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크스미술관의 작품에는 저마다 소장 번호가 있는데, 렘브란트 《야경》의 번호는 ‘에스케이시’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마지막 글자 ‘시’는 이 그림이 암스테르담시의 소유이고 미술관에는 맡겨져 있을 뿐이라는 뜻이며, 그렇게 맡겨진 것은 건축가 피에르 카위퍼르스가 지은 지금의 건물이 문을 연 1885년부터다. 같은 글자로 시작하는 번호는 시가 이미 1808년에 미술관으로 넘긴 렘브란트의 《포목상 길드의 평의원들》에도, 그리고 1854년에 죽은 은행가 아드리안 판 데르 후프가 암스테르담시에 유증한 그림들에도 붙어 있다. 번호에 ‘에이’라는 글자가 붙은 그림은 국가의 소유다.
레이크스미술관의 뿌리인 국립 미술 갤러리는 바타비아 공화국 시절인 1800년 헤이그에서 문을 열었고, 1808년 나폴레옹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 국왕이 그 컬렉션을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소장품은 1200년부터 2000년까지에 걸쳐 약 100만 점에 이르며, 미술관이 명성을 얻은 것은 네덜란드의 17세기 덕분이다.
이 글에서는 작품 25점을 이야기한다. 어느 작품에서든 누가 값을 치렀는지, 누가 고치거나 망가뜨렸는지, 누가 그것을 차지하려 다퉜는지가 보이는데, 그 주인공은 교회, 민병대 중대, 상인, 공화국, 그리고 국민 국가다. 첫 작품은 1504년, 아마도 알크마르의 구빈원이 주문해 그려진 다폭 제단화이고, 마지막 작품은 2022년 국가가 로칠드 가문에게서 1억 7500만 유로에 사들인 렘브란트다.
공화국 이전: 교회와 궁정을 위한 그림
1. 알크마르의 대가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 1504년
1582년 6월 24일 알크마르의 교회 관리인 야코프 디르크스 베인코퍼는 연대기에, 악한들이 성 라우렌티우스 교회에 침입해 설교단의 그림들과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를 검은 물감으로 덮어 칠했다고 적었다. 그보다 열 해 전 도시는 스페인 왕에게 맞선 봉기 편에 섰고, 교회는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검은 물감은 뒤에 씻어 냈다. 그보다 앞선 1566년이나 1572년에(미술관은 두 해를 모두 든다) 패널은 이미 칼로 긁혀 물감이 벗겨진 적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긁힌 곳은 얼굴이었다.
키가 큰 패널 일곱 개가 수수하고 어두운 틀 하나에 나란히 들어 있고, 가운데 패널 위쪽 틀에는 ‘1504년에 그렸다’는 뜻의 옛 네덜란드어 글귀가 적혀 있다. 패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굶주린 이를 먹이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이를 입히고, 죽은 이를 묻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는 일이다. 모든 일은 1500년 무렵 네덜란드의 한 도시, 현관 계단과 초록 지붕을 갖춘 벽돌집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흰 두건을 쓴 여인은 빵 바구니를 들고 문간에 서 있고, 모피 테를 두른 붉은 망토의 남자는 주석 주전자를 기울여 거지의 나무 그릇에 따르며, 순례자들의 모자에는 조가비와 엇갈린 열쇠 모양의 순례 배지가 꿰매져 있다. 거의 모든 패널에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머리가 긴 그리스도가 서 있는데, 군중 속에서 찾아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다섯째 패널 아래 틀에는 마태복음의 말씀, 곧 가장 작은 이에게 해 준 일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해 준 일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가운데 패널인 장례 장면은 짜임이 다르다. 위쪽에서는 붉은 망토를 두른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 그림에서처럼 무지개 위에 앉아 둥근 구 위에 발을 올려놓았고, 양옆에는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있다. 아래쪽, 담을 둘러친 마당에서는 흰 십자가가 그려진 관을 밧줄에 매달아 무덤으로 내리고 있는데, 이 아래쪽 절반에서는 관을 나르는 사람들, 흰 중백의를 입은 사제들, 삽을 든 무덤 일꾼, 검은 두건을 쓴 조문객들까지 거의 모든 사람의 얼굴이 매끈하고 희끄무레한 얼룩만 남도록 긁혀 나갔다. 1971~1975년 복원 때 성상 파괴자들의 흔적이 보이도록 이 손상은 일부러 그대로 두었고, 다른 패널들의 손상은 메웠다.


화가의 이름은 문서에서 찾지 못했다. 1914년 미술사가 발렌티너가 바로 이 작품을 따서 그에게 알크마르의 대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자리에 가장 자주 거론되는 사람은 코르넬리스 바위스로, 암스테르담 화가 야코프 코르넬리스 판 오스트사넨의 형제이며 1524년 죽을 때까지 알크마르에서 일했다. 하지만 미술관은 작가를 밝히려는 시도를 모두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미술관은 알크마르 성령 구빈원의 운영자들이 이 다폭 제단화를 주문했다고 본다. 이 구빈원은 가난한 나그네에게 사흘 낮 사흘 밤 잠자리를 내주고 병자를 돌보았으며, 부활절과 성탄절과 모든 성인의 날에는 가난한 사람 72명을 먹였으니, 패널에 그려진 것은 구빈원 자신이 하던 일이다. 종교 개혁 시기에 구빈원은 문을 닫았고, 제단화는 성 라우렌티우스 교회로 가서 큰 오르간 아래 세례대 뒤에 걸려 있다가, 1918년 교회 관리인들이 레이크스미술관에 팔았다. 1990년대에는 알크마르 로터리 클럽이 교회에 복제본을 기증했다.
2. 얀 모스타르트 《아프리카 남자의 초상 (크리스토플 르 모르?)》, 1525~1530년경
초상 속 남자는 어쩌면 합스부르크 궁정의 흑인 신하 크리스토플 르 모르일지도 모른다. 르 모르는 1503년부터 궁정 명부에 이름이 오르는데, 처음에는 마부였고 1521년에는 카를 5세의 호위대 궁수가 되어 있었으며, 그 자격으로 아헨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레이크스미술관은 이 이름을 조심스럽게 내놓으며 제목에 물음표와 함께 넣었다. 역사학자 케이트 로는 옷차림과 자세를 근거로, 그를 메헬렌에 궁정을 두고 네덜란드를 다스린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주변의 귀족으로 본다.
끝이 아래로 뾰족한 짙은 수염의 남자가 허리까지, 4분의 3 측면으로 그려져 있고, 고르게 칠한 청록색 바탕 앞에서 보는 사람을 비켜 왼쪽을 바라본다. 한쪽으로 접힌 주황빛 붉은 부드러운 모자에는 작은 인물들이 돋을새김된 둥근 메달이 꽂혀 있다. 넓은 깃이 달린 검은 망토 아래로 붉은 웃옷과 흰 셔츠가 보인다. 밝은 가죽 장갑을 낀 오른손은 손잡이를 검정과 금색으로 감은 칼자루 위에 놓였고, 왼손은 엉덩이께의 붉은 주머니를 짚고 있는데, 주머니에는 금빛 격자무늬가 수놓이고 은 징과 문장의 작은 백합꽃들이 박혀 있다.
이 그림은 실존한 흑인 한 사람을 유일한 인물로 그린 회화 초상 가운데 남아 있는 가장 이른 작품이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그보다 앞선 1508년에 아프리카 남자의 초상을 목탄으로 그렸다. 모스타르트 자신은 하를럼에서 일했고, 네덜란드 화가들의 전기를 쓴 카럴 판 만더르는 그가 18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를 섬겼다고 썼다. 하지만 그녀의 회계 장부에 화가는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아서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이 봉직을 의심한다.
이 패널의 내력은 런던의 한 화상이 가지고 있던 1920년부터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34년 맨체스터의 수집가 토머스 발로 경이 이를 샀고, 그의 상속인들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런던의 켄우드 하우스 미술관에 빌려주었으며, 2005년 레이크스미술관이 60만 유로에 이 초상을 사들였다. 구입에는 네덜란드 미술관들의 미술품 구입을 돕는 민간단체 렘브란트 협회와, 전국 복권을 비롯한 여러 기금이 함께했다. 패널 뒷면에는 예전 제목이 적힌 오래된 딱지들이 남아 있는데, 처음에는 동방 박사 가운데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검은 왕’이었고, 그다음은 ‘무어인의 초상’이었다.

