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6년,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동생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그림 1400점가량을 브뤼셀에서 빈으로 옮겼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총독으로 지낸 몇 해 동안 사들인 것이었다. 그 무렵 잉글랜드에서는 내전이 벌어져 몰락한 왕당파의 컬렉션이 시장에 나왔고, 1649년에 처형된 해밀턴 공작의 컬렉션도 그중 하나였다. 대공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그림들은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넘어갔고, 그렇게 해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반 에이크가 빈에 오게 되었다.

링슈트라세에 선 박물관 건물은 건축가 젬퍼와 하제나우어의 설계로 지어져 1891년에 문을 열었다. 여러 궁전과 성, 보물실에 흩어져 있던 황실 컬렉션을 한 지붕 아래 모으기 위해서였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네 세기에 걸쳐 모은 컬렉션이었다.

이 글에서는 작품 25점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황실 컬렉션에 들어오기까지의 길을 따라가 볼 수 있다. 한 군주가 다른 군주에게 보낸 선물, 신부의 초상화, 잉글랜드 컬렉션이 팔려 나갈 때 사들인 그림, 해산된 수도회의 제단화 같은 길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루벤스의 《작은 모피》는 그 길이 도중에 끊겨, 언제부터 빈에 있었는지만 알려져 있다. 마지막 작품인 페르메이르는 제국이 끝난 뒤 히틀러와의 거래를 거쳐 국가 컬렉션에 들어왔다.

군주들 사이의 선물과 거래 (1570~1595)

1. 벤베누토 첼리니 《소금 그릇》(살리에라), 1540~1543년

2003년 5월 11일 새벽 4시쯤, 빈의 경보 장치 설치 기사 로베르트 망은 마침 보수 공사 중이던 박물관 정면의 비계를 타고 올라가 2층 창문을 밀어 떼어 내고, 진열장을 깨뜨려 벤베누토 첼리니의 황금 소금 그릇을 들고 나왔다. 건물 안에 머문 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경보가 울렸지만 또 한 번의 오작동으로 여겨졌고, 도난 사실은 아침 8시가 지나서야 드러났다. 망은 나중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저지른 일이었고 소금 그릇의 값은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소금 그릇은 1년 반 가까이 그의 침대 밑 여행 가방 속에 있었고, 그 뒤 그는 이것을 상자에 담아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숲에 묻은 다음, 보험 회사에 1000만 유로를 요구하며 금을 녹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2005년 10월에는 증거로 넵투누스의 삼지창을 보냈는데, 인물상에서 떼어 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망은 협박 메시지에 쓸 심 카드를 산 휴대전화 가게의 감시 카메라 때문에 붙잡혔고, 2006년 1월 21일 직접 경찰을 브란트 마을 근처의 은닉처로 안내했다. 상자는 얼어붙은 땅을 파서 꺼내야 했다.

살리에라(소금 그릇)
살리에라(소금 그릇)벤베누토 첼리니, 1541, 미술사 박물관
여름
여름주세페 아르침볼도, 1563, 미술사 박물관

첼리니는 이 소금 그릇을 파리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위해 만들었고, 그의 금세공품 가운데 지금까지 남은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흑단으로 만든 타원형 받침 위에 황금 인물 둘이 서로 마주 보며 반쯤 누워 있고, 두 인물의 다리는 서로 얽혀 있다. 첼리니 자신은 이들을 바다와 대지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넵투누스와 텔루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넵투누스는 삼지창을 치켜들었고, 그 앞에서는 푸른 에나멜 물결 사이로 바다의 말 한 마리가 솟아오른다. 대지는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있고, 그 곁에는 후추를 담던 작은 황금 신전이 서 있다. 신전에서 대지 쪽을 향한 벽면에는 금빛 백합이 든 작고 푸른 에나멜 방패, 곧 프랑스 왕가의 문장이 보인다. 소금은 양 끝이 위로 휘어 오른 황금 배에 담았는데, 이 배는 반대편, 두 인물의 다리 사이에 놓여 있어서 신전 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소금 그릇은 선물로 빈에 왔다. 1570년 10월 22일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프랑수아의 손자인 프랑스 왕 샤를 9세가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엘리자베트 대공녀와 결혼했다. 신랑이 없는 대리 결혼이어서, 제단 앞에서는 신부의 삼촌인 티롤의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이 신랑을 대신했다. 샤를 9세는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소금 그릇과 함께 값진 용기 세 점을 더 선물했고, 이 용기들도 이 박물관에 있다. 페르디난트는 소금 그릇을 인스브루크 근처 암브라스성의 쿤스트카머, 곧 진귀한 물건을 모아 둔 방에 두었다. 1596년 그의 재산 목록에 소금 그릇이 기록되었고, 나중에 암브라스의 다른 보물들과 함께 빈으로 옮겨졌다.

2006년 복원 때 진열장 유리 파편에 긁힌 자국을 금에서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서, 대지의 가슴과 배에는 가는 흔적이 남아 있다.

2.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1563년

이 옆얼굴의 뺨은 패널에서 가장 밝은 부분인 복숭아로, 코는 어린 오이로, 입술은 버찌 두 알로 되어 있고, 입술 사이에는 이 대신 껍질이 벌어진 완두콩 꼬투리가 놓여 있다. 턱은 배이고, 눈은 연한 빛깔의 작은 배 아래에 놓인 작고 검은 버찌다. 귀는 터진 짚빛 껍질 사이로 비어져 나온 옥수수 이삭이고, 그 아래에는 뿌리가 달린 마늘 통들이 매달려 있다. 유럽에서 옥수수를 기른 지 그때 겨우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아서, 빈 궁정에서 옥수수는 바다 건너에서 온 진귀한 작물이었다. 머리카락과 모자 자리에는 멜론, 포도 잎, 가지, 자두, 블랙베리가 있고, 왼쪽 위에는 귀리 이삭이 깃털처럼 삐죽 솟아 있다.

밀 이삭으로 된 옷깃은 목둘레에 빳빳하게 서 있고, 그 아래로 뻣뻣하게 엮은 깃이 있는데, 그 짚에 화가의 이름 GIVSEPPE ARCIMBOLDO가 대문자로 엮여 들어가 있다. 글자는 무늬로 착각하기 쉽다. 연도 1563은 패널 왼쪽 아래, 어깨 부분의 짚에 엮어 넣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연구자들은 이렇게 짜 넣은 서명을, 자기 이름을 금빛 글자로 망토에 짜 넣게 했다는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에 관한 플리니우스의 이야기를 넌지시 가리킨 것으로 본다. 패널 맨 왼쪽 아래 구석에는 59로 끝나는 작고 밝은 숫자도 보이는데, 아마 옛 소장품 목록 번호일 것이다.

아르침볼도는 1562년 밀라노에서 빈으로 왔고, 《여름》은 막시밀리안 대공을 섬기며 처음으로 한 해를 꼬박 보낸 해에 그렸다. 대공은 그 이듬해 황제가 되었다. 그 첫 《사계》 연작 가운데 이론의 여지 없이 그의 것으로 인정되는 패널은 두 점이고, 《여름》과 《겨울》 모두 이 박물관에 있다. 1569년 새해에 화가는 막시밀리안 2세에게 《사계》와 《4원소》를 조반니 바티스타 폰테오의 라틴어 시와 함께 바쳤다. 이 시는 여러 사물을 모아 만든 머리들을 온갖 다른 피조물이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영원한 제국의 모습으로 풀이했다.

《여름》은 270년 가까이 진귀한 물건들 사이에 있었다. 처음에는 루돌프 2세의 쿤스트카머에, 그다음에는 빈의 보물실에 있었고, 보물실에서는 1748년에 목록에 올랐다. 회화관으로 옮겨진 것은 1830년이 되어서였다.

여름
여름주세페 아르침볼도, 1563, 미술사 박물관

3. 대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 1565년

안트베르펜의 상인이자 금융가 니클라스 용엘링크는 브뤼헐의 그림을 가장 많이 모은 수집가였고, 1565년 화가는 그를 위해 계절 연작을 그렸다. 패널 여섯 점에 두 달씩을 담은 연작이었다. 박물관에 따르면 이 패널들은 용엘링크의 식당 창문 사이에 걸려 있었다. 《사냥꾼》은 흔히 12월과 1월로 본다.

