. 그림을 찾고 있던 11월 10일, 프랑스 우정국은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그림들은 경찰에 걸려 온 익명의 전화 뒤, 1962년 4월 11일 마르세유에 버려진 도난 차량 푸조 404 안에서 발견되었다.

세잔의 모델은 엑스 근처 가족 영지 자드부팡의 일꾼들이었다. 그의 작품 목록에 따르면 카드를 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은 폴랭 폴레라는 이름이었고, 한 번 포즈를 취할 때마다 5프랑을 받았다.

양차 대전 사이 (1920~1936)

13.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

화가의 아틀리에
화가의 아틀리에귀스타브 쿠르베, 1855, 오르세 미술관

1881년 국가에 《오르낭의 매장》을 기증한 바로 그 누이 쥘리에트 쿠르베는 같은 해 12월 9일 드루오 경매장에서 《화가의 아틀리에》를 아로 화랑에 2만 1000프랑에 팔았다. 그 뒤 파리의 수집가 빅토르 데포세가 그림을 샀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미망인이 유품 경매에서 그림을 되샀고, 1919년까지 폭이 6미터 가까운 이 캔버스는 갈릴레 거리에 있는 데포세 저택의 아마추어 극장에서 무대 배경막으로 걸려 있었다. 1920년 2월 13일 그림은 공공 모금과 루브르 친구회의 돈으로 루브르를 위해 구입되었다. 흔히 거론되는 값은 70만 프랑이다.

쿠르베는 1854~1855년 겨울 오르낭에서 파리 만국박람회에 맞춰 이 그림을 그렸고, “나의 7년간의 예술적, 도덕적 삶을 규정하는 사실적 알레고리”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는 7년을 1848년 혁명부터 헤아렸다.

가운데에는 쿠르베 자신이 앉아 풍경을 그리고 있고, 이젤 위의 이 풍경은 그림 전체에서 가장 밝고 푸른 곳이다. 그의 어깨 뒤에는 벌거벗은 모델이 흰 시트를 가슴에 끌어안고 서 있고, 그녀의 드레스는 분홍빛과 흰빛이 섞인 더미로 바닥에 놓여 있다. 화가의 무릎 곁에서는 나막신을 신은 소년이 캔버스를 바라보고, 아래에서는 흰 고양이가 놀고 있다. 쿠르베는 샹플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대로 왼쪽에 “일상생활의 또 다른 세계, 민중, 가난, 부, 착취당하는 자들, 착취하는 자들”을, 오른쪽에는 “주주들”, 곧 친구들과 미술 애호가들을 배치했다. 오른쪽 끝에는 샤를 보들레르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쿠르베는 시인의 부탁으로 그 곁에 그렸던 연인 잔 뒤발을 덧칠해 지웠는데, 세월이 흘러 물감이 투명해지면서 그녀의 실루엣이 다시 비쳐 나오기 시작했다.

화가의 아틀리에
화가의 아틀리에귀스타브 쿠르베, 1855, 오르세 미술관
정원의 여인들
정원의 여인들클로드 모네, 1866, 오르세 미술관

1855년 박람회 심사위원단은 쿠르베의 작품 11점을 받아들였지만, 이 그림과 《오르낭의 매장》은 거절했다. 쿠르베는 박람회장 옆에 자기 전시관을 지어 ‘사실주의관’이라 이름 붙이고 《화가의 아틀리에》를 1번으로 걸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혼자 그곳을 찾아가 거의 한 시간을 머물렀고, 일기에 “거절당한 그의 그림에서 나는 걸작을 발견한다.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14.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6년 봄 클로드 모네는 파리 근교 빌다브레에 세 들어 살던 집의 정원에서 높이가 2.5미터가 넘는 그림을 시작했고, 일부는 아예 야외에서 그렸다. 시점을 바꾸지 않고 그림 윗부분에 손이 닿도록, 그는 정원에 도랑을 파고 캔버스를 그 안으로 내렸다. 모네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돈이 없었다.