도시가 제 초상을 주문하다
3. 프란스 할스와 피터르 코더 《레이니르 레알 대위가 지휘하는 제11구역 민병대 장교와 대원들》(‘마른 중대’), 1633~1637년
암스테르담 민병대 중대의 대위 레이니르 레알과 그의 중위 코르넬리스 블라우는 1636년 3월 19일 공증인 앞에서, 프란스 할스가 이미 1633년에 중대의 집단 초상을 맡았는데 아직도 끝내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할스에게는 14일 안에 암스테르담으로 오라는 기한이 주어졌고, 그러지 않으면 다른 화가가 중대를 그리고 할스는 받은 돈을 돌려주어야 했다. 다음 날 할스는 아픈 다리 때문에 침대에 누운 채 하를럼에서 답을 보냈다. 그는 원래 하를럼에서 그리기로 했다는 것, 민병대원들을 한자리에 모으기는 불가능하다는 것, 암스테르담에서 지내기에는 돈이 너무 든다는 것을 일깨웠다. 장교들은 인물 하나에 60휠던씩,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와서 마무리하면 여섯 휠던씩 더 주겠다고 했다. 7월에 할스는 다시 캔버스를 하를럼의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제안하며, 여섯이나 일곱 명이 오지 않더라도 그림은 거의 다 된 상태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할스는 쉰 살 무렵이었고, 이미 하를럼 민병대 중대들의 큰 집단 초상을 다섯 점 그린 뒤였다. 다른 도시의 주문을 맡은 것은 이 암스테르담 주문이 유일했다. 민병대원들은 하를럼으로 가지 않았고, 암스테르담 화가 피터르 코더를 고용했다. 코더는 작은 초상과 흥겨운 모임 장면을 그리던 화가로, 민병대원을 실물 크기 전신으로 그리는 일은 처음이었다. 1637년 그림이 완성되었고, 1653년 재산 목록에는 프란스 할스가 시작하고 코더가 마무리했다고 적혀 있다.
남자 열여섯 명이 길고 낮은 캔버스를 따라 한 줄로 서거나 앉아 있고, 거의 모두 검은 옷에 흰 깃을 달고 하늘색 띠를 둘렀다. 왼쪽, 거대한 주황빛 금색 깃발 앞에는 은회색 공단 옷을 입고 허리에 주황색 띠를 두른 기수가 한 손을 허리에 짚고 서 있는데, 그림에서 가장 밝은 인물이다. 할스는 왼쪽 부분을 대충 그어 둔 회색 밑그림 위에 빠르고 넓은 붓질로 칠했다. 오른쪽 일곱 인물은 흔히 코더의 솜씨로 보는데, 코더는 자기 그림에서는 붓 자국이 거의 남지 않게 매끈하게 그렸지만 여기서는 할스의 붓질을 흉내 냈다. 2017년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25일 동안 이 그림을 스캔한 연구자들은 이런 구분이 너무 단순하다고 판단했는데, 코더의 손길이 왼쪽에서도, 할스의 손길이 오른쪽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1758년에 이미 민병대 회관에서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옮겨져 있었고, 1885년 지금도 그림을 소유한 암스테르담시가 이를 레이크스미술관에 넘겼다. 별명이 생긴 곳도 그 시청이다. 1758년 재산 목록을 작성한 얀 판 데이크는, 이 그림의 민병대원들이 하도 바싹 마르고 야위어서 마른 중대라고 불러도 마땅하다고 적었다.
4. 렘브란트 《야경》, 1642년
1715년 《야경》을 담 광장의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옮기면서, 문과 문 사이 벽에 맞추려고 그림의 네 변을 모두 잘라 냈다. 가장 많이 잘린 쪽은 왼쪽이고, 그 띠와 함께 민병대원 둘과 아이 하나, 세 인물이 사라졌다. 잘려 나간 조각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암스테르담 화승총 민병대의 새 회관 큰 홀을 위해 그렸고, 그 홀에는 여러 화가가 그린 중대 집단 초상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의 제자 사뮈엘 판 호흐스트라턴은 1678년, 이 그림 곁에서는 홀의 다른 그림들이 트럼프 카드처럼 보였다고 썼는데, 그 자신은 렘브란트가 그림에 빛을 더 많이 주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덧붙였다. ‘야경’이라는 이름은 니스가 이미 어두워진 뒤인 1797년의 문서에서 처음 나온다. 렘브란트가 그린 것은 낮 장면이다. 중대가 어두운 아치에서 걸어 나오고, 빛은 앞쪽의 몇 사람만 비추며 나머지는 갈색 그늘에 남는다.
가운데에서는 검은 옷에 붉은 띠를 가슴에 두른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가 펼친 왼손을 빌럼 판 라위턴뷔르흐 중위 쪽으로 내밀고, 그 손의 그림자가 중위의 흰 스카프 바로 아래, 연한 금빛 가죽 조끼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보다 왼쪽, 대위 뒤에는 둘레의 누구보다 밝게 빛을 받은 소녀가 서 있고, 허리에는 발톱이 또렷하게 그려진 죽은 새가 매달려 있는데, 발톱이 화승총 민병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아래 큰 북 옆에서는 가시 박힌 목걸이를 한 잿빛 흰 개가 몸을 낮추고 주둥이를 쳐든 채 짖는다. 2025년 큐레이터 아너 렌더르스는 렘브란트가 이 개를 베껴 그린 원본을 찾아냈는데, 아드리안 판 데 베너가 1619년 펜으로 그린 소묘다(17번). 오래된 전승에 따르면 기수의 모자와 투구를 쓴 젊은이 사이에 눈 하나와 베레모 가장자리만 보이는 얼굴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다.

1911년 1월 13일 해군 요리사로 일했던 실직자가 칼로 그림을 찔렀지만, 칼날은 두꺼운 니스층에 박혀 물감까지 닿지 않았다. 1975년 9월 14일에는 일자리를 거절당한 교사가 개관하자마자 식당에서 가져온 톱니 달린 식탁용 칼을 들고 들어와, 그림에 12군데인지 13군데인지 칼자국을 내고 대위의 두 다리 사이에서 캔버스를 삼각형으로 도려냈다. 복원에는 약 여덟 달이 걸렸다. 1990년 4월 6일에는 한 관람객이 왼쪽에서 머스킷총을 장전하는 붉은 옷의 민병대원에게 황산을 끼얹었다. 당시 미술관은 니스만 손상되었다고 발표했지만, 2025년 연구자들은 물감층 자체에서 산의 흔적을 찾아냈다.
2019년 7월 그림은 유리 방 안에 들어갔고, 관람객이 보는 앞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2024년 11월 12일 복원가 여덟 명이 1975년 이후에 칠한 니스를 벗겨 내기 시작했는데, 용제를 한 방울 묻힌 천으로 닦아 내고, 남은 것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면봉으로 걷어 냈다.
5. 피터르 사인레담 《암스테르담의 옛 시청사》, 1657년
1657년 사인레담이 이 그림을 그렸을 때, 담 광장의 옛 시청은 사라진 지 이미 다섯 해가 지나 있었다. 1639년에 벌써 시장들은 건물이 너무 낡아서 곧 사고가 나겠다고 하소연했고, 1648년 새 시청의 주춧돌이 놓였으며, 그 자리를 마련하려고 옛 건물들은 대부분 헐렸다. 남아 있던 앞쪽 건물은 1652년 7월 7일 불길에 휩싸여 뼈대만 남았다. 사인레담은 1641년 7월 엿새 동안 현장에서 펜과 수채로 그린 자기 소묘를 바탕으로 이 건물을 되살렸다. 그가 이름을 얻은 교회 실내화도 그렇게 그렸는데, 먼저 현장에서 정확한 소묘를 하고 그다음에 유화를 그렸으며, 때로는 그 사이에 여러 해가 흘렀다.
1658년 7월 30일,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해부학 강의를 하는 바로 그 니콜라스 튈프 박사를 비롯한 암스테르담 재무관들이 시장들을 위해 하를럼 화가 피터르 사인레담의 그림을 받았고, 다음 날 그 값으로 400휠던을 치렀다. 사인레담은 이 거래에 관해 그림의 아주 작은 채색 스케치를 곁들인 메모를 남겼고, 그 메모는 하를럼의 테일러르스 박물관에 있다. 그가 적은 대로라면 모든 일은 더없이 정중하고 친절하게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그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있었으며, 그림은 시장들의 방에 걸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시는 지금도 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고, 그림은 1945년부터 레이크스미술관에 있다.
건물 정면들은 넓고 텅 빈 분홍빛 광장 너머에서 보는 사람을 똑바로 마주한다. 가운데에는 노르스름한 크림색 사암으로 지은 재판소가 있는데, 조각이 새겨진 돌은 부스러지고 있고, 가파른 초록 지붕에는 주황색 지의류 얼룩이 앉았으며, 맨 위 처마 돌림띠의 갈라진 틈에서는 풀 한 포기가 자란다. 그 아래로는 아치가 이어진 열린 회랑이 있고, 벤치에 몇 사람이 앉아 있다. 재판소 뒤로는 분홍 벽돌 탑이 솟아 있는데, 그 시계 문자판에는 금빛 바늘이 하나뿐이다. 그 무렵 탑의 첨탑은 이미 걷어 낸 뒤여서, 평평한 지붕 위에는 버려진 돌덩이와 통나무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나무 덧창을 단 하얀 회벽 집이 있고, 그 아래쪽에 낮은 노점 판매대가 줄지어 있다.