눈 속의 사냥꾼
눈 속의 사냥꾼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미술사 박물관

우리는 눈 덮인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왼쪽 비탈을 따라 사냥꾼 셋이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긴 창을 어깨에 메고 내려가고, 맨 앞 사람의 등에는 비쩍 마른 여우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주위로 사냥개 무리가 터벅터벅 따라가는데, 대부분 머리와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다. 사냥꾼들이 선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까마귀가 앉은 헐벗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하늘에는 까치 한 마리가 홀로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그 아래 얼어붙은 연못 두 곳에서는 아주 작은 검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넘어지고, 굽은 막대로 무언가를 쫓고, 얼음 위로 돌을 미끄러뜨린다. 맨 왼쪽 가장자리에는 여관이 있는데, 사슴이 그려진 간판이 장대에 고리 하나로만 걸려 있어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여관 앞에서는 짚불이 타오르고,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막대로 불을 뒤적인다. 멀리 플랑드르에서는 볼 수 없는 뾰족한 잿빛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흐린 날이어서 빛은 그림자 없이 눈 위에 고르게 퍼져 있다. 2018년 전시를 앞두고 그림을 조사했을 때, 처음 구상에는 맨 앞의 사냥꾼이 없었고 브뤼헐이 이미 다 그린 눈과 나무줄기 위에 그를 덧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566년 용엘링크는 안트베르펜시에 빚을 진 세금 징수 청부인인 친구 다니엘 더브라위너를 위해 1만 6000길더의 보증을 서면서 브뤼헐의 그림 16점을 담보로 잡혔다. 그 가운데에는 《열두 달》, 곧 이 연작과 《바벨탑》도 있었다. 그 뒤 연작은 시의 소유가 되었다. 1594년 안트베르펜은 새로 부임한 네덜란드 총독이자 황제 루돌프 2세의 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대공이 시에 성대하게 입성하자 이 연작을 그에게 바쳤다. 에른스트는 1595년 2월에 죽었고, 그의 유산을 나눌 때 루돌프가 패널들을 가져갔다. 1659년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재산 목록에는 이 패널이 다섯 점 올라 있다.

여섯 점 가운데 세 점, 곧 《눈 속의 사냥꾼》, 《음울한 날》, 《가축 떼의 귀환》이 빈에 있다. 《건초 수확》은 프라하의 로브코비츠 공 가문 컬렉션에, 《추수하는 사람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고, 늦봄을 그린 패널은 이미 17세기에 사라졌다.

눈 속의 사냥꾼
눈 속의 사냥꾼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미술사 박물관
음울한 날
음울한 날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미술사 박물관
가축 떼의 귀환
가축 떼의 귀환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미술사 박물관
건초 수확 (초여름, 6월/7월)
건초 수확 (초여름, 6월/7월)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로프코비츠 궁전
추수하는 사람들
추수하는 사람들대 피터르 브뤼헐, 15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4. 대 피터르 브뤼헐 《농민의 결혼식》, 1568년

네덜란드의 화가 전기 작가 카렐 반 만데르는 브뤼헐이 죽고 35년이 지난 1604년에 그에 관해 썼고, 그의 말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반 만데르에 따르면 브뤼헐은 상인 한스 프랑커르트와 함께 농부 차림을 하고 시골의 결혼식과 장터를 찾아다녔다. 두 사람은 다른 손님들처럼 선물을 들고 가서 친척 행세를 하며, 농부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브뤼헐은 큰 농민 장면을 생애 마지막 몇 해, 안트베르펜에서 브뤼셀로 옮겨 간 뒤에 그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두 점, 《농민의 결혼식》과 《농민의 춤》이 모두 빈에 있다.

결혼 잔치는 헛간에서 열리고, 뒷벽에는 곡식이 들보까지 쌓여 있다. 신부는 안쪽,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에 짙은 초록 천을 등지고 앉아 있고, 머리 위에는 2단으로 된 종이 왕관이 끈에 매달려 있다. 신부는 눈을 거의 감고 두 손을 식탁 위에 모은 채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다. 오른쪽 앞에서는 두 남자가 쟁반 대신 경첩에서 떼어 낸 문짝에 노란 죽 그릇을 가득 얹어 나르고, 문짝 앞쪽 가장자리에는 경첩의 쇠띠가 아직 붙어 있다.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남자의 초록 모자에는 나무 숟가락이 꽂혀 있다. 왼쪽 아래 바닥에는 공작 깃털을 꽂은 커다란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빈 접시를 든 채 앉아 손가락을 핥고 있고, 백파이프 연주자 둘 가운데 하나는 지나가는 음식을 눈으로 좇는다. 패널의 아래쪽 가장자리는 한때 잘려 나갔다가 나중에 좁은 띠를 덧대어 늘렸기 때문에, 바닥이 그려진 그림의 맨 아래는 덧붙인 나무 위에 나중에 그린 것이다.

농민의 결혼식
농민의 결혼식대 피터르 브뤼헐, 1567, 미술사 박물관

박물관은 식탁에 신랑이 없다고 본다. 관습상 신랑은 잔칫상에 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연구자들은 신랑을 찾아내려 하는데, 신부 곁에서 숟가락을 든 젊은이를 지목하기도 하고 맥주를 따르는 남자를 지목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1594년 에른스트 대공이 브뤼셀에서 샀다. 안트베르펜이 그에게 《사계》를 선물한 바로 그해였고, 그림은 나중에 레오폴트 빌헬름의 컬렉션에 기록되어 있다. 박물관은 1568년 작으로 보지만 우리 카탈로그에는 1567년으로 되어 있고, 문헌에는 두 연도가 모두 나온다.

5. 대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1563년

브뤼헐은 탑을 진짜 바위 위에 세웠고, 회색 암석은 오른쪽으로 여러 층에 걸쳐, 그리고 아래층들의 가운데에서 아직도 밖으로 드러나 있다. 아치로 된 층들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꼭대기 바로 아래에서는 작고 흰 구름이 탑을 휘감고 있다. 왼쪽은 이미 밝은 석회암으로 마감되었지만 오른쪽 위에는 마감이 없어서, 붉은 벽돌 벽과 궁륭이 단면도처럼 드러나 있다. 탑 전체가 눈에 띄게 왼쪽, 도시 쪽으로 기울어 있다. 탑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커다란 바퀴가 달린 기중기들이 서 있고, 아치 아래에는 나무 거푸집이 받쳐져 있으며, 층마다 아주 작은 일꾼들이 바글거리고, 오른쪽 발치에는 배와 벽돌 더미가 있는 항구가 펼쳐져 있다.

바벨탑
바벨탑대 피터르 브뤼헐, 1563, 미술사 박물관

왼쪽 아래 언덕에는 전승에서 이 공사를 벌였다고 전하는 왕 니므롯이 서 있다. 왕관을 쓰고, 흰 모피 깃을 단 푸르스름한 회색의 긴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홀을 들었으며, 그림 속 누구보다 크다. 그 앞에는 석공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한 사람은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모자를 땅에 떨어뜨렸다. 서명 “BRVEGEL FE”와 연도의 앞부분은 아래쪽 가장자리에 놓인 큰 돌덩이 앞면에 새겨져 있고, 같은 돌덩이 위에는 나무망치와 끌 세 개가 놓여 있다.

《사계》와 마찬가지로 이 탑도 용엘링크의 것이었고 1566년 그가 담보로 잡힌 그림들 가운데 있었으며, 그 뒤에는 아마 안트베르펜시로 넘어갔을 것이다. 1604년에는 이미 루돌프 2세가 가지고 있었다. 반 만데르가 황실 컬렉션에서 이 그림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는 이 큰 탑은 위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고 썼고, 곁에는 같은 주제의 작은 탑 그림이 걸려 있다고 적었다. 루돌프가 이 그림을 샀는지, 아니면 동생 에른스트의 유산과 함께 물려받았는지 알려 주는 문서는 연구자들이 찾아내지 못했다. 그 뒤 탑은 레오폴트 빌헬름의 컬렉션에 기록되어 있다.

반 만데르가 말한 작은 탑은 세월이 흐르며 합스부르크 컬렉션을 떠났고, 지금은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미술관에 있다. 그 그림에는 니므롯과 수행원들이 없는데, X선 사진을 보면 브뤼헐은 처음에 그 탑을 빈의 탑과 비슷하게 그렸다.