왼쪽의 세 여인은 그의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카미유 동시외가 모델을 섰다. 크리놀린 드레스를 입은 네 여인이 나뭇잎 그늘 아래 서 있거나 앉아 있고, 가늘게 두 갈래로 갈라진 어린나무가 그림을 둘로 나눈다. 가운데 앉은 여인의 흰 치마는 검은 장식끈을 두른 거대한 원을 그리며 풀밭 위로 펼쳐져 있고, 햇빛이 그 위를 비스듬히 가로지른다. 그늘 속에서 흰 드레스들은 차가운 푸른빛을 띤다. 오른쪽의 붉은 머리 여인은 나뭇가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땅에 발이 닿을 듯 말 듯 그쪽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2020~2021년 복원 과정에서, 모네가 왼쪽의 줄무늬 드레스 여인을 나중에 덧그렸고 서명을 가운데에서 오른쪽 아래 구석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867년 살롱 심사위원단은 이 그림을 떨어뜨렸다. 모네의 친구인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카미유가 아이를 가졌을 때 모네를 도우려고 매달 50프랑씩 나누어 내는 조건으로 2500프랑에 그림을 샀다. 바지유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본라롤랑드에서 전사했고, 그림은 그의 아버지에게 상속되었다. 모네 작품 목록을 엮은 다니엘 빌덴스탱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876년 바지유의 아버지는 르누아르가 그린 아들의 초상화를 받고 이 그림을 마네에게 넘겼고, 마네는 모네의 작품 한 점을 받고 그림을 모네에게 돌려주었다.

그 뒤 《정원의 여인들》은 45년 동안 아르장퇴유에서, 이어 지베르니에서 모네 곁에 머물렀다. 1921년 국가는 뤽상부르 미술관을 위해 화가에게서 20만 프랑에 이 그림을 샀다. 같은 무렵 모네는 《수련》 기증을 두고 국가와 협상하고 있었고, 패널 19점의 기증 증서는 1922년 4월 12일에 서명되었다.

정원의 여인들
정원의 여인들클로드 모네, 1866, 오르세 미술관

15. 폴 고갱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폴 고갱, 1891, 오르세 미술관

폴 고갱은 타히티에서 아르노라는 어느 선장에게 이 그림을 주었다. 선장의 딸 윌모 부인이 1920년까지 파페에테에서 그림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림은 30년쯤 섬에 머문 셈이다. 그 뒤 그림은 기 드 숄레 자작에게 넘어갔고, 1923년 그의 누이 비탈리 백작 부인이 그를 기리며 국가에 기증했다.

1891년 6월 고갱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고 드루오 경매장에서 자기 작품들을 팔아 치운 뒤 배를 타고 파페에테에 도착했고, 타히티에서 보낸 첫 몇 달 사이에 이 그림을 그렸다. 두 여인이 노란 모래 위에 앉아 캔버스를 거의 다 채우고 있는데, 오른쪽 여인은 그림 틀이 비좁을 만큼 커서 무릎과 치맛자락이 오른쪽 가장자리 너머로 빠져나간다. 왼쪽 여인은 한 손으로 몸을 받치고 고개를 숙인 채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긴 검은 머리에 노란 리본을 맸고, 귀 뒤에 흰 꽃을 꽂았으며, 큼직한 흰 잎 무늬가 있는 새빨간 파레오를 둘렀다. 오른쪽 여인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선교사들이 섬에 들여온 옷차림인, 목까지 단추를 채운 긴소매의 헐렁한 분홍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주황색 야자 섬유로 무언가를 엮으며 곁눈으로 보는 사람 쪽을 흘끗 본다. 두 여인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모래 너머로는 어두운 물, 선명한 초록 땅, 흰 파도가 부서지는 어두운 바다가 띠를 이루며 펼쳐진다.

1892년 고갱은 지금 드레스덴에 있는 그림 《파라우 아피(무슨 소식 있나요?)》에서 이 구도를 되풀이하며, 오른쪽 여인에게 줄무늬 파레오를 입혔다.

16. 프랑수아 퐁퐁 《북극곰》

북극곰
북극곰프랑수아 퐁퐁, 1928, 오르세 미술관

1922년 파리 가을 살롱에 나온 석고 북극곰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 프랑수아 퐁퐁은 예순일곱 살이었다. 그전 수십 년 동안 그는 다른 조각가가 만든 원형을 대리석으로 옮기는 석공으로 일했고, 카미유 클로델과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도 맡았다. 1905년 무렵 그는 동물로 눈을 돌려 파리 식물원 부속 동물원에서 동물을 그리고 빚었으며, 짐승을 따라 걸으며 점토를 다룰 수 있도록 가슴에 고정하는 휴대용 작업대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세부를 모두 살려 빚었다가 차츰 그것들을 덜어 냈다.