판매대 위 판자들에 사인레담은, 이 건물을 1641년에 먼저 현장에서 모든 색과 함께 그렸고 1657년에 유화로 그렸다고 적었다. 두 번째 글귀는 회랑 계단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는데, 이것이 7월 7일 세 시간 만에 불탄 암스테르담시의 옛 시청이라는 내용이다. 미술관은 이 글귀의 화재 연도를 1651년으로 읽으니, 화가가 한 해를 틀린 셈이다.
1663년 올페르트 다퍼르는 새 시청을 묘사하면서 이 그림이 걸린 자리를 적어 두었다. 그림은 시장들의 방, 의장을 맡은 시장의 의자 맞은편에 걸렸고, 그 짝으로는 시인 콘스탄테인 하위헌스가 새 건물을 노래한 시가 액자에 넣어져 걸렸다.
6. 렘브란트 《포목상 길드의 평의원들》, 1662년
레이던 태생인 렘브란트는 1630년대 초부터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초상을 그렸고, 1656년에는 파산을 인정하고 재산을 채권자들에게 넘겼다. 1662년 무렵 그는 로전흐라흐트 운하 가의 셋집에 살았고, 미술관의 표현으로는 암스테르담의 큰 주문자들이 예전만큼 그를 찾지 않았다. 《야경》 때문에, 곧 민병대원들의 불만과 끊긴 주문 때문에 그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역사가들이 오래전에 물리쳤는데, 1642년 뒤에도 그는 큰 주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주문 하나가 포목상 길드에서 왔다. 길드는 스탈스트라트 거리에 있는 회관에 걸 집단 초상이 필요했다.
초상을 주문한 것은 평의원들, 곧 성금요일부터 이듬해 성금요일까지 한 해 동안 염색한 천의 품질과 색을 견본과 대조해 검사하던 길드 회원 다섯 명이었다. 렘브란트는 그들을 탁자 뒤에 앉혀 조금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로 그렸기 때문에, 탁자 윗면은 거의 보이지 않고 늘어진 양탄자 자락만 보인다. 양탄자는 칙칙한 붉은색에 황토빛 금색 무늬가 있고 묵직한 술이 달렸다. 다섯 사람 모두 높은 검은 모자를 쓰고 납작한 흰 깃을 달았다. 여섯째 사람인 하인은 모자를 쓰지 않은 긴 검은 머리로 뒤에 서 있다. 맨 왼쪽의 백발노인은 붉은 천을 씌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옆의 가장 키 큰 사람은 팔걸이를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으며, 가운데 사람은 펼친 책 위에서 손바닥을 위로 돌렸고, 맨 오른쪽 사람은 구겨진 갈색 장갑을 손에 쥐었다. 거의 모두가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데, 미술관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회의를 끊은 듯한 눈길이라고 쓴다.
엑스선 사진에서 왼쪽에 앉은 야코프 판 론은 머리와 손이 세 가지 다른 자세로 보이고, 의자에서 일어서는 사람은 처음에 더 왼쪽에 서 있었다. 렘브란트는 판 론과 일어서는 평의원을 그린 준비 소묘 두 점을 장부 종이에 그렸다. 오른쪽 위 회벽에는 렘브란트가 1661년에 그렸다는 뜻의 서명이 또렷이 읽힌다. 미술관은 이 서명을 가짜로 보며, 그림에 남은 서명의 연도는 1662년이다.
평의원들은 1771년까지 길드 회관에 걸려 있다가 시청으로 옮겨졌고, 1808년 시가 이 그림을 미술관에 넘겼으며, 지금도 소유자는 암스테르담시다. 뒷날 평의원들과 하인의 모습은 미국 시가 상표 ‘더치 마스터스’의 상자에 인쇄되었다.
개인의 집과 시장을 위한 그림
7. 프란스 할스 《부부의 초상 (아마도 이사크 마사와 베아트릭스 판 데르 란)》, 1622년경
네덜란드 부부는 보통 초상 두 점을 따로 주문했는데, 할스는 남편과 아내를 한 캔버스에 나란히 앉혔고, 두 사람은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서로 몸을 거의 붙이고 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끝내 증명되지 않았다. 1934년 레이크스미술관 도록이 처음 이 이름들을 내놓은 뒤로 이들은 1622년 4월 25일 하를럼에서 결혼한 상인 이사크 마사와 베아트릭스 판 데르 란으로 여겨져 왔지만, 일부 역사가는 이 남자가 다른 초상 속의 마사와 별로 닮지 않았다며 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에 ‘아마도’라는 말이 들어 있다.
하를럼의 곡물 상인 이사크 마사는 젊은 나이에 모스크바로 보내졌고, 미술관에 따르면 그곳에서 여덟 해를 살았는데, 그 기간에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지막 몇 해와 가짜 드미트리와 바실리 슈이스키의 시대가 지나갔다. 돌아온 그는 공화국을 이끄는 총독 오라녜 공 마우리츠에게 《모스크바국에서 일어난 근래의 전쟁과 동란의 시작과 기원에 관한 짧은 보고》를 바쳤는데, 이 글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인쇄되었다. 베아트릭스 판 데르 란은 하를럼 시장의 딸이었고, 미술관은 이 캔버스를 대략 두 사람이 결혼한 해로 추정한다.
부부는 큰 나무 밑동의 둔덕에 앉아 캔버스의 왼쪽 3분의 2를 차지하고, 오른쪽에는 햇빛 비치는 정원이 펼쳐진다. 남자는 나무줄기에 몸을 기댔고, 챙이 아주 넓은 검은 모자를 뒤로 젖혀 썼으며, 수염은 불그스름하고, 가슴 한가운데에 댄 오른손에는 흰 장갑을 쥐었다. 크고 흰 주름 깃을 달고 분홍빛 붉은 테가 둘린 흰 두건을 쓴 여자는 그에게 몸을 기울여 오른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고, 그 손에 금반지가 보인다. 둘 다 보는 사람에게 웃음 짓고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는데, 미술관은 17세기 초상에서 드러내 놓고 웃는 여성은 아주 드물다고 짚는다.


둘레의 식물들을 역사가 에디 더 용과 피터르 빙컨은 1961년 결혼의 상징으로 읽었다. 모자 뒤의 나무줄기에는 포도덩굴이 감겨 올라가는데, 아내가 남편을 붙잡듯 덩굴은 나무를 붙잡고 있다. 여자의 발치에는 충실의 표시인 담쟁이가 있고 그 곁에는 엉겅퀴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삶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엎어진 질그릇 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정원 안쪽에서는 남녀들이 거닐고, 분수가 솟고, 조각상이 서 있으며, 밝은 빛깔 시골 저택의 현관 앞에는 공작 두 마리가 걷고 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암스테르담 사람 얀 식스가 가지고 있었고, 1702년 경매에서는 그저 프란스 할스가 그린 실물 크기의 남녀 그림으로 올라 있었다. 식스의 미망인이 이 그림을 되사들였고, 그림은 상속을 거쳐 헨드릭 식스 판 힐레흠에게 이르렀는데, 그의 결혼으로 이 목록의 다른 두 그림(10번과 11번)도 식스 집안에 들어왔다. 1851년 그의 컬렉션 경매에서 이 초상은 할스 자신과 아내를 그린 그림으로 나왔고, 600휠던에 레이크스미술관을 위해 팔렸다. 할스는 마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1623년 마사는 할스의 딸 세례식에 증인으로 섰고, 1626년 할스는 그를 한 번 더 그렸는데, 토론토에 있는 그 초상에서는 창밖으로 전나무들이 보이고, 연구자들은 그 풍경을 모스크바의 풍경으로 본다.
8. 프란스 할스 《즐거운 술꾼》, 1628~1630년경
세상을 떠난 판 레이던 남작 부인의 컬렉션은 1816년 7월 31일 바로 그녀의 성인 바르몬트 성에서 경매되었고, 목록 13번에는 웃는 얼굴로 손에 잔을 든 병사가 올라 있었다. 이 그림은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국립 미술관을 위해 325휠던에 팔렸고, 네덜란드 미술관이 할스의 그림을 산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연구자들은 주문 문서도, 그려진 사람의 이름도 찾지 못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즐거운 술꾼’으로 알려진, 베르케마이어 잔을 든 민병대원》이라고 부르는데, 가죽 조끼와 메달을 보면 그가 도시 민병대원이나 군인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아직도 이것이 초상인지 풍속화인지를 두고 논쟁한다.
엄청나게 큰 검은 모자를 뒤통수로 젖혀 쓴 남자가 보는 사람 쪽으로 몸을 내밀었는데, 볼은 붉고 입술은 살짝 벌어졌으며 눈은 가늘게 떴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활짝 펴서 손바닥을 보이며 들었고, 왼손으로는 볼록한 유리 돌기가 붙은 키 큰 투명한 잔의 밑동을 잡았는데, 잔에는 연한 금빛 포도주가 반쯤 차 있다. 허리띠에는 끈에 꿴 타원형 금메달이 달려 있고, 메달의 돋을새김은 붓질 몇 번으로 암시만 되어 있다. 역사가 호프스테더 더 흐로트는 거기서 오라녜 공 마우리츠의 초상을 알아보았다. 공들여 그린 것은 얼굴 하나뿐이다. 머리카락은 하나하나 따로 휘갈긴 붓질로, 깃은 짧게 엇갈린 붓질로 이루어졌고, 유리의 반짝임은 붓을 몇 번 그어서 냈으며, 오른쪽 어깨 높이에는 프란스 할스의 머리글자를 엮은 모노그램이 있다.
할스는 1868년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제가 여러 글에서 그의 넓은 붓질을 장점이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림을 끝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1872년 에두아르 마네가 이 그림을 보았고, 그 뒤로 마네가 1873년 살롱에 낸 《좋은 맥주 한 잔》은 이 캔버스와 자주 연결된다.
9. 헨드릭 아베르캄프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있는 겨울 풍경》, 1608년경
헨드릭 아베르캄프는 1585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약제사로 일한 캄펀에서 자랐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캄펀의 벙어리’라고 불렀다. 1607년 암스테르담 화가 피터르 이삭스의 작업실 경매 기록에는 구매자 가운데 피터르 이삭스 집의 벙어리라는 사람이 적혀 있는데, 역사가들은 여기서 아베르캄프가 그의 집에 살며 그림을 배웠다고 결론짓는다. 이 패널은 그가 23세 무렵이던 1608년경에 그렸고, 그 뒤 그는 얼음 위의 사람들이 있는 겨울 풍경을 거의 전문으로 그린 최초의 네덜란드 화가가 되었다. 미술관에 따르면 그 그림들이 아주 잘 팔려서 그는 여름에도 겨울 풍경을 그렸다. 1633년 유언장에서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맏아들인 그를 말 못 하는 가엾은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의 생계를 마련해 두었다. 그는 1634년 캄펀에서 죽었다.
얼어붙은 강이 앞쪽에서 희미한 지평선까지 뻗어 있고, 언덕에서 내려다보듯 위에서 본 모습이다. 미술관은 얼음 위의 인물을 200명가량으로 센다. 어떤 이들은 막대기로 공을 치는 콜프 놀이를 하고, 어떤 이들은 팔짱을 끼고 둘씩 스케이트를 타며, 가운데에서는 한 사람이 얼음 위에 큰대자로 넘어졌고, 오른쪽에서는 말이 끄는 붉은 썰매가 달린다. 왼쪽에는 뾰족탑을 단 교회, 기둥 위에 원뿔 지붕을 얹은 둥근 건초더미, 붉은 사자 두 마리가 받쳐 든 문장이 달린 벽돌집이 서 있다. 그림 속의 우스개는 미술관이 직접 꼽는다. 벽돌집 옆에는 배를 세로로 세워 만든 좁은 오두막이 있는데 이것이 변소이고, 그 낮은 입구로 벌거벗은 분홍빛 엉덩이가 삐죽 나와 있다. 건초더미 지붕 아래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붙이고 있고, 왼쪽 아래 구석에서는 개와 까마귀들이 짐승 사체를 뜯어 먹는데, 미술관은 이것을 말의 사체로 본다. 서명은 오른쪽 가장자리 헛간의 판자벽에, 다른 낙서들 사이에 흰색으로 긁듯이 쓰여 있는데, 라틴어식으로 쓴 이름 하인리쿠스와 성의 앞 두 글자다.
이 그림은 그 시대의 추운 겨울, 이른바 소빙하기의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로잔 대학교의 연구자 알렉시 메츠제는 2020년 네덜란드 겨울 그림 49점을 날씨 기록과 비교했다. 화가들은 맑고 건조한 추위, 곧 스케이트 타기 좋은 날씨를 골라 그렸는데, 그런 날은 겨울날의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