바벨탑
바벨탑대 피터르 브뤼헐, 1563, 미술사 박물관
바벨탑
바벨탑대 피터르 브뤼헐, 1568, 보이만스 반 뵈닝언 미술관

루돌프 2세의 컬렉션 (1585~1608)

삼위일체 경배
삼위일체 경배알브레히트 뒤러, 1511, 미술사 박물관

6. 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일체 경배》(란다우어 제단화), 1511년

뉘른베르크의 상인 마테우스 란다우어는 자기 잘못 없이 가난해진 늙은 수공업자 12명을 위한 집을 세웠고, 1508년까지 그 집에 삼위일체와 모든 성인에게 바친 예배당이 지어졌다. 예배당의 제단화는 뒤러에게 주문되었다. 1508년에 펜과 수채로 그린 그의 밑그림은 액자까지 함께 그려져 있으며, 프랑스 샹티이의 콩데 미술관에 있다. 뒤러는 이 제단화를, 1507년에 막 돌아온 베네치아에서 하던 대로 건축적인 액자에 끼운 한 장의 패널로 구상했다.

맨 위 밝은 광채 속에 흰 비둘기가 떠 있고, 그 아래에서는 금관을 쓰고 금빛 제의를 입은 성부가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의 가로대를 붙들고 있으며, 양옆의 천사들은 그 뒤로 금빛 술이 달린 넓은 초록 휘장을 펼치고 있다. 왼쪽 구름 위에서는 성모가 종려나무 가지를 든 동정녀 성인들을 이끌고, 오른쪽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율법 판을 든 모세와 하프를 든 다윗 왕, 그리고 예언자들을 이끈다. 그 아래 둘째 구름층에는 지상의 교회가 모여 있다. 붉은 옷의 추기경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흰 장갑 낀 손을 어두운 모피 외투 차림의 백발 노인에게 내미는데, 이 노인이 바로 구원받은 이들의 무리에 받아들여지는 란다우어다.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에는 금도금한 갑옷을 입은 젊은이가 서 있는데, 란다우어의 사위 빌헬름 할러다. 하늘의 무리 전체 아래로는 기슭에 도시가 있는 밝은 호수가 펼쳐지고, 오른쪽 아래 구석의 풀밭에는 모피 외투에 붉은 모자를 쓴 뒤러가 혼자 서 있다. 그는 한 손을 명판에 얹고 있는데, 명판에는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동정녀가 아기를 낳은 지 1511년째 되는 해에 이것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조각된 액자는 최후의 심판을 나타내고, 그림은 그 뒤에 오는 것, 곧 삼위일체를 둘러싼 구원받은 이들의 영원한 공동체를 보여 준다.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585년 황제 루돌프 2세는 구빈원 재단에게서 그림을 사서 프라하로 가져갔고, 액자는 예배당에 남겨 두었다. 빈에서는 이 패널을 1880년경에 만든, 위쪽에 같은 최후의 심판이 새겨진 금도금 조각 복제 액자에 끼웠다. 원래 액자는 뉘른베르크의 게르만 국립 박물관에 있고, 그 안에는 그림의 모사본이 끼워져 있다.

유피테르와 이오
유피테르와 이오코레조, 1530, 미술사 박물관

모사본은 1891년 빈의 화가 마리아 쇠프만이 그렸고, 뉘른베르크 박물관에 따르면 그녀는 왼쪽 위 구석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7. 코레조 《유피테르와 이오》, 1530~1532년경

1601년 마드리드 주재 황제 대사 한스 케벤휠러가 루돌프 2세를 위해 이 그림을 사들일 때, 조각가 폼페오 레오니는 그와 흥정하며 황제에게조차 값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레오네 레오니는 에스파냐 왕실의 조각가였고, 1584년 화가이자 저술가인 로마초는 밀라노에 있던 레오네의 집에서 《유피테르와 이오》를 보았다.

코레조는 1530년경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곤차가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고, 이것은 《유피테르의 사랑》 네 점 가운데 하나다. 바사리는 공작이 황제 카를 5세에게 선물하려고 이 연작을 주문했다고 썼고, 박물관은 1532년에 그림이 카를 5세에게 갔을 가능성을 인정한다. 코레조는 1534년에 죽었으므로, 이 연작은 그의 마지막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 유피테르는 님프 이오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땅 위에 짙은 안개를 드리웠고, 코레조는 신을 그대로 안개의 모습으로 그렸다. 높고 좁은 캔버스의 위쪽 절반은 짙은 잿빛 갈색 구름이 차지하고 있다. 이오는 흰 천 위에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으며, 눈은 감겼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다. 그녀의 입술 바로 앞, 구름 속에 놓치기 쉬운 희미한 얼굴이 떠오르고, 구름으로 된 앞발 하나가 그녀의 등과 옆구리에 얹혀 있는데, 이오는 한 손으로 그것을 끌어당긴다. 그림에서 가장 밝은 곳인 흰 천은 날카로운 주름을 지으며 왼쪽 아래로 흘러내린다. 오른쪽 아래 그늘 속에는 하얀 사슴뿔이 보이고 질그릇 항아리가 놓여 있다.

이 구매가 있고 몇 해 뒤, 같은 크기의 짝 그림 《가니메데스의 납치》가 《이오》 곁에 더해졌다. 이 그림은 다른 길로, 실각한 에스파냐 국왕 비서 안토니오 페레스에게서 펠리페 2세를 거쳐 왔고, 루돌프는 1605년에 이것을 손에 넣었다.

연작의 다른 두 점인 《레다》와 《다나에》는 베를린과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다.

유피테르와 이오
유피테르와 이오코레조, 1530, 미술사 박물관
볼록 거울에 비친 자화상
볼록 거울에 비친 자화상파르미자니노, 1523, 미술사 박물관

8. 파르미자니노 《볼록 거울에 비친 자화상》, 1524년경

바사리가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르미자니노라는 별명으로 불린 파르마의 젊은 화가 프란체스코 마촐라는 로마로 떠나기 전에 이발사들이 쓰던 볼록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그는 선반공에게 나무 공을 깎아 거울 크기에 맞춰 반으로 자르게 했고, 볼록한 반쪽 위에 보이는 것을 모두 그렸는데, 거울은 가까운 것을 크게 보이게 하므로 손은 조금 크게 그렸다.

원 한가운데 있는 젊은이의 얼굴은 거의 일그러지지 않았다. 아래 가장자리에는 주름 잡힌 흰 소맷부리에서 나온 커다랗고 창백한 손이 놓여 있는데, 얼굴보다 크고, 아래쪽 손가락의 반지는 몇 번의 빠른 금빛 붓질로만 표시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창살이 있는 창문이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호를 그리며 휘어 있고, 머리 위 천장은 둥글게 말려 들어가며, 오른쪽 맨 가장자리에는 금도금한 둥근 테의 가는 띠가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거울의 테로 보고, 박물관은 이젤에 놓인 그림의 액자로 본다.

1524년 여름, 스물한 살의 파르미자니노는 이 초상을 로마로 가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바쳤다. 그가 기대했던 큰 주문은 이 선물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교황은 초상을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에게 주었고, 바사리는 소년 시절 아레초의 아레티노 집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 뒤 초상은 베네치아의 수정 세공가 발레리오 벨리에게 갔는데, 바사리는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초상은 벨리의 아들에게서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를 거쳐 조각가 알레산드로 비토리아에게 넘어갔고, 비토리아는 1608년 죽음을 앞두고 이것을 황제 루돌프 2세에게 유증했다.

빈에서는 이 초상을 코레조의 작품으로 여겨 황실 보물실에 두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파르미자니노는 코레조에게서 배웠다. 초상이 회화관으로 옮겨진 것은 1777년이 되어서였다.

시장에 나선 대공들 (1648~1662)

9. 다비트 테니르스 2세 《브뤼셀의 미술관에 있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1651년경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높은 검은 모자를 쓰고 브뤼셀 화랑 한가운데에 서서, 긴 지팡이로 바닥에 기대 세워 둔 그림들을 가리키고 있다. 곁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셋 더 있는데, 한 사람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두 손으로 모자를 꼭 쥐고 있다. 뒷벽과 오른쪽 벽에는 바닥부터 천장 들보까지 금박 액자에 든 그림들이 다섯 줄로, 액자와 액자가 맞닿도록 빼곡히 걸려 있고, 바닥 한가운데에서는 희고 붉은 털의 작은 개 두 마리가 막대기 하나를 서로 당기고 있다. 오른쪽에는 거대한 캔버스가 비스듬히 서 있다. 계단과, 동방의 왕 앞에 선 금빛과 흰빛 옷의 여인이 그려진 이 그림은 베로네세의 《아하수에로 앞의 에스더》로, 나중에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으로 갔다.