1927년 국가는 뤽상부르 미술관을 위해 커다란 석조 판본을 2만 5000프랑에 주문했다. 잡지 《새로운 유럽》의 편집장인 언론인 루이즈 바이스가 장관 에두아르 에리오에게 퐁퐁을 위해 힘을 써 주었고, 은행가이자 수집가인 다비드 다비드베유는 석회암 덩어리를 기증했다. 곰을 깎은 사람은 석공 장조아킴 쉬페리로, 파리 근교 말라코프의 작업장에서 퐁퐁의 감독 아래 작업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석공이 퐁퐁을 위해 원형을 돌로 옮긴 셈이다. 곰은 1929년 2월 16일에 인도되었다. 그 뒤 1939년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1986년에는 오르세로 옮겨졌다. 유명한 1922년의 석고상과 이 석조상은 서로 다른 조각이다.

실물 크기의 곰은 기둥처럼 곧은 다리로 걸어가고, 뒷다리 하나는 이미 발뒤꿈치를 받침대에서 떼어 땅을 박차고 나가는 듯하다. 머리는 길고 굵은 목 위로 들려 있고, 냄새를 맡는 것처럼 주둥이를 치켜들었다. 돌은 매끄럽고 광택이 없으며, 털을 나타내는 홈은 하나도 없다. 눈은 작은 점 두 개로, 입은 가늘게 새긴 선 하나로 표시했는데, 그 선 때문에 곰이 살짝 웃는 것처럼 보인다. 퐁퐁은 자신이 “구멍도 그림자도 없는” 조각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북극곰
북극곰프랑수아 퐁퐁, 1928, 오르세 미술관

퐁퐁은 1933년에 세상을 떠나며 작품 300점가량을 국가에 남겼고, 그 대부분은 1948년 디종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17.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라 굴뤼의 장터 무대를 위한 패널 두 점

물랭 루주 카바레의 캉캉 스타 라 굴뤼, 곧 루이즈 베베르는 1895년 그곳을 떠나 푸아르 뒤 트론 장터에 자리를 얻고, ‘동방풍’ 배꼽춤을 추는 자기만의 천막 무대를 열었다. 그녀는 무대 정면을 꾸밀 커다란 캔버스 두 점을 친구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에게 부탁했다. 1891년 물랭 루주 포스터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로트레크는 높이와 폭이 각각 3미터쯤 되는 패널 두 점을 그렸고, 이 그림들은 비와 햇볕을 그대로 맞는 바깥 입구 곁에 걸렸다.

물랭 루주에서의 춤 (라 굴뤼와 발랑탱 르 데조세)
물랭 루주에서의 춤 (라 굴뤼와 발랑탱 르 데조세)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1895, 오르세 미술관
무어인의 춤
무어인의 춤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1895, 오르세 미술관
요람
요람베르트 모리조, 1872, 오르세 미술관

왼쪽 패널에서 라 굴뤼는 물랭 루주에서 ‘뼈 없는 사나이’라 불린 발랑탱 르 데조세와 춤을 추는데, 이것이 그녀의 과거다. 오른쪽 패널에서 그녀는 천막 무대에서 관객 앞에 새로운 ‘무어풍’ 춤을 추고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현재다. 로트레크는 배경을 거의 칠하지 않았고, 인물들은 갈색 캔버스 위에 붓으로 곧장 어두운 선을 그어 그렸으며, 색을 채운 것은 일부뿐이다. 온전히 색을 입힌 것은 라 굴뤼 자신으로, 흰 속치마의 거품 위로 초록 치마를 입고 있다. 반면 그녀의 파트너인 실크해트를 쓴 키다리 발랑탱은 거의 선으로만 되어 있다. 연구자들은 오른쪽 패널의 관객 가운데서 실크해트를 쓴 뚱뚱한 남자를 오스카 와일드로, 오른쪽에 누구보다 크게 그려진 뾰족한 턱수염의 남자를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으로 알아본다.

1900년 천막 무대가 망하자 수집가 조르주 비오 박사가 캔버스들을 샀다. 1907년 그의 소장품이 경매로 흩어지면서 패널들은 화상 오드베르에게 넘어갔고, 1926년 오드베르는 두 캔버스를 여덟 개의 큰 조각으로 잘라 저마다 따로 틀에 씌우고 액자에 넣어 독립된 그림처럼 만들었다. 1929년 국가는 위그 시몽이라는 한 소유자에게서 조각들과 캔버스 자투리를 샀고, 발랑탱 르 데조세가 그려진 조각은 오프레 씨가 기증했다. 1930년 패널들은 다시 하나로 맞추어졌다.

캔버스의 이음매는 눈에 보인다. 곧은 선들이 캔버스를 여러 직사각형으로 나누며 인물들을 곧장 가로지르고, 왼쪽 패널에는 발랑탱의 발밑에 더 밝은 캔버스 띠가 끼워져 있다.