1897년 헤이스베르트 더 클레르크 컬렉션 경매에서 화상 로스가 이 패널을 345휠던에 샀고, 몇 달 뒤 레이크스미술관에 550휠던에 팔았는데, 그 값의 일부는 렘브란트 협회가 댔다.
10.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우유 따르는 여인》, 1660년경
1907년 암스테르담 식스 가문의 상속인들은 국가에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을 사라고 제안했는데, 조건은 가문 컬렉션의 다른 그림 38점과 함께 한꺼번에 75만 휠던에 사는 것이었다. 네덜란드 회화 감식가 프리츠 뤼흐트는 그 38점 가운데 중요한 그림을 다섯 점밖에 꼽지 않았다.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의 관장 아브라함 브레디우스는 미국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이 《우유 따르는 여인》을 사 갈까 봐 걱정했고, 신문 만화가들은 엉클 샘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유 따르는 여인을 그렸다. 의회에서는 사회주의자 트룰스트라가 옛 거장들에게 이런 돈을 쓰는 데 반대했고, 오랫동안 네덜란드 유산을 지키려고 싸워 온 의원 빅토르 더 스튀르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림을 나라 안에 두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다수가 그의 편에 섰다. 국가가 55만 휠던을, 렘브란트 협회가 20만 휠던을 냈고, 1908년 1월 13일 그림 39점이 모두 레이크스미술관에 전시되었다.
페르메이르는 1660년 무렵 델프트에서 《우유 따르는 여인》을 그렸는데, 이 무렵 그는 큰 장면을 떠나 왼쪽 창으로 빛이 드는 조용한 방의 인물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된 구매자는 델프트의 수집가 피터르 판 라위번이었고, 페르메이르가 널리 이름을 얻은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이미 1696년, 판 라위번의 사위 야코프 디시우스의 컬렉션이 암스테르담에서 경매되었을 때 우유를 따르는 하녀를 그린 대단히 훌륭한 그림으로 소개된 이 그림은 175휠던에 팔렸는데, 그 경매에 나온 페르메이르 가운데 《델프트 풍경》 말고는 어느 그림보다 비쌌다.
하녀는 왼쪽 위 구석의 창 아래 탁자 곁에 서서 적갈색 질그릇 주전자에서 손잡이 두 개 달린 그릇으로 우유를 따르고, 그림 한가운데에서 우유가 가늘고 흰 줄기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노란 보디스를 입고, 팔꿈치 위로 걷어 올린 초록 토시를 끼고, 짙푸른 앞치마를 둘렀는데, 이 앞치마는 청금석으로 만든 값비싼 안료인 울트라마린으로 칠했고, 그 아래로 붉은 치맛단이 보인다. 빵 껍질과 바구니 손잡이와 회청색 주전자 가장자리는 도톰하게 솟은 밝은 물감 점들로 덮여 있다. 창유리 하나에는 깨진 구멍처럼 보이는 하얀 얼룩이 불규칙하게 나 있고, 뒷벽은 텅 빈 채 못 하나와 못 자국들만 있다.
2022년 스캔 조사로 페르메이르가 이 벽에 무엇을 그렸다가 지웠는지가 드러났다. 하녀의 머리 뒤에 그는 질그릇 주전자들이 매달린 선반을 그려 넣었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빨래를 말릴 때 쓰던 고리버들 숯 바구니를 그렸는데, 뒤에 그 바구니를 발 난로와 타일과 바닥으로 덮었다. 선반과 바구니는 화가가 죽은 뒤 작성된 그의 집 재산 목록에 올라 있다.


11.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델프트의 집 풍경》(‘골목길’), 1658년경
계단식 박공을 얹은 벽돌집이 그림의 오른쪽 3분의 2를 차지하고, 그 맨 위 계단은 캔버스 가장자리에 간신히 닿는다. 왼쪽에는 기와지붕을 얹은 더 낮은 집이 있는데, 그 정면은 지붕까지 청록색 덩굴로 덮였다. 두 집 사이에는 통로가 둘 있다. 왼쪽 통로로는 어두운 나무 문이 달린 아치가 나 있고, 열려 있는 오른쪽 통로로는 하얗게 회칠한 골목이 보이는데, 거기서 붉은 보디스를 입은 하녀가 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있다. 큰 집의 열린 문간에는 흰 두건을 쓴 여자가 바느질감을 들고 앉아 있고, 집 앞 포석 위에는 아이 둘이 보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무릎을 꿇고 있다. 아래층들의 회칠은 벗겨지고 얼룩졌으며, 박공 맨 위 계단에는 금이 가 있고, 문 옆에는 새빨간 덧창 하나가 걸려 있으며, 왼쪽 집 하얀 벽의 창 아래에는 이름의 머리글자와 성으로 된 페르메이르의 서명이 있다.
2025년 미술관 연구자들은 위층 물감 아래에서 찾아낸 것을 공개했다. 처음에는 왼쪽 통로 입구에 바느질하는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페르메이르는 그 여자를 덮어 지우고 문간의 여자를 그 여자의 좌우를 뒤집은 모습으로 그렸다. 큰 집의 문은 처음에는 닫혀 있었고 덧창처럼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페르메이르는 나중에야 그 문을 ‘열었다’.
이 그림은 국가에 《우유 따르는 여인》을 판 바로 그 가문을 거쳐 왔다. 1800년 피터르 판 빈터르가 이 그림을 샀고, 그의 딸 뤼크레티아가 이를 물려받아 1822년 헨드릭 식스와 결혼했다. 1921년 미술사가 얀 식스가 《골목길》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입찰가가 정해 둔 최저가에 이르지 못했고, 석유 재벌이자 로열 더치 셸의 총수인 헨리 데터딩이 62만 5000휠던에 이 그림을 사서 레이크스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집이 어디 있었는지는 백 년 넘게 논쟁거리였다. 2015년 미술사가 프란스 흐레이전하우트는 운하 준설세를 걷는 데 쓴 1667년의 델프트 장부를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집집마다 정면과 통로의 너비가 적혀 있었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이 집들을 플라밍스트라트 거리 40~42번지, 곧 너비가 같은 두 집과 그 사이의 좁은 통로 두 개로 지목했다. 미술관은 이 주소를 사실로 쓰지만, 연구자 필립 스테드먼은 치수가 맞지 않는다며 반박한다. 흐레이전하우트에 따르면 그 집은 페르메이르 아버지의 이복누이 아리안트헌 클라스 판 데르 미너의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 다섯을 둔 과부로 내장을 팔아 생계를 꾸렸고, 오른쪽 통로는 19세기까지 ‘내장 문’이라고 불렸다.
12.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편지를 읽는 여인》(‘파란 옷을 입고 편지를 읽는 여인’), 1663년경
1928년 이 캔버스를 배접한 복원가는 페르메이르가 찍어 놓은 하이라이트의 흰 점들을 진주로 착각하고, 탁자 위 목걸이 색에 맞추어 노랗게 덧칠했다. 이 노란 덧칠은 2010~2011년 복원 때 두껍고 누렇게 변한 고르지 않은 니스와 함께 걷어 냈는데, 그 니스 때문에 그림의 푸른색이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복원가 이허 페르슬레이퍼는 페르메이르가 웃옷의 울트라마린을 칠하기 전에 깐 구릿빛 초록 바탕층을 가장 큰 뜻밖의 발견으로 꼽았다.
젊은 여인이 옆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창이 있는 왼쪽을 향해 서서 가슴 바로 아래에서 두 손으로 편지를 들고 있고, 둘째 장은 손에서 늘어져 있다. 그녀는 짙푸른 리본이 달린 연푸른 누빔 웃옷을 입었고, 가장자리와 소맷부리 접힌 곳으로 황토빛 노란 안감이 보인다. 탁자 위에는 열린 상자, 진주 한 줄, 구겨진 푸른 리본, 종이들이 놓여 있다. 그녀 뒤의 벽은 거의 다 갈색의 홀란트와 서프리슬란트 지도가 차지하는데, 지도는 끝에 푸른 구슬이 달린 어두운 막대에 걸려 있고, 하얗게 회칠한 벽 위 의자 등받이의 그림자는 연한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여인은 흔히 임신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복식사가들은 그녀의 실루엣을 1660년대의 유행으로 설명한다.
1839년 암스테르담의 은행가 아드리안 판 데르 후프는 런던의 화상 존 스미스에게서 이 그림을 샀다. 1847년 그는 자기 컬렉션을 시에 유증하면서, 컬렉션을 흩뜨리지 말고 자기 이름을 붙여 암스테르담에서 전시하며 입장료 수입은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조건을 달았다. 1854년 그가 죽었을 때 시는 유산에 세금이 붙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받기를 망설였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 돈의 대부분은 개인 기부자들이 모았다. 컬렉션은 아우데만하위스포르트 건물에서 판 데르 후프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다가, 1885년 시가 이를 레이크스미술관에 넘겼다.
복원을 마친 그림은 먼저 일본으로 가서 교토, 센다이, 도쿄에서 전시되었고, 그다음 상하이, 상파울루,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2025년 시는 이런 여행이 컬렉션을 암스테르담에 두라는 조건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암스테르담 법원에 물었고, 법원은 1월 9일 임시 전시는 유언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1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연애편지》, 1669~1670년경
1971년 9월 23일 저녁, 벨기에 림뷔르흐 출신의 21세 견습 웨이터 마리오 로이만스가 폐관 전에 브뤼셀 보자르 궁의 배전실에 숨었다. 그곳에서는 《렘브란트와 그의 시대》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레이크스미술관에서 보내온 《연애편지》가 걸려 있었다. 그는 그림을 벽에서 떼어 냈지만 액자째로는 빠져나가려던 창문을 통과하지 못하자, 작은 부엌칼로 캔버스를 액자에서 도려내 접은 다음 바지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집에 숨겼고, 그다음 숲에 묻었다가 비 때문에 다시 파냈으며, 그 뒤에는 자기가 일하던 호텔에서 베갯잇에 넣어 매트리스 밑에 두었다. 그는 기자들을 통해, 당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벌어지던 동파키스탄의 난민들에게 2억 벨기에 프랑을 준다면 그림을 돌려주겠다고 전했다. 그는 플랑드르의 민중 영웅 틸 오일렌슈피겔의 이름으로 서명했고, 많은 벨기에 사람이 그의 편을 들었다. 10월 6일 그는 주유소에서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가 정체가 드러났고, 추격 끝에 한 시간 뒤 체포되었다.
그림은 도난 두 주 뒤 매트리스 밑에서 발견되었다. 칼자국을 따라 물감이 떨어져 나갔고, 오른쪽 위 구석이 가장 심했다. 레이크스미술관의 수석 복원가 라위천 카위퍼르가 거의 한 해 동안 캔버스를 복원했고, 미술관장이 꾸린 국제 위원회는 손실된 부분을 눈에 띄지 않게 메우기로 했다. 로이만스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실제로는 반년쯤 복역했다.
페르메이르는 1672년 직전에 《연애편지》를 그렸다. 1672년에는 프랑스의 침공으로 네덜란드 미술 시장이 무너졌고, 1675년 그는 빚을 남기고 죽었다. 보는 사람은 어두운 앞방에서 문간을 통해 밝은 방 안을 들여다보는데, 문간 위로는 커다란 황토빛 금색 무늬가 있는 어두운 휘장이 젖혀져 있다. 문턱에는 어두운 실내화가 놓여 있고 빗자루가 기대어 있으며, 왼쪽에는 빨래 바구니가 있고 그 위 벽에 페르메이르의 서명이 있으며, 오른쪽 의자의 짙은 붉은 방석 위에는 악보가 놓여 있다. 방 안에서는 노란 공단 옷에 담비털 테를 두른 노란 웃옷을 입은 안주인이 무릎에 시턴을 얹고 오른손에 접힌 편지를 든 채, 입을 조금 벌리고, 위에서 그녀에게 미소 짓는 푸른 앞치마의 하녀를 올려다본다. 두 사람 뒤 벽에는 그림 두 점, 나그네가 있는 풍경화와 돛단배가 있는 바다 그림이 걸려 있는데, 미술관의 설명으로는 바다 그림이 편지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1892년 렘브란트 협회가 경매에서 이 그림을 4만 1000휠던에 샀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값이었고, 이듬해 협회는 그림을 레이크스미술관에 넘겼다. 브뤼셀 도난 사건 네 해 뒤, 라위천 카위퍼르는 1975년 칼에 찢긴 《야경》을 복원했다.