브뤼셀의 미술관에 있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브뤼셀의 미술관에 있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다비트 테니르스 2세, 1651, 미술사 박물관

다비트 테니르스 2세는 1651년 대공의 궁정 화가가 되어 그의 컬렉션을 관리했다. 박물관은 이 그림 속 레오폴트 빌헬름이 막 사들인 해밀턴 컬렉션의 이탈리아 그림 51점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한다. 그림 속 배치는 일부 지어낸 것이어서, 테니르스는 방의 비례를 바꾸고 그림들을 제 나름대로 늘어놓았다. 그는 이런 화랑 그림을 열 점가량 그렸고, 거의 똑같은 판본 하나가 잉글랜드의 저택 페트워스 하우스에 있다.

벽에는 뒤에서 이야기할 그림 두 점이 걸려 있다. 맨 윗줄 왼쪽 끝에는 바위와 세 인물이 있는 조르조네의 《세 철학자》가 보이고, 왼쪽의 어두운 장 위에는 티치아노가 그린 야코포 스트라다의 초상, 곧 금 사슬을 두르고 흰 조각상을 손에 든 검은 옷의 남자가 걸려 있다. 테니르스는 이 화랑 그림을 대공을 위해 그렸고, 그림은 1685년에는 프라하 회화관에 있었으며 1781년에 빈으로 옮겨졌다.

1660년 테니르스는 대공이 가진 이탈리아 그림 243점을 판화로 옮긴 책 《회화의 극장》을 펴냈다. 판화가들을 위해 그는 그림마다 작은 유화 모사본을 그렸고, 지금은 이 모사본들을 보고 나중에 잘리거나 톱으로 나뉜 그림들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한다.

브뤼셀의 미술관에 있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브뤼셀의 미술관에 있는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다비트 테니르스 2세, 1651, 미술사 박물관

10. 조르조네 《세 철학자》, 1508~1509년경

이 그림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베네치아의 감식가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다. 그는 1525년 부유한 귀족 타데오 콘타리니의 컬렉션을 기록하면서, 풍경을 배경으로 세 철학자를 그린 유화 캔버스가 있는데 두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서 햇살을 바라보며, 바위가 놀랍도록 잘 그려졌다고 적었다. 미키엘에 따르면 이 그림은 조르조네가 시작하고, 훗날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로 불리게 되는 세바스티아노가 마무리했다. 그림을 조르조네와 확실히 연결할 수 있는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이것이 그중 하나다.

캔버스의 왼쪽은 시커먼 동굴 입구가 뚫린, 어둡게 튀어나온 바위가 차지한다. 가운데에는 흰 셔츠에 짙은 초록 망토를 걸친 젊은이가 직각자와 컴퍼스를 손에 들고 앉아 바위를 바라본다. 그 곁에는 흰 터번을 두르고 길고 붉은 카프탄을 입은 남자가 서 있고, 오른쪽에서는 노란빛 금색 망토를 걸친 흰 수염의 노인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는데, 거기에는 초승달이 든 원과 숫자 7이 그려져 있다. 빛은 왼쪽에서 얼굴과 옷 위로 떨어지고, 바위는 그늘 속에 남는다. 멀리 골짜기에는 탑이 있는 잿빛 집들과 물레방아가 있고, 지평선 가까운 하늘은 금빛으로 타오른다.

세 철학자
세 철학자조르조네, 1508, 미술사 박물관

이 세 사람이 누구인지를 두고 몇 세기째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별을 기다리는 동방박사 세 사람으로 불렸고, 1978년 역사학자 살바토레 세티스가 이 해석으로 돌아갔다. 아우구스토 젠틸리는 이들을 모세, 무함마드, 적그리스도로 보자고 제안했다. 카린 첼레니는 앉은 젊은이가 피타고라스이고 다른 두 사람은 그의 스승 페레키데스와 탈레스라고 보며, 박물관은 그녀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그림은 타데오에게서 다리오 콘타리니에게 넘어갔고, 1636년에는 베네치아의 상인이자 수집가인 바르톨로메오 델라 나베의 손에 있었다. 1638년 베네치아 주재 잉글랜드 대사 배질 필딩이 친척인 해밀턴 후작을 위해 델라 나베의 컬렉션을 사들였다. 1649년 국왕 편에 섰던 해밀턴이 처형되자 그의 그림들은 매물로 나왔고, 대부분을 레오폴트 빌헬름이 샀다.

그림이 대공의 브뤼셀 컬렉션에 들어왔을 때, 바위가 있는 왼쪽 가장자리가 크게 잘려 나갔다.

11. 안토넬로 다 메시나 《산 카시아노 제단화》 단편, 1475~1476년

산 카시아노 제단화
산 카시아노 제단화안토넬로 다 메시나, 1475, 미술사 박물관

1476년 3월 16일 베네치아의 귀족 피에트로 본은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에게 편지를 써서 20일쯤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공작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를 초상화가로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화가는 본이 베네치아의 산 카시아노 성당을 위해 주문한 제단화를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본은 이 제단화가 이탈리아 안팎을 통틀어 붓으로 그린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공작에게 장담했다.

안토넬로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플랑드르 회화를 모으고 잘 알던 나폴리에서 유화를 배웠으며, 베네치아에는 1년 반쯤 머물렀다. 박물관은 이 제단화와 함께 유화가 베네치아에 들어왔다고 본다. 원래 이 제단화는 높은 패널로, 교회 실내를 배경으로 성모가 성인 여덟 명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은 모습을 담고 있었다. 1620년 제단화는 톱으로 잘려 조각조각 팔렸고, 가장 좋은 인물 무리들은 따로따로 한 점의 그림이 되어 여러 컬렉션으로 흩어졌다.

단편들은 델라 나베, 이어 해밀턴의 손을 거쳐 1659년 레오폴트 빌헬름의 컬렉션에 기록되었고, 그곳에서는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테니르스는 《회화의 극장》을 위해 이 단편들을 작은 그림으로 모사했고, 나중에 사라진 성인들은 이 모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남은 조각들은 오랫동안 수장고에서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는 채 있다가, 1928년 빈 회화관의 큐레이터 요하네스 빌데가 이들이 한 제단화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보고 하나로 합쳤다.

패널 세 점은 거꾸로 놓인 T자 모양으로 바짝 붙어 있다. 가운데 패널은 높고 양옆 아래의 두 점은 더 낮아서, 옆 패널 위의 모서리는 비어 있다. 푸른 망토에 금빛 브로케이드 옷을 입은 성모는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녀의 오른손에는 손가락에 거의 가려진 채 가는 꼭지가 달린 붉은 버찌가 놓여 있다. 왼쪽에는 대머리에 백발인 성 니콜라오가 주교관 없이 서서 흰 장갑 낀 손으로 금빛 공 세 개가 놓인 책을 들고 있고, 그 곁에서 옆얼굴이 엄격한 여성 성인이 펼친 손바닥 위에 투명한 유리잔을 올려 들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성 도미니코가 눈을 내리깔고 있고, 패널 맨 가장자리에는 또 다른 얼굴 하나가 좁게 잘린 채 남아 있다.

빌데는 건축 구조와 사라진 성인들까지 담은 완전한 복원안을 1929년 종이 위에 발표했고, 패널들은 덧그린 부분 없이 남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산 카시아노 제단화
산 카시아노 제단화안토넬로 다 메시나, 1475, 미술사 박물관

12. 티치아노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1543년

티치아노는 이 거대한 장면을 1543년 베네치아 사람 조반니 다나를 위해 그렸는데, 바사리는 다나를 티치아노와 대부 관계로 맺어진 사이라고 적었다. 1620년경 잉글랜드 대사 헨리 워턴이 다나의 상속인들에게서 이 그림을 사서 버킹엄 공작에게 보냈다. 그림은 곧 유명해졌다. 후대의 이야기에 따르면 애런들 백작이 버킹엄에게 이 그림 값으로 7000파운드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리스도는 왼쪽 위 구석, 넓은 계단 위의 돌 단으로 밀려나 있고, 가시관을 쓰고 손이 묶인 채 거의 벌거벗고 서 있다. 그 곁에서 옅은 하늘색의 로마식 갑옷을 입고 리본 달린 선명한 하늘색 장화를 신은 빌라도가 온몸과 두 손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얼굴은 군중 쪽으로 돌리고 있다. 오래된 전통에 따르면 빌라도의 얼굴은 티치아노의 친구인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를 본뜬 것이다. 군중은 오른쪽 계단을 올라온다. 왼쪽 아래에서는 겁에 질린 젊은이가 개를 끌어안고 있고, 그 곁에서 초록 비늘 갑옷을 입은 병사가 등을 돌린 채 검은 쌍두독수리가 그려진 방패에 기대어 있으며, 가운데에서는 흰 공단 옷의 소녀가 환하게 빛난다. 아무 근거도 없는 전설은 이 소녀를 티치아노의 딸 라비니아로 여긴다. 아래쪽 계단에 놓인 말린 종이쪽지에는 “TITIANVS EQVES CES F 1543”이라는 서명이 있는데, ‘황제의 기사 티치아노’라는 뜻이다. 1533년 황제 카를 5세가 자신의 궁정 화가인 티치아노를 기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티치아노, 1543, 미술사 박물관
야코포 스트라다의 초상
야코포 스트라다의 초상티치아노, 1567, 미술사 박물관