18. 베르트 모리조 《요람》

젊은 여인이 왼쪽에 옆모습으로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잠든 아기를 바라본다. 요람은 그림의 아래쪽 절반과 오른쪽 가장자리를 다 차지하고, 위에서 흰 모슬린 휘장이 요람으로 늘어져 그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어머니의 가슴 앞까지 지나간다. 아기는 모슬린 너머로 보이고, 눈을 감고 있으며, 머리맡에 굽혀 올린 작은 팔이 어머니의 굽힌 팔을 되풀이한다. 여인은 다른 손으로 요람 가장자리를 만지고 있다. 그림은 거의 흰색과 회청색, 분홍빛 색조로만 칠해졌고, 어둡게 남은 것은 어머니의 재킷과 오른쪽 가장자리의 띠뿐이다.

그림 속 인물은 베르트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 퐁티용과 1871년 12월 23일에 태어난 그녀의 딸 블랑슈다. 자매는 함께 그림을 배웠지만, 에드마는 해군 장교 아돌프 퐁티용과 결혼해 로리앙으로 떠났고 그림을 그만두었다.

1874년 봄, 카퓌신 대로에 있는 사진가 나다르의 옛 작업실에서 열린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베르트 모리조는 참가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작품 아홉 점을 내놓았는데, 《요람》도 그중 하나였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모리조는 그림을 판매 목록에서 거두어들였다. 1895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망 증명서에는 “직업 없음”이라고 적혔다.

그림은 가족 곁에 남았고, 1930년 루브르는 결혼 전 성이 퐁티용인 블랑슈 포르제 부인에게서 그림을 샀다. 바로 그 요람 속 아기였고, 그때 그녀는 쉰여덟 살이었다.

요람
요람베르트 모리조, 1872, 오르세 미술관
14세의 어린 무용수
14세의 어린 무용수에드가 드가, 1881, 오르세 미술관

19. 에드가 드가 《14세의 어린 무용수》

마리 반 괴템은 1865년 6월 7일 파리의 가난한 벨기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와 자매들은 오페라 발레 학교에서 배웠다. 1879년 그녀는 조각의 제목에 나오는 바로 그 나이인 열네 살이 되었고, 그 무렵 에드가 드가가 그녀를 모델로 인물상을 빚었다. 1882년 5월 그녀는 수업에 빠졌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 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기 작가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드가는 뼈대 위에 착색한 밀랍으로 그녀를 빚고, 진짜 비단 보디스와 튈 발레 치마, 스타킹, 발레 슈즈를 입혔으며, 머리에는 새틴 리본을 묶고 진짜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씌웠다. 1881년 4월 그는 이 인물상을 유리 진열장에 넣어 제6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내놓았다. 드가가 대중에게 보인 조각은 이것 하나뿐이다. 비평가 폴 만츠는 신문 《르 탕》에서 그녀가 왜 이렇게 추하냐고 물었고, 한 평론가는 그녀를 “조금은 원숭이, 조금은 아즈텍인”이라고 불렀다.

1917년 9월 드가가 죽은 뒤 작업실에서 밀랍 인물상 150점가량이 발견되었다. 상속인들은 주물사 아드리앵오렐리앵 에브라르와 합의했고, 에브라르는 이것들을 청동으로 떴는데, 《어린 무용수》는 30점 가까이 주조했다. 드가는 한 번도 주조를 허락한 적이 없으니 그의 청동상은 모두 사후 주조품이고, 따라서 오르세에 서 있는 것은 작가가 죽은 뒤 만든 복제본이다. P라는 글자가 표시된 이 주조본은 1930년 국가가 샀고, 1931년 루브르에 들어갔다. 문서에는 화가의 상속인들과 에브라르 가문의 너그러움 덕분에 구입이 가능했다고 적혀 있다.

소녀는 왼발을 뒤로 빼고 두 손을 등 뒤로 맞잡은 채 발레의 제4 포지션으로 서서, 턱을 높이 들고 눈을 거의 감았다. 보디스는 단추와 주름까지 청동으로 함께 떠졌고, 청동으로 된 땋은 머리의 리본과 튈 치마는 진짜 천으로 만들었다.