14. 얀 스테인 《즐거운 가족》, 1668년
오른쪽 위 구석, 벽난로 위 벽에 꽂힌 종이에는 네덜란드 속담이 적혀 있는데, 늙은이들이 노래하는 대로 젊은이들이 피리를 분다는 뜻이다. 속담에서 ‘피리를 분다’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낱말은 피리를 분다는 뜻과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는 뜻을 함께 지녔고, 그림 속 아이들은 둘 다 하고 있다. 오른쪽의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는 긴 흙 파이프를 피우고, 창가의 곱슬머리 사내아이는 피리를 불며, 앞쪽에서는 노란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털모자를 쓴 꼬마의 입에 주석 주전자로 포도주를 곧장 부어 준다.
탁자 앞에서는 검은 빵모자를 쓴 흰 수염의 노인이 안락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려 노래하며, 백포도주가 담긴 키 큰 잔을 들어 올린다. 회녹색 두건을 쓴 노파는 눈을 감은 채 종이를 보며 노래하고, 흰 머릿수건을 쓴 젊은 여인은 숟가락을 든 채 깔깔 웃는 아기에게 미소 짓고, 붉은 모자를 쓴 젊은이는 벤치에 다리를 뻗고 플루트를 분다. 노인 뒤에서는 갈색 모자를 쓴 젊은이가 백파이프를 부는데, 미술관은 백파이프를 바보들의 악기라고 부르며 이 젊은이를 얀 스테인 자신으로 본다. 바닥에는 프라이팬, 옆으로 넘어진 병, 달걀 껍데기가 흩어져 있고, 탁자 곁에는 얼룩무늬 스패니얼이 서 있으며, 오른쪽 벤치의 앞판에는 화가의 이름과 1668이라는 연도로 된 서명이 있다.
스테인은 1661년부터 살던 하를럼에서, 사람이 북적이는 큰 가족 장면들을 그리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다. 네덜란드에서는 지금도 엉망진창인 집을 ‘얀 스테인의 살림’이라고 부르는데, 미술관은 이 표현을 《즐거운 가족》과 연결한다. 스테인이 술꾼이라는 평판도 얼마간은 이런 그림들에서 생겨났지만, 미술사가들은 백파이프 부는 젊은이에게서 화가가 웃음을 위해 맡은 배역을 본다. 판 데르 후프가 이 그림을 암스테르담에 유증했고, 그림은 1885년부터 레이크스미술관에 있다. 스테인이 레이던에서 선술집을 운영할 권리를 얻은 것은 《즐거운 가족》보다 네 해 뒤인 1672년이다.

15. 렘브란트 《이삭과 리브가》(‘유대인 신부’), 1665~1669년경
1828년 런던의 화상 존 스미스는 이 그림을 《입다와 그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경매에 내놓았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다. 1833년 암스테르담의 은행가 아드리안 판 데르 후프가 6825휠던에 이 그림을 샀고, 그의 재산 목록에는 아버지가 목걸이를 걸어 주는 유대인 신부의 그림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이 이름이 처음 나타난 기록이고, 1855년 판 데르 후프 미술관 도록에는 이미 유대인 신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림으로 올라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이삭과 리브가》라고 부르고, 예전 이름은 따옴표 안에 넣는다.
연구자들은 이 주제를 렘브란트가 1662년 무렵 그린 준비 소묘에서 끌어냈는데, 이 소묘는 미국의 개인 컬렉션에 있다. 소묘에서 남녀는 끌어안고 있고, 여자는 남자의 무릎에 앉아 있으며, 오른쪽 위 구석에는 창가의 한 남자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창세기의 아비멜렉 왕으로,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는 것을 보고, 이삭이 누이라고 속인 여자가 사실은 그의 아내임을 깨달았다. 엑스선 조사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캔버스에서도 처음에는 여자를 남자의 무릎에 앉혔다가, 나중에 두 사람을 선 모습으로 고쳐 그렸고, 아비멜렉은 그림에 넣지 않았다. 레이크스미술관의 큐레이터 요나탄 비커르는 이것이 당시 흔히 그랬듯 실제 부부를 이삭과 리브가로 분장시킨 주문 초상일 수 있다고 본다.
남자의 오른손은 여자의 가슴에 평평하게 얹혀 있고, 여자의 왼손은 그의 손등에 가볍게 닿아 있으며, 그녀의 두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둘 다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의 거대한 금빛 노란 소매를 렘브란트는 두꺼운 물감 이랑과 딱지로 쌓아 올렸는데, 일부는 팔레트 나이프로 발랐고 붓 손잡이로 긁어 내기도 해서 소매가 금속처럼 번쩍인다. 그림 전체가 갈색빛 검은 바탕에 붉은색과 금색으로 그려졌고, 빛나는 것은 소매와 손과 얼굴들과 붉은 치마뿐이다.
1885년 10월, 시가 이 그림을 새 레이크스미술관에 넘기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빈센트 반 고흐(24번)가 이 그림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동생에게, 이것이 얼마나 친밀하고 한없이 공감 어린 그림인지, 불같은 손으로 그린 그림인지 썼고, 이렇게 그리려면 여러 번 죽어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제자 안톤 케르세마커르스는 1912년, 마른 빵 한 조각만 가지고 이 그림 앞에 두 주 동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인생의 십 년을 내주겠다고 반 고흐가 말한 일을 회상했다. 케르세마커르스는 빈센트가 자신을 호사시키지 않으려고 빵을 언제나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먹었다고 덧붙였다.