버킹엄은 1628년에 암살되었고, 내전 시기에 그의 컬렉션이 압류되자 상속인들은 그 대부분을 네덜란드로 옮겨 안트베르펜에서 팔았다. 1649년 《이 사람을 보라》는 황실 컬렉션을 위해 팔려 나갔는데,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프라하성에 있던 황제의 회화관을 위해서였다. 당시 프라하 회화관은 새로 채워지고 있었다. 1648년 여름 스웨덴 군대가 프라하성을 점령하고 루돌프 2세의 컬렉션을 스톡홀름으로 실어 갔기 때문이다.

그림은 1723년에 빈으로 옮겨졌다.

13. 티치아노 《야코포 스트라다의 초상》, 1567~1568년

야코포 스트라다는 고미술품을 거래하며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그것들을 사들였고, 황실 고미술 담당관이라는 칭호를 지녔다. 1567~1568년 그가 또 한 번 물건을 사러 베네치아에 왔을 때 티치아노가 그를 그렸다. 스트라다는 탁자 너머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작고 흰 대리석 비너스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데, 한 손으로는 가슴께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다리를 받치고 있으며, 고개는 반대쪽으로 돌려 보는 사람을 비켜 오른쪽을 바라본다. 박물관은 손과 머리가 서로 반대로 움직이는 이 구도를 티치아노의 초상화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 본다. 탁자 위에는 은화와 동화, 접힌 편지, 대리석 토르소 조각이 놓여 있고, 스트라다의 어깨에는 털이 긴 회색 모피가, 가슴에는 메달이 달린 묵직한 금 사슬이 여러 겹 걸려 있다.

남자의 초상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
남자의 초상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얀 반 에이크, 1431, 미술사 박물관

티치아노는 여든 살쯤이었다. 그는 더는 여행하지 않았고, 그의 작업장은 거장의 신화화를 되풀이해 그려 팔았으며, 그는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살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 초상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주로 스트라다의 경쟁자였던 상인 니콜로 스토피오의 편지로 알려져 있다. 스토피오는 마침 베네치아의 로레단 고미술 컬렉션을 사들이는 일에서 스트라다에게 밀린 참이었으므로, 그의 말은 가려서 들어야 한다. 스토피오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 가문인 푸거가의 한 사람에게, 스트라다가 티치아노 작업장에서 되풀이해 그린 신화화들을 거장의 작품이라며 황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넘기기로 했고, 그 대가로 티치아노는 그의 초상을 그려 주고 그에게서 모피를 받는다고 썼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스트라다에 대한 티치아노의 평도 전하는데, 티치아노가 그를 세상에서 가장 거만한 무식쟁이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이 이 초상을 어디서 얻었는지 연구자들은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컬렉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테니르스가 브뤼셀 화랑의 장 위에 이 초상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위 구석에는 스트라다를 로마 시민이자 황실 고미술 담당관이라고 적은 카르투슈가 있는데, 그 모양이 지나치게 바로크풍으로 보여서 한때는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이 견해에 반대한다.

14. 얀 반 에이크 《남자의 초상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 1435년경

이 초상의 노인은 300년 넘게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으로 불려 왔지만, 그렇게 볼 증거는 없다. 이 이름은 17세기에,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이 안트베르펜의 상인 피터르 스테번스에게서 이 패널을 샀을 때 처음 나타난다.

노인은 가슴까지, 손 없이 4분의 3 측면으로 그려졌고, 얼굴은 왼쪽을 향하며 갈색 눈은 그보다 더 왼쪽, 우리를 비켜 간 곳을 본다. 빛은 왼쪽 위에서 들어와 이마와 얼굴 왼쪽 절반을 비추고, 오른쪽 뺨과 목은 부드러운 그늘 속으로 물러난다. 반 에이크는 눈가의 주름 하나하나, 눈 밑의 처진 살, 큼직한 귀, 턱의 흰 수염 그루터기까지 세밀하게 그렸고, 모피 깃이 달린 붉은 옷은 넓은 주름으로 처리했다. 아래쪽 왼편과 오른편으로 옷에 높고 뾰족한 트임이 두 개 나 있고, 그 사이로 밝은 모피 안감이 보인다.

알베르가티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의심을 받아 왔다. 알베르가티는 카르투시오회 수도사였으니 삭발을 했을 텐데, 노인은 짧은 백발에 세속의 옷을 입고 있다. 1990년 맬컴 베일은 이 노인을 잉글랜드의 추기경 헨리 보퍼트로 보자고 제안했고, 역사학자 존 헌터는 그가 추기경이기는 한지부터 의심하며, 박물관은 제목에 물음표를 남겨 둔다. 날짜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카탈로그에는 옛 설에서 알베르가티가 브뤼헤를 지나갔다고 하는 1431년으로 되어 있고, 박물관은 아라스 평화 회의가 열린 1435년경, 또는 물음표를 붙인 1438년을 제시한다. 18세기에 이 패널은 타원형으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다시 직사각형으로 돌아왔다.

은필로 그린 준비 소묘는 드레스덴에 있는데, 반 에이크는 얼굴 곁에 자신의 고향 말인 마스 지방 방언으로 노인의 머리카락과 입술, 턱수염 그루터기가 어떤 색인지 적어 두었다.

남자의 초상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
남자의 초상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얀 반 에이크, 1431, 미술사 박물관
남자의 초상을 위한 습작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
남자의 초상을 위한 습작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얀 반 에이크, 드레스덴 판화·소묘관

15. 미카엘리나 바우티르 《바쿠스의 승리》, 1659년 이전

1903년 빈 박물관의 플랑드르 회화 큐레이터 구스타프 글뤽은 옛 재산 목록에서 《바쿠스의 승리》를 그린 사람이 Woutiers라는 성을 가진 누군가라는 기록을 읽었지만, 그 기록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성 해방의 시대라 해도 이토록 힘차고 거의 거칠기까지 한 화풍의 그림을 감히 여성의 손에 돌리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썼다.

1659년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재산 목록에는 이 그림이 이름 없이 Woutiers라는 성 하나로만 적혀 있다. 몽스 출신의 미카엘리나 바우티르는 남동생 샤를과 함께 브뤼셀에서 일했고, 브뤼셀에 머물던 총독인 대공은 그녀의 그림을 네 점 가지고 있었다. 세 세기 동안 《승리》는 루벤스 화파의 작품으로, 또는 루카 조르다노나 코르넬리스 스휘트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1763년 프라하성에 있던 이 그림은 한 전시실에 맞추느라 폭이 잘렸다.

근육질에 육중한 바쿠스는 얼룩덜룩한 표범 가죽을 깐 길쭉한 나무 손수레 위에 늘어지게 누워 있다. 작은 뿔이 난 젊은 사티로스가 그의 벌린 입에 초록 포도송이를 짜 넣고, 염소 다리를 한 검은 수염의 사티로스는 히죽 웃으며 손수레 손잡이를 밀고, 왼쪽에서는 가무잡잡한 나팔수가 긴 금빛 나팔을 불며, 그 뒤에서 노인이 밧줄로 손수레를 끈다. 오른쪽에는 분홍 옷을 입은 금발 여인이 왼쪽 가슴을 드러낸 채 포도 덩굴을 감은 티르소스 지팡이를 들고 서서, 차분하게 우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박물관은 이 여인을 화가의 자화상으로 본다. 그녀의 발치에서는 곱슬머리 아이가 검고 흰 염소를 끌어안고 있다.