밀랍 원본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있으며, 1999년 폴 멜런의 소장품에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14세의 어린 무용수
14세의 어린 무용수에드가 드가, 1881, 오르세 미술관
뱀 부리는 여인
뱀 부리는 여인앙리 루소, 1907, 오르세 미술관

20. 앙리 루소 《뱀 부리는 여인》

화가 로베르 들로네의 어머니 베르트 들로네가 1907년 앙리 루소에게 이 그림을 주문했다. 널리 퍼진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인도를 여행했고, 손님들에게 그 여행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었으며, 루소에게 그 추억을 담은 그림을 부탁했다. 루소는 한때 파리로 들어오는 물품에 입시세를 거두던 세관 초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세관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프랑스 밖으로는 끝내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식물원의 온실과 동물원, 삽화 잡지들, 그리고 만국박람회마다 지어지던 이국풍 마을에서 자신의 정글을 모아 왔다.

그림은 역광으로 그려졌다. 왼쪽 물 위 초록빛 하늘에 보름달이 걸려 있고, 거의 한가운데에 우리를 향해 선 뱀 부리는 여인은 온통 검으며, 눈만 빛난다. 그녀는 피리를 불고 있고, 뱀 한 마리는 옷처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있으며, 다른 한 마리는 풀숲에서 그녀를 향해 몸을 일으킨다. 왼쪽 갈대숲에는 분홍 저어새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잎들이 벽처럼 솟아 있는데, 잎 하나하나에 따로 윤곽선이 둘러져 있다.

그 뒤 그림은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들로네에게 넘어갔고, 1922년 5월 두 사람은 패션 디자이너이자 수집가인 자크 두세에게 5만 프랑을 받고 그림을 팔았다. 거래를 주선한 사람은 당시 두세에게 무엇을 살지 조언하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파는 쪽은 두세가 그림을 루브르에 유증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두세는 1929년 10월 30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미망인이 그림을 곁에 두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국가는 1936년에야 유증을 받아들였다.

반 고흐 세 점 (1949~1975)

자화상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르세 미술관

21.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949년 폴 가셰 박사의 자녀인 아들 폴 가셰와 딸 마르그리트는 빈센트 반 고흐의 이 자화상을 박사 자신의 초상화와 함께 국가에 기증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가셰 집안의 기증이 1950년대 내내 이어졌다. 가셰 박사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반 고흐를 돌보았고, 화가는 1890년 7월 29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자화상이 어떻게 박사의 손에 들어왔는지를 전하는 자료는 영국 잡지 《아폴로》 하나뿐인데, 이 잡지는 2024년에 가셰가 빈센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의 동생 테오에게서 그림을 받았다고 썼다.

네덜란드 사람인 반 고흐는 1886년부터 프랑스에서 살았고, 1888년 2월 아를에 자리 잡았으며, 그해 말 발작을 겪은 뒤 1889년 5월 생레미에 있는 생폴드모솔 요양원에 스스로 들어갔다. 7월에 새 발작이 닥쳐 그는 몇 주 동안 작업을 하지 못했다. 그는 1889년 9월 이 초상화를 그렸고, 9월 20일 무렵 파리의 테오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한동안 들여다보렴. 내 얼굴 표정이 더 차분해졌다는 걸 네가 알아보면 좋겠구나. 다만 내가 보기엔 눈빛은 예전보다 더 흔들리는 것 같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자화상 가운데 하나다.

얼굴은 초록 그림자를 넣은 노란 황토색으로 칠해졌고, 입술은 꾹 다물었으며, 눈은 곁눈질로 보는 사람을 향한다. 붉은 머리칼과 수염은 짧고 나란한 붓질로 그려져 있다. 창백한 청록색 배경은 소용돌이와 물결무늬로 덮여 있고, 같은 물결치는 붓질이 재킷으로 이어져서 인물은 벽과 거의 하나로 녹아들며, 어두운 윤곽선과 주황색 머리만이 인물을 벽에서 떼어 놓는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보살핌을 받으러 오베르로 옮겨 가면서 테오에게서 이 캔버스를 가져와 박사에게 보여 주었다. 6월 그는 누이에게 가셰가 자화상을 보고 몹시 감탄했다고 편지에 썼고, 박사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같은 편지에서 자기 자화상도 그와 “거의 같다”고 적었다.