16. 페트로넬라 오르트만의 인형의 집, 이름 모를 암스테르담 장인들, 1686~1710년경
암스테르담 총포 제조공의 딸 페트로넬라 오르트만은 첫 결혼에서 함부르크의 비단 상인 카럴 비터의 아내가 되었다. 둘의 외동딸은 1684년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한 해 뒤 비터도 죽었으며, 1686년 페트로넬라는 비단 상인 요하너스 브란트와 결혼했다. 그 무렵 그녀는 이 장식장을 주문하기 시작해 약 25년 동안 그 안을 꾸몄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렇게 장식장 안에 꾸민 집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어른 여성을 위해 만들었고, 이상적인 살림의 모습을 담았다.
다리 달린 키 큰 장식장은 거북 등딱지로 마감되었고, 겉면 전체에 주석으로 만든 가는 덩굴무늬가 감겨 있다. 유리를 끼운 문짝 두 개 뒤에는 방이 아홉 개, 세 층에 세 개씩 있다. 장식장 몸체는 암스테르담에서 일하던 이름 모를 프랑스 가구 장인이 만들었고, 나머지는 조각가와 바구니 장인부터 은 세공인과 유리 장인까지 수십 명의 장인이 맡았다. 가운데 층 응접실 벽에는 화가 니콜라스 피몬트가 나무들과 먼 탑이 있는 풍경을 하나로 이어지게 그렸다. 아래층의 손님에게 보이는 부엌에는 금박 진열장에 청화 자기가 가득하고 창가에 새장이 걸려 있으며, 산모의 방에는 붉은 휘장을 친 침대가 있고, 위층 리넨 방에서는 천장 막대에 빨래가 마르며, 작은 탁자 위에는 다리미가 놓여 있다.

브란트 부부의 집에 장식장을 보러 왔던 독일 여행가 차하리아스 콘라트 폰 우펜바흐에게 가족은 이것을 만드는 데 3만 휠던이 들었다고 말했다. 레이크스미술관은 이 금액을 귀족들이 살던 헤렌흐라흐트 운하 가의 집 한 채 값과 견준다. 이것은 가족의 말이고, 1743년 그녀 아들의 재산 목록에서 장식장은 700휠던으로 평가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이 장식장을 사고 싶어 했지만 값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쌌다는 전설도 있다. 1821년 국가가 장식장을 샀다.
1710년 화가 야코프 아펠은 이 장식장을 유화로 그렸는데, 그의 그림에서는 인형들과 장식장을 가리던 노란 휘장, 그리고 정원이 보인다. 인형 가운데 남은 것은 밀랍 얼굴을 한 아기 하나뿐으로, 리본과 레이스를 단 분홍과 하늘색 비단 세례복을 입고 있다.
공화국 안에서 벌어진 다툼
17. 아드리안 판 데 베너 《영혼 낚기》, 1614년
1609년 연합 주 공화국은 스페인, 그리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다스리던 알베르트 대공과 이사벨라 대공비와 12년 휴전을 맺었다. 싸움은 멈췄지만, 새 국경 양쪽 신자들의 영혼을 두고 북쪽과 남쪽은 계속 겨루었다. 남쪽에서 이주해 온 집안 출신인 아드리안 판 데 베너, 곧 뒷날 렘브란트가 《야경》의 개를 그의 소묘에서 베껴 그리게 되는 그 화가는 1614년 엄격한 칼뱅파 지역인 제일란트의 미델뷔르흐에 살았고, 이 경쟁을 넓은 패널에 그렸다.
넓은 강이 앞쪽에서 안개 낀 지평선까지 흐르며 그림을 둘로 나눈다. 왼쪽 강가에는 흰 주름 깃을 단 검은 옷의 개신교도들이 빽빽이 모여 있고, 앞줄 사람들은 모두 초상처럼 그려진 얼굴인데, 그 가운데 총독 오라녜 공 마우리츠를 알아볼 수 있다. 오른쪽 강가에서는 붉은 옷의 추기경들이 행렬을 이루고, 금빛 닫집 아래로 교황을 메고 가며, 그 곁에 대공 부부가 서 있다. 왼쪽 강가 위 하늘은 밝아지고 오른쪽 위로는 먹구름이 짙어지며, 하늘 전체에 쌍무지개가 걸려 있다. 강에서는 영혼을 낚는다. 개신교 배에서는 검은 옷의 설교자들, 그 가운데 미델뷔르흐의 목사 빌럼 텔링크가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 적힌 꼬리표를 단 그물을 끌어당기고, 고물에는 복음의 어부들이라는 글귀와 1614라는 연도가 적힌 책이 놓여 있다. 가톨릭 배에는 붉은 제의에 주교관을 쓴 주교가 타고 있고, 이물에는 금빛 성체 현시대가 있으며, 소년 성가대가 노래하고, 이물에서는 아기 인형이 든 미끼 새장이 늘어져 있다. 미술관의 말로는 개신교 어부들은 초상으로, 가톨릭 어부들은 풍자화로 그려졌다.
가톨릭 그물에도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나중인 1640~1650년대에 빠르고 아주 얇게 덧그려져서 인물들 사이로 물이 비쳐 보인다. 처음에 그물은 비어 있었다. 미술관은 시대가 바뀌었거나 주인이 바뀌어서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려고 그렇게 했을 수 있고, 덧그린 사람이 판 데 베너 자신일 수도 있다고 본다. 1735년 이 그림은 헤이그에서 대 얀 브뤼헐의 작품으로 팔렸고, 아마도 총독 빌럼 4세가 샀을 것이다. 1795년 총독 가문의 컬렉션은 바타비아 공화국의 국유 재산으로 선포되었고, 1798년 《영혼 낚기》는 국립 미술 갤러리로 넘어갔다. 그림이 판 데 베너의 것으로 되돌려진 것은 1878년에 와서였고, 그때까지 인물과 풍경은 여러 화가에게 돌려졌다. 개신교 배의 이물에서 조금 왼쪽, 물 위에는 그려 넣은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대 얀 브뤼헐 식의 장난으로, 진짜 파리로 착각하기 쉽다.


18. 얀 데 반(전칭) 《더빗 형제의 시신》, 1672~1675년경
국립 미술 갤러리의 관리자 코르넬리스 세빌레 로스(20번)는 1801년 바타비아 공화국의 재정을 맡고 있던 알렉산더르 호헐에게 편지를 보내, 이 그림은 미술관에 두기에는 너무 끔찍하고 새 액자를 해 줄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각하께서 꼭 원하신다면 액자를 고치고 그림 앞에 작은 커튼을 달자고 로스는 썼다. 호헐은 그림이 보여 주는 사건 때문에 이 그림을 원했고, 1802년 갤러리는 교환으로 이 그림을 들여왔다.
프랑스가 공화국을 침공한 해인 1672년 8월 20일, 헤이그의 감옥 문 헤방엔포르트 앞에서 시의 민병대원들까지 섞인 군중이 더빗 형제를 죽였다. 얀 더빗은 거의 20년 동안 홀란트의 대법률고문, 곧 공화국 최고의 정치가였고, 도르드레흐트 시장이던 코르넬리스는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형제의 시신은 옷이 벗겨지고 훼손된 채 페이버르베르흐 광장의 처형대에 매달렸다.
그림 속은 밤이고, 화면 거의 전체를 어두운 나무들이 차지하며 위쪽에만 푸른 하늘이 띠처럼 보인다. 가운데에는 사다리처럼 가로대가 달린 높은 기둥이 서 있고, 거기에 발이 묶인 벌거벗은 시신 두 구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왼쪽 시신은 빛을 받고 있는데, 배가 갈라져 있고, 다리와 몸통에는 길고 붉은 상처가 이어지며, 머리는 붉은 웅덩이 위로 땅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오른쪽 시신은 기둥 뒤에 반쯤 가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붉은 웃옷을 입은 남자가 보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한 손으로는 횃불을 쭉 내밀고 다른 손은 머리로 올린 채 고개를 돌렸다. 시신들 아래 땅에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죽은 짐승이 놓여 있다.
이 그림은 두 형제가 살아 있을 때 둘을 모두 그린 헤이그의 초상화가 얀 데 반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미술사가 프란스 흐레이전하우트는 이 견해를 의심한다. 데 반은 도르드레흐트 시청을 위해 코르넬리스를 기리는 알레고리를 그렸는데, 1672년 군중은 그 그림을 벽에서 뜯어내 찢었고, 코르넬리스의 머리 부분을 캔버스에서 도려내 메르웨더강 건너로 가져가 교수대에 못 박았다.
로스는 이 그림을 판화를 베낀 것으로 보았고, 역사가 판 뤼터르펠트도 이 그림이 1672년 판화를 되풀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판화에서는 횃불을 두 사람이 들고 있고 그림 아래에 형제를 적대하는 시가 인쇄되어 있다. 캔버스 뒷면의 글귀는 내용이 다르다. 거기에는 이것이 얀 더빗과 코르넬리스 더빗의 시신으로, 밤 11시에 그들이 아직 기둥에 매달려 있을 때 한 유명한 화가가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이며, 1672년 8월 20일 실물을 보고 그린 유일한 원본이니 그만큼 큰돈의 가치가 있다고 적혀 있다.