바쿠스의 승리
바쿠스의 승리미카엘리나 바우티르, 1655, 미술사 박물관
초원의 마돈나
초원의 마돈나라파엘로, 1505, 미술사 박물관

1967년 박물관 큐레이터 귄터 하인츠는 같은 컬렉션에 있는, 그녀의 서명이 든 《성 요아킴》과 《성 요셉》과 화풍을 비교해 이 그림을 다시 미카엘리나 바우티르의 작품으로 돌려놓았다.

16. 라파엘로 《초원의 마돈나》(마돈나 델 프라토), 1505~1506년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귀족 타데오 타데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식탁에서 식사를 했고, 나중에 예의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그를 위해 그림 두 점을 그렸다. 바사리는 이 그림들에 스승 페루지노에게서 익힌 첫 화풍이 아직 남아 있고, 피렌체에서 배운 새 화풍도 이미 보인다고 말한다. 라파엘로는 1504년 말 피렌체에 왔고, 인물들을 삼각형으로 짜는 구성을 레오나르도에게서 받아들였다.

성모는 풀밭에 바로 낮게 앉아 있고, 그녀의 머리가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며, 밑변의 두 모서리는 왼쪽에 무릎 꿇은 어린 세례자 요한과 오른쪽의 그녀의 맨발이 이룬다. 요한은 두 손으로 가는 갈대 십자가를 붙잡고, 아기 그리스도는 한 걸음 내디디며 가로대 조금 아래를 쥔다. 마리아는 아들의 가슴과 옆구리를 붙들어 준다. 오른쪽 아래, 그녀의 발밑에는 빨간 열매가 달린 딸기가 자라고, 왼쪽 요한의 무릎 곁에는 데이지가 하얗게 피어 있으며, 그보다 오른쪽, 그리스도의 머리 높이에는 붉은 양귀비가 타오른다. 그녀의 빨간 옷 목둘레 가선에는 금빛으로 글자가 무늬와 뒤섞여 적혀 있는데, 가운데에 “M.D.V.”가 읽히고 그 뒤에 작은 동그라미와 세로 획 하나가 더 있다. 그래서 날짜는 1505년으로도 1506년으로도 읽히며, 우리 카탈로그에는 1505년으로 되어 있다.

그림은 타데이의 상속인들에게 남아 있다가 1662년 티롤의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그 가문에게서 샀다. 1663년부터 암브라스성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773년 빈으로 옮겨져 벨베데레에 걸렸는데, 여기서 《벨베데레의 마돈나》라는 두 번째 이름이 생겼다.

2017년 빈의 그래픽 미술관인 알베르티나에서 라파엘로 전시가 열렸을 때, 박물관은 그림을 옮기지 않으려고 대여하지 않았고, 이 그림을 위한 준비 소묘들 곁에는 작은 복제화가 걸렸다.

가족에게 보낸 초상화 (1659, 1779)

17. 디에고 벨라스케스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1659년

1659년 11월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피레네 조약을 맺었고, 펠리페 4세의 맏딸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루이 14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2년 전 왕에게는 아들이 태어났으므로,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혼인에는 여덟 살 난 작은딸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남아 있었다. 빈에서는 1658년부터 황제였던 그녀의 삼촌 레오폴트 1세가 다스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신붓감으로 점찍혀 있었지만 약혼은 1663년에야 발표되었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디에고 벨라스케스, 1659, 미술사 박물관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의 초상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의 초상디에고 벨라스케스, 1659, 미술사 박물관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파란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디에고 벨라스케스, 1659, 미술사 박물관

1659년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 두 점, 곧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과 어린 남동생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을 빈 궁정에 선물로 보냈다. 빈에서 소녀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이 두 점을 1660년 8월에 세상을 떠난 벨라스케스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그림으로 본다.

공주는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고, 버팀살을 넣은 치마는 캔버스 폭을 거의 다 채울 만큼 퍼져 있다. 파란 비단에는 은빛 장식끈이 둘러져 있고, 치마에는 가로줄이 이어지며, 몸판에는 굵은 금 사슬이 비스듬히 걸쳐 있고, 머리에는 짙은 초록 리본이 달려 있으며, 왼손은 커다란 갈색 모피 토시 위에 얹혀 있다. 은과 레이스와 모피는 도톰하게 올라온 붓질 하나하나로 그려져 있어서, 가까이에서는 그저 붓질로 남아 있다가 멀리서 보아야 비로소 천과 금속이 된다. 반면 얼굴은 매끄럽게 칠해져 있다. 이 소녀는 1656년 작 《시녀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바로 그 소녀이고, 그때보다 세 살 더 자랐다.

초상화는 황실 거처에 걸려 있었고, 1855년에는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방에 있었다. 18세기에 캔버스 윗부분이 반원형으로 잘렸는데, 1922년 그림이 호프부르크에서 박물관으로 넘어온 뒤 다시 직사각형으로 돌아왔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66년 12월 빈에 와서 레오폴트와 결혼했고, 1673년에 스물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6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녀는 아이 넷을 낳았다.

궁정 예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예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1778, 미술사 박물관

18.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궁정 예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78년

1778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인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선물할 큰 공식 초상화를 주문하면서, 그 일을 위해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을 베르사유로 불렀다. 화가는 스물세 살로 왕비와 거의 동갑이었고, 이것이 그녀가 그린 첫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이었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녀는 왕비를 서른 번가량 그렸고, 1783년에는 왕비 덕분에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비제 르브룅은 회고록에서, 왕비의 피부는 너무 투명해서 그림자가 깃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을 원하는 만큼 옮겨 그릴 수 없었다고 썼다.

왕비는 실물 크기의 전신으로, 아주 넓은 파니에를 넣은 흰 공단 궁정 예복 차림으로 서 있다. 옷에는 꽃줄 장식과 리본, 금빛 술이 달려 있고, 머리는 흰 타조 깃털을 꽂아 높이 올린 분 바른 머리다. 아래로 내린 오른손에는 분홍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고,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얼굴과 어깨, 공단 위에 내려앉는다. 오른쪽에는 붉은 벨벳을 덮은 탁자 위, 금빛 백합이 수놓인 연보랏빛 하늘색 쿠션에 프랑스 왕관이 놓여 있고, 그 위쪽 높은 받침대에는 루이 16세의 옆얼굴을 담은 청동 흉상이 서 있다.

1779년 2월 초상화는 빈으로 보내졌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보낸 답장에서 큰 초상화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는 초상화를 호프부르크에 두었고, 초상화는 1922년 호프부르크에서 박물관으로 넘겨졌다. 반세기 뒤에 쓴 회고록에서 비제 르브룅은 왕비가 처음 모델로 앉은 때를 1779년으로 적고, 초상화가 왕비의 오빠인 황제 요제프 2세를 위한 것이었다고 썼다.

캔버스의 서명 “Peint par Mde le Brun âgée de 22 ans, en 1780”, 곧 ‘르브룅 부인이 스물두 살 때인 1780년에 그림’은 박물관에 따르면 나중에 덧붙인 것이고, 연도와 나이가 모두 틀렸다.

18세기의 황실 회화관 (1720~1786)

자화상
자화상렘브란트, 1652, 미술사 박물관

19. 렘브란트 《큰 자화상》, 1652년

렘브란트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우리 바로 앞에 서 있고, 팔꿈치가 캔버스 양쪽 가장자리에 거의 닿는다. 그는 아무렇게나 묶은 밝은 띠를 두른 헐렁한 갈색 겉옷을 입고, 크고 부드러운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다. 박물관은 이것이 그가 작업실에서 일할 때 입던 바로 그 겉옷일 수도 있다고 본다. 빛은 왼쪽 위에서 얼굴로 떨어진다. 이마에는 가로 주름이 패어 있고, 눈썹은 올라가 있으며, 코와 뺨은 불그스름하고, 눈 밑은 처져 있다. 얼굴은 다른 어느 부분보다 자세히 그려졌고, 겉옷과 따뜻한 갈색 배경은 넓고 고르게 칠해져 있다. 캔버스는 양쪽이 잘려 나갔고, 박물관에 따르면 왼쪽 위 구석의 서명은 “…dt.f.1652”만 남았다.

이것은 1645년 이후 그가 처음 그린 유화 자화상이며, 거의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후기 자화상 연작의 시작이다. 같은 무렵 렘브란트의 형편은 점점 나빠졌다. 1656년 그는 파산을 신청했고, 이어 그의 재산과 컬렉션이 경매로 팔려 나갔다. 박물관에 따르면 당시 네덜란드에는 ‘자화상’이라는 말이 없었고, 사는 사람들은 렘브란트가 직접 그린 렘브란트의 초상을 찾았다. 그의 얼굴과 함께 그의 그림 솜씨를 보여 주는 견본을 원한 것이다.