자화상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르세 미술관

22.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침실》

1959년 4월 일본 요코하마 항에는 파리에서 유럽 미술을 사들였던 일본 기업가 마쓰카타 고지로의 소장품 375점이 도착했고, 그해 6월 이 작품들로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20점가량을 남겼는데, 《아를의 침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마쓰카타는 1920년대 초 파리의 폴 로젠버그 화랑에서 이 그림을 샀고, 그림은 일본으로 보내지지 않은 채 소장품 가운데 파리에 남은 부분과 함께 있었다.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된 뒤 이 소장품은 적국 재산으로 압류되었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강화 조약 제14조에 따라 연합국은 일본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고, 소장품은 프랑스 국가에 넘어갔다. 1953년 한때 마쓰카타에게 조언했던 미술사가 야시로 유키오는 프랑스 박물관 총국장 조르주 살에게 《침실》과 르누아르 그림 한 점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협상 끝에 르누아르는 돌려주었지만, 반 고흐는 돌려주지 않았다. 1959년 5월 27일 자 칙령으로 《침실》은 루브르에 넘겨졌다.

아를의 침실
아를의 침실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르세 미술관

2024년 단체 ‘인터내셔널 레스티튜션스’의 대표 로베르 카사노바스는,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적이 없으므로 1944년의 압류에는 근거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그림을 붙잡아 두는 것은 불법 점유라고 했다. 프랑스의 공식 입장은 다르다. 그림은 1951년 강화 조약과 1959년 칙령에 따라 국가 소유가 되었고, 나머지 소장품은 일본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되었다는 것이다.

오르세의 《침실》은 세 점 가운데 세 번째이자 가장 작은 판본이다. 반 고흐는 1888년 10월 아를에서 첫 번째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습기 때문에 그림이 상했다. 1889년 9월 생레미에서 그는 같은 크기로 그림을 다시 그렸고, 그달 말 네덜란드에 사는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 크기를 줄인 반복작을 만들었다(첫 번째 판본은 지금 암스테르담에, 두 번째는 시카고에 있다). 그는 이미 그 방에서 살지 않았으므로, 예전 그림을 보고 그렸다. 바닥은 창을 향해 가파르게 솟아오르고, 뒷벽은 앞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핏빛 붉은 이불을 덮은 노란 나무 침대가 오른쪽 절반을 차지하는데, 이것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붉은색이다. 침대 위에는 주황색 액자에 든 초상화 두 점이 걸려 있는데, 파란 재킷을 입은 수염 없는 붉은 머리 남자와 눈을 내리깐 검은 머리 여인이다. 암스테르담 판본에서는 이 자리에 다른 초상화들이 걸려 있고, 이 여인이 누구인지 연구자들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일부는 그녀를 화가의 누이 빌레미나로 본다.

2019년 이 그림은 미술관 개관 60주년을 기념하는 마쓰카타 소장품 전시회에 나와 도쿄에서 전시되었다.

아를의 침실
아를의 침실빈센트 반 고흐, 1889, 오르세 미술관

23. 빈센트 반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반 고흐는 론강 기슭에서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큰곰자리를 아를 위에 그려 넣었다. 이 별자리는 하늘의 북쪽에서 보인다. 천체물리학자 장피에르 뤼미네는 1888년 9월의 하늘을 재구성해 별들이 북쪽을 바라볼 때 보이는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화가가 한쪽의 도시와 다른 쪽의 별자리를 합쳤다고 추정했다.

1888년 9월 29일 무렵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마침내 밤에 가스등 아래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하늘”을 묘사했다. 초록빛이 도는 파란 하늘, 로열블루의 물, 연보랏빛 땅, 그리고 반사광이 “붉은 금빛에서 초록 청동빛으로” 바뀌는 노란 가스 불빛이었다. 별들은 방사상 붓질로 된 후광을 두른 옅은 녹백색 꽃송이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먼 강기슭을 따라 노란 주황빛 가로등이 줄지어 있고, 가로등마다 어두운 물속으로 거친 노란색과 금색 붓질의 기둥이 거의 앞쪽 끝까지 내려온다. 가운데 강가에는 가는 돛대를 단 배 두 척이 서 있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는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보는 사람 쪽으로 걸어오는데, 너무 작아서 놓치기 쉽다. 편지에서 반 고흐는 이들을 연인이라고 불렀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빈센트 반 고흐, 1888, 오르세 미술관

론강의 이 강기슭은 반 고흐가 세 들어 살며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며 가구를 들이던 노란 집에서 걸어서 2분 거리였다. 1889년 테오는 이 그림을 《붓꽃》과 함께 앵데팡당전에 보냈다.

테오가 죽은 뒤 그림은 그의 미망인 요한나 반 고흐봉어르에게 남았고, 1899년 네덜란드 작가 바스 베트가 반 고흐의 그림 세 점을 한꺼번에 1450휠던에 사면서 이 그림도 샀다. 그는 친구에게, 이런 성물을 돈을 주고 자기 집에 들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1922년 베트가 죽은 뒤 상속인들이 그림들을 팔았고, 뒷날 이 그림은 파리 사람 페르낭 모슈의 것이 되었다.