19. 빌럼 반 데 벨더(소) 《대포 사격》, 1680년경
프랑스가 육지로 공화국을 침공하고 바다에서는 다시 영국과 전쟁이 벌어지던 1672~1673년 겨울, 해전을 그리던 소묘 화가 빌럼 반 데 벨더(대)는 아들 빌럼과 함께 홀란트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1674년 영국 왕 찰스 2세는 두 사람에게 해마다 100파운드씩 주기로 했는데, 아들의 경우는 아버지의 소묘를 왕이 개인적으로 쓸 그림으로 옮기는 대가였고, 그림은 한 점마다 따로 값을 치렀다. 그들의 작업실은 그리니치의 퀸스 하우스에 마련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은 1674년에야 끝났으니, 그때까지 아버지와 아들은 적의 함대를 위해 일한 셈이다.
은행가 아드리안 판 데르 후프가 이 그림을 사서 나머지 컬렉션과 함께 암스테르담에 유증했고, 그림은 1885년부터 레이크스미술관에 있다. 이 그림의 짝인 《돌풍》은 돛대가 부러진 영국 군함이 폭풍과 싸우는 그림인데, 미술관이 20세기 초에 따로 사들였다.
미술관은 《대포 사격》을 화가의 영국 시절인 1680년 무렵으로 보는데, 그림에서는 네덜란드 군함이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 떠 있다. 캔버스는 세로로 길고, 그 3분의 2를 연한 하늘색 위에 잿빛 구름이 깔린 하늘이 차지한다. 배는 이물을 보는 사람 쪽으로 조금 비스듬히 돌리고 있고, 이물에는 붉은 사자가 조각되어 있으며, 펼친 돛은 활대에서 묵직한 크림색 주름을 이루며 늘어져 있고, 돛대에서는 빨강, 하양, 파랑의 기다란 깃발들이 늘어져 있다. 이물 왼쪽에서 짙은 흰 화약 연기가 뿜어져 나와 물 위로 깔렸다가 위로 올라가며 잿빛 덩어리로 퍼져 구름과 섞인다. 포문이 줄지어 난 어두운 선체가 거울처럼 매끈한 물에 비친다. 왼쪽에는 두 번째 배가 닻을 내리고 있고, 작은 보트에서는 한 사람이 우뚝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앞쪽 물 위에는 갈매기 세 마리가 앉아 있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반 데 벨더 2세라는 뜻으로 줄여 쓴 서명이 있다.
나라가 그림에 뜻을 부여하다
20. 얀 아셀레인 《위협받는 백조》, 1650년경
하얀 백조가 물가의 낮은 둑에서 몸을 곧추세우고 캔버스를 거의 다 덮을 만큼 날개를 펼쳤는데, 오른쪽 날개 끝은 캔버스 가장자리에 잘려 있다. 목은 휘었고 머리는 왼쪽으로 돌렸으며, 주황색 부리를 혀가 보이도록 벌렸고, 물갈퀴가 달린 검은 발을 넓게 벌려 디뎠다. 왼쪽 아래 구석, 놓치기 쉬운 곳에서는 검고 곱슬곱슬한 털의 개가 이빨을 드러내고 붉은 혀를 내민 채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그 곁에는 뽑힌 깃털이 떠 있다. 오른쪽, 마른 갈대로 엮은 둥지에는 창백한 알 하나가 놓여 있다.
그림에는 어두운 대문자로 쓴 네덜란드어 글귀가 세 개 있다. 개의 머리 위에는 ‘국가의 적’, 백조의 두 발 사이 둑에는 ‘대법률고문’, 알 둘레에는 ‘홀란트’라고 적혀 있다. 기술 분석에 따르면 이 글귀들은 화가가 죽은 뒤에 덧붙여졌다. 아셀레인은 1652년 암스테르담에서 죽었고, 얀 더빗이 대법률고문이 된 것은 1653년이다(18번). 글귀는 아마 18세기에 쓰였을 것이다. 글귀는 개를 그저 국가의 적이라고만 부르는데, 일부 역사가는 이 개에서 빌럼 3세를 본다.
아셀레인이 1630년대 말과 1640년대 초에 살았던 로마에서, 그곳 네덜란드 화가 모임의 동료들은 그의 불구가 된 왼손 때문에 그에게 ‘작은 게’라는 별명을 붙였다. 1647년에는 그가 이미 암스테르담에 돌아와 있었고, 그 무렵 렘브란트가 그의 초상을 에칭으로 새겼다. 아셀레인의 그림 가운데 이렇게 큰 화면에 동물 한 마리만 그린 것은 이 그림뿐이고, 그는 주로 이탈리아 풍경을 그렸다.

1800년 6월 11일 암스테르담 상인 얀 힐더메이스터르의 컬렉션 경매에서, 그 경매의 중개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뒷날 더빗 형제의 시신 그림 앞에 커튼을 달자고 했던 바로 그 코르넬리스 세빌레 로스가 이 백조를 95휠던에, 수수료를 더해 딱 100휠던에 샀다. 그는 11일 전 헤이그의 몰수된 궁전 하위스텐보스에서 문을 연 국립 미술 갤러리를 위해 이 그림을 샀고, 백조는 갤러리가 처음으로 사들인 작품이 되었다.
21. 얀 빌럼 피네만 《워털루 전투》, 1824년
세 해 전 카트르브라 전투의 오라녜 공을 그린 그림으로 이름을 얻은 암스테르담 화가 얀 빌럼 피네만은 1821년 2월 워털루를 그리려고 런던으로 건너갔다. 웰링턴 공작은 그를 위해 장교 약 30명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고, 자기 저택 앱슬리 하우스에 방을 내주었으며, 비서에게 장교들을 불러 포즈를 취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시골에서 자기 말 코펜하겐을 데려왔다. 말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피네만에게는 거북했는데, 그러자 웰링턴은 화가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자기가 직접 말에 오르겠다고 했다. 장교들은 전투 날 입었던 군복을 그에게 빌려주었다. 넉 달 뒤 피네만은 실물을 보고 그린 초상을 적어도 14점 가지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고, 미리 주문해 둔 캔버스를 들일 나무 작업실을 정원에 지었다.
피네만은 주문 없이, 자기 책임으로 이 그림을 그렸고, 레이크스미술관 큐레이터 미하엘 푸터르는 그가 영국에서 이 그림을 전시하고 팔 생각이었다고 본다. 동시대 사람들의 말로 미루어 보면 웰링턴은 이 그림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고 여겼다. 1824년 봄 오라녜 공이 작업실을 찾아와 그 자리에서 화가가 부른 값의 몇 배인 4만 휠던을 제안했고, 값은 그의 아버지인 빌럼 1세 국왕이 치러 아들에게 선물했다. 이 그림은 레이크스미술관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높이는 5.5미터가 넘고 너비는 8미터가 넘는다.
미술관은 그림의 순간을 웰링턴이 프로이센군이 도우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때로 설명한다. 전투는 웰링턴의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이 이겼다. 가운데에서 웰링턴은 모자를 벗은 채 이마에 흰 줄이 있는 밤색 말에 앉아, 쭉 뻗은 손에 검은 삼각모를 들고 있다. 그 뒤로 붉은 군복의 참모들이 줄지어 있고, 왼쪽에서는 놋쇠 투구를 쓴 기병들이 빼앗은 프랑스 군기 두 개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는데, 군기에는 금빛 독수리가 달려 있고 가까운 깃발에서는 나폴레옹 황제라는 프랑스어 글자가 읽힌다. 왼쪽 아래 구석에는 빨간 지그재그 무늬가 있는 회색 담요를 덮은 들것 위에, 금실로 수놓은 경기병 돌먼을 입은 창백한 부상자 오라녜 공이 앉아 보는 사람을 바라보고, 앞쪽에는 전사자들이 누워 있다. 일부 연구자는 피네만이 승리에서 네덜란드의 몫을 더 부각하려고 부상한 오라녜 공을 일부러 앞에 내세웠다고 본다. 반면 푸터르는 이 그림을 무엇보다 영국 장교들의 집단 초상으로 읽는데, 그 속에서 오라녜 공은 거의 묻혀 버린다. 1825년 런던의 한 신문은 네덜란드 화가가 오라녜 공을 앞으로 내세운 것을 애국적 시대착오라고 불렀다.

1824년 여름 피네만은 자기 작업실에서 입장료를 받고 그림을 보여 주었고, 신문들은 이미 팔린 그림으로 돈벌이를 한다며 그를 꾸짖었다. 1825년 그는 그림을 런던으로 가져가 하이드 파크에 이 그림을 위해 지은 전시관에 걸었고, 그다음에는 헨트로 가져갔다. 피네만 자신은 이 전시들에서 6000휠던 넘게 손해를 보았고 얻은 것은 명성뿐이었다고 말했다.
22. 니콜라스 피네만 《데 코크 중장의 디포네고로 체포》, 1830~1835년경
1830년 3월 28일, 라마단이 끝날 무렵 자와의 왕자 디포네고로는 안전 통행을 약속받고 마글랑에 있는 네덜란드 주재관의 집으로 협상하러 왔다. 다섯 해 동안 디포네고로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와 싸웠고, 이 자와 전쟁에서 자와 사람 약 20만 명이 죽었는데, 대부분 민간인이었고 굶주려 죽은 이도 많았다. 협상에서 디포네고로가 자와의 이슬람 군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자, 헨드릭 데 코크 중장은 그를 체포한다고 선언했다. 왕자는 유배되었고, 1855년 마카사르에서 죽었다.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이 그림은 데 코크 자신이 주문했다. 그린 사람은 얀 빌럼 피네만(21번)의 아들 니콜라스 피네만으로, 갓 스무 살을 넘겼고 자와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오른쪽에는 빨간 기와지붕에 흰 기둥이 받치는 베란다를 단 밝은 집이 있고, 지붕 위로는 빨강, 하양, 파랑 깃발이 펄럭이며, 문 위에는 사자들이 있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금빛 견장을 단 짙푸른 군복의 데 코크는 현관 계단 맨 위에 서서 왼손을 허리에 짚고, 오른손으로는 왼쪽, 군중 너머에 닫힌 마차가 기다리는 쪽을 가리킨다. 초록 터번에 길고 흰 옷을 입은 디포네고로는 계단 아래에 서서 고개를 들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고, 그의 발치에는 여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으며, 그 앞 모래 위에는 붉은 술이 달린 창들이 쌓여 있다.
데 코크 집안은 약 75년 동안 이 그림을 간직했고, 1907년 데 코크 남작이 레이크스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오랫동안 이 그림을 《디포네고로가 데 코크 남작 중장에게 항복하다》라고 불렀고, 액자에는 더 오래된 제목인 《반란 수괴 디포네고로가 데 코크 중장에게 항복하다. 자와 전쟁의 종결》이 적혀 있는데, 지금 그림의 이름은 《체포》다.
1857년, 유럽에서 20년 넘게 산 자와의 화가 라덴 살레가 자기만의 《디포네고로 왕자의 체포》를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왕자와 데 코크는 같은 높이에 서 있고, 디포네고로는 분노를 억누르며 장군을 똑바로 보고 있으며, 네덜란드 국기는 그림에 없다. 살레는 이 그림을 빌럼 3세 국왕에게 선물했고, 1978년 그림은 인도네시아에 반환되어 인도네시아 대통령궁 컬렉션에 속하게 되었으며, 2014년부터는 족자카르타의 궁전에 있다.
새 도시, 그리고 그 도시가 미술관에 준 것