그림이 어떻게 빈에 왔는지 밝힌 문서는 하나도 없다. 박물관이 말할 수 있는 것은 1720년에 이미 이 그림이 황실 회화관 목록에 올라 있었다는 것뿐이다.

20.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작은 모피》(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 1636~1638년경

1640년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루벤스는 그림 한 점을 재산 분할과 매각에서 빼고 아내 헬레나 푸르망에게 따로 남기면서, 유언장에서 그것을 ‘작은 모피’, 곧 het pelsken이라고 불렀다.

루벤스는 1630년 12월에 헬레나와 결혼했다. 그는 쉰세 살로 아내를 잃은 지 4년째였고, 그녀는 열여섯 살로 안트베르펜 비단 상인의 딸이자 그의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의 조카였다. 결혼 한 해 전 루벤스는 외교 임무를 띠고 런던에 머물며 찰스 1세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왕실 컬렉션에서 티치아노의 《모피를 두른 소녀》를 모사했는데, 이 그림도 지금은 이 박물관에 있다. 1630년대에 그는 외교에서 거의 손을 떼고 헬레나를 많이 그렸는데, 그녀를 그녀 자신의 모습으로 그린 누드 초상은 《작은 모피》 하나뿐이다. 루벤스는 1640년 5월 30일 안트베르펜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
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8, 미술사 박물관
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
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8, 미술사 박물관
모피를 두른 소녀
모피를 두른 소녀티치아노, 1535, 미술사 박물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7, 미술사 박물관

헬레나는 실물 크기의 전신으로, 붉은 양탄자 위에 맨발로 서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가리고 왼손으로는 흰 천을 배에 대고 누르고 있어, 고대 조각의 정숙한 비너스를 닮았다. 갈색 모피를 댄 검은 외투는 그녀의 등을 덮고 왼쪽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몸의 앞쪽은 온전히 드러나 있다. 루벤스는 무릎의 보조개와 손 아래 배의 주름까지 그렸고, 따뜻한 분홍빛 살갗은 검정과 갈색을 배경으로 환하게 빛난다.

1645년 헬레나는 재혼했고, 1658년 자신의 유언장에서 이 그림을 기념으로 두 번째 남편에게 남겼다가, 나중에 유언에 덧붙여 《작은 모피》를 첫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 곧 루벤스의 자녀들에게 넘기도록 했다. 1730년에는 이 그림이 빈의 황실 회화관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014년 이 그림을 X선 형광 분석으로 조사했더니, 오른쪽 어두운 배경 아래에서 벽감 속 분수가 나타났다. 분수는 헬레나의 어깨 높이까지 오고, 사자 머리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며, 받침대 위에는 오줌 누는 돌 소년상이 서 있었다. 이런 분수는 정원에 두었으므로, 루벤스는 처음에 아내를 바깥에 있는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가 나중에 직접 분수를 덮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21.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1617~1618년경

1773년 교황이 예수회를 해산했고, 당시 오스트리아령이던 남네덜란드에서는 예수회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갔다. 1615~1621년에 지은 안트베르펜의 예수회 성당에는 루벤스의 큰 제단화 두 점, 곧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그린 것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그린 것이 있었고, 성당에서는 교회력에 따라 밧줄과 도르래로 두 그림을 중앙 제단에 번갈아 걸었다. 1718년 벼락이 떨어져 루벤스의 밑그림에 따라 그린 천장화 39점이 불탔지만, 제단화들은 무사했다. 1776년 두 제단화는 빈으로 가져가기 위해 팔렸다.

캔버스는 사람 키의 세 배가 넘고, 성당 저편에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졌다. 예수회 초기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와 일본에서 선교했고, 루벤스가 그를 그릴 때는 아직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1619년에 시복되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하비에르는 오른쪽 돌 단 위에 서서 한 손으로 위를 가리키고, 다른 손은 군중에게 내민다. 오른쪽 위 구름 위에는 성작과 지구의를 든 ‘신앙’이 앉아 있고, 십자가를 든 천사들에게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왼쪽 위의 이교 우상을 내리쳐, 입을 쩍 벌린 뿔 달린 우상이 쪼개지며 떨어진다. 아래에서는 죽은 사람이 짚으로 엮은 들것에서 일어나 앉으며 머리에서 수의를 벗겨 내고, 한 여자는 얼굴이 아래로 향한 아기를 팔에 안고 있는데 아기의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며, 오른쪽에서는 눈먼 사람이 두 팔을 앞으로 뻗고 걸어 나온다. 구경꾼들 사이에는 노란 겉옷을 입고 높고 투명한 원뿔 모자를 쓴 남자가 서 있다. 루벤스는 이 남자를 따로 소묘로도 그렸는데, 이 소묘는 오랫동안 조선 사람의 초상으로 여겨졌고, 2016년 연구자들은 그를 1600년 미델뷔르흐에 배를 타고 온 중국 상인 이퐁으로 보자고 제안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캔버스의 대부분은 조수들이 그렸고, 중요한 부분은 루벤스가 직접 손보았다. 이 박물관에는 참나무 패널에 유화로 그린 작은 스케치도 있는데, 거기에서는 물에 빠진 아기 장면이 아직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7, 미술사 박물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모델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모델로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6, 미술사 박물관
로사리오의 성모
로사리오의 성모카라바조, 1607, 미술사 박물관

1776년 예수회에서 제단화들을 살 때, 1665년 화가 헤링이 그린 그들의 성당 그림도 함께 샀다. 그 그림 속 중앙 제단 위에는 루벤스의 성 이냐시오 제단화가 걸려 있다.

22. 카라바조 《로사리오의 성모》, 1601~1607년경

만토바 공작 빈첸초 곤차가의 궁정 화가였던 플랑드르 화가 프란스 푸르뷔스 2세는 1607년 나폴리에서 공작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아주 아름다운 그림 두 점이 팔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하나는 묵주를 그린 그림이라고 알렸다. 그 그림 값으로 400두카트를 불렀고, 공작은 사지 않았다. 그림은 플랑드르의 화가이자 상인인 루이 핀손과 아브라함 빙크가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주문자는 그림 속에 있는데도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왼쪽 아래, 크고 흰 주름 깃을 단 검은 옷의 대머리 백발 남자가 우리를 바라보며 성 도미니코의 망토 자락을 붙잡고 있다. 역사가들은 제작 시기도 다르게 보아, 어떤 이들은 카라바조의 로마 시절인 1601년경으로, 다른 이들은 나폴리 시절인 1607년으로 본다.

위쪽 전체를 가로질러 거대한 진홍빛 휘장이 드리워 있고, 휘장은 왼쪽에서 높은 기둥에 감겨 묶여 있다. 무릎에 아기를 앉힌 성모는 아래쪽의 도미니코를 가리키고, 도미니코가 펼친 손바닥에서는 묵주가 늘어져 있으며, 무릎 꿇은 가난한 사람들의 손이 그 묵주를 향해 뻗어 있다. 오른쪽에서는 이마 머리털 바로 아래에 피 흐르는 상처가 난 순교자 성 베드로가 우리를 똑바로 보며 아기를 가리킨다. 가운데 아래에는 녹슨 갈색 망토를 입은 남자가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무릎을 꿇고 있고, 그의 더러운 맨발 발바닥이 보는 사람 쪽을 향해 있다.

핀손은 그림을 북쪽으로 가져갔고 1617년 암스테르담에서 죽었다. 그곳에서 루벤스를 비롯한 안트베르펜의 화가와 미술 애호가 몇 사람이 1800길더에 이 그림을 사서 안트베르펜의 도미니코회 성 바오로 성당에 기증했다. 1651년의 기록에 따르면, 그 뒤 수도사들은 이 그림 값으로 4000길더, 6000길더, 마침내 1만 3000~1만 4000길더까지 제안받았지만, 그림은 어떤 돈으로도 팔지 않는다고 답했다.

1781년 황제 요제프 2세가 이 성당을 찾았고, 수도사들은 그에게 그림을 넘겨주었다. 도미니코회에는 황제가 비용을 대어 안트베르펜 아카데미 원장 안드레아스 베르나르두스 더크베르텐몬트가 그린 모사본이 남았고, 원작은 1786년 빈으로 옮겨졌다.