1975년 로베르 칸스리베르 부부는 페르낭 모슈 부부를 기리며 이 그림을 국가에 기증했는데,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곁에 둘 권리를 남겨 두었다. 그래서 국가는 그림을 걸 수 있게 되기 전부터 이미 그림의 주인이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빈센트 반 고흐, 1888, 오르세 미술관

상속세와 후원자 (1995~2022)

24. 귀스타브 쿠르베 《세계의 기원》

1889년 6월 29일 에드몽 드 공쿠르는 한 화상이 그에게 비밀이 숨은 그림을 보여 준 일을 일기에 적었다. 바깥쪽 덮개 판에는 눈 덮인 시골 성당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쿠르베가 할릴 베이를 위해 그린 두 번째 그림이 숨어 있었는데, “여자의 배와 아랫배”를 그린 것이었다. 공쿠르는 쿠르베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인정했고, 그 몸을 코레조의 그림에 견주었다. 그는 화상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문헌에서는 대개 이 화상을 골동품상 앙투안 드 라 나르드로 본다.

파리에 와 있던 오스만 외교관 할릴 베이는 에로틱한 그림을 모았고, 쿠르베의 《잠》과 앵그르의 《터키탕》도 가지고 있었다. 쿠르베는 1866년 그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일반적인 견해로는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다. 쿠르베에게 적대적이었고 파리 코뮌 이후에 글을 쓴 작가 막심 뒤 캉은 이 그림이 할릴 베이의 화장 방에 초록 커튼 뒤에 걸려 있었다고 회상했다. 1868년 도박으로 재산을 잃은 할릴 베이는 소장품을 팔았고, 이 그림은 개인 거래로 라 나르드에게 넘어갔다.

캔버스는 작다. 흰 시트 위에 반듯이 누운 벌거벗은 여성의 몸을 발 쪽에서 가까이 본 모습이다. 화면은 가슴과 허벅지에서 잘려 있어 머리와 팔, 정강이는 그 바깥에 남는다. 벌린 허벅지는 아래 양쪽 구석으로 뻗어 있고, 거뭇한 음모는 캔버스의 거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몸의 위쪽은 구겨진 시트로 덮였고, 오른쪽 위로는 가슴 한쪽이 보인다. 당시 아카데미 화가들은 누드를 매끈하고 털 없이 그렸지만, 쿠르베는 털을 세밀하게 그렸다.

세계의 기원
세계의 기원귀스타브 쿠르베, 1866, 오르세 미술관

1910년 무렵 부다페스트의 수집가 허트바니 페렌츠 남작이 파리의 베르넴죈 화랑에서 이 그림을 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소장품은 부다페스트 은행들의 금고에 보관되었다. 그림이 전쟁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서로 엇갈리는데, 허트바니 자신은 그림이 사라졌다가 “운 좋은 우연으로” 자기에게 돌아왔다고 썼다. 1947년 그는 파리로 떠나며 그림을 가지고 갔다.

1955년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과 그의 아내인 배우 실비아 바타유가 절반씩 돈을 내어 그림을 샀다. 두 사람은 기트랑쿠르의 시골집에 그림을 걸었고, 실비아는 형부인 화가 앙드레 마송에게 그림을 가릴 판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송은 옆으로 미는 나무 덮개를 만들고, 그 위에 같은 몸을 밝은 선으로 풍경처럼 그렸다. 라캉은 1981년에, 실비아 바타유는 1993년 12월에 세상을 떠났고, 1995년 상속인들은 상속세 대신 그림을 국가에 넘겼다. 프랑스에서 이렇게 예술 작품으로 세금을 내는 것은 1968년 법으로 허용되었다. 그전까지 이 그림이 미술관에 전시된 것은 1988년 브루클린에서 한 번뿐이었다.

오랫동안 모델은 휘슬러의 연인이었던 아일랜드 여성 조애나 히퍼넌으로 여겨졌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붉은색이었다. 2018년 뒤마 연구자 클로드 쇼프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원고와 대조했다. 편지에는 화가의 붓과 “오페라의 크니오 양”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쇄본에서 ‘인터뷰’로 읽혔던 단어는 원고에서 ‘내부’라는 단어로 드러났다. 편지가 가리킨 사람은 오페라의 발레리나 출신으로 할릴 베이의 연인이었던 콩스탕스 크니오였다. 같은 도서관의 실비 오베나스도 이 견해를 지지했지만, 이 견해는 편지 한 통에 기대고 있다.