23. 조르허 헨드릭 브레이트너 《흰 기모노를 입은 소녀》, 1894년
1893년 헤이스예 크박이 조르허 헨드릭 브레이트너의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는 16세였다. 미술관은 그녀를 하녀라고 부르고 다른 자료들은 모자 가게 점원이라고 하며, 미술관은 그녀의 이름에 ‘아마도’라는 말을 붙인다. 브레이트너는 비 내리는 암스테르담 거리와 공사장, 노동자와 말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었는데, 빠르고 거칠게 그렸고, 손에 드는 카메라로 모델들을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사진을 보며 그렸다. 1892년 헤이그의 예술가 협회 하흐서 쿤스트크링에서 일본 판화 전시를 본 그는 기모노와 병풍을 잔뜩 사들였고, 약 세 해 동안 빨강, 하양, 파랑 기모노를 입은 소녀들을 그린 그림 13점을 그렸다. 그는 편지에서 이 그림들을 ‘일본 아가씨들’이라고 불렀다.
소녀는 오른쪽 위 구석에서 아래 가장자리 가운데까지 대각선으로 소파에 누워 있다. 오른팔은 머리 뒤로 넘겼고, 왼손으로는 뺨을 괴었으며, 밝은 노란 쿠션 위에 놓인 큰 올리브빛 갈색 쿠션에 기대어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기모노는 은빛 흰색으로 넓은 붓질로 그렸고, 소매에는 검은 가지 위로 붉은 매화가 이어지며, 긴 소매는 몸 양쪽으로 천 두 폭처럼 늘어져 있다. 빨간색은 소맷부리 안감과 깃의 띠에만 보인다. 그녀 뒤에는 꽃과 나비가 흩뿌려진 거의 검은 접이식 병풍이 있고, 왼쪽 위 구석에는 붉은 물감으로 쓴 브레이트너의 서명이 있다. 2016년 조사에서 브레이트너가 다른 그림 위에 덧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기모노 입은 소녀 아래에서 체격이 다른, 어쩌면 벌거벗은 여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나왔다.
그 시대의 한 비평가는 머리를 쿠션에 묻은 화려한 옷차림의 일본 여자들, 수상쩍은 모습에 뻔뻔한 자세를 한 여자들에 대해 썼다. 수집가 장 샤를 드뤼커르와 그의 아내 마리아 드뤼커르프레이저르는 1919년 다른 그림 70점과 함께 《흰 기모노를 입은 소녀》를 레이크스미술관에 맡겼고, 1944년 이 그림을 미술관에 유증했다. 이 부부의 컬렉션을 위해 이미 1909년에 미술관 건물에 별관이 따로 지어졌다.

1895년 7월 헤이스예 크박은 자매와 함께 남아프리카로 떠났고, 1899년 그곳에서 22세에, 아마도 결핵으로 죽었다.
24.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7년
안드리스 봉어르는 1879년부터 파리에서 일하며 테오 반 고흐와 친구가 되었고, 그를 자기 누이 요한나에게 소개했는데, 테오는 1889년 요한나와 결혼했다. 빈센트는 그를 앙드레라고 불렀다. 1893년에는 봉어르가 이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고,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화가가 직접 선물했지만 언제 주었는지는 연구자들이 밝혀내지 못했다. 봉어르는 오딜롱 르동, 에밀 베르나르, 세잔, 반 고흐의 그림을 모았고 1936년 1월에 죽었으며, 같은 해 그의 미망인 프랑수아즈가 이 초상을 레이크스미술관에 기증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그림의 대부분은 그의 집안 컬렉션에서 나와 1973년에 문을 연 반 고흐 미술관에 있지만, 이 자화상은 레이크스미술관 자신의 소장품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86년 안트베르펀에서 파리로 왔는데, 그 전에는 브라반트의 마을 뉘넌에서 어두운 흙빛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파리에서 그는 화상인 동생의 집에서 지내며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았고, 자기 자신이 가장 값싼 모델이었기 때문에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미술관에 따르면 테오는 그에게 새롭고 밝은 프랑스 회화에 관해 이야기했고, 파리에서 빈센트는 그 기법들을 자기 자화상에 시험하기 시작했다. 1888년 2월 그는 아를로 떠났다.
초상은 판지에 그렸다. 머리는 4분의 3 측면으로 왼쪽을 향하고, 초록 눈은 보는 사람을 바라보며, 머리에는 챙이 넓은 회색 펠트 모자를 썼다. 붉은 수염은 잘고 세로로 짧은 붓질로 놓였고, 얼굴은 짧은 분홍, 주황, 초록, 크림색 붓자국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붓자국들은 눈 둘레로 부챗살처럼 퍼지고 콧등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는 흰 스탠드칼라에 새파란 넥타이를 맸고, 미술관은 그를 유행에 맞게 차려입은 파리 사람이라고 부른다. 갈색 재킷은 트위드처럼 색색의 짧은 획으로 덮였고, 청록색 배경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짧고 비스듬한 붓질로 칠해졌다.
봉어르의 미망인은 반 고흐의 자화상과 함께, 우리 네덜란드 친구들에게 바친다는 뜻의 프랑스어 헌사가 적힌 에밀 베르나르의 1897년 자화상도 미술관에 주었다.

다시 사들이다

25. 렘브란트 《기수》, 1636년
2019년 엘리 드 로칠드의 상속인들은 《기수》를 팔기로 했고, 프랑스는 그림을 국보로 지정해 30개월 동안 반출을 막았지만, 루브르는 돈을 모으지 못해 구입을 포기했다. 2021년 12월 네덜란드 정부는 이 그림을 1억 7500만 유로에 사들인다고 발표했다. 국가가 1억 5000만, 렘브란트 협회가 1500만, 레이크스미술관 재단이 1000만 유로를 냈다. 의회에서는 왜 돈이 쿡 제도의 신탁으로 가는지 묻는 이들이 있었고, 극장과 미술관들이 팬데믹으로 손실을 입고 있는 때에 이런 큰돈을 써도 되는지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의회는 이 그림을 모든 주에서 보여 달라고 요청했고, 2022년 5월부터 2023년 4월까지 그림은 레이우아르던에서 마스트리흐트까지 전국 12곳의 미술관에 세 주씩 걸렸다. 2023년 6월 14일 레이크스미술관에서는 학생들이 이 그림을 맞이했다.
프랑스 로칠드 가문은 1840년부터 《기수》를 소유했는데, 그해 제임스 드 로칠드 남작이 런던 경매에서 840파운드에 이 그림을 샀고, 그 전에는 영국 왕 조지 4세의 것이었다. 2016년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이미 로칠드 가문에게서 렘브란트의 한 쌍의 초상, 마르턴 솔만스와 오프연 코핏의 초상을 함께 사들인 일이 있고, 그 뒤로 레이크스미술관과 루브르가 이 초상들을 공동으로 소유한다.
렘브란트는 서른 살 무렵이었고, 두 해 전에 사스키아 판 아윌렌뷔르흐와 결혼했다. 연구자들이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그림 속 남자는 허리 조금 아래까지 보이며, 백 년 전 의상을 입고 보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본다. 오른쪽 팔꿈치는 옆으로 내밀고 손바닥은 허리에 짚었으며, 머리에는 모양을 낸 챙에 금빛 갈색 타조 깃털이 길게 달린 벨벳 베레모를 썼고, 목에는 강철 목가리개를 둘렀다. 그의 등 뒤로 캔버스 위쪽 가장자리에서부터 연회색 깃발이 거대한 주름을 이루며 떨어져 어깨에 걸쳐지고, 그는 왼손으로 엉덩이께에서 깃발 천을 움켜쥐고 있다. 빛은 왼쪽 위에서 얼굴과 깃발과 부푼 소매에 떨어지고, 나머지는 갈색과 올리브색 속에 잠긴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예술적 돌파라고 부르는데, 역시 기수가 등장하는 《야경》보다 여섯 해 앞서 그린 그림이다. 미술사가 에릭 얀 슬라위터르는 이 그림에서 희극, 곧 자기도취에 빠진 연극 무대의 기수를 보며, 직물 전문가들의 말을 근거로 드는데, 그들에 따르면 이 깃발은 장식을 단 커다란 아마포 침대 시트처럼 보인다.

스물다섯 점 다음에
우리는 누가 값을 치렀는지, 누가 바꾸었는지, 누가 소유권을 다퉜는지가 드러나는 작품들을 골랐고, 그 주인공은 알크마르의 구빈원부터 로칠드 가문에게서 렘브란트를 사들인 정부까지 이어진다. 다시 찾을 때는 야코프 판 라위스달의 《베이크 베이 다위르스테더의 풍차》, 얀 스테인의 《성 니콜라우스 축일》, 헤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의 《동방 박사의 경배》, 렘브란트의 《사도 바울로 분장한 자화상》을 찾아볼 만하다. 회화가 아닌 소장품으로는 델프트 도자기와 배 모형, 그리고 아시아관의 사원 수호신상부터 보는 것이 좋다.









































