국가가 지은 컬렉션의 집 (1822~1891)

23. 안토니오 카노바 《켄타우로스를 무찌르는 테세우스》, 1804~1819년

테세우스와 켄타우로스
테세우스와 켄타우로스안토니오 카노바, 1815, 미술사 박물관

테세우스는 왼손으로 켄타우로스의 목과 수염을 움켜쥐고, 사람의 몸이 말의 몸으로 바뀌는 등 부분을 무릎으로 내리누르며, 오른손으로는 울퉁불퉁한 곤봉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는데 아직 내리치지는 않았다. 그가 걸친 것은 볏 달린 그리스 투구와, 왼쪽 어깨에서 바위까지 긴 주름을 지으며 늘어진 망토뿐이다. 켄타우로스는 땅에 주저앉아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뒤로 젖혔고, 한 손으로는 테세우스의 팔뚝을 움켜쥐고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는 돌을 긁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페이리토오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켄타우로스들이 술에 취해 신부를 데려가려 했고, 신랑의 친구 테세우스가 그 가운데 하나를 죽였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공화국은 1804년, 나폴레옹과 1800년 마렝고에서 그가 오스트리아에 거둔 승리를 기리려고 밀라노를 위해 이 조각을 주문했다. 사람 키의 두 배인 이 군상은 도시 광장에 세울 기념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리석 덩어리는 1810년 로마에 있던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업장에 도착했고, 1814년에는 군상이 거의 완성되었지만, 그 무렵 나폴레옹은 이미 몰락한 뒤였다. 카노바는 살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1817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가 놓을 자리는 자신이 정한다는 조건으로 값의 마지막 4분의 1을 치르기로 했다.

궁정 건축가 페터 폰 노빌레는 이 군상을 위해 빈의 폴크스가르텐에 아테네의 테세우스 신전을 축소해 본뜬 신전을 지었고, 신전은 1823년에 문을 열었다. 카노바는 그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승리를 기리려던 기념비를 빈에서는 혁명에 맞선 정당한 질서의 승리로 해석했다. 1890년 군상은 새 박물관으로 옮겨져 중앙 계단의 층계참에 놓였다.

테세우스와 켄타우로스
테세우스와 켄타우로스안토니오 카노바, 1815, 미술사 박물관

옮기는 도중 테세우스의 오른팔이 부러졌고, 박물관 건물 공사에 참여한 조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하네스 벵크가 이를 무료로 고쳤다.

24. 구스타프 클림트, 에른스트 클림트, 프란츠 마치의 중앙 계단 벽화, 1890~1891년

1890년 2월, 젊은 화가들의 모임인 ‘예술가 컴퍼니’, 곧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른스트 클림트, 프란츠 마치는 새 박물관 중앙 계단에 남은 마지막 회화 칸 40개를 맡았다. 원래는 한스 마카르트가 계단 전체를 그릴 예정이었지만, 그는 반달 벽면만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천장화를 맡았던 한스 카논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미하이 문카치의 천장화와 마카르트의 반달 벽면 아래에 가장 젊은 벽화 층이 하나 더 생겼다.

프로그램은 박물관 큐레이터 알베르트 일크가 짰다.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바로크까지 이르는 미술의 역사를 담고, 그림마다 황실 컬렉션의 소장품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스물여덟 살의 구스타프는 북쪽 벽과 서쪽 벽의 첫 아치, 모두 13칸을 맡았다. 그는 이집트를 책에 의지해 그렸는데, 무엇보다 프랑스 이집트학자 마리에트의 흑백 사진첩을 참고했으므로, 청록과 빨강, 금빛 색채는 그가 스스로 지어낸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이집트구스타프 클림트, 1891, 미술사 박물관

좁고 높은 《이집트》 칸에는 젊은 벌거벗은 여인이 우리를 향해 똑바로 서 있다. 옆으로 뻗은 손으로 이집트의 생명의 상징인 흰 앙크의 아래쪽 끝을 쥐고 있고, 머리에는 가는 금실이 섞인 묵직한 검은 이집트식 가발을 썼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오늘날의 사람 같으며, 검은 눈은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의 어깨 뒤로는 네크베트 여신의 새인 독수리가 청록, 금빛, 검정, 빨강 깃털을 층층이 펼친 날개를 벌리고 있고, 왼쪽 위 날개 끝 위에는 “GVSTAV KLIMT”라는 서명이 있다. 이웃한 칸에서는 금빛 비늘의 아이기스를 두른 진홍빛 옷의 아테나가 긴 창과 작고 어두운 니케 조각상을 들고 있다.

2012년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맞아 4층 건물 높이의 계단 공간 위로 강철 다리를 걸쳤고, 관람객들은 처음으로 이 그림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2018년에 다리가 다시 설치되었다.

제국이 끝난 뒤 (1940~2011)

회화의 예술
회화의 예술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7, 미술사 박물관

25. 얀 페르메이르 《회화의 예술》, 1666~1668년경

1676년 2월, 얀 페르메이르가 죽고 두 달 뒤, 그의 미망인 카타리나 볼네스는 재산 목록을 작성하기 며칠 전에 《회화의 예술》을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 틴스에게 넘겼다. 페르메이르는 델프트에서 빚을 진 채 죽었고, 그림을 채권자들에게서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 현미경으로 이름난 박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파산한 유산의 관리인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그림을 가져갔고, 마리아 틴스가 항의했지만, 1677년 3월 15일 그림은 델프트의 성 루가 길드에서 경매로 팔렸다. 산 사람의 이름은 문서에 남아 있지 않다.

왼쪽의 무거운 태피스트리 커튼이 걷혀 있고, 그 뒤로 작업실이 열린다. 화가는 검은 베레모를 쓰고, 트임 사이로 흰 천이 보이는 검은 윗옷을 입고, 빨간 스타킹을 신은 채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서, 그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캔버스에는 아직 모델이 쓴 월계관의 푸른 잎들만 그려져 있다. 모델은 역사의 뮤즈 클리오의 모습으로 창가에 서서 월계관을 쓰고, 긴 놋쇠 나팔과 두꺼운 노란 책을 든 채 눈을 내리깔고 있다. 뒷벽에는 17개 주, 곧 분열되기 전의 네덜란드를 그린 큰 지도가 걸려 있는데, 구겨져 있고 한가운데에 세로로 접힌 자국이 있다. 천장에는 쌍두독수리를 얹은, 초가 꽂히지 않은 놋쇠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그림의 다음 주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외교관이자 궁정 도서관장이던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으로, 18세기 말 빈에 살았는데, 그림이 어떻게 그에게 갔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설명이 엇갈린다. 19세기 초 요한 루돌프 체르닌 백작이 그의 유산에서 이 그림을 피터르 더호흐의 작품으로 알고 샀고, 1860년경 감식가 토레뷔르거와 구스타프 바겐이 다시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돌려놓았다. 1940년 야로미르 체르닌은 린츠에 세우려던 미술관을 위해 이 그림을 165만 라이히스마르크에 히틀러에게 팔았다. 나중에 체르닌의 상속인들은 강요된 매각이었다고 주장했다. 2011년 오스트리아의 반환 자문위원회는 이 매각을 강제된 것으로 볼 근거가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1945년 미군이 알타우스제의 소금 광산에서 그림을 찾아냈고, 그해 11월 오스트리아에 넘겼으며, 1946년에 그림은 박물관에 들어왔다.

회화의 예술
회화의 예술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67, 미술사 박물관

이 목록에 들지 않은 작품들

우리는 빈 컬렉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물과 구매에서 제국이 끝난 뒤의 취득까지 따라가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골랐다. 그 가운데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루벤스의 《작은 모피》 두 점은 그 길의 일부가 사라졌다. 목록 밖에는 브뤼헐의 《아이들의 놀이》와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홀바인이 그린 제인 시모어의 초상, 그리고 루벤스가 자신의 《작은 모피》를 그릴 때 본보기로 삼은 티치아노의 《모피를 두른 소녀》가 남았다. 박물관을 두 번째로 찾는다면 쿤스트카머부터 보는 것이 좋다. 그곳에는 첼리니의 소금 그릇 말고도 크루믈로프의 성모와, 샤를 9세가 소금 그릇과 함께 선물한 용기들이 있다. 고대 컬렉션에는 루돌프 2세가 1만 2000두카트를 치른 카메오 《젬마 아우구스테아》가 있다.

아이들의 놀이
아이들의 놀이대 피터르 브뤼헐, 1560, 미술사 박물관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대 피터르 브뤼헐, 1559, 미술사 박물관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카라바조, 1607, 미술사 박물관
제인 시모어
제인 시모어소 한스 홀바인, 1536, 미술사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