2024년 5월 6일, 퐁피두센터 메스에서 열린 라캉 전시회에 그림이 대여되었을 때, 누군가 보호 유리 위에 붉은 페인트로 ‘미투’라고 썼다. 유리는 갈아 끼워야 했지만, 캔버스의 물감은 멀쩡했다.

25. 귀스타브 카유보트 《뱃놀이》

그림의 소유자인 카유보트 집안의 후손들은 2019년 10월 2일 그림을 프랑스 밖으로 반출하게 해 달라고 허가를 신청했다. 해외에 팔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1894년 화가가 죽은 뒤 그림은 동생 마르시알에게, 1910년에는 마르시알의 딸 주느비에브에게 넘어갔고, 그때부터 줄곧 집안에 남아 있었다. 2019년 12월 18일 국가 보물 위원회는 반출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2020년 1월 30일 반출이 거부되면서 그림은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국가에는 그림값을 제시할 수 있는 30개월의 기간이 주어졌다. 2022년 3월 25일 국가는 4300만 유로를 낼 후원자를 찾는다고 발표했다. 금액 전부를 LVMH 그룹이 냈고, 국가 보물에 관한 법에 따라 회사는 이런 출연금의 약 90퍼센트를 법인세에서 공제받을 수 있다. 그림은 국가의 소유이며, 2023년 1월 30일 오르세 미술관에서 공개되었다.

뱃놀이
뱃놀이귀스타브 카유보트, 1878, 오르세 미술관

보는 사람은 가벼운 보트의 고물에 앉아 노 젓는 남자를 마주하고 있다. 늑재와 가로 좌석이 보이는 니스 칠한 황토색 보트 바닥이 그림의 아래쪽 3분의 1을 차지하며 가장자리 밖으로 뻗어 나가고, 노는 그림을 거의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른다. 노 젓는 남자는 정확히 한가운데에 무릎을 벌리고 앉아, 노를 한 번 다 저은 끝에 팔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높은 검은 실크해트를 쓰고, 검은 조끼와 소매가 넓은 파랗고 흰 줄무늬 셔츠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맸다. 위원회의 의견서에는 그가 “도시 정장의 재킷만 벗었다”고 적혀 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보는 사람을 지나쳐 왼쪽을 바라본다. 그의 뒤로 보이는 강은 아마도 카유보트 집안이 여름을 보내던 예르강일 텐데, 인물보다 더 자유롭고 빠르게 끊어지는 붓질로 그려졌고, 맞은편에서는 밀짚모자를 쓴 두 사람이 노를 젓는 두 번째 보트가 다가온다.

카유보트는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이 그림을 내놓았다. 그는 직접 요트를 몰고 배를 만들기도 했는데, 문화부는 그가 배 32척을 가지고 있었고, 20척쯤은 더 설계도를 그렸다고 전한다.

1863년 나폴레옹 3세는 살롱에서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을 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심사위원단이 살롱에 들이지 않았다. 1890년 화가들은 돈을 모아 《올랭피아》를 국가에 안겼다. 1906년 모로넬라통이 국가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기증했고, 1911년 루브르는 유증으로 카몽도 소장품을 받았으며, 1995년 라캉의 상속인들은 쿠르베의 그림으로 상속세를 냈고, 2022년 국가는 카유보트의 《뱃놀이》가 프랑스를 떠나지 않도록 4300만 유로를 마련했다.

뱃놀이
뱃놀이귀스타브 카유보트, 1878,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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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의 교회
오베르의 교회빈센트 반 고흐, 1890, 오르세 미술관
벨렐리 가족
벨렐리 가족에드가 드가, 1858, 오르세 미술관

이 스물다섯 점 말고도, 1951년 역시 가셰 집안의 참여로 들어온 반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와, 1918년 독일군 포병이 파리를 포격하던 무렵 화가의 작업실 경매에서 사들인 드가의 《벨렐리 가족》이 있다. 조각 가운데에서는 1964년 파리 오페라 극장 정면에서 떼어 내고 복제품으로 바꾼 장바티스트 카르포의 《춤》과 카미유 클로델의 《중년》을 찾아볼 만하다. 국가는 1899년 이 조각군의 주문을 철회했고, 청동 주조 비용은 개인들이 댔다.

춤
춤장바티스트 카르포, 1869, 오르세 미술관
중년
중년카미유 클로델, 1902, 오르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